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은 ‘차이’가 절대적으로 부족… 전 세계에서 소득분배가 상당히 균등한 편에 속하는데도 박탈감 느껴
⊙ 우크라이나 침략 이유로 국내 러시아인 차별… 국가와 개인이 분리된 존재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前近代性
⊙ “과거 스페인인들이 잘못을 한 거지 지금 현대 스페인인들과는 관계가 없다”(페루에서 만난 가이드)
우원재
1990년생. 호주 퀸즐랜드 대학 정치학 및 언론학 전공 / ‘미디어펜’ 뉴미디어 팀장, 자유한국당 부대변인 & 뉴미디어 TF 단장 역임. 現 홍보업체 ‘Liberty Media LLC’ 대표 및 유튜브 ‘호밀밭의 우원재’ 운영 / 저서 《‘좋아요’ 살인시대》
⊙ 우크라이나 침략 이유로 국내 러시아인 차별… 국가와 개인이 분리된 존재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前近代性
⊙ “과거 스페인인들이 잘못을 한 거지 지금 현대 스페인인들과는 관계가 없다”(페루에서 만난 가이드)
우원재
1990년생. 호주 퀸즐랜드 대학 정치학 및 언론학 전공 / ‘미디어펜’ 뉴미디어 팀장, 자유한국당 부대변인 & 뉴미디어 TF 단장 역임. 現 홍보업체 ‘Liberty Media LLC’ 대표 및 유튜브 ‘호밀밭의 우원재’ 운영 / 저서 《‘좋아요’ 살인시대》
- 프라하의 광장에서 찍은 사진. 체코의 관광지는 주로 동유럽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들로 붐빈다. 비눗방울을 만들어 사람들로부터 팁을 받으며 살아가는 청년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하는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1. 비슷해서 비교하고, 비교해서 불행한 사람들
한국에서 친구나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 있다. 미국 사람들이 실제 사는 모습을 보며 놀라는 것이다. “미국은 잘사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왜 이리 가난한 사람이 많으냐”는 질문을 자주 한다.
흔히들 상상했던 미국과 퍽 다른 인상의 진짜 미국. 그 경험은 미국 땅을 밟자마자 시작된다. 한국 도로에서 자주 보이는 고급 외제차가 미국 도로에서는 흔하지 않다. 오히려 한국보다 한국 차를 더 많이 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또한 연식이 오래된 차들이 많다. 게다가 곳곳에 긁힌 흔적이 있거나, 찌그러지고 부서진 부분들이 있는데도 당당하게 도로를 누빈다. 한국에서는 이런 낡고 망가진 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사고가 덜 일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수리를 하기 때문이다. 차의 외견이 탑승자의 재력을, 지위를, 가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거리로 이동하면 그때부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깜짝 놀란다. 어디에나 노숙자들이 보이고, 노숙자로 오해받을 법한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한국인의 기준에서 보면 ‘촌스럽다’. 집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다들 정원과 수영장이 딸려 있는 크고 세련된 집에서 살 것만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주거 형태도 사람들 행색만큼이나 가지각색이다.
“한국인들은 딱 보면 알 수 있다”
반면 외국인이 한국인에 대해 느끼는 인상은 정반대다. 유학 시절 외국인 친구들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인들은 딱 보면 알 수 있다.”
동양인 사이에서도 한국인을 알아보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국인, 특히 한국 청년들의 경우 소위 말하는 ‘스타일’이 좋다. 잘 꾸민다는 거다. 미국의 지인들도 한국에서 온 필자의 주변인들을 보며 감탄하곤 한다. 하나같이 ‘Well-dressed(옷을 잘 입은)’란다. 식사 자리 같은 데에 가면 당황하며 “왜 이리 차려입었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한국인이 유독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미적(美的) 감각이 뛰어나 외관에 신경을 더 쓰는 걸까. 그렇지 않다. 필자는 이 차이가 ‘개인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유독 타인(他人)의 시선에 예민하다. 또 동시에 타인에게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행색을 하고 있고, 어떤 차를 타고, 어디에 사는지 알고 싶어 하고, 동시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한다. 남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동시에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에 신경 쓴다. 이런 식으로 불특정 다수의 평가가 ‘집단의 기준’이 되고, 이런 집단의 기준이 개인을 잡아먹고 있다. 강한 공동체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동양권 문화 내에서도 한국이 유독 이런 측면이 강하다.
