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월간조선》은 이 뜻깊은 해를 맞이해 다양한 특집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설날을 앞두고 나오는 이번 2월호에서는 그 첫 번째로 ‘해방 80년 80인-해방둥이에서 BTS까지’까지를 마련했습니다. 이에 관련해 독자 여러분께 몇 가지 설명을 드리고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우선 《월간조선》은 올해를 ‘광복 80주년’이 아니라 ‘해방 80주년’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해방과 광복이 같은 의미인 것처럼 혼용되고 있지만, 광복은 ‘잃었던 주권을 되찾았다’는 의미입니다. 광복은 곧 독립이나 건국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은 1945년에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바로 주권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3년간의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비로소 주권을 회복했습니다.
둘째, 인물 선정의 기준입니다. 이번 특집에서는 ‘1945년 이후 출생한 인물’을 그 대상으로 했습니다.
물론 해방 이후 활약한 주요 인물들을 꼽는다면 건국, 6·25, 산업화, 민주화 등과 관련된 분들이 될 것입니다.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백선엽(白善燁)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이병철(李秉喆) 정주영(鄭周永) 박태준(朴泰俊) 김우중(金宇中)…. 이분들은 분명 대한민국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분들이지만, 이미 과거에 해방이나 건국을 기억할 때마다 수없이 소환되었던 분들입니다.
저희는 이번에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서 ‘1945년 출생한 분’들부터 다루기로 했습니다. 흔히 ‘해방둥이’라고 불리던 분들도 이제는 80세입니다. ‘해방둥이’ 이후를 다루어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당대에 높은 자리에 있었다거나 반짝인기를 끌거나 화제가 되었던 이들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의 행보에 두드러진 족적을 남기거나 후대에 영향을 남긴 인물, 시대의 성취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이런 시도는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1945년 이후 출생자’로 한정하고 보니, 몇 가지 사실들이 보였습니다.
우선 건국 세대, 호국(護國) 세대, 근대화 세대에 비해 무게감은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치인·관료·군인 그룹에서는 역대 대통령들 외에는 눈에 띄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경제 분야에서는 개발연대 산업화를 이끌었던 기업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반도체·IT·금융·스타트업 등 분야에서 시대의 변화를 선도(先導)한 이들이 꽤 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대중문화, 스포츠, 시민사회운동 등의 분야에서는 선별하기 힘들 정도로 인물이 많았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미 1970년대부터 대중의 시대, 대중문화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정된 인물들, 특히 시민사회 분야나 문화예술 분야 인물들 가운데는 ‘보수의 관점’에서 보면 탐탁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좌경화(左傾化)된 우리 사회의 추이(推移)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월간조선》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꼭 기억해야겠다’ 싶은 인물들, 예컨대 이승복이나 연평해전 전사자들, 젊은 북한인권운동가들을 의도적으로 포함시켰습니다.
건국–근대화 세대가 만든 19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을 ‘국가·관료 주도, 근대화, 반공’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면, 1945년 이후 출생한 세대가 주도한 그 이후의 대한민국은 ‘민간 주도, 대중화, 좌경화’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특집에서는 인물들을 누가 선정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 권위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로 자문단을 구성하거나 여론조사를 하는 방법 등이 있을 것입니다.
특집을 준비하면서 《월간조선》이 가장 고민한 것도 이 대목이었는데,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몇몇 전문가들께 특집에 대해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습니다만, ‘해방 이후 활약한 인물’이라면 몇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도 ‘1945년 이후 출생한 인물’로 제한하면 얼른 대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말씀해 준 분들도 확인해 보면 1930년대나 1940년대 초에 태어난 분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론조사를 하더라도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또 ‘전문가 집단’을 구성해 그분들에게 선정을 의뢰한다고 해도 그 권위는 누가 담보할 것인지도 의문이었습니다.
결국 《월간조선》 기자들이 1945년 이후 출생한 분야별 유명 인사들의 방대한 리스트를 만든 후, 몇 차례 회의를 거쳐 80명으로 압축하기로 했습니다.
선정된 이름들을 보면서 ‘생소한 인물이 많다’고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빠졌느냐’거나 ‘왜 이런 사람을 포함시켰느냐’고 지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호불호를 떠나서 대중사회의 도래와 좌경화, 민간 주도라는 시대의 추이를 보여주는 이들이 선정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만, 그에 대한 질책은 편집장인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편집장 배진영 올림
정치/관계/군
노무현
팬덤 정치로 엘리트 정치 구도 깬 ‘원조 흙수저 정치인’
노무현(盧武鉉·1946~2009)은 한국 정치에 ‘팬덤(fandom)’의 개념을 각인시킨 인물이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주체는 소속 정당인 새천년민주당이라기보다는 팬덤 조직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였다.
노무현이 팬덤을 갖게 된 것은 정치인 노무현의 ‘특별함’ 때문이었다. 지연과 학연을 중시하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 고졸 출신 ‘흙수저’ 인권변호사라는 이력, 부산 출신이면서 민주계 정당에 몸담고 지역주의 타파에 앞장서는 점 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당선(부산 동구)됐지만 3당 합당에 반대해 합류를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남았다.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며 지역주의와 싸우다 총선(14~16대), 초대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으로 알려진 ‘노사모’가 탄생했고, 노무현은 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02년 16대 대선 출마를 결심한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그림자 아래 있던 기존 정치 구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였다. 새천년민주당 주류가 아니었던 노무현이 당내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지만 전국적으로 노사모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대이변을 일으켰고, 본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마저 꺾고 16대 대통령이 됐다.
노무현은 수많은 개혁을 꿈꿨지만 여당 내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고,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한 대통령이 됐다. 탄핵은 기각됐지만 정국 혼란, 경제정책 실패 등으로 임기 후반 그의 지지율은 계속 떨어졌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를 받던 그는 퇴임 후 낙향한 경남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고 말았다.⊙
권세진 기자
박근혜
박정희의 딸, 보수의 유산을 무너뜨리다
박근혜(朴槿惠·1952~ )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부녀(父女) 대통령이면서 최초로 파면된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장녀로 태어난 박근혜는 1974년 문세광 저격 사건으로 어머니를, 1979년 10·26 사태로 아버지를 잇달아 잃었다. 이후 20여 년간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1998년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16~19대까지 내리 5선(選)을 했다. 2012년 12월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가 등장한 1998년은 보수 세력이 해방 이래 처음으로 정권을 뺏기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해다. 박근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야권이었던 보수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기반을 다진 박정희의 딸에 보수는 열광했다. 박근혜는 보수 정당이 어려울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했고, 성공했다. 한나라당 대표(2004년)와 비상대책위원장(2011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2012년)으로 당을 이끌면서 총선과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했고, 매번 불리했던 판세를 역전시키며 승리를 이끌어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 괴담’에 이어 대통령 취임 4년 차인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국회에서 탄핵소추됐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로 보수 세력은 정권을 뺏기는 것은 물론 한동안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고 현재까지도 ‘탄핵 트라우마’가 보수 정당에 드리워져 있다.⊙
권세진 기자
문재인
‘적폐 청산’ 내걸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허물다
문재인(文在寅·1953~ )은 전임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실시된 조기(早期) 대선에서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문재인이 정치를 시작하고 계속해 나간 계기는 모두 노무현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일하던 문재인은 친구 노무현과의 오랜 인연으로 그의 ‘참여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비서실장을 지냈다. 노무현 사망 후 2012년 19대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고,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후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선출됐지만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극심한 당내 계파 갈등으로 호남 의원들이 탈당하는 등 정치적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대선 주자로 떠올랐고, 2017년 결국 19대 대통령이 됐다.
전직 대통령 탄핵의 아픔을 겪은 국민은 새로운 리더십과 경제 문제 해결을 원했다. 문재인이 취임하며 내건 슬로건은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었다. 문재인은 ‘정의(正義)’를 내세워 권력기관 재편과 적폐 청산, 북한과의 ‘가짜 평화 쇼’ 등에 몰두하며 대한민국의 기틀을 흔들었다. 검찰 개혁과 고위공직자수사처 신설 등 권력기관을 손보는 과정에서 극심한 정국 혼란이 빚어졌고 의회민주주의가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사회 양극화 현상도 심해졌다. 성별과 세대 간 혐오의 정치와 포퓰리즘이 고개를 들었고, 부동산 정책 실패로 집값이 크게 상승했다.
민심에서 멀어진 문재인 정부는 결국 민주당 정권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5년 만에 보수 정당에 정권을 다시 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권세진 기자
윤석열
좌초한 ‘검사 정치’
윤석열(尹錫悅·1960~ )은 대한민국 최초의 검사 출신 대통령이다. 9수(修) 끝에 사법시험 합격 후 2021년 검찰총장직을 그만둘 때까지 27년간 검사 생활을 하며 특수통으로 불렸다. 수원지검 여주지청장 시절인 2013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수사 외압 의혹을 폭로하며 “조직에 충성할 뿐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징계를 받고 지방을 전전하는 고초를 겪던 윤석열이 부활한 계기는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에 수사팀장으로 참여하면서다. 이때의 활약으로 문재인 정권에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됐다. 적폐 청산과 검찰 개혁을 부르짖던 문 대통령은 이어 그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조국(曺國) 당시 법무장관 수사 등을 두고 대통령 및 민주당과 충돌하면서 검찰총장직을 사퇴했다. ‘문재인과 당당하게 맞서는 윤석열’은 보수 진영에서 대권 주자로 급부상했다. 결국 윤석열은 국민의힘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 20대 대통령이 되었다.
보수 진영의 큰 기대를 받으며 취임한 윤석열은 3대 개혁(노동·교육·연금)과 외교안보 강화 등을 통해 이전 정권과 차별화에 나섰다. 하지만 의대 증원 등 무리한 의료 개혁으로 인한 사회 혼란, 당내 분열 초래, 부인 논란 등으로 민심이 점차 떠나갔고, 22대 총선에서 여당이 크게 패하면서 사실상 손발이 묶인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택한 방법이 비상계엄이었는데, 그 결과 민심은 돌아섰고 야당이 장악한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했다.
27년간 검사로서 특히 권력층 수사에서 맹활약했고 검찰의 수장(首長)에까지 오르며 두려움이 없었던 윤석열은 국민을 모두 수사 또는 교정(矯正)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검사 정치’의 좌초다.⊙
권세진 기자
김문수
노동운동가에서 ‘보수의 기수’로
“사상을 바꾸는 것을 두고 흔히 ‘연옥(煉獄)의 고통을 겪는다’고 표현하잖아요? 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죠.”
‘전향(轉向)’의 어려움에 대해 김문수(金文洙·1951~ ) 고용노동부장관이 늘 하는 말이다.
김문수는 경북고 재학 시절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서울대 상대 재학 중에는 학생 시위로 제적되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를 당했다. 한일공업(도루코) 노조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을 주도했고, 1986년 5·3 인천 사태로 구속돼 2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그는 “내가 열심히 데모에 뛰어들고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체계적, 이념적인 사회 인식 때문이라기보다는 소외받은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박한 신념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보면서 사회주의와 결별한 김문수는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민주자유당에 입당,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내리 3선을 했고 경기도지사를 연임(2006~14)했다. 2012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10년간 정치적으로 불우하게 지내다가 작년 8월 고용노동부장관으로 발탁됐다.
장관 인사 청문회 때 야당의 공격적 질문에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작년 12월 11일 민주당 의원들이 국무위원들에게 “일어나서 12·3 계엄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건국절 논란, 이승만 재평가 등에 대해서도 일관된 목소리를 내왔다. 이런 행보와 청렴 강직한 처신으로 보수층의 중망(衆望)을 모으고 있다.⊙
배진영 기자
추미애
‘엘리트 여성’의 정치 참여 문을 열다
추미애(秋美愛·1958~ ) 의원은 6선 국회의원, 법무부장관, 여당 대표 등 굵직한 이력을 지닌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다. 과거의 여성 정치인들이 대부분 여성운동가, 시민운동가 또는 정당인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엘리트 전문직 여성’이 정치에 참여해 성장하는 새로운 정치 스타일의 시초가 된 인물이다.
추미애는 10년째 판사로 일하던 1995년 법원에 사표를 내고 김대중 당시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당 부대변인을 맡으며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당시 추미애의 입당은 정치권에서 큰 화제가 됐다. 대구 출신, 30대, 미모의 전문직 여성이 야당에 입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야당에서 여성이 부대변인을 맡은 것도 처음이었다. 추미애는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에 출마해 당선됐고, 해당 지역구에서 5선(15, 16, 18~20대)을 했다. 2024년 22대 총선에서는 경기 하남갑으로 옮겨 막판 대역전극으로 6선에 성공했다.
추미애는 정치 입문은 화려했지만 당내에서 지연과 학연 덕을 보기 힘들었고, 특정 대학 출신이 주류인 여성계와도 거리가 있는 데다 그를 ‘장식용’으로 보는 시선 등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선입견에 맞서며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개혁 성향, 당찬 발언과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태도 등으로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민주계 정당에서 TK 출신인 그가 당대표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강하고 독특한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8년 당대표 당시 인터넷 포털 댓글 조작 수사 의뢰가 ‘드루킹 사건’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X맨’이라는 오명을 썼고, 2020년 법무부장관으로서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징계를 청구해 결국 문재인이 임명한 윤 총장을 국민의힘 소속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세진 기자
오세훈
‘TV 스타’에서 정치인으로… 초유의 4選 단체장
오세훈(吳世勳·1961~ )은 서울시장을 4번 지낸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준수한 외모의 TV 스타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정치 입문 방식을 한국 정치에 정착시켰다.
1990년대 변호사로 활동하던 오세훈은 일조권(日照權) 소송 등으로 유명세를 타다 방송국으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고, 〈생방송 오변호사 배변호사〉와 〈그것이 알고싶다〉의 진행자로 얼굴을 알렸다. 이 밖에도 각종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광고 모델로 출연하기도 하면서 정치권의 러브콜이 이어졌고, 2000년 16대 총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006년에는 서울시장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민선(民選) 최연소 서울시장이 됐다. 2010년 서울시장 재선에 성공했고 수도권 통합 대중교통 환승제 실시, 다산콜센터 설립 등 성과를 냈다.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부결(투표율 미달로 폐기)로 시장직을 사퇴한 오세훈은 10여 년간 사실상 정치적 야인(野人)으로 지냈다. 총선과 당대표에도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국회의원 재도전이 번번이 실패하고 정치적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그의 정치 인생이 끝났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치권에서는 꾸준히 잠재적 대권 주자로 꼽혀왔다.
결국 오세훈은 박원순 전 시장 사망으로 치러진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화려하게 재기한다. 야권 단일화를 통해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한 오세훈은 보수 정당 지지율이 낮았던 2030세대에서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렸고, 모든 구(區)에서 압도적으로 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꺾으면서 세 번째로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다시 서울시장에 당선, 네 번째 서울시장직을 수행중인 오세훈은 여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로 손꼽힌다.⊙
권세진 기자
이재명
팬덤 정치의 끝판왕, 최초의 ‘여의도 대통령’
이재명(李在明·1964~ )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헌정사상 유일하게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국회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인이다. 1988년 이후 한 정당이 국회 3분의 2 가까운 의석을 차지한 사례는 21대와 22대 국회의 더불어민주당뿐인데 이 시기 더불어민주당은 사실상 ‘이재명 사당(私黨)’이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경기도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시민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를 시작해19~20대 성남시장, 35대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파면으로 치러진 20대 대통령선거에 더불어민주당 후보경선에 출마했으나 낙마했다. 2022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22대 총선에서 당선(인천 계양을)돼 재선 국회의원이 됐고, 제6~7대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연임 중이다. 민주계 정당에서 당대표를 연임한 사례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이재명이 처음이다.
