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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한국 최초·최고 인물이 영면한 망우리공원

유관순·한용운·조봉암·이중섭·박인환 잠든 한국 근현대사 榮辱의 공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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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가 조선왕조 맥(동구릉)을 훼손하며 아차산 망우리에 공동묘지를 정한 것”
⊙ 한때 5만 기에 육박하던 묘가 2019년 6월 말 현재 7360기 정도 남아
⊙ 지난 7월 31일 조봉암 60주기 추모식에 문재인 대통령 화환 보내와
⊙ 한강 이북의 도봉산·수락산·불암산, 이남의 검단산·예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
서울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망우리공원묘지 입구 모습이다. 망우리에 묻힌 대표적인 근현대사 인물 사진을 걸어놓았다. 이하 모든 사진은 강남욱 선생이 찍었다.
  서울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에 걸터앉은 망우산(봉화산, 용마산 등이 아차산에 속한 봉우리다)을 찾았다. 망우리묘지공원. 그곳은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들이 묻힌 공간이다. 태조 이성계의 무덤이 있는 동구릉(사적 제193호, 구리시 동구릉로 197)에서 직선거리로 1km 남짓한 곳.
 
  망우(忘憂)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이성계가 사후 장지를 동구릉으로 정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과 경기의 경계가 되는 고개에 올라 “이제야 근심을 잊겠다(忘憂)”고 하여 망우로 정했다고 설이 내려오고 있다. 1760년에 필사 간행된 《망우동지(忘憂洞誌)》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기자는 지난 7월 31일 망우역사문화공원 조성 자문위원인 정종배(鄭鍾培·60·서울 신현고 교사)씨, 그의 제자 강남욱(기능장·서울여대 건축팀)씨와 함께 근현대사의 걸출한 인물들을 탐험해보았다.
 
  이날 새벽부터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공교롭게도 망우리에 묻힌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8~1959) 선생의 서거 6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일찍부터 비에 젖은 국화들이 망우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망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한 정종배 선생.
  불교 경전인 《유마경》에는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있다.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 있다.’ 기자는 속으로 이렇게 바꿔보았다. ‘겨자씨 속에 망우산이 들어 있다.’
 
  겨자씨 같은 믿음이 수미산을 옮겼듯, 약 25만 평(83만2800m2)의 망우산에 누운 영령(英靈)들로 인해 근현대사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곳에는 한국 최초·최고 인물이 영면해 있다.
 
  최고의 독립지사(대한민국장) 안창호와 한용운, 최초의 극영화 〈아리랑〉의 나운규, 영화음악의 1인자 노필, 조선의 ‘호무랑(홈런)’ 타자 이영민, 조선학의 선구자 문일평, 초대 조선축구협회장 박승빈,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 당대 빈궁문학의 최고봉 최서해, 최초의 대중소설가 김말봉, 예술계의 팔방미인 안석주, 아동문학의 선구자 방정환, 한국민주당 초대 당수 송진우, 한국인 최초로 유아 세례를 받은 서병호, 최초의 피부과 의사이자 세브란스 최초의 한국인 교장 오긍선, 최초의 도쿄대 의학박사(임상) 이영준, 근대 최고의 화가 이인성과 이중섭, 근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숙명여대 초대 총장 임숙재, 《동아일보》 초대 주필 장덕수,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 최초로 서양의학을 도입한 관립의학교 초대 교장 지석영, 최초의 수필문학 잡지 《박문》을 창간한 최신복(동요 ‘오빠생각’을 작사한 최순애의 오빠), 한국인 최초의 모르몬교도 김호직, 대한중석 초대 사장 안봉익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 벅찰 정도다. 그러나 이 중 일부는 망우리에서 묘를 이장한 상태다. 정종배 위원의 말이다.
 
  “1920년대 경성은 이태원, 신사리, 수철리(현재 성동구), 홍제내리, 아현리, 미아리 등의 공동묘지를 이용했다. 그러나 30년대 들어 급증한 주택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이곳에 분묘 단지를 조성했다. 조선왕조 맥(동구릉)을 훼손하며 아차산 망우리에 공동묘지를 정한 것이다.”
 
 
  근심을 잊다, 忘憂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던 무연고 합장묘가 1936년 망우리로 왔다.
  만장(滿葬)이 될 미아리 공동묘지를 대체하기 위해 1933년부터 망우산 25만 평에 묘지를 조성하게 된다. 정 위원의 말이다.
 