‘名品 계급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대학, 직업, 주택, 결혼, 자녀 등등 각각의 삶 곳곳에 주요 평가항목이 있고, 우리 모두는 수능을 치는 학생들처럼 일종의 등급으로 나눠진다. 심지어 이는 소비생활이나 문화생활 같은 영역에까지 퍼져 있다. 다른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은 명품 브랜드에 뭐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는 ‘명품(名品) 계급도’라는 게 존재한다. 회사 평사원은 이런 명품을 써야 하고, 사장은 이런 명품을 써야 한다는 ‘집단의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잘나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각종 유행부터, 사회경쟁력이라는 명분으로 세계 최다 수준으로 퍼져 있는 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좁디좁은 땅 덩어리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타인들로부터 평가받고, 또 타인들을 평가하며, 그렇게 개인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사회라는 피라미드 계급도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숨 막히는 사회 분위기는 ‘비슷함’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는 ‘차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같은 피부색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간다. 인종과 문화적 다양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경제적 다양성을 비롯해 소비나 취향의 다양성도 적다. 다들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사회정의를 부르짖다 보니 실감하지 못하지만, 사실 통계를 살펴보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소득분배가 상당히 균등한 편에 속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평등을 느끼고, 박탈감을 느끼고, 그래서 불행하다 생각한다.
‘헬조선’의 한국인들
한편 앞서 언급한 미국은 어떤가. 미국의 대도시, 특히 동부의 상류층 사회(High Society)는 지금도 밤마다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자신들의 저택에서 파티를 벌인다. 한편 저소득층은 쥐와 바퀴벌레가 들끓는 아파트의 렌트비를 내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일주일 치 주급이 밀리면 당장 밥을 굶어야 한다. 중산층들은 근교의 조용한 동네에서 정원을 돌보고, 취미활동을 하며 한국 기준으로는 지극히 소소하고 심심한 삶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개개인의 선택과 배경에 따라 너무나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 그래서 애초에 각각의 삶을 단일 잣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타인의 삶에 관심이 적고,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며, 동시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인종이나 집안처럼 타고난 요소부터, 진로나 취향 같은 선택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평등’과 같은 비슷함의 관성에서 벗어나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다양성을 발현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분위기가 개인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국은 객관적으로 부유한 나라다. 한국 국민들의 소비 수준은 이미 선진국 국민의 그것을 넘어섰고, 일상적으로 누리는 각종 인프라는 단언컨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어떤 타임머신을 상상해보자. 버튼을 누르면 전 세계 220여 개국 중 무작위로 선택된 한 국가에서 평균치 배경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그런 기계다. 과연 한국인 중 이 타임머신 버튼을 기꺼이 누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불행하다. 유행하는 옷을 입고,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최신형 스마트폰을 들고서 ‘헬조선’에 대해 불평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 원인으로 자꾸만 경제적 불평등 등 물질적인 부분만을 이야기한다. 이런 담론이 사람들을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2. 세계적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미국의 평범한 백인 가정에서 나고 자란 아내 제니퍼는 한국에서 잠깐 영어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원어민 교사를 고용하는 영어 유치원에서 일했는데 여기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미술 시간, 아이들로 하여금 스케치북에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서 이를 영어로 설명하게 하는 게 그날의 학습활동이었다. 그림 그리기가 시작되고 아내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칭찬을 하거나 조언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그림이 하나 보였다. 새빨간 크레파스로 여기저기를 마구 칠해둔 그림이었다. 자세히 보니, 한 인물이 칼을 휘둘러 여러 명을 학살하고 있는 그림이 아닌가. 아내는 깜짝 놀라 아이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그러자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답했다. 닌자-아마도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만화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가 되어서 일본인들한테 복수하는 걸 그렸다고.
인종차별과 학살. 아이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살벌한 그림. 어쩌면 아돌프 히틀러가 유년 시절에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아내는 아이에 대해 큰 우려를 느껴 엄마라도 된 듯한 마음으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특정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차별과 폭력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에 대해 나름 설명했지만, 아이가 이를 이해할 턱이 있나.
