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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들여다보기

에르도안이 쿠데타 배후로 지목한 귈렌은 누구인가?

세속국가·민주화 긍정하는 ‘이슬람 프로테스탄트’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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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부터 교육·봉사 추구하는 ‘히즈멧(hizmet) 운동’ 전개
⊙ 각계각층에 지지층 확보해 ‘국가 안의 국가’라는 눈총 받기도
⊙ 에르도안, 2013년 터져 나온 자신의 부패 스캔들 보도를 귈렌탓이라고 생각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불발 쿠데타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귈렌.
  “모든 국가기관에서 바이러스를 박멸하겠다.” 7월 15일 밤 10시에 발생해 6시간 만에 터키군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에르도안 대통령이 쿠데타 주도세력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냥 바이러스가 아니라 “암처럼 퍼져 간다”며 그가 정리하겠다고 지목한 이는 펫훌라흐 귈렌(Fethullah Gu¨len)과 그 추종자들이다.
 
  귈렌은 현재 미국 영주권자로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다. 에르도안은 미국에 ‘쿠데타를 주도한 범죄자’ 귈렌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귈렌은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라며 펄쩍 뛰고 있다. 미국 정부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면 인도를 검토하겠다고 하면서 사실상 터키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귈렌은 에르도안과 함께 힘을 모아 세속주의 국시(國是) 때문에 위축된 무슬림들의 종교생활에 활로를 트고 현(現) 정권을 창출한 주역이다. 그런데 왜 에르도안은 귈렌과 귈렌 추종자들을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내려 한 쿠데타의 주역이라고 단언하면서 없애고자 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일까?
 
 
  어려서부터 이슬람 교육 받으며 자라
 
  귈렌은 에르도안보다 13년 앞선 1941년 터키 동부의 도시 에르주룸(Erzurum) 인근 코루죽이라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맘(이슬람 종교지도자)이자 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귈렌은 정규 학교 교육을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녔다. 국가가 발령한 지역의 모스크에 부임해야 했던 아버지의 직업상, 학교가 없는 곳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귈렌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집은 항상 학자들로 붐볐다. 아버지가 학식 있는 이들과 종교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를 즐겼다. 귈렌은 “나는 아동, 청년 시절에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있어 본 적이 없으며 대신 나이 든 사람과 자리를 함께하며 마음과 가슴을 채워 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종교에 관한 모든 가르침이 금지된 시기에 가정에서 이슬람을 배운 것이다.
 
  귈렌은 중등교육 과정을 시험으로 마치고 1959년에는 국가시험에 합격해 이맘이 됐다. 살아 온 환경을 되짚어 보면 가정 내에서 이루어진 이슬람 교육과 함께 민족주의는 귈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에르주룸은 동부 국경지대로 터키의 안녕을 위협하는 카프카스 지역과 이란과 같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도발을 차단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귈렌은 청년시절에 공산주의에 맞서 ‘반공산주의터키협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는 터키가 오스만제국과 같이 다시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터키인들이 신실하게 이슬람적인 삶을 살면서 신(神)을 공공장소에서 인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국가가 이맘의 설교 내용 지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정책을 완화하려다가 군부쿠데타로 실각한 후 처형당한 멘데레스 전 총리.
  터키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늘날 터키 땅인 아나톨리아에 자리를 잡게 된 때는 11세기 말이다. 100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견고하게 지배하던 비잔틴제국이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셀주크 튀르크에 1071년 터키 동쪽 끝 만지케르트(오늘날 말라즈기르트)에서 패하면서 무슬림이면서 튀르크어를 쓰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4세기 후인 1453년에는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제국의 심장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다. 오스만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아나톨리아에는 이슬람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속주의 기치 아래 터키 민족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공화국 터키를 세우면서 이슬람은 공적인 영역에서 퇴출되었다. 이맘으로 불리는 예배 인도자이자 종교지도자는 국가가 통제하고 이들이 예배 시간에 하는 설교는 국가가 써 준 대로 해야만 했다.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 역시 금지했다.
 
  군부는 세속주의를 철저하게 수호했고 정치인들이 세속주의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여지없이 쿠데타로 철퇴를 가했다. 1960년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사형을 당한 멘데레스(Menderes) 총리는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를 느슨하게 풀어 모스크를 열고 터키어 대신 아랍어로 예배를 알리는 것을 허용하였을 뿐 아니라 종교학교를 새로 열도록 허용했다가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이슬람을 공공연하게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폐기 처분된 오스만제국이 이슬람 덕분에 위대했기에 터키가 다시 그런 나라가 되려면 이슬람 신앙을 돈독히 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위험했다.
 
