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항, 구호물자 받던 부두에서 세계 5위 수출입항으로
⊙ 산 자와 죽은 자의 共存, 아미동 비석마을
⊙ 보수동 책방골목엔 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
⊙ 再會의 장소로 약속한 다리 영도대교
⊙ 돼지 부산물로 탄생한 전쟁의 부산물 돼지국밥
⊙ 고마운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곳 유엔기념공원
⊙ 새로운 발견, 피란수도 기간은 1023일이 아닌 1026일
⊙ 산 자와 죽은 자의 共存, 아미동 비석마을
⊙ 보수동 책방골목엔 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
⊙ 再會의 장소로 약속한 다리 영도대교
⊙ 돼지 부산물로 탄생한 전쟁의 부산물 돼지국밥
⊙ 고마운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곳 유엔기념공원
⊙ 새로운 발견, 피란수도 기간은 1023일이 아닌 1026일
- 피란 행렬.
1·4후퇴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난 반공소설가 김동리(金東里)는 《밀다원 시대》에서 부산을 이렇게 묘사했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떠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곳….”

2020년 8월 18일은 부산이 전시수도(戰時首都)가 된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25 남침 전쟁으로 북한군이 남하하자 이승만 정부는 수도를 옮겨야 했다. 수도는 대전(6월 27일), 대구(7월 16일)를 거쳐 부산까지(8월 18일) 내려갔다. 대구 북방을 둘러싼 낙동강 방어선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토 수호의 최후 보루가 된 부산은 1953년 8월 15일 정부가 환도(還都)할 때(1차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2차 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까지 두 차례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대통령 관저
피란정부는 경남도청 청사(현 동아대 석당박물관·부산 서구 부민동)를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삼았다. 1925년에 만들어진 도청사(道廳舍)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물이었다. 임시정부가 입주하여 ‘임시 중앙청’이라고도 불렀다. 일제는 부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파악하고는 당시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겼다. 경남도청(1925~1950년), 제1차 임시수도 정부청사(1950년 9월 29일~10월 27일), 제2차 임시수도 정부청사(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 경남도청(1953~1983년), 부산지방검찰청(1984년 11월~2001년 9월)을 거쳐 현재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임시 중앙청’에 입주하지 못한 문교부·보건부·심계원(審計院·감사원의 전신)은 부산시청(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상공부는 남선전기(현 한국전력공사 토성동 지점), 국회는 부산문화극장(제2대 8회 국회)·부산극장(제2대 10~11회 국회)·무덕관(武德館·제2대 11~16회 국회)을 청사로 삼았다. 경남도청 바로 옆에 자리한 무덕관은 1926년 지어진 건물로 부산·경남 지역의 각종 무도대회, 웅변대회가 열리던 곳인데 1951년 6월 27일부터 국회 청사로 활용됐다. 동아대가 나중에 무덕관을 헐고 국제관을 새로 지었다. 과거 부산극장 자리에는 새로운 극장이, 부산문화극장 건물에는 은행이 입점해 있다.
임시수도 정부청사를 나와 왼쪽 언덕길로 약 200m를 걸어 올라가면 ‘부산 경무대’로 불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현 임시수도기념관·서구 부민동)가 나온다. 동서양의 양식을 혼합한 2층 목조와가(木造瓦家)로 1926년에 만들어졌다. 경남도지사 관사(1926~1950년)로 쓰이다가 피란기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다. 입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있는 서양식 응접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전시 지도부가 이곳에서 국정과 외교 업무를 논했는데, 우아한 벽난로와 채광 좋은 L자형 창(窓)이 인상적이다. 입구 정면에는 복도가, 왼쪽에는 화장실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1층(253㎡·76평)은 구분된 공간만 10곳에 이를 정도로 넓고 복잡했다. 서재, 내실, 거실, 식당, 주방, 욕실, 조리사실, 경비실, 화장실 등이 있다. 각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복도가 나 있고,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다. 2층(85㎡·26평)에는 집무실과 마루방이 있다. 대통령 내외와 수행비서들이 피란생활한 이 관저는 1953년 환도 이후 1983년까지 경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됐다.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도청을 옮기자 1984년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개관했다.
관저 뒤편에는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이 있다. 이 건물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2012년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전시관 뒤편에는 피란 당시 임시학교 모습을 재현한 야전 텐트 교실도 설치돼 있다.
2011년 3월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에서 대통령 관저로 이어지는 길목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설치했으나, 그해 6월 붉은색 페인트에 동상이 훼손되는 일이 벌어진 뒤 동상을 철거했다.
인구 30만명으로 계획된 도시 부산
정부가 수도를 옮기자 피란민들도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1945년 광복 당시 28만명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1950년 말 89만명을 기록했다. 부산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집을 지을 만한 공간이 부족했다. 일제(日帝)는 부산의 적정 인구를 30만명으로 계산했다. 집을 구하지 못한 피란민들은 깡통, 가마니, 판자 등을 이용해 산비탈이나 개울가에 움집과 판잣집을 지었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면 산비탈에 빼곡히 자리 잡은 알록달록한 집들을 볼 수 있다. 이는 부산의 지형과 전쟁, 피란민이 만들어낸 흔적이다.
전쟁 직후 시작된 피란을 ‘1차 피란’, 1950년 10월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이북·이남 지역 주민의 대규모 피란(1·4후퇴)을 ‘2차 피란’이라 한다. 피란민 수는 1차가 약 150만명, 2차가 약 480만명이었다. 1차 피란민은 주로 남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收復)과 10월 19일 평양 탈환으로 정부가 환도(1차)하자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2차 피란민의 대다수는 피란 지역에 정착했다.
피란민이 몰리자 부산시는 피란민 수용소를 마련했다. 영도의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대연 고개,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여 곳에 수용소를 세웠지만, 피란민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합법적으로 거처를 마련할 수 없는 피란민들은 공터만 보이면 판잣집을 지었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부산항을 배경으로 한 범일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등에 집들이 세워졌다. 남성은 주로 부둣가에서 하역 등의 육체노동을 했고, 여성은 자갈치시장·국제시장·부평시장 등지에서 어물을 나르거나 좌판을 벌였다.
사료에 의하면 1953년 7월 당국이 조사한 부산 시내의 판잣집만 2만8619호라고 한다. 판잣집도 마련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땅을 조금 파내고 각목이나 합판으로 벽을 만들어 가마니를 얹은 움집을 지어 살았다. 공동 화장실, 공동 급수를 이용해야 했고, 미군 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물을 한데 넣어 끓여 만든 유엔탕(UN湯), 이른바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웠다. 부대찌개와 차이점이 있다면, 꿀꿀이죽은 이른바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로 만든다는 점이다.
