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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하시모토 도루와 安哲秀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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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정계의 풍운아 하시모토 도루, 종군위안부 발언으로 추락 시작, 사카이市長 선거 패하면서 몰락
⊙ 하시모토 몰락 원인- 1인 탤런트정치, 정책·이데올로기 不在, SNS 쇠퇴, 현장에 약한 ‘입(口)의 정치’
⊙ 安哲秀, 이미지 정치에서 벗어나 ‘안철수 2.0’ 보여주어야

劉敏鎬
⊙ 53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일본 정계의 新星이었다가 추락 중인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과, 여전히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安哲秀 의원.
  1996년 한 일본인 역사가와 함께 혜산 박두진 (兮山 朴斗鎭) 시인(詩人)을 찾아뵌 적이 있다. 난(蘭)으로 가득한 박 선생의 서울 아파트 집에서 그분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었다. 일본인 역사가가 대화 도중 평균적인 한국 국민의 기질이 어떤지를 물었다. 선생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마디로 답했다. “급합니다(せっかちです)!”
 
  가벼운 웃음과 함께 던져진 선생의 반응은 한국인의 장단점을 압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도전정신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머리가 없이 몸이 먼저 나가는 국민성이란 의미이다. ‘빨리 빨리’ 하나로 근대화 현대화를 한 세대 만에 달성한 한국이다. 차기 대통령 선거에 관한 얘기는 박두진 선생의 대답에 걸맞은 소재일 듯하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남짓 지났는데, 벌써 4년 뒤에 있을 대통령 선거 얘기가 넘친다. 후보 가능 정치인에 대한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마침내 뉴욕의 반기문(潘基文) 유엔사무총장 이름도 오르내린다.
 
  나라를 이끌 지도자에 대한 토론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 어떤 인물인지, 정책이 무엇인지, 평소 어떤 식의 세계관으로 정치를 해 왔는지에 대한 심층분석은 민주국가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全) 세계적으로 볼 때 임기의 5분의 1 정도를 지난 대통령을 앞에 두고 차기를 거론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2017년 12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정치인은 안철수(安哲秀) 국회의원이다. 의사에서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머, 벤처기업가, 교수와 같은 다양한 타이틀로 변신해 온 안철수 의원에 대한 미디어와 국민의 관심은 남다르다.
 
  필자는 《월간조선》 2011년 12월호에서 ‘안철수 현상’을 분석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감옥에 간, 일본 IT업계의 황태자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와 비교한 글이다.
 
 
  安哲秀와 호리에
 
감옥에서 30kg이나 살이 빠져서 출옥한 호리에 다카후미는 다이어트 책을 써서 화제가 됐다(원 안은 예전의 호리에 다카후미).
  당시 한국 미디어는 2011년 11월 막 탄생한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을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신임 오사카(大阪) 시장에 비교하고 있었다. 시장에 당선된, ‘갑자기 뜬 인물’이란 점에서 전혀 무관한 두 사람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비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필자는 당시 박원순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안철수를 호리에와 비교 분석했다.
 
  30대 초의 호리에는 청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로 부상할 뻔했던 인물이다. 그는 전국망 텔레비전 방송국을 사들이고, 기존의 일본식 경영방식을 무너뜨리는 경제계의 혁명아(革命兒)로 나서자마자, 곧바로 내부자거래 관련 경제사범으로 체포됐다. 기성(旣成) 세력에 의해 ‘괘씸죄’로 걸린 것이다.
 
  한국의 안철수에 비견할 수 있는 일본 IT계의 풍운아(風雲兒)였던 호리에는 현재 출옥(出獄)한 상태다. 수감(收監) 중 체중이 30kg이나 빠진 그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이어트 책을 저술하는 한편, 원래 전공인 IT 분야에 매진하고 있다. 아직도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되어 버렸다.
 
 
  안철수와 하시모토의 공통점
 
  2014년 현재 정치인으로 변신한 안철수 의원은 ‘IT 풍운아’ 호리에가 아니라, ‘21세기 일본 정치계의 풍운아’로 불렸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에도 비견할 수 있다. 호리에가 IT를 통해 일본 청년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데 비해, 하시모토는 정치를 통해 ‘일본 청년의 미래’로 급부상했다. 호리에는 이미 추락했고, 하시모토는 현재 추락 중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한순간 일본에 등장한 청년들의 우상은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한순간에 희미해진 상태이다.
 
