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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스포츠 소식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가 된 ‘야구 천재’ 이치로

글 : 이상희  월간조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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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리그 데뷔 첫해 타격왕, 도루왕, 신인왕 이어 최우수선수상까지 휩쓸어
⊙ 타격폼 보고 2군으로 강등시킨 오릭스 감독과 장점을 보고 주전으로 발탁한 후임 감독
⊙ 이치로의 메이저리그행에 냉담한 반응 보였던 미국 언론들의 反轉
‘야구 천재’ 이치로의 성공은 99%의 열정과 노력이 빚어낸 결과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메이저리그’는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들만 뛸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이곳은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아시아 선수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불사조’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투수 박철순(59)을 포함한 몇몇 아시아 선수가 과거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 중 일본인 투수 마사노리 무라카미(71)만 1964년 9월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아시아 출신으론 최초였다. 하지만 그의 선수생명은 짧았다. 무라카미는 빅리그 통산 5승 1패의 성적을 거둔 뒤 1966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내 원소속팀과의 계약 문제 때문이었다.
 
  빅리그의 높은 벽을 허물며 ‘아시아 선수들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한다’는 것을 입증한 이는 박찬호(42)와 노모 히데오(47)다. 한일(韓日) 양국을 대표했던 두 투수는 90년대 중반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돌풍을 일으켰다.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1994년 4월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이후 17년간 빅리그를 호령하며 통산 124승 98패의 성적을 거둔 뒤 은퇴했다. ‘아시아 투수 빅리그 최다승’ 업적도 쌓았다. 히데오 또한 다저스 소속으로 1995년 5월 빅리그에 데뷔한 뒤 통산 123승 109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박찬호와 히데오 두 투수의 성공은 훗날 김병현(KIA), 다르빗슈 유(텍사스 레인저스), 류현진(LA 다저스) 등 다수의 아시아 투수가 빅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 때문에 이 둘은 ‘메이저리그를 개척한 아시아 투수’라는 칭송을 받는다. 미국 프로야구 스카우트 재단(PBSF)으로부터 ‘야구 개척자 상’도 수상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아시아 투수들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 야수(野手)들은 외면했다. 성공사례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구 천재’로 불리는 일본인 외야수 스즈키 이치로(42·마이애미 말린스)가 등장하면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갈색 돌풍’
 
  이치로는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며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그는 일본은 물론 아시아 최초로 빅리그에 진출한 야수가 된 것은 물론 메이저리그 데뷔 첫해에 아메리칸리그 타격왕, 도루왕, 신인왕은 물론 최우수선수(MVP) 상까지 휩쓸었다. 일본 프로야구(NPB)에서 7번이나 타격왕 자리에 올랐던 그였기에 어느 정도 잘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치로가 빅리그 데뷔 첫해에 이토록 성공할지는 몰랐다. 모두가 놀랐다.
 
  이치로가 몰고 온 ‘갈색 돌풍’은 이후 10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강타했다. 데뷔 첫해부터 10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된 것은 물론 10시즌 연속 200안타와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타자로 군림했다. 84년간 이어오던 빅리그 한 시즌 최다안타(262개) 기록도 이치로가 경신했다. 올해 42세인 이치로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선수로 뛰고 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폭발력은 없지만 여전히 새로운 기록들을 세워가고 있다.
 
  아시아 출신 최초의 야수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은 물론 각종 신기록을 세워가고 있는 이치로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이치로는 지난 7월 말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빅리그 성공비결에 대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누구보다 더 야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야구에 쏟아부은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이따금 사람들은 내가 가진 야구 열정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 열정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고, 지금껏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치로가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월간조선》이 처음이다. 그의 전담 통역인 일본계 미국인 앨런 터너(Allen Turner)를 통해 이루어졌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현역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자기관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야구선수들의 수명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왜 짧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과거에 비해 현재는 각종 문명의 발달로 예전에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나 또한 그런 문명의 도움과 혜택을 받아 과거에는 불가능했을지 모르는 40대 나이에도 건강하게 현역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치로에게 ‘한국 선수들처럼 체력 보강을 위해 인삼이나 녹용 등의 보양식’을 먹는지 묻자 그는 “특별히 즐겨 먹는 보양식은 없다. 다만 일본에서 만들어 갖다주는 영양음료는 시즌 내 꾸준히 챙겨 먹는다”고 말했다. 이치로는 좋아하는 음식으로 ‘카레라이스’를 꼽았다. 그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카레를 좋아해서, 매일은 아니지만 시즌 내 자주 즐겨 먹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야채를 싫어해서 건더기를 넣지 않고 먹는다”고 했다.
 
