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네상스 시대를 두고는 미켈란젤로를, 20·21세기엔 백남준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 브룬 전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 관장의 평가
⊙ 3000평 대지 위에 자리했던 창신동 ‘큰대문집’에서 ‘재벌집 막내아들’로 자란 백남준
⊙ 백남준이 고국에서 저평가되는 세 가지 이유… 유족과 한국 미술계의 불화, 비디오아트라는 장르의 특성, 한국인이라는 점
⊙ 인터넷, 스마트폰, 유튜브의 출현 예언한 백남준
⊙ 3000평 대지 위에 자리했던 창신동 ‘큰대문집’에서 ‘재벌집 막내아들’로 자란 백남준
⊙ 백남준이 고국에서 저평가되는 세 가지 이유… 유족과 한국 미술계의 불화, 비디오아트라는 장르의 특성, 한국인이라는 점
⊙ 인터넷, 스마트폰, 유튜브의 출현 예언한 백남준
파괴자, 예술가, 무당, 사상가 그리고 예언자. ‘먼저 깨달은 자(先知者)는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명제가 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백남준(白南準·1932~2006년)이다. 하나 그의 흔적이 서울 거리에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창신동에 있는 ‘백남준기념관’이다.
이곳과 관련해 최근 논란이 있었다. ‘일 버리기 사업’이란 다소 해괴한 이유로 폐관 위기에 몰렸었다. 백지숙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시절 결정된 일이었다. 비판 여론이 일어났다. 결론적으로 폐관은 보류됐다.
재벌집 막내아들

2023년 11월 9일 백남준기념관으로 향했다. 동대문역과 동묘앞역 사이 창신동 골목. 아담한 1층짜리 한옥이 보인다. 백남준기념관이다. 백남준이 실제 살던 집은 아니다. 백남준은 서울 서린동에서 태어나 창신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던 ‘큰대문집’은 3000평이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거대 한옥이었다. 큰대문집은 진작 헐렸고, 그 터에 남아 있던 작은 한옥을 서울시가 사들였다. 1960년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을 복원해 기념관으로 꾸몄다. 가파도 프로젝트와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건축가 최욱이 설계를 맡았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관리, 운영 중이다.
대문을 지나니 자그마한 중정 공간이 보이고 김상돈 작가의 작품도 보인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중정에 서서 둘러보니 좁은 공간에 전시실과 카페까지 짜임새 있게 들어서 있다. 없어질 수도 있다 하니 갑자기 귀중하게 느껴진 걸까. 전시물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기는 처음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전시 글엔 백남준의 인생과 철학, 그와 영향을 주고받은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백남준은 1932년 백낙승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백낙승은 조선 시대 ‘재벌’이었다. 태창방직을 경영하며 면포를 만주에 수출해 큰돈을 벌었다. 일제 말기엔 군수업체도 운영했다. 그러다 보니 백남준은 큰대문집에서 부족함이라곤 모르고 자랐다. 그가 1967년에 쓴 수필 〈뉴욕단상(斷想)〉을 보면, ‘어려서 캐딜락을 타보았던들 무슨 소용이요. 이병철의 장남인들 무슨 대수랴’는 문장이 나온다. 큰대문집에는 조선에 단 2대 있던 캐딜락 중 한 대가 있었고, 차 수리공까지 일하고 있었다. 외국 영화, 피아노, LP판 같은 각종 신문물을 아마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가장 풍요롭게 접하며 자랐다. 그야말로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
여권번호 7번
백남준은 수송국민학교와 경성중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다녔다. 1949년, 17세 때 부친을 따라 홍콩으로 건너간다. 당시엔 발급순으로 여권번호가 정해졌는데 백남준 부친의 여권번호가 6번, 백남준의 여권번호가 7번이었다. 한국에서 여섯 번째, 일곱 번째로 여권을 발급받았단 뜻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 미학과를 졸업한 백남준은 1956년 독일로 건너간다.
그러던 중 1961년, 한국에서 5·16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부정축재 기업을 지목해 가산을 몰수했다. 여기에 태창방직이 들어 있었다. 부친 백낙승의 뒤를 이어 백남준의 큰형 백남일이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던 참이었다. 회사를 빼앗긴 후 큰대문집 사람들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성씨는 백에서 하쿠다로 개명해 아예 귀화한다. 백남준 노후, 매니저 역할을 한 장조카 이름이 ‘하쿠다 켄’인 이유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3곳(뮌헨, 프라이부르크, 쾰른)의 대학교를 다니며 음악, 건축, 철학을 공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존 케이지(1912~1992년)를 만난다. 존 케이지는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4분33초’란 곡으로 음악계에 혜성처럼 떠오른 인물이다. (4분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그냥 앉아 있는다.) 그는 훗날 백남준의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행위예술로 넘어간 백남준은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플럭서스는 1960년대 독일에서 시작해 퍼져나간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이다. 백남준을 비롯해 조지 마키우나스, 존 케이지, 오노 요코, 요제프 보이스, 르네 블록, 샬럿 무어먼, 레이 존슨 등이 활동했다.
독일의 ‘마에스트로’
기념관에 독일 시절은 간략히 소개되어 있지만, 독일에서 백남준은 ‘마에스트로’라 불렸다. 독일에서 당대 최고의 예술가를 부르는 칭호다. 백남준이 세상을 떠나고 1주기였던 2007년, 독일 뒤셀도르프시에 다니는 모든 전차버스 옆면에 백남준의 얼굴 사진이 커다랗게 붙었다. 백남준을 독일의 예술가로 여기는 셈이다. 백남준은 1979년부터 1996년까지 뒤셀도르프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독일 출신 전위예술가 알프레드 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는 이렇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세계 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다. 독일은 변방이었다. 1970년대 ‘요제프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아트’를 창안해 독일 미술의 위상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미술 판도를 뒤바꾼,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다.”
