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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브렉시트와 나토

EU는 프랑스‑독일 중심, NATO는 미국‑영국 중심으로 간다

글 : 김국헌  前 국방부 군비통제관·예비역 육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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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안보의 기본은 미국과의 동맹… 대처 전 총리는 군사적으로 독일을 경계
⊙ 영국은 지상, 항공, 해저에 걸치는 핵 전력Triad을 건설… SSBN 4척 보유
⊙ 국제분쟁에서 역할분담… 결정적 작전은 미군 주도, 뒷수습은 영국군 맡아

金國憲
1949년생. 육군사관학교(28기)·서울대 철학과 졸업, 오하이오주립대 석사,
런던대 킹스칼리지 군사학 박사 / 국방부차관 보좌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21세기 국방개혁 연구위원,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참석,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역임 / 저서: 《국가전략의 이해》 《한 군인 40년의 지향》
《헌팅턴의 군인과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역서)
2011년 3월 22일 리비아 공습을 지휘하고 있는 나토 국제안보지원군(ISAF) 겸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사령관(오른쪽)이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회담을 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 영국 데이비드 리처드 합참의장(왼쪽)과 런던 다우닝가를 걸어가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영국이 실제 EU를 탈퇴할 때까지 2년에 걸쳐 유럽 각국과 복잡한 조정절차를 거쳐야 한다. 미국은 가장 충실한 파트너였던 영국을 대체할 새 파트너를 모색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유럽을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는 물음에 키신저의 유명한 답이 나왔다. “이제 그 답은 독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브렉시트의 정치적·법적 의의를 더 냉철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마거릿 대처, 독일 중심의 경제블록 반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사진은 1983년 5월 런던에서 열린 보수당 기자회견에서 연설하는 대처 총리.
사진=뉴시스
  먼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의 관계다. 1980년대 레이건의 대(對)공산권 승리가 굳어짐에 따라 그때까지 미·영의 주도하에 결속되어 있던 NATO가 이완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특히 프랑스-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세력이 미·영과 거리를 두고 유럽 독자성을 강화하려는 데서 영향을 받았다.
 
  “유럽인에 의한 유럽” 주장은 프랑스와 독일이 공통이익을 발전시키면서 가속도를 얻게 된다. 독일은 통일되더라도 유럽을 주도하기보다는 유럽의 한 부분으로 그 역할을 제한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거부감을 줄이려 꾸준히 노력했다. 프랑스도 독일 통일이 불가피하다면 독일을 유럽연방의 틀 안에 묶어둠으로써 독일의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이 중심이 되어 EC(EU의 전신)를 일종의 배타적 경제블록, 나아가 유럽연방(Federal Europe)으로 끌고 나가려는 데 대해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대처는 EC는 기본적으로 주권 국가 간의 적극적 협력관계에 기초해야 함을 분명히 하고, 각국이 각자의 독자성을 가질 때 유럽은 전체로서 보다 강력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대처는 레이건의 바통을 이은 부시에게 결국 영·미 특수관계만이 NATO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기둥임을 강조하고, 고르바초프에게는 통일된 독일이 소련에 큰 부담이 될 것임을 경고하면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에게는 독일을 제어할 수 있는 영국-프랑스(Angro-Franco) 제휴를 제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처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일의 콜 총리는 특유의 결단력을 발휘하며 통일의 결정적 전기를 잡자 부시, 고르바초프의 동의를 얻고, 미테랑을 침묵시키며 통일을 성사시켰다.
 
  브렉시트 이후 독일이 영국의 대체가 될 수 있다는 키신저의 생각은 지나친 것이다. 키신저는 독일 태생으로 독일이 미국의 파트너가 되기를 희망했을 수 있으나, 유럽인의 독일 경계는 뿌리가 깊다. 독일은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이후 아우슈비츠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 학살에 사죄하는 등, 원죄를 씻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으로 독일 포비아를 완화하다가 기회를 잘 잡아채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때문에 독일은 언제나 매우 신중하다. 독일이 미국의 파트너가 된다면 프랑스는 오히려 독일에 대한 유럽의 경계(警戒)를 이끌 것이다.
 
 
  미국의 유럽회귀 정책은 실현 불가능
 
  KGB 출신 푸틴의 등장과 이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제2의 신 동서냉전을 가져왔다. 러시아를 상대하는 데 있어 영국의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 냉전시대 노르웨이와 영국은 소련 해군을 북해에 봉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시아 전환 정책이 유럽 중시 정책으로 전환되리라 생각하는 것도 조급하다. 21세기에 있어 미국의 결정적 상대는 중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냉전에서 소련을 붕괴시킬 때도 미국의 대소 전선은 일관되고 강인했다. 유럽은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지 미국이 개입해서 봉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유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은 주로 외교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경계는 군사와 경제로 이루어진다. 트럼프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양해는 1979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개방 이래 중국의 성장에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G2로 등장한 중국은 태평양에서 공공연히 미국 해군에 도전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미국을 상대로 남중국해에서 영토 주권 문제가 발생한다면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쳤으며, 한반도 사드 체계에도 단호하게 반대했다. 동시에 “대만 독립 분열 세력에 대해서는 13억 인민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대만 정체성 강화 움직임에도 경고했다. 미국은 더욱 아시아 전환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유럽 중시로 돌아갈 여력이 없다.
 
