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발자취

한 세기를 살다 간 ‘救國의 영웅’ 白善燁 장군(1920~2020)

“내가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1950년 9월 대구 전선에서의 백선엽 장군.
  6·25전쟁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육군대장이 7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1920년생이니 100년, 한 세기를 꽉 채운 삶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1920년 11월 23일 평남 강서군 덕흥리에서 백윤상-방호열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열한 살 연상인 누나 복엽, 아래로 세 살 연하인 동생 인엽(仁燁·1923~1993)이 있다. 동생 백인엽은 6·25 당시 제17연대장, 수도사단장으로 용명(勇名)을 떨쳤고, 육군 중장까지 올라갔다.
 
  백 장군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1926년 장군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대처(大處)인 평양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백 장군은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40년 만주국 봉천군관학교(2년제)로 진학해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던 차에 만주 군관학교에서 생도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앞으로 2년 더 배울 수 있으니 군인의 길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해 압록강을 건넜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때 만주에 ‘독립군’은 없었다
 
  1941년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백 장군은 견습사관으로 동만주 주둔 만군 보병 제29단(연대)에서 근무하다가 소위로 임관한 후인 1943년 2월 간도성(間島省·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延吉)현에 있는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조선인 특전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일각에서는 이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을 이유로 백선엽 장군을 ‘독립군을 토벌한 친일파(親日派)’라고 매도한다. 하지만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할 당시 만주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군’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독립투쟁은 1939년에 조선혁명군을 이끌던 김활석 장군이 만주군에게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동북항일연군 산하에 조선인 부대원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산하에서 ‘중화조국의 옹호’와 ‘실지(失地) 동북(東北)의 회복’을 위해 싸웠다. 이들조차도 1939년 10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밀려 1940년 11월~1941년 2월 소련으로 패주(敗走)했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이던 김일성이 소련에 들어간 것도 이때였다. 백선엽 장군이 만주군 장교로 임관한 것이나 간도특설대 소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이 이후의 일이었다.
 
  일제(日帝)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것을 가지고 ‘친일’로 모는 것도 소아병적이다. 핀란드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원수(元帥)는 핀란드를 식민통치했던 제정(帝政) 러시아에서 중장(中將)까지 올라갔지만, 핀란드인들은 그를 ‘친러 부역자(附逆者)’가 아닌 훗날 소련과의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자 국부(國父)로 기억하고 있다.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은 영국군 소령 출신이지만, 아무도 그걸 시비 걸지 않는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직후 평양으로 돌아온 백 장군은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당시 평남인민정치위원장)의 비서로 일했다. 이 시절 백 장군은 조만식 선생을 만나러 온 김일성을 비롯해 최현·최용건·김책 등 후일 북한 정권 및 군부의 요인이 되는 자들과 조우했다.
 
  소련 점령군이 북한을 착착 소비에트화해가자 백선엽 장군은 1945년 12월 월남(越南)했다. 월남한 백 장군은 의식주가 해결되고 영어를 가르쳐준다는 말에 군사영어학교에 지원했다. 하지만 실제로 군사영어학교에 적(籍)을 두고 공부하지는 않았다.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선서를 하자 바로 중위로 임관, 부산 5연대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서류상으로 임관한 날짜는 1946년 2월 26일이었다.
 
  창군기(創軍期) 백선엽 장군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있으면서 숙군(肅軍)을 지휘한 일이다. 백 장군은 후일 “여순반란사건과 숙군이 없었더라면 6·25 때 국군은 자멸(自滅)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당시 백 장군이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된 박정희(朴正熙) 소령의 목숨을 건져준 것은 유명한 일이다.
 
  1950년 6·25가 터졌을 때 백선엽 장군은 제1사단장(대령)이었다. 개성-임진강 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1사단은 서울이 함락되던 6월 28일 오전까지도 분투(奮鬪)하다가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후퇴했다. 1사단은 한강 이북에 남은 최후의 사단으로서 선전(善戰)한 후 건제(建制)를 유지한 채 도하(渡河)한 부대로 평가받았다.
 
 
  ‘세계 戰史上 최후의 장군 돌격’
 
  전쟁 중 백 장군의 가장 큰 전공(戰功)은 다부동전투에서의 승리였다. 대구 북방 다부동이 뚫리면 대구가 함락되고, 대구가 함락되면 미군은 울산-밀양-진해를 연결하는 데이비드슨선(線) 아래로 후퇴하게 되어 있었다. 데이비드슨선은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선이라기보다는 미군 등 유엔군이 철수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선이었다. 다부동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해 8월 30일 1사단 11연대 1대대가 지키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다. 1사단을 지원하던 미 27연대마저 한국군이 후퇴하면 자기들도 철수하겠다고 압박하는 상황에서, 백 장군은 지프를 몰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백 장군은 후퇴하는 병사들을 붙잡아 앉힌 후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에게는 이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여기가 격파되면 나라가 망하고, 우리에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보라! 우리를 돕기 위해 지구 저쪽에서 온 미군이 저 아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버리고 우리만 살겠다고 하는 것은 대한의 남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백 장군은 돌격 명령을 내리고 선두에서 달려 나갔다. 이 모습을 보고 사기 충천한 장병들도 사단장의 뒤를 따라 돌격했다. 이렇게 해서 11연대 1대대는 잃었던 488고지를 탈환했다. 한국군이 후퇴하면 자기들도 철수하겠다던 27연대장 존 마이켈리스 중령은 “사단장이 직접 돌격에 나서는 것을 보니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고 칭찬했다. 일본의 군사저널리스트 이노우에 와히코는 이를 두고 ‘세계 전사상(戰史上) 최후의 장군 돌격’이라고 평했다.
 
