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舊 소련공산당의 이론가 수슬로프, 부시의 책사 칼 로브에 비견
⊙ 체첸 출신으로 체첸 문제로 고민하는 푸틴에게 강경책 조언해 신임 얻어
⊙‘주권민주주의론’ 등 푸틴의 통치이데올로기 창안
⊙ 체첸 출신으로 체첸 문제로 고민하는 푸틴에게 강경책 조언해 신임 얻어
⊙‘주권민주주의론’ 등 푸틴의 통치이데올로기 창안
- ‘푸틴의 책사’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부총리.
현재 러시아의 최고 실력자는 누가 뭐래도 블라디미르 푸틴(Putin·60) 총리다. 다음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Medvedev·47)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러시아 권력서열 1, 2위를 ‘뒤에서’ 주무르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별명은 ‘회색 추기경(gray cardinal)’이다. ‘막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Surkov·48)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1999년부터 무려 12년간 크렘린(대통령궁) 행정실의 부(副)실장으로 일하면서 푸틴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은 우리의 청와대 비서실 2인자인 정책실장에 해당한다. 모습이 외부에 자주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르코프의 힘은 막강했다. 푸틴을 러시아의 ‘국부(國父)’로 올려놓은 이가 수르코프였다. 2000~2008년 푸틴의 대통령 연임→2008~2012년 메드베데프에 4년간 권력 이양→2012년 푸틴의 재집권이라는 시나리오도 그의 작품이다. 심지어 미-러 인권위원회의 러시아 측 대표를 맡아 미국이 러시아의 인권 문제를 공격하면 “미국은 관타나모 수용소에 있는 죄수들을 고문하지 않았느냐”며 수비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12년 동안 푸틴 정권의 이념 정립에서부터 인사권, 이미지메이킹, 외교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자연 러시아 정가에선 “러시아 정치를 움직이는 최고 실세(實勢)”라고 불러왔다.
‘21세기의 수슬로프’
수르코프를 ‘21세기의 미하일 수슬로프(Suslov, 1902~1982)’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슬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부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Brezhnev, 1906~1982) 시대에 걸친 소련공산당의 이론가였다. 1947년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된 후 1982년에 사망하기까지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Pravda) 편집장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당내 민주주의 이론 정립 등에 공헌한 인물이다. 수르코프가 푸틴 시대의 모든 것을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수슬로프에 비유한 것이다.
그랬던 수르코프가 작년 말 돌연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에서 물러났다. 푸틴 총리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합의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수르코프는 대신 내각 부총리로 임명됐다.
수르코프가 크렘린을 떠나 내각으로 이동하자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 정치판을 뒤흔드는 최대 사건’이라고 했다. ‘수르코프의 시대는 끝났다’ ‘러시아 정치·외교 등 모든 것이 혁명을 맞을 것이다’라는 말도 나왔다. 이 같은 평가들의 적절성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지금까지 수르코프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방증하는 표현들이다.
수르코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폭발시켰을까. 또 그처럼 엄청난 힘을 가졌던 수르코프는 왜 크렘린을 떠나야 했을까.
필자는 2005년부터 4년간 러시아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르코프를 만난 적이 있다. 2006년 중반 수르코프가 모스크바 주재 외신기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였다. 3시간이 넘는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기자들은 러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을 비판하는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차례도 답변을 회피하지 않았다. 질문에 대한 답이 막힐 때 “그냥 보드카나 한잔 하자”며 넘어가거나 자리를 뜨는 여타 러시아 정치인들의 모습을 그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간담회가 끝나갈 무렵 참석했던 기자들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으로 푸틴과 처음 만나
수르코프와 푸틴의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광고맨’ 출신인 수르코프는 1999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으로 영입됐다. 러시아 광고주협회 회장 출신인 그가 옐친 정권의 홍보를 맡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발탁 인사였다고 한다. 행정실 부실장으로 들어가면서 푸틴 당시 총리와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진다.