피란민들의 흔적이 남은 주거지로는 서구 아미동(峨嵋洞) 비석마을과 남구 우암동(牛岩洞) 소막(牛幕)마을 등이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민(居留民)이 증가하자 1892년에는 산비탈 빈민촌인 아미동에 약 8만㎡(2만5000평)의 일본인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1909년에는 화장장까지 지었다. 일제의 갑작스러운 패망으로 수습되지 못한 일본인 묘지는 그대로 방치됐다. 당시 약 9000기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碑石 위에 집을 짓다
피란수도 시기에는 빈번한 화재와 부산 시내 판잣집 철거 정책으로 수많은 피란민이 산으로 떠밀려 왔다. 일부는 아미동 공동묘지를 거처로 삼았다. 이곳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과 상석(床石)이 널려 있었다. 피란민들은 비석과 상석에다가 손에 잡히는 각종 자재를 덧대 집을 만들어나갔다. 비석과 상석을 건축자재로 쓰니 그 밑에 놓인 단지(유골함)가 드러나기도 했다. 아미동 주민들은 이 항아리까지 시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탰다. 계단과 담벼락, 주춧돌, 옹벽으로 재활용된 비석과 상석이 마을 곳곳에 노출돼 있어 이곳이 공동묘지였음을 지금도 알려주고 있다. 비석에는 ‘소화(昭和·1926~1989) ○○’같이 일본의 연호(年號)를 나타내는 문구가 써 있다. ‘소화 19년’은 1944년이다. 비석임을 숨기려고 비석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돌에 새긴 글귀를 갈아낸 흔적도 눈에 띈다. 부산시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무질서해진 도시를 정비하고 일본인 유골들을 수습해 위령비를 세웠다. 이 위령비는 현재 부산시립 공원묘지에 있다.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다 보니 꿈에 귀신이 자주 나온다는 주민도 많다. 아미동 사람은 묘지 위에 집을 지은 미안함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면 제사상에 밥 한 그릇을 더 올려놓는다고 한다. 가수 김정구(‘눈물 젖은 두만강’), 정훈희(‘꽃밭에서’ ‘안개’), 권투 세계 챔피언 장정구, 영화배우 김윤석이 아미동 출신이다. 물을 얻기 위해 과거에는 도청까지 물을 받으러 가야 했지만, 1979년에는 배수지가 생기면서 24시간 급수도 가능해졌다.
일본은 675년 덴무 천황(天武天皇)이 발표한 ‘살생과 육식을 금지하는 칙서’에 따라 19세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육식을 금해왔다. 육식금지령이 해제되자 일본은 자국 내의 육식 수요를 본토 공급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조선과 중국에서 소를 수입했는데, 우암동 일대에 소를 반출하기 위한 소검역소(우역검사소)와 소 2400마리를 수용하는 막사(40개 동)를 지었다. 막사는 폭 9m, 길이 42m의 목조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우암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를 일본으로 이출(移出)한 곳이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이 축사들은 해방 이후 귀환 동포와 피란민이 몰려들면서 가옥으로 개조됐다. 이 때문에 동네의 골목길이 좁고 굽이진 곳이 많다. 〈황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도 이곳에 머물렀다. 피란민들은 집을 지을 만하다고 생각한 자리에는 마구잡이로 집을 지었다. 이곳에는 북한에서 피란 온 이들이 많았다. 함흥에서 온 피란민이 우암동에서 냉면집을 차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산 밀면의 기원이다.
이북 출신은 이북 출신끼리 주로 결혼했다. 음식 문화가 같고, 비슷한 정서를 가졌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부산을 쉽게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크게 작용했다.
영욕의 風波를 온몸으로 겪은 부산항
조선시대 부산의 중심지는 동래(東萊)였다. 부산은 동래부(東萊府)에 속한 어촌인 부산면(釜山面)에 불과했다. 개항(1876년) 이후 일제는 부산항 주변에 행정기관과 근대 시설을 설치했다. 한일합방(1910년) 이후에는 부산부(釜山府)를 만들었다. 행정의 중심이 동래에서 부산으로 옮겨가자, 동래는 부산부에 흡수됐다.
1876년 부산포라는 이름으로 개항한 부산항(부산 동구 초량동)은 1906년 축항공사에 들어가 제1부두(1912년), 제2부두(1927년), 제3부두(1944년), 제4부두(1943년)를 만들어나갔다. 부산항은 부산본부세관을 기준으로 위쪽은 북항(北港), 아래쪽은 남항(南港)으로 구분된다.
중구~동구~남구~영도구(影島區)에 걸쳐 있는 북항은 인적·물적 자원이 드나드는 터미널이자 물류운송 중심의 항이다. 경부선 철도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부산역에 이를 때면 북항을 거친다. 중구~서구~영도구 서쪽에 걸쳐 있는 연안항인 남항은 수산물을 싣고 드나드는 어항(漁港)으로 부산공동어시장과 자갈치시장을 끼고 있다.
부산항은 근현대의 영욕을 온몸으로 체험한 곳이다. 일제가 대륙 진출을 위해 만든 이 항구는 패망한 일본군과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통로였고, 재일동포에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이었다. 한국전쟁 때는 병력과 군수품, 구호품, 피란민들이 드나들었다. 6·25가 터지자 일본에 주둔하던 미 24사단 소속 스미스 특수임무대를 시작으로 유엔군(16개 전투병 파병국, 5개 의료지원단 파병국) 병력 179만명이 부산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전후에는 국가 재건을 위한 각종 구호물자가 한데 모인 곳이었고, 월남으로 떠나는 청룡·맹호 부대원을 싣고 나르던 곳이었다. 산업화 시기에는 한국 경제를 먹여살리는 최전선 경제 기지였고, 오늘날엔 세계 5위를 자랑하는 동북아 해양 물류의 허브(hub)이다.
부산항은 지난해 2199만TEU를 처리해 세계 6위 항만에 올랐고, 올해 상반기는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다른 항만보다 물동량 감소 폭이 좁아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는 길이 6.096m, 폭 2.44m, 높이 2.6m 크기의 컨테이너를 말한다. 부산광역시는 2008년부터 2019년까지 부산 북항 재개발을 위해 약 8조5000억원을 투입했다. 부산역 경부선 지상철로 지하화, 2030월드엑스포 추진 등으로 부산항 일대의 원도심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질 때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굳세어라 금순아’ 1953년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1934년 11월에 개통한 영도대교는 육지(중구 남포동)와 섬(영도구 대교동)을 잇는 한국 최초의 연륙교(連陸橋)이자 동양 최대의 도개교(跳開橋)였다. 도개교는 배가 지나갈 때 다리를 들어 올려 그 사이로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한 다리이다. 부산대교라고도 불렀다. 영도대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도선(渡船)으로 하루 평균 1만명이 육지와 섬을 오갔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현인도 영도에서 태어났다.