뉴욕으로 건너간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1974년 뉴욕 개인전에서 선보인 〈TV부처〉로 전 세계 미술계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돌부처가 맞은편 TV 화면 속 자신을 응시하는 작품인 〈TV 부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77년엔 구보타 시게코(1937~ 2015년)와 결혼한다. 한국엔 그저 백남준의 부인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시게코 역시 행위예술가다. 1965년 여성의 은밀한 부위에 붓을 꽂곤 작품을 그리는 ‘버자이너 페인팅’으로 예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년 1월 1일 드디어 백남준의 세계적인 공연이 열린다. 새해 벽두에 전 세계 동시 송출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를 연결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방송이었다. “조지 오웰 당신은 《1984》에서 TV를 빅브라더가 사람들을 독재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으로 그렸지만, 1984년 세계는 TV를 자유 표현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백남준이 당시 직접 설명한 제작 의도다.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요제프 보이스가 퍼포먼스를 하고, 뉴욕에선 존 케이지가 연주를 시작한다. 배우 이브 몽탕이 노래하며 탭댄스를 추고, 현대무용의 거두 머스 커닝엄과 살바도르 달리가 등장한다. 조지 오웰의 비관적 예언을, 당대 최정상의 영상 콘텐츠로 멋지게 반박한 이 특이한 예술가의 존재를 전 세계가 알아보게 된다.
한국의 KBS도 이 방송을 중계했다. 그 전까지 한국에서 무명이었던 백남준이 고국에 알려진 계기다. 이후 백남준은 〈바이 바이 키플링〉(1986)과 88올림픽을 기념하는 〈손에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1988)를 인공위성 생중계로 발표한다. 인공위성 3부작이다. 최초로 영상으로 세계를 이은 시도 자체로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캐나다의 문화비평가 마셜 매클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말을 남겼다. 백남준은 동시대인들 중 처음으로 그 명제를 예술로 실증한 셈이다. ‘바보상자’로 비난받던 TV를 주체적으로 이용하면 전 세계를 잇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냈다.
세계 미술계는 그가 보여준 새로운 예술에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모던, 뉴욕의 휘트니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파리의 퐁피두 센터, 독일의 갤러리 파르나스, 네덜란드의 스테델릭미술관…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백남준 생전에, 혹은 사후에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역시 백남준 회고전을 연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의 엘리자베스 브룬 전 관장은 “훗날 르네상스 시대를 두고는 미켈란젤로를, 20·21세기엔 백남준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과 한국 미술계 불화
1996년 뇌졸중으로 몸의 왼쪽이 마비된 후에도 백남준의 창작열은 식지 않았다. 2006년 74세로 별세했다. 6개국어(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닌 그는 죽은 후에야 고국에 정착했다. 서울 봉은사에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백남준기념관 전시물을 돌아보다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의 고국은 왜 (서울시의 해명처럼) ‘88㎡(약 27평)’의 작은 기념관마저 가만두려 하지 않는 걸까. 그가 한국에서 저평가되는 이유는 뭘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유족과 한국 미술계의 불화다. 백남준과 시게코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아니 낳지 못했다. 시게코는 결혼 전 걸린 자궁암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백남준의 작품과 수반되는 모든 저작권은 장조카인 하쿠다 켄이 물려받았다. 백남준의 큰형 백남일의 아들이다. 하쿠다 켄은 미국에는 한국 태생의 일본계 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를 졸업했고, 미국에서 어린이 발명 프로그램인 〈패드 박사(Dr. Fad) 쇼〉를 한동안(1988~1994년) 진행했다. 그가 일본에서 들여온 왁키 월워커(Wacky WallWalker)라는 문어 모양의 장난감은 1980년대 미국에서 대유행했다. 2억4000만여 개가 팔렸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앨리 웡이 지난해까지 그의 며느리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삼촌 백남준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그 시절부터 이미 한국인들과 거리를 뒀다고 그 시절 백남준을 알았던 이들은 증언한다. 이유는 뭘까. 일단 하쿠다는 한국어를 못 한다. 사고방식도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 어디쯤이다. 그는 특히 일부 한국 화랑을 비난했다고 한다. 백남준을 때론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지금까지도 한국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있다. 백남준기념관엔 백남준의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다. 유족과의 불화가 배경에 있었다.
위작 논란
내용은 이렇다. 미술계 인사들에게 들어보니, 백남준의 거동이 불편해진 후, 한국에서 작품을 제작한 다음, 추인받는 형식으로 작품 제작이 이뤄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쿠다는 이러한 작품들 중 어떤 작품은 ‘삼촌이 아주 싫어했다’고 주장했다. ‘조악한 작품들이 삼촌의 작품으로 둔갑했다’고도 말했다. 많은 논란이 그렇듯 하쿠다의 주장에도, 그에 반박하는 이들의 주장에도 진실과 오해가 섞여 있을 터다.
당장 백남준 사후에 위작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백남준과 친분이 있었던 모 교수가 국내 백화점에 빌려준 백남준 작품이 2013년 위작 시비에 걸렸다. 작품을 제작한 이가 나서서 ‘내가 만들어준 것’이라 증언했지만 모 교수는 진품이라 주장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진품이라 주장한 작품은 생김새가 민망할 정도로 조악하다.
