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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5〉

‘된장(미소)’으로 본 근대 일본의 정치경제학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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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戰國)시대 병사들의 전투식량으로 발달…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두 콩 재배와 미소 제조가 활발했던 지역 출신
⊙ 센다이미소, 에도시대에 품질과 신뢰로 시장 석권
⊙ ‘미소의 정치경제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경쟁과 자율성’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 에도에 있던 센다이번저. 번저에 머물던 센다이 사람들이 자기 고향의 미소를 에도에 퍼뜨렸다.
  일본에서 미소(味噌·일본 된장)가 제조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과 한반도를 경유해 누룩 사용법이 전래된 8세기 나라(奈良)시대부터다. 이후 미소는 가마쿠라(鎌倉)와 무로마치(室町)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제법과 물량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16세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다.
 
  전쟁이 일상화된 시대를 맞아 다이묘(大名)들은 상시 전투태세와 원정(遠征)에 대비한 병량(兵糧) 정비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주식인 쌀은 생쌀을 휴대하다가 후에는 생쌀을 쪄서 말린 ‘호시이이(干し飯)’가 개발되어 보급되었다. 수개월 이상 상온 보존이 가능하고 끓는 물만 부으면 바로 밥처럼 먹을 수 있는 즉석밥이었다. 밥만 먹고 싸울 수는 없다. 나트륨 등 필수 미네랄과 ‘맛’을 제공하는 반찬거리도 필요하다. 이에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미소다. 다량의 소금을 사용해 콩 또는 쌀을 원료로 발효시킨 미소는 ‘호시이이’와 짝을 이뤄 ‘맛’과 ‘영양’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최고의 전투식량으로 각광받게 된다.
 
  전투식량의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미소는 점차 전국의 다이묘들이 가장 공을 들여 제조와 비축에 힘을 기울이는 전략물자가 됐다. 전국시대 패권을 놓고 경쟁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3인 모두 콩 재배와 미소 제조가 활발하였던 지역의 출신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현대 일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신슈미소(信州味噌)’도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이 시기에 기반을 다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부국강병의 꿈이 담긴 ‘센다이미소’
 
센다이번의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
  국가안보 차원에서 미소가 취급되던 이 시기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미소는 ‘센다이미소(仙台味噌)’다. 센다이번(仙台藩)의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1567~1636년)는 센다이를 전국 최강 번의 하나로 이끈 명장(名將)이다. 그는 번 내의 운하를 정비하고 농지를 개척하는 한편, 조카마치(城下町·성 주위의 상업지구)에 전국 각지에서 능력 있는 상인, 기술자, 학자를 불러 모아 거주시킴으로써 경제와 문화의 융성을 도모한다. 부국강병책을 가장 성공적으로 추진한 다이묘 중의 하나인데, 그의 일화 중에서 센다이미소와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미소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뜬 마사무네는 품질, 영양, 보관성이 우수한 미소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마사무네의 목표는 성이 포위되어도 1~2년을 외부의 보급 없이 성내에서 자급자족하며 농성(籠城)하는 방어력의 획득이었다. 마사무네는 이를 위해 조슈마카베군(常州真壁郡·현재의 이바라키현) 출신의 미소 제조 쇼쿠닌(職人·전문기술자) 마카베야이치베(真壁屋市兵衛)를 연공(年貢) 현미 백석(百石)에 초빙하여 미소 제조를 의뢰한다. 작은 번의 오모테다카(表高·영지의 표준 미곡 산출량)가 1만 석부터 시작하는 점을 감안할 때, 100석의 연공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마사무네는 마카베야이치베의 스카우트와 함께 성(城) 아래에 ‘오엔소구라(御塩噌藏)’를 건립하도록 지시한다. 오엔소구라는 미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방(工房)으로 일본 최초의 공업적 미소 생산시설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마카베야이치베는 고메미소(米味噌) 양조법에 능한 기술자였다. 쌀과 콩을 함께 사용하는 고메미소는 콩의 단백질과 쌀의 탄수화물을 동시에 섭취할 수 있어 전투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마카베야이치베는 쌀누룩을 활용해 염도를 높이면서도 발효가 진행되는 양조법(釀造法)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는 미소의 보존기간을 크게 연장시켰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전략물자를 개발하고 대량으로 생산한 것이다(일본의 미소는 한국의 된장과 달리 자연발효 메주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배양된 누룩균을 사용하여 발효시킨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된장 제조 공정을 술과 마찬가지로 ‘釀造’라고 표기한다).
 