 
  99%의 노력과 열정의 산물
 
  일본 나고야 외곽의 소도시 도요야마 출신인 이치로는 7세 때 부친 스즈키 노부유키의 가르침을 받으며 야구를 시작했다. 기자와 친분이 있는 일본 야구기자 다카노 이시이에 따르면 이치로는 부친과 함께 매일 투구와 수비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치로는 아버지가 던져주는 공과 피칭머신(Pitching machine)을 통해 날아오는 공까지 하루에 무려 500개의 공을 타격했다. 1년에 단 하루만 쉬고 연습을 했는데 그 하루는 타격연습장이 유일하게 문을 닫는 날이었다.
 
  리틀야구 시절, 이치로는 자신의 글러브에 ‘집중’이란 글자를 새겨넣었을 만큼 야구에 대한 몰입도가 높았다. 12세 때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치로의 부친은 훗날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들과 함께하는 야구연습은 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치로는 “아버지에겐 재미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는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다.
 
  이치로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그의 부친은 야구부 코치에게 “이치로가 아무리 잘해도 절대로 칭찬하면 안 된다. 우리는 그를 정신적으로 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교시절 이치로는 투수와 외야수로 활약하며 통산 타율 0.505, 19홈런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이 시절 이치로는 타이어를 끌고 달리는 훈련을 통해 허리와 골반의 힘을 키웠고, 가벼운 플라스틱 공을 무거운 삽으로 쳐내는 연습을 통해 손목힘과 배트 스피드도 증가시켰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식이요법도 병행했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NPB) 관계자들은 이런 이치로를 외면했다. 당시 그의 키(177cm)가 작고 체격(56kg) 또한 왜소했기 때문이다. 이치로는 1991년 NPB 신인드래프트 최종 라운드에서 지명을 받아 겨우 프로에 진출할 수 있었다.
 
 
  日本 프로야구계가 외면한 이치로, 일본 프로야구를 점령하다
 
이치로는 일본 프로야구 시절부터 특이하게 유니폼 상의 뒷면에 자신의 성 대신 이름을 새겨넣었다. 그만의 독특함과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치로는 1992년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버펄로스) 소속으로 NPB에 데뷔했다. 18세였다. 하지만 곧 2군으로 강등됐다. 당시 오릭스 감독이 타격할 때 오른발과 함께 상체를 앞으로 끌고나가는 이치로의 독특한 폼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하체를 고정한 상태에서 상체의 안정된 회전이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타격폼을 선호했다. 심지어 오릭스 2군 감독은 이치로에게 “그런 독특한 폼으로는 공을 칠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
 
  이치로가 기회를 잡은 것은 프로 입단 후 3년의 시간이 흐른 1994년이었다. 새로 부임한 아키라 오기(Akira Ogi) 감독은 이치로를 주전으로 발탁했다. 이치로의 개성과 재능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오기 감독은 훗날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치로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어깨가 무척 강했기 때문이다. 이치로의 빠른 발과 뛰어난 배트 컨트롤 또한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오기 감독 부임 후 기회를 잡은 이치로는 시즌 초 2번 타자에 고정됐다. 이후 자신의 실력을 성적으로 입증한 그는 시즌 중 리드오프(Leadoff)로 불리는 1번 타자로 변신해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당시 이치로는 NPB 한 시즌 최다안타(210개) 기록을 경신하며 자신에게 쏟아졌던 ‘독특한 타격폼 논란’을 실력으로 잠재웠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자 오기 감독은 이치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유니폼 상의 뒷면에 성(姓) 대신 이름을 새겨넣자고 한 것. 스즈키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흔한 성이다. 때문에 오기 감독은 유니폼 상의 뒷면에 ‘스즈키’ 대신 이름(이치로)을 새겨 그만의 개성과 특별함을 부각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치로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에도 이 방법을 유지하고 있다. 유니폼 뒷면에 성 대신 이름을 새긴 이는 이치로가 유일하다.
 
