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승화 장군이 육사 교장-1군사령관-육군참모총장 시절 3년간 전속부관으로 모셔
⊙ 국방장관에게 전화 걸다가 합수부 수사관들에게 피격… 소장의 1/6 잘라내
⊙ 육군참모총장 부관으로 있으면서 경호휘장 수여 등 차지철의 월권, 경호실-중정 갈등 목격
⊙ “김재규, 차지철이 대통령과의 만찬 통보 전인 16시15분에 정승화 총장 초대… 내란 음모죄 성립 안 돼”
⊙ 육군본부 벙커에서 멍하니 있던 김재규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
⊙ 소대장 시절 연대장이었던 노태우, “무조건 군대 생활 열심히 하라”고 격려
⊙ 5공 시절 감시 속에서 군생활… 군 군수 전산 시스템 개발에 기여해 준장 진급
⊙ 국방장관에게 전화 걸다가 합수부 수사관들에게 피격… 소장의 1/6 잘라내
⊙ 육군참모총장 부관으로 있으면서 경호휘장 수여 등 차지철의 월권, 경호실-중정 갈등 목격
⊙ “김재규, 차지철이 대통령과의 만찬 통보 전인 16시15분에 정승화 총장 초대… 내란 음모죄 성립 안 돼”
⊙ 육군본부 벙커에서 멍하니 있던 김재규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
⊙ 소대장 시절 연대장이었던 노태우, “무조건 군대 생활 열심히 하라”고 격려
⊙ 5공 시절 감시 속에서 군생활… 군 군수 전산 시스템 개발에 기여해 준장 진급
- 사진=조준우

“1층에서 기다리라고 해! 뉴스 보고 내려갈 테니.” 뉴스가 끝나자 정 총장은 1층으로 내려갔다. 이 순간부터의 진행 상황을 정승화씨는 기자(조갑제 기자-편집자 주)에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의 증언을 정리해 본다.
사복한 대령 2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 대령은 국방부조사대장, 다른 대령은 보안사 처장이라고 소개했다(국방부조사대장이라는 대령은 우경윤 대령으로서 당시에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이었고 합수단의 제2국장으로 파견 나가 있었다. 보안사 처장이라고 한 대령은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기자 주).
“그런데 급한 보고가 있다는데 뭔가?”
허 대령이 말했다.
“총장님, 김재규한테서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김재규가 그랬나?”
“네. 참고로 진술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녹음도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녹음기는 준비됐나?”
“아닙니다. 녹음시설이 돼 있는 저희 부대로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이때 나는 퍼뜩 뭔가 오해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재규가 나를 물고 들어갔다고,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나를 오해하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이놈아, 계엄사령관이야! 내가 어떻게 거기로 가겠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같으니. 너희 최규하 대행에게 허가를 받았나?”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왜 연락이 없었나. 어이, 부관! 총리 공관에 전화 걸어! 총리가 안 계시면 국방장관을 찾아서 전화를 연결해 줘!”
이재천 소령은 “예” 하면서 현관 왼쪽에 있는 부관실로 뛰어들어갔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권총 소리였다. 나는 불상사를 막으려고 “사격 중지…” 하고 외쳤다. 공관 경비병과 합수단 수사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두 대령은 나를 양쪽에서 팔짱을 끼더니 “총장님, 갑시다”며 일으켜 세웠다. “그래, 가자!” 내가 일어섰다. 찻잔을 들고 온 당번병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와장창! 현관 창문을 깨고 누가 뛰어들어왔다. M16을 든 곤색 야전잠바 차림의 나이 든 군인이었다. 그는 홀로 뛰어들면서 공포를 몇 방 쏘고는 총구를 내 가슴에 갖다 대 몇 번 쿡쿡 쑤셨다. 총구가 내 뺨을 스쳐갔다.〉(후략)
《월간조선》 1987년 9월호에 실린 조갑제 기자의 〈정승화 증언, 10·26에서 12·12까지〉의 일부다. 정승화(鄭昇和)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전두환(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보낸 수사관들에게 연행되는 장면이다. 대학 시절 이 기사를 읽었을 때의 짜릿한 전율(戰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와 함께 당시 총상을 입었던 ‘정승화 부관 이재천’이라는 이름이 왠지 기억에 남았다.
