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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현장

르완다, 한국에서 미래를 찾다!

글 : 박용민  주르완다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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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가메 대통령, 반기문 총장에게 새마을운동 책자 내밀며 “한국이 했던 것을 우리도 하는 것”
⊙ 2001~2014년 평균 8% 성장… 정치적 안정, 치안 상태, 공공부문의 책임성 양호
⊙ 투치족은 소를 10마리 이상 가진 有産者, 후투족은 소가 없는 농부 의미… 벨기에가 식민통치를
    하면서 종족 구분으로 굳어져
⊙ KT, 르완다 전국에 광케이블망을 설치, 4G LTE 서비스 제공

朴容民
⊙ 49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英 옥스퍼드대 외교관과정 수료. 케임브리지대 국제관계 석사.
⊙ 외교부 북핵협상과장, 주일대사관 참사관, 주유엔대표부 공사참사관 역임. 現 주르완다 대사.
⊙ 저서: 《영화관의 외교관》 《별난 외교관의 여행법》 《사랑은 영화다》 《박용민의 지중해
    오디세이》 《맛으로 본 일본》 《재즈, 그 넓고 깊은 바다》 《회복된 세계》(譯書).
키갈리 남서쪽 3시간 거리에 있는 가샤루 라로 새마을운동 현장. 새마을운동을 통해 조합을 구성해 같이 농사를 짓고 수익을 나눈다고 한다. 사진=시릴 은데게야
  곧 착륙할 테니 안전띠를 착용하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우간다 엔테베에 들러 많은 승객을 내려놓고 다시 한 시간 남짓 날고 있었다. 창밖을 보았다. 공관장(公館長)으로 봉직하라는 명(命)을 받고 금년 4월 22일 도착한 나의 새로운 임지, 르완다였다. 자정을 넘긴 현지 시각. 일부러 조명(照明)을 한껏 낮춰 놓기라도 한 것처럼 어둑한 키갈리 시내가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맥락 없이, ‘20촉 전등(電燈)’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1950년대 말, ‘문화게릴라’로 칭송되며 주목받기 시작하던 약관(弱冠)의 평론가 이어령은 신문지상(新聞紙上)에서 겁도 없이 당시 한국문학의 대들보와도 같던 김동리(金東里)와 살벌한 논쟁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거물답게, 근거 없는 부정견(不定見)에 일일이 응수하기엔 자신의 시간이 너무나 귀해 앞으로 묵살하겠다던 김동리에게, 이어령은 잡지 독자를 위해 글을 쓰고 차(茶)를 마시는 김동리의 시간이 “20촉 희미한 전등 밑에서 책을 뒤지고 앉아 있는 우리의 지루한 시간보다는 귀중할지도 모른다”고 들이받았다. 그것은 대가(大家)의 오만을 독자들 앞에 까밝히는 일격이었고, 우상(偶像)을 파괴하겠다는 패기(覇氣)로 두 달 동안 이어간 공세(攻勢)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천개 언덕의 나라’
 
   어린 시절 읽었던 이 ‘20촉 전등’이라는 표현은 내게 그렇게 각인되었었나 보다. 주머니는 곤궁할망정 패기는 모자라지 않는 자들의 조명. 여유롭고 오만한 자들이 네온사인 아래서 벌이는 시끌벅적한 잔치보다 뭔가 훨씬 더 의미 있고 웅숭깊은 일이 조용히 도모되고 있는 작은 방의 불빛. 르완다의 인상(印象)이 그랬다. 가진 것은 아직 적지만 옹색하거나 비굴하지는 않은 나라. 비록 고단한 역사를 경험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시작하면 되지 않겠냐는 결기를 가진 사람들.
 