  팀의 주전 자리를 확보한 이치로는 1995년 소속팀 우승의 주역이 됐다. 2년 연속 타격왕 자리에 오른 것은 물론 홈런 24개와 도루 49개를 기록하는 등 공격 전 부문에 걸쳐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6년에는 NPB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은 ‘재팬시리즈’에서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MVP도 그의 몫이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이런 이치로를 가리켜 ‘안타 제조기’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메이저리그 진출의 교두보가 된 미일 프로야구 올스타전
 
  이치로가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8년이었다. 그해 11월에 열린 ‘미일(美日)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타율 0.380, 7도루의 빼어난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당시 이치로의 소속팀 오릭스의 재정 문제도 그의 미국 진출에 도움을 줬다. 2000년 시즌이 끝나자 오릭스는 포스팅 시스템을 통한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허락했다. 오릭스는 1년 뒤 자유계약선수(FA) 신분이 되는 이치로를 붙잡을 수 있는 재정적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오릭스와 단독협상권을 따낸 시애틀은 3년 총액 1400만 달러(약 163억원)의 계약을 통해 이치로를 영입했다. 시애틀은 또 그의 원소속팀 오릭스에 이적료 1300만 달러(약 151억원)를 지불했다. 시애틀은 애초에 6년 계약을 원했다. 하지만 이치로는 3년을 고집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치로는 훗날 “빅리그 진출 3년간 좋은 성적을 거둔 뒤 이를 바탕으로 고액 계약을 하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 “일본인 야수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해 미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빅리그에서도 타격왕 자리를 목표로 한다”는 말을 친한 지인들에게 했다고 한다.
 
  NPB 출신 야수 최초로 2001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치로에게 쏟아진 미일 양국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이치로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이치로가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강속구를 상대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보다 많은 162경기를 치르는 메이저리그 시즌 일정도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51번 유니폼을 받고 망설였던 이치로
 
  시애틀에 입단한 이치로는 등 번호 51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받았다. NPB 시절과 같은 번호였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51번은 시애틀 출신의 전설적인 투수 랜디 존슨(은퇴)이 사용했던 번호였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51번 유니폼을 입기로 한 이치로는 존슨에게 “51번 유니폼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메시지를 개별적으로 보냈다.
 
  이치로는 데뷔 첫해에 타율 0.350, 8홈런 242안타 56도루라는 믿기 힘든 성적을 거뒀다. 시즌 242안타는 메이저리그 역대 신인 최다안타 기록이며 이는 1930년 이후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기도 했다. 타격왕, 도루왕, 신인왕에 시즌 최우수선수 상까지 휩쓸며 첫해에 ‘이치로 돌풍’을 일으켰다. 이치로는 또 데뷔 첫해에 올스타에 선정된 것은 물론 각 포지션별 최고의 타자에게 주는 실버슬러거 상과 골드글러브도 수상했다. 타자에게 주는 거의 모든 상을 다 쓸어 담은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 야구 팬들을 대상으로 메이저리그 이치로 경기 관람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치로를 취재하기 위해 시애틀을 방문한 일본 기자가 150명 이상이나 됐다. 시애틀 구장에는 이치로의 인기를 반영한 일식 ‘이치롤(Ichiroll)’마저 등장했다. 이치로는 존슨에게 건넨 ‘51번 유니폼’ 약속을 제대로 지킨 셈이 됐다.
 
  당시 이치로의 에이전트 토니 아타나시오(Attanasio)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일본에 있는 이치로에게 편지나 소포 등을 보낼 때 주소 없이 ‘이치로’라고만 써도 배달된다”고 말했을 만큼 일본에서 이치로의 명성과 인기는 말 그대로 하늘을 찔렀다.
 
  데뷔 첫해에 대기록을 달성한 활약은 거침이 없었다. 매년 200안타 이상과 3할대의 뛰어난 타율을 기록하며 빅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한 이치로는 2004년 또 하나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조지 시슬러(작고)가 갖고 있던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안타(257개) 기록’을 84년 만에 경신한 것. 그해 10월 1일(현지시각) 텍사스와의 경기 3회에 안타를 친 이치로는 시즌 258개의 안타를 기록하며 빅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을 새롭게 썼다.
 
