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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翼의 연구

일본의 우익

사회당 당수(黨首)부터 부패한 우익 대부까지 무차별 공격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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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 청년장교들, “문답불용問答不用”이라며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사살 (1932년)
⊙ 육군 청년장교들은 2·26 쿠데타 일으켜 내대신, 대장대신, 육군교육총감 등 살해 (1936년)
⊙ 17살 소년 야마구치 오토야, 아사누마 이네지로 사회당 위원장을 칼로 찔러 죽여 (1960년)
⊙ 록히드 사건 연루된 우익 대부 고다마 요시오의 집에 가미카제 공격 (1976년)
⊙ 천황의 전쟁책임 언급했던 모토시마 히토시 나가사키 시장 피격 (1990년)
1960년 10월 12일 17살의 우익소년 야마구치 오토야는 아사누마 이네지로 사회당 위원장을 칼로 찔러 죽였다.
  탄핵정국의 와중에서 좌파는 ‘혁명’을 운운했다. 우파도 그에 질세라 ‘아스팔트를 피와 땀으로 물들일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이웃 일본에서도 그랬다. 좌익의 대두는 우익의 폭력을 불렀다. 대개의 경우 우익의 폭력은 좌익의 그것 못지않게 격렬하고 잔인했다.
 
  일본은 ‘칼의 나라’다. 우리나라에서는 말과 붓으로 다툴 때, 일본인들은 칼로 문제를 해결했다. 150여 년 전 도쿠가와 막부 말기, 새 세상을 꿈꾸던 사무라이들은 ‘존황양이(尊皇攘夷·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를 만들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친(親)막부파 요인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막부는 신센구미(新選組) 같은 무사집단을 동원해 이들을 탄압했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후, 반(反)막부파 혁명세력의 행위는 ‘지사(志士)’의 행위로 추인(追認)받았다. 신센구미는 한동안 메이지유신을 가로막은 반역의 무리로 치부되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무가(武家) 정권의 낙조(落照)를 장엄하게 물들인 마지막 무사집단’으로 재평가되었다.
 
  이런 전통 때문일까? 일본에서의 이념투쟁은 살벌한 폭력투쟁으로 이어져 왔다. 일본 좌익들의 투쟁은 급기야 도시 게릴라 투쟁 끝에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는 적군파(赤軍派)라는 괴물을 낳았다. 우익(右翼)도 만만치 않았다. 우익은 1930년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피로 물들였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혁신우익’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한 미카미 다쿠 해군 중위.
  ‘보수(保守)우익’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한국에서는 보수=우익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보수우익’ 외에 ‘혁신(革新)우익’이 존재해 왔다. ‘혁신우익’은 부패한 의회정치인, 재벌, 관료, 군벌(軍閥)과 같은 기득권 세력을 타도하고, 통제경제 체제의 수립 등 사회주의적 개혁을 통해 국가를 혁신해 보려는 생각을 말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반(反)자본주의·반민주주의적인 사고(思考)방식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우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사상의 중심에 ‘천황’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군민일체(君民一體)’라는 이상화(理想化)한 천황상을 그리면서, 그 천황을 개혁의 주체(主體)로 상정한다. 경제·사회사상에서는 다분히 ‘좌익적’이지만, 이런 점에서는 ‘우익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1930년대에 만연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60여 년간의 분투 끝에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성장했지만, 당시 일본은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해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오랫동안 국정을 농단했던 조슈(현 야마구치)와 사쓰마(현 가고시마) 출신의 번벌(蕃閥) 정치인들이 퇴진했지만,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부패한 정당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의 뒤에는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같은 재벌들이 있었다.
 
  미국·영국 등 열강은 태평양에서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워싱턴군축회의·런던군축회의 등을 통해 일본의 해군력을 제한했다. 군부와 언론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이면서, 열강의 압력에 굴복한 문민(文民) 정치인들을 ‘국적(國賊)’으로 간주했다.
 
