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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장리포트

라싸보다 더 티베트다운 캄에서 본 티베트 문제

大 티베트화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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牟鍾赫
⊙ 44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바이위 사원 한편에서 마니코루(嘛尼筒)를 돌리며 진언(眞言)을 읊조리는 티베트 부녀자들.
  지난 8월 25일 필자가 방문한 도시는 티베트고원에서 가장 높은 리탕(理塘)현이었다. 리탕은 쓰촨(四川)성 성도인 청두(成都)에서 서쪽으로 654km나 떨어져 있는데, 해발이 무려 4014m에 달한다. 가는 길이 험해서 청두에서 자동차로 꼬박 이틀을 달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7월 14일 이 고산도시는 전 세계 언론매체의 주목을 받았었다. 전날 티베트 불교의 린포체(活佛) 텐진 데렉(65)이 교도소에서 숨지자, 주민과 승려 1000여 명이 데렉의 시신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군중을 막아선 공안당국은 시위대가 해산 명령에 따르질 않자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에 흥분한 일부 주민이 경찰 방어선으로 돌진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이 부상을 입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부상자 수와 다친 원인이 총상(銃傷)인지 구타로 인한 것인지는 밝히질 않았다. 텐진 데렉은 2002년 리탕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의 범인으로 지목됐었다.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청두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리탕에서 만난 한 주민은 “린포체의 시신을 건네받아 사원에서 추모 예불을 올리고 천장(天葬)으로 영혼을 위로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본래 텐진 데렉은 현지에서 존경받는 린포체였다. 누구보다 티베트의 전통문화와 리탕의 자연환경 보호에 앞장섰다. RFA는 “텐진 데렉이 반체제 인사로 미운털이 박혀서 억울하게 혐의를 뒤집어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현지 주민은 유혈시위가 일어났던 사실만 확인해 줄 뿐, 더 이상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예부터 쓰촨 내 티베트인들 사이에서는 리탕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하는 노래가 회자됐었다. “하얀 두루미야, 너의 날개를 내게 다오. 아주 멀리 날아가진 않을 거야. 그냥 리탕에만 날아가서 놀다 올게.” 리탕 시내에서 서쪽으로 50여km 떨어진 지점에 이를 증명하는 장소가 있다. 티베트고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오야(毛垭)대초원이다. 해발 6204m인 거녜설산(格聶雪山) 앞에 좌우로 30km나 펼쳐져 있다. 리탕은 ‘거울처럼 평탄한 땅’이라는 티베트어에서 유래했다.
 
 
  ‘佛力 높은 스승’ 라마
 
  필자가 마오야대초원에 도착했을 때 간간이 흩날리던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은 초원 위에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비록 시들기 시작했으나 꽃잎을 붙들어 매며 아름다움을 뽐냈다. 멀리 보이는 거녜설산의 윗부분은 만년설(萬年雪)로 덮여 있었고, 양옆으로 해발 5000m가 넘는 봉우리가 줄지어 버티고 있었다. 산 아래 초원에는 티베트 유목민이 천막을 세웠고 야크(牦牛) 떼는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었다. 단숨에 달려가 그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초원을 가로지르는 우량허(無量河)를 건널 다리가 없었다.
 
  잠시 뒤 길을 오가던 티베트인들과 한족 여행객들이 사진 찍는 필자를 발견하곤 차를 멈추었다. 그들도 카메라, 휴대폰 등을 꺼내들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화를 렌즈에 담았다. 마침 3명의 젊은 승려가 필자 옆에 와서 사진을 찍었다. 모두 중국어에 능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중 한 승려가 “초등학교 졸업 후 리탕 사원으로 출가해 같은 스승 밑에서 한창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집은 바탕(巴塘)현인데, 스승의 허락을 받아 다른 승려들과 귀가했다가 사원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티베트어로 라마(喇嘛)는 ‘불력 높은 스승’을 뜻한다. 티베트인은 출가하기 전 먼저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을 찾는다. 일단 스승과 인연을 맺으면 10년 넘게 생사고락을 함께한다. 따라서 스승은 정신적 멘토이자 부모와 같은 존재다. 학승(學僧)은 스승 밑에서 티베트 문자를 익히고 불교 전반에 대한 지식을 배운다. 일정한 관문과 시험을 거쳐야 수행승인 자바(扎巴)가 되어 승적(僧籍)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수년간의 수행승 과정에서 공부와 명상에 더욱 매진해야 라마가 될 수 있다. 라마가 되면 일반 티베트인들의 스승으로 나서고 제자도 받는다.
 
