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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6〉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세 일본의 정치경제학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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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신궁 등 신사·사찰 참배에서부터 시작, 에도·오사카·교토 등 둘러보는 관광으로 발전
⊙ 18세기 초 도카이도(東海道) 이용자 연간 100만명에 달해
⊙ 여행문화 확산에 따라 료칸, 유곽 등 등장…, 여행 기획·안내하는 오시(御師)도 출현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이세신궁 참배 행렬을 그린 도쿠가와 시대의 그림. 이세신궁 참배는 일본 관광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근세 초엽부터 독특한 종교·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여행 생태계를 구축해 왔다. 서구와 비교해 무려 200년이나 앞선다. 유럽에서 서민 여행이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다. 철도교통망이 정비되면서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타(他)지역을 여행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훨씬 전인 에도(江戶)시대부터 일반 서민층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여행 대중화가 진전됐다.
 
  여행이 대중화되려면 이동에 필요한 교통망,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시설, 치안(治安)과 희구(希求)의 대상이 되는 명소, 명물 또는 유희(遊戱)와 도락(道樂)거리가 존재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이동의 자유와 노동의 속박에서 벗어난 여가의 시간이 허락되어야 한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봉건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고 제약이 제거됐다.
 
 
  평생에 한 번은 이세참배를…
 
도쿠가와 시대 일본 국내 여권인 ‘쓰코테가타’.
  일본에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원동력을 제공한 것은 종교였다.
 
  일본인들의 여행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은 신사(神社)와 불사(佛寺)에 대한 참배, 소위 사사참예(社寺參詣)가 그 동기이다. 서양의 순례(pilgrimage)와 유사하다. 특히 일본 건국신화의 상징인 이세신궁(伊勢神宮) 참배(‘伊勢參り·이세마이리’라고 한다)가 그 중심에 있었다. 중세 이전에는 황족 또는 귀족들만이 신도 신앙의 본산인 이세신궁 참배 순례를 할 수 있었으나, 에도막부 성립 이후 평화, 번영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러한 욕구가 일반 서민층에게까지 물결처럼 확산되었다. 서민들 사이에 “평생에 한 번은 이세참배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이세신궁 참배는 평생의 목표이자 삶의 의미가 되었다.
 
  에도시대 이전에 일본 서민은 이동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 원칙적으로 이동의 자유는 제한되었지만, ‘쓰코테가타(通行手形)’를 발급받아 합법적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점차 늘어나게 된다. ‘쓰코테가타’란 주요 경계인 세키쇼(關所)나 반쇼(番所)를 통과할 때 필요한 통행증으로 현대의 ‘여권’에 해당하는 신분증명서이다.
 
  무가(武家)의 경우는 소속 번(藩)의 영주가 발행하고, 평민의 경우에는 발행권을 위임받는 소속 마을의 촌장이나 사찰의 주지, 신사의 궁사(宮司) 등이 발행하였다. 에도 초기에는 발행이 엄격히 제한되었지만, 일본의 조상신을 모시는 이세신궁 참배라는 목적은 이러한 증서를 발급받는 데 매우 유효한 명분이 됐다. 민간의 이세참배에 대한 욕구가 워낙 간절하다 보니 막부와 번정부도 민심을 무시할 수 없어 여행에 관대한 정책을 취하게 됐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웬만한 서민도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면 쓰코테가타를 큰 어려움 없이 발급받아 합법적이고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여행 확산에 기여한 참근교대
 
다이묘의 상경을 강제했던 참근교대제는 도로·숙박시설 등 관광 인프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에도시대 여행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참근교대제이다. 17세기 이후 막부는 다이묘(大名) 참근단의 에도 출사(出仕)를 위해 대대적으로 도로망을 정비하였는데, 일반 서민들의 발걸음이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에도와 주요 지방을 연결하는 고카이도(五街道)가 간선도로로 정비되어 교통의 혈맥 역할을 하였고, 가도(街道)를 따라 조성된 슈쿠바마치(宿場町·숙박시설 밀집 지역)는 여행객의 이동 편의를 크게 제고하였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이동을 하였기에 일본 근세를 ‘여행천국’이라 부르는 것일까? 1690년부터 2년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의사로서 나가사키의 데지마상관(出島商館)에 주재하던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Englebert Kaempfer)가 자신의 에도 상경 경험을 기록한 《에도참부여행일기(江戶參府旅行日記)》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 나라의 가도에는 매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있어, 여행객이 몰리는 계절에는 인구가 많은 유럽 도시의 시내와 비슷할 정도로 사람들이 길에 넘쳐난다. 나는 일곱 개의 주요 가도 중 가장 큰 도카이도(東海道)를 네 번이나 왕래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다니는) 이유의 하나는 이 나라의 인구가 많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다른 나라 국민들과 달리 이들이 상당히 자주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중략) ‘이세참배’에 나선 사람들은 정해진 가도의 일정 구간을 이용해야만 한다. 이 참배여행은 특히 봄에 많이 집중되며, 그때가 되면 가도는 참배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나이, 신분, 성별에 관계없이 신앙과 여타 동기에서 엄청난 수의 사람이 여행에 나선다.〉
 