민주계 정당에 뿌리가 없는 것은 물론 지연과 학연 등 정치적 배경도 거의 없으며, 수많은 사법 리스크까지 보유한 ‘정치 흙수저’ 이재명이 이토록 강력한 의회 권력을 갖게 된 배경은 바로 팬덤이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시작된 이재명 팬덤으로 ‘개딸(개혁의 딸들)’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일 정도가 됐다. 이재명 팬덤은 이재명을 공격하는 여당 정치인은 물론 이재명에게 협조하지 않는 민주당 정치인들까지 비판하고 공격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 대통령과 총리 탄핵소추까지 이뤄냈지만 낙관하긴 이르다. 대북 송금 의혹 등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을 받고 있는 그가 사법 리스크의 높은 파고를 넘을지는 미지수다.⊙
권세진 기자
이준석
청년 정치의 새 패러다임 제시
이준석(李俊錫·1985~ )은 3김 시대 이후 별다른 성공 사례가 없었던 ‘청년 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인물이다.
과학고–서울대–하버드대 출신의 청년 기업인이었던 이준석은 만 26세 때인 2011년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발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박 대통령 탄핵 후 이준석은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 새로운보수당을 거치며 기존 보수 세력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보수’로서 정치활동을 하다 21대 총선 전 미래통합당에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시사 프로그램은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도 다수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높이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대중 정치인으로 자리 잡았다. 국회의원 선거에 세 차례 출마해 낙선했지만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고 당 선거에 기여하며 보수 정당의 유일한 리더급 청년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보수가 재기하는 계기가 된 선거로, 이준석은 오세훈 캠프 뉴미디어본부장을 맡아 청년 유권자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승리의 주역으로 주목받던 이준석은 같은 해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43.8%를 득표해 당대표 자리에 올랐다. 당시 나이 만 36세로, 30대 집권 여당 대표가 탄생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었다. 당대표 이준석은 20대 대선과 제8회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후 국민의힘에서 밀려나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개혁신당을 창당하고 22대 총선에서 경기 화성을에 출마해 초반 열세를 딛고 42.41%를 획득하며 거대 양당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세대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주목받으며 대권 주자로 평가받는 유일한 청년 정치인이다.⊙
권세진 기자
강만수
글로벌 금융위기에 잘 대응한 경제관료
강만수(姜萬洙·1945~ )는 ‘제2의 IMF 외환위기’가 될 수 있었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막아낸 인물이다. 1970년 행정고시 합격 후 주로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에서 일한 재무관료 출신인 강만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경제 공약인 ‘747(연평균 7% 성장, 10년 뒤 1인당 GDP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진입) 공약’을 설계해 ‘MB노믹스의 설계자’로 불리며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기획재정부장관을 맡았다.
MB정부 출범 반년 만에 미국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금융위기가 닥쳤고, 그 10년 전 IMF 외환위기의 악몽을 겪었던 우리 국민은 경제정책 수장인 강만수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때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강만수는 적극적인 환율 방어에 나서는 방법을 택했다. 환율 안정을 위해 정부가 직접 외환시장에 개입했고, 국내 은행 외채에 정부가 지급보증을 했으며, 한미 간 원–달러 통화스왑(swap) 협정을 체결했다. 일부에선 이 때문에 정부의 외환보유고가 줄었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국내 대기업들은 이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환율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수출 호조를 보이며 금융위기의 파고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해 많은 국가들이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한국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별다른 위기를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 외신으로부터 주목받기도 했다.
강만수는 이후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대통령 경제특보, 산업은행장을 역임하며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계속해서 책임졌다. 그가 몸담았던 이명박 정부는 국내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기업 친화적 정책을 펼치면서 물가와 집값도 잡은 정부로 평가받고 있다.⊙
권세진 기자
김관진
북한이 두려워한 단 한 명의 군인
김관진(金寬鎭·1949~ )은 대한민국 국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49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고를 나와 1972년 육군사관학교(28기)에 입교했다. 육사 생도 시절에는 기수당 1명만 선발하는 서독 위탁교육에 선발돼 독일에서 공부했다. 독일 위탁 육사 생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방부장관이 됐다. 선후배들 사이에 ‘레이저 김’ ‘독일 병정’이란 별명이 있다.
3군사령관·합참의장(대장)을 거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걸쳐 국방부장관과 국가안보실장을 지냈다. 장관 시절 김관진의 집무실 의자 뒤편 벽에는 북한 김정일과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군사보좌관 김격식 등 북한군 수뇌부 사진이 A4용지 크기로 걸려있었다고 한다. ‘적이 장관의 등을 노리고 있는 만큼 한시도 적을 잊어선 안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장관직을 수행했다. 2011년 3월에는 서부전선을 찾아 경계근무를 서는 장병들에게 “(적 도발 시) 현장에서 ‘쏠까요 말까요’ 묻지 말고 선(先)조치 후(後)보고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이 도발하면 원점(原點), 지원 세력은 물론 지휘 세력까지 타격하라고 강조하며 응징 의지를 보였다.
2014년에는 국가안보실장으로 발탁돼 안보 정책 수립과 실행을 총괄했다. 2015년 북한이 DMZ 일대에 목함지뢰를 매설해 우리 장병 2명이 부상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우리 정부가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북한은 유감을 표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는 시기에 김관진은 ‘안보에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안보실을 지켰으나, 돌아온 것은 수모와 댓글 재판이었다.⊙
이경훈 기자
제2연평해전 전사자 6인
피로써 서해 NLL을 지킨 영웅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전이 있던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북한 해군 함정이 NLL을 침범해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정(艇)을 공격했다.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윤영하(尹永夏·1973~2002) 정장(대위·이하 당시 계급)은 아버지(윤두호·해사 18기)의 뒤를 이어 해군 장교가 됐다. 북한군은 지휘체계를 무력화하고자 함교에서 지휘하는 정장을 가장 먼저 공격했다.
윤 대위를 대신해 부장(副長) 이희완 중위(현 국가보훈부 차관)가 지휘를 이어갔다. 그 역시 적 총탄에 부상을 입어 한쪽 다리 일부를 절단해야 했다.
한상국(韓相國·1975~2002) 조타장(중사)은 함정을 끝까지 조종하기 위해 조타키를 천으로 묶고 분투했다.
조천형(趙天衡·1976~2002) 병기사(중사)는 20mm포 담당이었다.그의 딸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해군 학군사관후보생(NROTC)이 됐다.
황도현(黃道顯·1980~2002) 하사도 20mm포를 끝까지 놓지 않고 방아쇠를 잡은 채 전사했다.
서후원(徐厚源·1980~2002) 하사는 M60 기관총으로 대응했으나 적 총탄에 왼쪽 흉부를 관통당해 쓰러졌다.
박동혁(朴東赫·1981~2002) 의무병(상병)은 쓰러진 전우를 구하기 위해 포탄이 빗발치는 갑판을 뛰어다니다가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돼 84일간 투병하다가 숨을 거뒀다.
여섯 용사의 장렬한 죽음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세상에 고발했다. 해군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유도탄고속함(PKG)들에 이들 전사자 이름을 명명하고 있다. 2015년에는 영화 〈연평해전〉이 만들어졌다.⊙
이경훈 기자
경제
김승연
K방산 이끄는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金升淵·1952~ ) 한화그룹 회장은 국가대표 K방산을 키워낸 주역이다. 2000년 초 국방부는 ‘차기 군단급 화력무기체계 확보계획’을 발표하면서 구체적인 획득 방법은 결정하지 않았다. 보통 무기 체계는 방위사업청이 사업과 투자비를 결정하고 회사가 개발을 하는데, 당시는 회사가 먼저 선행 투자로 개발을 해놓고 이를 방사청에 제안하는 이례적인 방식이었다. 업체 경영진들은 2005년에 독자 개발 진행 여부를 놓고 토론한 끝에 ‘사업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이때 김승연 회장은 “실패해도 좋다. 자주국방을 위한 기술은 남을 것 아니냐”며 오히려 경영진을 설득했고, 진취적으로 개발할 것을 주문했다. 오늘날 K방산의 대표주자인 ‘K9 자주포’와 ‘천무’ ‘레드백 장갑차’는 이렇게 탄생하고 발전했다.
한화는 2023년에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인수를 마무리해 기존의 우주, 지상 방산에서 해양까지 아우르는 육해공 통합 방산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M&A는 한화그룹 성장사(史)의 핵심이며 김승연 회장의 통찰력과 뚝심을 대표하는 키워드다. 김 회장은 IMF 외환위기 직후인 2002년에 적자를 지속하던 대한생명을 인수해 총자산 100조원이 넘는 우량 보험사로 키웠고, 2015년엔 삼성의 방산 및 석유화학 부문 4개사를 인수하는 빅딜로 재계를 놀라게 했다. 사업 고도화와 시너지 제고를 통해 한화 방산 부문은 명실상부 국내 1위로 도약했다. 1981년 김승연 회장이 취임할 때 총자산 7568억원, 매출 1조1000억원이었던 한화그룹은 2023년 말 기준 총자산 232조원, 매출액 80조1000억원을 기록하며 우리나라 7대 그룹으로 도약했다.⊙
정혜연 기자
황창규
‘황의 법칙’ ‘디지털 노마드’ 설파한 삼성 반도체 신화의 주역
황창규(黃昌圭·1953~ ) 전 삼성전자 사장은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이자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를 써 내려간 산 증인이다. 삼성전자 기술총괄사장,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황창규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 전기공학과 책임연구원, 미국 인텔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다 1989년에 삼성전자에 합류했다. 16M D램 소자개발팀장, 삼성전자 반도체 이사를 거치며 1994년에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에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받았고, 2004년부터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겸 메모리사업부 사장을 맡았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외국인 최초로 ‘IT 노벨상’으로 불리는 미국 ‘EIA 기술혁신리더상’, 2006년에는 반도체 산업의 환경안전 분야 최고상인 ‘이노우에 아키라상’과 반도체 기술 명장에게 주어지는 ‘IEEE 앤디 그로브상’을 받았다.
‘메모리반도체 집적도는 1년에 두 배씩 늘어난다’는 ‘황의 법칙’으로 유명한 그는 명강연자로도 이름을 알려 200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시작으로 2003년 스탠퍼드대, 2004년 MIT, 2005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강단에 섰다. 황 사장은 강연에서 ‘디지털 노마드(유목민)’ 전략을 소개하면서,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옮겨가는 유목민처럼 신(新)기술 개발을 위해 부단하게 정진하는 것이 그의 경영 전략이라고 밝혔다. 이후 KT 회장을 지냈다.⊙
정혜연 기자
박현주
대한민국 금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운 미래에셋그룹 회장
박현주(朴炫柱·1958~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2024년에 국제경영학회(AIB)로부터 ‘올해의 국제최고경영자상’을 받았다. 아시아 금융인으로서는 최초다. 이 상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경영인이 받는 최고 권위의 상이다. 박 회장은 “모험적인 창업자들이 이끄는 글로벌 사업을 바라보며 ‘왜 금융은 안 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시아, 중국, 인도를 커버하는 펀드 전략을 도입했고, 이는 글로벌 관점의 투자로 발전시켜 나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최연소 증권사 지점장을 지낸 박현주 회장은 1997년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박 회장은 회사 설립 초기부터 세계 시장 진출을 염두에 뒀고,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003년 국내 운용사 최초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등 초대형 글로벌 금융사들과 경쟁은 무리라는 반응이 팽배했지만, 박 회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장기적인 비전을 내놨다. 22년이 지난 현재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미국과 베트남, 브라질, 아랍에미리트, 영국, 인도, 일본, 중국 등 16개 지역에서 활동하는 국내의 대표 글로벌 금융기업으로 거듭났다. 전체 운용자산은 385조원에 달한다. 특히 해외 시장에 유망한 ETF 운용사를 인수해 글로벌 ETF 197조원을 운용하고 있고 미래에셋증권은 인도 쉐어칸 증권사를 인수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회사 출범 초기인 2003년에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만들어 글로벌 인재 육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박현주 회장은 “미래세대가 세계 곳곳에서 공부해 인적 네트워크를 갖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혜연 기자
이재현
‘문화 강국’ 대한민국 초석 놓은 CJ그룹 회장
이재현(李在賢·1960~ ) CJ그룹 회장은 1995년에 문화사업을 시작해 대한민국이 세계로부터 콘텐츠 강국으로 인정받는 데 초석을 놓은 이다.
이 회장은 대한민국이 문화 불모지라 불리던 1990년대 초반부터 영화사업에 뛰어들며 세계 시장 진출의 밑그림을 그렸다. 1995년에 스티븐 스필버그, 제프리 캐천버그 등이 설립한 ‘드림웍스’에 3억 달러를 투자해 2대 주주가 됐다.
영화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지만, 이재현 회장의 과감한 도전은 CJ ENM이 글로벌 콘텐츠 기업으로 도약하는 마중물이 됐다. 이후 CJ ENM은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 오픈, 국내 상영 영화 총 관객 수 역대 1위, 국내 유일 종합콘텐츠 기업, 세계 최대 K컬처 페스티벌 개최, 〈기생충〉으로 대한민국 최초 프랑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등 대한민국 문화사업에 길이 남을 굵직한 발자취를 새겼다.
대한민국을 문화 콘텐츠 강국으로 키워내겠다는 이재현 회장의 꿈은 자연스레 푸드 산업으로 확장됐다. CJ는 설탕 제조를 시작으로 밀가루와 조미료 생산 등 70여 년간 식품산업을 이끌어 왔다. CJ제일제당은 대표 브랜드 ‘비비고’를 앞세워 K푸드의 글로벌 영토 확장에 나서고 있다. ‘비비고 만두’는 미국에서 ‘K만두 신드롬’을 일으켰고, CJ제일제당의 해외 식품사업 매출은 2019년 3조1540억원에서 2023년 5조3861억원으로 4년 동안 70% 이상 성장했다.
이 회장은 늘 “전 세계인이 매년 2~3편의 한국 영화를 보고, 매월 1~2번 한국 음식을 먹고, 매주 1~2편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매일 1~2곡의 한국 음악을 듣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정혜연 기자
최태원
반도체로 SK의 미래를 설계한 ‘재계 맏형’
최태원(崔泰源·1960~ ) SK그룹 회장은 아버지 최종현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1998년 서른여덟 나이에 그룹 수장에 올랐다. 이후 그는 그룹의 체질적인 개선에 나서 SK를 국제적인 기업으로 일궈냈다. 1998년 자산 32조8000억원, 매출 37조4000억원이던 그룹의 규모는 2023년 말 자산 334조3600억원, 매출 200조9620억원으로 25년 만에 10배 안팎 성장했다.
2012년 SK하이닉스 인수는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신(前身)인 하이닉스반도체는 당시 3조원에 달하는 부채로 파산 위기에 놓여 있어 업계에서는 이 인수를 위험한 도박으로 여겼지만,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를 과감히 인수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매년 조(兆) 단위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한 결과 SK하이닉스는 2024년 3분기에 사상 최대 분기실적을 기록하며 영업이익 7조원을 돌파했다. 외국에서는 삼성전자와 함께 SK하이닉스를 한국의 소중한 전략자산으로 주목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취임 초기부터 ‘글로벌화’를 그룹의 핵심 전략으로 삼아, 내수 중심이던 그룹을 수출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1998년 취임 당시 8조3000억원이었던 수출액은 2023년 96조8000억원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수출의 12%에 달하는 수치다. 1993년 신약 개발 사업에 진출한 이후 2008년부터 바이오·제약사업을 신(新)성장동력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투자한 결과 2019년에는 미국 FDA로부터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의 판매 허가를 받았다.
