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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형제살해

내 형제를 죽이노라, 나의 권력을 위해!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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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간의 내전 끝에 집권한 메흐멧 2세, 술탄에 즉위하면 형제들을 죽이도록 법제화
⊙ 메흐멧 3세, 즉위 후 19명의 형제를 살해
⊙ 형제살해 덕에 역동적이고 유능한 후계자 이어져 제국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어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인 메흐멧 2세는 형제살해를 법제화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최고 권력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정치적 동물인 인간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들어 온 신조일는지 모른다. 오롯이 나 홀로 최고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 정적(政敵)을 투옥하거나 죽여서 제거해 버리는 경우는 고금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형제 간 다툼을 넘어 살해하는 경우도 적잖았고 아비가 자식을, 자식이 아비를 처치해 버리는 일도 있었으니 권력 앞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잔인무도한 존재다. 물론 오늘날 권력쟁취를 위해 형제나 부모 살해를 자행하는 나라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김정은 같은 사악한 비인간(非人間)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과거 로마를 위시한 제국에서는 황제인 아버지가 죽을 경우 그의 아들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서로를 죽였다는 기록이 역사에 남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조 3대 왕 태종도 권좌에 오르기 위해 이복형제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친형 방간과도 권력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을 강화하고 형제들의 권력욕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하여 이른바 형제살해를 합법화한 왕조가 있었다. 이는 바로 오스만튀르크 제국이었다.
 
 
  바예지드 1세, 11년간 내전 끝에 즉위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중동, 북아프리카, 동유럽을 장악한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기 전까지 안정적인 계승법이 없었기에 술탄 계승을 두고 내정(內政)의 혼란을 겪었다.
 
  4번째 술탄 메흐멧 1세(재위 1413~1421)는 자신의 조상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불편함을 잘 대처했다고 하면서 한 나라에 “두 명의 술탄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정권의 안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술탄의 아들은 모두 차기 술탄이 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튀르크 전통에 따라 12살이 넘으면 이들 왕자는 각기 수도에서 똑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행정구역에 보내져 일종의 차기 지도자 과정을 밟다가 술탄이 죽으면 가장 먼저 수도에 도착한 자가 차기 술탄이 되었다.
 
  권력 다툼에 밀린 왕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적국에 망명하여 술탄위(位) 찬탈의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다. 메흐멧 1세의 술탄 즉위는 극심한 혼란의 좋은 예다. 1402년 그의 부친이자 술탄이었던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와 벌인 앙카라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뒤 죽자 술탄의 아들들은 차기 술탄 자리를 두고 무려 11년간이나 서로 싸움을 벌였다. 결국 가장 어린 아들이었던 메흐멧 1세가 제국을 나누어 가지자고 한 형 무사를 차무를루 전투에서 무찌르고 목 졸라 죽인 후 술탄이 되었다.
 
  어렵게 술탄의 자리에 올라도 형제들이 살아 있는 한 권력은 항상 반란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술탄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군대가 있을 경우, 군대는 술탄의 형제 중 한 명을 지도자로 옹립하면서 술탄의 권위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야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형제가 있다면 제국의 정정(政情)은 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상존하였다.
 
  메흐멧 2세는 메흐멧 1세의 손자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실질적인 오스만 제국의 건설자로 칭송받는 명군(名君)이다. 메흐멧 2세는 술탄의 형제들이 빚어 내는 불협화음을 일소하고자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형제살해법을 제정한다.
 
  “나의 아들들 중 누구든 간에 술탄에 오르게 되면 반드시 세상의 질서를 위해 마땅히 형제들을 죽여야 한다. 법률가들이 승인하였으므로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하라.”
 
 
  아들을 죽인 술레이만 대제
 
술레이만 대제는 명군이었지만, 왕위 경쟁자인 아들을 죽였다.
  이로써 합법적으로 술탄이 자신의 형제들을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바예지드 2세(재위 1481~1512)가 죽자마자 수도 이스탄불에 있던 그의 막내아들 셀림(재위 1512~1520)은 스스로를 술탄으로 선언하고 두 형 아흐멧과 코르쿳을 궁중 만찬에 초대하여 죽였다. 이 때문에 셀림은 ‘야부즈(Yavuz)’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이는 터키어로 ‘잔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형제뿐 아니라 아들까지도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1553년 술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는 자신의 큰아들이자 차기 강력한 술탄 후보자였던 무스타파(1515~1553)를 자신이 참가한 전장(戰場)으로 호출했다. 막사로 들어오면서 인사의 예를 표하는 무스타파에게 술레이만 대제는 “야, 이 개야, 내게 감히 인사를 해?”라고 하면서 부하들을 시켜 목 졸라 죽였다.
 