  우리나라처럼 르완다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작은 나라다. 경상남북도를 합친 정도의 면적(2만8000km²)에 서울시 인구 정도의 사람들(1266만명)이 살면서(그러니까 인구밀도도 우리와 비슷하다), 울산시 정도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는 나라다. 우리가 그랬듯이, 르완다도 오래 전부터 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했고, 중앙집권적인 왕권(王權)이 미치던 자존심 강한 왕국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이것은 일반적이기보다는 예외적인 사례다.
 
  해발 1500m 이상의 고(高)지대라서 적도(赤道) 인근임에도 연중 온화한 기후이고 산과 언덕이 많아 르완다인들은 자기 나라를 ‘상춘(常春)의 나라(land of an eternal spring)’ 또는 ‘천 개 언덕의 나라(land of a thousand hills)’라고 부른다.
 
  온화한 자연환경의 혜택을 입은 이 땅에서 예부터 투치족, 후투족, 트와족이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공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와미라는 왕을 중심으로 같은 언어를 쓰고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며 영역의 구분 없이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르완다에서 이 종족들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큰 결례(缺禮)에 해당한다. 마치 〈해리 포터〉의 등장인물들이 볼드모트의 이름 부르기를 꺼리는 것처럼,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종족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어느 소설 속 악당도 감행하기 어려운 사악한 만행을 그 때문에 자행했기 때문이다.
 
 
  후투와 투치
 
르완다 학살 당시 자이르 국경의 난민촌으로 피난한 르완다 난민들.
  식민통치 이전 르완다에 관해서는 문자로 기록한 역사가 없지만, 이곳의 원주민은 동굴생활을 하던 피그미족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오늘날 트와족으로 불리는데 르완다 인구의 1%가 채 되지 않는다. 그보다 나중에 이주해 온 후투족과 투치족의 근거지가 어디였는지에 관한 몇 가지 설(說)은 사실보다는 추측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추측은 아프리카 내에서도 인종 간의 차별을 조장한 ‘함족 가설(Hamitic theory)’이라는 유럽인들의 사이비 종교적 편견과 관련이 깊다. 요컨대 같은 흑인이라도 투치족은 아브라함의 (저주받은) 먼 친족이므로 더 미개한 다른 종족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는 식이다.
 
  서구인(西歐人)들이 르완다에 처음 왔던 19세기 당시에, 투치는 왕족의 이름이자 소수 엘리트 계급과 동의어였으며,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투치는 언제나 인구의 15% 미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치가 소를 대부분 잃으면 후투(농부)가 되고, 후투가 소를 열 마리 이상 소유하면 투치가 되는 식이었다. 1884년 독일이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1919년부터는 벨기에가 위임통치(委任統治)를 시작했다. 벨기에는 주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면서 투치-후투를 세습되는 종족(種族) 구분으로 고착시켰고, 기득권(旣得權) 세력인 투치족을 앞세워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다 보니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할 때까지, 르완다의 독립투쟁사는 후투족의 반(反)투치 투쟁사(鬪爭史)와도 겹친다. 독립 후부터 다수(多數) 후투족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었고, 투치들에 대한 박해와 집단살해가 종종 벌어졌다.
 
  이처럼 종족 간의 긴장이 높아지다가 절정을 맞은 것이 1994년의 제노사이드(Genocide)다. 당시 자칭 ‘후투 파워’라는 인종주의적 세력은 출판물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투치 바퀴벌레들을 멸절(滅絶)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끈질기게 전파하고 있었다. 그해 4월 6일 하비아리마나(Habyarimana)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가 키갈리 착륙 직전에 격추당하자, 이를 계기로 후투족 민병대가 중심이 되어 소수부족인 투치족과 그에 우호적인 일부 후투족까지를 대상으로 피의 광란을 벌였다. 불과 석 달 만에 100만명 가까이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정글칼로, 총으로, 주먹과 몽둥이로….
 