사실 백남준만이 아니다. 정상급 작가가 위작 논란과 얽히는 일은 잊을 만하면 일어났다. 당장 이중섭, 이우환, 천경자 작가도 자유롭지 않았다. 이우환의 경우는 특이한 게, 작가는 진품이라 주장했는데 위작을 그린 화가가 붙잡혀 자백을 했다. 화랑 대표 등 위조 관계자들은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위작 시비는 언제 또 불거질지 모른다. 백남준에게는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가 없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작가의 ‘전집 도록’을 뜻하는 미술 용어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을 총망라한 작품집이다. 더불어 작가의 작품 세계를 통사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한다. 당연히 들여다볼 만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만 카탈로그 레조네를 가질 수 있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훗날 작품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출판된 후에라도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즉각 수정, 보완하는 이유다. 렘브란트의 카탈로그 레조네는 1921년 제작 당시엔 총 711점을 수록했다. 1968년 판에는 420점을 수록했다. 진품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작품들을 걸러 내서다. 카탈로그 레조네를 제작할 때 작가 본인뿐 아니라 조수, 큐레이터, 미술 평론가 등 다양한 이들의 증언을 참고하는 이유다. 국내 작가 중엔 장욱진, 박서보 작가 정도가 카탈로그 레조네를 잘 정리한 예로 꼽힌다.
백남준은 지금까지도 카탈로그 레조네가 없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2013년 국고 5억원을 지원받아 목록화 사업을 시작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백남준문화재단은 백남준을 기리는 이들이 모인 민간 단체다. 파리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심은록 미술평론가는 “백남준에게 카탈로그 레조네가 없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다”며 “백남준 정도의 작가라면 국가별로 카탈로그 레조네가 있는 게 당연한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백남준의 작품 가격이 명성에 비해 낮게 형성된 데는 카탈로그 레조네가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터다. 백남준의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은 2017년 홍콩 경매에서 팔린 〈수사슴(stag, 1996)〉이다. 59만 달러(수수료 제외, 약 7억8000만원)에 팔렸다. 가격이 예술을 평가하는 절대적 바로미터겠냐마는, 앤디 워홀의 작품(메릴린 먼로 초상화)이 2500억원에 팔린 것과 비교하면 한숨이 나오는 금액이다. 앤디 워홀이 팝아트의 선구자라면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데 말이다.
카탈로그 레조네를 만들려면, 하쿠다 씨와의 관계 개선이 우선이다. 당장 저작권 문제가 걸려 있기도 하지만, 유족과 협의 없이 만들긴 힘들다. 다행히 최근 취임한 박남희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과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 모두 관계 개선에 큰 의지를 보이고 있다.
‘난 한국 문화 수출하는 문화상인’
백남준이 저평가받는 두 번째 이유로 ‘비디오아트’라는 장르가 가진 난점(難點)을 들 수 있다. 박남희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의 얘기를 들어봤다. 백남준 아트센터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경기도 산하 미술관이다. 2008년에 개관했다. 하쿠다가 유일하게 인정한 백남준을 기리는 미술관이다. 백남준기념관에는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이란 부제가, 백남준 아트센터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박 관장의 말이다.
“미디어아트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장소도 확보해야 하고요. 유화 그림을 사는 것과 미디어아트 작품을 사는 건 다르다는 거죠. 특별한 식견과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인이 돈이 있다고 덜컥 들일 수 있는 작품은 아닌 겁니다. 그러니 환금성이라는 부분에서도 고민이 될 테고요.”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다다익선〉도 가동 중단 후 복원까지 3년의 기간이 걸렸다. 수리 방법에도 논란이 일었다. 제작 당시의 부품을 고수할 것인가, 진화한 부품을 도입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결국 LCD 기술을 도입해 수리하는 걸로 결론을 냈다.
누군가에겐 매체의 진화를 알린 선구자의 작품이지만, 다른 이에겐 오래된 TV를 붙여놓은 고물로 보일 수 있단 얘기다.
세 번째 이유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심은록 평론가는 “빌 비올라가 한국인이었다면 사정이 좀 다르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빌 비올라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백남준의 제자다. 백남준이 한국이 아닌 일본이나 독일, 미국 태생이었다면 확실히 그의 위상은 지금과 달랐을 터다.
백남준을 잘 모르는 이는 그가 주로 외국에서 활동하지 않았냐고 말한다. 백남준은 생전에 이미 답변을 남겼다.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합니다. 난 한국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상인이에요.”(1984년 인터뷰에서)
도포 입고 고향 찾아
기념관 게시글에 백남준에게 영향을 준 3명의 스승이 보인다. 백남준은 경기중학교 시절, 철학자 안병욱 선생에게선 국어를, 민족사학자 최관우 선생에게선 한문과 역사를, 영문학자 김진만 선생에게선 영어를 배우며 예술과 인생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도올 김용옥과의 인터뷰(1992)에서 이렇게 말했다.