  2014년 현재 정치인 안철수는 호리에처럼 과거형 인물로 추락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인기’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현재 추락 중인 하시모토와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지만, 상당한 비전 제시와 노력이 없이는 하시모토와 같은 운명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신문을 보면, 신년 들어서기 무섭게 정치세력화를 통해 ‘안철수 현상(신드롬)’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 있는 듯하다. 필자는 ‘안철수 현상’의 재현 가능성을 반반 정도로 본다.
 
  정치인 안철수를 시장 하시모토와 비교하는 이유는 두 사람이 가진 공통점 때문이다. 공통점은 크게 보면 네 가지이다.
 
  첫째, 기존 정당에 만족하지 못하는 부동층(浮動層)을 등에 업은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안철수가 한국인이 보수와 진보 모두에 염증을 느낄 때 등장했듯이, 하시모토도 일본인이 자민-민주당 양당(兩黨)체제에 피곤해진 틈을 타고 나타났다.
 
  둘째, 정치무대에 풍운아로 등장한 시점이 두 사람 모두 비슷하고, 3년이 지난 2014년 현재의 인기도가 과거에 크게 못 미친다는 점도 닮았다.
 
  셋째, 한때 청년층과 미디어를 통해 한순간에 전국적인 스타로 부상한 탤런트성(性)이 강한 정치인이란 점이다.
 
  넷째, 장로(長老)가 지배하는 한일(韓日) 정치무대에서 비교적 젊은, 비슷한 연령층의 인물이란 점이다.
 
 
  ‘트위터 대통령’ 하시모토
 
하시모토 도루 시장의 트위터. 그는 일본정치인 가운데 팔로워 수 1위를 자랑하는 SNS정치의 선두주자였다.
  2014년 현재 하시모토는 한물간 정치인으로 잊히기 직전이다. 일본 열도를 강타한 하시모토 열풍은 광풍(狂風)으로 치닫다가 한순간에 냉풍(冷風)으로 변해 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요미우리(讀賣)신문》에 실린, ‘하시모토, 트위터(@t_ishin)사용 격감’이라는 기사는 현재 하시모토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하시모토는 ‘일본 SNS정치의 챔피언’이다. 그는 115만5000여 명의 트위터 팔로워를 갖고 있다(2013년 12월 기준). 일본 정치인 가운데 1위다. 2위는 59만4000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前) 총리다. 23만1000명의 팔로워를 가진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現) 총리는 8위다.
 
  하시모토는 2010년 4월 오사카유신회를 결성한 뒤인 2011년 2월부터 트위터를 시작했다. 그는 트위터에서 기존의 정치인들이 멀리하는 소재나 주제를 즐겨 다뤘다. 중앙정부 공격, 공무원 무능, 낙하산 인사 비판, 원전(原電) 비판 등이 주된 테마였다. 하시모토는 단호한 어휘를 사용해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히 했다. ‘바보(馬鹿), 쓸모없다(使えない)’와 같은 과격한 표현은 기본이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으면 트위터를 통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루에 무려 100건이 넘는 트위터를 올리면서 열도(列島) 개혁의 전의(戰意)를 불사른 적도 있다. 낮에만 트위터를 올린 게 아니라 심야(深夜)나 새벽에도 올렸다.
 
  이른바 ‘하시모토류(流)’라는 트위터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젊은층이 주도하는 SNS 세계의 대통령이었다. 2011년 가을, 갑자기 일본 정국을 강타한 하시모토 열풍의 배경에는 바로 하시모토류 트위터가 있었다. 하지만 그 같은 현상은 하시모토 주가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에 국한된다.
 
  《요미우리신문》은 한 달에 최고(最高) 1025건에 달했던 하시모토 트위터 게시물의 수(數)가, 지난해 10월에는 6건, 11월과 12월에는 각각 2건으로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하시모토 관련 보도나 공지사항에 관한 안내문을 제외하면, 하시모토 스스로가 올리는 트위터 수는 한 자리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팔로워 수는 여전히 최고지만, 그 열기는 눈에 띄게 식어 버렸다.
 
