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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한국의 헤리티지재단으로 키우겠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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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에 박정희재단 이정표, 박정희 동상 세운다
⊙ “박정희는 좌·우·중도가 아닌 그 위를 걸어간 분”
⊙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 데려와 뛰노는 공간으로 바꿀 것

유영구
1946년생. 경기고·연세대 법학과 졸업, 미국 트리니티대 명예문학 박사, 일본 후쿠이공업대 명예박사 / 명지학원 이사장·LG트윈스 프로야구단 고문·한국국가기록연구원 이사장·대한체육회 부회장·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역임. 現 명지의료재단 명예이사장·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제5대 이사장 / 체육장관표창·봉황장·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제5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유영구 전 KBO 총재.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이라고 말합니다. 좌파, 우파, 보수, 진보, 연령대에 따라 각기 다른 평가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존경심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이니까요.”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든 것이 함축된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명지학원 이사장,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이사장, KBO 총재를 지낸 유영구씨가 지난 3월 제5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하 박정희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앞으로 3년간 박정희재단을 이끌게 됐다.
 
 
  飮水思源
 
  “제 인생에 있어 마지막 봉사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자리가 많이 무거워요. 박정희(朴正熙)라는 인물이 훌륭하고, 업적이 많아서 누가 와도 잘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 여건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니까요. 박정희 대통령을 이해할 만한 정권이 들어섰으니, 그동안 못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갈 생각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땠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프랑스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에 대해 ‘좌도, 우도, 중도도 아니다. 그 위를 걸어갔다’고 평가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그대로입니다. 어느 정당이든, 사상이든, 좌우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제약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일부의 잘못된 평가는 오해에서 비롯됐다고요.
 
  “우리의 오천년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이만큼 풍요로운 적이 있었습니까? 그 토대를 박정희 대통령이 마련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일부에서는 ‘그럼 박정희가 잘살게 했느냐? 근로자의 피땀은 없었냐?’고 합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를 평가할 때 단원이 연주를 훌륭하게 해서라고 말하기보다 지휘자의 역량이 뛰어났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강한 국가가 되는 데 사회 각층이 노력한 것은 맞지만, 지휘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 절하할 수는 없습니다.”
 
  ― 당연한 얘기인데, 여러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흠집을 내려고 하죠.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샘을 판 사람에 대한 고마움, 수고는 기억을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였던 일본과 중국이 1972년 일중(日中) 수교를 맺었죠. 덩샤오핑(鄧小平)과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자민당 총재의 결단으로 이뤄진 일입니다. 두 사람이 수교하고 덩샤오핑이 일본을 답방했을 때 다나카 총재는 미국 록히드사 여객기 도입과 관련한 ‘록히드 사건’으로 가택에 구금 중이었습니다. 세간의 관심은 ‘덩샤오핑이 구금 중인 다나카 총재를 만나겠느냐’였습니다. 그때 덩샤오핑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고 말하면서 다나카 총재를 찾아가 한 시간 반 동안 환담을 했습니다. 물을 마실 때 그 물의 수원을 생각한다는 뜻이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것입니다. 우리를 풍요롭게 살게 한 그분을 잊지 말아야죠.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도 1년에 한두 번은 기념관을 찾아 그분을 기리고, 젊은이들도 국가 부강의 토대를 닦은 그분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대에 걸친 박정희 일가와의 인연으로 이사장 맡아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전시실 로비.
  유영구 이사장이 박정희재단 일을 맡게 된 것은 박 대통령 일가와의 2대(代)에 걸친 인연 때문이다. 선친은 학원법인 명지학원의 설립자이자 충청북도 산업국장, 내무부 통계국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토통일연구원 장관을 지낸 방목(邦牧) 유상근 선생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명지보국(明知報國)’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줄 정도로 유상근 선생을 아꼈다. 유영구 이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부친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자주 접했고, 박근혜 전(前) 대통령, 박지만 EG 회장과도 교분을 쌓아왔다.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고, 국무회의에 들어갔다 오시면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정부가 돈을 투자해 시골의 기차역을 재정비하는 일을 논의할 때였답니다. 다들 역사에 꽃을 심자고 했는데, 한 분이 ‘콩을 심자’고 했대요. 다른 장관들이 ‘콩을 심으면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콩 서리가 빈번할 텐데’라며 반대를 했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이 ‘콩 서리하는 것도 우리 국민 아닙니까?’라고 해서 모두 숙연해졌답니다.”
 
