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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희망 保守’, 그 길을 찾다

영국 보수당의 생존 비결

패배 때마다 철저한 자기 개혁으로 불사조처럼 부활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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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총선 참패 후 복지국가 노선 수용, 청년보수운동, 정치센터·조사국 설치 등 개혁 단행
⊙ 1964년 총선 패배 후에는 밀실에서 당수 선출하던 방식 폐지
⊙ 데이비드 캐머런, 환경 문제 등 ‘진보적 이슈’ 수용한 ‘온정적 보수주의’로 13년 만에 정권 탈환
⊙ ‘하나의 국민’ 이념 아래 끊임없이 外延 확장 노력, ‘가진 자의 정당’ 이미지 탈피… 히스·대처·메이저 등 서민 출신 총리 배출
⊙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과 실용성 강조하면서도 보수의 본질적 가치는 포기하지 않아
  1945년 8월 21일 영국 보수당(保守黨) 평의원(平議員)들의 모임인 1922년위원회가 열렸다. 그해 7월 총선에서 참패(慘敗)한 지 한 달 가까운 때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보수당 의원은 당수이자 전(前) 총리인 윈스턴 처칠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고 완전히 무관심하고 남의 말도 듣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모여 있는 청중의 관심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난 ‘보수당이 이제 완전히 죽었구나’ 하는 두려움을 갖고 그 자리에서 비켜났다.”
 
  그해 7월 5일 치러진 총선은 1935년 이래 10년 만에 치러진 총선이었다. 선거는 7월 5일 실시됐지만, 해외에서 투표한 군인 표 집계 등의 어려움 때문에 7월 26일에야 선거 결과가 발표됐다. 4년간 전시(戰時) 거국(擧國)내각을 이끌었던 처칠 총리는 승리를 낙관하면서 7월 17일부터 열린 포츠담회담에 참석했다. 처칠 총리와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은 회담 중간에 선거 발표를 보러 잠시 귀국했는데, 포츠담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선거 결과 보수당이 노동당에 참패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애틀리 신임 총리와 어니스트 베빈 신임 외무장관이 교체선수로 들어와 회담을 마무리 지었다. 포츠담회담에 참석했던 소련의 스탈린은 ‘전쟁영웅’ 처칠이 선거에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 소련군이 점령한 동유럽에서 자유선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7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유권자의 36.2%를 득표, 197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치러졌던 1935년 선거에서 획득했던 432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다. 반면에 노동당은 47.7%를 득표, 393석을 차지했다. 이런 선거 결과를 두고 ‘보수의 대학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보수당으로서는 1906년 총선 패배 이래 가장 큰 패배였다.
 
 
  전쟁으로 달라진 세상
 
1945년 7월 포츠담회담. 총선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에 패하는 바람에 영국 측 참석자는 처칠에서 애틀리로 교체되었다.
  보수당은 총선 승리를 낙관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불굴의 지도자 윈스턴 처칠의 상품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전례(前例)도 있었다. 1918년 총선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연립정부를 이끌던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자유당이 압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보수당에는 불리하지만, 노동당에는 유리한 방향으로….
 
  첫째, 전쟁을 치르면서 국민들의 의식이 사회주의에 친화적이 됐다. 국민들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경제・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나 배급제에 익숙해졌다. 서로 다른 계층 출신의 젊은이들이 병사로 징집되어 전선(戰線)에서 함께 싸웠다. 후방의 국민들도 방공호(防空壕) 안에서 함께 공습(空襲)의 공포에 떨면서, 배급을 받기 위해 함께 줄을 서면서, ‘평등’을 맛보았다.
 
  둘째, 연립내각에 참여하면서 노동당 정치인들의 국정수행 능력이 향상됐다. 전시연립내각에서 총리, 국방장관, 외무장관 등 대외(對外) 관련 요직들을 보수당이 차지한 반면, 애틀리 부총리, 허버트 모리슨 내무장관, 어니스트 베빈 노동장관 등은 국내 문제를 맡았다. 전시에 국민들의 일상과 관련되는 일들을 처리하면서 이들은 국정 경험을 쌓는 한편, 국민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전쟁 전 노동당은 연립정부에 참여하거나 단독 정권을 창출하기는 했으나, 단독 집권 기간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국민들에게는 어딘가 못 미더운 정당이었는데, 전시연립내각에서의 활동을 통해 그런 우려를 불식시킨 것이다.
 