  영국은 국가정책을 국민투표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국민투표는 정치적 기능과 의의에 그친다. 국민은 투표로 의회에서 다수당을 선택하며, 의회에서 법으로 국론을 정한다. 이것이 영국의 헌정질서다. 국민투표 결과는 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지 않다며 의회가 이번 국민투표 결과를 묵살할 수 있다는 과격한 주장도 나온다.
 
  브렉시트에 찬성한 1740만명의 뜻을 뒤집기 위해서는 재투표를 공약으로 내세운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첨예하게 국민 여론이 대립하는 경우에 행하는 국민투표를 안보문제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트라이던트(Trident) 핵잠수함을 구매하는 것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인가? 포클랜드 전쟁을 치르는 것을 국민투표로 결정할 것인가?
 
 
  포클랜드전 때 미국과 영국의 정보-군수 협력
 
1980년 취역한 영국의 인빈서블(Invincible)급 경항공모함 1번함 인빈서블(2만톤). 포클랜드 전쟁에서 인빈서블은 함재기인 해리어 등을 통해 그 가치를 입증했다. 당시 앤드루 영국 왕자는 시킹(Sea king)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전했다. 사진=구글이미지
  안보 정책의 기본은 주로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처칠과 루스벨트는 전후 세계 질서를 구상하는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을 발표했다. 후일의 유엔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 여기서 탄생했다. 영국은 브렉시트의 충격이 조정될 때까지 나토에 더 충실하는 것이 필요하다.
 
  냉전시대의 나토가 16개국이었을 때나 확대된 지금이나 나토는 미국과 영국이 중심이 되어 움직인다. 냉전시대 나토 3개의 주요 사령부 중 하나인 해협사령부는 영국 해군 제독이 지휘하였으며, 독일에 주둔하는 라인강변 주둔 영국군(BAOR·British Army of the Rhine)은 미국의 5군단, 7군단과 함께 나토 지상군의 주력이었다. 영국은 지상, 항공, 해저에 걸치는 핵전력(Triad)을 건설하였고, 지금도 탄도탄 발사 핵잠수함(SSBN) 4척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은 호주, 뉴질랜드와 함께 전 세계에 걸친 미국의 통신감청망을 지탱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협조는 레이건과 대처 당시에 최고조에 달했다. 1986년 서베를린 폭탄 테러에 카다피가 배후에 있음이 드러나자 미국은 리비아를 공습하였다. 카다피는 겨우 폭살을 피하였다. 미국은 영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F-111 전폭기가 리비아 공습에 참가하는 데 동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처는 야당의 반대와 내각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요구를 수락했다. 미국의 요구는 유엔 헌장에서 허용하는 ‘정당방위’로서, 포클랜드 전쟁 당시 미국의 지원을 생각해서라도 이를 수용하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포클랜드는 영국이 개척한 식민지로서 주민이 거의 다 영국인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유엔 헌장에 명시된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영국에 귀속됨은 다툴 수 없다는 것이 대처의 명분이었다. 그는 포클랜드 문제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법의 원칙을 견지하고, 또한 서방의 이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강하게 내세웠다. 포클랜드의 원상회복을 위한 대처의 결정은 신속하고 단호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앤드루 둘째 왕자가 항모 인빈서블에 탑재된 헬기 조종사로 참전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남미 여러 국가와의 관계상 일방적으로 영국에 동조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특히 헤이그 국무장관은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는 왕복외교를 통하여 해결을 모색했으나, 레이건 대통령의 영국에 대한 지원 약속은 확고했다.
 
  영국에서 포클랜드에 이르는 원정은 지구의 반을 돌게 되는 장거리 원정이다. 아르헨티나로부터 포클랜드는 670km에 불과하지만, 영국으로부터는 1만2832km나 떨어진 거리였다. 미국은 이 전 과정을 정보망으로 호위했으며, 특히 미국의 적시 군수지원은 결정적이었다. 미국은 영국군에서 요청이 오면 어떻게 해서든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군에서 찾아내 제때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했다.
 
