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부산이 좋다 / Busan is good! 부산이라 좋다

‘서울내기’에서 ‘부산데기’로

바다를 담고 살다 보니 바다를 닮아 간 35년

글 : 조윤희  부산 금성고등학교 교사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소통과 의리가 먼저인 작은 싸나이들의 부산 교실. 그렇게 학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큰 어려움 없이 교실을 지킬 수 있었고, 열(熱)과 성(誠)을 다하자던 나의 ‘초심’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부산 해운대구 송일정에서 바라본 바다. 사진=게티이미지
  “네 딸은 시집을 멀리 갈 게다. 바늘에 실 꿰는 걸 보면 댓 발은 될 것 같아. 멀리도 갈 것 같네.”
 
  나의 외할머님이 내 어머니께 말씀하시곤 하던 대로, 난 서울서 이곳 먼 부산까지 아는 사람도 친구도 하나 없는 곳에 덜렁 내려와 35년째 살고 있다.
 
  부산에 와서, 처음에는 일가친척은 물론 친구도 없이 모든 것이 낯설고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10월에 결혼하고 새댁이 할 수 있는 건 매일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해서 서방님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전부였다. ‘무료하다, 무료하다’ 노래를 하며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부산의 전통시장 투어였다. 지하철이 있어도 몇 구간만 개통되었던 시절, 지하철 역세권과는 먼 외곽 지역에 살던 터라 버스를 갈아타가며 부산의 이름난 시장을 골목마다 누비고 다녔다. 국제시장, 평화시장도 다니고 구포까지 진출하여 구포 장날도 경험했다. 이곳저곳 시장을 다니는 재미는 꽤나 쏠쏠해서, 시장 골목골목 어디서 뭐를 파는지 새겨두는 일은 한동안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하지만 시장 나들이도 하루이틀이었다!
 
  스텐실도 하고 지점토도 하고 천을 떠다가 방석도 만들고 커튼도 만들고. 그럼에도 그 재미는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동이 났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일자리’를 찾아보게 되었고, 신문을 뒤적거리며, 학습지 교사라도 해볼까, 어딜 취직해볼까 기웃거리다가 대학 때 교직 과목을 이수해서 ‘교사 자격증’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신문에 공고가 난 ‘교사 초빙’ 광고를 보고 사립학교 교사가 되기 위한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교생 실습도 했었지만, 첫 직장이 싱가포르 영사관이었던 터라, 내가 교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수업 지도안을 만들고, 고등학교 생활기록부까지 떼고 온갖 서류를 준비할 때까지도 부산에서 ‘천직(天職)’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사립학교 교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경상도 지역에 고향을 둔 사람이 아니면 경상도 지역 말씨는 다 비슷하다 느낀다. 하지만 부산 사람이 구사하는 억양과 말씨는 좀 다르다. 이제는 나도 잘 알고, 35년 차 부산 아지매로 그 말씨를 구사하게 되었지만 처음 부산에 내려와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의 사투리는 무척 낯설었다.
 
  “사회책 17쪽 한 번 읽어보자. 준형이가 읽어볼래?”
 
  대구에서 전학을 온 준형이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아해하는 내게 아이들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쌤! 웃기잖아요! 하하하!”
 
  경북 쪽과 부산은 말투가 다르고 억양도 다르다. 엇비슷한 부산 지역도 서부 경남 말씨와 경북과 가까운 지역 쪽 말씨가 다르다는 건 이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게 되었다.
 
  부산에선 그릇도, 얼굴도, 몸도, 머리도, 옷도, 신발도, 가방도 ‘씻는다’. 깨끗하게 하기 위해 비누칠을 하거나 세제를 이용해 박박 문질러 닦거나, 빨거나 세척하는 모든 것이 ‘씻음’이면 끝이었다. 그릇은 부시고, 얼굴과 몸은 닦고, 머리는 감고, 옷과 가방과 운동화는 빠는 건데, 모든 동사가 ‘씻음’으로 통일! 매우 경제적인 단어 구사였다.
 
  “아가, 그릇은 대충 씻고 들어온나.”
 
  “어머니, 한 번만 더 부시면 끝나요!”라고 말씀드리자 “그릇을 왜 부수냐?”고 하셨다. 한바탕 웃고 이런저런 설명으로 고부간의 대화는 더 다양해져 갔었다.
 
금성중 교사 시절이던 2000년 5월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해양수련을 한 후(뒷줄 가운데가 필자). ‘부산 싸나이’들과 함께했기에 필자는 부산에서 교사로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수업 중엔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쓰던 말씨가 편하니 주로 ‘서울말’을 썼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부산 말투가 스며들었고, 교단 밑에선 적당히 부산과 서울이 섞인 말투와 억양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들과 거리는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고, 차츰 아이들의 ‘서울말 쓰는 사회 선생님’은 그냥 ‘우리 선생님’이 되어가고 있었다.
 