“날 자꾸 서양에서 다 배운 사람인 줄 아는데, 사실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이미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모두 흡수한 거거든. 우리나라 일제시대 때 한국 예술가들 수준이 당대의 서구라파나 일본의 아방가르드적 수준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우. 난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도 이건우 선생한테서 유학 가기 전에 다 배운 거고. 신재덕 선생이나 이건우 선생 같은 분이 가르쳐주신 수준이나 김순남 선생을 사사한 수준이 내가 독일 가서 작곡가 노릇 할 수 있었던 바탕을 다 만들어주셨던 거거든. 역사를 자꾸 단절적으로 보면 안 돼. 일제시대 때 문화도 말이지, 전통문화, 서구문화 다 높은 수준으로 그대로 가지고 있었거든. 난 그걸 흡수한 거야. 내 속에 가지고 있었던 전통문화와 서양의 아방가르드가 결국 비슷한 거란 것을 내가 나중에 발견한 것일 뿐이지.”
그는 무엇보다 고국을 사랑했다. 1990년 그는 흰 도포를 입고 누이, 유치원 친구 이경희씨와 함께 ‘큰대문집’ 집터를 찾아 나섰다. 그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백남준은 지게에 지구본을 얹고 종로 거리를 지나 집터에 도착한다. 세계를 향해 떠난 그가 40년 후 그 세계를 고향땅으로 가져온다. 비록 그를 기억하고 있지 않은 고향이긴 하지만.
《삼국유사》와 샤머니즘
그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무척 좋아했다. “《삼국유사》는 인간의 판타지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한국의 샤머니즘과는 하나가 됐다. 시게코가 쓴 책 《내 사랑 백남준》에는 백남준과 시게코가 한국의 굿을 두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남준이 말한다. “일본의 선(禪)도 좋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에 비하면 무척 따분하지.” 시게코가 반문한다. “둘 다 각자의 이론과 배경을 가진 철학인데 위아래가 어디 있어요.”
다시 백남준이 말한다. “절대 아냐! 한국 샤먼이 훨씬 창의적이지.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거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어릴 적 큰대문집에서 굿판을 벌이곤 했던 ‘애꾸무당’을 바라보던 아이는 훗날 ‘전자 무당’이 된다.
도올은 1992년 백남준을 만났다. 그 감상을 《석도화론》에 남겼다. 그해 백남준은 서울을 찾아 문예회관에서 무용가 김현자와 합동 퍼포먼스를 했다. 당시 한국의 경직된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백남준은 1978년 선보인 〈비디오 비너스〉(그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나체의 여성 조각가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였다)나 그가 무당으로 분한 〈요제프 보이스 추모굿〉(1990) 같은 강렬한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렸을지 모른다. 서울에서 연 추모굿에서 백남준은 무당보다 더 신기 어린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보이스 추모 굿판
도올은 그의 퍼포먼스를 본 후 이렇게 썼다.
“파괴는 있는 것을 부숴버리는 것, 망가트리는 것이지만 탈구성(deconstruction)은 구성된 존재의 구성을 벗겨가는 그 과정 자체에 심미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컨스트럭션(construction·건설) 자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디컨스트럭션이란 역사적 단계의 월권일 뿐 아니라 무의미한 일이다.”
성장과 개발이 어느 정도 완성된 사회라면 그걸 해체하는 것도 예술이 될 수 있지만, 해체할 것조차 아직 자라나지 않은 사회라면 그런 예술은 이해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동시에 현재에도 적용되는 얘기다.
기념관이 위치한 창신동엔 재개발 예정지가 여러 곳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창신동 재개발과 기념관 폐관은 관련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기념관을 둘러싼 환경은 백남준의 운명을 은유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도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다는 개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늘 컨스트럭션(건설) 중이니, 백남준의 탈구조적 예술을 지금도 이해 못 하는 게 아닐까.
기념관의 전시 글을 읽다 보니 백남준이 남긴 말들이 보인다. “인간이 무엇을 발명해내는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할 뿐이지요.”(1978), “게임에서 이긴다는 건 그 게임의 룰에 복종해서 이길 수도 있지만, 그 룰 자체를 변경해서 이길 수도 있다.”(1992),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이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꾸려온 것은 아니다. 청년들에게 아무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러운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1992)
인터넷, 스마트폰 예견
그는 인류 문명의 미래를 두고 많은 예언을 했다. 1974년 록펠러재단에 그가 제출한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 21세기는 불과 26년밖에 안 남았다〉에는 전 세계를 연결하는 ‘전자고속도로’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인터넷의 출현을 예견했단 얘기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이 제작한 영상 〈아티스트 백남준이 예언한 다섯 가지 미래〉를 보면, 1) 인터넷 외에도 2) 비디오아트 3) 기후 위기 4) 글로벌 미디어 5) 스마트폰의 출현을 예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백남준은 1974년 쓴 글에서 “언젠가 1001가지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을 위한 ‘멀티미디어 전화 시스템(mixed media telephone system)’이 생길 것”이라며 “그것으로 비디오 콜, TV 시청, 쇼핑, 심지어 건강 진단까지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예견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카메라의 발명은 모든 상황을 바꾸고, 모든 사람을 활발한 비주얼 아티스트로 만들 것이다.” 유튜브, 틱톡의 출현을 50년 전에 예측했단 얘기다.
그는 자신의 운명도 예측했다.
