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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브렉시트(Brexit)와 영국의 고립주의

브렉시트로 ‘국가’가 돌아왔다

글 :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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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통합은 원래 ‘독일문제’ 해결하기 위한 안보장치 …, 유럽의 평화는 EU 덕분이라기보다는
    유럽 주둔 미군 덕분
⊙ ‌영국의 고립주의는 자폐적 정책이 아니라 유럽보다는 세계에 더 관심을 쏟겠다는 것 …
    ‘영광스런 고립’ 자부
⊙ 브렉시트, 트럼프 부상은 ‘국가의 회귀(回歸)’ 의미

이춘근
195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 텍사스대 정치학 박사 /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同부원장, 한국경제연구원
외교안보연구실장 역임. 현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 저서 《미·중 패권경쟁과 한국의 국가전략》
《격동하는 동북아시아》 《현실주의국제정치학》 등
찬반 국민투표가 있기 전에 브렉시트 찬성 시위를 벌이는 영국인들. 영국인들의 고립주의는 뿌리가 깊다.
사진=뉴시스/AP
  영국 국민들은 6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해 52대48로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투표 직전 영국인들이 EU 잔류를 택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전 세계의 언론들은 영국이 EU에서 탈퇴했다는 사실을 “잘못된 결정”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바보 같은 짓을 했고 곧 경제·국가안보적으로 파탄날 것이며, 세계경제에도 아주 부정적인 충격이 가해질 것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이런 배경에는 EU가 마치 ‘신성불가침’이라는 인식이 있다. EU는 ‘좋은’ 것인데 영국은 그 좋은 것을 저버리는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비난 투의 보도가 압도적이었다. 우리나라 언론도 별다를 바 없었다. 세계경제의 3.8%를 차지하는 영국이, 쫄딱 망한 것도 아니고 EU에서 탈퇴한 것뿐인데 어떻게 세계경제가 위기에 당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무책임할 뿐 아니라 웃기는 보도들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국이 탈퇴를 한 결정은 ‘나쁜 것’이라는 비난 일색의 편파적인 해석이 아니라 영국이 ‘왜 탈퇴했는가?’에 관한 ‘객관적’인 설명이다.
 
  영국의 EU 탈퇴, 브렉시트(Brexit)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일이며 영국이 EU를 탈퇴할 것이라고 믿었던 전문가들도 많았다. 우선 EU는 영국으로 하여금 남아 있기보다는 탈퇴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한 원인제공자였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EU는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를 위한 매력적인 기구가 아니다. 영국이 좋은 것을 버렸다며 탈퇴결정에 경악해하는 언론들조차 EU를 정치·경제·군사적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었다.
 
 
  유럽, 통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쇠락
 
  유럽 국가들이 통합을 향해 달려온 지난 40년, 유럽 주요국가 15개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감소(減少) 일로였다. 1970년 세계경제의 36%에 이르렀던 유럽 15개국의 경제력은 2010년에는 27%로 그 비중이 줄어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미국의 경제적 비중이 쇠퇴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달리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지 않았다. 미국 경제가 세계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1975년에 26.3%, 2009년에는 26.9%였다. 아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1970년 15%, 2010년에는 26% 정도로 커졌다. 아시아의 성장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의 비중을 약화시켰다.
 
  유럽통합이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경제력 비중이 줄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EU가 경제적으로도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최근 작고한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Lester Thurow)는 2050년이 되면 미국의 경제력은 유럽의 약 2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EU의 경제적 미래는, 영국 탈퇴에 경악한 언론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달리, 장밋빛이 결코 아니었다. 사실 그들도 유로화의 미래, 유럽 경제의 미래 등에 대해 비관적으로 예측했다. 유로화의 쇠락, 그리스의 파탄, 높은 실업률, 복잡한 각종 규제조치, 무슬림 난민의 대거 유입, 사회주의 성향의 경제정책 등은 EU가 대등한 위치에서 미국 및 아시아와 경제적인 경쟁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유럽은 희망의 상징이 아니었다.
 
  2015년 EU에 회비로 130억 파운드(약 20조원)를 낸 영국은 EU가 영국을 위해 겨우 45억 파운드를 썼다고 생각했다. EU 국가 중 경제력 2위인 영국은 EU에 남아 있어야 할 매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영국은 유럽 통합에 열정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낸 나라도 아니었다. 1973년 뒤늦게 EU에 가입했던 영국은 43년 만에 탈퇴를 결정했다.
 