  “이때부터 경성 사람들은 망우리에 묘지를 쓰게 됐다. 그중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도 포함돼 있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해가 망우리로 운구될 때 일제는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장례식은 물론 망우리로 향하는 거리 곳곳에 병력을 배치했다. 안창호 선생은 망우리로 모셔진 지 35년 만인 1973년 미국에서 온 부인의 유골과 함께 현재의 강남 도산공원에 합장하게 된다.”
 
  ― 광복과 6·25를 거치며 망우리 묘지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광복과 6·25의 대혼란을 겪은 후, 피란 갔다 돌아온 이들은 남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무덤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네 조상이라 다투다 결국 관을 열어보는 일도 있었다. 사회 자체가 혼란스러웠음을 말해주는 일화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망우리 역시 묘를 쓸 터가 부족하기 시작했다. 1966년 2월 자료를 보면 당시 약 65만여 평에 4만7754기가 자리를 차지해 가용 공간이 부족한 상태였다. 서울시는 묘지 부족을 우려해 경기 벽제리, 용미리, 언주리(현재의 양재동) 등에 공동묘지를 조성했지만, 시민들은 거리가 멀고 조상들이 잠든 탓에 망우리로만 몰려들었다.
 
  망우리는 1973년 3월 22일부로 더는 묘를 쓰지 못하게 됐다. 당시 1만5000평의 여유 공간이 있었지만, 서울시는 ‘도시계획 및 조경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중단시켜버린 것이다.
 
  “1933년 망우리에 묘를 쓰기 시작한 지 딱 40년 만의 일이었다. 묘지 사용이 중단됐어도 한식, 추석 등 조문객이 몰릴 때는 여전히 혼잡스러운 것이 망우리였다. 그러나 점점 이장하는 수가 늘더니 한때 5만 기에 육박하던 묘가 2019년 6월 말 현재 7360기 정도만 남게 됐다. 지금도 윤달이 되면 이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장하여 빠져나간 묘터에 나무들이 들어서면서 숲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에 숲이 우거진 것은 20년이 채 안 된다. 이전에는 봉분만 가득한 민둥산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4.7km의 망우리 순환로를 ‘사색의 길’로 정비했고,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알리기 위한 연보비(年譜碑)가 세워졌다. 그러자 죽음의 공간이던 망우리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 위원과 망우리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다가 숲길로 들어섰다.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정 위원이 문득 “유관순 묘가 망우리에 있다”고 했다.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망우리 개설 초기인 1937년 6월 9일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이태원을 주택지로 만들기 위해 1935년부터 이장을 추진하여 1936년 4월 8일까지 유연고 4778기는 미아리로, 무연고 2만8000여 기는 망우리로 경성부 위생과에서 화장 후 합장했다. 그 불쌍한 혼을 위로하기 위해 9일 오후 2시부터 공동묘지에서 위령제를 거행한다.’
 
  유관순(柳寬順·1902~1920) 열사의 시신은 1920년 10월 12일 감옥에서 순국하여 이틀 뒤인 14일 일제 경찰의 경비 속에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의 독립운동 순국과 투옥으로 열사의 묘지를 망실(亡失)하고 말았다. 정 위원의 말이다.
 
  “유관순 열사는 무연고 합장묘에 잠들어 있으리라 추정하여 (망우리 관리사무소에서)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작년에 제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 연락하여 이화여고동창회 중심으로 기념 묘표가 세워졌다. 덕분에 지난 ‘3·1혁명’ 100주년 때는 참배객의 발길로 유택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는 유관순 열사를 가장 가깝게 추모할 수 있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유관순이 우리 민족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표지비’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누군가 가져다 놓은 조화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아무렇게나 꽂힌 태극기도 아쉽게 느껴졌다. 비를 흠뻑 맞아서인지 봉분 위로 잡풀이 무성했다.
 

  정 위원은 기자를 다시 산속으로 끌고 갔다. “유관순 열사와 독립운동을 함께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이었다. 비좁고 질척한 산길을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 길이 사라진 곳을 헤쳐가니 잡풀 속에 묘비가 있었다. ‘김분옥여사지묘(金芬玉女史之墓)’ 비석 뒷면에 그녀의 행장(行狀)이 적혀 있었다.
 