  셋째,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전후(戰後)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치가 높아졌다. 국민들은 전쟁 중의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더 많은 평등과 풍요를 요구했다. 1942년 11월 전시연립정부도 〈베버리지 보고서〉를 내놓아 전후 복지국가의 비전을 제시했다. 국민들의 기대치는 한껏 높아졌다.
 
  넷째, 전쟁 기간 중 보수당은 통상적인 정당 활동을 게을리한 반면, 노동당은 계속 활발하게 당을 가동했다. 보수당은 1943년, 1945년 두 차례 전당대회를 열었지만, 노동당은 매년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보수당 조직은 정체(停滯)했지만, 노동당 조직은 활성화됐다.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보수당
 
  보수당은 이런 시대정신과 상황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리처드 버틀러, 퀸틴 호그 등 당내 개혁파 의원들은 “만일 우리가 국민들에게 사회개혁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우리에게 사회혁명을 들고 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대다수 보수당 의원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이들은 전시 정부가 내놓았고 국민들이 열광했던 〈베버리지 보고서〉에 대해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최저임금법안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반대표를 던졌다. 1941년 12월 보수당 평의원들의 모임인 1922년위원회는 처칠에게 ‘몰래 진행되는 국유화(國有化)’에 대해 항의했다.
 
  당연히 1945년 7월 총선을 앞두고도 보수당의 복지공약은 어설펐다. 반면에 노동당은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만들어나갈 복지국가의 비전을 명확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당은 전쟁영웅 처칠에게 보내는 국민들의 환호를 보수당에 대한 지지로 착각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에서였을까? 처칠은 선거 유세 중 “노동당이 집권하면 게슈타포가 통제하는 전체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시연립내각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노동당 정치인들을 향한 ‘색깔론’은 역풍(逆風)만 야기했다.
 
  거기에 더해 국민들은 1920~1930년대 집권 기간 보수당이 경제공황 대책이나 실업(失業) 대책에 실패했고, 보수당 출신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유화책(宥和策)을 펴면서 히틀러의 대두를 방관했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었다. 1945년 총선은 그에 대한 뒤늦은 ‘심판투표’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 기간 보수당 비주류(非主流)였던 처칠에게는 억울한 일이었을 게다.
 
 
  보수당을 덮친 절망감
 
  이런 상황에서 막연하게 승리를 낙관하고 있다가 참패를 맛보았으니, 보수당이 멘붕(멘탈붕괴)에 빠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전쟁 전의 무능했던 노동당 정부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새로 들어선 애틀리 정부가 제공하는 복지국가의 단맛을 본 젊은 층이 앞으로 노동당의 강고한 지지층이 될 것이며, 적어도 한 세대 동안은 보수당이 정권을 탈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그들을 엄습했다.
 
  보수당의 절망감은 처칠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많은 이가 ‘낡은 보수당’을 상징하는 연로한 처칠은 이제 해럴드 맥밀런이나 퀸틴 호그 같은 젊은 개혁파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의 일이지만 보수당은 외연(外延) 확대를 위해 당명(黨名)을 연합당으로 바꾸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하지만 5년 후인 1950년 2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298석을 차지했다. 노동당은 315석을 획득했다. 보수당은 정권을 탈환하지는 못했지만, 5년 전보다는 크게 의석수를 늘렸다. 노동당과의 차이는 17석밖에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은 321석을 차지, 295석을 얻은 노동당을 누르고 집권에 성공했다. 적어도 한 세대 동안은 정권을 되찾지 못할 것이라며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정당이 불과 6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 것이다. 그 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처칠, “우리 당에도 사회주의자가 있구나!”
 
1945년 총선 패배 후 영국 보수당의 개혁을 이끈 리처드 버틀러.
  답은 간단하다. 보수당이 그 6년 동안 글자 그대로 처절한 개혁을 했기 때문이다. 보수당은 개명(改名) 대신 개혁을 택했다. 보수당의 개혁은 정책 노선과 당 조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첫째, 보수당 개혁파 의원들은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주의와 복지국가 노선을 받아들였다. 1945년 10월, 리처드 버틀러, 해럴드 맥밀런, 앤서니 이든 등의 지원 아래 보수당 의원의 5분의 1가량인 41명의 의원이 당내 개혁파 의원들의 모임인 보수당 개혁위원회의 주장에 동조하는 서명을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다음 달 보수당 중앙위원회는 국가개입주의를 수용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당수인 처칠은 노선 변경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러한 노력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그는 1946년 리처드 버틀러를 산업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해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버틀러는 전쟁 중에 이미 교육의 평등을 강조하는 ‘버틀러 교육법’을 입안(立案)하는 등 당내 개혁파의 선두주자였다. 1945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그는 “보수당은 이제 사회적 혁명에 제대로 적응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앞장서서 당 개혁을 주장해왔다.
 