 
  ‘중부유럽 문제’
 
2차대전 후 유럽합중국을 주장했던 윈스턴 처칠.
  영국의 EU 탈퇴를 큰일 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들에 따르면 그 큰일은 ‘경제적’인 것일 따름이다. EU의 목적 중에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통합의 원래 목적은 ‘국제안보’ 문제였다. 경제가 아니었다. 경제통합은 국제안보를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유럽대륙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특히 20세기 초반 유럽은 두 차례의 잔인한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지역이다. 그 핵심에는 ‘독일’이 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을 격파한 유럽 강대국들은 빈 체제라는 국제회의 체제를 통해 왕정을 복고하고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 체제는 비스마르크가 1871년 프랑스를 격파하고 독일을 통일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가 건설한 독일제국은 유럽의 균형을 언제라도 망가뜨리고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에 빠뜨릴 수 있을 만큼 막강했다. 외교사(국제정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독일의 힘이 너무나도 막강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고뇌를 ‘중부유럽(Mittel Europa) 문제’라고 명명했다.
 
  예상과 달리 독일제국을 건설한 비스마르크는 신생 독일 제국의 생존을 위해 정교한 동맹 및 협상을 형성하는 평화적 전략을 추구했다. 이 시기 유럽대륙에서 떨어져 있던 섬나라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팽창하는 힘을 해외로 돌려 전 세계에 걸친 식민지 확보 및 경영에 주력,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독일에 패배한 프랑스는 복수의 기회를 엿보는 한편 해외로 진출, 식민지를 넓혀 가며 프러시아에 당한 수모를 달래고 있었다. 덕분에 유럽은 당분간 평화의 시대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 EU를 세계화의 상징으로 보며, 세계화의 시대를 경제적 국경이 무너진 통상의 시대로 보고 있지만, 세계화의 주요 척도인 국가들의 무역의존도(수출·수입액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계산)가 가장 높았던 시점, 즉 국가들의 국제통상 비율이 최고점을 찍었던 시기는 1914년이었다.
 
  놀랍게도 바로 그해 세계 1차 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막강한 독일로 인해 유래하는 소위 ‘중부유럽의 문제’가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다. 1차 대전을 치르고 난 후 유럽 강대국들은 ‘중부유럽 문제’, 즉 독일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방법은 독일의 전쟁수행 능력을 원천적으로 박탈,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베르사유조약이었다. 이 강요된 조약은 나치 독일의 출현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유럽통합은 원래 안전보장 장치였다
 
유럽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
  2차 대전 이후, 유럽 열강은 독일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완전히 다른 방법을 구상했다. 독일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자는 방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발상이 EU, 혹은 그보다 더 발전된 유럽합중국 건설이었다. 이번 EU를 탈퇴한 영국의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도 그런 제안을 했다. 처칠은 통합유럽 안에서 영국의 입지에 대해서는 ‘유럽의 일부(of Europe)’가 아니라 ‘유럽과 함께(with Europe)’여야 함을 강조했다.
 
  한편 프랑스는 군비생산에 필요한 독일의 기간산업, 즉 석탄과 철강의 생산을 국제적으로 통제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차후 유럽통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장 모네의 발상이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망에 의해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독일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루라도 빨리 유럽의 일원으로 복귀해야 할 독일이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유럽통합은 당초 ‘독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안전보장 장치’로서 구상되었던 것이다. 1951년 4월 18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가 출범했다.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 등 6개국이 동참했다. 이들 6국이 EU의 모체 나라들이다. 유럽 석탄 및 철강 공동체는 1957년 로마조약에 의거 유럽경제공동체(EEC)로 확대되었고 회원국도 점차 확대되었다. 1973년 영국도 EEC에 가입했다. 냉전이 종식된 후인 1992년, EU 조약인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체결로 EU가 출범했다.
 