  ‘(이화학당에) 재학 시에는 방학 때마다 농촌 계몽운동을 하였고 유관순과 같이 민족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중략) 장학생으로 渡美 유학을 시켜 家事科를 전수케 하였다. (생략)’
 
  그러나 둥근 봉분의 형태는 무너지고 봉분 자리에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정 위원의 말이다.
 
  “유관순·서명학·김희자·김복순·국현숙 등과 함께 3·1운동 전날 이화여고 1학년 6인 결사대 중 한 분이 김분옥이었다. 우연히 돌배나무 꽃이 흐드러져 찾아 들어갔다가 잊힌 묘비를 찾았다. 유관순과 독립운동을 함께 하신 분인데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분의 흔적을 좇다가 1972년 간행된 《새로운 중학 가정3》과 고교 실업·가정과 교과서인 《새로운 가정》의 공동저자 ‘김분옥’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추측건대 후손들이 이민을 떠나는 바람에 묘지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유관순과 김분옥,
  이중섭과 구상·차근호·김병기

 
이중섭의 묘 앞이다. 구상 선생이 심은 소나무가 크게 자랐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바짓단을 걷고 근대화가 이중섭(李仲燮·1916~ 1956)의 묘 아래에 섰다. 망우리 용마천 약수터에서 북쪽으로 가다 보면 소나무가 나오고 조각가 차근호(車根鎬·1925~1960)가 만든 두 아이의 그림이 새겨진 조각 묘비 뒤에 이중섭의 묘가 있었다.
 
  “무덤 옆 소나무는 친구 구상(具常· 1919~2004) 선생이 심었다. 1976년 찍은 사진에는 소나무가 조그만데 지금은 아름드리로 자랐다.
 
  조각 묘비는 차근호가 만들었는데 당시 ‘형(이중섭) 옆에 묻히겠다’고 할 정도로 흠모하는 사이였다. 그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유리 4·19 국립묘지에 있는 ‘사월학생혁명기념탑’ 공모전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가 최종 탈락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는 설이 있다. 구상 선생의 수필을 읽으니 ‘화장터 불 속에 (차근호를) 넣고 일초(一超·高銀)와 밤새 통음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풍수에서는 묘 주변 소나무를 중요시 여긴다. 망우리의 내로라하는 묘역엔 소나무와 바위가 있다. 죽산(조봉암), 만해(한용운), 아사카와 다쿠미가 그렇다. 바위는 풍수에서 흙산 하나로 본다. 유명 정치인이나 재벌 묘역엔 저런 바위와 소나무가 있는데 아쉬운 것은 (망우리 묘역을 정비하며) 고인과 관련 있는 이가 심어놓은 사연 있는 나무들을 죄다 없애버렸다.
 
  지금은 관리가 되어서 그렇지 이맘때면 칡넝쿨이 넘어와 묘비를, 봉분을 친친 감는다. 자발적으로 모인 ‘영원한 기억 봉사단’에서 땀을 흘리며 묘역 곳곳을 정비하고 있다.
 
  이중섭 묘를 보면 봉분 가운데 떼가 죽어 있다. 개미집이 있다는 것인데 개미가 많이 살면 수맥이 흐른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곳에서 해 질 녘 노을을 바라보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구상 선생이 이중섭의 묘터를 직접 택했다는데 의외로 괜찮은 자리다. 잘 잡으셨다.”
 
  정 위원은 이중섭의 죽마고우인 김병기(金秉騏·1916~ ) 화백을 만난 적이 있다며 당시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이중섭은 평양 부자 김병기 화백 집에서 처음 붓을 잡았다고 할 정도로 두 분은 죽마고우였다. 김 화백은 ‘나는 추상미술을 통과해 (지금의 화풍이) 정착됐고, 이중섭 화가는 추상미술의 입문 과정으로 끝나버렸다’며 아쉬워했다. 또 ‘(이중섭은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보의 민족정신과 6·25전쟁 체험을 그림으로 표출했다’ ‘이중섭의 작품 크기가 조그마한 것은 바로 전쟁의 상흔 때문’이라고 하였다.”
 
 
  빈궁문학의 최고봉 최서해와 라이벌 계용묵
 
  천천히 빗속을 거닐어 서해(曙海) 최학송(崔鶴松·1901~1932)의 묘역에 이르렀다. 서해와 정 위원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그는 최학송의 묘지관리인이자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다. 해마다 추모식을 직접 주관하고 있다.
 
