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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

하와이에서 열린 이승만 박사 54주기 추도회 참석記

이승만의 든든한 지지자 동지회는 살아 있다

글 :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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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이 건립한 하와이한인교회 내 독립기념관은 ‘하와이 이승만기념관’으로 불려
⊙ 동지회, 하와이총영사관 건물 기증, 이승만 묘소 기념비 제작… 이승만박사장학금 수여 등 사업 계속하고 있어
⊙ 한인기독학원 자리에 들어선 알리이올라니초등학교, 이승만과 한인기독학원을 자기 학교 역사의 일부로 가르쳐
한인기독교회에 설치된 이승만 박사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이 독립기념관이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54주기를 맞아 추모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에 1년6개월 만에 하와이를 다시 찾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주한인역사연구소’를 설립·운영하는 제임스 권 대표를 비롯해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박사과정에 있는 박재원 학생도 이 추모 모임에 참석할 손님이다.
 
  호놀룰루공항에 도착하자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린다. 두 시간의 기다림 끝에 호놀룰루공항을 벗어나면 눈부신 햇살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끈적임 없는 상큼한 공기가 방문객을 맞는다. 106년 전 망국민(亡國民) 이승만이 찾은 하와이의 하늘도 이처럼 푸르고 햇살이 눈부셨으리라.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망명(亡命)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한인(韓人)기독교회, 한인기독학원, 동지회의 설립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조직들은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망명 생활 26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성격이 다른 세 조직은 유기적 관계 속에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며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후원했고, 한인 사회는 물론 하와이 다민족(多民族) 사회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비록 한인기독학원은 없어졌지만 그 명맥은 인하대로 이어졌다. 한인기독학원이 있던 자리에는 칼리히초등학교가 들어서 본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학교 부지를 제외한 곳은 택지로 개발되었고, ‘KURA KOLEA’라는 도로명이 그곳에 한인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인기독교회는 여전히 한인들의 신앙 공동체로써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동지회는 정치활동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승만 박사 기념 장학금 수여 사업을 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씨가 뿌려지다
 
하와이 이민노동자들이 첫발을 디뎠던 호놀룰루항, 이 건물을 통해 하와이 땅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와이 한인 이민 역사는 110여 년 전인 1903년 1월 13일, 최초의 노동이민단 102명이 호놀룰루항에 첫발을 내디디며 시작된다. 1903년 시작된 집단 이주는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카후쿠·와이알루아 사탕수수 농장을 비롯하여 하와이 6개 섬의 30여 개 사탕수수 농장으로 흩어졌다. 한인 노동자 대부분은 30℃를 웃도는 뙤약볕 아래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매우 고된 작업을 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높은 급료나 자녀 교육의 기회가 많을 것이라던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었다.
 
  첫 노동이민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하고 나서 2년 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었다. 5년 후에는 국권마저 잃어 망국 백성이 되었다. 1905년까지 하와이에 온 7400여 명의 한인 중에 약 2000명은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약 1000명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1910년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수는 4533명으로 줄어 하와이 총 인구의 2.4%에 불과했다. 이들은 장차 하와이에 정착할 이승만 박사와 때로는 협력자로 때로는 반대자가 되어 끊임없는 부침(浮沈)을 겪을 터였다.
 
 
  하와이 안에 있는 조선팔도
 
  이승만 박사는 1912년 3월 26일 일제(日帝)의 개신교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105인 사건)를 피해 조국을 탈출했다. 그때는 일시적 탈출로 생각했으나 현실은 귀국과 점점 멀어져만 갔다. 결국 귀국 희망을 포기한 이승만 박사는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하와이를 망명지로 선택하고 1913년 2월 3일 정착했다.
 
  하와이 정착 이듬해인 1914년 이승만 박사는 《태평양잡지》 6월호에 하와이 군도(群島) 8개 섬을 조선팔도(八道)에 비유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이 여덟 섬에 한인 아니 가 있는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팔도라. 섬 도(島) 자와 길 도(道) 자가 뜻은 좀 다르나 음은 일반이니 이것을 과연 우리의 남조선이라 이를 만한지라. 장차 이 속에서 대조선을 만들어낼 기초가 잡히기를 바랄지니 하나님이 10년 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 되기를 기약하겠도다… 하와이 사는 사람들이 이것을 태평양 낙원이라 하나니 우리 고초 중에 든 민족에게 이곳이 한 낙원 되기를 바라노라.〉
 
  하와이 한인 사회를 기독교 사회로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망국민 이승만 박사에게 하와이는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의 조선팔도가 될 곳이었다.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수고와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한인기독교회 내 독립기념관
 
한인기독교회 내 독립기념관. 흔히 ‘하와이 이승만기념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한인학교 자립(自立)을 성취한 이승만 박사는 교회의 자립을 도모하며 《신한민보》 1918년 11월14일자에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적었다.
 