그날 아내는 원장을 찾아가 진지하게 건의했다. 아이의 부모에게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알리고, 여의치 않으면 전문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원장은 이를 거절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취급하며, 오히려 이 철없고 순진한 미국 처자가 뭘 잘 몰라서 과민반응한다는 식으로 넘겼다. 그렇게 언쟁이 시작됐고, 언쟁의 끝은 원장의 일방적인 말로 마무리됐다.
“한국인으로서 그럴 수 있다. 너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 당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아내는 “너는 당해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에 몹시 황당했었다고 후술했다. 원장은 당해봤나 보다.) 외국인은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식의 태도. 아내는 결국 설득을 포기했고, 그날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Oink–Only in Korea’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위 사례와 같이 자신들의 상식과 이해에서 크게 벗어난 일들을 종종 경험한다. 아내만 이런 경험을 한 게 아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오곤 한다. (개중에는 ‘Oink - Only in Korea’와 같이 한국에 대한 풍자와 냉소로 가득한 대형 커뮤니티가 있을 정도다.) 전 세계에서 온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경험한 ‘이상한 일들’에 대해 공유하고,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상담을 하는 식이다.
최근 이런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이는 사연이 있다. 러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한국 내에서는 러시아인에 대한 각종 차별과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 편의점이 입구에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며 ‘러시아인은 입장 금지’라는 팻말을 써 붙여 외국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유명 러시아인 유튜버는 전쟁이 터지고 별안간 한국인들의 집단적인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푸틴 정부의 행보를 지지한 적이 없는데도 대대적인 비난 여론이 조성되고 구독취소 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한국에는 생각보다 많은 러시아인이 살고 있다. 학생부터 시작해 농사나 공장 일을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이 이들을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히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와서 유흥주점 종업원으로 일하는 러시아 여성이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취객에게 폭언은 물론 신체적 위협까지 당했다는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봉변을 당하는 이들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들이다. 그들 절대다수는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권위주의 정부가 싫어 러시아를 떠난 사람도 다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전쟁의 가해자(加害者)라도 되는 듯한 취급을 받으며, 무려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개인을 동일시하며, 국가의 잘못을 근거로 개인을 적대하는 이런 인종차별적 문제. 전 세계에 문화를 수출한다는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필자는 그 이유가 ‘근대적 인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개인이 분리된 존재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런 전근대성(前近代性)에 기생(寄生)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착취해왔다.
3. 정신적 개발도상국
남미나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대다수 식민 지배를 경험했다. 여행을 하며 영어를 하는 현지인을 만나거나, 현지 가이드가 있으면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편인데, 자주 물어보곤 하는 주제가 식민지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지배국에 대한 대중의 감정이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개발도상국의 국민들이 과거사 문제에 있어 얼마나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면 한국인 대다수는 깜짝 놀랄 것이다. 여행 중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물어보시라. 한국에서는 바로 친일(親日) 매국노 소리를 들을 이야기를 할 것이다.
얼마 전 페루 여행 중에도 페루 고산(高山)지대에서 길잡이를 해주는 분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잉카제국이 멸망당한 후 19세기 초까지 안데스 산맥 일대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다. 이 시기 스페인 제국은 지금의 페루 지역에서 각종 만행을 저지른다. 근대화와 함께 병합을 추진했던 일제(日帝)와는 그 결부터가 다른 철저한 약탈이었다.
“특별히 스페인인을 더 미워하지는 않는다”
페루 대중의 스페인에 대한 반감에 대해 묻자, 그는 일종의 선입견(先入見)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흔히 스페인인이나 리마에 사는 그 후손들이 토종 페루인들을 인종차별하고 하대한다는 인식들이 어느 정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다음에 나온 말이었다.
“특별히 스페인인을 더 미워하지는 않는다. 각 지방 출신에 대한 선입견이 있듯, 스페인인에 대한 선입견도 그런 종류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냐고 질문하자 이렇게 답했다.
“과거 사건들에 분노하지만, 그 역시 페루 역사의 일부다. 분노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 스페인인들이 잘못을 한 거지 지금 현대 스페인인들과는 관계가 없다.”