  산업정책위원회에는 해럴드 맥밀런 등 중진 4명, 평의원 4명, 그리고 레지널드 모들링 등 보수당 조사국 요원 3명이 참여했다. 산업정책위원회는 1947년 5월 〈산업헌장〉을 발표했다. 〈산업헌장〉에서 보수당은 노동당 정부의 복지정책을 수용하는 한편, 산업에 대한 국가개입, 노・사・정 협력, 국민의료보험(NHS・National Health Service) 설립, 철도・석탄・가스산업 등의 국유화 등도 받아들였다. 〈산업헌장〉 초안을 받아본 처칠은 “이제 우리 당에도 사회주의자가 있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보수당은 근본적인 가치(價値)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는 〈산업헌장〉이 “사회주의자들은 국민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국민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선언한 데서 잘 나타난다.
 
  이런 변화는 사실 보수당으로서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벤저민 디즈레일리, 스탠리 볼드윈 등의 시절에도 보수당은 ‘원칙’을 고집하기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정치・경제・사회개혁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보수당의 역사에서 마거릿 대처와 같은 강경한 이념형 지도자는 오히려 예외적인 존재였다.
 
 
  청년보수운동
 
  노선상의 변화보다 더 중요하고, 더 성공적인 것은 늙고 낡은 당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었다. 조직상의 개혁을 선도한 사람도 리처드 버틀러였다.
 
  버틀러는 정책・홍보・소통 기구를 전면적으로 정비했다. 우선 전시 중 자신이 이끌었던 ‘전후문제처리중앙위원회’를 정책자문위원회로 개편했다. 전쟁 중 폐지됐던 조사국도 부활했다. 조사국은 정책개발・연설・선전을 위한 기초자료를 당에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안 매클로드, 에녹 파월, 레지널드 모들링 등 훗날 보수당의 중진으로 활동하게 되는 젊은 인재들이 조사국 요원으로 활동했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도 조사국에서 보수당 정치 이력을 시작했다.
 
  버틀러는 1945년 12월에는 보수당 정치센터(Conservative Political Centre)를 만들었다. 당원 간에 다양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교환하고 피드백(feedback)을 점검하는, 당내 의사소통기구였다. 보수당 정치센터는 주요 정책 현안 등에 대해 당원들의 견해를 묻고 확인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당의 노선 변경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46년 7월 버틀러와 보수당 당의장 올튼 경(卿)의 노력으로 청년보수운동(Young Conservative Movement)이 시작했다. 이는 1945년 총선에서 패배한 것이 젊은 층의 표심(票心)을 잡지 못한 데서 비롯됐으며, 젊은 층에게 다가가지 않고서는 향후 정권 탈환은 불가능하다는 자성(自省)에서 시작됐다. 이 운동은 불과 3년 만에 2375개의 지역조직과 16만여 명의 청년당원을 확보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 윌리엄 헤이그 전 보수당 당수 등이 청년보수운동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올튼 경은 1947년 전당대회에서 침체된 당의 사기 진작을 위해 ‘밀리언펀드(Million Fund)운동’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중앙당 재정 확충을 위해 100만 파운드를 모금하자는 운동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100만 파운드는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하지만 올튼 경의 독려 아래 보수당은 예정기일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다. 올튼 경은 이외에도 새로운 당사 마련을 위한 헌금운동도 벌였다. 이 운동 덕분에 보수당은 1958년 웨스트민스터 스미스 광장에 새 당사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당사는 2004년까지 보수당의 본부가 됐다. 이런 모금운동을 통해 1945년 총선 패배 이후 좌절감에 빠져 있던 보수당원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보수당은 자신들의 가치를 당원들이나 시민들에게 교육・홍보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45년 총선 패배 이후 중견 간부들을 위한 정치교육이 시작됐다. 보수당 정치센터가 그 중심 역할을 맡았다.
 