‘재계 맏형’ 대한상공회의소 수장까지 맡은 최 회장은 최근에는 그룹 미래 도약의 원동력으로 AI를 꼽고 ‘AI 종합 솔루션 기업’으로 도약시키고자 분투하고 있다.⊙
정혜연 기자
안철수
의사에서 컴퓨터 백신 전도사, 정치인으로
안철수(安哲秀·1962~ ) 국민의힘 의원을 여전히 안랩(구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다. ‘의대 출신 컴퓨터 백신 전문가’라는 흔치 않은 이력에, 대다수의 사람이 그가 발명한 백신을 컴퓨터에 깔아놓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의대 출신인 그는 박사과정 시절에 개발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V3’를 일반인에게 무료로 보급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자신이 쓰던 디스켓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자 호기심으로 퇴치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새로운 컴퓨터 바이러스가 발견될 때마다 밤을 새워 백신을 업그레이드했다. 1995년에 바이러스 백신 회사 안철수연구소를 창업하면서 벤처기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반인에게는 무료로 보급하고 대신 기업·관공서에서는 대가를 받는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성공했다.
안철수 전 의장은 벤처업계에 뛰어든 지 10년 만인 2005년 안랩을 그만두고 3년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KAIST 석좌교수, 서울대 융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강단에 섰다. 2012년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해 낙선하고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국민의당 대표로 활동했다. 2013년 보궐선거(서울 노원병)로 처음 등원하고 20~22대에 내리 당선해 어느덧 4선 국회의원이 됐다. 2017년, 2022년까지 대선에 모두 세 번 출마했고 특히 2022년 대선 때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단일화로 정권 교체에 일익을 담당했다.
여전히 잠룡으로 꼽히는 안철수지만, 역사는 정치인보다 컴퓨터 백신을 한국에 알린 1세대 벤처기업가로 그를 기억하지 않을까.⊙
정혜연 기자
김범수
‘국민 메신저’ 카톡 만든 벤처 1세대
김범수(金範洙·1966~ ) 카카오 창업주는 전(全) 국민이 사용하는 메신저인 ‘카카오톡’을 만든, 국내 스타트업계의 신화이자 벤처 1세대를 대표하는 경영인이다.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삼성SDS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1998년에 온라인 게임 회사인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2년 뒤에 한게임과 네이버컴을 합병해, 삼성SDS 입사 동기인 이해진과 함께 NHN을 설립,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해진 대표와의 의견 충돌로 회사를 떠난 그는 2010년 3월에 아이폰용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출시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앞서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한 2008년에 미국에 머물고 있던 그는 애플의 스마트폰을 접하고 새로운 모바일 시대가 열릴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카카오톡 출시는 카카오 왕국 출범의 신호탄이었다. 김범수 창업주는 2014년에 다음커뮤니케이션을 합병해 회사 이름을 다음카카오로, 다시 카카오로 변경했다. 카카오는 2019년에 총자산 10조원 이상의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2022년 5월 기준으로 계열사가 136개까지 늘어났다. 그해 10월에 국회 국정감사에서 ‘문어발 확장’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김범수 창업주는 2024년 7월에 SM엔터테인먼트 주식 시세조종 혐의로 구속됐다. 그해 10월 31일에 보석으로 석방됐지만 그의 경영 복귀가 언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2023년 11월~2024년 7월까지의 그의 마지막 직함은 카카오 경영쇄신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정혜연 기자
김택진
국산 온라인 게임의 세계화 이끈 엔씨소프트 대표
김택진(金澤辰·1967~ ) 엔씨소프트 대표는 IT 시대에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벤처기업인으로 온라인 게임 ‘리니지’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리니지는 신일숙씨의 만화를 온라인 게임화했는데, 탄탄한 스토리가 있는 게임으로 초창기부터 유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PC방에서 가장 사랑받는 게임으로 자리매김했다.
김택진 대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89년 이찬진씨 등과 함께 ‘아래아한글’을 공동 개발하며 일찌감치 IT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대전자에서 개발팀장으로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1997년에 직원 17명과 함께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엔씨소프트를 설립했고, 이후 온라인 게임으로 방향을 틀어 이듬해 리니지를 출시했다. 리니지는 2000년 이후 미국, 일본, 중국, 대만, 태국, 유럽 등으로 진출해 국내 온라인 게임이 세계 시장에 전파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택진 대표는 2002년 6월에 《비즈니스위크》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스타’로 뽑혔다. 2003년에는 ‘리니지 2’를 내놔 온라인 게임 열풍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열광한 김택진 대표는 2011년에 작고한 최동원 선수의 열혈 팬이었다. 2011년 3월에 프로야구 NC 다이노스를 창단했고, NC가 처음 통합우승한 2020년 한국시리즈 1~6차전 전(全) 경기를 직관했다.
김택진 대표는 회사 광고에 직접 출연해 ‘택진이 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부인은 과학고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맥킨지 컨설팅과 SK텔레콤 상무를 지내 ‘천재 소녀’라는 별명을 가진 윤송이 박사다.⊙
정혜연 기자
이해진
국내 1위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아버지
이해진(李海珍·1967~ )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GIO)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검색 엔진과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를 개발, 운영하고 있다. 네이버는 블로그, 카페 등 커뮤니티 서비스를 비롯해 뉴스, 연예, 스포츠 등 다양한 콘텐츠 주제판을 제공하고 있다.
이해진 책임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전산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삼성SDS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사내벤처 ‘네이버’를 운영하다가 네이버의 전신인 네이버컴을 만들고서 김범수씨가 만든 한게임과 합병해 NHN을 출범시켰다. NHN은 ‘지식IN’이라는 지식백과 서비스를 성공시켜 설립 초창기부터 국내 포털업계 1위 자리를 유지해 왔다.
이해진 책임은 다른 스타트업 창업주들과는 달리 초창기인 2004년 1월에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이후 외부 행사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왔다. 2013년 네이버 이사회의장을 맡았을 때 영세 사업자들의 사업영역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모바일 메신저 ‘라인’의 가입자 3억 명 돌파 기념행사장에서 그는 그간의 성공에 대해 “이게 꿈이 아닐까, 깨고 나면 꿈인 것을 알고 다시 괴로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7년 3월에 네이버 이사장직을 내려놓고 공식적으로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네이버 GIO를 맡고 있다. 2020년부터는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라인과 야후 재팬의 합작법인인 A홀딩스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일본에서는 포털 사이트 1위가 야후 재팬, 메신저 1위는 이해진 책임이 만든 라인이다.⊙
정혜연 기자
김정주
‘한국의 디즈니’를 꿈꾼 온라인 게임 개척자
고(故) 김정주(金正宙·1968~2022) 넥슨 창업주는 ‘바람의 나라’로 대표되는 국내 1세대 온라인 게임 시장의 개척자다. 그의 시도는 오늘날 한국 온라인 게임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토대를 만들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김정주 창업주는 1994년에 대학 동기 송재경씨와 넥슨을 창업했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1996년, 그는 세계 최초의 그래픽 다중접속 역할수행 게임 ‘바람의 나라’를 출시해 성공을 거뒀다. 이후 넥슨은 ‘크레이지아케이드’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온라인 게임 시대를 열었다. 김정주 창업주는 모바일 게임 분야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했고, 넥슨은 2020년 국내 게임업계 최초로 연(年)매출 3조원을 돌파했다. 김 창업주는 자서전 《플레이》(2015년)에서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내는 디즈니의 100분의 1이라도 따라가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정주 창업주는 넥슨을 창업했지만 경영 일선에는 잘 나서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그는 2016년에 진경준 전 검사장이 김정주 창업주로부터 내부 정보와 주식 매입 자금을 받아 수백억원대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이른바 ‘진경준 게이트’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대법원의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로 혐의를 벗었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넥슨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2018년에는 넥슨재단을 설립해 본격적인 기부 활동을 시작했다. 오랜 기간 우울증 치료를 받던 끝에 2022년에 미국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정혜연 기자
이재용
삼성과 한국의 미래를 짊어진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李在鎔·1968~ ) 삼성전자 회장은 2022년부터 국내 최대 기업 삼성전자를 이끌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 회장은 최근 부진에 시달리는 삼성전자 반도체를 본궤도에 올려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4년 하반기에 완료될 것으로 점쳐졌던 엔비디아의 5세대 HMB3E의 인증이 늦어지면서 첨단 메모리 반도체에서 뒤처졌고, 범용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도 중국의 추격으로 ‘초격차’ 위상이 흔들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회장은 2025년 벽두 삼성전자 정기 사장단 인사에서 기존 경영진을 물갈이하며 기술력 강화와 조직 분위기 일신을 통해 반도체 위기 극복에 주력한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룹의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는 자동차 전장 부품, 로봇, 의료, 친환경 공조 등을 꼽았다. 작년 6월에는 크리스 티아노 아몬 퀄컴 사장,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 앤디 재시 아마존 CEO와 잇따라 만나는 등 인공지능 분야로의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선대(先代)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은 오너 3세 경영자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31년 만에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취임식도 취임사도 없었을 정도로, 평소 굉장히 소탈하다는 평을 받는다. 수행원 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고, 손수 승용차를 몰고 외부인을 만나고, 사업장을 방문할 때는 스스럼없이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2022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는 차기 전략 제품 보고를 임원이 아닌 MZ세대 직원으로부터 받는 등, 이 회장의 스타일은 ‘합리적 실용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혜연 기자
정의선
‘글로벌 톱티어’로 도약 이끈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의선(鄭義宣·1970~ )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회사를 명실상부한 글로벌 모빌리티 산업의 톱티어로 이끈 주역이다. 정 회장은 과거와 확연히 다른 파괴적 혁신과 비전으로 전통적 사업 영역과 신(新)사업 간 합리적 균형을 추구하며 게임 체인저로의 서막을 열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22년에 처음으로 연간 글로벌 판매 3위에 오른 이래 토요타, 폴크스바겐과 함께 줄곧 톱3를 유지하고 있다. 외형뿐만 아니라 내실에서도 근본적인 성장을 계속해, 현대차·기아는 2024년 상반기에 합산 매출액 139조4599억원, 영업이익 14조9059억원으로 반기 기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같은 해 두 회사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 3대 신용평가사 S&P, 무디스, 피치 모두로부터 신용등급 A를 받았다. 3사 모두에서 신용등급 A를 받은 곳은 현대차, 기아 외에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 일본의 토요타와 혼다뿐이다.
정의선 회장은 취임사와 4번의 신년사에서 ‘고객’이라는 단어를 38번이나 사용했을 정도로 ‘고객 중심 경영’을 강조한다. 현대차·기아가 전기차, 하이브리드차, 수소전기차 등 친환경차 부문에서 글로벌 위상을 갖게 된 데는 정의선 회장의 의지가 컸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는 정 회장이 적극 주도한 전기차 퍼스트무버 전략의 출발점이다.
선친 정몽구 회장을 이어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있는 정의선 회장은 한국 양궁이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그룹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협회를 투명하고 치밀하게 운영하며 올림픽에서 금빛 행진을 이어가 국민과 언론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정혜연 기자
사회/언론
조갑제
“이념은 팩트를 이기지 못한다” 탐사보도의 개척자
“기자는 이념과 팩트(사실)가 충돌할 때에는 팩트 편에 서야 한다.”
조갑제(趙甲濟·1945~ ) 조갑제닷컴 대표가 후배 기자들에게 자주 하는 이 말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준다. 서슬 퍼렇던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포항 석유’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 고초를 겪었던 것도, 1980년 5·18 당시 광주(光州)에 몰래 들어가 취재했다가 해직당한 것도 ‘사실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1983년 《월간조선》 기자가 된 조갑제는 탐사보도(investigative journalism) 영역을 개척하면서 시사월간지 전성시대를 열었다. ‘한국 내 CIA’ ‘KAL기 격추 사건의 진실’ ‘박정희 시대의 정치 비화(祕話)’ 등은 이 시절 그가 생산한 특종의 극히 일부다. 그는 특종 기자가 되는 비결로 ‘호기심’과 ‘명예욕’을 꼽곤 한다.
젊은 시절 권위주의 정권에 비판적이던 조갑제는 1990년대 초 이후 박정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를 되살리는 데 앞장서게 됐다. 북한 체제의 실체를 알게 되고부터는 김씨 왕조는 물론 그들을 두둔하는 국내 좌파 세력, 좌파 정권과 싸웠다. 그 연장선 상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우파 운동에도 깊이 간여했다. 반면에 그가 일부 우파들이 몰입하고 있는 5·18 북한군 개입설이나 부정선거 주장 등에 반대하는 것은 그런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다.
‘논객 조갑제’에 대해서는 고개를 흔드는 소위 진보 인사 중에서도 ‘기자 조갑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994년 이후 《시사저널》이 매년 선정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에 10차례 이상 이름을 올렸다.⊙
배진영 기자
조영래
산업화의 그늘에 가린 노동·여성 문제 천착한 ‘인권변호사’
“정의란 누구의 독점물도 아니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용의 위험에 빠진다.”
1980년 중반 어느 날, 여성·노동·인권 변호에 한창이던 조영래(趙英來·1947~ 1990) 변호사가 자신을 찾아온 《조선일보》 함영준 기자에게 한 말이다. 훗날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을 지낸 함 기자는 조 변호사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유신 시절 수감되고 고문당하고 핍박받았지만 누구를 증오하거나 독설을 내뱉지 않았다. 오래 참고 성내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온유함과 겸손함을 갖고 있었다.”
대구 출신의 조영래 변호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명문(名門) 경기중·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법대에 들어갔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남들처럼 대우받는 법조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협착하고 험준한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에겐 ‘실천적 정의(正義)’라는 삶의 원칙이 있었다.
1970년대 유신 시절은 구속과 수감, 석방, 수배로 점철됐다. 조영래는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복역했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도피 생활을 했다. 평탄하지 않은 삶은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서울 망원동 수재(水災) 집단소송 사건,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사건), 부천경찰서 성(性)고문 사건 등을 맡았다. 1970년대 후반 써놓았던 《전태일평전》을 이 무렵 출간했다.
조영래는 1990년 나이 마흔셋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인들은 ‘무엇이 이토록 빨리 조영래를 우리에게서 앗아갔는가’라며 추모했다. 그의 삶은 폭력과 독설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노동·인권 운동’에 조용한 울림을 준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전태일
제 몸 태워 노동운동史 새롭게 쓴 ‘아름다운 청년’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골방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하던 당시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그날 집회가 경찰에 의해 저지되자, 청년 노동운동가 전태일(全泰壹·1948~1970)이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그리곤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1950년 6·25 발발 3개월 전, 가족의 품에 안겨 부산으로 이사했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소규모 양복 제조업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으나 사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전쟁 이후 1954년 가족은 상경(上京), 천막촌을 전전했다. 어린 전태일은 신문팔이와 빈병 줍기, 성냥팔이로 끼니를 해결했다. 1965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견습공(시다)으로 임금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이듬해 시장 내 다른 업체에 미싱사 자리를 얻었다. 이때 고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다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그는 어린 여공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 공부를 포기하고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했다. 평화시장의 ‘청계피복노동조합’도 그가 만들었다.
1969년 11월, 전태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작성한다. 그로부터 1년 후 1970년 11월 13일, 분신(焚身)으로 새벽하늘의 별이 됐다. 죽음을 앞둔 그는 어머니(이소선·1929~2011)에게 “내가 뚫어놓은 작은 바늘구멍을 넓혀 벽을 허물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후 41년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전태일의 삶은 산업화 과정의 한국 사회에 노동 환경 개선과 노동권 보장 및 노동자 권리 강화의 초석을 깔았다. 서울 종로 청계천변 삼일교와 수표교 중간 지점에 ‘아름다운청년전태일기념관’이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최열
환경운동의 효시
환경운동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최열(崔冽·1949~ ) 환경재단 이사장이다. 1982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환경단체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환경운동연합, 환경재단을 출범시켰다.
