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영호,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시 ‘4·3 발언’으로 이목 끌어
⊙ 일부 사실과 다른 얘기 했지만, 희생자·유족 위로하는 취지… 그런데도 ‘망언’ 비난 쇄도
⊙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 배후에 ‘남로당 중앙’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 무장폭도는 ‘무장대’, 무장폭동과 그에 대한 군경의 진압을 ‘충돌’이라고 표기한 정부 보고서
⊙ 정부 보고서, 4·3단체와 다른 내용·입장 밝힐 경우 ‘법적 처벌’까지 각오해야
⊙ 일부 사실과 다른 얘기 했지만, 희생자·유족 위로하는 취지… 그런데도 ‘망언’ 비난 쇄도
⊙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 배후에 ‘남로당 중앙’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 무장폭도는 ‘무장대’, 무장폭동과 그에 대한 군경의 진압을 ‘충돌’이라고 표기한 정부 보고서
⊙ 정부 보고서, 4·3단체와 다른 내용·입장 밝힐 경우 ‘법적 처벌’까지 각오해야

-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2월 12일 제주 4·3평화공원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하고 있다. 사진=태영호 의원 페이스북 캡처
태 의원은 2월 13일, 제주도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첫 합동연설회에서 “4·3사건의 장본인인 김일성 정권에 한때 몸담은 사람으로서 유가족분과 희생자분들에게 진심으로 무릎 꿇고 용서를 빈다”고 밝혔다. 당연하게도 더불어민주당이 들고일어나고, 소위 ‘4·3단체’들이 반발했다. 태 의원을 향해 ‘최고위원 후보 사퇴’ ‘망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에 제소를 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럼에도 태 의원은 ‘제주 4·3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좌파에 의해서 잘못 쓰인 현대사를 다시 쓰겠다” “잘못된 역사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 선거가 끝나면 기회가 될 때마다 역사적 사실을 강하게 말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4·3은 공산당 폭동으로 일어났다”던 DJ
더불어민주당은 2월 15일, ‘태영호 징계안’을 국회 윤리위에 제출했다. 제주 서귀포시가 지역구인 위성곤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박용진 의원 등 19명이 공동발의했다. 이들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당선되기 위하여 강성 보수 표심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제주도의 역사적 비극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해묵은 색깔론을 꺼내 들었다”며 “제주도민들로 하여금 국회에 대해 불신하고 절망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회의 명예와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태영호 징계’를 요구했다. 이들이 밝힌 ‘징계 사유’는 다음과 같다.
〈국민의힘 국회의원 태영호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규탄과 제주 4·3희생자유족회 등 6개 단체의 공동 규탄성명이 있었음에도, 사과는커녕 또다시 2023년 2월 14일 페이스북에 “나는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워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억지 주장을 고집하였음. “김대중 대통령도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씀했다…”라고 주장하는 등 4·3사건의 전후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의 진의까지 왜곡하는 악의적인 발췌로 고인의 명예까지 훼손하였음.
2000년 1월 여야 합의로 제정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억울한 희생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 또한 2003년 정부 진상조사 보고서에서도 제주 4·3사건을 “군경의 진압 등 소요사태 와중에 양민이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했고,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음. 정부의 공식 진상조사 결과 대한민국의 군과 경찰에 의한 양민 희생 사건으로 결론이 난 사건에 대해, 국회의원 태영호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유족과 제주도민들의 아픈 상처에 다시 상처를 내었음.〉
참고로 제주 지역 신문 《한라일보》에 의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11월 23일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당 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남로당 중앙’의 ‘건국 방해’ 지령
![]() |
|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 폭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된 주민들이 국군 경비대에 의해 연행되고 있다. 사진=조선DB |
발언 맥락상, 태영호 의원이 얘기한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라고 해석할 수 있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 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자칭 ‘인민유격대’를 결성해 제주도 관내 경찰지서 12개소와 우익 인사들을 습격한 무장폭동을 말한다. 폭도들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반란 세력’이 됐다. 김달삼의 뒤를 이어 폭도 수괴(首魁)가 된 이덕구가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 정부’로 매도하며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폭도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와 뒤이어 대한민국에 항적한 반란과 관련해서 남로당 당수 박헌영(朴憲永)의 영향력을 배제하기는 쉽지 않다. 1946년 5월 ‘조선 정판사 위폐 사건’ 이후 월북한 박헌영은 1948년 초부터 남한 내 남로당 잔당에게 ‘단독선거, 단독정부’ 저지를 위한 ‘무장폭동’을 일으키란 지령을 내렸다.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이 있기 전인 2월 7일에 남로당이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5·10 총선거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방해하라고 내린 지령에 따라 좌익 세력이 전국적인 파업과 동맹휴학을 강행했고, 일각에서는 과격화된 세력들이 경찰지서를 습격한 소위 ‘2·7사건’이 있었다. 이는 ‘4·3특별법’이 얘기하는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의 전초전 성격이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행동’으로 단정한 정부 보고서
