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등거리 외교 같은 근시안적 정책은 곤란
⊙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에 기초해 한일협력해야
⊙ 북한에 대한 식민지배 보상은 통일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
金錫友
⊙ 66세. 서울대 행정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제법 석사.
⊙ 외무부 아주국장,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의전수석비서관, 통일원 차관, 국회의장 비서실장 역임.
⊙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에 기초해 한일협력해야
⊙ 북한에 대한 식민지배 보상은 통일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
金錫友
⊙ 66세. 서울대 행정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제법 석사.
⊙ 외무부 아주국장,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의전수석비서관, 통일원 차관, 국회의장 비서실장 역임.

-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2002년 9월 김정일과 만나 일·북 관계 정상화에 대해 논의했으나, 일본인 납치자 문제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중국은 작년에 국민총생산(GDP) 규모에서 일본을 앞질렀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일 뿐만 아니라, 이미 미국 다음의 군사대국이다.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으로 구미(歐美)열강으로부터 수모를 당한 이후 한 세기 반 만에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평원에 거대한 영토와 13억 인구를 가진 대국(大國)으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에 비하면 길게 이어진 열도와 1억30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일본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일본은 그 특유의 배타적이고 비(非)융합적인 성향으로 인해 더욱 왜소해져 간다. 지난 20년간 지속된 일본의 경제침체와 국내정치의 안정감 상실은 상승하는 중국과 대비된다. 1980년대에 당장이라도 미국을 능가할 것 같던 일본이 지금의 좌절감 속에서 지향할 방향은 무엇인가? 특히 대(對)한반도, 대북(對北)정책은 무엇인가?
韓日관계의 질적 변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점령국 미국이 기초한 평화헌법에 따라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택하면서 국방은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부흥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일본의 대외(對外)정책상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은 매우 실용적인 세력 신장 수단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쳐온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반일(反日)정책을 강하게 고수했다. 일본도 굳이 한일회담에 적극적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인 한일 양국이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미국의 기본 전략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추진 의욕이 추동력(推動力)이 되어 우여곡절 끝에 1965년 한일 국교(國交)정상화가 이루어졌다.
국교정상화 당시만 해도 현격한 국력(國力) 차이로 인해 한일 양국(兩國) 간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압도하는 비대등관계가 오랜 기간 지속됐다.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차이와 지속되는 무역불균형과 같은 결정적 요인 때문에 양국 간의 감정적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1980년대 중반 정치민주화까지 성취함에 따라 한일관계도 점차 대등한 관계로 질적(質的) 변화를 보게 됐다.
종합 국력상의 현격한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경제력이 급성장함에 따라 과거 식민통치에서 연유하는 일본의 일방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다. 한국의 광복 이후 세대는 일본을 거치지 않고도 세계의 첨단 기술·자본과 직접 연결됐다. 한국은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대등한 경쟁관계로 성장했다.
한편 일·북(日北) 관계는 어떠한가? 북한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소련 흐루쇼프의 평화공존정책 이후 국제적 고립을 면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정상화에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예비회담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은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개선에는 소극적 자세를 취하면서도 민간·경제 분야의 교류필요성에는 공감했다. 이에 따라 1956년 일·조(日朝)무역협회를 결성, 민간차원의 교류여건을 조성했다. 1959년부터는 9만3000명의 재일(在日)교포를 북송(北送)하기도 했다.
북한은 1970년대에 들어와 미·중(美中) 공동성명, 7·4 남북공동성명 등 긴장완화 분위기가 고조되자 일본을 향해 수교(修交)필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정부차원의 접촉은 주저하면서도, 의회차원의 친선단체 등 각종 우호단체를 결성하고, 민간협정들을 체결했다. 1973년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과 다음 해 8월 문세광(文世光) 사건으로 한일 양국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 결과 북한 최고인민회의 현준극 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했고, 우쓰노미야 도쿠마 자유민주당 의원이 이끄는 대표단도 북한을 방문했다.