  ― 저도 얘기만 들었습니다만, 국민이 배곯던 시절이었죠.
 
  “박정희 대통령 유품을 보면 값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친이 하루는 통일원에서 대통령과 회의하고 식사를 하시고 오셨습니다. 청와대에서 식사를 준비한다기에 뭘 가져오려나 기대를 했는데 햄버거였다고 하더군요. 소탈하고 인간적이며,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분이었습니다. 많은 분이 박정희 대통령의 면모를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젊은 세대는 그분에 대해 잘 모릅니다. 박정희의 자조, 자립, 협동 정신, 그것을 후대가 어떻게 올바르게 기억하도록 하느냐가 재단의 임무입니다.”
 
 
  젊은 세대에 박정희 업적 알리는 것이 임무
 
  ― 후대들이 박 대통령을 마치 미국 링컨 대통령처럼 역사 속의 인물로 느끼는 날이 오겠죠.
 
  “요즘 세대들은 ‘우리는 원래 잘살았어요’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요. 세계에서 이만큼 급속도로 잘살게 된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회의에 참석했을 때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홀대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1인당 GDP가 고작 128달러에 머물고 있었지만, 필리핀은 200달러로 동남아시아에서 선두그룹에 있었죠. 동행한 수행원들이 느낄 정도로 박 대통령을 홀대했는데, 그때 박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10년 뒤에 저 사람을 꼭 다시 만난다’고 했습니다. 그즈음에 우리나라와 필리핀의 경제 상황은 역전돼 있었습니다. 과감하게 산업화를 진행한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죠.”
 
  ―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분이죠.
 
  “당시에 야당에서 ‘농업 인구가 500만 명인 국가에서 무슨 산업화냐. 농업으로 먹고살아야지’라고 비난했습니다. 참 희한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은 엘리트 코스인 사범학교 교육을 받은 분 아닙니까. 당시 사범대는 수학, 영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배워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개발계획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국가 경제를 두고 종합적 판단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봅니다. 하늘이 우리나라에 내린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즘으로 치자면 슈퍼 컴퓨터처럼 두뇌가 작동한 겁니다.”
 
 
  좌파도 의식적으로 반대할 뿐, 마음속으로는 존경할 것
 
  ― 박정희 대통령의 여러 업적 중 경제 부문을 주로 알릴 생각이십니까.
 
  “적어도 그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좌파도 의식적으로 반대할 뿐, 마음속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봅니다. 지난 5년 동안 진행이 늦춰졌던 일들을 하나씩 할 겁니다.”
 
  ― 마포구 상암동이 외진 곳이어서인지, 여기에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죠.
 
  “표지판 사인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전(前) 정권에서 여러 제약을 가했습니다. 유명한 조각가가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기증하겠다고 했는데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동상도 못 세웠습니다. 조각가가 보관 중인데 조만간 박정희 대통령 동상 세우기도 해야 합니다.”
 
  ― 지난 5년간 하지 못한 일을 하려면 바쁘시겠습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나아가야죠. 이념에 경도되어 박정희라는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은 곤란합니다. 좌파에서 늘 얘기하는 것이 장기 집권인데, 저는 그 덕분에 보수나 진보의 색이 오히려 옅어졌다고 생각합니다. 5년만 집권하면 자기 색깔을 고집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하다 보면 보수만으로 국정 운영이 되지 않으니 다른 이념도 받아들입니다. 가령 건강보험을 시작한 것은 보수 쪽에서 보면 다소 놀랄 일이지만 밀어붙였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지만 박 대통령은 ‘1981년에 핵무기만 개발하면 이제 내가 그만둬도 북한의 위협은 없을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게 본심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부에서 ‘박정희의 숨겨진 재산이 몇조원이다’라는 둥 허황한 얘기를 여전히 늘어놓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1만원 후원금 내는 백만 명 모집에 매진할 것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전시실 모습.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연도별로 소개하고 있다.
  유영구 이사장은 취임 이후에 박정희재단 소개 팸플릿 제작을 주문하는 등 아주 기초적인 작업부터 지시했다고 한다. 유 이사장은 “두 명의 독지가에게 5000만원씩 1억원의 후원금을 받는 것보다 1만원 후원금을 내는 100만 명을 모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했다.
 