영입 당시 수르코프는 훗날 푸틴의 적이 될 만한 사람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990년 모스크바 국제대학교를 졸업한 수르코프는 이듬해 석유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Khodorkovsky·47)가 소유한 메나테프(Menatep) 은행의 광고와 홍보 담당자로 입사했다. 한때 러시아 경제를 호령하던 호도르콥스키는 푸틴에 반대하는 야권에 정치자금을 댔다가 2003년 탈세·횡령 혐의로 푸틴 정권에 의해 수감된 대표적인 반(反)푸틴 기업인이다.
수르코프는 메나테프 은행에서 만 5년을 일했다. 호도르콥스키의 재정 상태나 정치적 움직임을 워낙 잘 알 수밖에 없었던 위치에 수르코프가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는 ‘올리가르히(Oligarchy·신흥재벌)의 시대’라고 할 만큼 1991년 소련 해체 후 매물로 나온 국영기업을 헐값에 사들인 신흥 부자들이 경제적 부 축적은 물론 정치에까지 손을 대며 러시아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기였다.
수르코프는 1996년 또 다른 올리가르히 미하일 프리드만(Fridman·47) 소유의 알파은행에서도 역시 광고·홍보책임자로 일했다. 그러다가 1998년 국영 TV 채널의 제1보도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99년에야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으로 영입된 수르코프가 어떻게 푸틴 총리와 가까워지게 됐는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수르코프의 고향인 체첸공화국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무슬림이 대부분인 체첸은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펼치는 지역이다. 러시아인들에 대한 테러가 가장 활발하다.
수르코프는 1964년 체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다르벡 두다예프 역시 체첸인이고, 자신도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5년간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 그의 이름은 이슬람벡 두다예프(Dudayev)였다. 나중에 부모가 이혼했고, 수르코프는 어머니인 지나이다 수르코바(Surkova)를 따라 체첸의 북쪽 리페츠크주로 이사했다. 이때 러시아식 이름인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로 개명했다. 푸틴의 이너서클에서 체첸 출신은 사실상 수르코프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체첸 문제를 수르코프보다 잘 아는 이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르코프가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으로 들어온 1999년 푸틴은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전권(全權)을 물려받은 총리로서 체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푸틴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 이는 다름 아닌 체첸 출신 수르코프였다는 얘기가 있다.
크렘린 사정에 밝은 러시아 정부 소식통은 “체첸 출신인 수르코프가 러시아에서 독립하려는 체첸분리주의자를 소탕해야 러시아가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고민을 거듭하던 푸틴의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이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실제로 수르코프는 1999년 하반기부터 승승장구해 2000년 5월 푸틴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크렘린의 책사(策士)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푸틴 지지 청년단체 만들어
수르코프는 푸틴의 신뢰를 얻자마자 자신의 구상을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2001년 12월 1일 지금의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 창당이 첫 작품이었다. 수르코프는 푸틴이 오래 집권하려면 푸틴을 지탱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푸틴은 2000년 3월에 실시된 대선에서는 소속 정당 없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50%를 간신히 넘기는 득표율로 당선됐다. 수르코프는 단합당과 조국당을 합당해 ‘통합러시아당’을 만들었다. 이 당은 훗날 국가두마(하원) 의석의 70%를 석권하는 최대 정당이 된다.
