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슬람 들여다보기

王政 비판하다 慘殺된 사우디 언론인 카슈끄지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할아버지는 사우디 초대 국왕 압둘 아지즈의 주치의, 삼촌은 武器商 아드난 카쇼기, 사촌형은 다이애나의 애인 도디 알 파예드
⊙ 이슬람에 근거한 민주주의 주장하는 무슬림형제단 지지자… 미국이 왕실 대체할 지도자 감으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어
⊙ “건설적인 의견과 (종종 현명한) 반대의견이 묵살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 사우디 왕실, 駐美대사 칼리드 왕자 귀국시켜… 왕세자 교체설 나와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된 언론인 카슈끄지. 2014년 12월 바레인의 《알아랍》 뉴스 채널 국장 시절의 모습이다. 사진=AP/뉴시스
  자말 카슈끄지. 지난 10월 2일 터키 이스탄불 주재 자국(自國) 영사관에 혼인에 필요한 서류를 받으러 갔다가 살해되어 전(全)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우디아라비아 반체제 언론인. 카쇼끄지, 카쇼기로도 표기되는 성을 가졌는데, 카슈끄지라는 이름은 ‘나무 숟가락을 만들거나 파는 사람’을 뜻하는 터키어다. 터키어로는 ‘나무 숟가락’을 뜻하는 ‘카슈크’와 ‘사람’을 뜻하는 ‘츠’가 붙어 ‘카슈크츠’라고 하는데, 아랍어로는 ‘카슈끄지’라고 표기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래 터키 중부 카이세리 출신인데 사우디아라비아 여성과 결혼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初代) 국왕 압둘 아지즈의 주치의 역할을 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했다. 왕족은 아니지만,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카슈끄지 집안에는 꽤나 유명한 인물들이 많다. 카쇼기로 더 알려진 삼촌 아드난 카슈끄지는 1980년대에 무려 4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억만장자 무기상(武器商)으로 명성을 떨쳤다. 유명 여성작가였던 고모 사미라는 파리의 리츠호텔과 런던의 해로드백화점을 소유한 이집트 출신 갑부 무함마드 알 파예드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들 도디 알 파예드, 즉 카슈끄지의 사촌형은 영국의 전(前)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연인으로 다이애나와 함께 미심쩍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카슈끄지는 1958년 메디나에서 태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했다. 잠시 서점에서 일한 것 외에는 지난 30여 년 동안 줄곧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정보당국과 함께 일하면서 9·11 테러 이전에 왕가와 오사마 빈 라덴의 우호적인 관계 복원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측에 오고간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아는 인물로 꼽히는 카슈끄지는 왕족을 제외하고 일반인으로 민감한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인터뷰하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에 대항하는 전사(戰士)들의 신앙심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물론 9·11 테러 이후에는 입장이 바뀌었다.
 
 
  무슬림형제단 추종자
 
  2003년 일간지 《알와딴》의 편집장이 됐지만, 이븐 타이미야(1263~1328)를 비판하는 글이 지면에 나가도록 했다는 이유로 불과 52일 만에 편집장에서 해임됐다. 이븐 타이미야는 이슬람 종교사에서 “코란이 창조되지 않은 말씀”이라고 주장하다가 옥고(獄苦)를 치른 아흐마드 이븐 한발(780~855)의 보수적인 신앙을 이어 받은 학자다. 그는 코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고, 성인(聖人) 공경과 같은 대중적인 믿음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슬람으로 개종(改宗)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 지배층을 불신자(不信者)라고 비난했으며, 신학과 철학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을 배격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종교이념인 와하비(Wahhabi) 사상은 아흐마드 이븐 한발과 이븐 타이미야를 사상적 원조로 삼는다. 그런데 이븐 타이미야를 비판하는 글이 나가도록 했으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층이 발칵 뒤집어질 만한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서구(西歐)에서는 이때부터 카슈끄지를 진보적인 언론인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종교이념에 도전하는 용감한 언론인’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용기를 낸 것은 사실 대단한 일이다.
 