《현대사 사건 수행 일기》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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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건 수행 일기》 |
〈12·12 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부관이었던 이재천 대령(48·육사 28기)이 별을 단다. 정 총장의 비서들 중 장군으로 진급한 사람은 당시 수석비서관이던 황원탁씨(육사 18기·예비역소장·현 파나마 대사)에 이어 이 대령이 두 번째.
군수정보화 체계 사업을 담당하는 국방부 군수사업관리단장인 이 대령은 26일 발표된 육군 정기 인사에서 준장 진급자로 내정됐다. 79년 12·12 사태 당시 소령에서 만 17년 만이다. 줄곧 군수 분야에만 머물렀던 군수통이며 육군대학·대대장·8사단 연대장이 외도의 전부다. 이 대령은 당시 한남동 총장공관에서 합수부 측이 정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배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지난 10월 말, 서울시내 대형서점을 찾았다가 ‘이재천’이라는 이름을 다시 발견했다. 《현대사 사건 수행 일기 - 대한민국을 뒤흔든 10·26, 12·12 현장 기록》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보니, ‘정승화 부관’ 이재천 장군의 수기였다. 책을 훑어보니 육사 시절부터 썼던 일기를 바탕으로 엮은 책이라고 했다. 10·26 사태와 12·12 사태 당시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1960년대 말~1970년대 말 우리나라의 사회나 군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도, 전두환·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도 세상을 떠나고, 45년 전 12·12 사태의 주역들도 90세 전후인 마당에, 당시를 증언해 주는 기록이 나왔다고 생각하니 반가웠다. 출판사를 통해 이재천(李在千·76) 장군의 연락처를 알아낸 후 11월 5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노태우 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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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생도 시절의 이재천 장군. 사진=이재천 |
“아버지께서 해방 후에 원래 빨갱이 잡는 반공경찰이었는데, 이 때문에 6·25 때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제 고향이 전주 이씨 진남군파 집성촌(集姓村)이었는데, 집안 어르신들께서 아버지께 ‘이러다가 집안 다 망하겠다’며 경찰을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께서는 결국 경찰을 퇴직하고 농사를 지으셨는데, 공직(公職)을 부러워하셨어요.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데다가, 마침 같은 마을 출신 육사 생도가 있었는데, 참 멋있어 보이더군요. 그래서 육사에 진학했지요.”
1972년 육군 소위로 임관한 이재천은 제8사단 21연대 3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연대장은 노태우 대령, 대대장은 이진삼(李鎭三·육사 15기·육군참모총장, 체육청소년부 장관, 제18대 국회의원 역임) 중령이었다.
소대장 근무를 하는 시기 10월 유신(維新)이 선포됐다. 노태우 대령은 연대 간부들에게 비상계엄령 선포의 배경과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투표를 앞두고 미귀(未歸)한 병사를 찾으러 부산까지 다녀온 이재천 소위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집을 방문해 보니 부모님은 아파서 일하지 못하고, 어린 여동생이 봉제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가정환경 아래서도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조국의 분단 현실이 가슴 아팠다. 가난과 병마에 찌든 이들에게 10월 유신은 전혀 무관심 대상이었다. 일각에서는 장기 집권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적어도 내가 본 10월 유신은 뿌리 깊은 가난을 퇴치하기 위한 국력의 조직화에 있는 것 같았다.〉
이듬해에는 소대장 근무를 마친 후 연대 군수(軍需)장교가 됐다. 노태우 연대장은 후배를 자상하게 챙겼다. 사단장 전속부관 요원 선발을 위한 면담을 하고 돌아와 보고하자, 노태우 연대장은 “전속부관은 배울 것이 없다”면서 사단 참모장에게 전화해 그의 선발을 취소해 주었다. ○공수여단 창설 요원으로 예비 차출되었을 때에도 노태우 연대장은 존중해 사단 보임장교에게 연락해 육군본부 인사담당자에게 전달하게 함으로써 차출을 취소시켰다. 덕분에 이재천은 21연대에서 중대장까지 하겠다는 그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정승화 장군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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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5월 17일 정승화 1군사령관(왼쪽)은 전두환 소장(오른쪽)의 1사단을 시찰했다. |
― 정승화 장군은 어떻게 해서 모시게 됐습니까.