이른바 ‘푸틴당’ 창당에 이어 수르코프가 다음으로 주력한 분야는 친(親)푸틴 청년단체 설립이었다. 수르코프는 2005년 청년운동가 바실리 야케멘코(Yakemenko)와 함께 ‘나시(Nashi·사전적으로는 ‘우리’라는 의미)’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2011년 말 현재 회원수가 60만명으로 추산되는 이 단체는 15~30세 사이의 젊은이들이 멤버다. 푸틴을 지지하고 러시아 주권을 보전한다는 점을 목표로 한다. 다름 아닌 러시아 민족주의 조직이다. 나시는 벌써 국가두마 의원을 3명이나 배출했다. 소련 시절 소련공산당의 당간부 양성 조직이었던 콤소몰(Komsomol·공산주의청년동맹)을 본떠 만들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러시아식 민주주의를 푸틴의 이데올로기로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푸틴의 집권 기간 수르코프가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은 ‘주권 민주주의(sovereign democracy)’다. 이 개념은 푸틴의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요체는 서구식과 유사한 민주주의는 하되 외부의 위협, 다시 말해 러시아를 넘보려는 서방의 위협으로부터 주권을 지키는 ‘러시아식 민주주의’다. 마치 한국의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유신체제를 탄생시키면서 ‘한국식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르코프는 종종 지인들을 통해 “러시아는 서방처럼 열린 사회를 만들겠지만 외부의 개입은 원치 않는다”면서 “서방은 민주주의가 주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를 인정할 수 없고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와 주권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수르코프가 주권 민주주의론을 처음 제기한 시점은 2006년 2월 22일이다. 통합러시아당 당대회 연설에서였다.
그는 이보다 1년 정도 앞선, 2004년 11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이른바 ‘오렌지 혁명(부정부패로 얼룩진 레오니트 쿠치마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화 혁명)’의 파장을 주목했다. 그는 율리야 티모셴코(Tymoshenko)가 이끈 민주화 세력에 의해 친(親)러시아 성향의 레오니트 쿠치마(Kuchma) 정권이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이를 서방에 의한 조종의 결과로 인식했다.
러시아 관영 언론들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은 서방의 조종과 국민의 봉기가 야합해 성사된 정권의 전복”이라는 취지의 보도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지금도 ‘말라야 로시야(Malaya Rossiya·작은 러시아)’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민주화 혁명이 러시아로 파급될 경우 푸틴 정권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는 신호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수르코프로 하여금, 서방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 발전을 모색하는 주권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했다는 것이다. 푸틴은 수르코프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이 대표로 있던 통합러시아당의 이념으로 세우고, 이를 공식화했다.
주권 민주주의에 관한 수르코프의 애착과 집념은 강하다. 자신의 논리를 비판하는 이가 있으면 그가 비록 미국 정계의 거물이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반박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2006년 5~6월 딕 체니(Cheney) 미국 부통령은 소련의 일원이었던 리투아니아, 그루지야 등을 방문했다.
체니는 방문 기간 러시아를 겨냥해 “푸틴 집권하에서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 등의 민주주의 성과까지 뒤집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서방 언론들은 체니의 발언을 대서특필했다.
그러자 수르코프는 외신 기자들과의 간담회를 자청했다. 그는 “도대체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뭐가 후퇴했다는 것이냐. (서방국 지도자들의) 생각과 말은 종종 차이를 보인다. 속으로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따지면서 말로는 민주주의를 떠든다. (체니 부통령은) 러시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비판한 사람이 (독재국가인) 카자흐스탄을 방문해서는 카자흐스탄의 민주주의에 높은 점수를 줬다. 어느 누가 이런 행태에 동의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부시의 참모 칼 로브에 비견
수르코프는 푸틴을 미국의 영웅인 프랭클린 루스벨트(Roosevelt, 1882~1945) 전 대통령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때는 2007년 2월 7일, 모스크바 도심에 위치한 러시아 외교아카데미 회의실. 수르코프는 루스벨트 탄생 125주년을 기념한 회의에 초청 연사로 등장했다. “20세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우리 러시아인의 군사적 동지였지만 지금 21세기에는 우리의 이념적 동지입니다.” 그가 운을 떼자 회의장은 술렁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르코프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대공황 시기의 초반 3년간(1929~ 1931) 미국인들의 소득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1990년대 말 러시아 인구의 약 50%가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이라고 불렀던 때와 마찬가지죠. 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각각 미국과 러시아 경제를 재건하고 국부(國富)를 창출했습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참석자들은 이 얘기를 듣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모스크바국립대의 한 교수는 “참석자 대부분 수르코프가 진정한 푸틴의 브레인(brain)이라는 데 공감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수르코프는 2011년 7월 10일 체첸TV와의 인터뷰에서는 “푸틴은 어려웠던 시기의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신(神)이 러시아에 보내준 선물이자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수르코프는 2007년 후반기 푸틴 대통령 연임, 메드베데프에 권력 이양, 재집권이라는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푸틴이 3선할 경우 쏟아질 서방의 비난을 감안, 푸틴의 12년 후배이면서도 정치적 뿌리가 없던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앉히는 대신 4년간 총리로 물러앉게 한 것이다. 푸틴은 작년 9월 메드베데프와의 역할 맞교대를 선언하면서 “우리 팀은 이미 4년 전에 이에(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의 역할 맞교대에) 합의했었다”고 밝혀 오래전의 구상임을 확인시켜 줬다.