‘하렘의 술탄’ 록셀라나.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노예상에 붙잡혀 팔려 와서 술레이만 대제의 여인이 된 하렘의 술탄 록셀라나가 자신의 아들을 차기 술탄으로 만들려고 무스타파를 모함하여 일어난 비극이었다. 결국 그녀의 바람대로 아들 셀림 2세(재위 1566~1574)는 마지막 남은 이복형제 바예지드(1525~1561)와 그의 네 아들을 처형하고 대권 가도를 탄탄히 확보한 다음 5년 뒤 아버지가 죽자 술탄이 되었다.
 
  이 법을 마지막으로 적용한 권력자는 13번째 술탄 메흐멧 3세(재위 1595~1603)였다. 1595년 술탄이 되자마자 바로 이복형제를 포함하여 모두 19명의 형제를 죽여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함께 묻었다.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기에 술탄의 신임을 받는 농아(聾啞) 처형자들이 이들 왕자를 모두 비단 손수건으로 목 졸라 죽였다. 형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당한 왕자들 중에는 아직 젖도 떼지 못한 갓난아이들도 있었다.
 
 
  새장
 
왕위계승전에서 탈락한 왕자들을 유폐했던 톱카프 궁전의 카페스.
  이렇게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방법으로 형제들을 살해한 이유는 제국의 안정과 안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신민(臣民)들이 곱게 보아 줄 리 만무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여론을 반영이라도 한 듯, 13살에 메흐멧 3세의 후계자가 된 아흐멧 1세(재위 1603~1617)는 한 살 어린 이복형제인 어린 무스타파를 죽이지 않고 옛 궁전에 살도록 보냈다. 왜 무스타파를 죽이지 않았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아흐멧이 아직 아들이 없고 후계자가 동생뿐이어서 그랬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아서 그랬다, 동생을 좋아해서 그랬다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때부터 형제살해 전통은 막을 내렸고, 술탄직은 연장자(年長者)가 계승하였다. 형제를 살려주는 대신에 궁전 한 곳에 유폐 장소를 마련해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이나 아들들을 모조리 잡아넣고 무기한 감금하는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유폐에 사용된 건물을 ‘카페스(Kafes)’라고 하였는데, 새장, 철창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유폐된 이들은 여성과 술 등 유흥거리를 즐길 수 있었지만, 정치, 행정, 경제, 군사 등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궁전에 갇히긴 했지만, 금치산자(禁治産者)처럼 대우 받은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고, 이들 중에서 술탄이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술탄으로 선택되지 못하면 여기서 평생을 보내야 했고, 한정된 공간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속 지내야만 하였기에 정신병을 앓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갇힌 자들의 삶이 정상적이 아니었음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연장자 승계로 바뀐 후 제국 쇠퇴 시작
 
  형제살해가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이 작용하였기에 제국을 역동적으로 이끄는 순기능을 하였다고 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들은 형제살해 제도가 폐지되면서 오스만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 연장자 우선 계승 때문에 젊고 활력 넘치는 술탄 대신 연로한 술탄이 들어서는 바람에 역동적으로 제국을 운영하지 못하였고 술탄의 아들들이 주지사로 파견되어 행정경험을 쌓았던 과거와 달리 유폐되어 금치산자로 전락하여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안 사람들을 꼭 죽여야만 제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을는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멀쩡한 사람을 단지 술탄의 권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것이 이슬람에서는 쉽게 용인되었던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스만 2세(재위 1618~1622)의 경우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동생이 권력에 도전할 수 없도록 죽이고자 하였으나 이슬람 법학자인 에스아드 에펜디가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른 법학자로부터 살해해도 좋다는 법적 의견을 구해 동생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강화할 수 있을 듯했던 오스만 2세는 친위부대였던 예니체리 세력을 약화시키려다가 반격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고환을 으깨어 죽이는 방식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형제살해의 법적 근거
 
  이슬람법은 같은 사안일지라도 법학자의 해석이 다를 수 있기에 술탄은 자신에게 유리한 견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대체로 이슬람 법학자들은 혼란이나 위험보다는 안정을 선호하여 형제살해를 묵인하였다. 이들은 다음 두 《꾸란》 구절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받아들여 형제살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먼저 ‘살인보다 더 나쁜 것이 분열’이라는 2장 191절의 계시는 술탄직을 두고 제국이 분열되는 것보다는 형제살해가 더 낫다고 여기는 데 일조하였다. 또 18장에는 예언자 모세와 함께 있던 사람이 무고한 소년을 죽여 놀란 모세가 항의하자 그는 소년의 부모가 신앙인인데, 불신자인 소년이 반항하면서 부모를 괴롭힐 것이 걱정되어 죽였고, 신께서 더 나은 아이를 부모에게 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한다(18장 80~81절).
 