 
  충원 구조 개혁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를 쓴 퀸틴 호그.
  당내 개혁파였던 퀸틴 호그는 보수당의 의뢰를 받아 《보수주의란 무엇인가(The Case for Conservatism)》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유명한 펭귄문고의 스페셜 문고판으로 만들어져 보수당원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 보수주의 이념을 전파했다. 이 책을 통해 호그는 “보수주의는 모든 변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곧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일시적인 시대적 유행이나 사고(思考)방식에 저항하며 사회적 균형을 잡고자 하는 것”이라면서 “따라서 보수주의는 점진적 변화와 전통을 중시하고 그에 기초한 유기적이고 인본적(人本的)인 사회를 보호하려는 중도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보수당은 비록 노선상의 변화는 있지만, 자신들이 보수의 근본가치 자체는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또 하나 중요한 노력이 있었다. 바로 당원 충원(充員) 구조를 개혁한 것이다. 1948년 보수당의 맥스웰-파이프가 이끈 연구위원회는 후보자나 의원이 지구당에 내는 비용을 형식적인 수준으로 확 낮춰버렸다. 후보자는 연간 25파운드, 의원은 50파운드 이상을 기부하지 못하도록 못 박았다. 선거 때마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후보자나 의원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뜯어내는 오늘날 한국 정당과는 정반대의 발상이었다. 대신 선거에 필요한 자금은 지구당에서 자체적으로 모금해 충당하도록 하고, 중앙당은 지구당의 모금액에 상응하는 액수를 지원하도록 했다.
 
‘해충클럽’의 배지.
  이런 개혁 덕분에 돈이 없는 정치 신인도 정치에 뛰어들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서 정치에 입문한 사람 가운데 에드워드 히스,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등은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한편 당원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선거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지구당 차원에서 모금 실적을 쌓아야 했다. 그런 모금 과정에서 보수당은 소수(少數)의 거액(巨額) 기부자 대신 다수(多數)의 소액 기부자들에게 의존하는 체질로 변해갔다. 이런 모금 캠페인은 당의 하부조직을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렇게 당의 저변(低邊)이 확대되면서 보수당은 ‘가진 자들의 정당’이라는 딱지를 떼 낼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보수당이 다시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자, 보수지지층들도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노동당의 복지정책이 ‘자유’를 잠식한다고 믿는 중간 계층들은 종래의 점잔 떨기를 그만두고 ‘풀뿌리 보수운동’에 나섰다. 영국주부연맹, 해충클럽(Vermin Club) 등이 대표적이었다. 영국주부연맹은 노동당 정부하에서 계속되는 생활고(生活苦)에 지친 주부들이 만든 단체였다. 해충클럽은 노동당 좌파 정치인인 어나이린 베번 복지부 장관이 1948년 7월 보수당 지지자들을 향해 “해충보다 못하다”며 증오에 찬 발언을 한 데 항의해서 조직되었다. 이들은 수개월 만에 12만명의 회원들을 모집했고, 런던에서 ‘해충집회’까지 열었다. 말하자면 적폐세력으로 몰린 우파들이 ‘그래! 우리는 적폐다! 어쩔래?’라고 대들고 나선 격이랄까?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도 지역 해충클럽의 간부로 정치 이력을 시작했다.
 
 
  개혁파와 처칠
 
  이런 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리처드 버틀러, 퀸틴 호그, 해럴드 맥밀런, 앤서니 이든 등 일찍부터 당내에서 개혁의 목소리를 내온 주체 세력이 보수당 내에 건재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1945년 총선 참패의 악몽 속에서도 당의 중심을 잡으면서 당의 개혁을 선도했다. 이들을 대개 ‘하나의 국민(One Nation)파’라고 불렀다.
 
