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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들여다보기

거트루드 벨, 이라크를 만든 여인

“카툰(여왕)에게 물어보시오!”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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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류 탐험가로 이름 떨쳐… 1차 대전 때에는 영국군 정보장교로 활동
‌⊙ 이라크 관련 백서 작성, 이라크 국경 획정, 헌법 제정, 국립박물관 설립 등 참여
⊙ ‘이라크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 떠안아야 할 부담과 비용을 거부하는 거친 부족들로
    구성된 나라’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중동 지역을 탐험하고 이라크 건국에 기여한 거트루드 벨.
  1996년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은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를 보면 아라비아 사막을 지나던 영국 군인들이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행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 중 한명이 “저 산들을 통과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자 다른 군인이 “벨의 지도에 길이 나와”라고 말한다.
 
  영화에 나오는 벨의 지도는 거트루드 마거릿 로디안 벨(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이 만든 지도를 말한다. 벨은 여자였다. 영국 정보장교로 아랍군을 이끌고 오스만튀르크와 싸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여성판, 사막의 여왕 등 다양한 별명을 지닌 벨은 영국이 이라크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관리이자, 정보원, 고고학자, 탐험가다.
 
  벨은 1868년 7월 14일 더럼 지방의 워싱턴 뉴 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제철업자이자 자유당 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진보적인 자본가였다. 할아버지가 준남작(baronet)의 작위를 부여받았고, 아버지가 작위를 세습하였기에 경(sir)으로 불리었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런던 퀸스 칼리지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1888년 20세 때 여성 최초로 현대사를 전공하여 학사 취득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당시 옥스퍼드는 여성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기에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하였다.
 
  벨은 옥스퍼드를 떠나 당시 평범한 여성의 삶이라고 볼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벨은 6개월간 페르시아어를 공부한 후 1892년 주이란 대사로 봉직하고 있던 이모부를 만나기 위해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젊은 외교관 헨리 카더건을 만났다. 문학을 좋아하였던 둘은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벨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알프스에 이름을 남기다
 
1900년 레바논 쿠벳 두리스 유적지 앞의 거트루드 벨.
  이란에서 귀국한 후 벨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등산을 즐겼는데, 여성 등산복이 없던 시절, 치마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등정을 할 정도였다. 1899년 프랑스 알프스 라메주 정상에 올랐고, 스위스 알프스 엥겔호른 지역 9개 봉우리 중 7개 정상에 올랐다. 그중 봉우리 하나는 벨의 등정을 기념하여 그녀의 이름을 따 ‘거트루드봉’으로 부른다.
 
  벨의 강인함은 1902년 4274m 높이의 핀스터아르호른 등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상을 수백 미터 앞두고 눈보라를 만나 꼼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무려 53시간 동안 밧줄에 의지하여 버틴 것이다. 손발에 동상을 입긴 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2년 후 마터호른 등반에 성공하였다.
 
  1900년 벨은 다시 중동(中東)을 여행하였다. 테헤란에서 사귄 친구이자 예루살렘 주재 독일 영사의 부인인 니나 로젠의 초청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아랍어, 히브리어, 터키어를 공부하였고 승마를 배웠다. 무신론자(無神論者)로 종교를 경멸하였던 그녀는 시리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드루즈 지역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여타 서구인들과 달리 지역민들을 존중하고 아랍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벨은 어려움 없이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다는 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6월 영국으로 돌아온 벨은 1903년 인도에 갔다. 훗날 이라크에서 상관으로 모시게 될 퍼시 콕스 영사를 만나게 된다. 콕스로부터 중동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 천성적인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아라비아 반도 여행을 결심한다.
 
 
  영국군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
 
  아라비아 사막(Arabia Deserta)! 당시 영국인들은 리처드 버튼 경, 찰스 다우티, 기포드 팔그레이브, 윌프리드 블런트의 아라비아 여행기에 매료되었는데 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벨은 거의 2년에 한 번씩 모두 다섯 차례나 중동을 드나들었다. 고고학에 매료된 벨은 발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꼼꼼하게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죽을 때까지 그녀가 남긴 편지와 일기는 1600여 개, 사진은 7000여 장에 달한다. 이 귀중한 역사자료는 현재 뉴캐슬 대학에서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
 
  아라비아 여행을 통해 벨은 믿을 수 있는 아라비스트, 즉 아랍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벨을 스파이로 의심했다. 벨이 험한 곳을 홀로 다닌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여정에는 무장경비병, 하인, 요리사가 동행하였다. 1914년 벨은 2400km에 달하는 아라비아 중부 사막 지역을 낙타를 타고 탐험하여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장창립자 메달을 받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군은 아라비아를 잘 아는 벨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로써 벨은 영국군이 채용한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가 되어 카이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것은 없지만, 만일 처칠이 성급하고도 무모하게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 갈리폴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벨 소령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독일과 손을 잡을 것을 우려한 처칠은 선제공격을 시도하였다. 1915년 4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약 9개월간 이스탄불로 진입하는 바닷길인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오스만튀르크,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벌인 전투는 5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남긴 채 영국과 프랑스의 후퇴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벨이 사랑하는 남자 리처드 다우티-와일리 중령이 전사했다. 다우티-와일리 중령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남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벨은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남았다.
 