  카슈끄지가 ‘사상(思想)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철옹성(鐵甕城) 같은 국가이념인 와하비 사상에 반기를 든 것은 아니다. 그는 실은 무슬림형제단을 추종하는 인물이었다.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은 세속적(世俗的) 서구사상에 반대하고, 이슬람을 종교를 넘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보는 근대 이슬람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와하비와 다른 점은 와하비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정(王政)의 수호사상이라면, 무슬림형제단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의 가치가 철저히 스며든 국가를 꿈꾼다. 서구가 카슈끄지를 ‘진보적 언론인’으로 보는 것은, 면밀히 살피면 사실 실상과 다른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이 다양한 사유(思惟)가 공존(共存)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레인 방송국 맡은 지 11시간 만에 문 닫아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오른쪽)는 지난 10월 23일 카슈끄지의 아들 살라를 왕궁으로 불러 위로했다. 이를 두고 ‘잔인한 악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살라와 그의 가족은 이틀 후 미국으로 떠났다. 사진=AP/뉴시스
  편집장에서 해임된 후 카슈끄지는 일종의 ‘자진 망명’을 떠나 약 4년간 영국에서 생활하다가 2007년에 귀국, 《알와딴》 편집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의 엄격한 이슬람 해석을 계속 지적하는 글을 잡지에 싣다가 2010년 또다시 해임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에서 허용 가능한 논쟁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카슈끄지는 24시간 아랍어로만 방송하는 바레인의 뉴스 채널 《알아랍》을 맡아 야심차게 새 출발을 했다. 하지만 바레인 왕정이 극도로 경계하는 시아파 지도자의 인터뷰를 송출하는 바람에 개국(開局) 11시간 만에 방송국은 문을 닫았다.
 
  그 후에도 카슈끄지는 여러 신문·방송에서 평론가로 활동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현 왕세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에 반대해 온 입장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감지했다. 결국 2017년 9월 미국으로 다시 자진 망명을 떠난다. 《알자지라》와 인터뷰에서는 그는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 카슈끄지는 특출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는 최대 3년 유효한 O1비자를 받아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비자 만료 전에 영주권 신청을 계획하고 있었다. 왕세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인물로 느껴도 하나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카슈끄지는 왕세자의 여러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칼럼은 영어와 아랍어로 게재됐으니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실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의 강도는 상당했을 것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1979년 이란혁명의 영향으로 경직된 자기 나라를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이끌겠다는 신념 아래 여성운전, 영화상영을 허가하는 등 일련의 개혁적인 정책과 비전을 내세웠다. 때문에 왕세자는 변화를 갈구해 온 젊은 층의 너른 지지를 확보했다. 국제사회 역시 빈 살만이 이끄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과거와 달리 ‘정상국가’로 갈 것이라는 희망 어린 기대감을 피력했다.
 
 
  예멘전쟁 종식 주장
 
  그러나 카슈끄지는 빈 살만을 개혁가로 보지 않았다. 그는 빈 살만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만들기 위해 종교적으로 위험한 극단주의자들을 멀리하는 개혁적인 정책을 펴는 게 아니라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선량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7년 10월 31일자 《워싱턴 포스트》 칼럼에서 카슈끄지는 빈 살만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극단주의자들을 척결하겠다는 무함마드 왕자의 생각은 옳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잘못 쫓고 있다. 지난 2달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성인·성직자·언론인·사회관계망(SNS)의 유명 인사들이 다수 체포됐다. 이들 대다수는 아무리 나쁘게 본다고 하더라도 정부에 다소 비판적일 뿐이다. 반면 이슬람학자위원회 소속 다수 위원들은 극단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존경하는 셰이크 살리흐 알파우잔은 텔레비전에서 시아파는 무슬림이 아니라고 했다. 역시 존경하는 셰이크 살리흐 알루하이단도 무슬림 통치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반드시 들을 필요가 없다는 법적인 조언을 했다. 민주주의, 다원주의, 또는 여성운전에 반대하는 이들의 견해를 반대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도록 왕령(王令)으로 보호하고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생각을 용인하면서 어떻게 온건할 수 있을까? 건설적인 의견과 (종종 현명한) 반대의견이 묵살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카슈끄지는 더 나아가 왕세자의 독단적인 국정운영, 언론장악 등 권위주의적 통치행태를 비판하고 예멘전쟁, 카타르와의 단교(斷交), 레바논 정책, 신도시 네옴(Neom) 건설 등 굵직굵직한 외교·경제 정책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카슈끄지는 ‘개혁적인 계몽왕자’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빈 살만의 감추어진 어두운 면을 부각하여 거칠 것 없는 권력자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다. 살해되기 한 달 전인 9월 11일 칼럼에서는 2015년 왕세자가 주변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개시한 예멘전쟁을 끝내고 국가의 위엄을 되살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잔인한 예멘전쟁이 장기화되면 될수록 상처가 더 공고해질 것이다. 예멘 사람들은 가난, 콜레라, 식수난과 싸우면서 국가를 재건하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왕세자는 폭력을 종식하고 이슬람의 발생지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엄을 되찾아야 한다.〉
 