 
  “한국 육군 최상의 야전 지휘관”
 
정부·여당이 백선엽 장군 추도를 외면하는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雨中에도 서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시민분향소를 찾아 고인을 애도했다. 사진=조선DB
  여기서 보듯 백선엽 장군의 리더십 요체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이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이동철 옹(6·25전쟁 당시 1사단 소속 소년병)은 “38선을 넘어 행군하던 중 사단장 지프에서 내린 백 장군은 82mm 박격포를 어깨에 메고 가던 부하에게서 포신(砲身)을 건네받아 같이 짊어지고 한참을 걸어갔다. 무게가 20kg은 족히 돼 보이는 무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마치 사병처럼 씩씩하게 걸어가던 백 장군의 모습이 7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회상했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1950년 10월 17일 적도(敵都) 평양에 입성한 선봉부대였다. 당시 1사단과 평양 입성 경쟁을 벌이던 부대는 미 기병 1사단이었다. 1사단은 기동력에서는 미군보다 훨씬 뒤졌지만, 밤낮 없이 행군을 강행해 결국 평양을 향한 레이스에서 승리했다. 여기에는 백 장군이 평양에서 자란 덕분에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데다, 청일전쟁 당시의 전사(戰史)와 전훈(戰訓)에도 해박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평북 운산까지 북진했던 1사단은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도 미군의 엄호를 받으면서 부대의 건제를 유지한 채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1951년 1·4후퇴로 안성까지 후퇴했던 1사단은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할 때 한강을 건너 서울에 입성한 첫 부대가 됐다.
 
  1951년 4월 백선엽 장군은 소장으로 진급해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1군단장이 됐다. 같은 해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19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한 그는 2군단장을 거쳐 그해 7월 제7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1953년 1월에는 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해 5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예방(禮訪)한 자리에서 “폐허 위에 아무런 보장(guarantee) 없이 휴전만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청했다.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은 1951년 말 작성해 본국 정부에 올린 한국 정부·군부 인사들에 대한 보고서에서 백선엽 장군(당시 소장)에 대해 “한국 육군에서 최상(best)의 야전 지휘관으로 평가됨. 참모와 지휘관 양쪽 모두 탁월한(excellent) 기록 보유. 한국 육군에서 가장 걸출한(most outstanding) 장교임”이라고 극찬했다.
 
 
  初代 야전군사령관
 
  백선엽 장군은 1954년 2월 제1야전군사령부(현재의 지상군작전사령부)가 창설되자 초대(初代)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3년9개월간 신생 야전군의 토대를 닦은 후 1957년 육군참모총장(제10대)으로 복귀했다가 1959년 제4대 합동참모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선엽 장군은 4·19 후인 1960년 5월 예편했다. 이후 주(駐)중화민국(대만)·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을 역임한 후, 1969년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入閣)해 2년간 재임했다. 교통부 장관 재직 시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착공했다. 1971년 교통부 장관에서 물러난 후에는 충주비료·호남비료·한국종합화학 사장 등을 지내면서 중화학공업 건설에 이바지했다. 한국석유콤비나트 건설 당시, 일본 통상산업성 관료들은 4성 장군 출신인 그가 기술 이전을 받기 위해 매일같이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실무자들을 만나는 것을 보고 그 지성(至誠)에 감복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성우회장, 육군협회장, 명예주한미8군사령관 등으로 안보의식 고취와 육군 발전,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진력했다.
 
 
  “한국의 조지 워싱턴”
 
  국내 일각에서 백선엽 장군의 만주군 경력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은 한결같이 백선엽 장군을 ‘영웅’으로 극진하게 예우했다. 그들에게 백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 윌튼 워커, 매슈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 마크 클라크 등 미국 전사상의 영웅들과 함께 싸운 ‘전설’이었다. 한국에 부임하는 주한미군사령관들은 늘 백 장군을 찾았고, 장군을 자신들의 멘토로 여겼다. 평택 주한미군 기지에는 ‘백선엽 홀(Hall)’이 있다.
 
  백선엽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백선엽 장군을 오늘날 그의 조국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초대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미군의 아버지였던 것과 다르지 않다”면서 “우리는 세계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잃었다”고 추모했다.
 
  제임스 D.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그는 지난 70년 동안 한미동맹을 강화했고, 동맹이 깨지지 않도록 만든 진정한 영웅이었고, 애국자였다”면서 “백 장군은 자유의 가치, 그리고 희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고 기렸다.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그의 사망은 미한(美韓) 동맹에 깊은 손실이며, 이제 진정한 역사의 한 부분이 사라지게 된 것”이라면서 “그가 전장(戰場)에서 이끌었던 많은 전우, 그리고 그를 존경하며 함께 복무하다 먼저 떠난 전우들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로버트 에이브럼스 현 주한미군사령관도 “진심으로 그리워질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며 백 장군을 기렸다. 삼가 백선엽 장군의 명복(冥福)을 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008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도서출간 배너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