  만주사변 이후 국제적 고립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등장과 노동운동의 활성화 등은 기득권 세력을 긴장케 했다. 거기에 더해 동북지방에 기근이 닥쳤다. 가난한 농민들이 딸을 유곽에 파는 참담한 일까지 벌어졌다. 농촌 출신의 젊은 장교들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기성 체제에 분노했다.
 
  1932년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를 암살한 미카미 다쿠(三上卓) 해군 중위가 지은 ‘청년일본가’라는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권력자는 오만방자하나 나라를 걱정하는 진심이 없고, 재벌들은 부(富)를 자랑하나 사직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
 
  여기에 기타 이키(北一輝)나 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 같은 민간 우익 사상가들이 나타나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우익테러가 횡행했다.
 
 
  혈맹단의 일인일살주의(一人一殺主義)
 
재판을 받은 혈맹단 사건 관련자들.
  1930년 11월 14일 런던군축회의에 조인했던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가 우익단체 애국사(愛國社) 소속 사고야 도메오(佐鄕屋留雄)가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하마구치는 부상 후유증으로 이듬해 8월 세상을 떠났다. 1931년 3월에는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 육군대좌가 이끄는 사쿠라회(櫻會)가 오가와 슈메이 등 민간 우익과 손을 잡고 정권을 타도한 후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 육군대신을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을 세우려다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있었다(3월 사건).
 
  1932년 2월 9일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전 대장대신(大藏大臣·재무부 장관)이 암살당했다. 그는 미쓰비시그룹 총수의 동서였다. 같은 해 3월 5일에는 일본 양대 재벌의 하나였던 미쓰이합명회사 이사장 단 다쿠마(團琢磨)가 미쓰이은행 현관 앞에서 살해됐다.
 
혈맹단을 이끌었던 우익사상가 이노우에 잇쇼.
  이들의 뒤에는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가 이끄는 혈맹단(血盟團)이라는 극우단체가 있었다. 이노우에 잇쇼는 1910년 중국으로 건너가 마적단에 몸담은 적도 있고, 일본군의 첩보원이나 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이른바 ‘대륙낭인(大陸浪人)’이었다.
 
  10여 년 만에 귀국한 그는 ‘사회주의자의 증가, 극좌익의 횡포, 노동대중의 빈곤과 그들의 적화(赤化) 현상, 그리고 지도계급의 흉포(凶暴)와 무자각(無自覺)’에 절망, 국가혁신을 꿈꾸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국민계몽 운동을 통해 국가혁신을 꿈꾸었다.
 
  하지만 후지이 히토시(藤井齊) 소좌 등 해군의 급진적 장교들과 교류하면서 이노우에는 테러로 노선을 바꾸었다. ‘지도계급의 자각을 촉구’하기 위해 이노우에가 내건 방침이 ‘일인일살주의(一人一殺主義)’였다.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단 다쿠마는 그 희생자였다.
 
  혈맹단의 암살대상 중에는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전 총리, 와카쓰기 레이지로(若槻禮次郞) 전 총리,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 내대신(內大臣·천황 측근에서 자문역을 하는 원로대신)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이노우에 잇쇼는 그해 3월 11일 경찰에 자수했다.
 
 
  “문답불용. 발사!”
 
5·15사건으로 암살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그의 죽음으로 전전(戰前) 정당정치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노우에 잇쇼와 함께 체제전복 음모를 꾸며 온 극우세력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우익 사상가 오가와 슈메이로부터 지원을 받은 해군장교들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그해 5월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했다. 미카미 다쿠(三上卓) 해군 중위, 야마기시 히로시(山岸宏) 육군 소위 등 9명의 장교 및 사관후보생들은 총리 관저 서재에서 이누카이 총리와 대면했다.
 