20대 청년 최열은 1975년 ‘명동성당7인위원회’ 사건(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에 공해(公害) 문제의 심각성을 접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것도 지적(知的) 바탕이 됐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은 산업화·근대화의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환경 문제가 뒤따랐다. ‘경제 성장 제일주의’ 시대여서 산업단지 인근 주민들은 피해를 봐도 보상은커녕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최열은 옥중에서 공해 관련 전문서적 250여 권을 읽으며 전문가로 변해 갔다. 출소 후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에 나섰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시민들의 사회 참여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대중적인 환경운동 시대가 열렸다. 이때 최열은 여러 단체 지도들과 함께 ‘환경운동연합’을 주도했다. 2002년 설립한 환경재단은 우리나라 최초 환경 전문 공익재단이다. 최열은 ‘그린리더’ 개념을 만들었다. 그린리더란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뛰어넘어 혁신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을 말한다.
환경운동가 최열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다. 최열은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환경부 배출 기준치의 페놀이 든 어항 속 금붕어가 4시간이 채 안 돼 죽는다는 실험 결과를 공개했다. 페놀 사건은 대기업도 환경 문제를 등한시하면 망할 수 있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줬다. 최열은 환경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만 환경상’을 수상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박원순
시민사회운동 시대의 막을 연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朴元淳·1956~2020) 전 서울시장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경남 창녕 출신으로 1974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이듬해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다. 하지만 김상진 열사 추모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입학 3개월 만에 투옥된다. 4개월간 복역하고 학교로 돌아가려 했으나 제적된다. 이 사건은 박원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후 단국대를 졸업한 박원순은 스물넷에 사법시험에 합격, 검사로 공직을 시작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로 개업,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등을 거쳐 1994년 ‘참여연대’를 만들어 사무처장으로 6년간 일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2002년 건강한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아름다운재단’을 만들었고, 2006년에는 사회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기부·참여·나눔’ ‘소액주주 권리 찾기’ ‘정치인 낙선운동’ 등을 펼치며 ‘소셜(사회) 디자이너’의 삶을 살던 그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2014년과 2018년에 연이어 선출되어 ‘최장수 서울시장’을 기록하며 차기 대권 주자 반열에까지 올랐다. 그러다 2020년 전직 여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1993년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으로 ‘여성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우 조교 사건은 국내 최초의 공적(公的) 성희롱 문제로,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법적 문제를 넘어 사회·문화 차원의 성희롱 예방과 성평등 인식 확산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손석희
신문에서 방송으로 ‘언론 권력’ 이동 보여주는 상징
손석희(孫石熙·1956~ ) 전 JTBC 사장은 《시사저널》이 매년 실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 17년간(2004~20년) 1위를 기록했다. 2021년 이후 변경된 조사 방식에서도 ‘국민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인’ 1위를 차지했다. 그가 한국 사회에서 높은 신뢰도와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방송인 겸 언론인 손석희는 언론 권력의 이동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손석희는 국민대를 졸업하고 1984년 아나운서로 MBC에 들어갔다. 직전에 조선일보 업무직 사원으로 잠시 일했다. 준수한 외모에 깔끔한 목소리, 방송인으로서의 조건을 가진 그로서는 신문 판매보다 아나운서 직군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지인 일부는 ‘노력하는 손석희’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소신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손석희는 2000년부터 13년간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진행했다. 종편 채널 시대가 열리며 JTBC 총괄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뉴스9〉를 직접 진행했다. 그는 단순한 사건 전달보다 문제의식 제기, 사회적 담론 형성을 선호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상처럼 떠받들어지기도 했지만, 편파적이고 왜곡을 일삼는 언론인으로 비치기도 했다. 2019년에는 프리랜서 기자 폭행 논란으로 이미지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이래저래 대한민국 언론사(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손석희. 이에 대해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 이전 ‘레거시 미디어’ 시대에서 출발해 다음 시대까지 방송 활동을 한 ‘방송쟁이’였다는 것이다. 그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미디어는 파편화하고 진실은 개인화하는 이른바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언론인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고단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김영란
논란의 ‘김영란法’, 그래도 투명 사회로 가는 길을 놓다
2만9900원짜리 식사 메뉴와 4만9000원짜리 선물 세트.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이 시행되고 나서 생긴 신(新) 풍속이다. 김영란(金英蘭·1956~ ) 전 대법관이 2012년 국민권익위원장 재임 당시 추진해 2016년 시행된 이 법과 그 시행령에 따르면 공직자 등에게 3만원이 넘는 식사, 부조금과 화환을 합쳐 10만원이 넘는 경조사비, 5만원이 넘는 선물을 제공해선 안 된다. 이 중 식사와 선물의 가액은 현재 각각 5만원, 15만원(설날·추석 24일 전부터 5일 후까지는 30만원)으로 상향 조정됐다.
이 가액이 물가 상승에 뒤처진다는 점과 부정 청탁의 개념이 모호한 점, 법 적용 대상을 정하는 기준에 의문이 제기되는 점 등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이 법에 정해진 가액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이른바 ‘김영란 세트’가 나온 걸 보면 공익성이 강한 직역 전반에 이전보다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된 건 확실하다. 김 전 대법관도 “청탁금지법은 처벌 조항이라기보다는 늘 익숙하게 하던 행동들에 대해 ‘이거 괜찮은가?’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행동 규범에 가깝다”고 밝힌 바 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4년 여성으로서 사상 첫 대법관에 임명된 그는 업무를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재판 기록을 꼼꼼히 읽어요. 그래야 재판정에서 심층적인 질문을 할 수 있거든요. 재판관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해요. 서류를 읽고, 원고와 피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흑백을 가리는 게 재판관이잖아요.”⊙
김광주 기자
이승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학살당한 반공 소년
1968년 12월 9일 저녁 무렵, 7명가량의 무장공비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계방산 기슭에 있는 화전민 이석우씨 집에 들이닥쳤다. 집에는 아들 승복(李承福·1959~1968)과 그의 어머니, 형, 두 동생이 있었다. 공비들은 숙제를 하고 있던 승복에게 ‘남한이 좋으냐, 북한이 좋으냐’고 물었다.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하자 공비들은 대검으로 이승복의 입을 찢고, 가족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날은 승복의 생일이었다. 공비들에게 난자당한 후 퇴비 더미에 던져졌던 형 이학관이 극적으로 살아남아 이 비극을 세상에 알렸다.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공비 침투 등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이 극에 달했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이승복은 ‘반공의 상징’이 됐다. 전국의 초등학교에 그의 동상이 섰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승복의 기억은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1998년 8월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언론 개혁 관련 전시회를 열면서 1968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승복 보도를 ‘정부 수립 이후 오보(誤報) 50선(選)’의 하나로 선정했다. 같은 해 9월 MBC TV 〈PD수첩〉에서 다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이승복 오보설’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대법원은 2006년 11월 판결을 통해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외침이 있었고 ▲사건 다음날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기사를 송고한 것을 모두 사실로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승복 오보설’을 진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좌파 교육감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이승복 동상들을 철거해 이승복의 흔적을 지우려 들고 있다.⊙
배진영 기자
이태석
‘톤즈의 슈바이처’
고(故) 이태석(李泰錫·1962~2010) 신부의 생을 담은 영화 〈부활〉이 2024년 10월 24일 바티칸의 교황청 행사에서 상영됐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축하 인사와 함께 “이태석 신부의 삶을 기억하고 실천하자”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한국이 낳은 슈바이처’ 이태석은 아프리카 극빈국 남(南)수단의 톤즈에서 의사이자 교육자로 봉사 활동을 하다 암으로 선종(善終)한, 천주교 살라시오회 사제다. 말라리아, 콜레라, 한센병이 창궐하는 곳에서 출혈이 멎지 않는 자연유산 산모, 결핵으로 복부가 부풀어오른 소년,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었다.
낮은 처마의 ‘움막 진료소’를 방 12개짜리 번듯한 진료소로 변화시켰다. 현지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35인 규모의 브라스밴드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톤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생전 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수단에서는 아침에 눈 떠서 잘 때까지 무조건 퍼줘야 합니다. 진이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란 생각에 또 하루를 시작합니다.”
의대를 나온 후 다시 수도회에 들어가 로마 교황청 유학 중 1999년 선교 체험에 나섰다가 톤즈를 처음 접한 이 신부는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내 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했다”고 한다. 2001년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이끌리듯 톤즈로 달려갔다. 세례명 ‘존(요한)’에서 유래한 애칭 ‘쫄리’ 신부로 불린 그는 희망이 없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숭고한 희망의 불빛을 밝힌 전령사가 되었다.⊙
김태완 기자
‘강철’ 김영환
從北의 씨앗 뿌린 ‘주사파 대부’
1985년 대학가에 〈노동운동가가 청년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문건이 등장했다. 문건은 “한국 사회는 미 제국주의가 파쇼적으로 지배하는 식민지 사회”라고 주장했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김영환이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쓴 이 문건은 〈강철서신〉이라고 불리며 당시 대학가에서 진행되고 있던 다양한 좌파 이념 논쟁들을 삽시간에 잠재웠다.
‘주사파의 대부(代父)’ 김영환은 1991년 잠수정을 타고 두 차례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그를 ‘김 동지’라고 부르면서 공작금 40만 달러를 줬지만, 정작 김영환은 ‘주체사상의 기본 개념도 잘 모르는’ 김일성에 실망했다. 결국 김영환은 1997년 자신이 만든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해체하고, 이듬해 전향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수 차례 “〈강철서신〉은 북한 단파방송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면서 “나의 치명적인 오류는 친북적인 분위기가 운동권에 널리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2014년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심판 때는 헌법재판소에 나가 ‘통진당은 종북(從北) 세력’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운동권은 물론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종북 세력이 강고하게 똬리를 튼 다음이었다. 이석기의 RO(혁명조직)와 통진당도 김영환이 만든 민혁당의 잔존 세력이었다.
전향 후 김영환은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이 과정에서 2012년에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40여 일간 구금되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북한민주화운동에 대해, 과거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남조선 혁명’을 하려고 했던 그가 지금은 자신이 이해한 주체사상으로 ‘북조선 혁명’을 하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배진영 기자
오연호
인터넷 신문 시대를 연 《오마이뉴스》 대표
‘모든 시민은 기자다.’
정보통신기술(IT) 발전으로 사이버 공간이 한창 확장하던 2000년, 신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가 내세운 슬로건이다. 그러자 기성 언론계 일부에선 “누가 그래?” “훈련받지 않은 시민이 기자라니 말도 안 돼”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 신문도 이제 한물간 매체로 치부된다. 유튜브를 비롯해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 등 다양한 SNS 플랫폼이 콘텐츠(뉴스 포함) 유통·소비 수단으로 등장했다. 놀랍게도 제공자·이용자 모두가 기자이면서 동시에 콘텐츠 소비자가 된 것이다.
그 ‘시작’ 버튼을 좌파 성향 월간지 《말》 출신의 오연호(吳連鎬·1964~ ) 기자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눌렀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그는 “새천년에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자” 새로운 인터넷 신문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오연호는 1995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 언론학을 공부하며 구상한 모든 것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문구에 녹여넣었다. 세계 최초로 ‘시민기자’ 제도를 선보여 시민을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기사 말미에 댓글을 다는 ‘댓글 시스템’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기사 작성 공식도 바꿔버렸다. 기사 형식을 파괴했고, 기존의 ‘뉴스 밸류(news value)’ 기준도 흔들어놨다.
오연호는 ‘20세기 신문 문화’에서 소외당하던 ‘재야 비주류 월간지’ 기자의 한계를 깨고 그들과 철저히 결별하기 위해 뉴스의 생산·유통·소비 문화를 바꾸는 데 일부 성공했다. 하지만 언론의 정치사회적 편향성, 참여 저널리즘의 책임성, 댓글 조작 등 여론 왜곡, 디지털 언론의 상업화 등 한계도 보이고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함운경
‘反美 투쟁’ 선봉에서 ‘종북 좌파 청소부’로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도 고향에 내려와 횟집을 한다면? 소위 ‘출세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잘못된 인생일까?
전북 군산 출신의 함운경(咸雲炅·1964~ )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운동권 출신 사회 변혁가다.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85년 함운경은 ‘삼민투위(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주도했다. 이 일로 ‘별’을 달았다. 반미(反美) 투쟁의 선봉으로 당시 학생운동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浮上)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출소하자 양김(김대중·김영삼) 진영에서 “함께 일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 무렵 운동권은 주체사상에 깊이 매몰돼 갔다. 함운경은 1989~90년대 초 동유럽 공산·사회주의 정권들이 무너지자 새로운 통일운동을 꾀했다. 1991년 뒤늦게 대학 졸업장을 받은 후 수학 강사로 잠시 일하다 1994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에 참여하고, 이어 1996년 15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관악갑에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落選). 다시 2000년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전북 군산에 출마했고 19~20대 총선에도 도전했으나 역시 당선과는 멀었다. 작년 22대 총선에서는 서울 마포을 지역구에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고배(苦杯)를 마셨다.
1980년대 반미 투쟁의 선봉이 40년이 흐른 지금 ‘운동권 청소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함운경은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으로서 종북 주사파(從北主思派)를 척결하고 반미 통일운동 세력이 민주화운동을 악용해 이익을 사취(詐取)하는 데 경종(警鐘)을 울리고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박종철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되다
“종철아! 잘 가거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고문치사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잘 가거라, 할 말이 없다’뿐이었다. 1987년 1월,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이던 박종철(朴鍾哲·1965~1987)은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에 연행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물고문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건 초기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死)로 발표했다. 하지만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의 추가 보도 등으로 고문(拷問) 의혹이 제기됐다. 정부는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을 전격 해임하고 고문 근절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 했다.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권은 ‘4·13 호헌(護憲) 조치’를 발표한다. 민주 진영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한 것이다.
역사는 드라마다. 그해 5월, 재야 운동으로 수형 생활 중이던 이부영(李富榮)이 박종철 사건의 축소·은폐 사실을 알게 된다. 소식은 곧바로 외부 민주 세력에게 전파됐다. 그해 6월 10일, 민주 세력은 당시 여당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그런데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 이한열(李韓烈·1966~1987)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 파편에 맞아 사망한다. 핵폭탄이 터진 격이었다.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 6월 10일, 일반 시민까지 합세한 시위는 항쟁의 시작이었다.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 요구 물결이 폭풍우처럼 불어 닥쳤다. 마침내 정권은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임수경
무단 訪北으로 통일 문제 대중화
유난히 뜨거웠던 1989년 여름, 한국의 한 여대생이 느닷없이 평양에 나타났다. 한국외대 4학년 임수경(林琇卿·1967~ ).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물론 무단 방북이었다. 도쿄, 취리히, 서베를린를 거쳐 동베를린에서 북한 고려항공편으로 북녘 땅을 밟았다. 체류 기간도 길었다. 46일간을 머무르며 김일성(金日成)도 만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자극받은 북한 정권은 임수경을 ‘통일의 꽃’이라 칭하며 체제 선전에 적극 활용했다.