  하시모토 열풍이 식은 출발점은 지난해 5월 종군(從軍)위안부 관련 실언(失言)이다. 한국 언론도 크게 보도했지만, 당시 발언을 압축해서 살펴보자.
 
  “전쟁 중 세계 각국의 군(軍)은 위안소와 같은 시설을 만들었다. 구(舊)일본군도 종군위안부가 필요했다. 젊은 군인들을 위해 위안부는 필요한 존재이다. 조선인 위안부만이 아니라, 일본인 위안부가 더 많았다. 왜 조선인 위안부 문제만이 거론되는가?”
 
  “법률의 범위 내에 성적(性的)인 에너지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가 일본에 있고, 그런 장소를 활용하지 않으면 미국 해병대처럼 용맹스런 군인들이 성문제를 제어할 수 없으니 (풍속업체를) 충분히 활용해 주길 바란다.”
 
  한국·중국은 물론, 미국과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불러일으킨 이 발언은 풍운아가 급추락하는 전환점이 됐다.
 
 
  하시모토, 종군위안부 왜곡에 대해서는 사과 안 해
 
  주목할 부분은 하시모토 추락의 원인을 보는 한국·중국과, 일본 사이의 온도차이다. 한국과 중국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왜곡 설명했기 때문에 하시모토 열풍이 식었다고 분석한다. 발언 직후 《마이니치(每日)신문》이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일본인의 75%가 하시모토 발언이 문제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 신문이 한 설문조사를 자세히 보면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하시모토의 종군위안부 발언과 풍속업을 둘러싼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의 핵심은 ‘조선인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하시모토 발언이 옳은가?’가 아니다.
 
  단언컨대 일본인은 태평양전쟁 당시의 종군위안부 문제를 왜곡했다는 이유로 하시모토를 비난하지 않았다. 일본인이 분노한 것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일본 여성에 연결시키고, 나아가 오키나와(沖繩) 주둔 미군사령관에게 풍속업체 활용을 권장하는 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안 해도 되는 얘기를 왜 꺼내서 일본인의 자존심과 수치스런 과거를 파내느냐’라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들고일어났고, 심지어 정부 내 우향우(右向右) 인사들까지도 “왜 그런 얘기를 쓸데없이 꺼내서 미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느냐?”고 비난했다. 필자는 만약 하시모토가 조선인 종군위안부 문제에 국한해 얘기했다면 그의 추락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시모토 발언 직후인 작년 6월 1일 오사카텔레비전(TVO)은 하시모토 발언의 잘못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종군위안부가 강제가 아니었다는 하시모토 발언이 옳은가?’라는 질문이었다. 전화의 디지털 신호를 이용한 시청자 설문조사에 무려 6392명이 참가했다. 이 중 77%인 4929명이 ‘하시모토 발언이 옳다’고 답했다. ‘문제 있다’고 답한 시청자는 23%인 1463명에 불과했다.
 
  여기서도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시모토 추락’이라는 결과는 같지만, 한국에서 보는 것과는 이유가 전혀 다르다. 하시모토는 일본은 물론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은 뒤에도 ‘종군위안부에 강제성은 없었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사과한 것은 오키나와 미군기지 주변 일본 여성들에 대한 부분과, 주일 미군에게 성매매업소 이용을 권장하는 듯한 발언에 국한된다.
 
 
  하시모토, 再起 기대됐지만…
 
  사실 하시모토의 종군위안부 관련 발언은 정치적 생명을 끊을 만한 대사건은 아니었다. 여성표가 한순간 날아갔다는 점이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일본정치의 주류(主流)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이런 파문에도 불구하고 하시모토를 적대시하는 좌성향 미디어를 제외한 일본 언론들은 하시모토가 특유의 순발력을 바탕으로 빠른 시일 내에 재기(再起)할 것으로 보았다.
 