12년 집권 프로젝트를 만든 수르코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있다. 바로 “미국 백악관에 칼 로브(Rove)가 있다면, 크렘린에는 수르코프가 있다”는 말이다. 칼 로브는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킹메이커(kingmaker)라고 불린 사람으로, 부시 대통령의 정치자문 겸 백악관 비서실 부실장이었다. 이 같은 로브와 수르코프의 위상을 동급(同級)으로 위치시킨 것이다.
수르코프, “정치 개입 안 할 것”
그렇다면 이렇게 유능하고 자신의 집권에 없어서는 안 될 수르코프를 푸틴은 왜 크렘린에서 빼낸 것일까.
무엇보다 러시아 정치권은 작년 12월 4일 치러진 총선에서 빚어진 통합러시아당의 부정선거 의혹 이후 성난 민심을 의식한 조치로 분석한다. 부정선거 논란 이후 러시아에서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20년 만에 최대 인파인 3만여 명이 모여 규탄시위를 벌였다. 비록 수르코프가 부정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확증이 없더라도 부정선거의 진원(震源)인 통합러시아당과 수르코프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르코프는 2001년 통합러시아당의 창당을 주도한 인물이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정치분석가 스타니슬라프 벨콥스키는 “3월 4일 대선을 통해 크렘린에 재(再)입성하는 푸틴이 부정선거 논란을 촉발한 통합러시아당과 밀접한 수르코프를 크렘린에서 빼내,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보이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수르코프의 자리인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에 동갑내기 뱌체슬라프 볼로딘(Bolodin·48) 부총리 겸 총리 비서실장이 내정된 것도 이런 분석과 맥을 같이한다. 볼로딘은 푸틴이 2012년 3월 대선에 대비하기 위해 여야와 청년·시민단체 인사들을 망라해 작년 5월 설립한 ‘전러시아국민전선’의 대표다.
벨콥스키는 “통합러시아당은 총선에서의 부정으로 인해 앞으로 푸틴이 거리를 둘 수밖에 없고, 결국 전러시아국민전선이 통합러시아당의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며 “따라서 수르코프를 볼로딘으로 바꾼 것은 당연해 보인다”고 말했다.
일단 수르코프는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직을 떠나면서 “비록 실수도 있었지만 크렘린 팀(team)은 최고였다. 나는 앞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르코프가 크렘린에서 내각으로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관측이 소수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지금까지 수르코프의 역할이 워낙 컸기 때문에 푸틴으로서는 향후 수르코프에게 중요한 임무를 계속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차원에서다. 전망의 근거는 이렇다.