이와 관련한 남로당의 지령은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 발발 이후에도 변경·취소되지 않았다. 이런 점과 함께 오로지 상부의 지시에만 움직이는 공산당 조직 운영 원리를 감안했을 때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과 관련한 남로당 중앙의 직접적인 지령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남로당 중앙 지령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거나, ‘제주도당 독자행동’으로 단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른바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를 주도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소위 ‘군사부장’ 겸 인민유격대장 김달삼(본명 이승진)이 1948년 8월, 북한의 소위 ‘조선 인민 대표자 회의’에 가서 보고할 목적으로 작성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와 4·3사건 당시 폭동에 참여한 김봉현, 김민주(본명 김태봉)가 1963년에 발간한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에도 ‘중앙당 지령’을 언급하는 부분이 수차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과 달리 태영호 의원은 김일성을 “4·3사건의 장본인”이라고 했다가 “망언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망언’은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말’이다. 앞서 살폈듯이 태 의원 발언은 지금까지 드러난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언을 했다”거나 “4·3을 왜곡했다”고 몰아붙일 정도의 ‘실언’은 아니다. 태 의원이 얘기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뒤에는 김일성이 있지는 않았지만, 상기한 것처럼 최소한 박헌영 또는 ‘남로당 상부’의 지령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정황들은 존재한다.
그런데도 노무현 정부 때 발간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에 대해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따른 게 아니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단독 범행이란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4·3사건은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 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다.〉
‘4·3’에 대한 일방 시각 강요하는 사회
![]() |
| 2월 20일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주 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공동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문재인(文在寅) 정부 당시인 2021년 3월에 전부개정하고, 그해 6월에 시행된 ‘4·3특별법’은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족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 결과 및 제주 4·3사건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 4·3사건 관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제13조, 희생자 및 유족의 권익 보호)”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아직 이와 관련해 판례가 나오지 않아 구체적인 처벌 기준은 알 수 없지만, 그 누구든 의도와 무관하게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 결과 또는 제주 4·3사건 관련 단체의 입장과 다른 주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법원에 불려다닐 위험이 있는 셈이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발간 당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고건 국무총리는 분명히 서문에서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는데도 상황이 이렇게 됐다.
억울한 희생자 ‘명예회복’과 ‘추모’는 당연하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4·3 추념사를 통해 “제주도민들은 오직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으며 되찾은 나라를 온전히 일으키고자 했으나,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고,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간절한 요구는 이념의 덫으로 돌아왔다(2020년 4월 3일)” “완전한 독립을 꿈꾸며 분단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당시 국가 권력은 제주도민에게 ‘빨갱이’ ‘폭동’ ‘반란’의 이름을 뒤집어씌워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2021년 4월 3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소위 ‘보수정당’이라는 국민의힘마저 ‘태영호 발언’ 논란과 관련해서 “제주 4·3은 7년간 제주도민이 국가 권력에 희생된 역사적 비극(정진석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라고 하고 있다.
앞으로는 폭도들을 ‘무장대’라고 지칭하고, 남로당의 무장폭동·반란과 군경의 진압을 ‘서로 맞섬’이라는 뜻을 가진 ‘충돌’이라고 표기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표현을 따르지 않으면, 벌을 받는 세상이 도래할 수도 있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를 ‘공산 세력의 무장폭동’이라고 규정하는 걸 ‘망언’이라고 몰아세우는 행태, 폭동 주모자와 그 배후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까지 막을 위험이 있는 법률은 ‘양심의 자유(제19조)’ ‘표현의 자유(제21조 1항)’ ‘학문의 자유(제22조 1항)’를 명시한 ‘헌법’에 반하는 것 아닌가.
물론 ‘제주 4·3사건’은 비극적인 사건이다. 다만, 그 사건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4·3사건’의 핵심 대목인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는 공산 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할 목적으로 자행한 무장폭동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뒤에 이들이 전개한 ‘반란’과 군경의 진압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한 것 역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4·3 당시 제주도는 준전시 상황이었으므로 양민을 폭도로 오인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폭도의 가족들을 연좌제로 묶어 처형하거나, 소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폭도로 간주해 죽이고 옥살이를 하게 한 실례가 다수 있다. 따라서 국가가 이에 대해 반성하고,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추모하고, 적절한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억울한 희생’과 ‘무장폭동’은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전 국민이 ‘4·3사건’에 공감하고, 무고한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