  하시모토의 주가(株價)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2011년 11월이다. 당시 후지텔레비전 설문조사 결과 하시모토가 이끄는 일본유신회에 대한 지지율은 22.4%에 달했다. 자민당 22.9%에 비해 약간 뒤떨어지지만,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의 14.8%보다 무려 7.6%포인트가 높았다. 하시모토는 ‘지금 당장 총리가 됐으면 싶은 인물’을 묻는 질문에서 15.6%로 1위를 차지했다. 아베 총리는 하시모토에 한참 밀리는 11.9%로 3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우향우 정치의 원조(元祖) 격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 10.5%로 하시모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비록 일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는 했지만, 하시모토는 부라쿠(部落)출신다운 서바이벌 근성으로 일본정치 무대의 중심에 다시 설 정치가로 여겨졌다.
 
  그 같은 바람은 지난해 9월 29일 이뤄진 오사카부(府) 사카이(堺)시 시장선거 결과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시모토가 적극적으로 민 일본유신회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떨어진 것이다.
 
 
  일본정치는 지역정치
 
하시모토 도루는 오사카부와 오사카시, 사카이시의 통합을 주장했지만, 주민들은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시모토의 일본유신회는 종군위안부 발언 이후 이뤄진 두 차례의 선거에서 이미 연거푸 패한 상태였다. 일본유신회는 지난해 6월의 도쿄도(都) 도의회 선거와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 도쿄도 선거에서는 127석 중 2석을, 참의원 선거에서는 121석 중 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와 함께 당내의 불협화음과 책임소재 문제를 둘러싼 이견(異見)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에서 마침내 하시모토의 기반인 오사카 내 사카이시에서의 선거에 패한 것이다. ‘하시모토는 용도폐기, 재기불능’이란 말이 등장했다.
 
  하시모토의 정치적 기반이어야 할 오사카 시민들은 ‘오사카도(都) 구상’으로 불리는 하시모토의 행정개혁에 반대하거나 무심했다.
 
  일본정치는 지방분권(分權)을 기초로 한다. 지역의 지지기반이 튼튼할 경우 언제라도 다시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정치계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남아 직(職)을 유지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방송에 얼굴을 비치는 것보다, 지역 결혼식에 참가해 한 표라도 더 확보하려는 것이 일본 정치인들이다. 그들에게는 도쿄의 전국 텔레비전보다는 지역 내 작은 지방 텔레비전 방송이 더 중요하다. 지역 기반을 배경으로 계속해서 정치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언젠가 자신의 파벌(派閥)을 만들어 총리로 나설 수도 있다.
 
  때문에 하시모토에게 사카이시 시장 선거 패배는 도쿄도 선거와 참의원선거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 더 이상 그를 밀어 줄 세력이 없어졌다는 의미이다. 좌성향 미디어만이 아니라 지방분권을 주장하는 반(反)도쿄 성향의 미디어와 기자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토록 많은 일본인이 열광했던 하시모토 정치가 왜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됐는가. 지금 일본에서는 이에 관해 많은 논의가 있다. 하시모토 정치를 ‘하시즘(ハシズム)’이라 부르면서, 전체주의 일당독재 파시즘이라고 비난해 온 지식인들은 물론, 하시모토를 아끼고 지원했던 사람들도 하시모토의 추락과 교훈에 대한 논의를 벌이고 있다.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하시모토 정치의 명암(明暗)에서 나오는 교훈은 네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개인의 인기를 기반으로 한 ‘1인 탤런트정치’의 한계다. 배경이 약한 하시모토는 자신의 스타성(性)을 기초로 정치를 해 왔다. 오사카 부라쿠 출신인 그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들어간 직후 곧바로 사회에 뛰어들었다. 일본에서 오사카는 서바이벌 근성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이 흔히 생각하는 예의바른 일본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오사카 사람들은 제 고집만 내세우고 언성을 높이면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캐릭터로 유명하다. 부라쿠는 그런 오사카 내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해당한다. 하시모토의 성장배경이 얼마나 척박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하시모토는 아버지 없이 자란 인물이다.
 
  하시모토는 대학 재학 때부터 현재의 부인과 동거(同居)에 들어가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가죽점퍼 장사에 나섰다가 실패했지만, 실패 원인을 파헤쳐 가는 과정에 법(法)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25살 때인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1997년 고향인 오사카시로 돌아가 탤런트 프로덕션사(社)를 상대로 한 변호사 업무에 나섰다.
 