  거녜설산 앞 초원에서 20km 더 가니 하천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보였다. 마침 강 주변에서는 한 무리의 티베트인이 유목 중이었다. 한족과 접촉이 전혀 없는 고산초원인지라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사전에 배워간 라싸(拉薩)의 티베트어는 그들이 쓰는 방언과 전혀 달랐다. 다행히 “자시델레”라는 인사말은 서로 통했다. “자시델레”는 ‘마음먹은 뜻대로 좋게 잘돼라(吉祥如意)’는 뜻이다. 한 유목민 가족과 손짓 발짓해 가며 “원래 집은 10km 떨어진 마을에 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초원에 나와 야크를 방목하며 지낸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바이위 사원
 
  리탕에서 접한 유혈사태, 고산초원, 설산, 불교 승려, 유목민 등 일련의 사건과 풍경은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연상하는 티베트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티베트를 밑바탕부터 알기 위해서는 먼저 티베트인의 정신세계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티베트 불교부터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리탕에서 꼬박 하루 동안 험준한 산을 넘고 길을 달려 바이위(白玉)현에 도착했다. 바이위의 면적은 1만591km2에 달하지만, 2013년 말 호적인구는 5만4000명에 불과하다. 이 중 티베트인이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한다.
 
  바이위는 티베트어로 ‘덕이 넘치는 땅’이란 의미다. 이름에 걸맞게 바이위에는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중 하나면서 가장 오래된 닝마파(寧瑪派)의 핵심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고대 티베트인들은 샤머니즘의 성격과 내용이 강한 토착신앙 ‘뵌교’를 믿었다. 뵌교는 하늘과 땅, 해와 달, 산과 호수 등 자연을 숭배했다. 티베트고원은 평균 해발이 4500m로 하늘과 가깝다. 고대 티베트인들은 하늘은 신과 죽은 영혼이 사는 극락으로, 해와 달은 세상을 밝혀주는 광명의 신으로 받들었다.
 
  설산은 사시사철 만년설에 뒤덮여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다. 만년설에서 녹아내린 물은 시내와 하천을 만들지만, 때때로 산사태를 일으켜 사람들을 위협한다. 이런 설산을 고대 티베트인들은 경외감을 느끼며 신산(神山)으로 숭배했다. 마오야대초원에서 봤던 거녜설산도 티베트 24개 신산 중 하나다. 호수는 척박한 대지를 적셔주는 고마운 존재다. 특히 티베트에는 염호(鹽湖)가 많아 사람들에게 소금을 선사한다. 고대 티베트인들은 호수를 신호(神湖)로 섬겼고, 국가 대사나 집안 큰일을 결정하기 전 뵌교의 무당을 보내 길흉을 점쳤다.
 
  이런 티베트의 원시종교시대를 종식한 이가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다. 파드마삼바바는 8세기 초 인도 우디야나의 왕자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연꽃에서 출생했다고 해서 ‘연화생(蓮華生)’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어린 나이에 출가해 나란다 불교대학에서 수학했고 그 뒤 여러 나라를 떠돌며 수행했다. 그의 명성을 전해들은 티베트왕국(吐藩)의 티송데첸(赤松德贊)왕이 초청하자 티베트로 건너갔다.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서 밀교(密敎)를 포교했고, 뒤이어 761년 티송데첸왕은 불교를 국교로 정했다. 이듬해 티베트 최초의 불교사찰인 삼예 사원(桑耶寺)을 짓기 시작해 775년에 낙성(落成)했다. 파드마삼바바는 낙성법회를 봉행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티베트의 원시종교시대를 끝낸 파드마삼바바
 
  닝마파는 파드마삼바바를 조사(祖師)로 섬긴다. 필자가 바이위 사원 내 연화생 전각에서 만난 라마 니츠마니(31)는 “우리 종파는 파드마삼바바가 문수보살, 관음보살, 금강수(金剛手)보살이 합일된 제2의 석가모니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 종파답게 닝마는 티베트어로 ‘오래되다’, 닝마파(pa)는 ‘오래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9세기 중엽부터 티베트왕국의 분열과 뵌교 승단의 반격으로 200년 넘게 침체에 빠졌던 티베트 불교를 부흥시킨 아티샤(Atisa)가 이름 지었다. 아티샤는 11세기를 기점으로 닝마파를 구파(舊派)로, 나머지 3대 종파를 신파(新派)로 나눴다.
 
  다른 종파와 달리 닝마파는 밀교의 전통이 아주 강해 조직화와 중앙집권화가 더디었다. 니츠마니는 “닝마파는 한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차례대로 전해지는 ‘구전(口傳)의 가르침’, 오랜 수행과 명상을 통해 생성(生成)을 넘어 완성(完成)에 이르는 ‘수행의 가르침’을 중시한다”고 소개했다. 이런 연유로 오랫동안 삼예 사원 이외에 다른 사찰을 세우지 않았다. 17세기 닝마파를 존중했던 달라이 라마 5세의 후원 아래 파드마삼바바와 관련된 성지에 6대 사원을 건립했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크고 세력이 강력했던 것이 1675년에 창건한 바이위 사원이다.
 