왜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을까
영도다리는 전쟁 통에 헤어진 피란민들이 재회(再會)의 장소로 약속한 곳이다. 급히 피란길에 올라야 했던 이들은 헤어지면서 훗날 부산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부산에서 서로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곳이 부산대교, 영도다리였다. 이렇게 영도대교는 헤어진 이들이 만남을 기약하는 약속의 장소가 됐다.
남포동 방면의 영도다리 밑에는 점바치 골목이 있었다. 점바치는 점쟁이를 뜻하는 영남 사투리이다. 부산으로 피란을 온 이북의 역술가를 비롯해 전국에서 몰려든 역술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가족의 생사, 미래에 대한 궁금증으로 답답했던 사람들은 영도의 점쟁이를 찾아갔다. 한때 노점과 판잣집을 비롯해 120여 개의 점집이 성행했으나 2014년에는 3곳으로 줄었고, 2016년 모두 사라졌다. 이곳은 지금 ‘유라리광장’으로 바뀌어 피란민의 가수 현인과 피란민을 본뜬 동상이 설치돼 있다.
1934년 영도다리가 처음 다리를 들어 올리는 날, 15만명의 부산 부민(府民) 중 7만~8만명이 영도대교의 도개 장면을 구경하러 왔다고 한다. 1935년 부산부청에서 시작하는 영도행 전차가 개통돼 영도대교에는 전차 선로도 놓였다. 그러던 영도대교가 1966년 9월 1일부로 더는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게 됐다. 이유는 교통체증 때문이었다. 다리를 한 번 들 때마다 차량 200여 대와 시민 600여 명, 전차 3대가 멈춰 기다려야 했다. 하루에 5~6척 왕래하는 대형 어선의 편의보다는 육지의 교통난 해소가 더 급했다.
영도는 상수도가 부족해 물 사정이 좋지 않았다. 다리에 송수관을 가설해야 했기에 다리를 고정해야만 했다. 1980년 1월에는 국내 최장 아치형 다리 부산대교가 준공되면서 영도대교는 ‘부산대교’라는 이름을 새로운 다리에 내주고 영도대교란 이름만을 갖게 됐다.
2000년대 들어 영도대교 존치를 두고 의견이 갈렸으나, 롯데가 광복동 일대에 롯데타운을 건설하는 조건으로 영도대교 복원 및 재건축 비용 1100억원을 모두 부담했다. 4차선인 교량은 6차선으로 늘었고, 2013년 7월 26일 영도대교는 47년 만에 다리를 다시 들어 올렸다.
새롭게 단장한 영도대교는 총길이가 214.6m, 폭이 25.3m이다. 이 중 도개부는 길이 31.3m, 무게 590톤이다. 영도대교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기 위해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사이렌이 울리고 주변 교통이 통제된다. 오후 2시2분부터 4분30초간 교량이 올라가기 시작해 2시7~9분에는 55도의 각을 이루며 완전 도개가 펼쳐진다. 2시9분부터 2시14분까지 다시 다리를 내린다. 다리가 일(一)자가 되고 1분 뒤면 교통이 재개된다.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릴 때면 ‘굳세어라 금순아’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옛 노래가 흘러 나온다.
戰時 통학로 보수동
한때 전국에서 헌책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서울의 청계천 일대와 부산의 보수동(부산 중구) ‘책방골목’이었다. 청계천 일대의 헌책방은 오늘날 대부분 자취를 감췄고, 보수동 책방골목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평시장과 국제시장에서 임시정부청사(동아대 부민 캠퍼스)를 잇는 대로변에 위치한다. 6·25전쟁 이전부터 부평시장과 국제시장 일대에선 몇몇 사람이 노점에서 책을 사고팔았다.
전쟁이 나자 보수동 바로 옆 부민동에는 임시정부청사가 들어섰다. 부산으로 피란 온 전국의 지식인과 문화인들도 보수동, 대청동, 남포동, 광복동에 자리를 잡았다. 전쟁으로 구덕산 일대와 보수동 뒷산에는 서울 등지에서 피란 온 대학들이 하나로 뭉쳐 ‘부산전시연합대학’을 만들어 운영했다. 다른 학교들도 천막을 치고 임시학교를 세웠다. 보수동 골목길은 학생과 교수, 교사들의 통학로였다. 유동 인구가 많은 이곳에 책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 보수동 책방골목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는 70여 개 점포가 있었지만 그 수가 줄어 지금은 40개 정도만 영업하고 있다. 빈자리 일부를 커피 전문점, 가구 공방 등이 채우고 있다.
한 책방 주인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만화책 몇 권을 놓고 번역문을 오려 붙여 빌려주다가 나중에는 헌책을 모아 팔기 시작해 가게를 마련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청계천에서 헌책방을 하다가 1982년에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한 여성은 “1990년대가 제일 좋았다”고 했다. 그는 고향은 서울이지만 어쩌다 보니 갓난아이를 안고 내려와 부산에 눌러앉았다고 한다. 그 아이가 벌써 마흔이라고 한다. 책방골목이 잘나갈 때 권리금 받고 점포를 넘긴 이들은 돈을 많이 벌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다 되는 시대인데 누가 요즘 책을 보겠느냐”며 한탄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신학기를 맞아 교재를 구하려는 ‘보수동 신학기’ 현상이 나타날 만큼 책방골목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의 등장으로 책방골목은 침체기를 맞았다. 한 상인은 “책방골목이 밖에서 볼 때는 문화 공간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생계유지에 사활을 건 영세업자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대형 서점까지 나서 헌책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 약 10년 전 보수동 책방골목 상인 모임인 책방골목번영회에서 보유 장서를 추산한 적이 있는데, 약 400만 권에 이른다고 했다. 지난 6월 기준 국회도서관이 보유한 단행본(책) 수가 272만 권이었다.
보수동에서는 시중 서점에서 판매되는 책일 경우 정가의 40~50% 선에 판매한다. 출간된 지 10년가량 된 책은 20~50% 선에 팔지만 20년 이상 된 책은 정가보다 비싸게 팔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통상 헌책은 판매가의 25%로 매입한다.
이곳에서도 《월간조선》(정가 1만3000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발간된 지 오래된 책은 1000원, 최근 과월호는 2000원 선에 매입된다. 판매가는 3000~5000원 선이라고 한다.
보수동 골목은 ‘책’이라는 하나의 주제에서 벗어나 옛날을 회상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에 방문객은 늘어났지만 실제 책 구매로 이어지진 않는다고 했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젊은이들이 열댓 명 보였지만, 주로 사진 찍는 데만 집중했을 뿐 책에는 관심이 없었다.