 
  일본유신회, 1人독재 정당으로 전락
 
  하시모토는 이내 특유의 친화력으로 연예계 사람들과 가까워졌고, 얼마 후에는 본인 스스로 프로덕션사 소속 탤런트로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후 하시모토는 도쿄로 진출해 니혼(日本) TV의 법률상담 프로그램에 출연, ‘염색을 한 변호사’란 별명과 함께 전국적인 스타로 급부상(急浮上)했다. 똑 부러지는 탁월한 언변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스타성을 기반으로 그는 오사카부(府) 지사, 오사카 시장으로 승승장구했고, 이어 일본유신회를 창당해 일본 열도 개혁의 기수(旗手)를 자처했다.
 
  하시모토는 한창 시절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적극 활용해, 잠도 안 자면서 하루에 100여 건의 트위터를 날렸다. 청년들이 호응하면서 일본유신회가 개최한 숙(塾)에 전국의 인재가 몰려들었다. 숙생을 위한 강의에 직접 나서 두세 시간씩 열변을 토했고, 실시간 동영상을 이용해 자신의 강의를 전국의 청년들에게 방영하기도 했다.
 
  필자도 시청했던, 2011년 말 당시 하시모토 강연 동영상의 시청 예약자는 최소한 10만명 선에서 출발했다. 이른바 하시모토가 가진 정열을 기초로 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일반 국민은 물론, 정치가 기자 지식인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마치 환각(幻覺)상태에 빠진 듯, 일본인 모두가 변호사 출신의 탤런트 정치인에 열광했다.
 
  이러한 하시모토의 1인 스타성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일본유신회라는 정당을 만들었지만, 이 당은 사실상 하시모토가 좌지우지하는 1인독재당으로 추락했다. 민의(民意)와 당원의 뜻을 수렴한다고 하지만, 앞으로 치고 나가는 하시모토류의 정치를 막을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당의 뜻과 하시모토의 발언이 어긋나는 경우가 늘어 갔다.
 
 
  ‘귀가 없는 사람’
 
일본 인터넷에는 原電에 찬성하는 이시하라 신타로와 脫原電을 주장하다가 입장을 바꾼 하시모토 도루를 비꼬는 게시물이 올라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스타성에 의존하는 1인정치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혼자서 앞서 나가면서 떠드는 과정에서 정치적 감각을 상실하게 되고,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진 것이다. 하시모토는 ‘귀가 없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참모는 있지만 유명무실(有名無實)하다. 한국에서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다변(多辯)정치인’으로 유명했지만, 하시모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시모토는 이른바 ‘부찌사가리(ぶら下がり)’ 식 인터뷰를 매일 시행한 최초의 일본 정치인이다. ‘부찌사가리’란 호텔이나 기자회견장에서 행하는 정식인터뷰가 아니라, 걸어가면서, 혹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주고받는 대화 스타일의 인터뷰다. 하시모토는 매일 아침 이뤄지는 부찌사가리 인터뷰를 가장 중시했다. 그는 시간 제한 없이 기자들의 질문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답변했다.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10분, 20분씩 쏟아냈다.
 
  뿐만 아니라 트위터, 강연회,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서도 엄청나게 많은 말을 쏟아 냈다. 비서들이 그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하시모토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시모토는 오사카시에 관한 얘기만이 아니라, 일본 전체, 나아가 외교 문제까지 거론했다. 종군위안부 문제만 해도 원래 지방 시장인 하시모토가 거론할 얘기가 아니었다.
 
  하시모토는 끊임없이 말을 이어 나가는 과정에서 모두가 자신을 지지하는 줄 착각했다. 실언(失言)이 나가도 결코 철회하지 않았다. 실언을 덮는 실언이 이어졌다. 이렇게 혼자 떠드는 정치가 하시모토를 보면서 주변의 참모들도 모두 방관하게 됐다. 결국 당내에서 불만과 이견(異見)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창당 1년 만에 일부 소속 의원이 당을 떠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카모토 료마를 흉내 냈지만…
 
하시모토 도루는 메이지유신의 선각자 사카모토 료마를 흉내 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두 번째 교훈은 정책·이데올로기가 없는 정치의 한계다.
 