 
  9개국에서 사용하는 아랍 삼색기
 
1921년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거트루드 벨, T.E.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
  만일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더라면 영국이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대항하라고 아랍인들을 선동하여 규합하는 데 벨이 아랍전문가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스만튀르크 군이 무력(無力)하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제국 지배 아래에 있던 아랍인들의 민족감정을 이용하여 아랍인들이 오스만튀르크를 공격하는 데 선봉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아랍인들에게 독립 아랍국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영국을 도와 아랍 항쟁을 이끈 히자즈 지방 메카의 아랍 지도자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도 그중 하나였다. 파이살은 12세 아랍 소년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것을 보다 울분을 토하며 튀르크 상관에게 격렬하게 대들었다가 한때 투옥되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잔혹함에 분노한 파이살은 영국의 도움으로 반(反)오스만 아랍 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아랍 항쟁군은 영국인 마크 사이크스가 만들어준 적색, 흰색, 검은색으로 된 삼색기를 들고 싸웠다. 이 깃발은 오늘날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을 포함하여 아랍 9개국의 국기의 바탕이 되었다.
 
  아랍인들의 독립국의 범위는 영국의 계획과 달랐다. 아랍 전 지역을 독립국 영토로 생각한 아랍인들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항쟁 이전인 1916년에 러시아와 함께 1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영향권에 둘 지역을 나누어 정하였다. ‘사이크스-피코 협약’이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국제 공동관리 구역으로 두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은 그 외 아랍 지역을, 러시아는 터키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로 했다. 영국이 아랍인에게 약속한 아랍 독립국은 영국의 힘이 미치는 지역으로 한정됐으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은 애초부터 제외된 상태였다.
 
  바스라를 거쳐 1917년 바그다드로 돌아온 벨은 총영사로 근무 중이던 콕스를 보좌하여 중동문제 비서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그다드는 벨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벨은 모든 아랍인이 하나가 되는 아랍국을 생각한 적이 있으나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여러 개의 아랍국가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사이크스가 프랑스의 피코와 협의한 것을 뒷받침하는 작업을 한 셈인데, 정작 사이크스는 벨을 싫어하였다.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벨을 이렇게 평했다.
 
  “오만하고, 과장이 심하고, 밋밋한 가슴을 지녔고, 남자 같고, 세계여행이나 하고 다니고, 엉덩이나 흔들고, 실없는 말이나 하는 바보같이 멍청한 수다쟁이, 이 빌어 처먹을 것!”
 
  그도 그럴 것이 벨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두고 사이크스가 무능하다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사이크스는 극심한 반아랍 정서를 지닌 사람이었다. 벨은 사이크스를 1905년 하이파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사이크스는 아랍인을 “겁 많고 병들고 게으른 동물”로 비유하여 벨을 크게 놀라게 했다. 벨은 사이크스와 달리 아랍인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아랍 지역을 여러 국가로 나눴다는 점에서 벨과 사이크스는 초록동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아랍인에 대한 감정은 사뭇 달랐다.
 
 
  시아와 수니
 
1921년 바스라에 있는 영국대표부에서. 이븐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1), 퍼시 콕스(2), 거트루드 벨(3).
  제1차 세계대전 승리를 예감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국가를 세울 것을 계획하였고, 1920년 11월 11일 국제연맹은 영국에 이라크를 보호통치령으로 위임하였다. 전통적으로 아랍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라크는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만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새로운 이라크는 북부까지 포함한 국가가 되었다.
 