  ‘하나의 국민’이라는 개념은 19세기 중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창안한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산업혁명 과정에서 빈부(貧富)격차가 벌어지고 소외계층이 늘어나면서 국민들이 서로의 삶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한 두 개의 계층으로 나뉘는 현실을 우려했다. 그는 ‘두 개의 국민’을 ‘하나의 국민’으로 단합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며, 보수당은 전체 국민의 삶을 돌보는 대중복지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하나의 국민’ 개념은 이후 보수당의 전통 가운데 하나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1945년 총선의 패장(敗將)이자 ‘낡은 보수당’의 상징이었던 처칠을 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총선 패배 직후 처칠 퇴진론이 나오기는 했지만, 처칠은 당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처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절망적 상황에서 영국 국민들을 이끌면서 승리를 일구어냈다는 점에서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국제적으로도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처칠은 당수이기는 했지만, 현안에 대해서는 비교적 초연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철(鐵)의 장막’ 연설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집필하는 데 더 힘을 쏟았다. 단순한 현실 정치인을 넘어서 ‘역사적 인물’로 존재하고 싶어한 처칠은 보수당이 추진하고 있는 개혁들에 대해 못마땅한 부분이 있어도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았다. 덕분에 개혁파들은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처칠은 보수당의 무게중심이었다. 개혁에 성공한 보수당은 처칠이라는 얼굴을 앞세워 1951년 정권을 탈환할 수 있었다.
 
  1945년 총선에서 패했을 때, 처칠의 부인 클레멘타인은 “이 결과는 불행으로 변장한 행운일지 몰라요”라며 처칠을 위로했다. 처칠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변장을 아주 잘한 것이군!”
 
  하지만 1945년 총선 패배 덕분에 보수당은 철저한 자기 개혁을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그 패배는 ‘불행으로 변장한 행운’이었다.
 
 
  흄 vs 윌슨
 
하원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된 최초의 보수당 당수 에드워드 히스.
  정권을 탈환한 보수당은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을 거치면서 1964년까지 집권했다. 1945년 총선 패배 당시의 암울했던 분위기를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196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다시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노동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보수당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감, 육군장관 존 프로퓨모의 섹스 스캔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수인 해럴드 윌슨이라는 상품이 좋았던 것도 그 이유였다. 미국에서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영국에서도 TV시대에 걸맞은 잘생기고 활기찬 젊은 정치인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다. ‘민중의 남자(man of the people)’를 자처하고 나선 47세의 해럴드 윌슨은 그런 요구에 딱 맞는 정치인이었다.
 
  이에 맞선 보수당 당수 알렉 더글러스-흄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정치인이었다. 당시 60세던 그는 원래 백작 작위를 가진 상원의원, 한마디로 ‘금수저’의 전형이었다. 그가 보수당 당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전임자인 맥밀런 총리의 아집 때문이었다. 맥밀런의 후임으로 가장 유력했던 사람은 보수당 개혁파의 기수던 리처드 버틀러였다. 역시 개혁파 출신인 퀸틴 호그, 레지널드 모들링도 당수 후보로 유력했다. 하지만 버틀러를 미워한 맥밀런이 한사코 버틀러를 거부하면서 상황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당시 영국 보수당 당수는 ‘매직 서클(magic circle)’이라고 하는 당내 소수 그룹에 의해 밀실(密室)에서 결정되었다. 즉 당 원로와 중진, 몇몇 의원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수명의 후보자 중 하나를 간택(揀擇)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런 시스템 아래서는 전직 총리 등 원로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 ‘튀는 후보’보다는 다수가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후보가 선택되기 쉬웠다. 흄도 맥밀런 총리가 미는 사람인데다가, 당내 유력자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덜하다는 이유로 덜컥 당수가 된 것이다.
 
  흄이 등장하면서 보수당은 다시 ‘금수저들의 정당’ ‘낡은 정당’이라는 이미지에 갇혀버렸다. 해럴드 윌슨은 이 기회를 마음껏 이용했고,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보수당은 이번에도 패배를 개혁의 기회로 삼았다. 선거에서 질 수밖에 없는 흄이라는 사람을 당수로 만든 밀실 시스템을 뜯어고친 것이다. 그 결과 보수당 하원의원들이 투표로 당수를 선출하는 방식이 도입됐다. 이 새로운 시스템에 따라 1965년 7월 에드워드 히스가 당수로 선출됐다.
 
  히스는 보수당 역사에 두 가지 기록을 남겼다. 하나는 하원의원들에 의해 선출된 최초의 당수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비(非)귀족・비상류층 출신 당수라는 점이었다. 그의 전임자들은 말보로 공작 가문 출신인 처칠을 비롯해 귀족이거나 부유한 기업가 집안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튼스쿨 등 명문 사립학교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반면에 히스는 중하류층 출신으로 공립학교를 나온 후 옥스퍼드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흙수저’가 보수당 당수, 영국 총리가 되는 시대가 열렸다. 히스의 후임인 마거릿 대처는 중소도시 구멍가게 주인[나중에 시장(市長)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의 딸이었다. 대처의 후임인 존 메이저는 시골 악단 단원을 부모로 뒀다.
 