길잡이의 말을 필자가 임의로 의역(意譯)하고 요약했지만, 그는 아주 확고하게 현대 스페인 정부나 스페인 국민에 대한 범(汎)대중적 적개심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물론 산악 길잡이인 그는 전 세계 여행객을 상대한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접하며 비교적 더 열린 사고(思考)를 갖게 됐을 것이다. 필자가 한국 내의 반일(反日)감정과 일본인에 대한 각종 인종차별 등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페루의 대중적 기준에서 봐도 한국의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 여론은 이상한 것이었을 터다.
우리 안의 전체주의
한국인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한반도 주민들에 대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차별 문제는 물론이고, 일제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봐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2022년의 대한민국은 정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과거를 조명하고 공부하고 있는지 또한 의문이 든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해괴한 접근 방식으로 과거사를 왜곡하고 있고, 학술적 객관성에 따라 역사를 논하자는 주장을 친일 매국 사관 등으로 매도하며 스스로를 자기 세뇌하고 있다. 논리나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정과 애국에 호소하며, 이제는 도그마가 된 이른바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강요한다. 오늘날 일본과 관련된 근현대사 문제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 신앙’에 관한 문제에 가깝다. 불과 한 세기 전의 역사가 왜곡과 과장으로 점철된 대중매체에 의해 범국가적으로 공유(共有)되는 유사(類似) 기억이 되고 있다.
최악은 정치인들의 행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과거사 문제와 반일감정을 정치적 적대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데마고기로 이용하고 있다. 반세기 전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매카시즘을 비판했던 인간들이, 무려 21세기에 친일파 몰이에 나서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반일선동 때 벌어진 일본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일본 브랜드를 사용하는 자국민에 대한 인민재판은 한국인으로서 자괴감(自愧感)마저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K-콘텐츠라며 세계로 문화를 수출한다는 나라가 이런 전근대성을 애국과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건 그야말로 모순의 극치였다. 한편 당시 집권 여당은 한일갈등 사태가 다가오는 선거 승리에 유리하다는 내부 자료를 돌려보고 있었다. 일제의 전체주의가 지도층의 이런 짓으로 자행될 수 있었다.
‘첨단 물질문명을 누리는 未開한 국가’
지금이야말로 정신과 문화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고 생각한다. 뭇 한국인보다 성숙한 담론을 나누는 개발도상국의 한 국민을 보며 확신했다. 우리는 미개(未開)하다는 말에 예민하다.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게 그 뜻이다. 근본적으로 저열한 게 아니라, 아직 발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필자는 한국이 첨단 물질문명을 누리는 미개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인식하는 국가적 위상에 비해 정치인들 수준부터 역사라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으로 미개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반세기 전만 해도 밥 굶을 걸 걱정했던 나라가, 전 세계에 유례없는 발전으로 갑자기 경제적 선진국이 되었으니 겪는 현상인데도, 이를 인정하는 게 스스로의 자존감을 해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스스로 우물 안에 들어가 우리만 잘났다고 개골개골 아우성인 거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과정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애국과 정의의 이름으로 입막음하고, 그렇게 스스로 건강하고 발전적인 담론을 가로막는 한, 우리는 끝내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친구나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 있다. 미국 사람들이 실제 사는 모습을 보며 놀라는 것이다. “미국은 잘사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왜 이리 가난한 사람이 많으냐”는 질문을 자주 한다.
흔히들 상상했던 미국과 퍽 다른 인상의 진짜 미국. 그 경험은 미국 땅을 밟자마자 시작된다. 한국 도로에서 자주 보이는 고급 외제차가 미국 도로에서는 흔하지 않다. 오히려 한국보다 한국 차를 더 많이 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또한 연식이 오래된 차들이 많다. 게다가 곳곳에 긁힌 흔적이 있거나, 찌그러지고 부서진 부분들이 있는데도 당당하게 도로를 누빈다. 한국에서는 이런 낡고 망가진 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사고가 덜 일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수리를 하기 때문이다. 차의 외견이 탑승자의 재력을, 지위를, 가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거리로 이동하면 그때부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깜짝 놀란다. 어디에나 노숙자들이 보이고, 노숙자로 오해받을 법한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한국인의 기준에서 보면 ‘촌스럽다’. 집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다들 정원과 수영장이 딸려 있는 크고 세련된 집에서 살 것만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주거 형태도 사람들 행색만큼이나 가지각색이다.