실질적 총리 역할을 할 것이란 예상도
수르코프의 전·현직인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과 내각 부총리는 같은 급(級)이다. 수평이동인 셈이다. 특히 푸틴이 3월 대선을 통해 5월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하면 지금껏 4년간 푸틴이 맡으면서 비대했던 총리의 역할은 축소될 것이 뻔하다. 수르코프는 내각에서 경제현대화와 혁신을 담당하는 부총리다. 푸틴은 이미 경제현대화를 대선 후 자신의 비전으로 공식화했다. 경제현대화 담당 부총리 수르코프가 허약해진 총리를 대신해 푸틴의 비전(vision)을 실현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제까지 푸틴 시대의 이론적 기초를 다 닦았다면 이제는 현실에서의 실천 임무가 수르코프에게 부여됐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수르코프는 부총리 임명 직후 “나는 오랫동안 보직 변경을 희망해 왔고 푸틴 총리와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2012년부터 새 삶을 시작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 왔다”며 “새로 맡게 된 경제현대화 담당 부총리 업무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지난 12년간 러시아 정치를 주물렀던 수르코프의 향후 행보에 러시아는 물론 세계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그는 1999년부터 무려 12년간 크렘린(대통령궁) 행정실의 부(副)실장으로 일하면서 푸틴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은 우리의 청와대 비서실 2인자인 정책실장에 해당한다. 모습이 외부에 자주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르코프의 힘은 막강했다. 푸틴을 러시아의 ‘국부(國父)’로 올려놓은 이가 수르코프였다. 2000~2008년 푸틴의 대통령 연임→2008~2012년 메드베데프에 4년간 권력 이양→2012년 푸틴의 재집권이라는 시나리오도 그의 작품이다. 심지어 미-러 인권위원회의 러시아 측 대표를 맡아 미국이 러시아의 인권 문제를 공격하면 “미국은 관타나모 수용소에 있는 죄수들을 고문하지 않았느냐”며 수비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12년 동안 푸틴 정권의 이념 정립에서부터 인사권, 이미지메이킹, 외교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자연 러시아 정가에선 “러시아 정치를 움직이는 최고 실세(實勢)”라고 불러왔다.
‘21세기의 수슬로프’
수르코프를 ‘21세기의 미하일 수슬로프(Suslov, 1902~1982)’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슬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부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Brezhnev, 1906~1982) 시대에 걸친 소련공산당의 이론가였다. 1947년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된 후 1982년에 사망하기까지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Pravda) 편집장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당내 민주주의 이론 정립 등에 공헌한 인물이다. 수르코프가 푸틴 시대의 모든 것을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수슬로프에 비유한 것이다.
그랬던 수르코프가 작년 말 돌연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에서 물러났다. 푸틴 총리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합의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수르코프는 대신 내각 부총리로 임명됐다.
수르코프가 크렘린을 떠나 내각으로 이동하자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 정치판을 뒤흔드는 최대 사건’이라고 했다. ‘수르코프의 시대는 끝났다’ ‘러시아 정치·외교 등 모든 것이 혁명을 맞을 것이다’라는 말도 나왔다. 이 같은 평가들의 적절성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지금까지 수르코프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방증하는 표현들이다.
수르코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폭발시켰을까. 또 그처럼 엄청난 힘을 가졌던 수르코프는 왜 크렘린을 떠나야 했을까.
필자는 2005년부터 4년간 러시아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르코프를 만난 적이 있다. 2006년 중반 수르코프가 모스크바 주재 외신기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였다. 3시간이 넘는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기자들은 러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을 비판하는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차례도 답변을 회피하지 않았다. 질문에 대한 답이 막힐 때 “그냥 보드카나 한잔 하자”며 넘어가거나 자리를 뜨는 여타 러시아 정치인들의 모습을 그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간담회가 끝나갈 무렵 참석했던 기자들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으로 푸틴과 처음 만나
수르코프와 푸틴의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광고맨’ 출신인 수르코프는 1999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으로 영입됐다. 러시아 광고주협회 회장 출신인 그가 옐친 정권의 홍보를 맡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발탁 인사였다고 한다. 행정실 부실장으로 들어가면서 푸틴 당시 총리와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진다.