  바이위 사원은 시내 뒷산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다. 크고 작은 전각과 학당을 중심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승방이 산을 뒤덮고 있다. 본래 바이위 사원은 지금보다 훨씬 웅장했다. 1951년 티베트를 점령한 중국은 1959년 티베트인들이 독립 투쟁을 벌이자, 불교 사원을 봉기의 근거지로 지목해 파괴했다. 특히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은 티베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찰을 방화했고 승려를 쫓아냈다. 이 시기 바이위 사원도 잿더미로 변했다가 1980년대 초부터 재건했다.
 
  1960년 바이위 일대 모든 닝마파 종단의 종정(宗正)인 린포체 페놀 11세도 인도로 망명했다. 페놀 11세는 남인도에 사원을 세웠고 네팔, 대만, 홍콩, 미국, 캐나다 등에도 분원을 열어 포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 2009년 ‘고향에서 반드시 환생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78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4년 뒤 유언처럼 환생한 페놀 린포체를 찾아냈다. 주인공은 시짱(西藏)자치구 자차(加査)현의 두 살 난 아이였다. 지난해 7월 31일 바이위 종단은 페놀 12세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날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 설법을 했다는 초전법륜일(初轉法輪日)이었다. 즉위식을 전후해 중국 각지와 전 세계에서 신자 15만명이 바이위현으로 몰려들었다.
 
 
  티베트 불교의 가장 큰 특징 린포체 전세 제도
 
필자를 위해 포즈를 취한 치메 린포체.
  이 린포체 전세(活佛轉世) 제도는 티베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람에게 있어 죽음은 가장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고대 티베트인들은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갖게 됐다. 육체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영혼은 잠시 하늘로 올라갔다가, 새로운 생명체의 몸을 빌려 다시 강림(降臨)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뵌교가 이 같은 사상체계를 확립했다. 흥미로운 점은 막강한 주술력을 쌓은 무당은 사람으로, 일반인들은 다른 생명체로 환생(還生)한다고 믿었다.
 
  인도에서 전래한 불교는 티베트의 토착신앙과 장기간 다투면서 뵌교의 일부 교리와 의식을 흡수했다. 특히 환생관이 대표적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모든 라마가 본래대로 환생한다고 여기질 않았다. 깊은 영적 수행을 거쳐 위대한 업적을 쌓은 고승만이 가능했다. 이들이 바로 린포체다. 본래 전세 제도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다. 티베트왕국이 붕괴된 이후 티베트는 오랫동안 분열했다. 대다수 티베트인이 유목생활을 영위했기에 사회 통합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교는 수백 년에 걸친 뵌교 승단 및 보수귀족들과의 투쟁에서 이긴 뒤 사분오열한 티베트를 통합했다.
 
  티베트 불교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절대적인 종교지도자를 내세워야 했다. 또한 지속적인 영향력 행사를 위해 지도자의 승계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 전통적인 환생관에서 빌려온 전세 제도다. 환생관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관념이었기에 일반 대중에게 거부감이 없었다. 티베트 불교는 끊임없이 환생하는 린포체를 내세워 정치적 권력을 유지했고, 지도자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세력 다툼도 제거했다.
 
  필자는 바이위 사원의 한 말사(末寺)인 자카츄에서 폐관 수행 중인 린포체 치메 또지(73)를 만났다. 그는 바이위 종단에서 서열 4위의 고승으로, 입적한 린포체 페놀 11세가 처음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이다. 치메 린포체는 “선사(先師) 밑에서 수행했던 학승 중 나와 사형 2명만 남았다”고 말했다. 환생에 대해 그는 “라마나 중생이 불공을 쌓으면 사람으로 환생한다. 하나 본래의 영혼을 지닌 채 환생하는 이는 오직 불심 깊고 일정한 공덕을 쌓은 고승뿐이다”라고 소개했다. 현재 티베트 불교 승려 가운데 린포체는 500여 명에 달한다. 그중 으뜸이 달라이 라마 14세다.
 