“한국인들은 딱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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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고속도로에서 찍은 차 사진. 차 문은 찌그러져 있고, 뒷유리는 깨져서 검은색 비닐을 붙여뒀고, 번호판은 어디 갔는지 종이에 번호를 써놨다. 이런 차들은 생각보다 흔하다. |
“한국인들은 딱 보면 알 수 있다.”
동양인 사이에서도 한국인을 알아보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국인, 특히 한국 청년들의 경우 소위 말하는 ‘스타일’이 좋다. 잘 꾸민다는 거다. 미국의 지인들도 한국에서 온 필자의 주변인들을 보며 감탄하곤 한다. 하나같이 ‘Well-dressed(옷을 잘 입은)’란다. 식사 자리 같은 데에 가면 당황하며 “왜 이리 차려입었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한국인이 유독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미적(美的) 감각이 뛰어나 외관에 신경을 더 쓰는 걸까. 그렇지 않다. 필자는 이 차이가 ‘개인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유독 타인(他人)의 시선에 예민하다. 또 동시에 타인에게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행색을 하고 있고, 어떤 차를 타고, 어디에 사는지 알고 싶어 하고, 동시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한다. 남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동시에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에 신경 쓴다. 이런 식으로 불특정 다수의 평가가 ‘집단의 기준’이 되고, 이런 집단의 기준이 개인을 잡아먹고 있다. 강한 공동체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동양권 문화 내에서도 한국이 유독 이런 측면이 강하다.
‘名品 계급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대학, 직업, 주택, 결혼, 자녀 등등 각각의 삶 곳곳에 주요 평가항목이 있고, 우리 모두는 수능을 치는 학생들처럼 일종의 등급으로 나눠진다. 심지어 이는 소비생활이나 문화생활 같은 영역에까지 퍼져 있다. 다른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은 명품 브랜드에 뭐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는 ‘명품(名品) 계급도’라는 게 존재한다. 회사 평사원은 이런 명품을 써야 하고, 사장은 이런 명품을 써야 한다는 ‘집단의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잘나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각종 유행부터, 사회경쟁력이라는 명분으로 세계 최다 수준으로 퍼져 있는 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좁디좁은 땅 덩어리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타인들로부터 평가받고, 또 타인들을 평가하며, 그렇게 개인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사회라는 피라미드 계급도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숨 막히는 사회 분위기는 ‘비슷함’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는 ‘차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같은 피부색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간다. 인종과 문화적 다양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경제적 다양성을 비롯해 소비나 취향의 다양성도 적다. 다들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사회정의를 부르짖다 보니 실감하지 못하지만, 사실 통계를 살펴보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소득분배가 상당히 균등한 편에 속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평등을 느끼고, 박탈감을 느끼고, 그래서 불행하다 생각한다.
‘헬조선’의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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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말고는 뭐든지 하겠다며 구걸을 하고 있는 백인 빈곤층. 미국의 빈곤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
개개인의 선택과 배경에 따라 너무나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 그래서 애초에 각각의 삶을 단일 잣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타인의 삶에 관심이 적고,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며, 동시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인종이나 집안처럼 타고난 요소부터, 진로나 취향 같은 선택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평등’과 같은 비슷함의 관성에서 벗어나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다양성을 발현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분위기가 개인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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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결혼식. 친구 부부는 좋아하는 집 근처 공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돈은 거의 들지 않았다. 필자의 경우 서류 작업만 하고 결혼식은 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지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부부는 각자 원하는 단체에 기부를 했다. 한국의 경우 ‘보여주기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크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불행하다. 유행하는 옷을 입고,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최신형 스마트폰을 들고서 ‘헬조선’에 대해 불평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 원인으로 자꾸만 경제적 불평등 등 물질적인 부분만을 이야기한다. 이런 담론이 사람들을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2. 세계적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미국의 평범한 백인 가정에서 나고 자란 아내 제니퍼는 한국에서 잠깐 영어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원어민 교사를 고용하는 영어 유치원에서 일했는데 여기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미술 시간, 아이들로 하여금 스케치북에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서 이를 영어로 설명하게 하는 게 그날의 학습활동이었다. 그림 그리기가 시작되고 아내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칭찬을 하거나 조언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그림이 하나 보였다. 새빨간 크레파스로 여기저기를 마구 칠해둔 그림이었다. 자세히 보니, 한 인물이 칼을 휘둘러 여러 명을 학살하고 있는 그림이 아닌가. 아내는 깜짝 놀라 아이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그러자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답했다. 닌자-아마도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만화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가 되어서 일본인들한테 복수하는 걸 그렸다고.