1988~89년 사이에 남한 인사의 밀입북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서경원 평민당 의원, 문익환 목사에 이어 스물두 살 임수경까지 평양을 다녀오자 국내에 공안 정국이 조성됐다.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임수경은 곧바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5년형을 선고받고 3년 4개월째 복역하던 중 1992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임수경의 삶은 평안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알아보고 ‘대우’했다.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스스로 “정치적이지 못하다”고 했다. 2016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종북(從北)도 아니고 북한에 관심도 별로 없다”고 했다. ‘89년 평양의 임수경’ 이미지로 인해 일종의 피해의식까지 생겼다고 했다. 요컨대 ‘통일의 꽃’은 그녀의 원죄(原罪)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89년 임수경 방북 사건’은 국내 통일 문제의 대중화를 가져온 시발(始發)이었다. 1980년대 확산한 반미(反美) 세력, 북한 주사파, 그리고 민주화 세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가면서 통일운동이 전개됐다. 임수경의 방북이 역설적으로 폐쇄된 북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는 주장도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이지문
軍 내부 부정 투표 양심선언 ‘공익제보 1세대’
1992년 3월 22일 일요일 밤, 서울 종로5가에 위치한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실의 기자회견장. 짧은 머리에 사복 차림을 한 젊은 장교가 “14대 총선을 앞두고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의 개입으로 군(軍) 내부에서 부정 투표가 이뤄졌다”고 폭로했다. 육군 9사단 소속 이지문(李智文·1968~ ) 중위의 내부 고발 양심선언이었다. 기자회견을 마친 그는 헌병에 의해 수도방위사령부로 끌려갔고 근무지 무단이탈,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등 혐의로 이등병으로 강등, 파면됐다. 고려대 ROTC로 대학생 시절 데모 한 번 하지 않았던 그의 ‘저항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지문은 3년간 소송에 매달렸다. 마침내 1995년 대법원으로부터 파면 처분이 부당하다는 최종 판단을 얻어내 중위 계급장을 되찾았다. 이후 공익제보 지원, 내부고발자 보호, 부정선거 감시 등 공익제보 전문가로 활동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2014년 국민권익위원회에 등록된 유일한 공익신고 지원 단체인 ‘한국청렴운동본부’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의 ‘용기’로 당시까지만 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군내 부정 투표와 정치적 중립성 위반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이는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1990년 5월 재벌 비(非)업무용 부동산 현황을 폭로한 이문옥 감사원 감사관, 같은 해 10월 보안사의 민간인 정치 사찰을 터뜨린 윤석양 이병, 1992년 8월 금권·관권 선거를 고발한 한준수 연기군수 등의 공익제보가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부패방지법과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제정됐다. 한 군인의 강등·파면·구속을 가져온 ‘내부 고발 양심선언’이 ‘공익제보’라는 개념으로 발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강철환
북한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세계에 폭로하다
강철환(姜哲煥·1968~ )은 존재 자체가 역사적 증거품이다. 1968년 평양 출생. 할아버지는 재일동포 사업가로 북송선을 탔다. 막대한 재산을 북에 헌납했으나, 사석에서 김씨 왕조를 ‘봉건적’이라고 말했다가 일가족 전체가 수용소로 끌려갔다. 강철환이 9살 때의 일이다. 법도 재판도 없는 전근대적(前近代的) 연좌제(連坐制)다. 끌려가던 날 강철환 소년이 가장 먼저 챙긴 물건이 ‘어항’이다. 집행자들이 왜 비웃는지를 그때는 몰랐다. 후일 그가 펴낸 《수용소의 노래》(2005년) 부제가 책 제목이 ‘평양의 어항’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현직 시절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백악관에서 강철환을 만났다.
수용소 생활의 묘사는 생생하고 참혹하다. 수용소 수감자들이 작업장을 이탈, 손으로 열매를 몰래 따먹었다. 간수들은 손에 물든 산열매의 색이 없어질 때까지 손바닥을 땅에 대고 뛰라고 했다. 손바닥 살갗이 다 벗겨지고 피가 흘러도 멈출 수 없었다. 뱀, 쥐 등 움직이는 것은 모두 잡아먹고 쇠똥을 뒤져 곡식을 골라 먹는 것이 강철환이 전하는 북 정치범 수용소의 일상이다. 공개 고문과 처형은 수시로 벌어진다.
강철환은 수용소에서 10년을 생활하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난 후 필사적으로 탈북해 1992년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는 북한전략센터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있기에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전면 부인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던 북의 태도에 균열이 생겼다. 국제 사회의 관심도 폭증했다. 그가 발화(發火)한 ‘북한인권운동’은 그의 생생한 증언에 힘입어 세계로 퍼졌다.⊙
장원재 ㈜전후70년 생생현대사 TV 대표
이수현
몸을 던진 희생으로 한일 우호의 가교를 놓다
매년 1월 26일 일본의 한 지하철역에서는 한국 청년의 추모식이 열린다.
벌써 24년 전의 일이다. 도쿄 신주쿠(新宿)구 JR 신오쿠보(新大久保)역. 선로에 취객이 누워 있고,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있었다. 이를 목격한 유학생 이수현(李秀賢·1974~2001)은 주저 없이 선로로 뛰어들었다. 역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혼자 안간힘을 쓰는 동안 열차가 다가왔고, 보다 못한 일본인 사진가 한 명이 그를 도우려 선로로 뛰어들었으나 기적은 없었다. 3명 모두 그 자리에서 숨졌다.
빈소에는 일본 정치인을 비롯한 추모객들이 줄을 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 뛰어드는 이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두고 “이수현씨가 보여준 희생정신으로 일본인들이 정의와 용기에 새롭게 눈뜨게 됐다”고 했다.
1974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수현은 고려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는 부모에게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본과 관계된 일을 하면서 한일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 구축에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한일 양국 시민들이 그 꿈과 뜻을 대신 잇겠다고 나섰다. 한일 간 청소년 교류사업인 ‘아이모(아름다운 청년 이수현 모임)’는 올해로 16년째를 맞이했다. 그의 이름을 딴 장학회도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20일 이수현의 모친 신윤찬씨에게 2024년 추계 외국인 서훈(욱일쌍광장)을 했다. 이씨 부친 이성대(2019년 별세)씨도 지난 2015년 같은 훈장을 받았다.⊙
박지현 기자
이영환
참신한 아이디어로 투쟁하는 북한인권운동의 새로운 기수
이영환(1979~ )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대표는 20년 이상 북한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 왔다. 1999년 탈북자 정착 시설 하나원이 개소했을 때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북한인권운동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2014년 TJWG를 설립했다.
UN은 ‘전환기 정의’를 ‘한 사회가 과거 역사 속 대규모 잔학행위의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책임을 규명하고, 정의를 세우며, 화해를 이루려는 모든 과정과 메커니즘’으로 규정한다. 이영환 대표는 “전환기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해자 처벌, 피해자 배상과 구제, 기관 개혁이 중요하다”면서도 “항구적으로 중요한 건 다음 세대들의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TJWG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다. 2017년 북한 내 처형지·암매장지 등 인권 탄압 장소를 위성 좌표에 근거해 지도로 만들었다. 당시 《뉴욕타임스》가 ‘그들은 어디에 묻혔을까’라는 제목으로 보도할 정도로 화제가 됐다. 2023년에는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방사성 물질이 주변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정치권의 반응도 뜨거웠다. 현 정부 들어 핵실험장 인근 출신 탈북민에 대한 방사선 피폭 전수조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10월엔 북한의 강제실종 범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심층 조사해 보고서를 펴냈다.
이영환 대표는 지난해 한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도 전환기가 시작돼 현장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집단매장지 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과거 뉘른베르크, 도쿄 전범재판소처럼 평양에도 재판소가 세워져 반(反)인도 범죄를 단죄하고 인권과 정의가 회복될 날이 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세윤 기자
《월간조선》은 이 뜻깊은 해를 맞이해 다양한 특집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설날을 앞두고 나오는 이번 2월호에서는 그 첫 번째로 ‘해방 80년 80인-해방둥이에서 BTS까지’까지를 마련했습니다. 이에 관련해 독자 여러분께 몇 가지 설명을 드리고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우선 《월간조선》은 올해를 ‘광복 80주년’이 아니라 ‘해방 80주년’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해방과 광복이 같은 의미인 것처럼 혼용되고 있지만, 광복은 ‘잃었던 주권을 되찾았다’는 의미입니다. 광복은 곧 독립이나 건국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은 1945년에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바로 주권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3년간의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비로소 주권을 회복했습니다.
둘째, 인물 선정의 기준입니다. 이번 특집에서는 ‘1945년 이후 출생한 인물’을 그 대상으로 했습니다.
물론 해방 이후 활약한 주요 인물들을 꼽는다면 건국, 6·25, 산업화, 민주화 등과 관련된 분들이 될 것입니다.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백선엽(白善燁)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이병철(李秉喆) 정주영(鄭周永) 박태준(朴泰俊) 김우중(金宇中)…. 이분들은 분명 대한민국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분들이지만, 이미 과거에 해방이나 건국을 기억할 때마다 수없이 소환되었던 분들입니다.
저희는 이번에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서 ‘1945년 출생한 분’들부터 다루기로 했습니다. 흔히 ‘해방둥이’라고 불리던 분들도 이제는 80세입니다. ‘해방둥이’ 이후를 다루어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당대에 높은 자리에 있었다거나 반짝인기를 끌거나 화제가 되었던 이들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의 행보에 두드러진 족적을 남기거나 후대에 영향을 남긴 인물, 시대의 성취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이런 시도는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1945년 이후 출생자’로 한정하고 보니, 몇 가지 사실들이 보였습니다.
우선 건국 세대, 호국(護國) 세대, 근대화 세대에 비해 무게감은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치인·관료·군인 그룹에서는 역대 대통령들 외에는 눈에 띄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경제 분야에서는 개발연대 산업화를 이끌었던 기업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반도체·IT·금융·스타트업 등 분야에서 시대의 변화를 선도(先導)한 이들이 꽤 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대중문화, 스포츠, 시민사회운동 등의 분야에서는 선별하기 힘들 정도로 인물이 많았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미 1970년대부터 대중의 시대, 대중문화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정된 인물들, 특히 시민사회 분야나 문화예술 분야 인물들 가운데는 ‘보수의 관점’에서 보면 탐탁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좌경화(左傾化)된 우리 사회의 추이(推移)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월간조선》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꼭 기억해야겠다’ 싶은 인물들, 예컨대 이승복이나 연평해전 전사자들, 젊은 북한인권운동가들을 의도적으로 포함시켰습니다.
건국–근대화 세대가 만든 19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을 ‘국가·관료 주도, 근대화, 반공’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면, 1945년 이후 출생한 세대가 주도한 그 이후의 대한민국은 ‘민간 주도, 대중화, 좌경화’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특집에서는 인물들을 누가 선정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 권위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로 자문단을 구성하거나 여론조사를 하는 방법 등이 있을 것입니다.
특집을 준비하면서 《월간조선》이 가장 고민한 것도 이 대목이었는데,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몇몇 전문가들께 특집에 대해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습니다만, ‘해방 이후 활약한 인물’이라면 몇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도 ‘1945년 이후 출생한 인물’로 제한하면 얼른 대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말씀해 준 분들도 확인해 보면 1930년대나 1940년대 초에 태어난 분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론조사를 하더라도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또 ‘전문가 집단’을 구성해 그분들에게 선정을 의뢰한다고 해도 그 권위는 누가 담보할 것인지도 의문이었습니다.
결국 《월간조선》 기자들이 1945년 이후 출생한 분야별 유명 인사들의 방대한 리스트를 만든 후, 몇 차례 회의를 거쳐 80명으로 압축하기로 했습니다.
선정된 이름들을 보면서 ‘생소한 인물이 많다’고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빠졌느냐’거나 ‘왜 이런 사람을 포함시켰느냐’고 지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호불호를 떠나서 대중사회의 도래와 좌경화, 민간 주도라는 시대의 추이를 보여주는 이들이 선정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만, 그에 대한 질책은 편집장인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편집장 배진영 올림
정치/관계/군
노무현
팬덤 정치로 엘리트 정치 구도 깬 ‘원조 흙수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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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노무현이 팬덤을 갖게 된 것은 정치인 노무현의 ‘특별함’ 때문이었다. 지연과 학연을 중시하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 고졸 출신 ‘흙수저’ 인권변호사라는 이력, 부산 출신이면서 민주계 정당에 몸담고 지역주의 타파에 앞장서는 점 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당선(부산 동구)됐지만 3당 합당에 반대해 합류를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남았다.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며 지역주의와 싸우다 총선(14~16대), 초대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으로 알려진 ‘노사모’가 탄생했고, 노무현은 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02년 16대 대선 출마를 결심한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그림자 아래 있던 기존 정치 구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였다. 새천년민주당 주류가 아니었던 노무현이 당내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지만 전국적으로 노사모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대이변을 일으켰고, 본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마저 꺾고 16대 대통령이 됐다.
노무현은 수많은 개혁을 꿈꿨지만 여당 내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고,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한 대통령이 됐다. 탄핵은 기각됐지만 정국 혼란, 경제정책 실패 등으로 임기 후반 그의 지지율은 계속 떨어졌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를 받던 그는 퇴임 후 낙향한 경남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고 말았다.⊙
권세진 기자
박근혜
박정희의 딸, 보수의 유산을 무너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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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장녀로 태어난 박근혜는 1974년 문세광 저격 사건으로 어머니를, 1979년 10·26 사태로 아버지를 잇달아 잃었다. 이후 20여 년간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1998년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16~19대까지 내리 5선(選)을 했다. 2012년 12월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가 등장한 1998년은 보수 세력이 해방 이래 처음으로 정권을 뺏기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해다. 박근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야권이었던 보수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기반을 다진 박정희의 딸에 보수는 열광했다. 박근혜는 보수 정당이 어려울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했고, 성공했다. 한나라당 대표(2004년)와 비상대책위원장(2011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2012년)으로 당을 이끌면서 총선과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했고, 매번 불리했던 판세를 역전시키며 승리를 이끌어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 괴담’에 이어 대통령 취임 4년 차인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국회에서 탄핵소추됐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로 보수 세력은 정권을 뺏기는 것은 물론 한동안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고 현재까지도 ‘탄핵 트라우마’가 보수 정당에 드리워져 있다.⊙
권세진 기자
문재인
‘적폐 청산’ 내걸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허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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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문재인이 정치를 시작하고 계속해 나간 계기는 모두 노무현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일하던 문재인은 친구 노무현과의 오랜 인연으로 그의 ‘참여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비서실장을 지냈다. 노무현 사망 후 2012년 19대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고,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후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선출됐지만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극심한 당내 계파 갈등으로 호남 의원들이 탈당하는 등 정치적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대선 주자로 떠올랐고, 2017년 결국 19대 대통령이 됐다.
전직 대통령 탄핵의 아픔을 겪은 국민은 새로운 리더십과 경제 문제 해결을 원했다. 문재인이 취임하며 내건 슬로건은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었다. 문재인은 ‘정의(正義)’를 내세워 권력기관 재편과 적폐 청산, 북한과의 ‘가짜 평화 쇼’ 등에 몰두하며 대한민국의 기틀을 흔들었다. 검찰 개혁과 고위공직자수사처 신설 등 권력기관을 손보는 과정에서 극심한 정국 혼란이 빚어졌고 의회민주주의가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사회 양극화 현상도 심해졌다. 성별과 세대 간 혐오의 정치와 포퓰리즘이 고개를 들었고, 부동산 정책 실패로 집값이 크게 상승했다.
민심에서 멀어진 문재인 정부는 결국 민주당 정권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5년 만에 보수 정당에 정권을 다시 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권세진 기자
윤석열
좌초한 ‘검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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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징계를 받고 지방을 전전하는 고초를 겪던 윤석열이 부활한 계기는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에 수사팀장으로 참여하면서다. 이때의 활약으로 문재인 정권에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됐다. 적폐 청산과 검찰 개혁을 부르짖던 문 대통령은 이어 그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조국(曺國) 당시 법무장관 수사 등을 두고 대통령 및 민주당과 충돌하면서 검찰총장직을 사퇴했다. ‘문재인과 당당하게 맞서는 윤석열’은 보수 진영에서 대권 주자로 급부상했다. 결국 윤석열은 국민의힘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 20대 대통령이 되었다.
보수 진영의 큰 기대를 받으며 취임한 윤석열은 3대 개혁(노동·교육·연금)과 외교안보 강화 등을 통해 이전 정권과 차별화에 나섰다. 하지만 의대 증원 등 무리한 의료 개혁으로 인한 사회 혼란, 당내 분열 초래, 부인 논란 등으로 민심이 점차 떠나갔고, 22대 총선에서 여당이 크게 패하면서 사실상 손발이 묶인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택한 방법이 비상계엄이었는데, 그 결과 민심은 돌아섰고 야당이 장악한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했다.