  바이위 사원은 닝마파 종단의 본사답게 자체 목판인쇄소를 갖추고 있다. 목판으로 새겨진 경전을 대중에게 보급하는 일은 티베트에서 아주 중요하다. 초창기 티베트 불교는 제대로 된 경전(經典) 없이, 대개 구전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교리는 종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었고 예불의식도 사원마다 각기 달랐다. 이런 혼란상을 종식시킨 이가 총카파(宗喀巴·1357~1419)다. 총카파는 본명이 로상 닥페 벨로, 지금의 칭하이(靑海)성인 암도(安多)의 총카 계곡에서 태어났다. 총카파는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3세 때 승려 된둡린첸에게 맡겨졌고, 8세에 출가해 학승이 됐다. 16세에 자바가 되자, 보다 깊은 불심을 얻기 위해 스승의 곁을 떠나 여러 종파의 사원을 전전하며 반야(般若)사상을 연구했다. 총카파는 구도행(求道行) 과정에서 1390년 정신적 스승 우마파를 만났다. 우마파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공성(空性)을 이해했고 문수보살과 교감까지 했다. 자신만의 사상체계를 완성한 총카파는 오랜 사색을 끝내고 행동에 나섰다. 잘못된 교리와 해석을 신랄히 비판했고, 대중 강론을 한 치도 어긋나는 법이 없이 진행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줄을 잇자, 총카파는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사원 생활을 청렴하게 하도록 강조했다. 총카파는 이를 체계화하기 위해 1392년 ‘깨끗한 계율을 지키는 사람’ 겔룩파(格鲁派)를 창시했다. 1409년 티베트력 1월 1일부터 보름간 총카파는 라싸의 조캉 사원(大昭寺)에서 모든 생명의 행복을 기원하는 법회 ‘몬람’을 주재했다. 그 뒤 몬람은 겔룩파 최대의 종교 집회이자 티베트 민족 축제로 발전했다. 또한 겔룩파는 라싸에 뿌리내리면서 1409년 간덴 사원(甘丹寺), 1416년 드레펑 사원(哲蚌寺), 1419년 세라 사원(色拉寺) 등을 잇달아 건립했다.
 
  총카파는 겔룩파의 조사로 오늘날까지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는 중생들이 제대로 된 불경을 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래서 목판에 경전을 새겨서 종이나 천에 찍어 보급도록 했다. 티베트 불교의 상징 기호처럼 떠올리는 타르쵸(經幡)는 천 위에 찍어 만든 깃발이다. 목판인쇄소에서 일하는 투떵(41)은 “목판에는 불경의 내용, 고승의 강론, 탕카(幀畵)의 그림 등을 새긴다”며 “한 획 한 획 정교하게 파야 하기에 고도의 집중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투떵은 목판 장인으로 18년째 일하고 있다.
 
 
  문화대혁명도 파괴 못 한 더거인경원
 
3대에 걸쳐 지은 티베트 최대의 더거인경원. 문혁 시기 다른 전각은 모두 파괴되고 본전만 남았다.
  바이위에서 북쪽으로 4시간 거리의 더거(德格)현에는 티베트에서 가장 큰 목판인쇄소가 있다. 겅칭 사원(更慶寺)이 운영하는 더거인경원(印經院)이 그것이다. 더거인경원은 티베트인들 사이에서 ‘티베트 문화의 백과사전’ ‘설산 속의 문화보고’로 불린다. 1729년 창건 이래 양면에 문자와 판화로 조각한 32만 권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인지 1959년 티베트인의 독립 투쟁이 발발했을 때 중국군도 인경원만은 남겨뒀다. 문화대혁명 때는 현지 주민들이 목숨 걸고 지킨 덕분에 본전과 목판 대부분이 참화를 피했다.
 
  더거는 티베트어로 ‘아름다운 땅’이다. 그 땅을 다스렸던 영주 딴바이런은 산비탈을 깎아 인경원을 짓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쌓던 건물을 아들이 이어 지었고 다시 손자가 계승했다. 그렇게 30년을 지어 면적 3000m2, 3층 규모로 완공했다. 인경원은 견고히 지었기에 수차례의 내부수리를 제외하고 300년 동안 보수할 필요가 없었다. 목판에는 불경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의학, 천문, 문학 등도 기록했다. 그중 70%를 한 세기 이전에 새긴 것이다. 특히 전설적인 영웅 게사르(格薩爾)의 서사시를 새긴 목판은 길이가 세계에서 가장 길어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
 
  겅칭 사원이 속한 사캬파(薩迦派)는 1073년 꼰촉 겔뽀가 티베트 서남부의 사까 지방에서 창시했다. 사캬파는 다른 종파와 달리 꼰촉 겔뽀의 핏줄만이 종정이 되고 세습한다. 따라서 지금의 종정인 텐진 린포체는 꼰촉 겔뽀의 41대 후손이다. 또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문자와 언어로 쉽게 전달하는 현교(顯敎)에 속한다. 이 덕분에 세력을 빠르게 넓혀갔고, 13세기에는 원나라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100여 년간 티베트 전역을 지배했다.
 
  이는 사캬파의 중시조(中始祖)로 꼽히는 파스파(八思巴)의 공이 크다. 몽골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정(西征)에 성공한 뒤 티베트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최고의 라마를 제국의 궁정으로 보내라. 그러지 않으면 티베트를 짓밟을 것이다”고 위협했다. 이에 따라 1244년 사캬 판디타가 어린 조카들과 함께 몽골로 갔다. 이후 그는 1251년 입적을 하고, 조카 파스파가 궁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260년 즉위한 쿠빌라이 칸은 파스파를 국사(國師)로 임명하면서 모든 불교도와 티베트인의 통치권을 위임했다. 파스파의 노력으로 몽골인들은 티베트 불교를 신봉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티베트의 어원도 몽골어인 ‘투베트(Thubet)’에서 유래했다.
 