일본의 등거리 외교
이러한 일·북교류가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 언론과 지식인 사회의 공산사회에 대한 환상, 당장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일본 나름의 접근방법 때문이었다. 일본은 북한과의 의회차원이나 민간차원의 교류를 증진시킴으로써 분단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일본이 소위 남북 등거리(等距離) 정책을 취했다고 비판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일본의 남북 등거리 자세는 1980년대에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변하게 된다. 한반도라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본의 전 세계적 역할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1982년 11월 취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취임 40여 일 만에 첫 해외 방문지로 워싱턴이 아닌 서울을 택했다. 그는 40억 달러 경협(經協)차관 문제를 마무리 짓고, 한일 우호관계를 확인했다. 그 후 일본에서 총리가 되려는 정치인은 한국과 한국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不文律)처럼 됐다.
1989년 동구권의 몰락과 1991년 소련체제의 종언은 전(全) 세계적 질서의 변환이었다. 1990년 9월 한·소 수교,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반도에서도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정치대국을 지향해 온 일본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1990년 9월 가네마루-다나베 공동대표단의 방북 후 자민당·사회당·조선노동당 간의 3당 공동선언을 통해 수교교섭의 물꼬를 텄다. 이후 일본은 외무성 중심으로 북한과의 수교교섭을 부단하게 진행했다.
일본외교로서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라는 계산이 물론 있었고, ‘전후(戰後)처리의 마지막 과제를 해결한다’는 정치인들의 욕심이 크게 작용했다. 경제파탄에 이른 북한으로서도 50억~100억 달러에 달하는 보상금이 매우 간절했다.
日·北 수교 3원칙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북한이 자행한 테러와 불법행위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한국정부가 제시하여 1995년 11월 무라야마 총리 방한 시에 확인한 일·북 수교 3원칙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즉 ①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② 한일 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대응하고, ③ 수교 이전 대북 경제지원은 불가(不可)하다는 내용이었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후 김대중 정부는 일본에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권유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2002년 9월 평양을 방문해 국교정상화를 위한 수교 교섭재개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 인정·사과를 포함하는 5개항의 일·북 평양선언에 합의했다.
그 후 일·북 간 현안이던 일본인 납치행위를 김정일이 인정·사과하고, 납북 일본인 5명을 다음 달 일본으로 귀환시켰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요코타 메구미 등 8명을 포함한 다른 피랍자에 대한 의혹은 계속 일본 여론의 분위기를 악화시켰다. 게다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 EU와 함께 국제적 제재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행위는 다시금 한·미·일 간 공조를 결속시켰다. 중국이 북한의 후견자(後見者) 역할을 맡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역풍은 북한이 감당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특히 연평도 포격은 한국사회 안의 친북(親北)세력마저 적극적으로 북한 편을 들 수 없게 만들었다. 북한에 식량·비료를 지원하자는 주장은 설 땅을 잃게 됐다. 가을에 추수한 양곡이 바닥나는 3월경이 되면 체제유지마저 심각해질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애간장이 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중국과 함께 6자회담 재개를 제의하고, 남북 간에도 당국, 국회, 적십자, 군사회담 제의 등 각종 대화공세를 펴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대화 공세를 펼치고 있다.
현재까지 한·미·일 3국 간 공조체제는 잘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일본사회의 초조감이 대외정책에서 나타날 수 있다. 2009년 9월 자민당 장기집권 54년 만에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정권은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문제에 혼선을 빚는 등 주요 외교정책에서도 무게중심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마에하라 日외상, 대북대화 의지 피력
금년 1월 4일 마에하라 세이지 일본 외상은 “북한과 국교는 없지만 일·북대화를 중요과제로 삼겠다”, “납치, 미사일, 핵문제 등으로 일·북 직접 대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1월 15일 방한 시 그는 “일본과 북한과의 대화에 앞서 남북대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한·미·일 간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북한과 세 나라가 각각 대화를 하는 식으로 공조하고 대화를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남북대화가 우선해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대화국면을 기대하여 일본도 북한과의 대화통로를 개척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일본이 취할 대북정책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우선 거시적(巨視的) 시각에서 보자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역량과 가치관이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일본 외교가 각론(各論)에는 강하지만, 총론(總論)에는 약하다는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 과거사에 대해 용기 있게 대응을 하지 못하는 한 주변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일본의 정치력은 커지기 어렵다. 일본은 일본경제가 최고조였던 시기에 이를 정치력 신장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의 모멘텀으로 활용하지 못한 점을 상기해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초대국(超大國)의 여건을 갖춘 중국의 부상에 대하여 일본 혼자만으로는 대응하기가 어렵게 됐다. 장차 동아시아 질서의 패러다임이 변환되어 다자적(多者的) 안보협력체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일·중 간 경쟁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지역안보체제 형성을 막는 요인이기도 하다. 2010년 9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선박충돌 사건이 좋은 예다.