27년간 검사로서 특히 권력층 수사에서 맹활약했고 검찰의 수장(首長)에까지 오르며 두려움이 없었던 윤석열은 국민을 모두 수사 또는 교정(矯正)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검사 정치’의 좌초다.⊙
권세진 기자
김문수
노동운동가에서 ‘보수의 기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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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전향(轉向)’의 어려움에 대해 김문수(金文洙·1951~ ) 고용노동부장관이 늘 하는 말이다.
김문수는 경북고 재학 시절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서울대 상대 재학 중에는 학생 시위로 제적되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를 당했다. 한일공업(도루코) 노조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을 주도했고, 1986년 5·3 인천 사태로 구속돼 2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그는 “내가 열심히 데모에 뛰어들고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체계적, 이념적인 사회 인식 때문이라기보다는 소외받은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박한 신념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보면서 사회주의와 결별한 김문수는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민주자유당에 입당,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내리 3선을 했고 경기도지사를 연임(2006~14)했다. 2012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10년간 정치적으로 불우하게 지내다가 작년 8월 고용노동부장관으로 발탁됐다.
장관 인사 청문회 때 야당의 공격적 질문에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작년 12월 11일 민주당 의원들이 국무위원들에게 “일어나서 12·3 계엄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건국절 논란, 이승만 재평가 등에 대해서도 일관된 목소리를 내왔다. 이런 행보와 청렴 강직한 처신으로 보수층의 중망(衆望)을 모으고 있다.⊙
배진영 기자
추미애
‘엘리트 여성’의 정치 참여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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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추미애는 10년째 판사로 일하던 1995년 법원에 사표를 내고 김대중 당시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당 부대변인을 맡으며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당시 추미애의 입당은 정치권에서 큰 화제가 됐다. 대구 출신, 30대, 미모의 전문직 여성이 야당에 입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야당에서 여성이 부대변인을 맡은 것도 처음이었다. 추미애는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에 출마해 당선됐고, 해당 지역구에서 5선(15, 16, 18~20대)을 했다. 2024년 22대 총선에서는 경기 하남갑으로 옮겨 막판 대역전극으로 6선에 성공했다.
추미애는 정치 입문은 화려했지만 당내에서 지연과 학연 덕을 보기 힘들었고, 특정 대학 출신이 주류인 여성계와도 거리가 있는 데다 그를 ‘장식용’으로 보는 시선 등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선입견에 맞서며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개혁 성향, 당찬 발언과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태도 등으로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민주계 정당에서 TK 출신인 그가 당대표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강하고 독특한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8년 당대표 당시 인터넷 포털 댓글 조작 수사 의뢰가 ‘드루킹 사건’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X맨’이라는 오명을 썼고, 2020년 법무부장관으로서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징계를 청구해 결국 문재인이 임명한 윤 총장을 국민의힘 소속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세진 기자
오세훈
‘TV 스타’에서 정치인으로… 초유의 4選 단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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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1990년대 변호사로 활동하던 오세훈은 일조권(日照權) 소송 등으로 유명세를 타다 방송국으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고, 〈생방송 오변호사 배변호사〉와 〈그것이 알고싶다〉의 진행자로 얼굴을 알렸다. 이 밖에도 각종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광고 모델로 출연하기도 하면서 정치권의 러브콜이 이어졌고, 2000년 16대 총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006년에는 서울시장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민선(民選) 최연소 서울시장이 됐다. 2010년 서울시장 재선에 성공했고 수도권 통합 대중교통 환승제 실시, 다산콜센터 설립 등 성과를 냈다.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부결(투표율 미달로 폐기)로 시장직을 사퇴한 오세훈은 10여 년간 사실상 정치적 야인(野人)으로 지냈다. 총선과 당대표에도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국회의원 재도전이 번번이 실패하고 정치적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그의 정치 인생이 끝났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치권에서는 꾸준히 잠재적 대권 주자로 꼽혀왔다.
결국 오세훈은 박원순 전 시장 사망으로 치러진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화려하게 재기한다. 야권 단일화를 통해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한 오세훈은 보수 정당 지지율이 낮았던 2030세대에서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렸고, 모든 구(區)에서 압도적으로 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꺾으면서 세 번째로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다시 서울시장에 당선, 네 번째 서울시장직을 수행중인 오세훈은 여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로 손꼽힌다.⊙
권세진 기자
이재명
팬덤 정치의 끝판왕, 최초의 ‘여의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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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이재명은 경기도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시민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를 시작해19~20대 성남시장, 35대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파면으로 치러진 20대 대통령선거에 더불어민주당 후보경선에 출마했으나 낙마했다. 2022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22대 총선에서 당선(인천 계양을)돼 재선 국회의원이 됐고, 제6~7대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연임 중이다. 민주계 정당에서 당대표를 연임한 사례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이재명이 처음이다.
민주계 정당에 뿌리가 없는 것은 물론 지연과 학연 등 정치적 배경도 거의 없으며, 수많은 사법 리스크까지 보유한 ‘정치 흙수저’ 이재명이 이토록 강력한 의회 권력을 갖게 된 배경은 바로 팬덤이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시작된 이재명 팬덤으로 ‘개딸(개혁의 딸들)’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일 정도가 됐다. 이재명 팬덤은 이재명을 공격하는 여당 정치인은 물론 이재명에게 협조하지 않는 민주당 정치인들까지 비판하고 공격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 대통령과 총리 탄핵소추까지 이뤄냈지만 낙관하긴 이르다. 대북 송금 의혹 등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을 받고 있는 그가 사법 리스크의 높은 파고를 넘을지는 미지수다.⊙
권세진 기자
이준석
청년 정치의 새 패러다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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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과학고–서울대–하버드대 출신의 청년 기업인이었던 이준석은 만 26세 때인 2011년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발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박 대통령 탄핵 후 이준석은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 새로운보수당을 거치며 기존 보수 세력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보수’로서 정치활동을 하다 21대 총선 전 미래통합당에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시사 프로그램은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도 다수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높이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대중 정치인으로 자리 잡았다. 국회의원 선거에 세 차례 출마해 낙선했지만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고 당 선거에 기여하며 보수 정당의 유일한 리더급 청년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보수가 재기하는 계기가 된 선거로, 이준석은 오세훈 캠프 뉴미디어본부장을 맡아 청년 유권자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승리의 주역으로 주목받던 이준석은 같은 해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43.8%를 득표해 당대표 자리에 올랐다. 당시 나이 만 36세로, 30대 집권 여당 대표가 탄생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었다. 당대표 이준석은 20대 대선과 제8회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후 국민의힘에서 밀려나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개혁신당을 창당하고 22대 총선에서 경기 화성을에 출마해 초반 열세를 딛고 42.41%를 획득하며 거대 양당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세대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주목받으며 대권 주자로 평가받는 유일한 청년 정치인이다.⊙
권세진 기자
강만수
글로벌 금융위기에 잘 대응한 경제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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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MB정부 출범 반년 만에 미국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금융위기가 닥쳤고, 그 10년 전 IMF 외환위기의 악몽을 겪었던 우리 국민은 경제정책 수장인 강만수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때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강만수는 적극적인 환율 방어에 나서는 방법을 택했다. 환율 안정을 위해 정부가 직접 외환시장에 개입했고, 국내 은행 외채에 정부가 지급보증을 했으며, 한미 간 원–달러 통화스왑(swap) 협정을 체결했다. 일부에선 이 때문에 정부의 외환보유고가 줄었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국내 대기업들은 이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환율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수출 호조를 보이며 금융위기의 파고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해 많은 국가들이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한국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별다른 위기를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 외신으로부터 주목받기도 했다.
강만수는 이후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대통령 경제특보, 산업은행장을 역임하며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계속해서 책임졌다. 그가 몸담았던 이명박 정부는 국내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기업 친화적 정책을 펼치면서 물가와 집값도 잡은 정부로 평가받고 있다.⊙
권세진 기자
김관진
북한이 두려워한 단 한 명의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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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3군사령관·합참의장(대장)을 거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걸쳐 국방부장관과 국가안보실장을 지냈다. 장관 시절 김관진의 집무실 의자 뒤편 벽에는 북한 김정일과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군사보좌관 김격식 등 북한군 수뇌부 사진이 A4용지 크기로 걸려있었다고 한다. ‘적이 장관의 등을 노리고 있는 만큼 한시도 적을 잊어선 안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장관직을 수행했다. 2011년 3월에는 서부전선을 찾아 경계근무를 서는 장병들에게 “(적 도발 시) 현장에서 ‘쏠까요 말까요’ 묻지 말고 선(先)조치 후(後)보고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이 도발하면 원점(原點), 지원 세력은 물론 지휘 세력까지 타격하라고 강조하며 응징 의지를 보였다.
2014년에는 국가안보실장으로 발탁돼 안보 정책 수립과 실행을 총괄했다. 2015년 북한이 DMZ 일대에 목함지뢰를 매설해 우리 장병 2명이 부상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우리 정부가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북한은 유감을 표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는 시기에 김관진은 ‘안보에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안보실을 지켰으나, 돌아온 것은 수모와 댓글 재판이었다.⊙
이경훈 기자
제2연평해전 전사자 6인
피로써 서해 NLL을 지킨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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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해군 |
윤영하(尹永夏·1973~2002) 정장(대위·이하 당시 계급)은 아버지(윤두호·해사 18기)의 뒤를 이어 해군 장교가 됐다. 북한군은 지휘체계를 무력화하고자 함교에서 지휘하는 정장을 가장 먼저 공격했다.
윤 대위를 대신해 부장(副長) 이희완 중위(현 국가보훈부 차관)가 지휘를 이어갔다. 그 역시 적 총탄에 부상을 입어 한쪽 다리 일부를 절단해야 했다.
한상국(韓相國·1975~2002) 조타장(중사)은 함정을 끝까지 조종하기 위해 조타키를 천으로 묶고 분투했다.
조천형(趙天衡·1976~2002) 병기사(중사)는 20mm포 담당이었다.그의 딸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해군 학군사관후보생(NROTC)이 됐다.
황도현(黃道顯·1980~2002) 하사도 20mm포를 끝까지 놓지 않고 방아쇠를 잡은 채 전사했다.
서후원(徐厚源·1980~2002) 하사는 M60 기관총으로 대응했으나 적 총탄에 왼쪽 흉부를 관통당해 쓰러졌다.
박동혁(朴東赫·1981~2002) 의무병(상병)은 쓰러진 전우를 구하기 위해 포탄이 빗발치는 갑판을 뛰어다니다가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돼 84일간 투병하다가 숨을 거뒀다.
여섯 용사의 장렬한 죽음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세상에 고발했다. 해군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유도탄고속함(PKG)들에 이들 전사자 이름을 명명하고 있다. 2015년에는 영화 〈연평해전〉이 만들어졌다.⊙
이경훈 기자
경제
김승연
K방산 이끄는 한화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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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화 |
한화는 2023년에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인수를 마무리해 기존의 우주, 지상 방산에서 해양까지 아우르는 육해공 통합 방산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M&A는 한화그룹 성장사(史)의 핵심이며 김승연 회장의 통찰력과 뚝심을 대표하는 키워드다. 김 회장은 IMF 외환위기 직후인 2002년에 적자를 지속하던 대한생명을 인수해 총자산 100조원이 넘는 우량 보험사로 키웠고, 2015년엔 삼성의 방산 및 석유화학 부문 4개사를 인수하는 빅딜로 재계를 놀라게 했다. 사업 고도화와 시너지 제고를 통해 한화 방산 부문은 명실상부 국내 1위로 도약했다. 1981년 김승연 회장이 취임할 때 총자산 7568억원, 매출 1조1000억원이었던 한화그룹은 2023년 말 기준 총자산 232조원, 매출액 80조1000억원을 기록하며 우리나라 7대 그룹으로 도약했다.⊙
정혜연 기자
황창규
‘황의 법칙’ ‘디지털 노마드’ 설파한 삼성 반도체 신화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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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황창규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 전기공학과 책임연구원, 미국 인텔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다 1989년에 삼성전자에 합류했다. 16M D램 소자개발팀장, 삼성전자 반도체 이사를 거치며 1994년에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에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받았고, 2004년부터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겸 메모리사업부 사장을 맡았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외국인 최초로 ‘IT 노벨상’으로 불리는 미국 ‘EIA 기술혁신리더상’, 2006년에는 반도체 산업의 환경안전 분야 최고상인 ‘이노우에 아키라상’과 반도체 기술 명장에게 주어지는 ‘IEEE 앤디 그로브상’을 받았다.
‘메모리반도체 집적도는 1년에 두 배씩 늘어난다’는 ‘황의 법칙’으로 유명한 그는 명강연자로도 이름을 알려 200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시작으로 2003년 스탠퍼드대, 2004년 MIT, 2005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강단에 섰다. 황 사장은 강연에서 ‘디지털 노마드(유목민)’ 전략을 소개하면서,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옮겨가는 유목민처럼 신(新)기술 개발을 위해 부단하게 정진하는 것이 그의 경영 전략이라고 밝혔다. 이후 KT 회장을 지냈다.⊙
정혜연 기자
박현주
대한민국 금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운 미래에셋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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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래에셋 |
최연소 증권사 지점장을 지낸 박현주 회장은 1997년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박 회장은 회사 설립 초기부터 세계 시장 진출을 염두에 뒀고,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003년 국내 운용사 최초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등 초대형 글로벌 금융사들과 경쟁은 무리라는 반응이 팽배했지만, 박 회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장기적인 비전을 내놨다. 22년이 지난 현재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미국과 베트남, 브라질, 아랍에미리트, 영국, 인도, 일본, 중국 등 16개 지역에서 활동하는 국내의 대표 글로벌 금융기업으로 거듭났다. 전체 운용자산은 385조원에 달한다. 특히 해외 시장에 유망한 ETF 운용사를 인수해 글로벌 ETF 197조원을 운용하고 있고 미래에셋증권은 인도 쉐어칸 증권사를 인수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회사 출범 초기인 2003년에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만들어 글로벌 인재 육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박현주 회장은 “미래세대가 세계 곳곳에서 공부해 인적 네트워크를 갖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혜연 기자
이재현
‘문화 강국’ 대한민국 초석 놓은 CJ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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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J |
이 회장은 대한민국이 문화 불모지라 불리던 1990년대 초반부터 영화사업에 뛰어들며 세계 시장 진출의 밑그림을 그렸다. 1995년에 스티븐 스필버그, 제프리 캐천버그 등이 설립한 ‘드림웍스’에 3억 달러를 투자해 2대 주주가 됐다.
영화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지만, 이재현 회장의 과감한 도전은 CJ ENM이 글로벌 콘텐츠 기업으로 도약하는 마중물이 됐다. 이후 CJ ENM은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 오픈, 국내 상영 영화 총 관객 수 역대 1위, 국내 유일 종합콘텐츠 기업, 세계 최대 K컬처 페스티벌 개최, 〈기생충〉으로 대한민국 최초 프랑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등 대한민국 문화사업에 길이 남을 굵직한 발자취를 새겼다.
대한민국을 문화 콘텐츠 강국으로 키워내겠다는 이재현 회장의 꿈은 자연스레 푸드 산업으로 확장됐다. CJ는 설탕 제조를 시작으로 밀가루와 조미료 생산 등 70여 년간 식품산업을 이끌어 왔다. CJ제일제당은 대표 브랜드 ‘비비고’를 앞세워 K푸드의 글로벌 영토 확장에 나서고 있다. ‘비비고 만두’는 미국에서 ‘K만두 신드롬’을 일으켰고, CJ제일제당의 해외 식품사업 매출은 2019년 3조1540억원에서 2023년 5조3861억원으로 4년 동안 70% 이상 성장했다.