 
  에르도안과 귈렌의 차이점
 
  귈렌은 그런 소리를 공공연히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귈렌이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 칼리파를 두고 무슬림들을 규합하려 했던 오스만제국의 정치적 체제를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오스만이 지녔던 문화적 가치와 관습이다. 구체적으로 대화의 정신, 오스만제국이 다국어·다종교·다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여성존중, 19세기에 시작한 오스만제국과 서구(西歐)의 지적(知的)·문화적 화해다.
 
  귈렌이 에르도안과 다른 점은 바로 오스만제국이 남긴 유산에 대한 이해다. 귈렌은 오스만제국의 문화적인 가치를 높게 산 반면 에르도안은 제국의 정치적 업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귈렌은 이슬람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 권력을 잡는 에르도안의 방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둘 다 세속주의로 위축된 이슬람 신앙생활을 부활하는 데 노력했지만 방식은 크게 달랐다. 에르도안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개혁을 꿈꿨다. 이를 위해 권력을 잡고 권력을 취한 후에는 터키를 세속주의에서 이슬람주의로 바꾸는 것을 지향한다.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과거 오스만제국처럼 터키가 쥐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랍연맹국에 아랍연맹 대신 이슬람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까지 했다.
 
  귈렌은 하향식 개혁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개인적 변화 없는 체제 변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귈렌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이 내적으로 성숙하여 안에서부터 질적인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슬람과 과학의 결합을 추구하고 법치와 민주주의 정부를 지지하며 자유시장 경제와 교육을 통한 구원을 지향한 사이드 누르시(1876~1960)의 영향 아래 귈렌은 현대화한 세계에 발맞추어 무슬림들이 내적으로 변화하여 진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무슬림이 당면한 문제를 무지, 가난, 분열로 요약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육, 봉사, 대화를 제시한다.
 
 
  ‘국가 안의 국가’ ?
 
터키는 아타튀르크 이후 공적 영역에서 종교의 역할을 제한해 왔다. 사진은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
  터키 내에서 귈렌의 사회개혁 운동은 교육에서 시작했다. 대학진학이 소수에게만 가능하던 시기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양질의 교육기회를 교육 소외층에게 제공했다. 1982년에는 이스탄불과 이즈미르에 자신의 교육철학에 근거한 사립학교를 만들었다. 이후 수백 개에 이르는 학교가 터키뿐 아니라 해외에 개교하였고 이곳 졸업생들이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하여 귈렌의 사상을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귈렌의 뜻에 동참하는 사업가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가난 퇴치를 위해 기꺼이 이웃과 나누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99년 터키 지진을 계기로 만들어진 방송 프로그램 ‘킴세욕무(거기 누구 없어요)’가 2002년 구호단체로 결성되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도 귈렌이 주창한 가난 퇴치를 위한 봉사정신의 일환이다.
 
  귈렌은 열심히 일하여 부(富)를 축적하고 나누는 것을 권장한다. 이 때문에 귈렌 운동을 종종 ‘이슬람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으로 보기도 한다.
 
  분열 극복을 위한 대화는 주로 종교문화 간 대화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터키 내 소수 종교인과 공동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대변하는 사람들이 귈렌의 추종자들이다. 귈렌은 개개인의 차이를 인간 본성의 일부로 인정하고 이러한 차이를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하여 평화를 추구한다. 이와 같이 ▲교육을 통한 무지 타파 ▲부의 축적, 나눔·봉사를 통한 가난 퇴치 ▲대화를 통한 통합을 추구하는 귈렌 운동을 터키어로 ‘봉사’를 의미하는 ‘히즈멧(hizmet) 운동’이라고 한다.
 
  히즈멧 운동에 동참한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1982년 최초로 귈렌 사상에 기반을 둔 학교가 설립된 이래 히즈멧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교육계, 법조계, 언론계, 군, 경제계 등 터키 사회 각계각층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즈멧 운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귈렌과 추종자들이 ‘국가 안에 또 다른 국가’를 비밀스레 결성했다고 본다. 에르도안이 바로 그렇다. 그는 귈렌의 히즈멧 운동을 이번 쿠데타의 주역으로 몰아붙이면서 국가를 해치는 바이러스로 정의 내리고 박멸 작전에 들어갔다.
 
  쿠데타의 배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귈렌이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가능성도 없다. 다만 귈렌 스스로도 밝혔듯이 귈렌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담했을 가능성은 있다.
 