과거 세대에겐 책방골목이 지식에 대한 갈구(渴求)를 해소할 오아시스이자 보고(寶庫)였다면, 오늘날 젊은 세대에겐 소셜미디어(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한 빈티지(고전풍) 배경인 셈이다.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을 꼽으라면 상당수가 국제시장(부산 중구 신창동)을 말한다. 하지만 역사는 부평시장(부산 중구 부평동)이 더 오래됐다. 1910년에 개설된 부평시장은 조선 최대의 공설시장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을 주로 취급해 ‘깡통시장’으로도 불렸다. 국제시장과 나란히 붙어 있어 처음 가는 이들은 두 시장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두 시장 모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쓸어 모아 물건을 사고판다’고 해서 ‘도떼기(돗대기) 시장’으로 불렀다. 국제시장은 1948년 ‘자유시장’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1950년 국제시장으로 이름을 되돌렸다.
국제시장에는 밀무역품, 미군 용품, 유엔 원조 물자 등 정상적인 경로를 거치지 않은 물건이 많았다. 밀수품 대부분은 일본에서 들여왔다. 1953년 말 기준으로 국제시장 점포 800호 중 200호는 밀수품 전문 취급점이었다. 단속도 심했지만, 상인들과 단속반원들은 서로를 이해했다. 상인들은 “단속반원도 먹고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했다. 부평시장에는 일제 상품 목록을 담은 ‘카탈로그’가 있어 찾는 물건을 말하면 3일 뒤에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5년에는 부산에 두 곳의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이 여파로 부산 지역 상권이 국제시장 일대의 원도심(原都心·구도심)에서 서면 지역으로 넘어갔다.
냉면 대신 밀면, 설렁탕 대신 돼지국밥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하면 ‘돼지국밥’과 ‘밀면’을 말한다. 이런 음식도 전쟁이 만들어낸 것이다. 6·25전쟁 이전에도 국에 밥을 말아 먹는 탕반 문화(설렁탕·곰탕·소고기국밥 등)는 있었지만, 1950년대에는 소고기를 대신해 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와 밥을 말아서 내주는 돼지국밥이 널리 퍼졌다. 특히 영남 일대에서 급속히 확산했다. 소고기가 귀하니 돼지 부산물로 설렁탕을 흉내내기 시작하면서 유행한 것이다. 북한의 순대국밥을 돼지국밥의 뿌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왜 돼지국밥일까. 당시 부산 경제는 육체노동 위주의 산업이 주를 이뤘다. 고강도 육체노동을 견디려면 단백질 등 영양 섭취가 중요했는데, 돼지고기는 동물성 단백질이 풍부해 포만감이 컸다. 돼지국밥집을 차리는 데는 큰 비용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리법이 쉽고 회전율도 빠르니 돼지국밥집 창업이 늘었다. 배도 부르고 값도 싸고 영양가도 있는 돼지국밥의 탄생과 유행은 전쟁이 만들어낸 부산물인 셈이다.
부산의 ‘내호냉면’은 상호와 달리 냉면보다는 밀면으로 유명하다. 부산 밀면의 원조,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함경도 흥남부(현 함흥시 흥남구) 내호리에서 냉면집을 하던 이가 6·25 때 우암동 소막마을로 피란을 와 1952년 개업했다. 당시 피란민들은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구호물자인 밀가루에 감자녹말(전분)을 섞어 면(麵)을 만들어 냉면 대용으로 먹기 시작한 게 밀면의 시초(始初)다. 밀면은 ‘밀가루 냉면’ ‘경상도 냉면’이라고 불렀다. 부산 사람들은 심심한 맛의 냉면보다는 매콤 새콤한 양념이 올라간 밀면을 더 좋아했다. 식감도 냉면처럼 질기지 않았다. 부산에선 냉면집보다 밀면집을 찾는 게 더 쉽다.
든든한 후방기지, 워커하우스와 캠프 하야리아
70년 전에는 국가의 운명을 건 전투를 지휘했던 곳이 지금은 학생들의 배를 채워주는 곳이 됐다. 바로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arris Walker)의 이름을 딴 ‘워커하우스’(Walker House·현 부경대·부산 남구 대연동)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워커 장군은 낙동강 일대에 최후 방어선인 일명 ‘워커 라인(Walker Line)’을 설정했다. 워커는 대구 인근까지 포탄이 떨어지자 텔레타이프(teletype) 같은 통신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당시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 지휘본부를 1950년 9월 6일 부산수산전문대학(현 부경대)으로 옮겼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에는 지휘본부를 다시 대구로 옮겼다. 18일간 미 8군의 지휘본부로 활용된 워커하우스는 ‘돌집’으로도 불렸다. 바닷가에서 자연석을 모아 콘크리트와 섞어 벙커 모양으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호에 신경을 썼다. 1981년부터는 이 건물이 대학의 동아리방으로 이용되다가 1990년 화재로 건물의 일부가 소실됐다. 1995년 다시 공사해 오늘에 이른다. 지금의 워커하우스는 전쟁 당시 건물 원형과는 차이가 있다.
2014년 개장한 부산시민공원(부산 부산진구 범전동)은 캠프 하야리아(Camp Hialeah)가 있던 곳이다. 하야리아 부지는 부산의 도심인 서면과 인접해 있으며 면적은 54만3360㎡(약 16만 평)이다. 일제시대에는 경마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시설로 활용됐다. 6·25전쟁이 터지고는 미 극동사령부 산하의 부산기지사령부가 됐다. 초대 사령관의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주 하야리아시(市)에서 부대 명칭을 따왔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주한미군 부대로 활용됐다. 2006년 8월 하야리아 부대 폐쇄가 결정되자 부산시는 6679억원을 들여 47만749㎡(약 14만 평) 규모의 공원을 조성했다.
유엔군 전사자의 5.55%가 잠든 곳
6·25에 참전해 전사한 유엔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있다. 1951년 1월 18일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한 유엔기념공원(UNMCK·부산 남구 대연동)이다. 이곳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1951년 4월 묘지가 완공된 후 개성·인천·대전·대구·밀양·마산 등지에 가매장한 유엔군 전몰 장병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기 시작했다.
1951~1954년 이곳에는 유엔군 전사자 약 1만1000명의 유해가 안장됐다. 현재는 유엔군 부대에 파견돼 싸우다 전사한 한국군(카투사) 36명을 포함해 11개국 2309구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유엔군 전사자·실종자는 총 4만 896명으로 이 중 5.55%가 부산에 잠들어 있다. 기념공원에는 영연방 국가(영국 884명, 캐나다 378명, 호주 281명, 뉴질랜드 32명) 출신 전사자의 유해가 많다. 영국은 군인이 사망하면 숨진 현지에 유해를 묻는 풍습이 있다. 기념공원에 안장된 국군 전사자 36명 중 35명은 9월 2~10일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다가 산화했다.