이 회장은 늘 “전 세계인이 매년 2~3편의 한국 영화를 보고, 매월 1~2번 한국 음식을 먹고, 매주 1~2편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매일 1~2곡의 한국 음악을 듣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정혜연 기자
최태원
반도체로 SK의 미래를 설계한 ‘재계 맏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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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K |
2012년 SK하이닉스 인수는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신(前身)인 하이닉스반도체는 당시 3조원에 달하는 부채로 파산 위기에 놓여 있어 업계에서는 이 인수를 위험한 도박으로 여겼지만,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를 과감히 인수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매년 조(兆) 단위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한 결과 SK하이닉스는 2024년 3분기에 사상 최대 분기실적을 기록하며 영업이익 7조원을 돌파했다. 외국에서는 삼성전자와 함께 SK하이닉스를 한국의 소중한 전략자산으로 주목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취임 초기부터 ‘글로벌화’를 그룹의 핵심 전략으로 삼아, 내수 중심이던 그룹을 수출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1998년 취임 당시 8조3000억원이었던 수출액은 2023년 96조8000억원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수출의 12%에 달하는 수치다. 1993년 신약 개발 사업에 진출한 이후 2008년부터 바이오·제약사업을 신(新)성장동력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투자한 결과 2019년에는 미국 FDA로부터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의 판매 허가를 받았다.
‘재계 맏형’ 대한상공회의소 수장까지 맡은 최 회장은 최근에는 그룹 미래 도약의 원동력으로 AI를 꼽고 ‘AI 종합 솔루션 기업’으로 도약시키고자 분투하고 있다.⊙
정혜연 기자
안철수
의사에서 컴퓨터 백신 전도사, 정치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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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서울대 의대 출신인 그는 박사과정 시절에 개발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V3’를 일반인에게 무료로 보급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자신이 쓰던 디스켓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자 호기심으로 퇴치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새로운 컴퓨터 바이러스가 발견될 때마다 밤을 새워 백신을 업그레이드했다. 1995년에 바이러스 백신 회사 안철수연구소를 창업하면서 벤처기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반인에게는 무료로 보급하고 대신 기업·관공서에서는 대가를 받는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성공했다.
안철수 전 의장은 벤처업계에 뛰어든 지 10년 만인 2005년 안랩을 그만두고 3년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KAIST 석좌교수, 서울대 융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강단에 섰다. 2012년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해 낙선하고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국민의당 대표로 활동했다. 2013년 보궐선거(서울 노원병)로 처음 등원하고 20~22대에 내리 당선해 어느덧 4선 국회의원이 됐다. 2017년, 2022년까지 대선에 모두 세 번 출마했고 특히 2022년 대선 때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단일화로 정권 교체에 일익을 담당했다.
여전히 잠룡으로 꼽히는 안철수지만, 역사는 정치인보다 컴퓨터 백신을 한국에 알린 1세대 벤처기업가로 그를 기억하지 않을까.⊙
정혜연 기자
김범수
‘국민 메신저’ 카톡 만든 벤처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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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카카오톡 출시는 카카오 왕국 출범의 신호탄이었다. 김범수 창업주는 2014년에 다음커뮤니케이션을 합병해 회사 이름을 다음카카오로, 다시 카카오로 변경했다. 카카오는 2019년에 총자산 10조원 이상의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2022년 5월 기준으로 계열사가 136개까지 늘어났다. 그해 10월에 국회 국정감사에서 ‘문어발 확장’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김범수 창업주는 2024년 7월에 SM엔터테인먼트 주식 시세조종 혐의로 구속됐다. 그해 10월 31일에 보석으로 석방됐지만 그의 경영 복귀가 언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2023년 11월~2024년 7월까지의 그의 마지막 직함은 카카오 경영쇄신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정혜연 기자
김택진
국산 온라인 게임의 세계화 이끈 엔씨소프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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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김택진 대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89년 이찬진씨 등과 함께 ‘아래아한글’을 공동 개발하며 일찌감치 IT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대전자에서 개발팀장으로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1997년에 직원 17명과 함께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엔씨소프트를 설립했고, 이후 온라인 게임으로 방향을 틀어 이듬해 리니지를 출시했다. 리니지는 2000년 이후 미국, 일본, 중국, 대만, 태국, 유럽 등으로 진출해 국내 온라인 게임이 세계 시장에 전파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택진 대표는 2002년 6월에 《비즈니스위크》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스타’로 뽑혔다. 2003년에는 ‘리니지 2’를 내놔 온라인 게임 열풍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열광한 김택진 대표는 2011년에 작고한 최동원 선수의 열혈 팬이었다. 2011년 3월에 프로야구 NC 다이노스를 창단했고, NC가 처음 통합우승한 2020년 한국시리즈 1~6차전 전(全) 경기를 직관했다.
김택진 대표는 회사 광고에 직접 출연해 ‘택진이 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부인은 과학고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맥킨지 컨설팅과 SK텔레콤 상무를 지내 ‘천재 소녀’라는 별명을 가진 윤송이 박사다.⊙
정혜연 기자
이해진
국내 1위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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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
이해진 책임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전산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삼성SDS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사내벤처 ‘네이버’를 운영하다가 네이버의 전신인 네이버컴을 만들고서 김범수씨가 만든 한게임과 합병해 NHN을 출범시켰다. NHN은 ‘지식IN’이라는 지식백과 서비스를 성공시켜 설립 초창기부터 국내 포털업계 1위 자리를 유지해 왔다.
이해진 책임은 다른 스타트업 창업주들과는 달리 초창기인 2004년 1월에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이후 외부 행사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왔다. 2013년 네이버 이사회의장을 맡았을 때 영세 사업자들의 사업영역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모바일 메신저 ‘라인’의 가입자 3억 명 돌파 기념행사장에서 그는 그간의 성공에 대해 “이게 꿈이 아닐까, 깨고 나면 꿈인 것을 알고 다시 괴로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7년 3월에 네이버 이사장직을 내려놓고 공식적으로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네이버 GIO를 맡고 있다. 2020년부터는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라인과 야후 재팬의 합작법인인 A홀딩스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일본에서는 포털 사이트 1위가 야후 재팬, 메신저 1위는 이해진 책임이 만든 라인이다.⊙
정혜연 기자
김정주
‘한국의 디즈니’를 꿈꾼 온라인 게임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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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김정주 창업주는 1994년에 대학 동기 송재경씨와 넥슨을 창업했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1996년, 그는 세계 최초의 그래픽 다중접속 역할수행 게임 ‘바람의 나라’를 출시해 성공을 거뒀다. 이후 넥슨은 ‘크레이지아케이드’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온라인 게임 시대를 열었다. 김정주 창업주는 모바일 게임 분야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했고, 넥슨은 2020년 국내 게임업계 최초로 연(年)매출 3조원을 돌파했다. 김 창업주는 자서전 《플레이》(2015년)에서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내는 디즈니의 100분의 1이라도 따라가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정주 창업주는 넥슨을 창업했지만 경영 일선에는 잘 나서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그는 2016년에 진경준 전 검사장이 김정주 창업주로부터 내부 정보와 주식 매입 자금을 받아 수백억원대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이른바 ‘진경준 게이트’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대법원의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로 혐의를 벗었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넥슨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2018년에는 넥슨재단을 설립해 본격적인 기부 활동을 시작했다. 오랜 기간 우울증 치료를 받던 끝에 2022년에 미국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정혜연 기자
이재용
삼성과 한국의 미래를 짊어진 삼성전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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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삼성전자 |
이재용 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 회장은 최근 부진에 시달리는 삼성전자 반도체를 본궤도에 올려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4년 하반기에 완료될 것으로 점쳐졌던 엔비디아의 5세대 HMB3E의 인증이 늦어지면서 첨단 메모리 반도체에서 뒤처졌고, 범용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도 중국의 추격으로 ‘초격차’ 위상이 흔들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회장은 2025년 벽두 삼성전자 정기 사장단 인사에서 기존 경영진을 물갈이하며 기술력 강화와 조직 분위기 일신을 통해 반도체 위기 극복에 주력한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룹의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는 자동차 전장 부품, 로봇, 의료, 친환경 공조 등을 꼽았다. 작년 6월에는 크리스 티아노 아몬 퀄컴 사장,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 앤디 재시 아마존 CEO와 잇따라 만나는 등 인공지능 분야로의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선대(先代)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은 오너 3세 경영자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31년 만에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취임식도 취임사도 없었을 정도로, 평소 굉장히 소탈하다는 평을 받는다. 수행원 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고, 손수 승용차를 몰고 외부인을 만나고, 사업장을 방문할 때는 스스럼없이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2022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는 차기 전략 제품 보고를 임원이 아닌 MZ세대 직원으로부터 받는 등, 이 회장의 스타일은 ‘합리적 실용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혜연 기자
정의선
‘글로벌 톱티어’로 도약 이끈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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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현대자동차 |
현대자동차그룹은 2022년에 처음으로 연간 글로벌 판매 3위에 오른 이래 토요타, 폴크스바겐과 함께 줄곧 톱3를 유지하고 있다. 외형뿐만 아니라 내실에서도 근본적인 성장을 계속해, 현대차·기아는 2024년 상반기에 합산 매출액 139조4599억원, 영업이익 14조9059억원으로 반기 기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같은 해 두 회사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 3대 신용평가사 S&P, 무디스, 피치 모두로부터 신용등급 A를 받았다. 3사 모두에서 신용등급 A를 받은 곳은 현대차, 기아 외에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 일본의 토요타와 혼다뿐이다.
정의선 회장은 취임사와 4번의 신년사에서 ‘고객’이라는 단어를 38번이나 사용했을 정도로 ‘고객 중심 경영’을 강조한다. 현대차·기아가 전기차, 하이브리드차, 수소전기차 등 친환경차 부문에서 글로벌 위상을 갖게 된 데는 정의선 회장의 의지가 컸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는 정 회장이 적극 주도한 전기차 퍼스트무버 전략의 출발점이다.
선친 정몽구 회장을 이어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있는 정의선 회장은 한국 양궁이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그룹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협회를 투명하고 치밀하게 운영하며 올림픽에서 금빛 행진을 이어가 국민과 언론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정혜연 기자
사회/언론
조갑제
“이념은 팩트를 이기지 못한다” 탐사보도의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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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조갑제(趙甲濟·1945~ ) 조갑제닷컴 대표가 후배 기자들에게 자주 하는 이 말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준다. 서슬 퍼렇던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포항 석유’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 고초를 겪었던 것도, 1980년 5·18 당시 광주(光州)에 몰래 들어가 취재했다가 해직당한 것도 ‘사실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1983년 《월간조선》 기자가 된 조갑제는 탐사보도(investigative journalism) 영역을 개척하면서 시사월간지 전성시대를 열었다. ‘한국 내 CIA’ ‘KAL기 격추 사건의 진실’ ‘박정희 시대의 정치 비화(祕話)’ 등은 이 시절 그가 생산한 특종의 극히 일부다. 그는 특종 기자가 되는 비결로 ‘호기심’과 ‘명예욕’을 꼽곤 한다.
젊은 시절 권위주의 정권에 비판적이던 조갑제는 1990년대 초 이후 박정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를 되살리는 데 앞장서게 됐다. 북한 체제의 실체를 알게 되고부터는 김씨 왕조는 물론 그들을 두둔하는 국내 좌파 세력, 좌파 정권과 싸웠다. 그 연장선 상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우파 운동에도 깊이 간여했다. 반면에 그가 일부 우파들이 몰입하고 있는 5·18 북한군 개입설이나 부정선거 주장 등에 반대하는 것은 그런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다.
‘논객 조갑제’에 대해서는 고개를 흔드는 소위 진보 인사 중에서도 ‘기자 조갑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994년 이후 《시사저널》이 매년 선정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에 10차례 이상 이름을 올렸다.⊙
배진영 기자
조영래
산업화의 그늘에 가린 노동·여성 문제 천착한 ‘인권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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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영래 변호사 25주기 기념전 |
1980년 중반 어느 날, 여성·노동·인권 변호에 한창이던 조영래(趙英來·1947~ 1990) 변호사가 자신을 찾아온 《조선일보》 함영준 기자에게 한 말이다. 훗날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을 지낸 함 기자는 조 변호사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유신 시절 수감되고 고문당하고 핍박받았지만 누구를 증오하거나 독설을 내뱉지 않았다. 오래 참고 성내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온유함과 겸손함을 갖고 있었다.”
대구 출신의 조영래 변호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명문(名門) 경기중·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법대에 들어갔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남들처럼 대우받는 법조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협착하고 험준한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에겐 ‘실천적 정의(正義)’라는 삶의 원칙이 있었다.
1970년대 유신 시절은 구속과 수감, 석방, 수배로 점철됐다. 조영래는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복역했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도피 생활을 했다. 평탄하지 않은 삶은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서울 망원동 수재(水災) 집단소송 사건,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사건), 부천경찰서 성(性)고문 사건 등을 맡았다. 1970년대 후반 써놓았던 《전태일평전》을 이 무렵 출간했다.
조영래는 1990년 나이 마흔셋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인들은 ‘무엇이 이토록 빨리 조영래를 우리에게서 앗아갔는가’라며 추모했다. 그의 삶은 폭력과 독설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노동·인권 운동’에 조용한 울림을 준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전태일
제 몸 태워 노동운동史 새롭게 쓴 ‘아름다운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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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태일기념사업회 |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1950년 6·25 발발 3개월 전, 가족의 품에 안겨 부산으로 이사했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소규모 양복 제조업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으나 사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전쟁 이후 1954년 가족은 상경(上京), 천막촌을 전전했다. 어린 전태일은 신문팔이와 빈병 줍기, 성냥팔이로 끼니를 해결했다. 1965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견습공(시다)으로 임금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이듬해 시장 내 다른 업체에 미싱사 자리를 얻었다. 이때 고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다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그는 어린 여공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 공부를 포기하고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했다. 평화시장의 ‘청계피복노동조합’도 그가 만들었다.
1969년 11월, 전태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작성한다. 그로부터 1년 후 1970년 11월 13일, 분신(焚身)으로 새벽하늘의 별이 됐다. 죽음을 앞둔 그는 어머니(이소선·1929~2011)에게 “내가 뚫어놓은 작은 바늘구멍을 넓혀 벽을 허물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후 41년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전태일의 삶은 산업화 과정의 한국 사회에 노동 환경 개선과 노동권 보장 및 노동자 권리 강화의 초석을 깔았다. 서울 종로 청계천변 삼일교와 수표교 중간 지점에 ‘아름다운청년전태일기념관’이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최열
환경운동의 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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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20대 청년 최열은 1975년 ‘명동성당7인위원회’ 사건(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에 공해(公害) 문제의 심각성을 접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것도 지적(知的) 바탕이 됐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은 산업화·근대화의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환경 문제가 뒤따랐다. ‘경제 성장 제일주의’ 시대여서 산업단지 인근 주민들은 피해를 봐도 보상은커녕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최열은 옥중에서 공해 관련 전문서적 250여 권을 읽으며 전문가로 변해 갔다. 출소 후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에 나섰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시민들의 사회 참여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대중적인 환경운동 시대가 열렸다. 이때 최열은 여러 단체 지도들과 함께 ‘환경운동연합’을 주도했다. 2002년 설립한 환경재단은 우리나라 최초 환경 전문 공익재단이다. 최열은 ‘그린리더’ 개념을 만들었다. 그린리더란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뛰어넘어 혁신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을 말한다.