  즉, 분열보다는 안정, 악보다는 선을 위해 《꾸란》을 근거로 법학자들이 술탄의 형제살해를 용인한 것이다. 그런데 해당 《꾸란》 구절을 보면, 특히 2장 191절은 싸움을 거는 자가 있을 경우를 두고 한 말인데, 술탄 자리에 관심이 없어 싸움도 걸지 않은 왕자들을 모두 죽인 것이니 참으로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형은 이슬람법에서 명백한 증거가 필요한데 증거도 없이 훗날 문제가 될 것이라는 가정과 추측만으로 갓난아이의 목숨까지 빼앗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달려야 산다!
 
셀림 1세는 총리를 7명이나 처형했다.
  터키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나라이다. 특히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은 마르마라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곳으로 널리 정평이 나 사시사철 방문객으로 붐빈다. 그런데 기막히게 멋진 이 궁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마음이 아플 뿐이다.
 
  톱카프 궁전 정문 양쪽에는 최근에 처형당한 범죄자들의 목이 걸려 있었고 정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궁의 내부로 향하는 곳에 사형집행관들이 참수나 교살 후 손을 씻는 곳이 있었다. 사형집행관을 ‘보스탄즈 파샤’라고 불렀는데, ‘정원사’라는 뜻이다. 목 졸라 죽이거나 머리를 잘랐으니 ‘죽음의 정원사’다. 왕족이나 고관대작은 피를 흘리면 안 되는 전통에 따라 목을 졸라 죽였고, 그 외에는 참수(斬首)하였다.
 
  이곳은 셀림 1세(재위 1512~1520) 때 특별히 자주 사용되었다. 그의 재위 중에 7명의 총리가 목숨을 잃었고, 3만 건에 달하는 처형명령이 집행되었다. 오스만튀르크 시대에 “그대가 셀림 1세의 총리가 되길!”이라는 말은 저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셀림 1세는 총리를 자주 죽였다.
 
  총리들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유서를 옷 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중앙문에는 술탄의 심기를 거스른 관리들의 잘린 목이 대리석 기둥에 놓여 있었다. 장관이었으면 솜이, 하부 관리였으면 짚이 잘린 머리에 박혀 있었고 잘린 혀, 코, 귀도 함께 전시되기도 하였다. 일단 사형선고가 내려지면 바로 집행하였다.
 
  그러나 사형선고를 받은 총리에게는 목숨을 살릴 기회가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총리는 중앙정문에서 약 270m를 빨리 달려 보스탄즈 파샤보다 먼저 사형 집행장인 수산시장 정문에 도착하면 사면되었다. 1822년 사형선고를 받은 하즈 살리흐 파샤 총리는 달리기 경주에서 이겨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미친 자’ 이브라힘
 
  톱카프 궁전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로는 사형선고를 받은 여성들을 보스탄즈 파샤가 무거운 자루에 묶어 던졌다. ‘미친 자’로 불린 이브라힘(재위 1640~1648) 술탄은 자신의 하렘에 살던 여성 280명 전원을 이러한 방식으로 죽였다고 한다.
 
  이브라힘은 왜 그랬을까? 현대 학자들은 그가 정신병을 앓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카페스에 유폐되어 살면서 혼이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아버지 아흐멧 1세는 형제살해를 폐지하였지만, 술탄이 된 그의 아들이자 이브라힘의 형인 오스만 2세와 무라드 4세(재위 1612~1640)는 이브라힘만 남겨 두고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죽기 직전 병석에서 무라드 4세는 미친 이브라힘이 제국을 이끄는 것보다 차라리 제국이 끝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사형명령을 내렸으나 어머니가 말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이브라힘은 카페스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무라드 4세가 죽고 군중이 그를 새로운 술탄으로 추대하려고 몰려들자 자신의 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보낸 사람들로 생각하여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술탄의 근위대가 오고 어머니가 나오라고 설득해서야 비로소 처소에서 나와 “백정이 죽었다!”라고 소리치며 춤추었다고 한다.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서 살았으니 미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유폐된 술탄의 형제, 아들들에게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필이면 술탄과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 좁은 곳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다니,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술탄의 아들과 형제들은 총리들처럼 빨리 달려 살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었다.
 
  오스만튀르크는 1876년 헌법에서 왕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술탄이 된다고 규정하였다. 이때 제국은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여 병사(病死) 직전이었다. 그리고 1922년 11월 1일 36번째 술탄 메흐멧 6세가 폐위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로운 공화정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수많은 이의 목숨을 끊은 술탄직을 폐지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갓난아이를 죽이거나 유폐할 필요가 없는 공화정이 들어섰다.
 
  말끝마다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형제를 죽이는 동토(凍土)의 왕국은 오스만 제국 술탄의 피비린내 나는 비정한 역사를 재현하려고 하니,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다. 인간 백정이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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