  당시 이치로가 안타를 치고 1루에 진루하자 경기장을 찾은 수많은 관중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중에는 시슬러의 딸 프랜시스(Francis)도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 불빛이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이치로의 모습을 담기 위해 경기장을 수놓았다. 이치로는 그해 총 262개의 안타를 쳤고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전망이다.
 
  이치로는 또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시즌 동안 총 924개의 안타를 기록해 메이저리그 역대 4시즌 통산 최다안타 기록도 경신했다. 종전 기록은 빌 테리(작고)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쳐낸 918개였다. 이치로는 이후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총 930개의 안타를 쳐 자신이 갖고 있던 종전기록을 한 번 더 경신했다.
 
  이치로는 2009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던 올스타전에 참가했을 때 종전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 보유자인 시슬러가 영면해 있는 묘지를 찾아 화제가 됐다. 이치로는 당시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인트루이스에는 올 기회가 없었다”며 “시슬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4년이며 그를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야구계의 뛰어난 선배를 찾아 존중을 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나의 방문을 좋아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反日감정’ 싹 틔운 이치로의 발언은 誤報
 
  이치로에게는 한국 팬들이 많지 않다. 2006년 불거진 이치로의 ‘30년 발언’ 보도 때문이다. 당시 이치로는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앞두고 일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단순히 이기는 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와 맞붙는 상대가 ‘앞으로 30년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몇몇 언론은 “이치로가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대만이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겠다” 했다고 보도했다. 이치로가 언급한 ‘불특정 상대’가 ‘한국과 대만’으로 확대 해석된 것이다. 이 기사를 접한 수많은 한국 야구팬과 누리꾼들은 이를 ‘망언’으로 규정하며 공분했다. 이치로에게 ‘입치로’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이치로의 망언’이 오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아직도 이치로를 향한 국내 야구팬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2009년 제2회 WBC에서 보여준 이치로의 활약도 한국인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다. 당시 한국과 결승전에서 맞붙은 일본은 9회까지 3-3 동점을 이뤄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일본은 10회초 2아웃 상황에서 임창용(삼성)을 상대로 터트린 이치로의 2타점 적시타에 힘입어 한국을 5-3으로 누르고 2회 연속 WBC 왕좌에 올랐다. 이치로는 결승전에서 6타수 4안타의 맹타를 휘둘렀다.
 
 
  올스타전 MVP마저 따낸 이치로, 빅리그 ‘대형 계약’ 체결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현역생활을 이어가는 이치로. 그를 향한 미국 현지 팬들의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미국 진출 후 각종 기록을 경신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이치로는 200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올스타전에서 장내홈런으로 불리는 ‘인사이드 더 파크(Inside the park)’ 홈런을 기록해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이는 타자가 친 공이 외야 펜스를 넘어가지 않았는데도 타자가 홈까지 들어온 경우를 지칭하는 것으로 빅리그 역대 올스타전 최초의 장내홈런이었다. 당시 이치로는 홈런 포함 3타수 3안타의 맹타를 휘둘러 올스타전 MVP도 품에 안았다.
 
  2007년 시즌이 끝난 뒤 자유계약선수(FA) 신분이 된 이치로는 그해 7월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선 소속팀 시애틀과 5년 총액 9000만 달러(약 1048억원)의 대형 계약을 체결했다. 지금이야 추신수(33·텍사스) 등 이보다 더 많은 몸값을 받는 선수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규모였다. 이치로는 계약 전 인터뷰를 통해 “시즌이 끝난 뒤 FA시장에 나가 나의 가치를 평가받고 싶다”고 말했다. 시애틀은 이런 이치로의 마음을 잡기 위해 연봉 외에 연간 3만 달러 이상의 미국 내 거주비용과 매년 가족들을 위한 일본 왕복항공권 4장(1등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개인 트레이너와 전담 통역도 계약조건에 포함시켰다. 시애틀은 또 이치로에게 최고급 SUV자동차도 선물했다.
 