  자기 눈앞에서 권총을 장전하는 청년장교들을 보면서 노(老) 정치인은 “이와 같이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고 이야기하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다”면서 이들을 달래려 했다. 야마기시 히로시 소위는 “문답불용(問答不用·말은 필요 없다). 발사!”라고 외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미카미 다쿠 중위도 함께 총을 쏘았다. 이누카이 총리의 죽음과 함께 의회 다수당의 당수가 총리를 맞는 정당정치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대신 전직 군 장성이나 관료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들어섰고, 군부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다.
 
  일국의 총리를 암살했음에도 당시 육군대신은 “이처럼 순진한 청년이 행동을 취하게 된 심정을 생각하면 눈물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해군대신도 “무엇이 순수한 청년장교들에게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하게 했나를 생각할 때 옷깃을 여미게 된다”고 했다. 군법회의에서 미카미 다쿠는 금고(禁錮) 15년, 야마기시 히로시는 금고 10년을 선고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 났다.
 
  청년장교들에 대한 이런 온정적 조치는 군부 내 젊은 군인들의 간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1935년 8월 12일에는 아이자와 사부로(相澤三郞) 중좌가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永田鐵山) 소장의 집무실에서 군도를 휘둘러 나가타 국장을 살해했다.
 
  당시 일본 육군은 군부가 국가를 통제하면서 전쟁준비에 매진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제파(統制派)와, 천황을 받들고 기득권 세력을 몰아내는 국가개조를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황도파(皇道派)로 갈라져 있었다. 통제파에는 육군대학 출신 엘리트들이, 황도파에는 농촌 출신 야전 장교들이 많았다. 나가타 소장은 통제파의 리더였고, 아이자와 중좌는 황도파였다. 아이자와 중좌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2·26 쿠데타
 
2·26사건 당시 도쿄 시가를 행진하는 쿠데타군. 그들의 지휘자는 위관급 장교들이었다.
  아이자와 중좌의 ‘행동’과 죽음은 황도파 청년장교들을 분격시켰다. 그 결과가 1936년 일어난 2·26사건이다. 주도자는 무라나카 고지(村中孝次) 예비역 대위,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 예비역 대위, 고다 기요사다(香田淸貞) 대위, 안도 데루조(安藤輝三) 대위, 노나가 시로(野中四郞) 대위, 구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중위, 나카하시 모토아키(中橋基明) 중위, 니우 세이추(丹生誠忠) 중위 등 위관급 장교들이었다. 근위 보병 제3연대, 보병 제1연대, 보병 제3연대, 야전 중포병 제7연대 등에서 동원된 병력은 1483명이었다.
 
  이들은 천황 측근의 간신으로 간주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총리, 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郞) 시종장, 사이토 마코토(斎藤實) 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대장대신,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 전 내대신, 와타나베 조타로(渡邊錠太郞) 육군교육총감 등의 집을 습격했다. 오카다 총리 관저를 습격한 쿠데타군은 그와 외모가 흡사한 처남 마쓰오 렌조(松尾傳藏) 대좌를 총리로 오인해 사살했다. 오카다 총리는 집 안에 숨어 있다가 탈출했다.
 
  조선 총독과 총리를 지낸 사이토 내대신은 47발의 총탄을 맞고 10여 군데를 칼에 찔려 죽었다. 쿠데타군의 한 장교는 사이토의 피가 묻은 손을 들어 보이며 “보라! 국적(國賊)의 피를!”이라고 외쳤다. 러일전쟁 당시 전비(戰費) 마련의 1등공신이었던 다카하시 대장대신도 ‘국적’으로 몰려 죽었다. 와타나베 육군교육총감도 총탄을 받고 칼에 찔려 살해됐다. 스즈키 시종장도 총탄에 쓰러졌다. 안도 데루조 대위는 일본도로 시종장의 목을 치려 했으나, 부인이 애원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스즈키 시종장은 중상을 입고도 살아나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에 총리를 지냈다.
 