  “박정희재단은 기부금으로 운영됩니다. 월남참전용사, 재향군인회, 새마을운동협회 등 재단 후원에 열정적인 분들이 있지만, 저는 1만원을 내는 회원을 많이 모으려고 합니다. 그런 회원이 많아야 재단에 힘이 생기거든요. 박정희기념관을 많은 분이 찾도록 홍보하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 기념관이 개관된 이후 관람객이 15만 명을 돌파했죠.
 
  “너무 적은 숫자죠. 박정희 대통령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감회에 젖어 눈시울을 붉히는 어르신들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젊은 부모들이 어린 자식을 데리고 와서 뛰어놀 수 있는 공간, 누구나 문턱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실제로 유영구 이사장은 과거 경찰박물관을 론칭했을 당시에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1년 방문객이 15만 명을 돌파했다. 그는 당시 경찰박물관을 아이들을 위한 체험장으로 만들도록 조언했다. 아이들용 경찰복, 쇠고랑, 권총을 체험관에 전시해 아이들이 편견 없이 경찰관 체험을 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을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또 기성세대에는 ‘음수사원’의 심정으로 1년에 한두 차례 방문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 박정희라는 위대한 분을 기념하는 곳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저는 기념사업이라는 것이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하늘에서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 그리움에 눈물을 쏟는 곳으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젊은이들이 편하게 찾고, 아이들이 ‘우리 할아버지들 때 저렇게 못 살았구나. 박정희 할아버지가 우리가 잘사는 데 기틀을 다졌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나아가 헤리티지재단과 같은, 국가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 유족들도 그걸 원하겠지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때 뵐까 했는데 못 봬서, 조만간 대구에 내려가서 뵐 생각입니다. 박지만 회장은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고 각종 루머에도 시달렸지만, 생각이 상당히 건전한 분입니다. 판단력이 뛰어나죠. 그분들도 재단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실 겁니다.”
 
  ― 지난해 9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구미시에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이 개관했죠.
 
  “저희 재단에서 유품 5600여 점을 위탁했고, 근현대 산업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관입니다. 박 대통령이 사용하던 은제 담뱃갑, 재떨이, 가죽가방 등이 전시돼 있는데 더욱 활성화되도록 도울 예정입니다.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 유품을 찾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유품을 보관 중이던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2, 3세들이 소지품을 보관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보이는데, 그분들께 기증받는 일을 계속할 겁니다.”
 
  ― 손자들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잘 모르죠.
 
  “아무래도 낯설죠. 30~40대 기성세대들도 박정희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재단에서 ‘박정희 키즈’를 만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세대들에게 소상히 알릴 계획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초기 재임 시절 사진만 제대로 전시하더라도 오늘날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연히 느낄 겁니다.”
 
 
  2011년 명지학원 사학비리의 실체
 
  유 이사장이 기자들을 만난 것은 2009년 KBO 총재로 취임할 때 취임식장에서 기자회견을 했던 것이 전부다. 이후 그는 2011년 명지학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일 때 수백억원대의 비리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수감 생활을 했고, 2012년에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런 그가 10년이 지나 박정희재단 이사장으로 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다. 자신도 “10년 만이라 망설임이 많았다”고 했다.
 
  “세상일에 염증이 생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재단으로 부터 이사장직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선뜻 답하지 못하고 몇 달 동안 고민했던 이유입니다. 그래도 이 일만큼 제 인생에 있어 보람된 일이 없을 것 같더군요. 박정희 올바로 알리기에 제 혼신의 힘을 다할 생각입니다.”
 
  ― 박정희재단과 연관은 없지만, 먼저 말씀해주시니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간단한 사건이었습니다. 명지재단이 주식의 100%를 출자한 명지건설이 2009년에 경기도 용인시에 실버타운을 착공했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였는데, 노인들에게 혜택을 준다는 이유로 실버타운이 ‘1가구 1주택’에서 제외되도록 했습니다. 명지건설이 실버타운을 분양했는데 첫날 97%가 분양 완료됐습니다. 굉장히 인기가 좋았죠. 그런데 국세청이 반대해서 정부가 실버타운을 ‘1가구 1주택’에 포함하도록 했습니다. 1가구 2주택이 되니까, 실버타운 계약을 맺었던 고객의 85%가 해약했고 명지건설이 부도 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제가 명지학원 이사장으로서 상황을 보니까 명지건설이 부도나면 영세업자의 연쇄 부도로 이어져 사회문제가 되겠더군요. 그래서 명지학원 법인이 명지건설에 500억원을 지원했는데 그게 배임 횡령이 된 겁니다.”
 