  EU의 본래 목적은 국제안보 문제였는데 과연 유럽통합은 그 목적을 달성했는가? 많은 사람이 유럽통합의 결과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의 발발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와 독일이 다시 싸울 가능성은 없다고 믿는다. 이 말이 맞다면 냉전 종식 후 동·서독이 통일을 이룩할 무렵 프랑스, 영국의 지도자들이 이를 결사반대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독일통일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통일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은 통일 후에도 4만명 정도의 미군을 독일에 주둔시키고 있다. 만약 주독미군 및 유럽에 주둔하는 미군이 전면 철수할 경우에도 유럽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까? 미국이 빠진 유럽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지금처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유럽에 평화를 가져온 요인이 EU의 존재 때문인지 혹은 유럽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미국과 미군 때문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영광스런 고립’
 
  유럽의 통합과정과 세계화 과정은 국가들의 국경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경제적 의미에서 국경은 무의미하게 되었고 이 같은 현상은 ‘국가의 퇴각’(Retreat of the State)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사실 정치조직의 발전사(發展史)는 더 큰 정치단위를 향한 확대와 통합의 과정이었다. 씨족국가들이 통합되어 부족국가로 확대되었고 부족국가들이 통합되어 국민국가(nation state)로 확대되었다.
 
  다음 수순은 논리적으로 국민국가를 초월하는 정치단위가 될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국민국가들은 정치통합의 마지막 단계처럼 인식될 정도로 능력이 막강했다. 국민국가들은 좀처럼 자신의 주권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국민국가들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되었다.
 
  현재 지구상에서 ‘국민국가’들보다 더 크고 막강한 주권을 가진 정치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엔, 유럽연합 등은 주권국가들의 연합체일 뿐이다. 이들이 보유한 힘은 회원국의 자발적 양보로써 얻어진 것이며, 회원국들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은 아니다.
 
  영국의 경우처럼 다른 조직(즉 EU)에 의해 자신의 주권이 감당할 수준 이상으로 간섭당한다고 생각할 경우, 국가들은 그 조직에서 탈퇴하면 그만이다. 영국은 EU가 결정하는 만큼 이민자들을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 처지를 ‘영토에 관한 주권’이 훼손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영국의 어른들은 영국의 아이들이 ‘나는 유럽인’(I am European)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데 경악하기도 했다.
 
  영국 국민들은 EU가 점차 막강해지며 영국의 주권에 훼손을 가하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럽의 변방에 존재하는 섬나라로서 유럽대륙의 일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영국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고립정책이었다.
 
  ‘영광스런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 지칭되는 대영제국의 대외 정책은 외부의 일에는 눈을 감고 자기들 내부의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자폐적(自閉的)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국의 능력을 바탕으로 유럽대륙보다는 세계에 더 관심을 쏟겠다는 정책이었다. 영국 수준의 막강한 나라만이 할 수 있었던, 문자 그대로 ‘영광스런’ 정책이었다.
 
 
  드골의 예언
 
영국의 EEC가입을 거부했던 드골 프랑스 대통령.
  유럽대륙의 국가와 지도자들도 이런 영국적 특질을 잘 알았다. 1963년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영국의 EEC 가입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은 … 섬나라이고 바다에 접해 있어서 무역, 시장, 식량 공급선 등을 통해 매우 다양한 나라들, 대개는 매우 먼 나라들과 연결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산업과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농업의 비중은 아주 낮다. 영국은 … 매우 뚜렷하고 독창적인 관습과 전통을 갖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영국의 자연, 구조, 경제적 배경 등은 유럽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크게 다르다. … 숫자도 많고 특징도 매우 다양한 모든 회원국들의 응집력이 오랫동안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것, 결국은 미국에 대한 의존과 미국의 지도력하에서 거대한 대서양공동체가 등장하리라는 것, 그리고 이 대서양공동체가 유럽공동체를 금방 완전히 삼키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드골은 영국 ‘고립주의’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연원과 함께, 영국이 유럽보다는 대서양 건너 미국과 더 동질감을 느끼는 나라임을 정확하게 짚었던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비록 세계 패권(覇權)의 지위를 미국에 내주기는 했지만,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권을 가진 EU의 일개 회원국이 되어, 이래라저래라 간섭을 받을 처지의 나라는 아니다. 9·11 이후 미국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으로 반테러 전쟁에 참전, 강대국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영국의 눈에 EU의 미적지근한 반테러 전쟁정책, 혹은 아랍에 대한 우호정책, 더 나아가 반미주의적 정책들은 비겁함의 극치로 보였을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한때 자신의 식민지였던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를 프랑스·독일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
 
 
  국가가 돌아왔다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국민국가 영국에 ‘국가’가 다시 되돌아왔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016년 대선을 치르는 미국에서도, 그리고 프랑스·독일에서도 언제 불거질지 모르는 민족과 국가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국가의 퇴각’ 현상이 멈칫하는 동시에 ‘국가의 회귀’ (Return of the State) 현상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더불어 영국의 EU 탈퇴는 국가의 회귀(回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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