  쿠데타군이 닥치는 대로 중신들을 살해한 것은 그들이 ‘파괴는 곧 건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천황 측근의 간신들을 제거하면, 세상은 저절로 바로잡히리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쿠데타 성공 후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가겠다는 비전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육군성, 경시청 등을 장악하고 황궁을 점거한 후, 황도파의 수장인 마자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郞) 대장을 총리로 옹립한 후 천황을 받들면서 쇼와(昭和)유신을 결행한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받들려고 했던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쿠데타에 결연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쿠데타 초기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스즈키 시종장의 부인은 천황의 유모였다. 스즈키 시종장 부부는 천황에게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사이토 내대신은 천황의 최측근 참모였다. 이런 이들이 쿠데타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천황은 격노했다. 그는 대원수(大元帥)의 군복을 입고 나와 군부에 쿠데타 진압을 명령했다.
 
  육군대신, 제1사단장 등 군 상층부는 당초 쿠데타에 동조적이었다. 하지만 천황의 뜻이 워낙 강경했다. 2월 27일 무력진압을 재가한 천황은 그날 하루에만 13번이나 시종무관장을 불러 “왜 빨리 진압하지 않느냐?”고 닦달했고, 급기야 “내가 직접 부대를 지휘해서 반란군을 진압하겠다”고 호령했다.
 
  결국 2월 29일 진압군이 쿠데타군 토벌작전에 나섰다. 쿠데타군 지휘부는 저항을 포기하고 부하들을 원대복귀시켰다. 노나카 시로 대위는 자결했고, 나머지 주모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청년장교들이 자신들의 멘토로 생각했던 민간 우익 사상가 기타 이키도 주모자로 몰려 처형됐다.
 
  2·26사건으로 육군 내 황도파는 일소됐다. 육군을 장악한 통제파는 “2·26사건과 같은 쿠데타가 재발할 수도 있다”면서 정부를 협박, 나라를 군국주의로 이끌고 갔다. 2·26쿠데타는 당시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청년 박정희(朴正熙)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후일 박정희는 2·26사건으로 군복을 벗고 만주군관학교에 와 있던 간노 히로시(管野弘)를 만나 훈육을 받게 된다.
 
 
  공산당 서기장에게 수류탄 투척
 
  태평양전쟁의 패배는 일본 우익의 패배이기도 했다. 맥아더사령부는 초국가주의(超國家主義) 단체들을 해체하고 그 지도자들을 전범(戰犯)으로 처벌하거나 공직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좌익세력이 발호하고 냉전(冷戰)이 시작되자, 맥아더사령부는 우익세력에 대한 제재를 해제했다.
 
  좌익세력이 주도한 2·1파업을 앞둔 1947년 1월 신예대중당이라는 극우단체 소속 청년 두 명이 파업 지도자 조도 곳키 산별(産別)노조 위원장을 칼로 찔렀다. 이 사건은 전후(戰後) 최초의 우익테러 사건이었다. 신예대중당은 ‘당’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체는 아사쿠사의 야쿠자 마키 야스히라가 만든 폭력단이었다.
 
  일본의 우익단체 중에는 폭력단과의 경계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학자들은 이런 단체들을 ‘의협계(義俠系) 우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48년 7월에는 반공연맹 오쓰루 청년부 회원 고가 이치로 등 4명이 사가시 공회당에서 연설 중이던 도쿠다 규이치(徳田球一) 공산당 서기장에게 수류탄을 투척, 전치 1주의 상처를 입혔다.
 
  1960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정권이 추진하던 미일안보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 정국은 큰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좌익세력이 중심이 되어 반전(反戰)평화를 명분으로 조약에 반대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일(訪日)을 앞두고 경찰력만으로는 시위대를 막기 어렵다고 판단한 기시 정권은 우익의 대부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다마는 야쿠자들과 1만5000명의 도박꾼, 야바위꾼 등을 동원, 애국신농동지회를 조직했다. 크고 작은 우익단체들이 경찰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해 6월 15일 전국적인 파업이 벌어졌다. 우익단체 유신행동대가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연극인회의와 주부 시위대를 습격, 8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극좌세력이 지도하고 있던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학생 4000여 명이 이 사건에 자극받아 국회 구내로 진입했다. 경찰이 이들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도쿄대 학생 간바 미치코가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7대 언론이 공동사설을 발표해 기시 퇴진을 요구할 정도로 여론이 악화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방일을 취소했고, 얼마 후 기시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17살 소년, 사회당수를 척살
 