  더거에서 동쪽으로 출발해 해발 6168m의 췌얼산(雀兒山)을 넘으면 간쯔(甘孜)현이 나온다. 간쯔의 주요 사찰은 바이위나 더거와 달리 겔룩파 사원이다. 필자는 시내에 들어서기 전 린포체 빠덴 시라(41) 일행과 조우했다. 빠덴 린포체는 간쯔 사원에서 서열 3위의 고승으로, 인도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야외 법회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는 “본래 이 일대는 토착 영주의 후원을 받아 다른 종파의 세력이 강했다”며 “17세기 훠얼(藿爾) 가문의 치지 앙웡펑춰가 라싸로 가서 달라이 라마 5세에게 가르침을 받고 돌아온 뒤 13곳에 사원을 세우면서 겔룩파가 뿌리내렸다”고 밝혔다.
 
  14세기 명나라는 원을 대륙에서 쫓아내느라 티베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실제 쿠빌라이 가문의 원 황실만 몰락했을 뿐, 몽골고원에는 북원(北元)이 새로 들어섰다. 몽골 서부와 서역(西域)은 15세기 초 홉스굴에서 흥기한 몽골인의 사촌격인 오이라트 부족이 지배했다. 오이라트 부족은 몽골인처럼 티베트 불교를 줄곧 존중했다. 17세기 초 티베트는 카규파(喝擧派)가 세운 짱바 칸(藏巴汗) 정권과 뵌교를 지지하는 영주, 몽골 계열의 영주 등이 분할 할거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1634년 달라이 라마 5세는 오이라트 4부 중 호쇼트(和碩特)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637년 호쇼트부의 수장 구시 칸(固始汗)은 군대를 이끌고 암도로 쳐들어가 카규파 세력을 토벌했다. 1641년에는 라싸와 르카쩌(日喀則)를 기습해 짱바 칸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듬해 달라이 라마는 구시 칸으로부터 통치권을 넘겨받아 티베트를 통일해 정교합일(政敎合一) 정권을 수립했다. 1645년 구시 칸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로산 초에키 기알첸을 판첸 라마 4세로 옹립할 것을 요구했고, 달라이 라마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판첸 라마는 티베트의 2인자가 되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환생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攝政)하는 권한을 가졌다.
 
  1717년 서역을 제패한 준가르 제국이 라싸를 침공했다. 1720년 청나라는 티베트를 보호한다며 출병해 준가르군을 몰아냈다. 티베트를 장악한 청은 달라이 라마 체제는 존속시키되, 1727년부터 주장대신(駐藏大臣)이라는 관리를 파견해 내정을 간섭했다. 1792년에는 금병추첨(金甁抽籤)을 도입해 간접 통치를 강화했다. 금병추첨은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환생자를 정할 때 주장대신이 추정되는 아이의 이름과 생년을 금항아리에서 작대기로 뽑는 의식이다. 또한 캄(康)을 티베트로부터 분리했고, 진사강(金沙江)을 기점으로 서쪽만 달라이 라마의 관할로 인정했다.
 
 
  달라이 라마가 망명을 결정하게 된 이유
 
두 명이 한 조를 이뤄 한 명이 목판 위에 물감을 묻히고 종이를 놓으면, 다른 한 명은 롤러로 눌러 찍어낸다. 반복으로 이어지는 속도가 아주 빠르다.
  여기서 캄은 티베트 동부 지역으로, 티베트 방언인 캄어를 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쓰촨성 서부, 윈난(雲南)성 서북부, 간쑤(甘肅)성 서남부를 포괄한다. 예부터 이 지역은 중앙 티베트와 중국 내지의 접경지대였다. 평균 해발이 4000m가 넘어 대지는 척박하고, 고산을 넘어야 다른 마을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인구 밀집도가 낮다. 또한 중앙 티베트인에게서 촌사람이라는 업신여김을 받았고 한족의 침략을 수시로 당했다. 이 때문에 캄의 티베트인들, 즉 ‘캄파(康巴)’는 성격이 억세고 거친 편이다.
 
  사실 티베트의 영토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크고 거대하다. 옛날부터 티베트인들은 중앙은 위짱(衛藏), 동부는 캄, 서부는 아리(阿里), 북부는 암도로 구분했다. 이는 지금의 시짱 전체, 쓰촨의 40%, 윈난의 10%, 간쑤의 15%, 칭하이 전체 등 5개의 성·자치구에 걸쳐 있다. 전체 면적이 190만km2에 달해 중국 영토(960만km2)의 1/5에 해당한다. 2010년 제6차 중국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전체 티베트인은 628만명, 이 중 절반도 안 되는 271만6000명이 시짱에 살고, 302만5000명이 캄과 암도에 거주하며 54만명이 중국 내지에 흩어져 산다.
 