 
  대처리즘
 
마거릿 대처.
  노동당과 보수당이 교대로 영국을 이끌었던 혼돈의 1970년대를 거치고 난 후 1979년 총리가 된 마거릿 대처는 영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보수주의를 결합한 그의 정치이념을 흔히 ‘대처리즘(Thatcherism)’이라고 하는데, 영국에서 특정 정치인의 이름 뒤에 ‘주의(主義・ism)’라는 말이 붙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대처는 노조의 횡포를 진압하고, 금융업을 중심으로 경제구조를 개편하면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포클랜드전쟁에서 승리해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인두세(人頭稅) 도입에서 비롯된 민심 이반과 유럽연합(EU) 가입을 둘러싼 당내 반발로 1990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처의 후임자인 존 메이저는 당내 분란을 수습하는 데 바빠서 총리로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새로운 적수(敵手)가 등장했다. ‘제3의 길’을 내건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을 개혁하고 도전해온 것이다. 41세로 노동당 당수 자리에 오른 블레어는 보수당 장기 집권하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낡은 마르크스주의와 친(親)노조 노선에 매몰되어 있던 노동당을 확 뜯어고쳤다. 블레어는 공공연히 “대처를 존경한다”고 말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대처의 아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가 내세운 ‘제3의 길’을 두고 ‘블레처리즘(Blatcherism)’이라고 비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블레어의 변화를 환영했다. 결국 노동당은 19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노동당은 419석(득표율 43.2%), 보수당은 165석(득표율 30.7%)을 얻었다. 보수당은 이 선거에서 종전보다 171석을 잃었는데, 이는 득표율 기준으로는 1832년 이래 최저, 의석 기준으로는 1906년 이래 최저였다.
 
 
  보수당 당수 수난시대
 
  역대급 참패를 당한 보수당은 1997년 6월 당시 36세던 윌리엄 헤이그를 당수로 선출했다. 1783년 24세에 총리가 된 윌리엄 피트(소피트)에 이어 보수당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당수였다.
 
  헤이그는 16세 때인 1977년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노동당을 비판하는 연설을 해서 일약 유명해진 ‘정치신동(神童)’이었다. 이후 보수당의 기대주(期待株)로 주목받아오다가 이때 당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것이다. 헤이그는 ‘새로운 출발’을 내걸고 기세 좋게 출발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서 오는 경륜(經綸) 부족은 어쩔 수 없었다. 권위와 리더십이 부족했던 헤이그는 신자유주의 노선이나 EU 가입 등을 놓고 갈라진 당론(黨論)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잦은 말실수로 국민들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했다. 더욱이 블레어가 ‘제3의 길’을 내세우면서 법과 질서, 안보, 미국과의 동맹, 경제성장 등 보수당의 어젠다들을 가로채는 바람에 노동당과 각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헤이그가 이끄는 보수당은 2001년 총선에서 4년 전보다 불과 1석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헤이그는 1920년대 오스틴 체임벌린 이후 처음으로 총리가 되지 못한 보수당 당수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래도 헤이그는 보수당 개혁사에 한 가지를 추가했다. 종래 하원의원들이 당수를 선출하던 것을 일반 당원들도 참여할 수 있게 바꾼 것이다. 이제 하원의원들이 두 명의 당수 후보자들을 투표로 선출하면 당원들이 우편투표로 최종 승자를 뽑게 됐다.
 
  바뀐 룰에 따라 2001년 9월 당내 경선에서는 던컨 스미스가 당수로 선출됐다. 하지만 그는 2003년 당내 신임투표에서 불신임을 당하는 바람에 중도 하차했다. 방향을 잃은 보수당에서는 당수를 하려는 사람도 사라졌는지, 마이클 하워드가 그해 11월 경선 없이 당수로 선출됐다. 마이클 하워드는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의 아들로 청년보수운동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도 2005년 5월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에 패했다. 보수당은 197석을 얻어 의석수를 늘리기는 했지만, 355석을 차지한 노동당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보수주의자의 신조〉
 