네덜란드 상인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가 작성한 일본 지도.
  일본의 한 학자가 카엠프페르가 도카이도의 모습을 기록한 18세기 초반 겐로쿠(元祿) 시기에 도카이도를 통행한 인원의 규모를 추산해 본 적이 있는데, 그 숫자가 놀랍다. 도카이도 주요 길목에 위치한 하마나(浜名) 호수에는 당시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통행인은 배를 이용해야 했다. 1702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운행한 도하선(渡河船)의 운행일지를 보면 4만4700여 회 왕복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회당 20명 정도의 탑승인원을 가정하고, 우회 육로를 이용한 인원이나, 별도의 전용 선박을 이용한 다이묘 참근단의 인원을 더할 경우 연간 100만이 넘는 인원이 도카이도를 이용한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3000만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인원이 도카이도를 이용해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세신궁의 방문 기록도 이러한 숫자를 뒷받침한다. 1718년 이세신궁 측에서 막부에 올린 상계에는 그해 정월에서 4월 중순까지 42만7000명이 이세신궁을 참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개 농민으로서 농한기에 여행을 떠나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매년 최소한 50만 이상의 참배객이 이세신궁을 방문한 것으로 추산된다. 오늘날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이 연간 250만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300년 전 50만의 이세신궁 방문객 수는 실로 경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기투어와 ‘고(講)’
 
  이세참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의미가 퇴색하고 유희와 유람의 목적으로 변질된다. 한 번 다녀보기 시작하니 유희의 인간(homo ludens)으로서의 본능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질은 서민들의 이세참배 여행 일정의 변화에서 드러난다. 초기에 이세신궁만을 다녀오던 ‘이세왕복형’ 일정이 점차 ‘명소주유(周遊)형’ 일정으로 바뀐 것이다. 이세신궁 이외의 유명 온천이나 유적, 명승지, 에도,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등지의 대도시를 일정에 포함시키고, 일정도 50~70일을 넘나드는 장기투어가 성행하였다.
 
  당시 도호쿠(東北) 지방 사람의 참배여행 기록을 보면 이세신궁에 들러 참배를 한 후, 나라(奈良), 아스카(飛鳥), 교토, 오사카 등 긴키(近畿) 일대의 명소를 돌아보고, 오는 길에 에도에 들러 수도(首都)의 위용과 첨단 도시문명을 체험하고 나서야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장장 3~6개월의 대여정이 드물지 않다. 현대인들도 대개 꿈으로 끝나는 장기여행을 에도 서민들은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여행 대중화가 가져온 몇 가지 변화를 소개하면, 먼저 여행경비 마련을 위한 ‘고(講)’의 유행이다. ‘고’란 본래 종교적 교리나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기도회, 강독회 등을 하면서 일정 금액을 상호부조의 목적으로 적립하는 모임이다. 이세참배가 유행하면서 많은 ‘이세코’가 지역 공동체 단위로 생겨나 적립금을 모으고 추첨이나 투표를 통해 이세참배자를 선발하여 비용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여행에서 얻어진 결과를 기록하고 공유하였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여행에 대한 인식은 명맥이 이어져 지금도 다양한 공부회, 취미회, 동호회가 생겨나 기금을 적립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단체여행을 즐기고 있다.
 
 
  료칸의 등장
 
  료칸(旅館) 문화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초기 형태는 ‘기센(木錢)’이라는 자취(自炊)형 숙박시설이다. 잠자리와 함께 땔감이 제공되는 원시 형태의 숙박시설로, 여행객들은 음식재료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기센에 들러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하였다.
 