 
 
빈 살만, 顧問 자리 제의하며 회유

 
  이처럼 카슈끄지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에서 조국 사우디아라비아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며 반정부(反政府) 언론인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특히 올해 초에는 ‘아랍세계를 위한 민주주의(Democracy for the Arab World Now)’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보다 본격적으로 반정부 활동에 나섰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아랍세계’란 무슬림형제단이 민주적인 절차로 정권을 잡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법이 통치하는 국가’는 아니더라도 ‘이슬람에 근거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였다.
 
  분명 왕세자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위기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치 파리나 모기가 얼굴 앞에서 계속 앵앵거리는 불편함은 컸을 것이다. 선거를 모르는 왕정국가에서 국가 기반을 흔드는 민주주의는 금기어(禁忌語)이니 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질적인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통치기본법 6조는 국민들은 “국왕에게 충성하고, 편할 때나 어려울 때나 행복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복종하고 순종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설 자리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1985년생 33살의 혈기왕성한 왕세자는 비록 카슈끄지가 자신보다 27살이나 더 많은 1958년생이라지만 왕족도 아닌 자가 자기를 대놓고 비판하니 몹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왕족이라도 눈 밖에 나면 가만두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빈 살만은 카슈끄지의 마음을 돌리고자 귀국하면 고문(顧問) 자리를 주겠다고 그를 회유했다. 그러나 카슈끄지는 그러한 초빙에 응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거절했다.
 
 
  사랑과 죽음
 
CCTV에 찍힌 자말 카슈끄지와 그의 약혼녀 하티제 젠기즈의 마지막 모습. 지난 10월 2일 카슈끄지가 살해되기 몇 시간 전에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사진=AP/뉴시스
  사우디아라비아는 친미(親美) 왕정국가였지만, 2001년 9·11 테러범 대다수가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였다. 이에 격노한 미국 정부 일각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을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체제로 바꾸어 미국이 직접 원유(原油)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면서 미국이 앞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끌 인물로 염두에 둔 사람 가운데 하나가 카슈끄지라는 말도 돌았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어찌 됐든 그 정도의 말이 돌 상황이라면 카슈끄지를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부터 카슈끄지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카슈끄지를 국내에 있는 가족과 생이별을 하도록 만들었다. 아내와도 외부 압력 때문에 사실상 강제 이혼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가진 그의 아이들은 모두 출국(出國) 금지 조치를 당했다.
 
  홀로 미국에서 살던 그는 올해 5월 이스탄불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24살 어린 터키 대학원생 하티제 젠기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의 나이 차가 크다던 젠기즈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과 워싱턴을 오가며 새로운 삶을 꾸미기로 약속했다. 카슈끄지는 결혼에 필요한 서류인 이혼증명서를 받기 위해 지난 9월 28일 이스탄불에 있는 자국 영사관을 방문했다.
 