 
  정부 사무실에 스테이플러 하나 남지 않아
 
  지금의 르완다를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는 1994년 제노사이드의 배경과 경위와 영향을 얼마나 정확히 아느냐에 달려 있다. 사건 자체는 물론 그것을 극복해 온 과정이 르완다 국민을 규정하는 정체성(正體性)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저널리스트 필립 구레비치(Philip Gourevitch)는 제노사이드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국제 재난 전문가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황폐해진 나라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새 정부가 출범했을 때 국고(國庫)에는 달러든 르완다프랑이든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정부 사무실에서는 깨끗한 종이나 스테이플러 심은 물론이고 고장 나지 않은 스테이플러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문이 남아 있어도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설령 차량이 남아 있어도 움직이지 않기 일쑤였다. 변소에도, 우물에도 죽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전기, 전화, 수도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키갈리에선 하루 종일 폭발이 있었다. 누가 지뢰를 밟았거나 미처 터지지 않은 폭발물 잔해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폐허 위에 임시로 세운 병원은 밀려드는 치료 요청을 감당하지 못했다. 교회, 학교, 그 밖에 도살장으로 사용되지 않은 공공(公共)시설은 대부분 약탈당했고, 약탈을 자행한 사람들은 대개 죽었거나 도망치고 없었다. 1년 동안 수확한 차와 커피는 온데간데없었고, 커피를 볶는 기계의 약 70%가 작동하지 않았다.〉
 
 
  금융위기 불구하고 안정적 성장
 
  이런 상태에서 출발한 르완다가 불과 20년 만에 이룩한 성취는 눈부시다. 2001~2014년 기간 르완다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평균 8%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은행이 2014년 발표한 기업환경평가에서 전체 189개 국가 중 32위를 차지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원조효과성 평가는 2011년 이래 최고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르완다는 지금도 1인당 국민소득 700달러대의 최빈국(最貧國)이다(한국이 700달러선을 넘은 것은 1975년경이었다). 시장규모가 협소한 내륙(內陸)국가라는 사정이 변할 리도 없다. 전력난(電力難) 극복, 수송비용 절감, 시장규모 확대, 민간기업 육성, 세수(稅收) 증대 등 허다한 도전과 난제들이 앞에 놓여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르완다의 정치적 안정과 좋은 치안상태, 공공부문의 책임성, 효율성, 투명성, 청렴성은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곳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다. 이러한 무형(無形)의 자산이 다른 어떤 물증(物證)보다 르완다의 장래에 대한 낙관을 넉넉히 담보해 준다. 통계로 보아도 르완다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사하라 이남(以南) 아프리카는 세계 금융위기 직전까지만 해도 8%에 가까운 성장으로 경제학자와 투자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금융위기 이후에도 4%대 성장을 유지해서 부푼 기대감을 뒷받침해 주었다.
 
  하지만 2013년경부터 원유(原油)와 원자재(原資材)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체의 성장은 느리지만 뚜렷한 하향세(下向勢)를 그리기 시작했다. 사하라 이남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앙골라(GDP규모 1~3위) 등이 자원시장 침체에 큰 영향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등과 더불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자원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르완다의 경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평균(4.6%)보다 훨씬 높고 안정적인 7%대의 성장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카가메의 ‘정중한 경고’
 
필자는 지난 8월 14일 카가메 대통령(오른쪽)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와 같은 발전은 폴 카가메(Paul Kagame)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제노사이드 당시 우간다에서 투치족 중심의 무장단체 르완다애국전선(RPF)를 이끌던 카가메 장군은 국내로 진격해 왔다. 제노사이드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던 RPF의 공격이 후투파워의 과격화에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식민종주국도, 다른 강대국들도, 심지어 유엔도 문제의 해결을 포기하고 철수해 버린 지옥도(地獄道) 같은 상황을 접수하고 정리한 것이 RPF를 이끌던 카가메 장군이었다. 그 나라를 어제보다 나은 나라, 내일은 더 나을 것으로 기대되는 나라로 가꾼 지도력을 발휘한 것도 그였다.
 