인종차별과 학살. 아이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살벌한 그림. 어쩌면 아돌프 히틀러가 유년 시절에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아내는 아이에 대해 큰 우려를 느껴 엄마라도 된 듯한 마음으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특정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차별과 폭력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에 대해 나름 설명했지만, 아이가 이를 이해할 턱이 있나.
그날 아내는 원장을 찾아가 진지하게 건의했다. 아이의 부모에게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알리고, 여의치 않으면 전문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원장은 이를 거절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취급하며, 오히려 이 철없고 순진한 미국 처자가 뭘 잘 몰라서 과민반응한다는 식으로 넘겼다. 그렇게 언쟁이 시작됐고, 언쟁의 끝은 원장의 일방적인 말로 마무리됐다.
“한국인으로서 그럴 수 있다. 너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 당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아내는 “너는 당해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에 몹시 황당했었다고 후술했다. 원장은 당해봤나 보다.) 외국인은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식의 태도. 아내는 결국 설득을 포기했고, 그날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Oink–Only in Korea’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위 사례와 같이 자신들의 상식과 이해에서 크게 벗어난 일들을 종종 경험한다. 아내만 이런 경험을 한 게 아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오곤 한다. (개중에는 ‘Oink - Only in Korea’와 같이 한국에 대한 풍자와 냉소로 가득한 대형 커뮤니티가 있을 정도다.) 전 세계에서 온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경험한 ‘이상한 일들’에 대해 공유하고,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상담을 하는 식이다.
최근 이런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이는 사연이 있다. 러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한국 내에서는 러시아인에 대한 각종 차별과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 편의점이 입구에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며 ‘러시아인은 입장 금지’라는 팻말을 써 붙여 외국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유명 러시아인 유튜버는 전쟁이 터지고 별안간 한국인들의 집단적인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푸틴 정부의 행보를 지지한 적이 없는데도 대대적인 비난 여론이 조성되고 구독취소 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한국에는 생각보다 많은 러시아인이 살고 있다. 학생부터 시작해 농사나 공장 일을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이 이들을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히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와서 유흥주점 종업원으로 일하는 러시아 여성이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취객에게 폭언은 물론 신체적 위협까지 당했다는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봉변을 당하는 이들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들이다. 그들 절대다수는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권위주의 정부가 싫어 러시아를 떠난 사람도 다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전쟁의 가해자(加害者)라도 되는 듯한 취급을 받으며, 무려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개인을 동일시하며, 국가의 잘못을 근거로 개인을 적대하는 이런 인종차별적 문제. 전 세계에 문화를 수출한다는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필자는 그 이유가 ‘근대적 인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개인이 분리된 존재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런 전근대성(前近代性)에 기생(寄生)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착취해왔다.
3. 정신적 개발도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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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고도 8000피트에 지어진 마추픽추 고산도시의 전경. 독립된 이후에 발견되어 망정이지, 스페인 제국이 이를 먼저 발견했다면 지금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안데스 산맥의 수많은 금은보화와 유적들이 스페인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
식민 지배를 경험한 개발도상국의 국민들이 과거사 문제에 있어 얼마나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면 한국인 대다수는 깜짝 놀랄 것이다. 여행 중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물어보시라. 한국에서는 바로 친일(親日) 매국노 소리를 들을 이야기를 할 것이다.