 
  배임 횡령 혐의로 구속됐으나, 벌금·추징금 10원도 없어
 
  ― 개인 착복, 뭐 그런 거 아니었습니까.
 
  “학교 법인에서 10원도 챙긴 것이 없습니다. 제가 500억원을 배임 횡령했다는데, 나중에 재판부는 벌금, 추징금을 10원도 선고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법인 돈을 유용했다면 당연히 뱉어내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부도날 뻔했다가 살아난 명지건설로 인한 피해자도 한 명도 없었고, 제 배임에 동조한 공범도 한 명도 없습니다. 명지건설 부도를 막기 위해서 그런 결정을 한 저, 딱 한 명만 구속됐습니다.”
 
  ― 개인 유용이 아니고 피해자, 공범도 없는데 구속됐다고요.
 
  “마지막 재판 때 판사가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떤 결정을 하겠느냐’고 해서 제가 ‘똑같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제가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일종의 괘씸죄로 7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학교 법인에 여유 자금이 있고, 학교 법인이 100% 소유한 회사로 인해 수백 명이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그걸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저는 똑같은 결정을 할 겁니다.”
 
  ― 왜 이런 얘기를 여태 안 했습니까.
 
  “해명하고 다닐 이유도 없고, 그냥 세상이 싫더라고요. 명지건설 영세업자들이 오히려 재판부에 저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으니까, 적어도 직접 당사자인 그분들은 알 거 아닙니까. 그럼 됐지, 뭘 계속 얘기합니까. 달랑 집 한 채 있는 것도 명지학원 재단에 기증했습니다.”
 

  ― 그럼 지금 무주택자세요?
 
  “네. 이태원에 30평짜리 4층 건물의 4층에 살고 있는데 재단에 기증했습니다. 제가 당장 살 곳은 있어야 하니까 ‘나 죽을 때까지는 이 집에 살게 해주고, 그다음 재단에서 알아서 처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육부에서는 그것도 편법 지원이다 뭐다 말이 많더군요(웃음).”
 
  ― 사학 법인들이 비리에 종종 휩싸이니까 제목만 보고 ‘명지학원’도 그런 비리겠거니 했는데요.
 
  “재판부가 오히려 밝혀줬잖습니까. 구속은 했는데, 추징금도 벌금도 선고할 것이 없다는 걸요. ‘공범도 없고, 저 혼자 했다’니까 검사가 그렇게 진술하면 안 된다더군요. 그런데 그게 사실인 걸 어쩝니까. 저는 복잡한 게 싫어요. 학교 법인에서 돈을 착복하면 숨겨야 하는데 그런 거 못 합니다. 명지학원 이사장을 20년 했는데 땅 산 적도 없고, 주식 산 적도 없고, 통장도 없어요.”
 
 
  국가기록원 이사장 맡아 해외 古書 발굴
 
  인터뷰를 하기 전에 질문할까 망설였는데 유영구 이사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박정희재단과는 무관한 과거의 일이지만, 그의 소신과 신념이 앞으로 그가 얼마나 저돌적으로 박정희재단을 이끌어갈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유영구 이사장은 거침없었고, 굉장히 담백한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명지학원 이사장을 하면서 여기저기 관여하고 그 결과로 비리에 연루됐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거든요. 저는 과거에 대학총장을 선임할 때 ‘학교 팔아먹는 것 빼고는 총장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늘 말했습니다. 고건 전(前) 국무총리, 송자 전 총장, 선우중호 전 총장을 뽑았을 때 항상 같은 말을 했습니다.”
 
  ― 진짜 일절 학교에 관여하지 않으셨습니까.
 
  “취임식에 딱 한 번 가고 학교에 간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학교 직원들이 왜 안 오느냐고 연락이 오면, ‘태양이 2개 뜨면 헷갈린다. 학교와 관련된 건 총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을 보면 제가 시간이 많으니까 참 다양한 일을 했잖아요. 학교에 관여하느라 바빴다면 국가기록원이며 문화유산국민신탁이며 했겠어요?”
 
  ― 이력을 보니 국가기록원 이사장을 하셨더군요.
 
  “명지대에 관여하기보다 제 스스로 재밌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야구 구경을 좋아해서 야구인들과 30년 이상 인연을 쌓았고, LG트윈스 고문을 8년 동안 했습니다. 야구인들과의 인연 덕분에 나중에는 KBO 총재를 했죠. 정말 신나게 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유홍준씨가 문화재청장을 할 때 문화유산국민신탁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고요. 국가기록원은 김학준씨와 둘이 만들었습니다.”
 