“소위 임관 후 전방에서 5년 동안 소대장, 연대 군수장교, 중대장 등 위관 장교 때 거쳐야 할 경력을 다 쌓았습니다. 이후에는 육사로 가서 훈육관이나 교관으로 근무하는 게 육사 출신 위관 장교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사로 발령이 났는데, 교장 전속부관을 하라는 겁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해서 안 하겠다고 했는데, 선배가 ‘전속부관 하면서도 결혼할 수 있다’고 해서 결국 맡았습니다. 그런데 5개월 만에 덜컥 정승화 장군이 제1군사령관으로 전보(轉補)되었습니다.”
― 곁에서 모신 정승화 장군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육사 교장 시절 모실 때는 잘 몰랐는데, 군사령관 시절 모시면서 보니 ‘우리 군에 저런 장군이 계셨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어떤 점이 그렇게 훌륭해 보이던가요.
“군사령관 시절 춘천에서 화천으로 연결되는 통로, 인제-양구를 지나 설악산을 넘어가는 길목 등을 시찰하면서 6·25 때 전투를 하면서 12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이야기를 하시는데, 얼마나 재미있고 실감 나게 하시는지…. 젊은 장교로서 참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1978년 5월 17일 자 일기에는 정승화 사령관을 수행해 서부전선 1사단 지역을 방문한 얘기가 나온다.
〈서부전선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경기도 파주의 1사단 지역을 헬기로 방문하였다. 1사단장 전두환 소장의 브리핑을 받고 임진강 차안(此岸)의 방어진지도 둘러봤다. 전두환 소장은 말로만 듣던 정규 육사 11기생 선두 주자답게 과묵하고 신념에 가득 찬 장군처럼 보였다.… 사령관님은 전두환 소장에게 종심(縱深)이 짧은 사단 작전 지역에서 북괴가 속도전을 펼쳤을 때의 대비책을 중점적으로 질문하여, 현재 연구 중인 북괴 속도전에 대비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전두환 소장을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1년 반 뒤에 전두환 소장에 의해 정승화 장군은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이재천 대위의 몸에는 총알이 박히게 되리라는 것을….
차지철 월권의 증거 ‘대통령 경호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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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준 경호휘장. 뒷면에 ‘대통령 경호실장’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
유신 권력 마지막 해에 벌어진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의 월권(越權)과 권부(權府)의 알력은 신임 육군참모총장을 수행하던 청년 장교의 눈에도 또렷했다.
〈행정장교 윤 대위가 건네준 스케줄에 따르면, 오늘도 차지철 경호실장이 주관하는 경호·경비대책회의에 참석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10시쯤 경호실에서 대통령 경호휘장을 달고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동안 총장님 스케줄에 따라 정복 등 복장을 꼼꼼히 챙겨 왔지만, 그런 휘장을 본 적이 없었다. 총장님에게 상황을 보고드렸더니 책상 서랍을 열어보고는 “여기 있으니 알았다”고 하기에 그냥 나왔다. 이내 차례로 해군총장 전속부관 오 대위와 공군총장 전속부관 김 대위가 전화를 걸어와 “육군총장님도 경호휘장을 달았냐”고 물어서 “달고 가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경호휘장 패용 문제로 한동안 부산을 떤 후 경호실에 도착하였다. 경복궁 담벼락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더니 오늘은 어쩐 일인지 경호실 요원이 차 안에서 대기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에어컨을 켜고 대기하려 하자 시동을 끄라고 하였다. 결국 중정부장 수행원이 나와서 경호실 요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촌극이 발생하였다. (중략) 이날 이후 ‘경호휘장’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이는 대통령이 하사한 것이 아니라 경호실장이 자체 제작한 것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참모총장님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식사 초대 때 달아준 경호휘장이 못마땅했는지 부관인 내게 주지 않고 집무실 책상 서랍 속에 넣어뒀던 것이다. 그 후 3군 참모총장 전속부관들은 카터 미 대통령 방한에 대비해 경호실이 경호·경비대책회의를 열 때마다 이 휘장을 수행 가방 안에 챙겼으나, 각군 참모총장의 복장에는 달지 않았다.