영입 당시 수르코프는 훗날 푸틴의 적이 될 만한 사람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990년 모스크바 국제대학교를 졸업한 수르코프는 이듬해 석유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Khodorkovsky·47)가 소유한 메나테프(Menatep) 은행의 광고와 홍보 담당자로 입사했다. 한때 러시아 경제를 호령하던 호도르콥스키는 푸틴에 반대하는 야권에 정치자금을 댔다가 2003년 탈세·횡령 혐의로 푸틴 정권에 의해 수감된 대표적인 반(反)푸틴 기업인이다.
수르코프는 메나테프 은행에서 만 5년을 일했다. 호도르콥스키의 재정 상태나 정치적 움직임을 워낙 잘 알 수밖에 없었던 위치에 수르코프가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는 ‘올리가르히(Oligarchy·신흥재벌)의 시대’라고 할 만큼 1991년 소련 해체 후 매물로 나온 국영기업을 헐값에 사들인 신흥 부자들이 경제적 부 축적은 물론 정치에까지 손을 대며 러시아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기였다.
수르코프는 1996년 또 다른 올리가르히 미하일 프리드만(Fridman·47) 소유의 알파은행에서도 역시 광고·홍보책임자로 일했다. 그러다가 1998년 국영 TV 채널의 제1보도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99년에야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으로 영입된 수르코프가 어떻게 푸틴 총리와 가까워지게 됐는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수르코프의 고향인 체첸공화국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무슬림이 대부분인 체첸은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펼치는 지역이다. 러시아인들에 대한 테러가 가장 활발하다.
수르코프는 1964년 체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다르벡 두다예프 역시 체첸인이고, 자신도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5년간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 그의 이름은 이슬람벡 두다예프(Dudayev)였다. 나중에 부모가 이혼했고, 수르코프는 어머니인 지나이다 수르코바(Surkova)를 따라 체첸의 북쪽 리페츠크주로 이사했다. 이때 러시아식 이름인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로 개명했다. 푸틴의 이너서클에서 체첸 출신은 사실상 수르코프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체첸 문제를 수르코프보다 잘 아는 이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르코프가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으로 들어온 1999년 푸틴은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전권(全權)을 물려받은 총리로서 체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푸틴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 이는 다름 아닌 체첸 출신 수르코프였다는 얘기가 있다.
크렘린 사정에 밝은 러시아 정부 소식통은 “체첸 출신인 수르코프가 러시아에서 독립하려는 체첸분리주의자를 소탕해야 러시아가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고민을 거듭하던 푸틴의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이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실제로 수르코프는 1999년 하반기부터 승승장구해 2000년 5월 푸틴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크렘린의 책사(策士)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푸틴 지지 청년단체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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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푸틴 청년조직인 나시의 지도자 바실리 야케멘코. |
이른바 ‘푸틴당’ 창당에 이어 수르코프가 다음으로 주력한 분야는 친(親)푸틴 청년단체 설립이었다. 수르코프는 2005년 청년운동가 바실리 야케멘코(Yakemenko)와 함께 ‘나시(Nashi·사전적으로는 ‘우리’라는 의미)’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2011년 말 현재 회원수가 60만명으로 추산되는 이 단체는 15~30세 사이의 젊은이들이 멤버다. 푸틴을 지지하고 러시아 주권을 보전한다는 점을 목표로 한다. 다름 아닌 러시아 민족주의 조직이다. 나시는 벌써 국가두마 의원을 3명이나 배출했다. 소련 시절 소련공산당의 당간부 양성 조직이었던 콤소몰(Komsomol·공산주의청년동맹)을 본떠 만들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러시아식 민주주의를 푸틴의 이데올로기로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푸틴의 집권 기간 수르코프가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은 ‘주권 민주주의(sovereign democracy)’다. 이 개념은 푸틴의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요체는 서구식과 유사한 민주주의는 하되 외부의 위협, 다시 말해 러시아를 넘보려는 서방의 위협으로부터 주권을 지키는 ‘러시아식 민주주의’다. 마치 한국의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유신체제를 탄생시키면서 ‘한국식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르코프는 종종 지인들을 통해 “러시아는 서방처럼 열린 사회를 만들겠지만 외부의 개입은 원치 않는다”면서 “서방은 민주주의가 주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를 인정할 수 없고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와 주권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수르코프가 주권 민주주의론을 처음 제기한 시점은 2006년 2월 22일이다. 통합러시아당 당대회 연설에서였다.