환경운동가 최열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다. 최열은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환경부 배출 기준치의 페놀이 든 어항 속 금붕어가 4시간이 채 안 돼 죽는다는 실험 결과를 공개했다. 페놀 사건은 대기업도 환경 문제를 등한시하면 망할 수 있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줬다. 최열은 환경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만 환경상’을 수상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박원순
시민사회운동 시대의 막을 연 ‘소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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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박원순 변호사는 2002년 건강한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아름다운재단’을 만들었고, 2006년에는 사회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기부·참여·나눔’ ‘소액주주 권리 찾기’ ‘정치인 낙선운동’ 등을 펼치며 ‘소셜(사회) 디자이너’의 삶을 살던 그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2014년과 2018년에 연이어 선출되어 ‘최장수 서울시장’을 기록하며 차기 대권 주자 반열에까지 올랐다. 그러다 2020년 전직 여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1993년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으로 ‘여성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우 조교 사건은 국내 최초의 공적(公的) 성희롱 문제로,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법적 문제를 넘어 사회·문화 차원의 성희롱 예방과 성평등 인식 확산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손석희
신문에서 방송으로 ‘언론 권력’ 이동 보여주는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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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국회사진기자단 |
손석희는 국민대를 졸업하고 1984년 아나운서로 MBC에 들어갔다. 직전에 조선일보 업무직 사원으로 잠시 일했다. 준수한 외모에 깔끔한 목소리, 방송인으로서의 조건을 가진 그로서는 신문 판매보다 아나운서 직군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지인 일부는 ‘노력하는 손석희’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소신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손석희는 2000년부터 13년간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진행했다. 종편 채널 시대가 열리며 JTBC 총괄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뉴스9〉를 직접 진행했다. 그는 단순한 사건 전달보다 문제의식 제기, 사회적 담론 형성을 선호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상처럼 떠받들어지기도 했지만, 편파적이고 왜곡을 일삼는 언론인으로 비치기도 했다. 2019년에는 프리랜서 기자 폭행 논란으로 이미지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이래저래 대한민국 언론사(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손석희. 이에 대해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 이전 ‘레거시 미디어’ 시대에서 출발해 다음 시대까지 방송 활동을 한 ‘방송쟁이’였다는 것이다. 그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미디어는 파편화하고 진실은 개인화하는 이른바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언론인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고단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김영란
논란의 ‘김영란法’, 그래도 투명 사회로 가는 길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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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이 가액이 물가 상승에 뒤처진다는 점과 부정 청탁의 개념이 모호한 점, 법 적용 대상을 정하는 기준에 의문이 제기되는 점 등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이 법에 정해진 가액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이른바 ‘김영란 세트’가 나온 걸 보면 공익성이 강한 직역 전반에 이전보다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된 건 확실하다. 김 전 대법관도 “청탁금지법은 처벌 조항이라기보다는 늘 익숙하게 하던 행동들에 대해 ‘이거 괜찮은가?’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행동 규범에 가깝다”고 밝힌 바 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4년 여성으로서 사상 첫 대법관에 임명된 그는 업무를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재판 기록을 꼼꼼히 읽어요. 그래야 재판정에서 심층적인 질문을 할 수 있거든요. 재판관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해요. 서류를 읽고, 원고와 피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흑백을 가리는 게 재판관이잖아요.”⊙
김광주 기자
이승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학살당한 반공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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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공비 침투 등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이 극에 달했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이승복은 ‘반공의 상징’이 됐다. 전국의 초등학교에 그의 동상이 섰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승복의 기억은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1998년 8월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언론 개혁 관련 전시회를 열면서 1968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승복 보도를 ‘정부 수립 이후 오보(誤報) 50선(選)’의 하나로 선정했다. 같은 해 9월 MBC TV 〈PD수첩〉에서 다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이승복 오보설’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대법원은 2006년 11월 판결을 통해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외침이 있었고 ▲사건 다음날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기사를 송고한 것을 모두 사실로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승복 오보설’을 진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좌파 교육감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이승복 동상들을 철거해 이승복의 흔적을 지우려 들고 있다.⊙
배진영 기자
이태석
‘톤즈의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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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한국이 낳은 슈바이처’ 이태석은 아프리카 극빈국 남(南)수단의 톤즈에서 의사이자 교육자로 봉사 활동을 하다 암으로 선종(善終)한, 천주교 살라시오회 사제다. 말라리아, 콜레라, 한센병이 창궐하는 곳에서 출혈이 멎지 않는 자연유산 산모, 결핵으로 복부가 부풀어오른 소년,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었다.
낮은 처마의 ‘움막 진료소’를 방 12개짜리 번듯한 진료소로 변화시켰다. 현지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35인 규모의 브라스밴드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톤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생전 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수단에서는 아침에 눈 떠서 잘 때까지 무조건 퍼줘야 합니다. 진이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란 생각에 또 하루를 시작합니다.”
의대를 나온 후 다시 수도회에 들어가 로마 교황청 유학 중 1999년 선교 체험에 나섰다가 톤즈를 처음 접한 이 신부는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내 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했다”고 한다. 2001년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이끌리듯 톤즈로 달려갔다. 세례명 ‘존(요한)’에서 유래한 애칭 ‘쫄리’ 신부로 불린 그는 희망이 없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숭고한 희망의 불빛을 밝힌 전령사가 되었다.⊙
김태완 기자
‘강철’ 김영환
從北의 씨앗 뿌린 ‘주사파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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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주사파의 대부(代父)’ 김영환은 1991년 잠수정을 타고 두 차례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그를 ‘김 동지’라고 부르면서 공작금 40만 달러를 줬지만, 정작 김영환은 ‘주체사상의 기본 개념도 잘 모르는’ 김일성에 실망했다. 결국 김영환은 1997년 자신이 만든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해체하고, 이듬해 전향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수 차례 “〈강철서신〉은 북한 단파방송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면서 “나의 치명적인 오류는 친북적인 분위기가 운동권에 널리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2014년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심판 때는 헌법재판소에 나가 ‘통진당은 종북(從北) 세력’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운동권은 물론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종북 세력이 강고하게 똬리를 튼 다음이었다. 이석기의 RO(혁명조직)와 통진당도 김영환이 만든 민혁당의 잔존 세력이었다.
전향 후 김영환은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이 과정에서 2012년에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40여 일간 구금되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북한민주화운동에 대해, 과거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남조선 혁명’을 하려고 했던 그가 지금은 자신이 이해한 주체사상으로 ‘북조선 혁명’을 하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배진영 기자
오연호
인터넷 신문 시대를 연 《오마이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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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정보통신기술(IT) 발전으로 사이버 공간이 한창 확장하던 2000년, 신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가 내세운 슬로건이다. 그러자 기성 언론계 일부에선 “누가 그래?” “훈련받지 않은 시민이 기자라니 말도 안 돼”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 신문도 이제 한물간 매체로 치부된다. 유튜브를 비롯해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 등 다양한 SNS 플랫폼이 콘텐츠(뉴스 포함) 유통·소비 수단으로 등장했다. 놀랍게도 제공자·이용자 모두가 기자이면서 동시에 콘텐츠 소비자가 된 것이다.
그 ‘시작’ 버튼을 좌파 성향 월간지 《말》 출신의 오연호(吳連鎬·1964~ ) 기자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눌렀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그는 “새천년에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자” 새로운 인터넷 신문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오연호는 1995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 언론학을 공부하며 구상한 모든 것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문구에 녹여넣었다. 세계 최초로 ‘시민기자’ 제도를 선보여 시민을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기사 말미에 댓글을 다는 ‘댓글 시스템’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기사 작성 공식도 바꿔버렸다. 기사 형식을 파괴했고, 기존의 ‘뉴스 밸류(news value)’ 기준도 흔들어놨다.
오연호는 ‘20세기 신문 문화’에서 소외당하던 ‘재야 비주류 월간지’ 기자의 한계를 깨고 그들과 철저히 결별하기 위해 뉴스의 생산·유통·소비 문화를 바꾸는 데 일부 성공했다. 하지만 언론의 정치사회적 편향성, 참여 저널리즘의 책임성, 댓글 조작 등 여론 왜곡, 디지털 언론의 상업화 등 한계도 보이고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함운경
‘反美 투쟁’ 선봉에서 ‘종북 좌파 청소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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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전북 군산 출신의 함운경(咸雲炅·1964~ )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운동권 출신 사회 변혁가다.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85년 함운경은 ‘삼민투위(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주도했다. 이 일로 ‘별’을 달았다. 반미(反美) 투쟁의 선봉으로 당시 학생운동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浮上)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출소하자 양김(김대중·김영삼) 진영에서 “함께 일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 무렵 운동권은 주체사상에 깊이 매몰돼 갔다. 함운경은 1989~90년대 초 동유럽 공산·사회주의 정권들이 무너지자 새로운 통일운동을 꾀했다. 1991년 뒤늦게 대학 졸업장을 받은 후 수학 강사로 잠시 일하다 1994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에 참여하고, 이어 1996년 15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관악갑에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落選). 다시 2000년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전북 군산에 출마했고 19~20대 총선에도 도전했으나 역시 당선과는 멀었다. 작년 22대 총선에서는 서울 마포을 지역구에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고배(苦杯)를 마셨다.
1980년대 반미 투쟁의 선봉이 40년이 흐른 지금 ‘운동권 청소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함운경은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으로서 종북 주사파(從北主思派)를 척결하고 반미 통일운동 세력이 민주화운동을 악용해 이익을 사취(詐取)하는 데 경종(警鐘)을 울리고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박종철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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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철 열사 영정사진 |
고문치사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잘 가거라, 할 말이 없다’뿐이었다. 1987년 1월,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이던 박종철(朴鍾哲·1965~1987)은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에 연행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물고문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건 초기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死)로 발표했다. 하지만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의 추가 보도 등으로 고문(拷問) 의혹이 제기됐다. 정부는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을 전격 해임하고 고문 근절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 했다.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권은 ‘4·13 호헌(護憲) 조치’를 발표한다. 민주 진영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한 것이다.
역사는 드라마다. 그해 5월, 재야 운동으로 수형 생활 중이던 이부영(李富榮)이 박종철 사건의 축소·은폐 사실을 알게 된다. 소식은 곧바로 외부 민주 세력에게 전파됐다. 그해 6월 10일, 민주 세력은 당시 여당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그런데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 이한열(李韓烈·1966~1987)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 파편에 맞아 사망한다. 핵폭탄이 터진 격이었다.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 6월 10일, 일반 시민까지 합세한 시위는 항쟁의 시작이었다.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 요구 물결이 폭풍우처럼 불어 닥쳤다. 마침내 정권은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임수경
무단 訪北으로 통일 문제 대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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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1988~89년 사이에 남한 인사의 밀입북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서경원 평민당 의원, 문익환 목사에 이어 스물두 살 임수경까지 평양을 다녀오자 국내에 공안 정국이 조성됐다.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임수경은 곧바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5년형을 선고받고 3년 4개월째 복역하던 중 1992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임수경의 삶은 평안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알아보고 ‘대우’했다.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스스로 “정치적이지 못하다”고 했다. 2016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종북(從北)도 아니고 북한에 관심도 별로 없다”고 했다. ‘89년 평양의 임수경’ 이미지로 인해 일종의 피해의식까지 생겼다고 했다. 요컨대 ‘통일의 꽃’은 그녀의 원죄(原罪)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89년 임수경 방북 사건’은 국내 통일 문제의 대중화를 가져온 시발(始發)이었다. 1980년대 확산한 반미(反美) 세력, 북한 주사파, 그리고 민주화 세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가면서 통일운동이 전개됐다. 임수경의 방북이 역설적으로 폐쇄된 북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는 주장도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이지문
軍 내부 부정 투표 양심선언 ‘공익제보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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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
이지문은 3년간 소송에 매달렸다. 마침내 1995년 대법원으로부터 파면 처분이 부당하다는 최종 판단을 얻어내 중위 계급장을 되찾았다. 이후 공익제보 지원, 내부고발자 보호, 부정선거 감시 등 공익제보 전문가로 활동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2014년 국민권익위원회에 등록된 유일한 공익신고 지원 단체인 ‘한국청렴운동본부’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의 ‘용기’로 당시까지만 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군내 부정 투표와 정치적 중립성 위반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이는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1990년 5월 재벌 비(非)업무용 부동산 현황을 폭로한 이문옥 감사원 감사관, 같은 해 10월 보안사의 민간인 정치 사찰을 터뜨린 윤석양 이병, 1992년 8월 금권·관권 선거를 고발한 한준수 연기군수 등의 공익제보가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부패방지법과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제정됐다. 한 군인의 강등·파면·구속을 가져온 ‘내부 고발 양심선언’이 ‘공익제보’라는 개념으로 발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승구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강철환
북한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세계에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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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수용소 생활의 묘사는 생생하고 참혹하다. 수용소 수감자들이 작업장을 이탈, 손으로 열매를 몰래 따먹었다. 간수들은 손에 물든 산열매의 색이 없어질 때까지 손바닥을 땅에 대고 뛰라고 했다. 손바닥 살갗이 다 벗겨지고 피가 흘러도 멈출 수 없었다. 뱀, 쥐 등 움직이는 것은 모두 잡아먹고 쇠똥을 뒤져 곡식을 골라 먹는 것이 강철환이 전하는 북 정치범 수용소의 일상이다. 공개 고문과 처형은 수시로 벌어진다.
강철환은 수용소에서 10년을 생활하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난 후 필사적으로 탈북해 1992년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는 북한전략센터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있기에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전면 부인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던 북의 태도에 균열이 생겼다. 국제 사회의 관심도 폭증했다. 그가 발화(發火)한 ‘북한인권운동’은 그의 생생한 증언에 힘입어 세계로 퍼졌다.⊙
장원재 ㈜전후70년 생생현대사 TV 대표
이수현
몸을 던진 희생으로 한일 우호의 가교를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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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수현 추모 사이트 캡처 |
벌써 24년 전의 일이다. 도쿄 신주쿠(新宿)구 JR 신오쿠보(新大久保)역. 선로에 취객이 누워 있고,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있었다. 이를 목격한 유학생 이수현(李秀賢·1974~2001)은 주저 없이 선로로 뛰어들었다. 역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혼자 안간힘을 쓰는 동안 열차가 다가왔고, 보다 못한 일본인 사진가 한 명이 그를 도우려 선로로 뛰어들었으나 기적은 없었다. 3명 모두 그 자리에서 숨졌다.
빈소에는 일본 정치인을 비롯한 추모객들이 줄을 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 뛰어드는 이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두고 “이수현씨가 보여준 희생정신으로 일본인들이 정의와 용기에 새롭게 눈뜨게 됐다”고 했다.
1974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수현은 고려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는 부모에게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본과 관계된 일을 하면서 한일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 구축에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한일 양국 시민들이 그 꿈과 뜻을 대신 잇겠다고 나섰다. 한일 간 청소년 교류사업인 ‘아이모(아름다운 청년 이수현 모임)’는 올해로 16년째를 맞이했다. 그의 이름을 딴 장학회도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20일 이수현의 모친 신윤찬씨에게 2024년 추계 외국인 서훈(욱일쌍광장)을 했다. 이씨 부친 이성대(2019년 별세)씨도 지난 2015년 같은 훈장을 받았다.⊙
박지현 기자
이영환
참신한 아이디어로 투쟁하는 북한인권운동의 새로운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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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UN은 ‘전환기 정의’를 ‘한 사회가 과거 역사 속 대규모 잔학행위의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책임을 규명하고, 정의를 세우며, 화해를 이루려는 모든 과정과 메커니즘’으로 규정한다. 이영환 대표는 “전환기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해자 처벌, 피해자 배상과 구제, 기관 개혁이 중요하다”면서도 “항구적으로 중요한 건 다음 세대들의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TJWG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다. 2017년 북한 내 처형지·암매장지 등 인권 탄압 장소를 위성 좌표에 근거해 지도로 만들었다. 당시 《뉴욕타임스》가 ‘그들은 어디에 묻혔을까’라는 제목으로 보도할 정도로 화제가 됐다. 2023년에는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방사성 물질이 주변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정치권의 반응도 뜨거웠다. 현 정부 들어 핵실험장 인근 출신 탈북민에 대한 방사선 피폭 전수조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10월엔 북한의 강제실종 범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심층 조사해 보고서를 펴냈다.
이영환 대표는 지난해 한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도 전환기가 시작돼 현장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집단매장지 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과거 뉘른베르크, 도쿄 전범재판소처럼 평양에도 재판소가 세워져 반(反)인도 범죄를 단죄하고 인권과 정의가 회복될 날이 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세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