기념공원에 들어서면 공동묘지라는 인상보다 경건하게 잘 정돈된 정원에 온 느낌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공동묘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공원 관계자는 “이곳이 묘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오히려 더 화려하게 조경을 한다”고 말했다. 미처 피지도 못하고 저버린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인지 형형색색의 꽃들로 묘역을 꾸몄다.
우리나라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유엔기념공원 일대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聖地)로 지정할 것을 결의했다. 유엔은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 총회에서 결의문 제977(X)호로 채택했다. 1974년부터는 한국을 포함해 전사자가 안장된 11개국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가 관리를 맡고 있다.
해외 참전용사들이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할 때면, 전우들이 잠든 이곳을 꼭 찾는다. 먼저 간 전우를 그리워하는 참전용사 중 사후 기념공원 안장을 희망할 경우 이곳에 안장될 수 있다. 부부가 합장되는 사례도 있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전쟁 중인 어느 겨울, 정 회장은 5일 만에 유엔 묘지를 푸른 잔디로 덮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각국의 유엔 사절이 내한해 참배할 때 흙으로만 뒤덮인 묘지의 민망함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에 그 넓은 묘지를 채울 잔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 회장은 흙을 감추기 위해서는 굳이 잔디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에 낙동강변(邊)에 있는 보리를 옮겨와 묘지에 심었다. 참배객들은 한겨울에 물결치는 푸른 보리를 보고 연신 ‘원더풀’을 외쳤다고 한다.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는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유엔 참전용사 국제추모식’이 열린다. 유엔 참전국들이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1분간 묵념하며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의 마음을 갖자는 취지다.
피란수도 부산, 1023일 아닌 1026일
피란수도 부산을 말할 때면 ‘1023’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1차 피란기(1950년 8월 18일~10월 27일)와 2차 피란기(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를 모두 더하면 1023일이라는 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 계산하니 1026일(1차 71일, 2차 955일)이 나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한국전쟁을 연구한 남정옥 박사(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도서연구실장)는 “기존의 1023일이라는 계산이 틀리고, 1026일이 맞을 수 있다”고 했다. 남 박사는 “1950년 8월 18일부터 부산 임시정부가 시작됐는데, 8월 19일로 날짜 계산을 시작하고 윤년(1952년·그해 2월이 29일인 해)도 반영하지 않은 채 1953년 8월 14일을 임시정부 종료일로 착각해 그렇게(1026일이 아닌 1023일로) 계산한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이다”라고 했다. 이어 “‘1023일’이라는 숫자를 한 번 쓰기 시작하니 이후에도 검증 없이 따라 쓰기 시작해 굳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남 박사는 “지금은 6·25전쟁 기간을 ‘1129일’이라고 바로잡았지만,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6·25전쟁을 1127일 동안 벌어졌다고 써왔다”는 사례를 소개했다.⊙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떠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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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부산 해운대 일대. 사진=조선DB |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대통령 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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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쓰였던 동아대 석당박물관. |
‘임시 중앙청’에 입주하지 못한 문교부·보건부·심계원(審計院·감사원의 전신)은 부산시청(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상공부는 남선전기(현 한국전력공사 토성동 지점), 국회는 부산문화극장(제2대 8회 국회)·부산극장(제2대 10~11회 국회)·무덕관(武德館·제2대 11~16회 국회)을 청사로 삼았다. 경남도청 바로 옆에 자리한 무덕관은 1926년 지어진 건물로 부산·경남 지역의 각종 무도대회, 웅변대회가 열리던 곳인데 1951년 6월 27일부터 국회 청사로 활용됐다. 동아대가 나중에 무덕관을 헐고 국제관을 새로 지었다. 과거 부산극장 자리에는 새로운 극장이, 부산문화극장 건물에는 은행이 입점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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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
1층(253㎡·76평)은 구분된 공간만 10곳에 이를 정도로 넓고 복잡했다. 서재, 내실, 거실, 식당, 주방, 욕실, 조리사실, 경비실, 화장실 등이 있다. 각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복도가 나 있고,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다. 2층(85㎡·26평)에는 집무실과 마루방이 있다. 대통령 내외와 수행비서들이 피란생활한 이 관저는 1953년 환도 이후 1983년까지 경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됐다.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도청을 옮기자 1984년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개관했다.
관저 뒤편에는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이 있다. 이 건물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2012년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전시관 뒤편에는 피란 당시 임시학교 모습을 재현한 야전 텐트 교실도 설치돼 있다.
2011년 3월에는 임시수도 정부청사에서 대통령 관저로 이어지는 길목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설치했으나, 그해 6월 붉은색 페인트에 동상이 훼손되는 일이 벌어진 뒤 동상을 철거했다.
인구 30만명으로 계획된 도시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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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부산 동구 일대에 자리 잡은 판잣집. 부산항 부근에 자리 잡은 움막집. |
전쟁 직후 시작된 피란을 ‘1차 피란’, 1950년 10월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이북·이남 지역 주민의 대규모 피란(1·4후퇴)을 ‘2차 피란’이라 한다. 피란민 수는 1차가 약 150만명, 2차가 약 480만명이었다. 1차 피란민은 주로 남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收復)과 10월 19일 평양 탈환으로 정부가 환도(1차)하자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2차 피란민의 대다수는 피란 지역에 정착했다.
피란민이 몰리자 부산시는 피란민 수용소를 마련했다. 영도의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대연 고개,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여 곳에 수용소를 세웠지만, 피란민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합법적으로 거처를 마련할 수 없는 피란민들은 공터만 보이면 판잣집을 지었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부산항을 배경으로 한 범일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등에 집들이 세워졌다. 남성은 주로 부둣가에서 하역 등의 육체노동을 했고, 여성은 자갈치시장·국제시장·부평시장 등지에서 어물을 나르거나 좌판을 벌였다.
사료에 의하면 1953년 7월 당국이 조사한 부산 시내의 판잣집만 2만8619호라고 한다. 판잣집도 마련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땅을 조금 파내고 각목이나 합판으로 벽을 만들어 가마니를 얹은 움집을 지어 살았다. 공동 화장실, 공동 급수를 이용해야 했고, 미군 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물을 한데 넣어 끓여 만든 유엔탕(UN湯), 이른바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웠다. 부대찌개와 차이점이 있다면, 꿀꿀이죽은 이른바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로 만든다는 점이다.