그는 이보다 1년 정도 앞선, 2004년 11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이른바 ‘오렌지 혁명(부정부패로 얼룩진 레오니트 쿠치마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화 혁명)’의 파장을 주목했다. 그는 율리야 티모셴코(Tymoshenko)가 이끈 민주화 세력에 의해 친(親)러시아 성향의 레오니트 쿠치마(Kuchma) 정권이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이를 서방에 의한 조종의 결과로 인식했다.
러시아 관영 언론들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은 서방의 조종과 국민의 봉기가 야합해 성사된 정권의 전복”이라는 취지의 보도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지금도 ‘말라야 로시야(Malaya Rossiya·작은 러시아)’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민주화 혁명이 러시아로 파급될 경우 푸틴 정권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는 신호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수르코프로 하여금, 서방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 발전을 모색하는 주권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했다는 것이다. 푸틴은 수르코프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이 대표로 있던 통합러시아당의 이념으로 세우고, 이를 공식화했다.
주권 민주주의에 관한 수르코프의 애착과 집념은 강하다. 자신의 논리를 비판하는 이가 있으면 그가 비록 미국 정계의 거물이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반박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2006년 5~6월 딕 체니(Cheney) 미국 부통령은 소련의 일원이었던 리투아니아, 그루지야 등을 방문했다.
체니는 방문 기간 러시아를 겨냥해 “푸틴 집권하에서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 등의 민주주의 성과까지 뒤집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서방 언론들은 체니의 발언을 대서특필했다.
그러자 수르코프는 외신 기자들과의 간담회를 자청했다. 그는 “도대체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뭐가 후퇴했다는 것이냐. (서방국 지도자들의) 생각과 말은 종종 차이를 보인다. 속으로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따지면서 말로는 민주주의를 떠든다. (체니 부통령은) 러시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비판한 사람이 (독재국가인) 카자흐스탄을 방문해서는 카자흐스탄의 민주주의에 높은 점수를 줬다. 어느 누가 이런 행태에 동의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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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4월 11일 ‘러시아 국민단합의 날’에 나시 회원들이 반(反)인종주의 집회를 열고 있다. |
부시의 참모 칼 로브에 비견
수르코프는 푸틴을 미국의 영웅인 프랭클린 루스벨트(Roosevelt, 1882~1945) 전 대통령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때는 2007년 2월 7일, 모스크바 도심에 위치한 러시아 외교아카데미 회의실. 수르코프는 루스벨트 탄생 125주년을 기념한 회의에 초청 연사로 등장했다. “20세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우리 러시아인의 군사적 동지였지만 지금 21세기에는 우리의 이념적 동지입니다.” 그가 운을 떼자 회의장은 술렁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르코프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대공황 시기의 초반 3년간(1929~ 1931) 미국인들의 소득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1990년대 말 러시아 인구의 약 50%가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이라고 불렀던 때와 마찬가지죠. 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각각 미국과 러시아 경제를 재건하고 국부(國富)를 창출했습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참석자들은 이 얘기를 듣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모스크바국립대의 한 교수는 “참석자 대부분 수르코프가 진정한 푸틴의 브레인(brain)이라는 데 공감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수르코프는 2011년 7월 10일 체첸TV와의 인터뷰에서는 “푸틴은 어려웠던 시기의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신(神)이 러시아에 보내준 선물이자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수르코프는 2007년 후반기 푸틴 대통령 연임, 메드베데프에 권력 이양, 재집권이라는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푸틴이 3선할 경우 쏟아질 서방의 비난을 감안, 푸틴의 12년 후배이면서도 정치적 뿌리가 없던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앉히는 대신 4년간 총리로 물러앉게 한 것이다. 푸틴은 작년 9월 메드베데프와의 역할 맞교대를 선언하면서 “우리 팀은 이미 4년 전에 이에(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의 역할 맞교대에) 합의했었다”고 밝혀 오래전의 구상임을 확인시켜 줬다.