  18세기부터 티베트가 청에 예속됐다곤 하지만, 티베트인의 거주 범위에서 볼 수 있듯 그 지배력은 한정됐다. 또한 만주족은 티베트 불교를 숭배했기에 종교의 자유를 무제한 허용했다. 위짱과 아리, 암도에선 달라이 라마의 정교합일통치가 유지됐고 티베트인들은 청의 피정복민이라 여기질 않았다. 청 황제를 문수보살 대황제로 존칭했으나, 티베트 불교를 수호하는 중국 황제라고 인식했을 뿐이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성은 더욱 강화됐다. 1888년과 1904년 영국군이 두 차례 침략하자, 티베트인은 결사항전을 벌였다. 이에 반해 라싸 주둔 청군은 영국의 침략을 방관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자, 달라이 라마 13세는 중국인 관리와 군대를 추방한 뒤 독립을 선언했다. 1912년에는 티베트군이 리탕을 함락했고, 이에 호응해 캄과 암도 각지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1917년에는 티베트군이 중국군을 몰아내고 캄 대부분을 점령했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중국군은 여러 차례 캄으로 진격했지만, 작전은 항상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시기 티베트는 중국의 행정력이 닿질 않았다. 1934년 국민당 정권이 라싸에 멍짱(蒙藏)위원회 라싸사무소를 설치했으나, 티베트의 독립적 지위를 훼손하진 못했다.
 
  티베트고원의 평화가 깨진 것은 1950년 1월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은 티베트가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라며 티베트에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겠다고 선언했다. 10월 중국군 4만명은 티베트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티베트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수십 년간 내전으로 단련된 중국군의 적수가 되질 못했다. 참도 전투에서만 티베트군 5700명이 죽고 2000여 명이 투항했다. 결국 티베트 정부는 무력 항쟁을 포기하고 1951년 5월 중국 정부와 ‘티베트의 평화 해방에 관한 협의 17조’를 체결했다. 이후 티베트는 민족자치를 시행하는 중국의 한 지방으로 격하됐고, 중국은 “티베트 고유의 종교사회제도를 강제로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티베트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한다는 중국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질 않았다. 중국은 티베트를 쪼개서 캄과 암도를 내지로 편입시켰다. 1954년에는 촨짱(川藏)공로와 칭짱(靑藏)공로를 개통해 티베트 지배를 공고히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강압적인 토지개혁과 식량징발을 추진했다. 비협조적인 승려는 강제로 환속시켰고 사원은 파괴했다. 중국의 속박과 탄압이 이어지자, 1957년 캄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게릴라 투쟁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 숫자는 티베트 전역에서 8만여 명에 달했다.
 
  1959년 3월 10일 라싸에서 달라이 라마 14세가 중국군 사령관의 초대로 창극 관람을 위해 군영에 불려간다는 소문이 퍼졌다. 티베트인 2000여 명이 노부링카궁(羅布林卡宮) 주변에 몰려 달라이 라마가 공연에 가질 못하게 막았다. 중국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해 베이징(北京)으로 데려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침공 이후 여러 곳의 린포체가 중국군의 문화공연에 초대됐다가 실종되는 일이 빈번했다. 중국군은 “한족을 몰아내자” “티베트 독립”을 외치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날 이후 독립 투쟁이 가열되자, 달라이 라마는 더 이상의 참극을 막기 위해 망명을 결정했다. 3월 17일 달라이 라마와 호위단은 노부링카궁을 빠져나가 인도로 향했다. 같은 해 승려와 민중 8만여 명도 히말라야산맥을 넘었다. 그 뒤 중국 정부는 게릴라와 시위자에 대한 처형, 불교사원의 무차별 파괴, 일반인에 대한 노동교화와 사상개조 등을 자행했다. 1965년부터 인민공사(人民公社) 사업을 추진해 농민과 유목민을 기아에 빠뜨려 다수의 아사자를 발생케 했다. 문혁 시기에는 6259개 불교사찰 중 네댓 개만 남긴 채 모두 파괴했다. 1951년부터 1978년까지 중국의 폭정하에 숨진 티베트인은 100만명에 달한다.
 
 
  티베트도 중국도 아닌 캄
 
한 겔룩파 사원 안에 안치된 총카파 금동상과 판첸 라마 10세 사진(좌).
  1970년대 말부터 중국은 종교 활동을 다시 허용했다. 보조금을 지급해 파괴된 불교사찰 재건을 지원했다. 하나 억압의 고삐는 늦추질 않았다. 사원의 정원을 엄격히 제한했고 승려에게 애국교육을 강요했다. 산아제한정책에 따라 한 가정에 자녀 둘만 낳게 했고, 셋째를 가진 임신부는 강제로 낙태시켰다. 이런 강압정책에 반기를 들어 1989년 3월 라싸에서 티베트인 1만여 명이 독립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저항했지만, 장갑차를 앞세워 총기를 난사하는 중국군에게 진압당했다. 사망자 250여 명을 낸 진압작전을 지휘한 이가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이었다.
 