“한 천재의 비범한 시도들이 일으키는 불길을 끌 것이 아니라, 직접 천재의 길을 걸어볼 일이다. 비록 우리 국민들이 그런 일을 전혀 모르기는 하지만 그들은 처음엔 트집을 잡다가 나중엔 이러한 것을 찬양하는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다.”(1959)
“뒤샹조차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100년이 걸렸다. 나는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2032년에 사람들은 나의 엉성하고 엉망인 미학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1992)
한국 미래 축원한 백남준
2024년은 백남준이 역사적인 퍼포먼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을 세상에 내놓은 지 40년이 되는 해다. 지난 40년간 우리는 얼마만큼 그의 사상을 이해한 걸까. 이번 기념관 폐관 해프닝은 아직도 그가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있는 기념관을 없앨 게 아니라 서울 서린동에서 시작해 창신동 백남준기념관, ‘원족(遠足)’을 다닌 수송동, 삼선동, 뚝섬을 거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를 들러 봉은사에서 끝나는 ‘백남준 순례 코스’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백남준 아트센터를 국립미술관으로 승격시키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겠다. 현재는 경기도문화재단에 소속되어 있다. 경기도에서 예산을 얼마나 배정하느냐에 따라 전시의 질이 널을 뛰는 구조다. 2014년엔 예산이 없어 1, 2층 중 1층만 불 켜놓고 있기도 했다.
기념관을 모두 둘러보고 나서는 길, 마음 한 편이 먹먹하다. 백남준은 한결같이 조국의 미래를 축원했다.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뒤지지 않습니다. 전자매체의 세계가 되어서 제일 덕 보는 것이 아마 우리나라일 겁니다.”(1993) 그를 보내고 1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에게 다가서지 못한 것 같다.⊙
이곳과 관련해 최근 논란이 있었다. ‘일 버리기 사업’이란 다소 해괴한 이유로 폐관 위기에 몰렸었다. 백지숙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시절 결정된 일이었다. 비판 여론이 일어났다. 결론적으로 폐관은 보류됐다.
재벌집 막내아들

2023년 11월 9일 백남준기념관으로 향했다. 동대문역과 동묘앞역 사이 창신동 골목. 아담한 1층짜리 한옥이 보인다. 백남준기념관이다. 백남준이 실제 살던 집은 아니다. 백남준은 서울 서린동에서 태어나 창신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던 ‘큰대문집’은 3000평이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거대 한옥이었다. 큰대문집은 진작 헐렸고, 그 터에 남아 있던 작은 한옥을 서울시가 사들였다. 1960년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을 복원해 기념관으로 꾸몄다. 가파도 프로젝트와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건축가 최욱이 설계를 맡았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관리, 운영 중이다.
대문을 지나니 자그마한 중정 공간이 보이고 김상돈 작가의 작품도 보인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중정에 서서 둘러보니 좁은 공간에 전시실과 카페까지 짜임새 있게 들어서 있다. 없어질 수도 있다 하니 갑자기 귀중하게 느껴진 걸까. 전시물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기는 처음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전시 글엔 백남준의 인생과 철학, 그와 영향을 주고받은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백남준은 1932년 백낙승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백낙승은 조선 시대 ‘재벌’이었다. 태창방직을 경영하며 면포를 만주에 수출해 큰돈을 벌었다. 일제 말기엔 군수업체도 운영했다. 그러다 보니 백남준은 큰대문집에서 부족함이라곤 모르고 자랐다. 그가 1967년에 쓴 수필 〈뉴욕단상(斷想)〉을 보면, ‘어려서 캐딜락을 타보았던들 무슨 소용이요. 이병철의 장남인들 무슨 대수랴’는 문장이 나온다. 큰대문집에는 조선에 단 2대 있던 캐딜락 중 한 대가 있었고, 차 수리공까지 일하고 있었다. 외국 영화, 피아노, LP판 같은 각종 신문물을 아마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가장 풍요롭게 접하며 자랐다. 그야말로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
여권번호 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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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부친 백낙승의 상여가 큰대문집 앞을 지나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러던 중 1961년, 한국에서 5·16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부정축재 기업을 지목해 가산을 몰수했다. 여기에 태창방직이 들어 있었다. 부친 백낙승의 뒤를 이어 백남준의 큰형 백남일이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던 참이었다. 회사를 빼앗긴 후 큰대문집 사람들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성씨는 백에서 하쿠다로 개명해 아예 귀화한다. 백남준 노후, 매니저 역할을 한 장조카 이름이 ‘하쿠다 켄’인 이유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3곳(뮌헨, 프라이부르크, 쾰른)의 대학교를 다니며 음악, 건축, 철학을 공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존 케이지(1912~1992년)를 만난다. 존 케이지는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4분33초’란 곡으로 음악계에 혜성처럼 떠오른 인물이다. (4분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그냥 앉아 있는다.) 그는 훗날 백남준의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행위예술로 넘어간 백남준은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플럭서스는 1960년대 독일에서 시작해 퍼져나간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이다. 백남준을 비롯해 조지 마키우나스, 존 케이지, 오노 요코, 요제프 보이스, 르네 블록, 샬럿 무어먼, 레이 존슨 등이 활동했다.
독일의 ‘마에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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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미국 뉴욕에서 동거하던 시절의 백남준(왼쪽)과 구보타 시게코. 사진=구보타 시게코 |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는 이렇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세계 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다. 독일은 변방이었다. 1970년대 ‘요제프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아트’를 창안해 독일 미술의 위상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미술 판도를 뒤바꾼,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다.”