일본은 전후에 일본이 발전시켜 온 가치 면에서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 지역에서 일본이 자랑할 만한 매우 중요한 가치이며 자산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하다.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1970년대 남북한 사이에서 작은 이익을 취하려 했던 것과 같은 계산은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머지않은 시기에 김정일 사망 후 북한의 급변사태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북한이 3대 세습에 의한 독재체제를 지속하면서, 주민의 민생을 외면하는 길을 걷는데도, 이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이다. 이미 한국의 햇볕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 미사일 개발과 천안함, 연평도 포격으로 증명됐다. 그 훨씬 이전의 일본의 유화적 대북정책이 실패였던 것도 함께 확인됐다.
한일 공동으로 새로운 대북지원 모델 만들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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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던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 |
따라서 앞으로는 한일 양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에 기반을 두고, 북한의 비핵화(非核化)와 정상국가화를 추진하는 공동의 원칙을 확립하고 이 원칙을 바탕으로 북한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강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북한의 진정한 변화라는 조건이 성숙된 후에는 대북지원 측면에서도 한일공조를 강화해야 한다.
조건이 성숙됐다는 전제하에서 새로운 지원 협력 모델을 발굴할 필요도 있다. 종래의 대북지원은 식량, 비료, 중유 등 땜질식으로 그날그날 먹이는 식의 단순방식으로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축소재생산 구조의 경제 강성대국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지속적인 확대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경제지원 모델을 추진하도록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발굴하여 제시할 수도 있다. 예컨대, 가칭 ‘북한경제발전 지원을 위한 한일협의체’를 구성하여 북한에 정말 필요하고 바람직한 경제발전 모델과 외부 지원이 필요한 수요를 체계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협의 과정에서 북한을 초청하여 입장을 반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장차 이것이 발전되면 중국, 러시아, EU 등 관심국의 참가도 유도하여 북한판 IECOK(1960~70년대의 한국경제개발을 위한 국제협력체)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이는 북한이 개혁·개방을 거부하여 급변사태가 일어날 경우에는 그 대책으로서 활용될 수도 있다. 일본은 앞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강경이든 온건이든 한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전제로 해야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대북보상금은 통일 후에
일본과 북한의 적절한 대화는 북한이 핵무기,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고, 천안함, 연평도 포격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의 진정성을 보일 때, 그리고 한·미·일 간의 긴밀한 공조를 거칠 때에 자연스럽게 발전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월 15일 마에하라 외상의 입장은 적절한 것이다. 이는 1995년 11월 일·북 수교교섭 3원칙의 기본정신에 합치하는 것이다.
이제 대북정책은 북한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북한 정권이 이를 거부할 때에는 그 결과 급변사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를 굳이 막아줄 필요가 없다. 2000만 북한 주민을 도탄에서 구해내기 위한 노력이 우선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은 한반도의 통일과 지역의 평화에 기여하는 길이다.
50억 내지 100억 달러에 해당하는 식민지 통치에 대한 보상금 문제도 무책임한 독재 정권의 수명만을 연장시키는 데 쓰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그것은 나중에 통일이 됐을 때, 한반도의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돈이 남북이 통일된 후 쓰일 때 크게 평가받을 것이다.
또한 강제납북 일본인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추구해 왔듯이 양보할 수 없는 문제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일본 여론 때문에라도 일·북 관계정상화는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미국과 함께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가하여 주권침해와 인권유린에 대한 북한의 사실인정, 사과,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당사자가 되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앞으로 북한 정권이 개혁·개방을 단행하든, 급변사태로 진전되든 간에 한반도는 격동의 시기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이 어떠한 역할을 하느냐는 앞으로 수 세기 동안 한일 관계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대북관계에 있어서 일본은 나무만 보기보다는 큰 숲을 보면서 나가야 한다. 그것은 일본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한·미·일 간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