  “1970년 1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친구에게 책 두 권을 빌렸다. 한 권은 신동엽의 장편 서사시 《금강》, 또 한 권은 최서해의 《탈출기》였다. 그것이 서해와의 첫 인연이었다.
 
  지난 2000년 4월 망우리 공원 ‘사색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서해의 묘를 발견했다. 폐묘에 가까웠다. 주변 신갈나무와 아까시나무 뿌리가 묘에 얽혀 있어 봉분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아내 몰래 돈을 저축해 2006년 이후 서해의 묘지를 세 번 재단장했다. 2010년엔 서해의 묘지관리인으로 정식 등록했고, 제자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도 만들었다.”
 
  ― 최서해는 어떤 인물인가. 어떤 인연으로 망우리에 묻혔나.
 
  “서해는 우리나라 빈궁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카프(KAPE·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가담했으나 적극적이진 않았다.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1892~?)를 흠모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학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서울로 와 방인근(方仁根·1899~1975) 주간 《조선문단》의 편집을 맡았다. 잡지 편집에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932년 32세 나이로 위문협착증, 즉 장이 붙어버리는 병으로 죽었다.”
 
  서해는 결혼을 네 번 했다. 마지막 아내는 시조시인 조운(曺雲·1900~?)의 막냇누이였다. 아들 둘, 딸 하나를 얻었다. 그가 죽자 문인장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문인장은 당시 최초였다. 처음엔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장례식 행렬에 자동차 50여 대가 뒤를 이어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그러나 미아리 공동묘지가 문을 닫자 시인 김광섭(金珖燮·1905~1977)의 주도로 망우리로 이장했다.
 
  ― 최서해의 후손은 없는가.
 
  “남편이 죽자 북으로 간 서해의 아내는 5년 뒤 죽었다. 큰아들은 광복 무렵 외가인 전남 영광에서 폐병으로 죽었다. 딸 또한 일찍 죽었다. 둘째 아들 최택은 북으로 가 서해의 후광으로 김일성대를 졸업하여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이 되었다.
 
  이 사실은 북한에 피랍됐던 신상옥 감독이 김정일의 지시로 소설 〈탈출기〉를 영화로 제작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그 무렵, 최택이 자신의 집안 내력을 북한 잡지에 기고한 것이다. 그 글이 문학잡지 《문학사상》에 재수록되면서 연구자들에게 알려졌다.”
 
  최서해의 무덤 아래 소설가 계용묵(桂鎔默·1904~1961)의 무덤도 있다. 계용묵 하면 소설 〈백치 아다다〉가 떠오른다. 1930년대 미적 언어로 표현된 단편소설로 격을 높였다는 평가다.
 
  “두 사람은 문단 라이벌이었다. 서해는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고국〉으로, 계용묵은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 〈상환(相換)〉으로 등단했다. 생전 티격태격하던 그들도 서해가 떠나자 계용묵은 후원도 하고 (서해의) 자식도 돌보았다고 전한다.
 
  아쉽게도 현재 계용묵의 묘는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 묘도 작고 수맥이 흐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60주기 조봉암, 국립묘지 대신 망우리에 묻힌 한용운
 
지난 7월 31일 오전 11시에 시작된 죽산 조봉암 선생의 서거 60주기 추도식에 문재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이 보낸 화환이다.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었다. 올해는 죽산 조봉암의 서거 60년, 탄생 120년째 되는 해다. 오전 11시부터 60주기 추모식이 시작되었다. 기자가 추모식 30분 전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화환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화환 중에 문재인 대통령, 문희상 국회의장의 화환이 눈에 띄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화환도 보였다. 정 위원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60주기가 되니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 같다. 과거 추모식에서는 대통령 화환을 본 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봉암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정권의 핵심 권력자도 망우리에 묻혔다. 자유당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 1960년 4월 28일 아들 이강석이 쏜 총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고, 이강석도 자살했다.
 
  이기붕 일가의 죽음과 관련해 국민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총살했다는 설도 나돌았지만, 아무튼 이들은 망우리에 안치됐다. 한동안 이기붕 일가의 묘지가 가짜란 말이 나돌았다. 어딘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몇몇 젊은이가 묘를 파헤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이기붕 일가의 묘는 표지도 없이 풀 속에 방치됐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를 찾기 힘든 상태다.”
 