우익단체 대일본애국당 시절의 야마구치 오토야(왼쪽에서 두 번째).
  그해 10월 12일에는 일본을 전율케 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淺沼稻次郞)가 백주에 척살(刺殺)당한 것이다. 그날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는 자유민주당, 사회당, 민주사회당 3당 당수 초청 연설회가 열렸다. 아사누마가 한창 연설을 하고 있을 때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가 단상에 뛰어올라 33cm짜리 칼로 아사누마의 가슴을 두 차례 찔렀다. 아사누마는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는 당시 17살의 대학 청강생이었다. 육상자위대원인 아버지 밑에서 애국심을 교육받으면서 자란 그는 대일본애국당이라는 극우단체에 몸담기도 했다. 그는 아사누마 사회당 위원장이 평소 친중반미(親中反美) 주장을 일삼는 것을 보고 아사누마 살해를 결심했다. 야마구치는 범행 당시 다음과 같은 문건을 소지하고 있었다.
 
  〈너,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의 적화(赤化)를 꿈꾸고 있다. 나는 너 개인에게 원한은 없으나, 일본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 책임과, 방중(訪中) 시의 폭언과 국회난입 등의 직접적 선동자로서 책임을 물어,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나는 너에게 천벌을 내린다.〉
 
  야마구치는 조사 과정에서 야마구치는 당차고 이로정연하게 자신의 우익적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제1야당의 당수를 살해했지만, 미성년자여서 도쿄 소년감별소에 수용됐다. 그해 11월 2일 밤 야마구치는 ‘칠생보국(七生報國·7번 다시 태어나도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뜻) 천황폐하 만세’라고 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천벌’이니 ‘칠생보국’이니 하는 말들은 메이지유신 시기의 지사(志士)들이 많이 썼던 말로 야마구치의 사고(思考)를 잘 보여준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오늘날까지도 그를 ‘열사(烈士)’로 기리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11월 25일 육상자위대 동부방면총감부 발코니에서 장병들에게 쿠데타를 선동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1960년대 일본은 격동의 시기였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극좌세력의 저항이 거세졌다. 1969년 1월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의 도쿄대학교 야스다강당 점거사건이나, 적군파의 등장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천황의 권위에 기대서 국가를 혁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금각사》 등의 소설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1960년대 중반부터 자위대 간부, 정부의 젊은 엘리트들과 어울리면서 자위대 입대체험을 하는 등 군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한국을 방문해 휴전선을 돌아본 적도 있다고 한다.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는 자신의 사병(私兵)집단인 방패회 회원 5명을 이끌고 도쿄 이치가야에 있는 동부방면총감부에 난입했다. 그는 총감을 감금한 후 자위대원 1000명을 불러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천황을 받들어 국가를 개혁하자며 쿠데타를 호소했다.
 
  “자위대에서의 건군(建軍)의 본의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것이다. 일본을 지키는 것이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것이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일본을 뼈 없이 만드는 헌법에 따라왔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여러 분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와 함께 일어설 자가 여기 없는가?”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소와 야유였다. 절망한 미시마는 “그러면서도 무사인가?”라고 탄식하다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모리타 핫쇼(森田必勝)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미시마 유키오 사건은 친미반공(親美反共) 일변도의 기존 우익에서 탈피해, YP체제(얄타-포츠담체제·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전후체제) 해체, 반미(反美) 자주화와 천황절대주의,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체제 개혁을 주장하는 신우익(新右翼) 내지 민족파 우익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신우익은 1930년대 국가개조를 주장하던 혁신우익과 맥을 같이한다.
 