특히 경호·경비대책회의 운영을 두고 구설수가 많았다. 위원장인 경호실장이 서열상 국무위원(내무부 및 법무부 장관), 중정부장보다 하위임에도 상석에 앉아 부하 거느리듯 회의를 운영한다는 것을 우리 수행원까지도 알게 되었다.〉(1979년 5월 15일)
이재천 장군은 아직껏 보관하고 있는 경호휘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잘 보세요. 이게 바로 차지철이 얼마나 월권을 했는지에 대한 증거입니다. 정승화 총장이 10·26 초기에 차지철 실장이 범인이라고 오해했던 것도 이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재규도 정승화 초청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28일에는 김재규 부장이 정승화 총장을 불러 저녁 식사를 베풀었다. 이재천 대위는 이때 처음 중앙정보부장 사무실이 있는 ‘궁정동’에 가보았다. 중정부장 수행비서관인 육사 선배 박흥주(朴興柱·육사 20기) 대령도 처음 보았다. 넉 달 뒤 10·26 사태에 가담했다가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형에 처해진 바로 그 사람이다. 이날 일기에 이 대위는 이렇게 썼다.
〈2주 전 경호실장은 3군 참모총장을 별도로 초청해 휘장을 수여하고 만찬을 베푼 바 있었다. 경호실장과 경쟁하듯이 중정부장도 만찬을 열어 3군 총장을 환대하였다. 초급 장교인 나로서는 3군 참모총장의 위상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렇게 내연(內燃)하던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은 결국 부마(釜馬) 사태를 계기로 폭발한다. 부마 사태로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지 이틀 후인 1979년 10월 20일 이재천 대위는 부산·마산 지역을 순시하는 정승화 총장을 수행했다.
정 총장, 부산 지역 민심 박 대통령에게 보고
〈아침부터 헬기로 부산지구 계엄사령부가 설치된 군수사(군수사령부)를 방문하였다. 오늘은 작전참모부장과 민사군정감이 동행하였는데, 이번 소요 사태는 여느 때와 달리 남포동 번화가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학생시위대에 민간인이 함께 참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총장님은 계엄군 지휘관에게 절대 실탄을 지급하지 말고 공포탄을 휴대하더라도 장전하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대통령의 특별 당부임을 힘주어 말하였다.〉
정승화 총장은 다음 날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산·마산 지역의 상황을 보고했다.
〈총장님은 극비리에 박 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어제 부산 및 창원 지역을 순시하면서 직접 관찰하고 보고받은 소요 사태 상황과 민심을 보고하였다. 총장님은 박 대통령이 5·16 시절 방첩대장 때 대면한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상황 보고를 경청하였다고 전하였다.〉
10·26 하루 전인 10월 25일 자 일기에는 그 전날 참모회의 석상에서 정승화 총장이 훈시한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한 군 간부의 자세〉라는 제목의 참모총장 훈시 제17호를 소개하고 있다.
〈(전략) 육군의 장성급 장교를 비롯한 전 간부는 국가의 안위와 대다수의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진압 시 국민을 탄압하거나 위협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여 더욱 자숙하고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부산·마산 지역에 출동하는 모든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철저한 교육을 시켜 절대 선량한 시민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였다.〉
부마 사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나 군 수뇌부가 사태를 보는 시각이나 분위기는 이듬해 5·18 때와는 사뭇 달랐다는 느낌이 든다.
‘16시15분’
운명의 1979년 10월 26일. 이재천 소령(그해 9월 1일 진급)은 시간 단위로 일기를 기록했다.