  식이 거행되자 많은 이가 몰려들었다. 애국가 제창과 묵념이 있었고, 죽산선생의 육성 녹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굵지 않았다. 무척 빨랐다. 이상하게도 음성이 낯설게, 멀게만 느껴졌다.
 
  “1959년 8월 2일 죽산이 망우리에 모셔진다. 조봉암은 진보당 당수로서 북한과 내통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당시 언론은 단신으로 보도했고, 이후 30년 가까이 조봉암은 금기어였다.”
 
망우리에는 잊히고 망실된 묘지가 많다. 땅속에 묻힌 묘비다.
  사후 30주기인 1989년에서야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2007년 9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조봉암에 대한 사과·명예 회복을 국가에 권고했고, 2011년 1월 20일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판결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추모식 시작 전 잦아들더니 식이 시작되자 그쳤다. 이부영(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장), 김성훈(전 농림부 장관), 박남춘(인천시장), 송영길(국회의원)의 추도사를 들으며 발길을 옮겼다. 인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묘지로 향했다.
 
  시 ‘님의 침묵’으로 잘 알려진 만해는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타계했다. 일제의 감시 속에 화장돼 망우리로 모셔졌다고 한다. 1970년대 말 추모사업회가 발족해 선생의 유골을 국립묘지로 이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01년에는 고향인 충남 홍성군으로 이장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지금도 망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만해 선생은 1892년 14세 때 결혼했다. 1933년에 재혼한 부인 유씨(兪氏)와 함께 망우리에 모셔져 있다. 만해의 묘는 2012년 10월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됐다. 개인적으로는 국립묘지보다 민중과 함께 있는 망우리야말로 선생에게 좋은 안식처가 아닐까 싶다. 만해의 유해가 안치된 1940년대 망우리에는 여우가 그렇게 많았다고 한다.”
 
  죽산의 60주기 추모식을 찾은 이들이 삼삼오오 만해의 묘지를 찾았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야 하지만 기꺼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찾아왔다. 조화와 함께 활짝 핀 난이 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근대 의학의 선구자, 오긍선과 제자 이영준
 
해관 오긍선 선생의 가족묘. 봉분 대신 한옥 모양의 오석으로 만들었다.
  해관(海觀) 오긍선(吳兢善·1879~ 1963)의 묘가 눈길을 끌었다. 망우리 묘역 중 가장 돋보이는 가족묘였다. 삼각형 한옥지붕 모양 오석(烏石)으로 봉분을 없애버렸다. 묘역 구분 담장도 굳건했다. 해관이 운명할 때 한 말이 지금도 회자된다.
 
  “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간다.”
 
  해관의 무덤은 망우리 약수터 중 물맛이 가장 좋다는 동락천 왼쪽 계단에 연보비가 서 있는데 그의 생이 이렇게 요약돼 있었다.
 
  ‘…1978 충남 공주군 사공면 운암리에서 출생. 1907 미국 루이빌 의과대학 졸업(의학박사 학위). 1917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한국 최초 피부과 창설. 1919 경성 보육원 및 양로원을 설립하여 사회사업 시작. 1934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제2대 교장에 취임. 미국 센추럴 대학에서 명예이학박사. 루이빌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취득. 1949년 사회사업 공로표창, 의학교육 공로상, 공익표창 등을 받음. 1963년 문화훈장 추증…’
 
  정 위원의 말이다.
 
  “해관은 근대 의학의 선구자다. 우리나라 의사면허 1호, 최초 피부과 의사, 세브란스의전 한국인 교수와 교장이었다. 고아원(1919년)과 양로원(1931년) 설립 역시 한국인 최초였다.”
 
  그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시험이 없어지자 이듬해 상경, 배재학당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 2년 선배 이승만(李承晩·1875~1965)과 독립협회 일을 하다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선교사 집에 피신하게 된다. 그 인연으로 배재 졸업 후 1902년 미국 유학을 떠나 의술을 배운다. 1907년 남장로교 선교 의사 자격으로 귀국, 순종 황제 전의(정3품 월급 150원)를 사양하고 군산 야소교(예수교) 병원의 의사로 일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1934년 한국인 최초 세브란스의전 2대 교장에 취임했다. 해방 후 미 군정청 민정장관을 제의받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초대 사회부 장관을 맡겼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의 아들 오한영은 제2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냈다. 오한영은 의술을 돈벌이로 삼지 않았다. 세브란스의전 교수와 병원장, 6·25 당시 국립경찰병원장을 지냈다.
 