 
  ‘천황 전쟁책임’ 언급한 나가사키 시장 저격
 
  일본 우익의 테러 이유와 대상은 제한이 없었다.
 
  쇼와청년회라는 극우단체 회원이 북방영토 반환을 요구하며 일본을 방문한 바이바코프 소련 부총리를 저격(1968년)하는가 하면, 국방청년대 회원 히로세 스미오가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는 이유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총리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1975년). 일본민족독립의용군이라는 극우단체는 오사카의 소련영사관에 화염병을 투척했다(1983년).
 
  미국을 상대로 한 테러도 있었다. 일본민족독립의용군은 고베의 미국영사관에 불을 질렀고, 통일의용군의 이카와 다케시라는 자는 미국대사관을 습격했다가 체포되었다(1981년).
 
  천황에 대한 불경(不敬)을 이유로 한 테러도 여러 차례 자행됐다. 대표적인 것이 1990년 1월 18일 발생한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나가사키 시장 암살 미수사건이었다. 모토시마 시장은 쇼와 천황이 사경을 헤매고 있던 1988년 12월 7일 시의회에서 일본공산당 소속 의원으로부터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
 
  이로 인해 그는 우익단체들은 물론 소속 정당인 자유민주당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았다. 이듬해 1990년 1월 18일 극우단체 정기숙(正氣塾) 회원이 그를 저격, 중상을 입혔다. 《문예춘추》 사장 다나카 겐고는 황실 관련 기사에 불만을 품은 우익의 습격을 받았다(1994년 11월 20일).
 
  우익단체들을 폄하하는 기사를 쓴 언론사들도 우익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민족독립의용군은 우익운동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아사히신문》의 도쿄 본사와 나고야 본사에 방화했다(1983년 8월 13일). 신우익운동가 노무라 슈스케(野村秋介)는 1993년 10월 20일 자신이 이끌던 ‘바람(風)의 모임’을 ‘이(虱)의 모임’이라고 조롱한 《아사히신문》 사장실에 난입해 사과를 요구하다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자살했다.
 
 
  가솔린 탱크 실은 트럭으로 총리 관저 돌진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우익은 보수 여당인 자유민주당의 부정부패나 재계(財界)의 지나친 영리추구에 항의하는 테러도 벌였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록히드 사건에 우익세력의 대부(代父) 고다마 요시오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간사이애국자단체간담회 등의 우익단체에서는 고다마에게 할복 권고서를 보냈다.
 
  마에노 미쓰야스(前野光保)라는 우익인사는 경비행기를 몰고 고다마의 집에 가미카제 공격을 감행, 자결했다(1976년 3월 9일). 적보대(赤報隊)라는 극우단체는 리크루트 사건이 발생하자 불법 정치자금을 자유민주당에 제공한 에쓰기 전 사장 집을 습격해 총을 쏘고 도주했다(1988년 8월 10일). 이듬해에는 신우익운동가 노무라 슈스케의 비서 미즈타니 신이치(水谷伸一) 등이 가솔린을 가득 실은 탱크 트럭을 몰고 총리 관저로 돌입하려 했으나 폭발 직전에 저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989년 3월 15일). 1993년 3월 20일에는 우국성화(憂國誠和)라는 우익단체 회원이 자유민주당의 대표적 금권정치인 가네마루 신(金丸信)을 저격했다.
 
  노무라 슈스케는 동료 3명과 함께 “재계의 영리지상주의 규탄”을 외치며 1977년 3월 3일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본부를 점거했다. YP체제타도청년동맹라는 극우단체는 부동산 가격 폭등에 항의해 1987년 1월 13일 안도 다로 스미토모부동산 회장의 집을 습격했다. 이 사건에 자극을 받은 모리 유즈루라는 우익청년은 같은 달 31일 권총을 갖고 스미토모은행을 습격했다. 이런 행동들은 1930년대 일본 우익이 이노우에 준노스케, 단 다쿠마 등을 살해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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