  그 후 중국은 좀 더 교묘한 정책을 채택했다. ‘지역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도로와 철로를 건설했다. 2006년 7월 개통한 칭짱철도가 대표적이다. 지난 8월 22일부터 필자는 윈난성 샹그릴라에서 출발해 쓰촨성 청두에 이르는 3200km의 고산도로를 11일 동안 달렸다. 일부를 제외하고 도로가 너무나 잘 닦여져 있었다. 실제로 한족은 도로와 철로를 통해 티베트인 거주지로 끊임없이 이주했다. 2010년 라싸의 인구는 55만명이었는데, 그중 티베트인이 42만명(76%), 한족이 12만명(21%)이었다. 1949년 라싸의 한족은 1000여 명에 불과했었다.
 
  이런 한족의 대거 이주에 반발해 2008년 3월 라싸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시위는 이전과 양상이 전혀 달랐다. 시위대는 티베트 독립뿐만 아니라 한족 축출을 외쳤다. 구호에 그치지 않고 일부 군중은 한족이 운영하는 가게를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인 회족(回族)의 식당도 피해를 입었다. 캄 곳곳에서도 라싸의 시위에 호응했다. 간쯔현에서는 두 달간 승려와 주민의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위신이 떨어진 중국 정부는 2009년 여름까지 모든 외국인과 한족 개별여행객의 시짱과 캄 전역의 출입을 통제했다.
 
  한편, 인도에 도착한 달라이 라마 14세는 망명정부를 세우고 다람살라에 ‘작은 라싸’를 건설했다. 정식 명칭이 ‘티베트중앙행정부’인 망명정부는 티베트로의 복귀를 목표로 한다. 과거 티베트는 철저한 계급사회로 폐쇄적이었다. 심지어 중국의 침공 이전까지 농노제(農奴制)를 유지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반성하여 망명정부는 삼권을 분립하여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한다. 2012년 달라이 라마는 정치권력을 새로이 취임한 롭상 상가이 총리에게 물려줬다. 롭상 상가이는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망명세대’다.
 
  오랫동안 망명정부는 중국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1979년 첫 접촉 이전까지 중국 정부와의 어떤 만남도 피해왔다. 이런 노선에 변화가 온 것은 1988년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유럽의회 연설에서 비폭력·평화노선을 천명하면서, 중국 중앙정부가 국방·외교권을 갖되 ‘고도의 자치’를 보장받은 티베트 정부가 들어서는 ‘평화 5조항’을 제시했다. 이에 국제사회가 호응해 티베트 문제는 글로벌 이슈로 부각됐다. 서구세계의 압력으로 중국은 망명정부와 몇 차례 협상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더욱 진전된 입장을 내놓았다. 1999년 3월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티베트청년회의(TYC)에 분리독립 포기를 설득하겠다”고 천명했다. 뒤이어 중국에 특사를 수차례 파견해 티베트 문제를 논의했다. 2005년 3월에는 “분리독립을 추진하지 않고 고도의 자치만 추진하겠다”는 ‘중도노선(Middle Way)’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은 “중도노선은 ‘선(先)자치 후(後)독립’의 변형된 독립노선”이라며 “국가 분열행위를 영원히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라”며 압박했다. 망명정부의 대화 상대인 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는 지난 8월 25일 발표한 성명에서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중도노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중국이 중도노선을 강력히 거부하는 데는 달라이 라마가 선제조건으로 내건 ‘대 티베트(大藏區) 자치안’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 티베트는 시짱자치구 외에도 다른 티베트인 거주지인 캄과 암도를 하나로 묶는 개념이다. 중국은 “현재 대 티베트 지역에는 티베트인뿐만 아니라 한족, 회족, 몽골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다”며 “다른 민족을 내쫓는 ‘민족 말살책’이다”고 비난했다. 2009년 3월 양제츠(楊潔箎) 당시 외교부장은 “달라이 라마가 중국 영토의 1/5에 달하는 곳에 ‘대 티베트 독립지구’를 건설해 분열주의를 획책한다”고 성토했다.
 
  실제 대 티베트 개념은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달라이 라마는 위짱과 아리, 암도 이외에서 행정권을 행사하질 못했다. 과거 캄은 각지의 영주들이 자신의 도시를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그들은 티베트인이라는 정체성과 불교도로서의 신심(信心)으로 달라이 라마를 따르고 존중했을 뿐이다. 명·청조도 이런 상황을 악용해 영주들을 지방행정관인 토사(土司)로 임명해 간접 통치했다. 국민당과 공산당 정권은 캄을 아예 분리해 시캉(西康)성을 설치했다. 1910년대 달라이 라마 13세가 무력으로 캄을 점령한데는 이런 연유에서 비롯됐다.
 