〈16시15분, 수석부관실 전화벨이 울렸다. 수석부관이 총장실로 들어가 보고한 후 나오더니 “18시30분까지 총장님을 궁정동 중정부장 사무실로 모셔라”라고 하면서 “궁정동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안다고 답한 뒤, 공관 근무병 김 병장에게 전화를 걸어 외출 준비를 지시하고 운전기사 장광식 상사에게도 연락하였다.〉
이재천 장군은 “이 대목은 김재규가 내란 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기 위해 정승화 총장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합동수사본부는 1979년 10월 28일, 10·26 사건 중간 발표를 통해 차지철 경호실장이 대통령과 저녁 식사를 하겠다고 김재규 부장에게 연락한 시간이 10월 26일 16시30분이고, 18시20분부터 만찬이 시작됐다고 했어요. 그런데 참모총장 수석부관 황원탁(黃源卓·육사 18기·육군소장 예편, 외교안보수석비서관·주독대사 역임) 대령이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시각은 16시15분입니다. 황 대령은 총장님께 전화를 연결한 후 나에게 18시30분까지 궁정동으로 모시라고 했어요. 이러한 사실은 10·26 사건 발생 직후 10월 27일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의 초동 수사를 지휘한 백동림 수사1국장의 저서 《멍청한 군상들》에도 분명하게 나옵니다.
김재규 부장이 대통령과의 저녁 식사 사실을 알고 정승화 총장을 초대했다면 내란 목적 공모죄가 형성되지만, 정 총장을 초대한 다음에 대통령과의 식사를 통보받았다면 정 총장과의 공모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박흥주, “이 소령, 안으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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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로 군사재판정에 선 박흥주 대령. 사진=조선DB |
이재천 소령은 20시10분경 총장 공관 휴대용 이동식 전화기로 근무병으로부터 차규헌 수도군단장이 정승화 총장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승화 총장이 식사 중 서울에서도 학생 시위가 발생해 육군본부로 이동한 것이라고 판단한 이 소령은 정승화 총장의 차를 타고 궁정동을 떠나 20시40분 육군본부 벙커 총장 집무실에 도착했다.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박흥주 대령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김치열(金致烈) 법무부 장관, 구자춘(具滋春) 내무부 장관 등 국무위원들이 속속 육본 벙커에 도착하고 있던 21시30분, 이재천 소령은 박흥주 대령을 발견했다.
〈벙커 안이 복잡하여 나를 비롯한 수행원들은 집무실 밖 통로로 나와 있었다. 좁은 통로에서 중정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을 발견하고 “선배님,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나도 모른다”라고 하며 멍하니 서 있기만 하였다. 이때야 비로소 중정부장은 자신의 승용차로 총장과 함께 와서 참모총장 집무실의 거실에, 박흥주 수행비서관은 총장 집무실 밖 통로에, 경호원은 벙커 입구 밖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23시15분. 총장님이 국방부 장관실로 들어갔다.… 장관실 복도 벽 쪽에서 중정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이 보이기에 가까이 가서 “무슨 일이냐?”고 또 물었지만, 묵묵부답으로 멍하니 서 있기만 하였다.〉
이재천 장군은 “이러한 정황은 당시 김재규 부장이 내란 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는 10·26 사태가 일어난 이후, 20시10분경 정승화 총장이 육본 벙커 상황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육본 벙커로 돌아와 20시40분경부터 27일 새벽 4시에 비상계엄령을 발령할 때까지 정승화 총장을 근접 수행했습니다. 이때 내가 목격한 김재규 부장은 육본 벙커에서 체포될 때까지 총장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을 위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행한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과 경호원에게도 어떤 무력 사용을 지시하지 않았어요. 김재규 부장이 군령권(軍令權)을 쥔 참모총장을 사전에 불러내 내란 목적으로 대통령을 시해했다거나, 정승화 총장이 그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합수부 수사관도 “총장께서 나라를 구하였다”
10월 26일 23시30분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김재규 중정부장이 범인이라는 말을 들은 정승화 총장은 노재현(盧載鉉) 국방부 장관과 의논한 후 김진기 육군헌병감에게 김재규를 체포해 보안사로 넘기도록 조치했다. 국방부에서 육본 벙커로 가는 지하 통로에서 정승화 총장은 “이럴 수가 있느냐?”고 중얼거렸지만, 이재천 소령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내 정승화 총장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정 총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을 범인으로 여기고 수경사 병력으로 하여금 청와대를 원거리 포위하게 했던 일, 9공수여단과 20사단 병력 출동 명령을 내렸다가 중지시킨 일, 김재규를 체포하도록 한 일도 몰랐다.