〈보수주의자의 신조〉를 공표한 마이클 하워드.
  보수당이 노동당에 3연패(連敗)를 당하는 암울한 시절에 마이클 하워드는 보수당을 위해 인상적인 기여를 하나 했다. 바로 〈보수주의자의 신조〉를 만든 것이다. 그는 이 신조를 신문광고를 통해 공표하면서 “서로를 헐뜯는 데 익숙한 정치권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에게 진정한 보수당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광고를 냈다”고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은 물론 가족의 건강과 부(富)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2. 누군가 부자이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가난해졌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3. 누군가 지식이 있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무식해졌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4. 국민이 인간 본연의 야망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정치인의 의무라고 나는 믿는다.
 
  5. 국민은 그들이 삶의 주인이고 간섭과 지나친 통제를 받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나는 믿는다.
 
  6. 국민은 커야 하며 정부는 작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7. 관료주의, 형식주의, 갖가지 규정과 조사관, 각종 위원회와 독립적인 정부기관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인간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8. 모든 국민은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9. 책임 없는 자유는 없으며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나는 믿는다.
 
  10. 불공평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며 기회 균등이야말로 중요한 가치임을 나는 믿는다.
 
  11.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들이 받았던 것보다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기를 원한다고 나는 믿는다.
 
  12. 모든 어린이는 노후(老後)에 자신들의 부모가 평안하기를 바란다고 나는 믿는다.
 
  13. 영국인들은 그들이 자유로울 때만이 행복하다고 나는 믿는다.
 
  14. 영국은 언제나 영국의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15. 행운과 타고난 재능과 노력, 그리고 부의 다양성을 통해서만이 섬나라인 영국이 고귀한 과거와 약동하는 미래를 가진 위대한 사람들의 고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들의 종이 되는 것이 행복하다.
 
  16. 누군가 건강하기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병들게 됐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이 〈보수주의자의 신조〉는 영국 국민들이 ‘보수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또 보수당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데이비드 캐머런
 
과감한 개혁으로 정권을 탈환한 데이비드 캐머런과 그가 새롭게 바꾼 보수당 로고.
  이 무렵부터 보수당은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됐다. 39세의 신성(新星), 영국 왕실의 피가 흐르는 잘생긴 데이비드 캐머런이 2005년 12월 보수당 당수로 선출된 것이다.
 
  보수당 조사국 출신인 데이비드 캐머런은 ‘보수당의 토니 블레어’였다. 블레어가 경제성장, 법과 질서, 안보, 미국과의 동맹 같은 보수당의 전통적인 이슈들을 가져가 노동당을 바꾸었다면, 캐머런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분배, 환경 등 ‘진보적’ 이슈들을 보수당의 가치에 접목(接木)시켰다. 이를 캐머런은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라고 표현했다. 그는 영국 국기를 모티브로 했던 당의 로고를 ‘나무’를 모티브로 하는 현대적 로고로 바꾸었는데, 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골수 대처주의자들은 “캐머런은 토니 블레어의 계승자”라며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캐머런은 개혁을 밀어붙였다.
 
  이런 노력은 2010년 결실을 거두었다. 그해 총선에서 보수당은 306석을 획득해 제1당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과반수 의석에는 20석이 모자랐다. 노동당은 258석에 그쳤다. 캐머런은 57석을 가진 자유민주당(자유당의 후신)을 끌어들여 연립내각을 구성해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캐머런의 보수당은 2015년 총선에서 330석을 획득해 258석에 그친 노동당을 압도하면서 보수당 단독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캐머런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2016년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에서 패해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영국 정국(政局)은 브렉시트를 둘러싼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정권은 보수당의 손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테리사 메이 총리를 거쳐 2019년 집권한 보리스 존슨 총리는 같은 해 12월 총선에서 56.2%, 306석을 얻어 압승했다. 노동당은 구태의연한 좌파 포퓰리즘 공약과 고질적인 내분, 리더십 부재로 모처럼 맞은 집권 기회를 날려버렸다.
 