피란민들의 흔적이 남은 주거지로는 서구 아미동(峨嵋洞) 비석마을과 남구 우암동(牛岩洞) 소막(牛幕)마을 등이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민(居留民)이 증가하자 1892년에는 산비탈 빈민촌인 아미동에 약 8만㎡(2만5000평)의 일본인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1909년에는 화장장까지 지었다. 일제의 갑작스러운 패망으로 수습되지 못한 일본인 묘지는 그대로 방치됐다. 당시 약 9000기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碑石 위에 집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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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마을. 사진=부산 서구청 |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다 보니 꿈에 귀신이 자주 나온다는 주민도 많다. 아미동 사람은 묘지 위에 집을 지은 미안함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면 제사상에 밥 한 그릇을 더 올려놓는다고 한다. 가수 김정구(‘눈물 젖은 두만강’), 정훈희(‘꽃밭에서’ ‘안개’), 권투 세계 챔피언 장정구, 영화배우 김윤석이 아미동 출신이다. 물을 얻기 위해 과거에는 도청까지 물을 받으러 가야 했지만, 1979년에는 배수지가 생기면서 24시간 급수도 가능해졌다.
일본은 675년 덴무 천황(天武天皇)이 발표한 ‘살생과 육식을 금지하는 칙서’에 따라 19세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육식을 금해왔다. 육식금지령이 해제되자 일본은 자국 내의 육식 수요를 본토 공급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조선과 중국에서 소를 수입했는데, 우암동 일대에 소를 반출하기 위한 소검역소(우역검사소)와 소 2400마리를 수용하는 막사(40개 동)를 지었다. 막사는 폭 9m, 길이 42m의 목조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우암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를 일본으로 이출(移出)한 곳이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이 축사들은 해방 이후 귀환 동포와 피란민이 몰려들면서 가옥으로 개조됐다. 이 때문에 동네의 골목길이 좁고 굽이진 곳이 많다. 〈황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도 이곳에 머물렀다. 피란민들은 집을 지을 만하다고 생각한 자리에는 마구잡이로 집을 지었다. 이곳에는 북한에서 피란 온 이들이 많았다. 함흥에서 온 피란민이 우암동에서 냉면집을 차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산 밀면의 기원이다.
이북 출신은 이북 출신끼리 주로 결혼했다. 음식 문화가 같고, 비슷한 정서를 가졌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부산을 쉽게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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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1950년 9월 부산항 제1부두. 부산항. 사진=조선DB |
1876년 부산포라는 이름으로 개항한 부산항(부산 동구 초량동)은 1906년 축항공사에 들어가 제1부두(1912년), 제2부두(1927년), 제3부두(1944년), 제4부두(1943년)를 만들어나갔다. 부산항은 부산본부세관을 기준으로 위쪽은 북항(北港), 아래쪽은 남항(南港)으로 구분된다.
중구~동구~남구~영도구(影島區)에 걸쳐 있는 북항은 인적·물적 자원이 드나드는 터미널이자 물류운송 중심의 항이다. 경부선 철도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부산역에 이를 때면 북항을 거친다. 중구~서구~영도구 서쪽에 걸쳐 있는 연안항인 남항은 수산물을 싣고 드나드는 어항(漁港)으로 부산공동어시장과 자갈치시장을 끼고 있다.
부산항은 근현대의 영욕을 온몸으로 체험한 곳이다. 일제가 대륙 진출을 위해 만든 이 항구는 패망한 일본군과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통로였고, 재일동포에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이었다. 한국전쟁 때는 병력과 군수품, 구호품, 피란민들이 드나들었다. 6·25가 터지자 일본에 주둔하던 미 24사단 소속 스미스 특수임무대를 시작으로 유엔군(16개 전투병 파병국, 5개 의료지원단 파병국) 병력 179만명이 부산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전후에는 국가 재건을 위한 각종 구호물자가 한데 모인 곳이었고, 월남으로 떠나는 청룡·맹호 부대원을 싣고 나르던 곳이었다. 산업화 시기에는 한국 경제를 먹여살리는 최전선 경제 기지였고, 오늘날엔 세계 5위를 자랑하는 동북아 해양 물류의 허브(hub)이다.
부산항은 지난해 2199만TEU를 처리해 세계 6위 항만에 올랐고, 올해 상반기는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다른 항만보다 물동량 감소 폭이 좁아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는 길이 6.096m, 폭 2.44m, 높이 2.6m 크기의 컨테이너를 말한다. 부산광역시는 2008년부터 2019년까지 부산 북항 재개발을 위해 약 8조5000억원을 투입했다. 부산역 경부선 지상철로 지하화, 2030월드엑스포 추진 등으로 부산항 일대의 원도심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질 때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굳세어라 금순아’ 1953년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1934년 11월에 개통한 영도대교는 육지(중구 남포동)와 섬(영도구 대교동)을 잇는 한국 최초의 연륙교(連陸橋)이자 동양 최대의 도개교(跳開橋)였다. 도개교는 배가 지나갈 때 다리를 들어 올려 그 사이로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한 다리이다. 부산대교라고도 불렀다. 영도대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도선(渡船)으로 하루 평균 1만명이 육지와 섬을 오갔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현인도 영도에서 태어났다.
왜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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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대교. 사진=조선DB |
남포동 방면의 영도다리 밑에는 점바치 골목이 있었다. 점바치는 점쟁이를 뜻하는 영남 사투리이다. 부산으로 피란을 온 이북의 역술가를 비롯해 전국에서 몰려든 역술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가족의 생사, 미래에 대한 궁금증으로 답답했던 사람들은 영도의 점쟁이를 찾아갔다. 한때 노점과 판잣집을 비롯해 120여 개의 점집이 성행했으나 2014년에는 3곳으로 줄었고, 2016년 모두 사라졌다. 이곳은 지금 ‘유라리광장’으로 바뀌어 피란민의 가수 현인과 피란민을 본뜬 동상이 설치돼 있다.
1934년 영도다리가 처음 다리를 들어 올리는 날, 15만명의 부산 부민(府民) 중 7만~8만명이 영도대교의 도개 장면을 구경하러 왔다고 한다. 1935년 부산부청에서 시작하는 영도행 전차가 개통돼 영도대교에는 전차 선로도 놓였다. 그러던 영도대교가 1966년 9월 1일부로 더는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게 됐다. 이유는 교통체증 때문이었다. 다리를 한 번 들 때마다 차량 200여 대와 시민 600여 명, 전차 3대가 멈춰 기다려야 했다. 하루에 5~6척 왕래하는 대형 어선의 편의보다는 육지의 교통난 해소가 더 급했다.
영도는 상수도가 부족해 물 사정이 좋지 않았다. 다리에 송수관을 가설해야 했기에 다리를 고정해야만 했다. 1980년 1월에는 국내 최장 아치형 다리 부산대교가 준공되면서 영도대교는 ‘부산대교’라는 이름을 새로운 다리에 내주고 영도대교란 이름만을 갖게 됐다.