이재천 장군은 “국가 권력 공백 8시간 동안 가장 가까이서 그림자처럼 수행했던 부관조차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위기 상황을 조치한 총장님의 냉철함과 침착함에 감격했다”고 술회(述懷)했다. 이 장군은 “이후 한동안 군 지휘부, 국무위원, 언론 등에서도 정승화 총장이 위기 시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 나라를 구했다고 극찬했다”면서 “이는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10월 29일 자 일기를 보자.
〈저녁 무렵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이○○ 수사관 외 한 명이 참모총장 집무실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과정에 관해 총장님을 조사하였다. 조사를 마치고 총장실 수석부관실에서 육사 18기 동기생인 수석부관 황 대령을 만난 이 수사관은 “총장께서 국가 권력 공백 8시간 동안 국가 위기를 침착하게 잘 처리하시어 나라를 구하였다”고 극찬하였다. 나는 이 수사관의 소감 일성(一聲)을 분명하게 들었다.〉
11월 7일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10·26 사태 전모를 발표했다. 그날 이재천의 일기는 이렇다.
〈사건 발생 동기와 과정, 그리고 현장 요도를 보는 순간, 그날 저녁 중정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의 모습과 행동이 주마등처럼 오버랩되었다. 지난 5~6월, 카터 대통령 방한에 대비한 경호·경비대책회의 때 보여준 박흥주 대령의 경호실에 대한 불만, 10·26 사건이 일어난 저녁에 육본 벙커 통로에서의 행동, 체포 직전인 23시경 국방부 장관실 복도에서의 행동 등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납득되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군인이 직속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시해에 가담한다는 것 또한 이해되지 않았고, 시해 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던 박흥주 대령의 그날 저녁 행동을 떠올렸을 때 거사 계획을 사전 모의하였다는 발표가 믿기지 않았다.〉
“軍이 다시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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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는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군 지휘관들. 맨 왼쪽이 이재천 부관. |
하지만 18년간 이 나라를 통치했던 절대권력이 사라진 진공(眞空) 상태는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18시30분에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개최한 군 수뇌부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삼청동 공관으로 갔다. 오늘도 수행비서관들이 모여 있어 인사를 나눴는데, 한 수행비서관이 나에게 “계엄사령관이 군내의 정치군인들을 축출하고 각종 부조리를 척결하는 등 사회 정화 활동을 더욱더 강하게 해야 한다”라고 주문하였다. 그러나 나는 “총장님이 계엄사령관이지만, 정치인은 아니다”라고 응수하였다.〉(1979년 11월 21일)
〈오찬 후 공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엊그제 삼청동 공관 만찬에 수행했던 수행비서관의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총장님은 화를 내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옮긴다고 역정을 냈다. 공관에 도착해서도 “젊은이들이 헌법이 정한 절차대로 따라야지. 또다시 군인을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우리 군인도 다시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꾸중하였다.〉(1979년 11월 24일)
“공관 경비병 사격 주장은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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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천 장군이 12·12 사태 당일 입고 있었던 옷. 작은 총탄 구멍이 나 있다. |
“전화를 걸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있을 때 근거리에서 권총 피격을 당했기 때문에 복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도 머리를 얻어맞은 후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일어나려는데 밖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알이 쏟아져 들어왔다. “총 쏘지 마라!”는 정승화 총장의 목소리, 차량 문을 ‘꽝’ 하고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군부는 정승화 총장이 부관에게 고함을 지르자 공관 경비병과 수사관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발표했지만, 거짓입니다. 나는 부관 방에서 최초로 피격된 상태였으며, 연행하러 온 공관 내의 수사관과 공관 밖 지원 수사관의 쌍방 사격이 유혈 사태의 원인이었습니다. 공관에서 실탄이 장전되지 않은 권총을 차고 있었던 나와 김인선 경호장교는 애초에 선제(先制)사격을 할 수 없었습니다.”