  오한영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오중근은 국립마산결핵병원장, 둘째 오장근은 국립철도병원장, 국립서울병원장을 지냈다.
 
  오씨 3대의 결단은 놀랍다. 해관의 말이 후손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해관은 평소 이렇게 말했다.
 
  ‘의료가 축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되며 개업의가 한 사람 늘면 그만큼 조선에 가난한 사람이 더 생긴다.’
 
  장남 오한영이 개업의의 뜻을 비치자 해관은 ‘서양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청년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항차 우리나라 사람이 청년교육을 외면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개업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이라며 크게 책망했다고 한다. 손자 두 명(오중근·오장근)도 공직 은퇴 후 개업하지 않았다.”
 
  해관의 묘역 아래에 그의 제자 이영준(李榮俊·1896~1968)의 묘가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경제대 박사 출신이다. 1942년 해관에 이어 세브란스의전 3대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스승과 180도 다른 길을 걸었다. 정치인이 되었고 4선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1968년 72세로 사망하자 망우리로 묘를 정했다. 스승에게 돌아온 것이다.
 
 
  조각가 권진규와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
 
한국적 리얼리즘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의 묘지다.
  한국적 리얼리즘을 조각으로 승화시킨 권진규(權鎭圭·1922~1973)의 묘를 찾기 위해 산속을 한참 헤맸다. 정 위원도 “올 때마다 헷갈린다”고 했다.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걸어 왼쪽 순환로를 따라 오르다 첫 번째 계곡의 능선을 타고 다시 오르다가 ‘유인청주한씨묘’(孺人淸州韓氏之墓)를 지나 작은 도랑을 따라 다시 오른쪽으로… 어쨌든 찾았다. 묘를 안내하는 표식이 전혀 없었다.
 
  나란히 누운 4개의 봉분 맨 안쪽 봉분의 묘비에 ‘권공진규지묘(權公鎭圭之墓)’라 적혀 있었다. 권진규는 이중섭, 이인성(李仁星·1912~1950)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정 위원의 말이다.
 
  “그가 사용했던 고택과 화실(畵室)은 지금도 남아 있고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생전 단 3회의 개인전을 가졌지만, 한국 구상 조각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북향의 높은 절벽 위에 묘역이 있지만,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마련돼 있다. ”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은 지금도 많은 이를 놀라게 한다.
 
  “범인(凡人)에게는 침을, 천재에게는 감사를, 바보에게는 존경을!”
 
  천재였던 그는 세상을 바보처럼 살다가 홀연히 떠났음이 분명하다. 1973년 5월 13일 《조선일보》 5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조각가 권진규씨의 갑작스런 죽음이 뒤늦게 자살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공식적으로 자살설을 부인한다.
 
  지난 4일 오후 2시 외출에서 돌아온 권씨는 작품의 산실이며 살고 먹고 자고 한 10평 남짓한 아틀리에로 평소와 다름없이 들어갔다. 오후 6시 문을 열었을 때 천장에서 내려와 있던 쇠줄에 목을 맨 그가 자신이 만든 수많은 얼굴(테라코타와 건칠[乾漆])들 사이에 있었다고 전한다. 살아서 하필이면 고통스럽기만 한 예술가의 길을 택했던 권씨는 화창한 봄날에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음을 택했다. 왜? 무엇 때문에?
 
  59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어려운 작품제작 여건과 국내 미술계의 냉담한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지쳐서…”라고 말끝을 맺지 못한 미술평론가 유준상(劉俊相)씨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권진규가 유서에 쓴 말은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었다고 한다.
 
누구보다 한국인과 한국의 미를 사랑했던 민예학자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의 묘 앞에서. 오른쪽이 정종배 교사다.
  우리는 산을 내려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의 묘로 향했다. 홍림회(洪林會)에서 세운 묘표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정 위원의 말이다.
 