  지난 9월 14일 키갈리에서는 유엔과 공동으로 조사한 제4차 종합생활여건통계 발표회가 열렸다. 그 결과에 따르면, 르완다는 빈곤퇴치 관련 일부 사항을 제외한 모든 항목에서 유엔의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초과달성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 발표회 행사에서 카가메 대통령은 거기 참석한 각료들을 쏘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영양부족(malnutrition) 부문의 진전이 부족한 것이 아쉽습니다. 이 부분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은 여기 있는 각료들께 드리는 정중한 경고(polite warning)이기도 합니다.”
 
  내가 르완다 경제부처 장관이었다면 등에 식은 땀이 흘렀을 것 같다. 2000년부터 대통령으로 재직해 온 카가메 대통령의 지도력은 두 가지 부분에서 가장 큰 빛을 발한다. 첫째는 경제적 성장이고, 둘째는 국민적 통합이다. 그 성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은 전향적이고 희망적인 사회의 분위기다. 희망은 거대한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자조적(自嘲的)인 냉소주의(冷笑主義)나 자포자기(自暴自棄)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곳에 희망은 살아 숨 쉰다. 한가로이 자기연민이나 자기비하에 빠지기에는 르완다인들이 당대에 겪은 사건의 비참함이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이것은 과거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카가메 대통령과 새마을운동
 
깔끔하게 정비된 키갈리 시내 도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감탄한 바 있다.
  르완다의 방방곡곡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깨끗하다. 반기문(潘基文) 유엔 사무총장은 외교장관으로 재직하던 2006년 르완다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항에서 시내에 이르기까지 길이 깨끗하고 정돈이 잘되어 있어 정말 인상적이었다. 카가메 대통령을 만나 그렇다고 했더니 대통령은 ‘한국이 했던 것을 우리도 하는 것’이라면서 책상 위에 있던 새마을 운동에 관한 영문 책자를 집어 들어 내밀더라.”
 
  지난 9월 29일 뉴욕에서는 유엔개발계획(UNDP)과 OECD가 공동 주최한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가 열렸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반기문 사무총장 외에 르완다, 라오스, 페루, 베트남 등 4개국 국가 정상(頂上) 및 UNDP와 OECD의 수장(首長)이 참석해 농촌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카가메 대통령은 한국의 개발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이 기여한 바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새마을운동이라는) 한국의 자생적인 해결책은 개발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주도적 역할, 자발적 참여, 국민적 단합이 언제나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 요소임을 입증해 줍니다.”
 
  필자는 지난 8월 14일 카가메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그와 양국(兩國)관계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지금까지 대법원장, 상원의장, 국무총리와 16명의 각료, 키갈리 시장(市長)과 주지사(州知事)들, 군(軍) 참모총장과 경찰청장 등을 만나면서 해당 부처별로 공통 관심사항을 협의해 왔다. 그들과 나눈 대화내용을 일일이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르완다의 지도층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상(像)은 다른 어느 선진공여국(先進供與國)과 다르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들이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대부분의 목표가 달성 가능함을 증명하는 가장 확고한 징표들 중 하나다. 인간은 무엇이 가능하다고 믿느냐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된다. 인구의 15% 정도에 불과한 소수부족(少數部族)을 멸절시켜 버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을 때, 이 나라에서는 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광란(狂亂)이 벌어졌었다.
 
 
  르완다인들의 현실주의
 
KOICA가 2010년부터 지원하고 있는 키추키로 종합기술훈련원(IPRC-K). 올해에는 교사 역량 개발을 위한 직업기술교사 교육원 건축도 시작했다. 사진=시릴 은데게야
  실은 르완다가 극복해야 하는 제노사이드의 상처는 아직도 현재형(現在形)이다. 생존자 또는 희생자의 가족들이 가해자들과 여전히 한마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구레비치의 표현을 한 번 더 빌리자면, “현대사를 통틀어 다른 민족을 살육했거나 이른바 살육이라는 행위를 저지른 민족이, 고만고만하게 작은 공동체에서 살육당한 민족의 유족(遺族)들과 완전히 뒤섞여 생활하면서 응집력 강한 국가사회를 이루어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르완다 곳곳에 존재하는 제노사이드 기념관은 국민화합이 지금도 여전히 르완다 사회의 당면과제라는 사실을 아프게 말해 주고 있다.
 