 
  리비아 공습 때 영국 주둔 미군기 출격 허용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영국군 장병. 사진=연합뉴스
  한미연합훈련을 하게 되면 보게 되는 것이지만, 미군은 필요하다면 텍사스의 창고를 뒤져서라도 너트 볼트 하나라도 찾아서 공급한다. 이러한 군수 지원 체계는 세계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다. 러시아도 어림없다. 영국은 이러한 미국의 막대한 정보와 군수 지원에 힘입어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다. 영국과 미국의 동맹이 실전에서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이처럼 명백하게 보여준 예가 없다. 1986년 4월 리비아를 공격하는 미군 전폭기가 영국에서 출격하는 것에 동의한 것은 영국으로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영국에서 출격한 미국 전폭기가 프랑스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스페인은 미군기가 영공을 통과하는 것은 허용하나 이 사실이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상 수용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미군기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리비아를 공격했다.
 
  대처는 언론이 리비아 응징의 당위성보다 폭격을 받은 리비아인의 참상을 과장 보도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대처는 영·미 동맹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는 냉철한 계산을 하고,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여론의 반대에도 무릅쓰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영국에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쉽게 변치 않는 안보 정책의 바탕이다.
 
  냉전시대 동서의 가장 첨예한, 그리고 마지막 대치는 전역핵미사일을 둘러싼 대치였다. 소련은 1987년 유럽에 전역핵미사일 SS-20을 배치했다. NATO 핵전략의 전제는 미국의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막강한 전력으로 중부 유럽에 쇄도하는 소련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퍼싱-2 같은 전역 핵을 유럽에 배치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대처는 미국이 퍼싱-2를 영국에 배치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를 반대하는 핵철폐 캠페인(CND·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나, 대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끝내 배치를 성사시켰다. 미국은 퍼싱-2를 영국과 네덜란드에 배치하여 SS-20에 대항하면서 1987년 중거리 핵전력(INF) 협상에서 소련의 SS-20을 철수시키는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냉전의 종막을 가져왔다.
 
  핵전력 이외에도 영국은 프랑스, 독일과 함께 나토의 주요 전력이었다. 현재도 영국군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확대를 견제하는 데 있어 역할이 적지 않다. 오늘날 영국, 프랑스, 독일의 재래식 전력은 20만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냉전시대에 비하면 대폭 삭감된 수준이다. 그러나 영국은 아직도 인빈서블급 경항모 3척을 운영하고 있으며, 두 척의 중형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있다.
 
  북해의 해군은 겨울에 어는 러시아의 무르만스크를 봉쇄하는 데 동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해 능력은 미군보다도 뛰어나다. 참고로 전통적 해군국인 영국이나 일본은 항공모함이나 잠수함보다도 소해전 분야에서 미군을 지원하는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국제분쟁지역에서 영국군과 미군의 역할 분담
 
지금은 테러세력의 통로로 변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연결하는 ‘카이버 패스’. 카이버 패스 주변에 다양한 종족의 마을들이 흩어져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은 영국-아프간 전쟁 과정에서 카이버 고개에서 아프간 전사의 습격을 받아 전멸했다.
사진=조선일보
  오늘날 나토의 군사구조는 냉전시대의 특징인 영구적이며 고정된 지휘부에 중무장 집중된 형태가 아니고 광범위한 작전에 유연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작고 기동성 있는 군대에 중점을 둔다. 영국군은 효율적이며 적시에 사용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국가 재건을 지원하는 국제안보지원군(ISAF)은 최초 영국의 지휘하에 있었다. 또한 나토 대응군은 임무에 맞추어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는데 영국은 여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분쟁 발발을 예방하고,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복구하고 평화를 보존하는 것이 나토의 중요 역할이 되었다. 보스니아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을 수행하기 위해 1995년 평화유지군이 창설되었다. 2003년 8월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안보지원군이 만들어졌다. 2004년 8월에는 이라크 나토 훈련단이 이라크 정부의 군사훈련과 군 건설을 원조하기 위해 창설됐다. 이라크 전과 아프간 전에서 대규모 결정적 작전은 미군이 주도했지만, 뒷수습은 영국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신뢰가 두터웠고, 이 지역에서 영국은 미국보다도 오랜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간은 19세기 제국주의 경쟁에서 인도로 진출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막는 영국 봉쇄선의 전선(前線)이었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세 차례의 영국-아프간 전쟁으로 아프간을 인도 제국의 속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이 카이버 고개(Khyber Pass)에서 아프간 전사(戰士)의 습격을 받아 전멸하는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때문에 영국은 아프간의 지형과 아프간 전사에 익숙하며 이런 종류의 작전에 효율적이다.
 
  브렉시트가 어떠한 결말을 지을지 아직은 불확실한 점이 많다. 어떻게 되든 미국과의 제휴를 전제로 하는 유럽에서의 영국의 전통적 역할은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EU는 프랑스와 독일이 중심이 되더라도, NATO는 미국과 영국 중심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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