  하시모토의 1인 스타성을 기반으로 한 정치의 한계는 또 다른 일본 내 거물스타 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와의 연대를 통해 더 한층 드러났다. 2012년 11월 일본 미디어의 주목하에 이시하라의 태양당과 하시모토의 일본유신회가 합당(合黨)했다. 당명(黨名)은 일본유신회로 하되, 이시하라가 당대표, 하시모토가 대표대행(代行)을 맡았다. 이 당은 탈원전(脫原電),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가, 소비세(消費稅) 인상 등 일본유신회의 정책을 그대로 승계했다. 그러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법. 스타성이 강한 탤런트 정치인의 대명사인 두 사람이 당을 같이하면서 이견과 갈등이 터져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탈원전’을 둘러싼 견해 차이였다. 이시하라는 에너지 현실을 감안하고 핵(核)무기 개발을 위해서라도 원전운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시모토는 합당 조건의 하나로 ‘탈원전’을 걸었지만,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탈원전’ 정책을 포기했다. 이렇게 ‘탈원전’에 대한 태도가 오락가락하면서 하시모토에 대한 신뢰성과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시모토의 일구이언(一口二言)은 급조된 일본유신회의 정책부재, 이데올로기 부재를 잘 보여준다. 하시모토는 메이지(明治)유신 당시의 선각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개혁서(改革書)를 흉내 낸 정책입안서를 돌렸던 인물이다. 미디어는 그를 21세기에 등장한 ‘오사카 료마’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시모토는 개혁서에 거창한 포부를 담았지만, 각론(各論)으로 들어가면 상충(相衝)되고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일본유신회와 하시모토가 추락한 것도 지향하는 구체적인 방향이나 비전에 대한 통일적인 논의나 토론이 없다는 평가 때문이다. 당의 방침은 있지만, 당이 지향하는 100년 아니 10년의 청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평생 함께 갈 지지세력을 염두에 둔 이데올로기 없이, 장밋빛 슬로건만 넘치는 것이 하시모토의 특징이자 한계이다.
 
 
  벽에 부딪힌 SNS정치
 
  셋째, 대중정치를 이끌던 SNS가 쇠퇴한 것도 하시모토 추락의 원인 중 하나다.
 
  앞서 살펴봤듯이, 하시모토 정치의 몰락은 트위터의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하시모토는 트위터를 통해 급부상했지만, 더 이상 약발이 안 듣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일본의 IT 전문가들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SNS정치를 분석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한 정치가 생각만큼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당초 신기하게 바라보던 SNS 메시지도, 수많은 학습효과를 거치면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으로 변해 가고 있다. 일방적·수동적으로 SNS 메시지를 받아들기보다, 트위터 메시지에 반발하면서 대응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시모토가 재기하는 데 결정타를 날린 사카이시 시장 선거 당시 하시모토가 날린 트위터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선거 당시 우연히도 태풍 18호가 몰아쳤다. 하시모토가 시장 선거에 관한 트위터를 계속 날리자, 한 시민이 “태풍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게 시장의 도리가 아니냐”고 리트위트를 했다. 하시모토는 특유의 어투로 “태풍 관련 정보는 오사카시가 총괄할 문제”라면서 “내 정치 관련 트위터가 싫다면 팔로워를 하지 않으면 될 것”이라고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이에 대해 많은 시민이 불쾌해하면서 “하시모토는 정치인이 아닌, 시장으로서의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일본인들은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자연재해에 무척 민감해졌다. 태풍피해가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하시모토의 반응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하시모토의 신경질적인 트위터 내용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그에게 반대 입장을 밝힌 시민의 리트위트가 각광받았다.
 
  수많은 SNS 채널이 나오면서 등록만 하고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는, 이른바 깡통가입자가 늘었다는 점도 하시모토 추락의 원인 중 하나이다. 페이스북 가입자가 전 세계 10억명을 넘은 지 오래지만, 사실 매일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사람은 1%에 그칠 것이란 분석도 있다. 동아리 형태의 소(小)모임에서의 SNS는 늘고 있지만, 트위터가 처음 등장했던 시기의 열기에 비하면 관심이 현격하게 줄었다. 이러한 변화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 스타정치인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트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하시모토임은 물론이다.
 