  중학교에서 10년을 넘게 근무하다가 고등학교로 전근을 온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덩치도 제법 크고 수업엔 뜻이 없어 보이는 아이가 뒷자리 친구와 계속 잡담을 하고 있었다.
 
  딱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의 소음. 신경이 거슬렸다. 명백히 수업 방해였다.
 
  “동현아, 좀 조용히 하면 좋겠다. 다른 애들이 잘 못 듣잖니. 조용히 해줄래?”
 
  “안 떠들었는데요?”
 
  떠들어서 조용히 하랬더니 안 떠들었다고 눈에 흰자위를 드러내며 날 치켜보면서 반항 조로 말하는 덩치 큰 고3 녀석. 순간 당황스러웠다. 녀석을 어찌 처리하나? 시비를 가리면 다른 아이들도 주목을 할 테고 평소에도 교사들에게 좀 시위와 반항을 일삼는 녀석에게 ‘승기’를 잡게 하면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데다가 교사는 당연히 우스운 꼴을 당하거나 무능해질 위기였다. 교사의 권위를 앞세워 체벌로 ‘바른 수업 태도’를 가르치기엔 느닷없이 만난 고등학생이기에 ‘래포’가 없었다. 재빨리 나름의 ‘시간차’ 공격을 시도했다. 아이는 교사가 화를 낼 지점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고, 화를 내면 반항하며 ‘그다음’을 보려고 슬쩍 빙글거리는 미소까지 비치고 있었다.
 
  “그래? 미안! 선생님이 잘못 봤나 보네! 난 또 어디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에!”
 
  그러곤 웃었다. 벙찌다는 표정으로 아이는 간간이 계속 뒷자리 아이와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수업 시간이 끝났다.
 
아이돌그룹 2PM 멤버인 제자 장우영과 함께.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 체육대회가 찾아왔다. 평소 DSLR 카메라를 사용하던 터에 70~200mm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로 한 아이를 집중해서 따라다니며 찍었다. 말 많은 덩치 큰 반항쟁이 동현이. 축구선수로 뻥뻥 슛을 날리는 동현이는 수업시간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운동장을 누비고 있었다. 동현이의 사진으로 가득한 체육대회 모습을 학교 홈페이지 행사란에 게재하고 난 뒤, 그 후의 수업시간을 기다렸다.
 
  빙글거리며 수업시간에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폭풍 칭찬을 했다.
 
  “와! 동현이 축구 진짜 잘하더라! 베컴이더라 아주 그냥! 진짜 멋졌어. 네 사진 학교 홈페이지 행사란에 다 올렸는데, 아직 안 봤니?”
 
  “어? 보셨어요? 아직 안 봤는데요?”
 
  눈이 동그래진 아이는 겸연쩍다는 듯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약간의 골탕으로 사회 선생을 만만하게 만들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바뀌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었다.
 

  조용히 편안하게 수업은 잘 진행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동현이와 반대편 쪽 자리에서 누군가 또 소음을 만들고 있었고,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하려고 내가 바라보는 순간 동현이의 일침이 먼저 날아들었다.
 
  “마! 쌤이 조용히 하라 안 하시나!”
 
  그걸로 끝이었다. ‘쌤’과 학생 사이에 서로 ‘통’하고 믿게 되면 그걸로 더 군소리는 필요 없는 게 부산의 싸나이들이었고 교실이었다. 그 이후로도 동현이는 아이들의 소음을 허용하지 않았고, 당연히 사회 선생님의 수업을 방해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소통과 의리가 먼저인 작은 싸나이들의 부산 교실. 그렇게 학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큰 어려움 없이 교실을 지킬 수 있었고, 열(熱)과 성(誠)을 다하자던 나의 ‘초심’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부산의 선생님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울내기’가 ‘부산데기’가 되어 점점 둥근 넉넉함과 푸근함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바다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방향으로든 대략 20분만 달리면 부산은 바다에 닿을 수 있다. 그런 곳에 살며 바다를 담고 살다 보니 바다를 닮고 있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깊은 바다의 잔잔한 물길과 고요를 닮아가며 35년을 맞는다. 그렇게 바다와 함께 서울댁이 부산댁이 되는 데는 35년이 걸렸다. 간혹 폭풍 치는 파도 같은 분노를 쏟아내기도 하지만 바다는 늘 많은 것을 품고 쓸어안는다. 그런 바다를 늘 보며 사는 일은 축복이다.Ⓑ
 
조윤희
  1964년생.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부산대 대학원 교육심리전공 석사, 현 동아대 대학원 다문화교육전공 재학 중 / 부산 금성중·부산여상·덕문여고 교사, 교육과정평가원 교과서 검정위원, 교육과정평가원 평가위원 역임. 현 부산 금성고 교사, 대한민국교원조합 상임위원장, 올바른교육을위한전국교사연합 대표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