 
  자치는 한계, 독립은 요원
 
  달라이 라마 14세도 이런 역사와 현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 티베트 자치안은 중도노선에 반대하는 TYC를 설득하는 데 효율적이다. TYC는 전 세계에 회원이 8만명에 달하는 청년조직이다. 또한 모든 티베트인을 하나로 묶는 상징적인 수단이다. 시짱자치구를 제외한 캄과 암도에서 한족의 유입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2010년 현재 캄 내 자치주 인구분포를 살펴보면, 쓰촨성 간쯔 109만명의 78%, 아바(阿壩) 89만명의 56%, 윈난성 디칭(迪慶) 40만명의 35%, 간쑤성 간난(甘南) 68만명의 50%가 티베트인이다. 1949년 캄에 살던 한족은 전체 인구의 5%도 안 됐었다.
 
  만약 달라이 라마가 대 티베트 자치안을 버릴 경우, TYC의 엄청난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캄과 암도의 티베트인들도 정신적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이미 이들은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중국 정부와 티베트 망명정부에 압력을 넣고 있다. 2011년 3월 아바현에서 시작된 승려와 주민의 분신은 이미 140명을 넘어섰고 대부분이 사망했다. 분포 도시는 이번에 필자가 둘러본 간쯔, 다오푸(道孚) 등을 포함해 20여 개에 달하는데, 그중 90% 이상이 캄에 속해 있다.
 
  물론 소신공양 사태의 이면에는 티베트인들의 경제사회적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 금세기 들어 중국 정부는 캄에서 강력한 도시화와 유목민의 정착 정책을 펼쳐왔다. 산골에서 칭커(青稞)를 재배하고 초원에서 야크를 유목하며 자급자족해 왔던 티베트인들을 도시로 몰아넣었다. 2013년 6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부터 7년간 약 200만명을 새집으로 이주시키거나 살던 집을 개조했다. 소피 리처드슨 HRW 국장은 “티베트 전통문화와 생활양식을 파괴하기 위한 정책”이라며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유례가 없던 일”이라고 비판했다.
 
  지금도 중국 관영언론은 유목하다가 도시로 정착해 행복하게 사는 티베트인 가정을 심심찮게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도시에 사는 티베트인은 취업난, 빈부격차, 물가고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는 2011년 9월 쓰촨성 정부가 티베트인 거주지인 32개 현 1458가구를 설문조사한 결과에서 잘 드러난다. 조사 대상의 47.2%는 ‘당면한 취업난이 극심하고 앞으로도 낙관적이지 못하다’고 응답했다. 쓰촨성 정부조차 “심각한 빈부격차를 축소하고 물가고를 해소해야 민생안정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간쯔자치주의 여러 도시에서 그 현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더거에서 렌터카 기사로 일하는 쯔런 자시(31)는 7년 전 도시로 내려왔지만 단 한 번도 회사에 취직하질 못했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졸업 후 진학을 못 했기에 도시에서 문자와 언어 체계가 전혀 다른 중국어를 다시 배워야 했다”며 “결국 학력이 낮고 익힌 기술이 없어 취업을 못 해 야크를 판 돈으로 차를 사서 여행객들을 관광명소에 데려다주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더거 교외의 산골에서 만난 차시 조마(여·55)는 “1년 이모작으로 칭커를 재배하고 여름에 송이버섯을 채취해 내다 팔아도 한 해 수입은 3000~4000위안(약 55만~74만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막내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어떻게 대줄지 걱정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간쯔자치주의 물가 수준은 대도시와 별 차이가 없다. 야크 고기는 500g에 40위안(약 7400원)이 넘고 내지에서 수입하는 공산품은 대도시보다 비싸다. 간쯔의 한 학교 교사인 깐토 요전(여·36)은 “지난 10여 년간 동충하초와 송이버섯 가격이 급등했지만 정작 유통을 장악한 한족 상인만 큰돈을 벌었다. 이런 상대적 박탈감이 더해져 티베트인들의 불만이 높다”고 밝혔다.
 
  지난 9월 1일 티베트 정부를 대체한 시짱자치구가 출범한 지 50주년이 됐다. 이를 기념해 9월 8일 중국 정부는 라싸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를 가졌다. 기념식장은 오성홍기로 뒤덮였고, 역대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초상화가 내걸렸다. 특히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변경을 다스려야 하고, 변경을 다스리려면 먼저 시짱을 안정시켜야 한다(治國必治邊, 治邊先穩藏)’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어록이 쓰인 대형 플래카드가 식장 배후에 배치됐다.
 
  기념행사에 앞서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시짱에서의 민족지역 자치제도 성공적 실천》이라는 백서를 발간했다. 백서에 따르면, 시짱의 GDP는 1965년 3억2700만 위안에서 2014년 920억8000만 위안으로 281배나 증가했다. 특히 중앙정부가 1952년부터 2014년까지 6480억 위안(약 119조8800억원)의 재정지원을 해주어 티베트의 경제발전을 이끌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있다. 티베트인이 진정으로 바라고 염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다. 지금처럼 표면적인 실적만 들이대면서 티베트인들을 압박한다면 티베트의 평화와 안정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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