  시애틀에 잔류하게 된 이치로는 2007년 7월 말 메이저리그 통산 1500안타를 기록했다. 이는 빅리그에서 통산 1500안타를 기록한 선수 중 3번째로 최단시간 만에 달성한 기록이다. 좌타자인 이치로는 빠른 발을 이용해서 생산하는 내야안타가 많다. 그가 2008년 기록한 내야안타 56개는 빅리그 역대 한 시즌 최고기록이다.
 
  이치로는 또 그해 7월 29일 ‘미일 프로야구 통산 3000안타’의 금자탑도 쌓았다. 과거 메이저리그 내야수였던 브랜든 인지(은퇴)는 “가능하다면 3루 베이스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이치로가 어떻게 타격을 하고 1루를 향해 뛰어가는지를 자세히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지는 이어 “일부에서는 ‘내야안타’를 운이라고 폄하하지만 이치로의 것은 다르다. 그의 내야안타는 뛰어난 실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된 이치로가 생각하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이치로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리그에서 뛰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뛰느냐이다. 때문에 메이저리그 진출 후 내가 달성한 각종 기록보다 최고의 무대에서 좋은 팀 동료들과 함께 즐겁게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메이저리그 최초 10시즌 연속 ‘200안타 + 3할 타율’
 
각고의 노력을 통해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가 된 이치로는 야구용품을 관리하는 방법도 특별하다.
  2010년은 이치로에게 또 다른 기록 경신이란 기쁨을 안겼다. 그해 총 162경기에 출장한 이치로는 타율 0.315, 6홈런 43타점 42도루의 성적을 올렸다. 그해 총 214안타를 기록한 이치로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10시즌 연속 시즌 200안타와 3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이치로는 그해 시즌 총 162경기를 모두 소화해 ‘철인’이란 애칭도 얻었다. 당시 메이저리그 선수 중 시즌 162경기를 모두 다 뛴 이는 이치로와 맷 캠프(31·샌디에이고) 단 2명뿐이었다.
 
  이치로는 빅리그 진출 후 시즌 160경기 이상을 뛴 해가 무려 8시즌이나 될 만큼 자기관리 또한 뛰어나다. 이치로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치로는 야구를 사랑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선수”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치로는 야구용품 하나를 대하는 자세나 방법도 남다르다.
 
  대부분의 야구선수가 배트를 천이나 비닐로 된 가방에 담아두는 것과 달리 이치로는 특별히 주문 제작한 하드케이스(Hard case)에 보관한다. 그리고 그 케이스를 항상 세로로 세워둔다. 가로로 눕혀놓을 경우 미세하나마 방망이가 휠 수 있고 그러면 타격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달 이치로를 인터뷰할 때도 그의 하드케이스는 로커(Locker) 옆에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치로의 노력은 또 있다. 과거 일본 A사의 야구화를 후원받았던 이치로는 새 야구화를 대략 10경기 정도만 사용하고 새것으로 교체했다. 미세하나마 늘어난 야구화가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야구 천재’도 피해가지 못한 트레이드
 