10·26 당시 중정 직원들이 경호실 경호원들을 확인 사살했던 것이 생각난 이재천 소령은 응접실 바(Bar)로 기어가 그곳에 있는 전화기로 육본 상황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안사 정보처장과 육군 범죄수사단장이 총장님을 납치하였으며, 차량은 슈퍼살롱”이라고 신고했다. 이어 그는 육본 상황실에 전화를 걸었다. 윤성민(尹誠敏·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역임) 육군참모차장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재차 상황을 설명하고 병력을 출동시키고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시계를 보니 19시50분이었다. 20시에 그는 해군 제2차장 공관 담장을 넘어 맨발로 순천향병원으로 걸어가 의식을 잃었다.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제1군사령부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육본 의무실장 진춘조 소령(건국대 민중병원장 역임)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때가 21시50분이었다.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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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참모총장 공관 부관실. 이재천 장군은 12·12 당일 이 방에서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다가 피격당했다. |
“10·26 때 경호실 경호원들이나, 박흥주 대령 등 관련자들은 다 죽었잖아요? 정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어요. 그 후 저는 한 번도 바가지를 긁지 않았어요.”
12월 15일 만난 진춘조 소령은 12·12 사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부상과 수술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권총 한 발이 간(肝)을 관통해 소장(小腸)에 박혔는데, 파열된 간을 꿰매고 소장의 6분의 1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했다”고 했다. 김 대위는 총알 네 발 중 두 발은 다리를 관통했으나, 꼬리뼈 부분의 다리 쪽과 얼굴에 박힌 총알 한 발씩은 수술로 제거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재천 장군은 “김인선 대위는 그 후 대령까지 진급했다가 예편했다”면서 “요즘 인지 능력에 장애가 와서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얼굴에 박힌 총알의 납 성분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엉망진창이 된 장기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극심한 통증이 왔다. “빨리 나아서 퇴원하고 싶으면 1층부터 5층까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뛰어다니라”는 군의관의 권고에 고통을 참고 운동을 했다. 12월 22일 아내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듬해 1월 7일 이재천 소령은 서울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 대공분실에 수감됐다. 이곳에서 그는 12·12 사태 때 합수부 반대편에 섰던 장군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을 보면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의 전속부관으로서 상황 판단을 잘못해서 역사적 사건의 원인이 됐다”는 극심한 자괴감(自愧感)에 빠지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수감 기간 중 12·12 당일 상황에 대한 조사는 없었다.
“수사관은 10·26 당시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던 박흥주 대령의 군인 정신에 대해 좋게 말하더군요. 순간 합수부 수사관들이 우리에게 총을 쏜 것도 상관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에 의한, 불가피한 행위라고 정당화하기 위해 이러는구나 싶더군요.”
석방, 그리고 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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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3월 13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1군단 지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정승화 총장 왼쪽에 노태우 9사단장의 모습이 보인다. |
다음 날 육군본부 총장실 담당 보안반장이 그를 찾아왔다. 21연대 시절 연대를 담당하는 보안부대 장교였던 그는 “선배들 모두 이 소령의 군인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서 “정치적 시국 사건의 당사자이므로 입 다물고 오로지 군 복무에만 전념하라”고 말했다. 그날 이재천 소령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해 2월 12일 육군대학 입교 명령을 받은 이재천 소령은 한 달 후 진해로 이사했다.
― 5공 시절 군대 생활은 어땠습니까.
“육대로 내려갔는데,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반응이 세 가지였어요. 하나는 악수는 하면서도 얼굴은 딴 데를 보는 경우, 하나는 악수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간질이는 경우인데, 이건 그런 식으로 내 안부를 묻는 거였어요.”