12년 집권 프로젝트를 만든 수르코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있다. 바로 “미국 백악관에 칼 로브(Rove)가 있다면, 크렘린에는 수르코프가 있다”는 말이다. 칼 로브는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킹메이커(kingmaker)라고 불린 사람으로, 부시 대통령의 정치자문 겸 백악관 비서실 부실장이었다. 이 같은 로브와 수르코프의 위상을 동급(同級)으로 위치시킨 것이다.
수르코프, “정치 개입 안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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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뱌체슬라프 볼로딘. |
무엇보다 러시아 정치권은 작년 12월 4일 치러진 총선에서 빚어진 통합러시아당의 부정선거 의혹 이후 성난 민심을 의식한 조치로 분석한다. 부정선거 논란 이후 러시아에서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20년 만에 최대 인파인 3만여 명이 모여 규탄시위를 벌였다. 비록 수르코프가 부정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확증이 없더라도 부정선거의 진원(震源)인 통합러시아당과 수르코프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르코프는 2001년 통합러시아당의 창당을 주도한 인물이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정치분석가 스타니슬라프 벨콥스키는 “3월 4일 대선을 통해 크렘린에 재(再)입성하는 푸틴이 부정선거 논란을 촉발한 통합러시아당과 밀접한 수르코프를 크렘린에서 빼내,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보이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수르코프의 자리인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에 동갑내기 뱌체슬라프 볼로딘(Bolodin·48) 부총리 겸 총리 비서실장이 내정된 것도 이런 분석과 맥을 같이한다. 볼로딘은 푸틴이 2012년 3월 대선에 대비하기 위해 여야와 청년·시민단체 인사들을 망라해 작년 5월 설립한 ‘전러시아국민전선’의 대표다.
벨콥스키는 “통합러시아당은 총선에서의 부정으로 인해 앞으로 푸틴이 거리를 둘 수밖에 없고, 결국 전러시아국민전선이 통합러시아당의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며 “따라서 수르코프를 볼로딘으로 바꾼 것은 당연해 보인다”고 말했다.
일단 수르코프는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직을 떠나면서 “비록 실수도 있었지만 크렘린 팀(team)은 최고였다. 나는 앞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르코프가 크렘린에서 내각으로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관측이 소수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지금까지 수르코프의 역할이 워낙 컸기 때문에 푸틴으로서는 향후 수르코프에게 중요한 임무를 계속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차원에서다. 전망의 근거는 이렇다.
실질적 총리 역할을 할 것이란 예상도
수르코프의 전·현직인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과 내각 부총리는 같은 급(級)이다. 수평이동인 셈이다. 특히 푸틴이 3월 대선을 통해 5월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하면 지금껏 4년간 푸틴이 맡으면서 비대했던 총리의 역할은 축소될 것이 뻔하다. 수르코프는 내각에서 경제현대화와 혁신을 담당하는 부총리다. 푸틴은 이미 경제현대화를 대선 후 자신의 비전으로 공식화했다. 경제현대화 담당 부총리 수르코프가 허약해진 총리를 대신해 푸틴의 비전(vision)을 실현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제까지 푸틴 시대의 이론적 기초를 다 닦았다면 이제는 현실에서의 실천 임무가 수르코프에게 부여됐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수르코프는 부총리 임명 직후 “나는 오랫동안 보직 변경을 희망해 왔고 푸틴 총리와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2012년부터 새 삶을 시작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 왔다”며 “새로 맡게 된 경제현대화 담당 부총리 업무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지난 12년간 러시아 정치를 주물렀던 수르코프의 향후 행보에 러시아는 물론 세계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