  센다이미소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라는 말이 있다. 조선에 출병한 각 번의 군대가 가져온 미소가 여름철 고온다습한 환경에 부패하여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마사무네 휘하의 군대가 소지한 미소만은 멀쩡하게 맛과 영양이 살아 있어 이를 타 지역의 군대에도 나눠준 것이 계기가 되어 센다이미소가 일약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오엔소구라의 건립시기와 시기적 불일치가 있어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센다이미소의 전투식량으로서의 우수성이 당시부터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에도시대의 개막과 미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하여 에도(江戶)막부의 평화시기가 도래하자 센다이미소는 새롭게 도약한다. 일본인들의 식생활은 가마쿠라시대부터 ‘일즙일채(一汁一菜·한 가지 국에 한 가지 반찬)’가 보편화되었는데 국은 대개 미소시루(みそ汁·된장국)를 의미하였다.
 
  에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 본거지를 두기로 정하기 전까지 한적한 바닷가의 깡촌이었다. 어느 날 수많은 무사와 상인과 노동자가 물밀듯 밀려들어 오면서 에도인들의 소비 물자의 상당 부분은 외부에서 조달되는 의존형 경제가 된다. 술과 간장 등 역사와 전통을 요하는 생필품과 기호품은 주로 긴키(近畿·오사카와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쪽에서 유입되었지만, 미소만큼은 도쿠가와의 출신지인 미카와노쿠니(三河国·현 아이치현 동부) 지역에서 생산된 ‘산슈미소(三州味噌)’가 주로 반입되었다. 에도막부 수립으로 대량 이주해 온 미카와노쿠니 출신자들이 많은 탓에 그들의 ‘고향의 맛’인 산슈미소가 에도 미소시장의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참고로 산슈미소는 현재 나고야(名古屋) 명물로 알려진 핫초미소(八丁味噌)의 원형이다.
 
  18세기 들어 에도가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면서 미소의 수요가 더욱 늘어난다. 당시 에도에는 도시 형성 과정의 특성상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았으며, 서민 가옥인 나가야(長屋)는 취사가 금지되어 매식(買食)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인구가 많았다. 미소시루는 간편한 한 끼 해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조미료이자 영양 공급원이었다. 무가(武家)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즐겼다는 ‘오채삼근(五菜三根) 미소시루’와 장어에 미소를 발라 구워 먹는 ‘우나기 미소카바야키’ 등 미소를 활용한 고급요리가 유행했다. 바닷길에서 내륙 수로로 연결되는 선착장 인근에는 미소 도매점이 성업했고 에도 거리 어디를 가도 미소를 판매하는 소매점과 행상이 없는 곳이 없었다.
 
 
  품질과 신뢰로 에도시장을 뚫다
 
  센다이미소의 인기몰이는 이러한 도시화와 물자 유통망의 발달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로서 3대 웅번(雄藩)의 하나였던 센다이번은 에도에 총 7개소의 ‘에도한테이(江戶藩邸·에도에서의 거처)’를 두고 3000명에 이르는 근번(勤番) 인력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에도에서 유행하던 산슈미소나 아마미소(甘味噌·단맛이 나는 된장)에 만족하지 못하던 센다이 번사(藩仕)들은 해로가 뚫리자 고향의 미소를 날라다 먹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내부용으로 소비하다가 점차 인원이 늘자 아예 에도에 생산공장을 차린다. 현재의 시나가와(品川)구 히가시오오이(東大井)에 센다이번의 시모야시키(下屋敷·실무직원들의 거처)가 있었는데 센다이번은 이곳에 에도판 ‘오엔소구라’를 짓고 센다이에서 수송해 온 콩과 쌀로 미소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가시오오이는 도쿄만 입구에 가까운 강변 지역으로 원료를 센다이로부터 해로로 운반하여 집하(集荷), 처리하기 좋은 입지이다. 센다이번의 에도 미소 공장 건립은 해운망의 발달에 힘입어 재료 산지와 소비시장 인근의 제조공장을 연결하는 초기 형태의 원격지 생산체제를 구축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직도 그 자리에는 센다이미소양조소(仙台味噌釀造所)라는 이름의 회사가 400년 전통의 센다이미소 제조, 판매처로서 영업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체 소비 후 남는 물량을 일부 도매업자들에게 부정기적으로 출하하던 수준이었으나 뛰어난 품질과 번주(藩主) 직영 시설에서 출하된다는 프리미엄과 신뢰성이 더해져 수요가 점점 늘자 번 정부도 직영 사업으로서의 상업적 관점에 주목하고 판매 증대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당시 에도에서는 ‘미소’ 그러면 십중팔구 ‘센다이미소’를 지칭할 정도로 센다이미소는 높은 지명도를 자랑하는 미소의 대명사가 된다.
 