얼마 전 페루 여행 중에도 페루 고산(高山)지대에서 길잡이를 해주는 분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잉카제국이 멸망당한 후 19세기 초까지 안데스 산맥 일대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다. 이 시기 스페인 제국은 지금의 페루 지역에서 각종 만행을 저지른다. 근대화와 함께 병합을 추진했던 일제(日帝)와는 그 결부터가 다른 철저한 약탈이었다.
“특별히 스페인인을 더 미워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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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중부에 위치한 테오티우아칸 유적의 모습. 기원전 2세기경에 지어진 걸로 추정되는 고대 유적. 중남미에는 고대 문명의 장엄한 유적들이 늘어서 있다.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고대 보물이 스페인 제국에 의해 용광로에 들어가 금괴가 되었다. |
“특별히 스페인인을 더 미워하지는 않는다. 각 지방 출신에 대한 선입견이 있듯, 스페인인에 대한 선입견도 그런 종류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냐고 질문하자 이렇게 답했다.
“과거 사건들에 분노하지만, 그 역시 페루 역사의 일부다. 분노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 스페인인들이 잘못을 한 거지 지금 현대 스페인인들과는 관계가 없다.”
길잡이의 말을 필자가 임의로 의역(意譯)하고 요약했지만, 그는 아주 확고하게 현대 스페인 정부나 스페인 국민에 대한 범(汎)대중적 적개심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물론 산악 길잡이인 그는 전 세계 여행객을 상대한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접하며 비교적 더 열린 사고(思考)를 갖게 됐을 것이다. 필자가 한국 내의 반일(反日)감정과 일본인에 대한 각종 인종차별 등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페루의 대중적 기준에서 봐도 한국의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 여론은 이상한 것이었을 터다.
우리 안의 전체주의
한국인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한반도 주민들에 대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차별 문제는 물론이고, 일제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봐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2022년의 대한민국은 정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과거를 조명하고 공부하고 있는지 또한 의문이 든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해괴한 접근 방식으로 과거사를 왜곡하고 있고, 학술적 객관성에 따라 역사를 논하자는 주장을 친일 매국 사관 등으로 매도하며 스스로를 자기 세뇌하고 있다. 논리나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정과 애국에 호소하며, 이제는 도그마가 된 이른바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강요한다. 오늘날 일본과 관련된 근현대사 문제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 신앙’에 관한 문제에 가깝다. 불과 한 세기 전의 역사가 왜곡과 과장으로 점철된 대중매체에 의해 범국가적으로 공유(共有)되는 유사(類似) 기억이 되고 있다.
최악은 정치인들의 행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과거사 문제와 반일감정을 정치적 적대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데마고기로 이용하고 있다. 반세기 전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매카시즘을 비판했던 인간들이, 무려 21세기에 친일파 몰이에 나서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반일선동 때 벌어진 일본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일본 브랜드를 사용하는 자국민에 대한 인민재판은 한국인으로서 자괴감(自愧感)마저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K-콘텐츠라며 세계로 문화를 수출한다는 나라가 이런 전근대성을 애국과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건 그야말로 모순의 극치였다. 한편 당시 집권 여당은 한일갈등 사태가 다가오는 선거 승리에 유리하다는 내부 자료를 돌려보고 있었다. 일제의 전체주의가 지도층의 이런 짓으로 자행될 수 있었다.
‘첨단 물질문명을 누리는 未開한 국가’
지금이야말로 정신과 문화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고 생각한다. 뭇 한국인보다 성숙한 담론을 나누는 개발도상국의 한 국민을 보며 확신했다. 우리는 미개(未開)하다는 말에 예민하다.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게 그 뜻이다. 근본적으로 저열한 게 아니라, 아직 발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필자는 한국이 첨단 물질문명을 누리는 미개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인식하는 국가적 위상에 비해 정치인들 수준부터 역사라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으로 미개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반세기 전만 해도 밥 굶을 걸 걱정했던 나라가, 전 세계에 유례없는 발전으로 갑자기 경제적 선진국이 되었으니 겪는 현상인데도, 이를 인정하는 게 스스로의 자존감을 해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스스로 우물 안에 들어가 우리만 잘났다고 개골개골 아우성인 거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과정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애국과 정의의 이름으로 입막음하고, 그렇게 스스로 건강하고 발전적인 담론을 가로막는 한, 우리는 끝내 열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