지독한 연습벌레로 통하는 이치로. 야구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만큼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이치로는 2011년 시즌이 끝난 뒤 타율 0.272와 안타 184개가 적힌 성적표를 받았다. 표면상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메이저리그 진출 후 최저타율을 기록한 이치로는 11년 연속 시즌 200안타 달성도 실패했다. 올스타에 선정되지 못한 것은 물론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골드글러브 수상도 실패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때부터 ‘야구 천재’ 이치로의 하락이 시작된 것이다. 이치로는 2011년을 기점으로 단 한 번도 3할 타율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이치로의 활화산 같은 타격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의 기록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이치로는 2012년 6월 애리조나를 상대로 자신의 메이저리그 통산 2500안타를 쳐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치로는 이후 23타수 무안타를 기록할 만큼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그러자 팀 안팎에서 이치로를 성토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치로의 전 동료였던 제이 뷰너(은퇴)는 “시애틀은 변화가 필요하다. 한 선수에게 모든 돈을 쏟아부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했지만 이는 높은 몸값에 비해 성적이 부진했던 이치로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부진한 성적에다 자신을 향한 지역언론의 평가마저 우호적이지 못하자 이치로는 2012년 시즌 중반에 직접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팀 내 유망주들이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편치 않다”는 이유를 들며 말이다. 이치로는 결국 2012년 7월 자신이 원했던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양키스는 우익수였던 이치로에게 좌익수로 옮길 것과 중심타자였던 그에게 최하위 타선인 9번 타자로 뛸 것을 요구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양키스는 상대투수가 좌완(左腕)일 경우 좌타자인 이치로가 선발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조항도 이적조건에 포함시켰다.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치로는 받아들였다.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키스로 이적하기 전 시애틀에서 타율 0.261로 부진했던 이치로는 이적 후 타율 0.322, 5홈런 27타점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아메리칸리그 ‘이주의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이치로가 부활하자 양키스는 서둘러 그를 2번 타자로 이동시켰다. 상대투수가 좌완이라도 어김없이 경기에 출전시켰다. 양키스는 그해 이치로의 활약에 힘입어 포스트시즌(Postseason)에 진출할 수 있었다. 자신의 옛 모습을 되찾은 이치로는 시즌이 끝난 뒤 양키스와 2년 총액 1300만 달러(약 152억원)에 계약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치로에게 3할 타자의 명성과 빠른 발을 이용한 뛰어난 주력은 볼 수 없었다. 2013시즌을 타율 0.262, 7홈런 35타점으로 마감한 이치로는 지난해에도 타율 0.284, 1홈런 22타점으로 부진했다. 시즌이 끝난 뒤 양키스와의 재계약이 결렬된 이치로는 한동안 소속팀을 찾지 못해 미아(迷兒)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올 1월 말 현 소속팀 마이애미와 1년 200만 달러(약 23억원)에 겨우 계약할 수 있었다.
 
  이치로는 ‘올 시즌 목표’를 묻는 질문에 “야구는 매일 다른 결과를 야기하기 때문에 올해도 출전하는 매 경기를 통해서 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고 수정해 가고 있다”며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런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이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야구 천재’답지 않은 소박하고 겸손한 대답이었다.
 
 
  메이저리그 ‘3000 안타’ 달성을 앞둔 이치로
 
  올해로 메이저리그 경력 15년째인 이치로는 8월 초 기준 빅리그 통산 타율 0.315, 113홈런 733타점 496도루 2907안타의 성적을 기록 중이다. NPB 기록까지 합하면 통산 4185안타가 된다. 불혹을 넘긴 탓에 경기에 출전하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그의 경기에는 최소 6명 이상의 일본 기자들이 찾아와 취재경쟁을 벌인다. 전성기는 끝났지만 이치로의 빅리그 통산 ‘3000안타 달성’에 대한 팬들의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이치로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는 기자에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야구선수가 좋은 성적을 올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좋은 성적들이 모여 하나의 기록이 되고 업적이 된다”며 “나 같은 경우는 현재 날마다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3000안타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출전하는 경기마다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싶고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메이저리그 3000안타라는 대기록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통산 ‘3000안타’ 기록을 달성한 이는 29명뿐이다. 이는 수준급 타자의 바로미터(Barometer)인 시즌 150안타 이상을 20년 동안 꾸준히 쳐야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이치로가 아직도 현역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빅리그 통산 3000안타 기록 달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치로는 ‘은퇴 후 일본에서 뛸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직 은퇴를 생각해 보지 않았고 은퇴를 논할 시점도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성원해 주는 일본 팬들을 위해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왜 ML에 가고 싶은 걸까?’
 
  이치로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일본을 넘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됐다. 그리고 이런 이치로의 성공은 조지마 겐지(39·은퇴), 마쓰이 히데키(41·은퇴), 강정호(28·피츠버그) 등 아시아 출신 야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됐다. 앞으로 이치로 같은 선수가 또 나올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빅리그를 목표로 태평양을 건너는 아시아 출신 야수들의 도전은 계속될 전망이다.
 
  기자는 인터뷰 말미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목표’로 하는 아시아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왜 메이저리그에 가고 싶은 건가?’라는 질문을 하기 바랍니다. 혹, 그 질문에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서’ 또는 ‘유명해지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나온다면 메이저리그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사랑하고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뛰고 싶다는 열정이 있다면 과감하게 도전해도 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한 뒤 성공하거나 행여 실패해도 절대로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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