  센다이미소가 에도의 미소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보아 세 가지 측면이다. 첫째, 단맛이 적은 담백함이 당시 에도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간토(關東)나 도호쿠(東北) 지방 출신자들의 입맛에 잘 맞았다는 점, 둘째 ‘오엔소구라’ 건립 이래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고품질의 미소를 안정적으로 출하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에도와 비교적 가까운 동북(東北) 지역의 원료를 해로를 이용하여 단기간 내에 운송함으로써 재료의 확보와 가격 경쟁력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현대의 경제 논리에 비추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성공 요인이다.
 
 
  신시대, 신기술로 승부하다
 
센다이미소는 시장점유율은 많이 떨어졌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으로 번이 폐지됨에 따라 히가시오오이의 미소 공장은 센다이 번주로부터 센다이의 호상(豪商)인 야기(八木) 가문에 인수되어 민영화된다. 비슷한 시기 사사쥬(佐々重)의 창업(1854년)을 비롯 여타 민간업자도 미야기(宮城)현과 도쿄 일대에 설립되어 미소시장에 뛰어든다. 본격적인 근대화 추진에 따라 산업화가 진행되고 신기술이 속속 도입되는 시대였다. 누가 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고 깨어 있느냐가 생존과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미소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5년 일본육군양말창(日本陸軍糧秣廠) 소속의 가와무라 고로(河村五郞)가 속양법(速釀法)을 개발한다. 가열과 냉각 등 과학적 온도 조절로 누룩균의 활성화를 컨트롤해 미소의 양조기간을 1년 이상에서 수개월로 단축시키고, 물량과 코스트 면에서 비약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신기술이었다. 이 기술은 센다이미소의 양조법과 유사한 면이 있어 센다이미소 제조업체들에 의해 적극 채용된다. ‘속성으로 만든 센다이미소(早づくりの仙台みそ)’라는 의미에서 ‘하야센(早仙)’으로 불린 염가형 센다이미소가 대량으로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하자 센다이미소는 간토, 도호쿠의 시장을 석권하며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한발 앞선 신기술의 채용이 달리는 말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영원할 것 같던 센다이미소의 독주(獨走)도 한순간에 위기를 맞게 된다. 1944년 나가노현(長野県) 출신의 미소 제조업자인 다나카 에이조(中田栄造)가 보온법(保溫法)을 가일층 발전시켜 불과 한 달 만에 공장 출하가 가능한 신기술을 개발한 것이 계기였다. 이 공법은 예전부터 향토 미소로 독자적 수요를 확보하고 있던 나가노 지방의 신슈(信州)미소 생산에 적용되었고 종전 후 극심한 물자난에 시달리던 일본 시장에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미소를 공급할 수 있었던 신슈미소는 순식간에 전국 시장점유율을 30%로 끌어올리며 급속히 시장을 파고들었다.
 
  가격경쟁력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 센다이미소는 속수무책으로 점유율이 하락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물자난이 해소되고 경제 부흥의 시기가 찾아왔지만 한번 신슈미소에 길든 일본인들의 입맛은 돌아올 줄 몰랐고 신슈미소는 전국 점유율 40%를 차지하는 넘버원 미소의 자리에 등극한다. 신기술에 허를 찔린 센다이미소는 여전히 3대 미소의 하나로 꼽히며 옛 명성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나고야의 핫초미소에 2위 자리를 내주는 등 미소의 대명사로서 에도시절에 누리던 절대적 지명도와 인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경쟁과 자율성이 꽃피운 미소 문화
 
  ‘미소의 정치경제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경쟁과 자율성’이다. 번과 번이 서로 경쟁했고 각 번은 막부에 대해 일정한 의무만 이행하면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속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이중적 구조하에서 각 지방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성장한 것이 일본의 미소 문화다.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원리로 설명한 바 있다. 미소의 예처럼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시기에 ‘영토’와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경쟁본위의 환경 속에서 도전과 응전의 반복을 통해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역동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배양되고 체화된 ‘경쟁원리에 대한 이해, 실용주의적 현실감각, 변화에 대한 감수성, 신기술에 대한 수용성’ 등은 지금도 일본 사회에 면면히 이어져 일본 경제의 경쟁력을 담보하는 사회심리적 토대가 되고 있다. 강력한 유교적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이 갖지 못했던 사회적 역동성이기에 그 시대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는 현대의 한국이 진지하게 곱씹어봐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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