뉴욕으로 건너간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1974년 뉴욕 개인전에서 선보인 〈TV부처〉로 전 세계 미술계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돌부처가 맞은편 TV 화면 속 자신을 응시하는 작품인 〈TV 부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77년엔 구보타 시게코(1937~ 2015년)와 결혼한다. 한국엔 그저 백남준의 부인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시게코 역시 행위예술가다. 1965년 여성의 은밀한 부위에 붓을 꽂곤 작품을 그리는 ‘버자이너 페인팅’으로 예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1984년 1월 1일 드디어 백남준의 세계적인 공연이 열린다. 새해 벽두에 전 세계 동시 송출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를 연결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방송이었다. “조지 오웰 당신은 《1984》에서 TV를 빅브라더가 사람들을 독재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으로 그렸지만, 1984년 세계는 TV를 자유 표현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백남준이 당시 직접 설명한 제작 의도다.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요제프 보이스가 퍼포먼스를 하고, 뉴욕에선 존 케이지가 연주를 시작한다. 배우 이브 몽탕이 노래하며 탭댄스를 추고, 현대무용의 거두 머스 커닝엄과 살바도르 달리가 등장한다. 조지 오웰의 비관적 예언을, 당대 최정상의 영상 콘텐츠로 멋지게 반박한 이 특이한 예술가의 존재를 전 세계가 알아보게 된다.
한국의 KBS도 이 방송을 중계했다. 그 전까지 한국에서 무명이었던 백남준이 고국에 알려진 계기다. 이후 백남준은 〈바이 바이 키플링〉(1986)과 88올림픽을 기념하는 〈손에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1988)를 인공위성 생중계로 발표한다. 인공위성 3부작이다. 최초로 영상으로 세계를 이은 시도 자체로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캐나다의 문화비평가 마셜 매클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말을 남겼다. 백남준은 동시대인들 중 처음으로 그 명제를 예술로 실증한 셈이다. ‘바보상자’로 비난받던 TV를 주체적으로 이용하면 전 세계를 잇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냈다.
세계 미술계는 그가 보여준 새로운 예술에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모던, 뉴욕의 휘트니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파리의 퐁피두 센터, 독일의 갤러리 파르나스, 네덜란드의 스테델릭미술관…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백남준 생전에, 혹은 사후에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역시 백남준 회고전을 연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의 엘리자베스 브룬 전 관장은 “훗날 르네상스 시대를 두고는 미켈란젤로를, 20·21세기엔 백남준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과 한국 미술계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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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대표작 〈TV 부처〉(1974). 사진=백남준아트센터 |
백남준기념관 전시물을 돌아보다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의 고국은 왜 (서울시의 해명처럼) ‘88㎡(약 27평)’의 작은 기념관마저 가만두려 하지 않는 걸까. 그가 한국에서 저평가되는 이유는 뭘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유족과 한국 미술계의 불화다. 백남준과 시게코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아니 낳지 못했다. 시게코는 결혼 전 걸린 자궁암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백남준의 작품과 수반되는 모든 저작권은 장조카인 하쿠다 켄이 물려받았다. 백남준의 큰형 백남일의 아들이다. 하쿠다 켄은 미국에는 한국 태생의 일본계 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를 졸업했고, 미국에서 어린이 발명 프로그램인 〈패드 박사(Dr. Fad) 쇼〉를 한동안(1988~1994년) 진행했다. 그가 일본에서 들여온 왁키 월워커(Wacky WallWalker)라는 문어 모양의 장난감은 1980년대 미국에서 대유행했다. 2억4000만여 개가 팔렸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앨리 웡이 지난해까지 그의 며느리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삼촌 백남준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그 시절부터 이미 한국인들과 거리를 뒀다고 그 시절 백남준을 알았던 이들은 증언한다. 이유는 뭘까. 일단 하쿠다는 한국어를 못 한다. 사고방식도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 어디쯤이다. 그는 특히 일부 한국 화랑을 비난했다고 한다. 백남준을 때론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지금까지도 한국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있다. 백남준기념관엔 백남준의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다. 유족과의 불화가 배경에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미술계 인사들에게 들어보니, 백남준의 거동이 불편해진 후, 한국에서 작품을 제작한 다음, 추인받는 형식으로 작품 제작이 이뤄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쿠다는 이러한 작품들 중 어떤 작품은 ‘삼촌이 아주 싫어했다’고 주장했다. ‘조악한 작품들이 삼촌의 작품으로 둔갑했다’고도 말했다. 많은 논란이 그렇듯 하쿠다의 주장에도, 그에 반박하는 이들의 주장에도 진실과 오해가 섞여 있을 터다.
당장 백남준 사후에 위작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백남준과 친분이 있었던 모 교수가 국내 백화점에 빌려준 백남준 작품이 2013년 위작 시비에 걸렸다. 작품을 제작한 이가 나서서 ‘내가 만들어준 것’이라 증언했지만 모 교수는 진품이라 주장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진품이라 주장한 작품은 생김새가 민망할 정도로 조악하다.
사실 백남준만이 아니다. 정상급 작가가 위작 논란과 얽히는 일은 잊을 만하면 일어났다. 당장 이중섭, 이우환, 천경자 작가도 자유롭지 않았다. 이우환의 경우는 특이한 게, 작가는 진품이라 주장했는데 위작을 그린 화가가 붙잡혀 자백을 했다. 화랑 대표 등 위조 관계자들은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위작 시비는 언제 또 불거질지 모른다. 백남준에게는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가 없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작가의 ‘전집 도록’을 뜻하는 미술 용어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을 총망라한 작품집이다. 더불어 작가의 작품 세계를 통사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한다. 당연히 들여다볼 만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만 카탈로그 레조네를 가질 수 있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훗날 작품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출판된 후에라도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즉각 수정, 보완하는 이유다. 렘브란트의 카탈로그 레조네는 1921년 제작 당시엔 총 711점을 수록했다. 1968년 판에는 420점을 수록했다. 진품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작품들을 걸러 내서다. 카탈로그 레조네를 제작할 때 작가 본인뿐 아니라 조수, 큐레이터, 미술 평론가 등 다양한 이들의 증언을 참고하는 이유다. 국내 작가 중엔 장욱진, 박서보 작가 정도가 카탈로그 레조네를 잘 정리한 예로 꼽힌다.