2000년대 들어 영도대교 존치를 두고 의견이 갈렸으나, 롯데가 광복동 일대에 롯데타운을 건설하는 조건으로 영도대교 복원 및 재건축 비용 1100억원을 모두 부담했다. 4차선인 교량은 6차선으로 늘었고, 2013년 7월 26일 영도대교는 47년 만에 다리를 다시 들어 올렸다.
새롭게 단장한 영도대교는 총길이가 214.6m, 폭이 25.3m이다. 이 중 도개부는 길이 31.3m, 무게 590톤이다. 영도대교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기 위해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사이렌이 울리고 주변 교통이 통제된다. 오후 2시2분부터 4분30초간 교량이 올라가기 시작해 2시7~9분에는 55도의 각을 이루며 완전 도개가 펼쳐진다. 2시9분부터 2시14분까지 다시 다리를 내린다. 다리가 일(一)자가 되고 1분 뒤면 교통이 재개된다.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릴 때면 ‘굳세어라 금순아’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옛 노래가 흘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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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 책방골목. |
전쟁이 나자 보수동 바로 옆 부민동에는 임시정부청사가 들어섰다. 부산으로 피란 온 전국의 지식인과 문화인들도 보수동, 대청동, 남포동, 광복동에 자리를 잡았다. 전쟁으로 구덕산 일대와 보수동 뒷산에는 서울 등지에서 피란 온 대학들이 하나로 뭉쳐 ‘부산전시연합대학’을 만들어 운영했다. 다른 학교들도 천막을 치고 임시학교를 세웠다. 보수동 골목길은 학생과 교수, 교사들의 통학로였다. 유동 인구가 많은 이곳에 책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 보수동 책방골목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는 70여 개 점포가 있었지만 그 수가 줄어 지금은 40개 정도만 영업하고 있다. 빈자리 일부를 커피 전문점, 가구 공방 등이 채우고 있다.
한 책방 주인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만화책 몇 권을 놓고 번역문을 오려 붙여 빌려주다가 나중에는 헌책을 모아 팔기 시작해 가게를 마련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청계천에서 헌책방을 하다가 1982년에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한 여성은 “1990년대가 제일 좋았다”고 했다. 그는 고향은 서울이지만 어쩌다 보니 갓난아이를 안고 내려와 부산에 눌러앉았다고 한다. 그 아이가 벌써 마흔이라고 한다. 책방골목이 잘나갈 때 권리금 받고 점포를 넘긴 이들은 돈을 많이 벌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다 되는 시대인데 누가 요즘 책을 보겠느냐”며 한탄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신학기를 맞아 교재를 구하려는 ‘보수동 신학기’ 현상이 나타날 만큼 책방골목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의 등장으로 책방골목은 침체기를 맞았다. 한 상인은 “책방골목이 밖에서 볼 때는 문화 공간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생계유지에 사활을 건 영세업자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대형 서점까지 나서 헌책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 약 10년 전 보수동 책방골목 상인 모임인 책방골목번영회에서 보유 장서를 추산한 적이 있는데, 약 400만 권에 이른다고 했다. 지난 6월 기준 국회도서관이 보유한 단행본(책) 수가 272만 권이었다.
보수동에서는 시중 서점에서 판매되는 책일 경우 정가의 40~50% 선에 판매한다. 출간된 지 10년가량 된 책은 20~50% 선에 팔지만 20년 이상 된 책은 정가보다 비싸게 팔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통상 헌책은 판매가의 25%로 매입한다.
이곳에서도 《월간조선》(정가 1만3000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발간된 지 오래된 책은 1000원, 최근 과월호는 2000원 선에 매입된다. 판매가는 3000~5000원 선이라고 한다.
보수동 골목은 ‘책’이라는 하나의 주제에서 벗어나 옛날을 회상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에 방문객은 늘어났지만 실제 책 구매로 이어지진 않는다고 했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젊은이들이 열댓 명 보였지만, 주로 사진 찍는 데만 집중했을 뿐 책에는 관심이 없었다.
과거 세대에겐 책방골목이 지식에 대한 갈구(渴求)를 해소할 오아시스이자 보고(寶庫)였다면, 오늘날 젊은 세대에겐 소셜미디어(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한 빈티지(고전풍) 배경인 셈이다.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을 꼽으라면 상당수가 국제시장(부산 중구 신창동)을 말한다. 하지만 역사는 부평시장(부산 중구 부평동)이 더 오래됐다. 1910년에 개설된 부평시장은 조선 최대의 공설시장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통조림을 주로 취급해 ‘깡통시장’으로도 불렸다. 국제시장과 나란히 붙어 있어 처음 가는 이들은 두 시장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두 시장 모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쓸어 모아 물건을 사고판다’고 해서 ‘도떼기(돗대기) 시장’으로 불렀다. 국제시장은 1948년 ‘자유시장’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1950년 국제시장으로 이름을 되돌렸다.
국제시장에는 밀무역품, 미군 용품, 유엔 원조 물자 등 정상적인 경로를 거치지 않은 물건이 많았다. 밀수품 대부분은 일본에서 들여왔다. 1953년 말 기준으로 국제시장 점포 800호 중 200호는 밀수품 전문 취급점이었다. 단속도 심했지만, 상인들과 단속반원들은 서로를 이해했다. 상인들은 “단속반원도 먹고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했다. 부평시장에는 일제 상품 목록을 담은 ‘카탈로그’가 있어 찾는 물건을 말하면 3일 뒤에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5년에는 부산에 두 곳의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이 여파로 부산 지역 상권이 국제시장 일대의 원도심(原都心·구도심)에서 서면 지역으로 넘어갔다.
냉면 대신 밀면, 설렁탕 대신 돼지국밥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하면 ‘돼지국밥’과 ‘밀면’을 말한다. 이런 음식도 전쟁이 만들어낸 것이다. 6·25전쟁 이전에도 국에 밥을 말아 먹는 탕반 문화(설렁탕·곰탕·소고기국밥 등)는 있었지만, 1950년대에는 소고기를 대신해 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와 밥을 말아서 내주는 돼지국밥이 널리 퍼졌다. 특히 영남 일대에서 급속히 확산했다. 소고기가 귀하니 돼지 부산물로 설렁탕을 흉내내기 시작하면서 유행한 것이다. 북한의 순대국밥을 돼지국밥의 뿌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왜 돼지국밥일까. 당시 부산 경제는 육체노동 위주의 산업이 주를 이뤘다. 고강도 육체노동을 견디려면 단백질 등 영양 섭취가 중요했는데, 돼지고기는 동물성 단백질이 풍부해 포만감이 컸다. 돼지국밥집을 차리는 데는 큰 비용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리법이 쉽고 회전율도 빠르니 돼지국밥집 창업이 늘었다. 배도 부르고 값도 싸고 영양가도 있는 돼지국밥의 탄생과 유행은 전쟁이 만들어낸 부산물인 셈이다.