  1994년 제노사이드를 통해 국제사회와 르완다는 공히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르완다의 제노사이드 직후 세계 각국의 인도적 지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고 해외원조 정책이 지금과 같은 정도로나마 정비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평화유지군(PKO)의 활동과 특별정치임무단의 활동으로 구성되는 유엔 평화활동(peace operations)의 연혁(沿革)은 르완다 사태 이전과 이후로 또렷이 나뉜다. 1994년에 대한 반성을 통해 유엔은 민간인 보호를 위한 강력한 임무(robust mandate)를 평화활동에 포함하기 시작했고, 국제사회는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이라는 관념을 발전시켰다.
 
  르완다로 말하자면, 문제가 생기면 외국인들은 떠나 버린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무원이건 민간인이건, 유엔이건, 비정부기구(NGO)건 생사의 기로에 처한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르완다 국민들에게 매우 현실주의적인 태도와 감성을 심어 준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르완다인은 외래(外來)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쉽사리 선동되지 않을 사람들처럼 보인다. 외부의 도움을 고마워하지만 거기에 전부를 의지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르완다식 진실규명과 화해
 
  1994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르완다국제형사법원(ICTR)을 설립했지만, 르완다인들은 당초부터 그 법원이 자신들이 경험한 부조리를 깔끔하고 정의롭게 정리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ICTR은 지금까지 기껏 59개 사건을 종결지었을 뿐이고, 기소된 피고 중 9명은 아직 잡히지조차 않고 있다.
 
  르완다는 가차차(Gacaca)라는 전통적 형태의 재판을 통해 진실규명과 화해를 추구했다. 세상의 모든 제도가 그렇듯, 그것이 완벽한 정의(正義)를 구현하는 장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르완다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차차 법정을 까다롭게 비판하는 인권옹호자들 중 누구도 그보다 더 나은 대안(代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자연히, 현재 르완다는 국민들의 경제적·사회적 권리 증진에 관해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자신 있게 성과를 말하지만 정치적·시민적 권리 증진에 관해서 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는 그보다 적은 것처럼 보인다. 이 또한 우리의 과거 어떤 부분을 닮아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을 감안할 때, 한국과 르완다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배워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르완다의 성공적인 발전은 동아프리카 지역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본보기가 되는 모델을 제시할 것이다. 그 성공에는 아프리카와 경제협력을 확대해 나가야 할 우리의 이해(利害)도 걸려 있다. 게다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르완다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국민화합 과정은 분단국인 우리에게 중요한 함의를 지닐 터이다. 그것이 우리가 르완다를 아프리카 7개국 우선협력파트너 중 하나로 지정한 참뜻이라고 믿는다.
 
 
  KT, 르완다에 4G LTE 제공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 시내의 삼성 스마트폰 판매점. KT는 르완다 정부와 합작회사를 설립, LTE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현재 르완다에서 농촌개발, 교육, 정보통신기술(ICT) 등 3개 분야를 중점협력분야로 설정하고 14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2015년 예산 2000만 달러는 KOICA 전체 사업예산의 5%에 달하고, KOICA가 금년에 아프리카에 제공한 나라별 원조금액 중 최고 액수에 해당한다. 금년에는 최초의 차관(借款) 사업으로서 5100만 달러 규모의 대외경협기금(EDCF) 공여를 통한 르완다 국립대 인프라구축 사업도 시작했다. 현재 르완다 방방곡곡에서는 50여 명에 달하는 자문관 및 봉사단원이 이 나라의 발전을 헌신적으로 돕고 있다.
 