  여행객들이 항상 식재료를 휴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고메다이(米代)’를 겸하는 기센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고메다이는 ‘쌀값’이라는 뜻으로 쌀과 간단한 음식을 함께 판매하는 형태의 숙박시설이다. 18세기 초엽이 되면 기센·고메다이는 ‘하타고(旅籠)’로 진화한다. 하타고는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는 본격적인 숙박시설이다. 점차 하타고 사이에 경쟁이 생기면서 보다 고급화하고 특색 있는 로케이션, 음식, 시설, 서비스 등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료칸이 등장한다.
 
  유명 사찰이나 신사는 자체적으로 ‘슈쿠보(宿坊)’라 불리는 숙박시설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세신궁의 경우는 외궁(外宮) 인근에 무려 600채가 넘는 슈쿠보마치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슈쿠보에서의 숙박을 비롯하여 참배, 기념품 구입, 주변명소, 여흥거리 등을 안내하고 주선하는 사람을 ‘오시(御師)’라고 한다. 이세신궁 소속 오시는 차별을 두기 위해 특별히 ‘온시’라고 불렀다. 이들은 해당 사찰이나 신사의 안내서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참배객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현대적 의미의 패키지투어 기획자이자 여행가이드인 셈이다.
 
 
  유곽과 야쿠자
 
  유명 신사나 사찰의 주변에는 몬젠마치(門前町)라고 하는 유흥가가 생겨났다. 몬젠마치는 사설 숙박시설과 함께 연극, 가극, 기예 등을 공연하는 극장, 기념품 판매점, 음식점, 유곽 등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현대의 라스베이거스를 연상하면 되는 유흥 지역이다.
 
  몬젠마치는 번성 일로를 달린다. 여성의 이동 제약으로 주로 남성들로 구성된 참배여행객들은 참배 전까지는 나름 경건함을 유지하다가 참배가 끝나면 소위 ‘쇼진오토시(精進落とし)’라 하여 몬젠마치에 들러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였다. 특히 유곽이 성업하여 이세신궁 주변에 조성된 몬젠마치인 ‘후루이치(古市)’는 에도의 요시와라(吉原), 교토의 시마바라(島原)와 함께 3대 유곽 밀집 지역으로 불릴 정도였다. 후루이치의 전성기에는 유곽이 70여 곳, 여 종사자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기념품 판매점은 커다란 수익을 올리며 상업자본화하였고, 토산품 시장의 형성으로 공예, 식품 등 지역산업 발전이 촉진되었다. 환락가의 번성은 자연스럽게 검은돈의 유통과 자체 치안의 필요성을 유발하였다. 도박 등의 불법 유기(遊技)업, 유곽 경영, 고리대금업, 자경단(自警團) 역할 자임 등을 통해 이권을 챙기는 불량배 무리가 생겨났다. 야쿠자로 불리는 현대 폭력조직은 이 시기의 이러한 도당(徒黨)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참배여행이 대중화되면서 여행의 백미로 여겨지게 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도시 방문이었다. 시골 거주자가 대부분인 서민들에게는 에도, 오사카, 교토 등지의 도시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꿈에 그리던 평생 소원이었다.
 
 
  ‘관광’의 탄생
 
  엄밀히 말해서 여행과 관광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관광’이란 말은 중국 고전인 《역경(易經·周易)》에 나오는 ‘관국지광(觀國之光)’에서 비롯된 말이다. 주역의 관궤(觀卦) 효사(爻辭) 중에 ‘관국지광 이용보우왕(觀國之光 利用賓于王)’이란 구절이 있는데, ‘나라의 빛을 살피고 그로써 왕을 섬기고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에도시기에 들어 통치철학으로서 주자학이 중시되면서 ‘각지의 빛나는 문물, 명소, 전통 등을 찾아 살피는 것’이라는 의미로 ‘관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정착된다.
 
  ‘관광’은 유희활동으로서의 여행(tour)이나 구경(sightseeing)이 아니다. 일본은 이러한 관광의 속성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먼저 발현되었고, 그것이 다시 근대시기 통치기반 강화와 통합의식 함양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여행천국이 아니라 관광을 통해 국가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관광입국(觀光立國)’의 나라라 할 수 있다.
 
  ‘여행(旅行)’이라는 말은 근대화 시기에 도입된 일본 유래의 단어이다. 한국어사전은 여행에 해당하는 고유어를 ‘나그넷길’로 제시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처없는 유랑(流浪)의 의미만 느껴질 뿐 경험, 발견, 유희, 휴식, 재충전이라는 목적 지향의 행위인 ‘여행’과는 거리가 있다. ‘관광’이라는 말은 일본이 근세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재생산된 단어이니 한국 전래의 전통에서 그 연원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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