부산의 ‘내호냉면’은 상호와 달리 냉면보다는 밀면으로 유명하다. 부산 밀면의 원조,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함경도 흥남부(현 함흥시 흥남구) 내호리에서 냉면집을 하던 이가 6·25 때 우암동 소막마을로 피란을 와 1952년 개업했다. 당시 피란민들은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구호물자인 밀가루에 감자녹말(전분)을 섞어 면(麵)을 만들어 냉면 대용으로 먹기 시작한 게 밀면의 시초(始初)다. 밀면은 ‘밀가루 냉면’ ‘경상도 냉면’이라고 불렀다. 부산 사람들은 심심한 맛의 냉면보다는 매콤 새콤한 양념이 올라간 밀면을 더 좋아했다. 식감도 냉면처럼 질기지 않았다. 부산에선 냉면집보다 밀면집을 찾는 게 더 쉽다.
든든한 후방기지, 워커하우스와 캠프 하야리아
70년 전에는 국가의 운명을 건 전투를 지휘했던 곳이 지금은 학생들의 배를 채워주는 곳이 됐다. 바로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arris Walker)의 이름을 딴 ‘워커하우스’(Walker House·현 부경대·부산 남구 대연동)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워커 장군은 낙동강 일대에 최후 방어선인 일명 ‘워커 라인(Walker Line)’을 설정했다. 워커는 대구 인근까지 포탄이 떨어지자 텔레타이프(teletype) 같은 통신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당시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 지휘본부를 1950년 9월 6일 부산수산전문대학(현 부경대)으로 옮겼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에는 지휘본부를 다시 대구로 옮겼다. 18일간 미 8군의 지휘본부로 활용된 워커하우스는 ‘돌집’으로도 불렸다. 바닷가에서 자연석을 모아 콘크리트와 섞어 벙커 모양으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호에 신경을 썼다. 1981년부터는 이 건물이 대학의 동아리방으로 이용되다가 1990년 화재로 건물의 일부가 소실됐다. 1995년 다시 공사해 오늘에 이른다. 지금의 워커하우스는 전쟁 당시 건물 원형과는 차이가 있다.
2014년 개장한 부산시민공원(부산 부산진구 범전동)은 캠프 하야리아(Camp Hialeah)가 있던 곳이다. 하야리아 부지는 부산의 도심인 서면과 인접해 있으며 면적은 54만3360㎡(약 16만 평)이다. 일제시대에는 경마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시설로 활용됐다. 6·25전쟁이 터지고는 미 극동사령부 산하의 부산기지사령부가 됐다. 초대 사령관의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주 하야리아시(市)에서 부대 명칭을 따왔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주한미군 부대로 활용됐다. 2006년 8월 하야리아 부대 폐쇄가 결정되자 부산시는 6679억원을 들여 47만749㎡(약 14만 평) 규모의 공원을 조성했다.
유엔군 전사자의 5.55%가 잠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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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기념공원 영국군 묘역. |
1951~1954년 이곳에는 유엔군 전사자 약 1만1000명의 유해가 안장됐다. 현재는 유엔군 부대에 파견돼 싸우다 전사한 한국군(카투사) 36명을 포함해 11개국 2309구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유엔군 전사자·실종자는 총 4만 896명으로 이 중 5.55%가 부산에 잠들어 있다. 기념공원에는 영연방 국가(영국 884명, 캐나다 378명, 호주 281명, 뉴질랜드 32명) 출신 전사자의 유해가 많다. 영국은 군인이 사망하면 숨진 현지에 유해를 묻는 풍습이 있다. 기념공원에 안장된 국군 전사자 36명 중 35명은 9월 2~10일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다가 산화했다.
기념공원에 들어서면 공동묘지라는 인상보다 경건하게 잘 정돈된 정원에 온 느낌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공동묘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공원 관계자는 “이곳이 묘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오히려 더 화려하게 조경을 한다”고 말했다. 미처 피지도 못하고 저버린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인지 형형색색의 꽃들로 묘역을 꾸몄다.
우리나라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유엔기념공원 일대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聖地)로 지정할 것을 결의했다. 유엔은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 총회에서 결의문 제977(X)호로 채택했다. 1974년부터는 한국을 포함해 전사자가 안장된 11개국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가 관리를 맡고 있다.
해외 참전용사들이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할 때면, 전우들이 잠든 이곳을 꼭 찾는다. 먼저 간 전우를 그리워하는 참전용사 중 사후 기념공원 안장을 희망할 경우 이곳에 안장될 수 있다. 부부가 합장되는 사례도 있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전쟁 중인 어느 겨울, 정 회장은 5일 만에 유엔 묘지를 푸른 잔디로 덮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각국의 유엔 사절이 내한해 참배할 때 흙으로만 뒤덮인 묘지의 민망함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에 그 넓은 묘지를 채울 잔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 회장은 흙을 감추기 위해서는 굳이 잔디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에 낙동강변(邊)에 있는 보리를 옮겨와 묘지에 심었다. 참배객들은 한겨울에 물결치는 푸른 보리를 보고 연신 ‘원더풀’을 외쳤다고 한다.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는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유엔 참전용사 국제추모식’이 열린다. 유엔 참전국들이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1분간 묵념하며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의 마음을 갖자는 취지다.
피란수도 부산, 1023일 아닌 1026일
피란수도 부산을 말할 때면 ‘1023’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1차 피란기(1950년 8월 18일~10월 27일)와 2차 피란기(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를 모두 더하면 1023일이라는 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 계산하니 1026일(1차 71일, 2차 955일)이 나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한국전쟁을 연구한 남정옥 박사(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도서연구실장)는 “기존의 1023일이라는 계산이 틀리고, 1026일이 맞을 수 있다”고 했다. 남 박사는 “1950년 8월 18일부터 부산 임시정부가 시작됐는데, 8월 19일로 날짜 계산을 시작하고 윤년(1952년·그해 2월이 29일인 해)도 반영하지 않은 채 1953년 8월 14일을 임시정부 종료일로 착각해 그렇게(1026일이 아닌 1023일로) 계산한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이다”라고 했다. 이어 “‘1023일’이라는 숫자를 한 번 쓰기 시작하니 이후에도 검증 없이 따라 쓰기 시작해 굳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남 박사는 “지금은 6·25전쟁 기간을 ‘1129일’이라고 바로잡았지만,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6·25전쟁을 1127일 동안 벌어졌다고 써왔다”는 사례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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