  우리 기업 KT는 야심적인 투자를 시행하여 르완다 정부와 AoS(Africa Olleh Services)와 oRN(Olleh Rwanda Networks)이라는 두 개의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이것은 통신분야에서 세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관협력(Public-Private Partnership) 사례다.
 
  KT는 르완다 전국에 광케이블망을 설치했고, oRN은 이 망을 인수받아 4G LTE 서비스를 독점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oRN은 심지어 키갈리 시내버스에도 4G LTE 단말기를 설치하여 승객들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AoS는 공공부문과 시장에 한국의 앞선 정보기술(IT) 솔루션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르완다가 추구하는 지식기반 경제로의 변혁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르완다 개발청장은 필자에게 AoS와 oRN의 성공은 르완다 정부에도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치안 양호하지만, 위생은 주의해야
 
르완다에서 드문 사바나 지형을 갖고 있는 아카케라 국립공원. 르완다를 찾는 관광객은 2000년 3700명에서 2013년 113만7000명으로 급증했다.
  유쾌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만, 르완다는 아직까지 온 길보다 가야 할 길이 더 먼 것이 사실이다.
 
  르완다에 사업상 진출하거나 관광을 위해 이곳에 오실 우리 국민은 적어도 부정부패나 치안, 또는 기후에 관한 걱정은 접어 둬도 좋다. 모든 여행자가 상식적으로 기울여야 할 정도의 주의(注意)만으로도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는 곳이 르완다다.
 
  그러나 위생과 의료에 관해서는 그보다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길게 쓰는 것은 어쩌면 유가족에게 결례가 될지도 몰라 삼가겠지만, 우리 대사관은 금년 7월 말 사랑하는 동료의 부인을 풍토병(박테리아 감염)으로 황망(慌忙)히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지난 6개월간 외교단 가운데는 말라리아나 뇌수막염으로 생사(生死)의 고비를 넘긴 분들도 있었다. 해서, 우리 대사관은 재(在)르완다 동포사회에 건강관리에 신경 쓸 것을 신신당부하고 있다.
 
  키갈리의 밀콜린(Mille Collines) 호텔은 제노사이드 당시 생존자들의 실화(實話)를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다.
 
  지난 10월 31일, 이곳에서 유엔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주르완다 유엔사무소가 주최한 리셉션이 열렸다. 국제기구 대표들과 외교단(外交團)은 말할 것도 없고, 르완다의 장관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정보부장과 경찰청장도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나 싶더니 음악 소리가 들렸다.
 
  뒤편의 출입문에서 다양한 국적의 젊은 유엔 직원들이 르완다 무용수 복장을 하고 입장해 전통춤을 추기 시작했다. 행사 때 흥을 돋우는 르완다 무용수들이 자주 그러하듯, 이들도 준비된 공연 말미에는 객석의 손님들에게 다가가 함께 춤출 것을 권유했다. 잠시나마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20년 전 이 장소에서 만일 누군가가 앞으로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언했다면, 사람이 아무리 낙관적인 것도 좋다지만 제발 현실감도 좀 가지라는 지청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점점 더 커지는 나라
 
  르완다를 비추는 조명이 있다면, 아직 그것은 희미한 20촉 전등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전벽해(桑田碧海)라지 않던가. 내게 ‘20촉 전등’의 미학(美學)을 은연중 심어준 이어령 선생도 일찍이 거인에게 돌팔매질하는 목동처럼 보이던 청년 평론가였지만 이제는 자신을 우상이라 부르며 파괴해 줄 후학(後學)을 기다리는 거목(巨木)이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르완다라는 나라는 훨씬 더 크고 탄탄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르완다라는 국명(國名)은 ‘크완다(kwanda)’라는 르완다어에서 파생되었다. ‘점점 더 커진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動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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