 
  내분으로 자멸한 자유당
 
  보수당은 17세기 말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의 왕위(王位) 계승문제 당시 등장한 ‘토리(Tory)’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토리는 아일랜드어로 ‘도적떼・불량배’라는 의미다. 토리파는 왕권(王權)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국교도(國敎徒)가 아닌 가톨릭 교도라고 해도 제임스 2세의 왕위계승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2세의 왕위계승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휘그(Whig)’라고 불렀는데 스코틀랜드어로 ‘소도둑놈・반역자’라는 의미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략 숙종과 장희빈 때쯤 출현한 ‘도적떼’와 ‘소도둑’은 여러 차례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쳐 19세기 중엽쯤 보수당과 자유당으로 정리가 된다. 자유당은 이후 보수당과 함께 영국 의회정치를 좌우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 자리를 노동당에 내주었다. 자유당이 몰락한 것은 노동계층의 대두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탓이 크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내부 분열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 자유당 출신 로이드 조지는 당시 총리였던 허버트 애스퀴스를 밀어내고 전시연립내각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후 두 사람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됐다. 당도 두 사람을 따라서 분열됐다. 분열된 자유당은 노동당의 대두를 막지 못했고, 1920년대 이후 몰락해버리고 말았다. 자유당의 몰락을 두고 ‘자멸(自滅)’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자유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보수당은 여전히 영국 정치의 중추세력으로 남아 있다. 영국이 양당제 국가라고는 하지만 20세기 이후를 보면 3분의 2 이상을 보수당이 집권해왔다.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보아도 보수당 집권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다.
 
 
  보수당의 성공비결
 
‘하나의 국민’ 이념을 강조한 벤저민 디즈레일리.
  그 이유는 어디 있을까?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당의 생명력-영국 보수당》에서 보수당의 성공비결로 ① 결속과 충성심 ②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처 ③ 국가경영 능력과 ‘통치에 적합한 정당’ 이미지 ④ ‘국민의 당’, 애국정당 ⑤ 조직과 선전 등을 꼽았다.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영국 보수당의 역사》의 저자인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의 관찰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첫째, 이념적 원칙이나 순수성보다 권력 장악이라는 실용성을 강조한다. 19세기 말 영국 정치를 이끌었던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는 “빌어먹을 너의 원칙을 버려라. 그저 당에 충성하라”고 일갈했다.
 
  둘째, 사회변화에 대한 유연함이다. 보수당은 수구적(守舊的)・반동적(反動的)인 정당이 아니라,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여왔다. 현재 이익을 그대로 지키고자 하기보다는 영리하게 양보할 것은 양보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이 뿌리째 위협받지 않도록 했다.
 
  셋째, 당의 외연을 넓혀왔다. 토지소유계급, 귀족의 집단으로 출발한 보수당은 산업혁명 이후 부를 축적하여 새로운 사회적 힘으로 떠오른 상공업자들을 끌어들였고, 이들과 하나로 융합했다. 상공업자 출신 볼드윈, 중산층 출신의 자수성가형 히스와 대처,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에서 일했던 메이저 총리 모두 보수당이 배출한 총리였다. 보수당은 귀족과 기득권층의 정당, 이튼과 옥스브리지(옥스퍼드대학+케임브리지대학) 출신만의 배타적(排他的) 정당이 아니라 다수를 포용해낼 수 있는 정당으로의 변모를 위해 애썼다.
 
  보수당은 디즈레일리나 볼드윈처럼 필요하다면 사회개혁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뿐만 아니라 애국주의 정당, 제국의 정당과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적 요소를 보수당의 전통에 포함시켰다.
 
 
  保守의 기본가치는 포기 않아
 
  박지향・강원택 교수가 말한 것 외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보수당은 도그마를 거부해온 그 유연함과 실용성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어려울 때에도, 당의 개혁파 정치인조차 보수의 기본가치 한 가닥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1945년 총선 패배 후 보수당의 개혁 프로그램인 〈산업헌장〉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국민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국민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한 것이나, 마이클 하워드가 블레어의 노동당에 밀리던 시절에 〈보수주의자의 신조〉를 통해 보수의 가치를 천명한 것이 그 예(例)이다.
 
  우리나라 4・15 총선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미래통합당은 여전히 친박(親朴)과 비박(非朴), 찬탄파와 반탄파로 나뉘어 비상대책위원회조차 꾸리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반면에 더불어민주당은 코로나지원금을 풀고 ‘문재인판 뉴딜 정책’을 내세우면서 국민들을 포섭하고 있다. ‘보수정당’의 적자(嫡子)로 여겨져온 미래통합당에서는 영국의 자유당이나 노동당의 모습이, ‘진보정당’이라는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보수당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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