  벨은 시아파 무슬림이 다수인 이 지역의 통치자는 수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수니를 시아보다 더 문명인이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시아는 종교적 광기를 지닌 사람들로 위험하고 전(前)근대적이라고 보았다. 1920년 10월 3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벨은 시아파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행사하여 매 순간 정부가 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가정해 보신다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교황과 시아파 종교지도자를 단지 바보 같은 노인네들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아직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벨은 결론적으로 시아보다 소수인 수니파 무슬림이 실권을 갖는 새로운 국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수니 무슬림들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종교지도자가 다스리는 신정(神政)국가가 설 것입니다. 이는 진정 사악한 일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다
 
파이살 이라크 국왕(오른쪽에서 두 번째)과의 피크닉에 나선 벨(가운데).
  벨은 이라크라는 나라가 문명국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이라크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 떠안아야 할 부담과 비용을 거부하는 거친 부족들로 구성된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대중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내부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벨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백서(白書)를 쓴 여성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행정보고서》라는 제목의 백서는 당시 런던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메소포타미아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려는 노력보다 “개가 뒷다리로 섰다”면서 여성이 백서를 썼다는 데 놀라는 언론의 반응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1921년 8월 23일 영국 정부는 벨의 강력한 건의에 따라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과 싸웠던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벨은 새로운 나라 이라크를 위한 헌법을 쓰는 데 일조하면서 왕의 조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의 국경선을 그었다. 벨은 이라크의 국경을 정할 당시 모습을 1921년 12월 4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사무실에서 하일에서 온 신사와 아니자 부족의 지도자 파하드 벡의 도움으로 이라크 남쪽 사막지대 국경선을 그리며 아침시간을 잘 보냈습니다. 파하드 벡이 사막에 대해 제가 잘 알고 있다고 믿어서 부끄러웠습니다. 콘월리스가 그에게 부족의 경계를 묻자 그는 ‘카툰(여왕)에게 물어보시오. 그녀가 잘 아오’라고 답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파하드로부터 아니자 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물을 모두 알아내고 하일에서 온 사람에게서는 샴마르 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물을 전부 파악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리저리 꽤 합리적으로 국경을 확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습니다.”
 
  2015년 벨의 삶을 영화화한 〈사막의 여왕(Queen of Desert)〉 개봉에 앞서 벨로 열연한 니콜 키드먼은 “벨이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경을 획정하였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라크를 만들고 아랍인들에게 ‘여왕’으로 불린 벨이 이라크에 남긴 가장 큰 선물은 국립박물관이다. 당시 서구 고고학자들은 중동에서 발굴한 유물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을 관행으로 여겼다. 벨은 고고학 유물이 전부 고고학 발굴지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법으로 구체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왕에게 간청하여 고대 유물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26년 6월 16일 이라크 국립박물관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벨 이후의 이라크
 
1921년 카이로회의. 둘째 줄 왼쪽이 벨(원 안), 앞줄 가운데가 윈스턴 처칠.
  벨은 1926년 7월 11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살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라크 건국 이후 정치적으로 크게 할 일이 없었고, 1923년 자신의 상관이자 후견인이었던 콕스가 떠난 이후 런던이나 주변의 영국 관료들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우울증을 앓아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
 
  1921년 8월 28일 일기에서 벨은 이라크라는 나라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이라크를 사랑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이라크는 지금 아랍 수니, 아랍 시아, 쿠르드 세 파로 나뉘어 혼란을 겪고 있다. 1921년부터 2003년까지 80여 년 동안 이라크는 소수 수니가 다수 시아를 통치하는 나라였다. 벨은 셋 중 둘이 힘을 합하여 하나를 제어하는 영국의 통치 원칙에 충실하였다. 아랍 수니와 쿠르드 수니가 연합하여 수니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아랍 시아를 다스리고, 아랍 수니와 시아가 아랍이라는 이름 아래 힘을 모아 쿠르드를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아랍이라는 언어적 정체성도 수니와 시아라는 종교적 정체성도 이라크를 평온한 국가로 만들지 못하였다. 이라크 지방과 메카가 위치한 히자즈 지방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당시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자즈 출신 파이살을 굳이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한 것 또한 패착이었다. 왕정은 1958년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되었다.
 
  어쩌면 오늘날의 이라크는 벨의 실패작이라기보다는 벨의 말마따나 시민의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폭력적인 사람들이 권력만을 탐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1921년 2월 17일 벨이 파하드 벡과 나눈 대화는 그러한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파하드 벡은 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관료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영국과 같다고 생각하나 봅니다만 우리는 한참 뒤처져 있습니다. 이 나라는 당신 나라처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벨은 이에 “그래서 저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길 바라는 겁니다”라고 하자 파하드 벡은 “예. 그러나 당신이 돌보아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벨이 옆에서 서서 지켜보겠다고 하자, 영국이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한 파하드 벡의 모습에서 스스로 결연한 의지 없이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쉽게 알 수 있다.
 
  80여 년 동안 권좌를 무력으로 지키다 아랍 시아에 권력을 빼앗긴 아랍 수니가 IS 극단주의자로 되어버린 오늘날 이라크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바그다드의 바브 알-샤르지에 묻혀 있는 벨이 그토록 싫어했던 시아가 장악한 이라크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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