  쿠데타 발발 이전에 에르도안 측에서 숙청 대상자 명단을 작성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쿠데타가 실패한 지 하루도 채 안돼 수많은 사람을 그렇게 빨리 검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151명의 장군을 포함해서 1만명 이상의 군인과 3000여 명에 달하는 경찰을 체포했다. 약 4만명에 달하는 교육부 산하 공무원, 1577명의 대학 학장이 자리에서 쫓겨났다. 1043개의 사립학교, 15개의 대학교, 109개의 기숙사가 문을 닫았다. 공격의 칼날이 귈렌 사상의 보급처인 교육기관에 집중된 것을 보면 에르도안이 귈렌 운동을 뿌리 뽑으려고 작심했음을 알 수 있다.
 
 
  10년형 구형 받기도
 
  귈렌이 에르도안과 생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귈렌 추종자들이 에르도안과 2002년 정의개발당을 함께한 것은 에르도안이 정치권력을 통한 터키 사회 변화가 아니라 개개인의 내적 변화를 지향하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귈렌은 에르도안과 철학이 달랐기에 1998년 쿠데타로 해체된 이슬람정당 복지당(Welfare Party)과도, 1998년 결성돼 2001년 세속주의 헌법 위반으로 인해 다시 당 간판을 내린 미덕당(Virtue Party)과도 함께하지 않았다.
 
  귈렌은 1998년 도미(渡美)한 이래 단 한순간도 미국 땅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표면적인 도미 이유는 신병(身病) 치료였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껴 떠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터키 국내 TV방송은 귈렌이 추종자들에게 이슬람국가를 세울 기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방영했다. 이후 검찰은 세속주의 국가를 파괴해 신정(神政)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죄목으로 귈렌에게 10년형을 구형하였다.
 
  귈렌은 자신이 이슬람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방송 내용은 편집된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2006년 에르도안 정부 아래에서 무죄(無罪) 판결을 받았지만 귈렌은 방송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그는 “고국이 그리우나 언론의 자유가 더 소중하다”고 하면서 망명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에르도안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정부 깊숙이 침투한 귈렌 세력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해 귈렌의 교육운동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대학입시 학원과 같은 교육기관을 운영하던 귈렌 운동을 표적으로 삼아 2013년 폐쇄령을 내렸다.
 
  그러자 에르도안과 에르도안의 아들이 불법 자금에 대해 통화하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정부의 도덕성이 심판대에 올랐다. 에르도안은 이를 귈렌 측의 반격으로 여겨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터키 내 최고 부수를 자랑하는 《자만(Zaman)》 신문을 위시한 친 귈렌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귈렌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모든 언론은 정부가 소유권을 빼앗고 관련 언론인은 투옥했다.
 
 
  세속국가의 합법성 인정
 
지난 8월 7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쿠데타 규탄 대회에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는 에르도안 대통령.
  에르도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현실에서 귈렌과 귈렌을 따르는 사람들이 에르도안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귈렌 지지자들은 오히려 이번 쿠데타가 실패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쿠데타가 법치(法治)에 근간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귈렌의 정신에 어긋날 뿐 아니라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독재자 에르도안이 영원히 영웅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향후 터키 정국은 이변이 없는 한 에르도안의 무한질주가 이어질 것이다. 에르도안은 귈렌과 추종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만 귈렌은 한결같이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무슬림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쳐 왔다. 테러를 비난하면서도 테러의 원인을 서구의 침탈에서 찾는 대다수의 무슬림 지도자와 달리 보기 드물게 테러의 원인이 무슬림 사회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귈렌 운동이 정치적인 이유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에서 만일 성공했더라면 어떤 모습일까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귈렌이 이슬람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한 점을 상기하면 모두가 모범으로 생각한 그대로의 터키였을 듯싶다.
 
  에르도안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 쿠데타군을 막으려 거리로 나온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대다수가 수염을 길렀고 “민주주의” 대신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시다)”를 크게 외쳤다고 한다.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를 두고 “미나렛은 방망이, 둥근 지붕은 헬멧, 모스크는 병영의 막사, 신자는 군인”이라고 한 에르도안의 지지층답다. 술탄이 되고픈 에르도안과 “모든 믿음과 철학에 똑같이 거리를 두는 세속국가를 수용한다”고 하면서 이슬람국가가 아니라 민주화를 대세로 여기는 귈렌과의 차이는 크다.
 
  귈렌을 따르는 필자의 지인은 늘 면도를 해서 수염 없는 말끔한 얼굴인데 쿠데타 직후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귈렌 선생이 조금이라도 쿠데타에 개입했다면 저는 귈렌 선생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정치가가 아니라 종교지도자입니다. 종교지도자가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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