백남준은 지금까지도 카탈로그 레조네가 없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2013년 국고 5억원을 지원받아 목록화 사업을 시작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백남준문화재단은 백남준을 기리는 이들이 모인 민간 단체다. 파리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심은록 미술평론가는 “백남준에게 카탈로그 레조네가 없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다”며 “백남준 정도의 작가라면 국가별로 카탈로그 레조네가 있는 게 당연한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백남준의 작품 가격이 명성에 비해 낮게 형성된 데는 카탈로그 레조네가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터다. 백남준의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은 2017년 홍콩 경매에서 팔린 〈수사슴(stag, 1996)〉이다. 59만 달러(수수료 제외, 약 7억8000만원)에 팔렸다. 가격이 예술을 평가하는 절대적 바로미터겠냐마는, 앤디 워홀의 작품(메릴린 먼로 초상화)이 2500억원에 팔린 것과 비교하면 한숨이 나오는 금액이다. 앤디 워홀이 팝아트의 선구자라면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데 말이다.
카탈로그 레조네를 만들려면, 하쿠다 씨와의 관계 개선이 우선이다. 당장 저작권 문제가 걸려 있기도 하지만, 유족과 협의 없이 만들긴 힘들다. 다행히 최근 취임한 박남희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과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 모두 관계 개선에 큰 의지를 보이고 있다.
‘난 한국 문화 수출하는 문화상인’
백남준이 저평가받는 두 번째 이유로 ‘비디오아트’라는 장르가 가진 난점(難點)을 들 수 있다. 박남희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의 얘기를 들어봤다. 백남준 아트센터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경기도 산하 미술관이다. 2008년에 개관했다. 하쿠다가 유일하게 인정한 백남준을 기리는 미술관이다. 백남준기념관에는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이란 부제가, 백남준 아트센터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박 관장의 말이다.
“미디어아트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장소도 확보해야 하고요. 유화 그림을 사는 것과 미디어아트 작품을 사는 건 다르다는 거죠. 특별한 식견과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인이 돈이 있다고 덜컥 들일 수 있는 작품은 아닌 겁니다. 그러니 환금성이라는 부분에서도 고민이 될 테고요.”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다다익선〉도 가동 중단 후 복원까지 3년의 기간이 걸렸다. 수리 방법에도 논란이 일었다. 제작 당시의 부품을 고수할 것인가, 진화한 부품을 도입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결국 LCD 기술을 도입해 수리하는 걸로 결론을 냈다.
누군가에겐 매체의 진화를 알린 선구자의 작품이지만, 다른 이에겐 오래된 TV를 붙여놓은 고물로 보일 수 있단 얘기다.
세 번째 이유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심은록 평론가는 “빌 비올라가 한국인이었다면 사정이 좀 다르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빌 비올라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백남준의 제자다. 백남준이 한국이 아닌 일본이나 독일, 미국 태생이었다면 확실히 그의 위상은 지금과 달랐을 터다.
백남준을 잘 모르는 이는 그가 주로 외국에서 활동하지 않았냐고 말한다. 백남준은 생전에 이미 답변을 남겼다.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합니다. 난 한국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상인이에요.”(1984년 인터뷰에서)
도포 입고 고향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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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백남준 타계 후 조카 하쿠다 켄(왼쪽) 씨가 유해를 운구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오른쪽은 비디오아티스트 존 하프만. 사진=조선DB |
“날 자꾸 서양에서 다 배운 사람인 줄 아는데, 사실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이미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모두 흡수한 거거든. 우리나라 일제시대 때 한국 예술가들 수준이 당대의 서구라파나 일본의 아방가르드적 수준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우. 난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도 이건우 선생한테서 유학 가기 전에 다 배운 거고. 신재덕 선생이나 이건우 선생 같은 분이 가르쳐주신 수준이나 김순남 선생을 사사한 수준이 내가 독일 가서 작곡가 노릇 할 수 있었던 바탕을 다 만들어주셨던 거거든. 역사를 자꾸 단절적으로 보면 안 돼. 일제시대 때 문화도 말이지, 전통문화, 서구문화 다 높은 수준으로 그대로 가지고 있었거든. 난 그걸 흡수한 거야. 내 속에 가지고 있었던 전통문화와 서양의 아방가르드가 결국 비슷한 거란 것을 내가 나중에 발견한 것일 뿐이지.”
그는 무엇보다 고국을 사랑했다. 1990년 그는 흰 도포를 입고 누이, 유치원 친구 이경희씨와 함께 ‘큰대문집’ 집터를 찾아 나섰다. 그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백남준은 지게에 지구본을 얹고 종로 거리를 지나 집터에 도착한다. 세계를 향해 떠난 그가 40년 후 그 세계를 고향땅으로 가져온다. 비록 그를 기억하고 있지 않은 고향이긴 하지만.