― 다른 하나는요?
“나를 반갑게 얼싸안으면서 ‘몸은 괜찮으냐? 다친 데 한번 보자’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런 사람은 다음 날 보안대로 불려 가서 ‘이재천이하고 무슨 얘기했냐?’고 추궁당한 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어요.”
‘국난극복 기장’의 아이러니
― 특히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면.
“5공 정부 출범 직후에 10·26에서 5공 출범 사이에 복무했던 군인들에게 ‘국난극복 기장(記章)’이라는 것을 줬어요. 기장 수여증에 ‘소령 이재천은 국난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였으므로 기장을 수여한다’고 되어 있는데, ‘내가 피해자인데 그런 걸 헤아리지도 않고 나한테 이런 걸 주나?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고, 참 아이러니하더군요.
육대 교관으로 있으면서 자료 수집차 모교인 육사를 찾아갔더니, 육사 보안반 사람이 나와 있더군요. ‘아, 나는 돌아다니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낚시를 다녔어요.”
― 진급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나요.
“결국 중령 진급에서 탈락했는데, 딱 세 사람이었어요. 다른 두 사람은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이 된 당시 군부 실세에게 대들었던 사람과 김재규의 인척이었던 사람이었죠.”
― 많이 힘들었겠네요.
“21연대 시절 알게 된 보안부대 장교를 찾아가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고 물었죠. 탁 까놓고 얘기하더군요. ‘어디 가서 사람, 특히 군대 외부 사람이나 언론인 만나지 말고, 낚시나 다니면서 입 다물고 살라’고. 2년 후인 1984년에 ‘이번에도 진급시켜 주지 않으면 제대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중령 진급을 시켜주더군요.”
― 그래도 초임 소대장을 했던 21연대장도 했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합수부 수사관들의 선제 총격으로 부상을 당한 것이, 5공 정권의 정당성과도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통제하기 위해 군에 머물도록 했던 것 같기도 해요. 하여튼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것이 내 운명이구나. 내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정승화 총장님도 늘 ‘군인은 군인다워야지, 잡생각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정승화 장군은 진정한 군인의 길 걸은 분”
― 정승화 장군은 자주 찾아뵈었나요.
“내 처지도 그렇고, 총장님도 그걸 아시니까, 5공 때는 뵙지 못했어요. 대신 1군 사령부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진춘조 군의관이 나와 총장님 사이에서 소식을 전해줬죠. 대령 진급했을 때와 연대장 마쳤을 때, 총장님이 밥을 사주셨어요.”
― 초임 장교 시절 연대장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12·12 주도자 중 하나였다는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그래도 저한테는 ‘연대장님’이었어요. 대대장님(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이나 21연대 시절 보안부대 장교들이 종종 연대장님 말씀이라면서 ‘이재천이 너는 무조건 군대 생활 열심히 해라’고 전하곤 했어요. 그런 분들 덕분에 군대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결국 저를 알아준 이들은 8사단 21연대였어요.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중요해요.”
군에 남은 육군 장교 이재천은 자신이 일할 분야를 찾아냈다. 군수 전산 시스템 구축이었다. ‘부하들은 모르고, 상관들은 싫어하는 일’을 열심히 했더니,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결국 별까지 달았다. 2002년 전역 후에는 군인공제회 C&C 사장으로 부임했다. 이재천 장군이 이 시절 업적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전역증과 체크카드 기능 등을 담은 ‘나라사랑카드’다. 2010년에는 고향 경주로 귀향해 군 복무 중 쌓은 시스템 분석 및 설계 재능으로 고향 마을 재개발 사업 등을 했다.
― 정승화 장군과의 인연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분을 모셨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고통을 받았지만, 그분을 모시면서 배운 지식과 삶의 방식을 존중합니다. 그분은 정말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걸은 분이었습니다. 사실 12·12 사태가 일어난 것도 그분이 1979년 10월 26일부터 12월 12일까지 너무나도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고, 신군부는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