  젠기즈에 따르면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영사관 직원들은 카슈끄지를 상당히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서류 준비에 시간이 걸리니 10월 2일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카슈끄지는 영사관을 나왔다. 운명의 그날인 10월 2일, 카슈끄지는 젠기즈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맡기고 죽음의 소굴로 들어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 분위기가 좋았기에 카슈끄지는 다소 편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자신이 나오지 않으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고문이자 터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 의원이었던 아크타이에게 전화를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카슈끄지는 영사관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했다.
 
 
 
“그 개의 목을 가져오라”

 
  모두 왕세자를 의심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랫것들’이 과잉충성심에서 카슈끄지를 압박하다가 사고가 발생하여 죽었다는 공식적인 해명을 내놓고 있다. 정황상 불법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을 도·감청한 것으로 보이는 터키는 외교마찰 우려 때문에 정보를 공식적으로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대신 언론을 통해 정보를 흘리고 있다. 터키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정부 차원에서 반정부 발언을 일삼는 골칫덩이 카슈끄지를 제거했다고 확신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카슈끄지를 처치하기 위해 당일 터키인 근무자들에게는 미리 휴가가 주어졌고, 법의학 전문가를 포함한 15명의 암살단이 사건 당일 새벽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터키로 들어왔다고 하면서 신상도 공개했다. 처참하게 토막 난 카슈끄지의 시체 사진까지 나돌았다.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해라는 말이다.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 왕세자실의 고문이 “그 개의 목을 가져오라”고 한 말을 도청한 음성파일까지 언론에 폭로됐다.
 
  터키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체포한 살해 용의자들을 자국으로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응하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는 떠들썩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잠잠해지는 형국이다.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강력하게 의심을 받고 있는 빈 살만은 의심은 가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태다. 그는 시간을 끌면서 국제 여론이 카슈끄지를 잊길 바라는 전략을 쓰고 있는 듯하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카슈끄지의 죽음을 끝까지 파헤치겠다고 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될 시신이 나오지 않고 있는 데다 체포된 용의자들이 살해 지시 윗선을 자백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질 가능성이 짙다.
 
 
  왕세자 교체설 나오기 시작
 
칼리드 주미 사우디 대사. 사진=주미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홈페이지
  사우디아라비아 및 미국과 사이가 불편했던 터키는 이번 사건을 양국(兩國)과 관계를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좋은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꽃놀이패를 쥔 형국이다. 영국·독일·프랑스·캐나다 등 인권·자유·민주를 핵심 가치로 삼는 정부는 언론인 살해를 규탄하고 나섰지만, 사우디에 대한 무기 수출 때문에 비판 수위를 조절했다. “합당한 해명을 할 때까지 무기 판매를 중지하겠다”고 한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나마 가장 강력하게 항의를 표한 셈이다.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큰 문제 없이 조용히 사건을 처리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곤란하다는 신호를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전달했을 것이다.
 
  국제여론의 비판적인 기조에 위축된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은 빈 살만 왕세자에게 더 이상 독단적인 행동은 안 된다는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인지 주미대사로 재직 중이던 막내 동생 칼리드를 불러들였다. 왕세자가 내쳤던 왕실 인사들도 다시 조용히 불러들이고 있는 중이다. 대내외적으로 평판이 좋은 칼리드를 부(副)왕세자로 임명한 후 왕세자를 교체할지도 모른다는 설까지 나돈다.
 
  수세에 몰린 빈 살만 왕세자는 카슈끄지가 위험한 이슬람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자신이 꿈꾸는 온건한 이슬람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어울리지 않는 무슬림형제단 사상을 쫓는 인물이라는 주장이었다. 과거 이집트·시리아 등 주변 국가의 세속주의 정권을 견제할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무슬림형제단이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급부상하면서 왕정 전복의 위험을 간파한 사우디 왕실은 무슬림형제단의 강력한 반대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러니 당연히 무슬림형제단에 경도된 카슈끄지는 위험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이유야 어찌 됐든 현대 중동에서 이슬람은 이처럼 여전히 정치 담론의 핵심이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서로를 마음 편히 대할 수 없는 적(敵)으로 여겨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언제나 마무리될까? 오로지 알라만이 알 것이다. 알라후 아을람!⊙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