《삼국유사》와 샤머니즘
그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무척 좋아했다. “《삼국유사》는 인간의 판타지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한국의 샤머니즘과는 하나가 됐다. 시게코가 쓴 책 《내 사랑 백남준》에는 백남준과 시게코가 한국의 굿을 두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남준이 말한다. “일본의 선(禪)도 좋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에 비하면 무척 따분하지.” 시게코가 반문한다. “둘 다 각자의 이론과 배경을 가진 철학인데 위아래가 어디 있어요.”
다시 백남준이 말한다. “절대 아냐! 한국 샤먼이 훨씬 창의적이지.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거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어릴 적 큰대문집에서 굿판을 벌이곤 했던 ‘애꾸무당’을 바라보던 아이는 훗날 ‘전자 무당’이 된다.
도올은 1992년 백남준을 만났다. 그 감상을 《석도화론》에 남겼다. 그해 백남준은 서울을 찾아 문예회관에서 무용가 김현자와 합동 퍼포먼스를 했다. 당시 한국의 경직된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백남준은 1978년 선보인 〈비디오 비너스〉(그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나체의 여성 조각가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였다)나 그가 무당으로 분한 〈요제프 보이스 추모굿〉(1990) 같은 강렬한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렸을지 모른다. 서울에서 연 추모굿에서 백남준은 무당보다 더 신기 어린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보이스 추모 굿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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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백남준의 〈다다익선〉 앞에서 백남준 1주기 기념식이 열렸다. 왼쪽에 부인 구보타 시게코 씨가 보인다. 사진=조선DB |
“파괴는 있는 것을 부숴버리는 것, 망가트리는 것이지만 탈구성(deconstruction)은 구성된 존재의 구성을 벗겨가는 그 과정 자체에 심미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컨스트럭션(construction·건설) 자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디컨스트럭션이란 역사적 단계의 월권일 뿐 아니라 무의미한 일이다.”
성장과 개발이 어느 정도 완성된 사회라면 그걸 해체하는 것도 예술이 될 수 있지만, 해체할 것조차 아직 자라나지 않은 사회라면 그런 예술은 이해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동시에 현재에도 적용되는 얘기다.
기념관이 위치한 창신동엔 재개발 예정지가 여러 곳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창신동 재개발과 기념관 폐관은 관련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기념관을 둘러싼 환경은 백남준의 운명을 은유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도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다는 개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늘 컨스트럭션(건설) 중이니, 백남준의 탈구조적 예술을 지금도 이해 못 하는 게 아닐까.
기념관의 전시 글을 읽다 보니 백남준이 남긴 말들이 보인다. “인간이 무엇을 발명해내는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할 뿐이지요.”(1978), “게임에서 이긴다는 건 그 게임의 룰에 복종해서 이길 수도 있지만, 그 룰 자체를 변경해서 이길 수도 있다.”(1992),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이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꾸려온 것은 아니다. 청년들에게 아무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러운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1992)
인터넷, 스마트폰 예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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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임영균이 1983년에 촬영한 백남준의 사진. 1984년 《뉴욕타임스》 신년특집호에 크게 실리기도 했다. 사진=임영균 |
영국의 테이트 모던이 제작한 영상 〈아티스트 백남준이 예언한 다섯 가지 미래〉를 보면, 1) 인터넷 외에도 2) 비디오아트 3) 기후 위기 4) 글로벌 미디어 5) 스마트폰의 출현을 예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백남준은 1974년 쓴 글에서 “언젠가 1001가지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을 위한 ‘멀티미디어 전화 시스템(mixed media telephone system)’이 생길 것”이라며 “그것으로 비디오 콜, TV 시청, 쇼핑, 심지어 건강 진단까지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예견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카메라의 발명은 모든 상황을 바꾸고, 모든 사람을 활발한 비주얼 아티스트로 만들 것이다.” 유튜브, 틱톡의 출현을 50년 전에 예측했단 얘기다.
그는 자신의 운명도 예측했다.
“한 천재의 비범한 시도들이 일으키는 불길을 끌 것이 아니라, 직접 천재의 길을 걸어볼 일이다. 비록 우리 국민들이 그런 일을 전혀 모르기는 하지만 그들은 처음엔 트집을 잡다가 나중엔 이러한 것을 찬양하는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다.”(1959)
“뒤샹조차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100년이 걸렸다. 나는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2032년에 사람들은 나의 엉성하고 엉망인 미학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1992)
한국 미래 축원한 백남준
2024년은 백남준이 역사적인 퍼포먼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을 세상에 내놓은 지 40년이 되는 해다. 지난 40년간 우리는 얼마만큼 그의 사상을 이해한 걸까. 이번 기념관 폐관 해프닝은 아직도 그가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있는 기념관을 없앨 게 아니라 서울 서린동에서 시작해 창신동 백남준기념관, ‘원족(遠足)’을 다닌 수송동, 삼선동, 뚝섬을 거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를 들러 봉은사에서 끝나는 ‘백남준 순례 코스’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백남준 아트센터를 국립미술관으로 승격시키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겠다. 현재는 경기도문화재단에 소속되어 있다. 경기도에서 예산을 얼마나 배정하느냐에 따라 전시의 질이 널을 뛰는 구조다. 2014년엔 예산이 없어 1, 2층 중 1층만 불 켜놓고 있기도 했다.
기념관을 모두 둘러보고 나서는 길, 마음 한 편이 먹먹하다. 백남준은 한결같이 조국의 미래를 축원했다.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뒤지지 않습니다. 전자매체의 세계가 되어서 제일 덕 보는 것이 아마 우리나라일 겁니다.”(1993) 그를 보내고 1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에게 다가서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