  “2000년 4월 첫 토요일로 기억한다. 전날 밤 수필집 《약손》의 저자 박문하(朴文夏·1918~1975) 선생이 쓴 〈또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글에는 박문하가 일본인 지인에게 ‘《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년),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년)를 구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튿날 망우리를 산책하고 있는데 조화가 두 줄로 늘어선 모습을 보고 유택을 확인하니 다쿠미의 묘였다. 다쿠미가 바로 두 책의 저자였다. 그는 ‘조선인은 유랑하면서도 이삿짐 맨 위에 밥상이 실려 있다. 온돌방에 가장 적합한 밥상은 실용성, 조형미, 예술성 등 쓰면 쓸수록 빛나는 동양 최고 민예품’이라고 극찬했다.”
 
  정 위원에 따르면, 다쿠미는 한국의 미를 흥과 가락과 멋으로 파악한 인물이다. 조선민족미술관 건립(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주도적으로 활동했고, 폐허동인 오상순·염상섭·변영로·남궁벽 등과 교우했다.
 
  한여름 밤 성동역(제기동)에서 내려 정릉 천변을 걸어, 다쿠미 선생과 청량사에서 차담을 나누는 교류가 당시 명사들의 최고 풍정(風情)이었다고 한다. 홍릉·광릉수목원 이전 작업 전반에 걸쳐 능력을 발휘하였다.
 
  “일본 정부가 지금도 못된 짓을 하여 정말 밉다. 그러나 이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만은 일본 보수 쪽의 협박과 위협에도 목숨 걸고 한국의 얼과 혼을 좋아하고 실천하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삶을 살았다.
 
  생전 어려운 한국인을 돕고, 가난한 동료 직원 자녀의 학비를 대신 내줬다. 한국말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한복을 입고 온돌문화 등 한국식 생활을 즐겼다.”
 
  다쿠미 묘지는 이문동 공동묘지에서 1942년 망우리로 이장했다. 명당에 쓴 묘는 점점 커진다는 말이 있다. 다쿠미 묘역도 조금씩 넓혀졌다. 2014년 다쿠미의 고향에서 4300만원이 쾌척, 그해 10월 4일 재단장한 묘역에서 성대하게 추모식을 치렀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지금은 망우리 묘역 중 둘레석을 둘러친 호화 분묘(?)가 되었다. 다쿠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독립지사 묘는 초라한데 쪽바리 묘는 크게 모시는가’라며 종종 불만을 터트린다. 그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박인환 묘와 김영랑, 안석주의 묘터를 찾아서
 
박인환의 묘. 비석에는 시 ‘세월이 가면’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폭우가 쏟아진 탓에 더는 걸을 수 없어 하산했다가 이틀 뒤인 8월 2일 망우리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올여름 가장 무더운 날씨였다. 인근 주민들이 운동복 차림으로 혹은 등산복 차림으로 망우산 자락을 오르고 있었다.
 
  한국의 가장 슬픈 모더니스트 박인환(朴寅煥·1926~1956) 시인의 묘지를 찾았다. 망우리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시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박인환의 묘는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봉분 한쪽에 개미집이 보였다. 화병에는 주황색과 분홍색 조화가 여러 송이 꽂혀 있었다. 그의 시 때문일까. 파란 잔디가 쓸쓸해 보였다. 비석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지금은 이장했지만, 박인환의 묘 가까이 있었다는 시인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1903~1950)과 예술인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1901~1950)의 묘터를 찾았다. 박인환의 묘지를 기준으로 13시 방향 50m 근처라고 정 위원이 일러주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라고 노래하던 시인, “북쪽에 소월이 있다면 남쪽에 영랑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안석주는 또 어떤가. 시인이자 기자·소설가·배우·영화감독·화가 등 근대 식민지 조선의 팔방미인이었다. 못하는 것이 없었다.
 
  영랑과 석영의 묘터를 오래 더듬었다. 땀이 비 오듯 했다. 이장 흔적이 있는 묘터 여러 곳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그곳이 두 사람의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웠다.
 
석영 안석주의 묘 앞에 둘러앉은 당대 문인들과 석영의 가족들. 사진 속 망우리는 나무가 없는 민둥산으로 보인다.
  정 위원이 석영이 망우리에 묻혔을 당시의 모습을 담은 귀한 흑백사진을 휴대전화로 보내왔다. 석영의 묘비를 둘러싼 당대 문인과 가족의 표정이 정겹게 보였다.
 
  문득 산속 어느 이장터를 뒤로하고 바라본 탁 트인 하늘이 기막히게 푸르렀다. 멀리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이 아차산을 차지하려 했던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명당 자리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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