  ― 국가기록원은 왜 만드셨나요.
 
  “우리가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이 약하고, 관리가 안 돼서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환자에 관한 기록이 정확하면 진료가 쉽지만, 기록이 틀리면 어렵잖습니까. 교수들 몇백 명이 저희 일에 합류하고, 김학준씨가 연구원장, 제가 이사장을 맡았죠.”
 
  ― 명지대 안에 ‘LG연암문고’도 만드셨던데 기존 도서관 외 별도의 도서관을 만드신 겁니까.
 
  “고서 모으는 취미가 있습니다. 한적고서(동양고서)는 서울대 규장각이 충분히 소장하고 있는데, 1950년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를 다룬 서양에서 발간된 책은 많지 않더라고요. 서양 국가를 다니면서 한국을 다룬 책을 모았습니다.”
 
  ― 1950년 이전의 책을 주로 모은 이유가 있습니까.
 
  “1950년 이후, 서양에 한국이 알려진 것은 6·25전쟁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10권 중 9권은 전부 그 얘기뿐이에요. 서양에서 바라본 우리의 근현대사 기록이 있을 텐데 싶어서 ‘한국고서찾기운동’으로 1950년 이전의 기록을 집중적으로 찾았습니다. 또 고병익 당시 서울대 총장께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고 총장이 고서를 많이 모으려면 자금이 꽤 필요할 것이라 조언해줘서 LG의 후원을 받아 고서를 수집했습니다. 명지대 안에 있는 별도 도서관에 1만2000여 권 정도가 있습니다. 희귀 도서가 많아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을 만난 기록, 덕수궁에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가 만난 기록 등 흥미진진한 근대사 기록이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 위대한 어른으로 평가할 때”
 

  ― 명함만 명지학원 이사장이지 다른 일에 몰두하셨네요.
 
  “제가 원래 두루두루 관심이 많습니다. 좌파, 우파, 여당, 야당, 나이, 신분에 상관없이 친구가 많고요. 제가 실없는 소리 많이 해서 주위 사람들 웃게 하자는 생각이 강합니다. 명지학원 이사장이 제게 준 것은 감방 생활이네요(웃음). 그런데 거기서도 재밌더라고요. 제가 복역 중일 때 이상득 전 의원, 최시중 고문, 천신일 회장 등이 있었거든요. 제가 그 안에서 웃고 지내니까 최시중 고문이 ‘뭐가 그렇게 즐겁나’고 묻더군요. ‘집사람이랑 딸들, 여자들 잔소리 안 들어서 살 것 같다’고 했습니다.”
 
  ― 진심이셨나요.
 
  “제가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하도 집사람이 잔소리해서 하나님께 ‘여자들 잔소리 좀 안 듣게 해주세요’ 기도했거든요. 하긴 나중에 집사람이 저한테 인생을 잘못 산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더군요. 지인들이 5만원, 10만원 이렇게 영치금을 넣어줬습니다. 영치금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제가 지정한 개인 계좌로 넘어갑니다. 저를 챙겨주는 지인이 많다 보니 집사람 계좌로 매월 200만~300만원 정도 넘어갔나 봐요. 집사람이 그 얘기를 하기에 ‘내가 300만원 받고 교도소에 취직했나’ 싶긴 합디다(웃음).”
 
  ―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유쾌하시네요. 박정희재단에도 그런 식으로 많은 분의 관심을 끌어오시겠죠.
 
  “그런 일 하라고 제가 이 자리에 있지 않겠습니까. 손학규 전 지사가 경기고등학교 동창인데 제가 박정희재단으로 왔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네가 갔으니까 내가 한 번 가야지’ 하기에 좋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더는 좌, 우, 중도 이런 이념은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위대한 어른으로 평가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참, 요즘 제일 관심사는 ‘박정희TV’인데 아이디어 없어요? 유튜브야말로 가볍게 가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게 제일 고민이네요.”
 
  시종일관 유쾌했던 유영구 이사장과의 대화는 결국 ‘박정희TV’를 끝으로 끝났다. 그의 쾌활한 웃음으로 보건대 그가 앞으로 박정희재단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올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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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2022-07-13) 찬성 : 0   반대 : 2
명지대학교 수습이나 잘 하세요. 명지대학교 사고 쳐놓고서 박정희재단 맡으면 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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