  넷째, 현장에 약한 ‘입(口)의 정치’의 한계가 드러났다. 변호사 하시모토는 입 하나로 일본 정치의 풍운아가 되었다.
 
  입의 특징 중 하나는 현장성(現場性)의 결여이다. 나름대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서바이벌 정치인이라고 하지만, 하시모토가 보여준 것은 현실과는 괴리된, 좁은 세계관 속의 갇힌 모습이었다. 사실 하시모토가 의존했던 트위터 정치부터가 현장성 결여의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현장을 지키는 일이다. 현실감각을 익히고, 땀냄새와 악취가 풍기는 현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가 올라간다. 하시모토 정치의 현장성 결여는 오사카부 시장선거를 통해 나타났다. 일본유신회 경쟁후보에 대한 하시모토의 트위터 내용이 화근(禍根)이 됐다.
 
 
  경쟁자의 제방 시찰 비판했다가 逆風 맞아
 
  경쟁후보가 태풍에 관한 주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제방안전시찰에 나선다고 발표하자 하시모토는 곧바로 트위터를 날렸다. “제방시찰 같은 문제를 아마추어 시장후보가 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트위터가 나가는 즉시 집중포화를 받은 것은 하시모토이다. “제방시찰이 꼭 전문가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가서 사람들의 고통과 불안을 나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모두가 태풍피해에 대비하고 있는데 하시모토는 집에서 트위터나 날리면서 제방시찰에 나서는 사람을 비난하고 있다. 기본이 안 된 인간이다.”
 
  필자는 제방시찰을 둘러싼 현장성의 문제가 시민들로부터의 지지를 잃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하시모토는 입으로만 떠드는 정치인”이라고 비난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직접 관련된 문제일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태풍피해에 불안해하고 있던 시민들은 하시모토가 날린 트위터 글을 보고 ‘하시모토는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확신하게 됐을 것이다. 민심이 등을 돌린 것이다. 하시모토는 입으로 흥했지만, 입 때문에 망하게 된 셈이다.
 
 
  1962년생 同期의 희망
 
지난 1월 2일 안철수 의원은 서울 명동거리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새정치추진위원회 참여를 호소했다.
  필자는 1962년생으로 안철수 의원과는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고등학교 한 학급의 학생 수가 70명을 넘었고, 100만명이 동시에 예비고사를 보면서 대학에 들어갔다.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만든 졸업정원제가 처음으로 시행되면서, 모든 대학의 정원이 두 배로 늘어났다. 덕분에 1년 전 선배에 비해 비교적 쉽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88년 올림픽 덕분에 취직도 쉽게 했고, 졸업 무렵에는 종래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가되던 해외유학이 자유화됐다.
 
  사실 제5공화국을 욕하면서 대학을 다녔지만, 지나고 보면 군사정권으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세대가 우리 세대, 즉 ‘안철수 학번’이 아닐까 싶다. 좀 저속하게 표현하자면, 1962년생만큼 성장기 대한민국의 단물만 빨아먹으며 살아온 세대도 드물 것이다.
 
  나이가 같다는 것은 동일한 환경 속에서 비슷한 세계관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안철수 의원이 던지는 단어 하나, 표정 하나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동(同)시대인으로서의 교감도가 남다르다. 이는 찬성이나 반대 이전의 문제이다. 익숙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익숙하다고 해서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철수 의원에 대해 다른 정치인보다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필자는 익숙하게 와 닿는 동시대 정치인 안철수를 볼 때마다 추락 중인 하시모토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시모토는 안 의원이 ‘안철수2.0’으로 나아가기 위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현재의 안철수 의원은 오르막과 내리막 중간 어디쯤에 서 있을 듯하다. 지금이 ‘이미지 정치인’ ‘탤런트 정치인’ 안철수가 차가운 광야(曠野)에 내버려지는 순간일 수도 있다. 1962년생이 대한민국으로부터 받았던 과분한 혜택을 감안하면, 그는 대통령 출마, 나아가 대통령 당선 여부를 넘어서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다. 그가 옆 나라의 ‘탤런트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의 부상과 몰락에서 교훈을 얻어, ‘안철수2.0’의 새정치로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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