  〈종교상 독립 자유의 근본이 서지 못하고 국가의 독립 자유를 도모하는 자 없나니, 이는 곧 마음이 남을 의뢰하는 자 능히 육신을 자립할 수 없는 연고… 교회도 우리 교회가 완전히 서겠고 그 결과로 장차 국가적 독립도 새로 기초가 잡힐지니.〉
 
  이승만 박사는 교회의 독립을 통해 장차 국가의 독립도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한인들이 자신의 재산과 힘으로 세운 교회를 경영하는 가운데 자연히 자치(自治)능력이 자라고,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중에 재산권(財産權)에 대한 인식이 싹터 주인의식이 길러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만 박사는 한인의 주장으로, 한인의 소유로 교회를 발전시키자는 목적 아래 1918년 12월 23일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했다.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교회의 독립은 한인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한인기독교회 건물. 광화문을 본떠 만들었다.
  1915년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와서 한인기독교회 설립에 동참한 천연희씨는 자신의 자서전적 생활문화기에서 “아직도 우리 한인이, 나라가 자유독립되면 백성이 자유로워지고 교회가 자립하면 교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확실히 아는 민족인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릴리하 한인기독교는 한인들의 재산과 힘으로 설립되었다. 옳은 목적인 까닭에 아직도 꿋꿋이 서 있고 전부가 한인들의 재산이다”라며 이 박사를 따른 자신들의 결정이 옳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소명(召命)을 띠고 설립된 한인기독교회가 지난해 12월 23일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한인기독교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인기독교회 100년 사진역사》를 발간하고, 한동안 닫혀 있던 교회 내 ‘독립기념관’을 새로 단장해 개관했다.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독립기념관 벽에는 한인기독교회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잘 정돈된 사진패널들이 걸려 있다. 역대 교역자 사진과 이승만 박사 사진도 함께 전시된 독립기념관은 ‘하와이 이승만기념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독립기념관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관람이 가능하다. 4명의 자원봉사자의 수고로 운영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기념관을 관리하며, 관람객에게 한인기독교회 역사와 이승만 박사의 업적을 설명·이해를 돕는 역할을 한다. 독립기념관을 위해 매일 수고하는 김사빈·박경자·최혜자씨에게 이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흔히 ‘동지회’라는 약칭으로 부르는 대한인동지회는 1921년 7월 7일 조직되었다. 동지회 설립 목적은 당시 상하이(上海)에 있던 임시정부를 옹호하며, 교포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24년 11월 하와이한인대표회의에서 동지회는 이승만 박사를 총재로 선출하고 동지회의 3대 정강(政綱)과 정강 진행방침을 결정했다.
 
 
  동지회, 총영사관 건물 구입해 정부에 기증
 
동지회 임원들과 이승만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동지회는 지금까지 100만 달러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동지회는 이후 이승만 박사의 든든한 지지세력이 됐다. 동지회는 이승만 박사가 탄핵으로 임시정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한 후에도 임시정부가 내린 구미위원부 폐지 명령을 거부하고 이승만 박사의 구미위원부 활동을 계속 지원했다. 또한 기관지인 《태평양주보》를 발행하고,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독학원을 원조했다.
 
  동지회 활동은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이어졌다. 가난한 국가 재정 형편상 하와이총영사관 건물을 구입할 수 없자 동지회 회원들은 2만2000달러를 모금해, 1949년 10월 25일 총영사관으로 사용할 가옥을 구입해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했다.
 
  1969년 말이 되자 동지회 회원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동안 해오던 사업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면서 회관도 필요 없게 되어 1970년 1월 19만 달러에 회관을 매각했다. 동지회는 2월 8일에 동지회 및 호상부(상호부조기관) 대회를 열어 “동지회 건물이 매각되어 건물은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동지회를 유지하여 독립을 차지한 한민족(韓民族)을 위하여 일해나가야 될 것이니, 동지회를 계속 유지할 것”을 결정했다.
 
  1972년 동지회는 동지회관을 매각한 대금 중 일부로 이승만 전 대통령 묘지 기념비를 제작하는 한편, 장학사업을 이어왔다.
 
  동지회는 1987년 2월 22일 새 장정을 채택했다. 새 장정은 동지회 목적을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사회, 문화, 교육, 기타 모든 면에서 한국의 전통을 장려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또 동지회는 ‘이승만 박사 장학금(Dr. Syngman Rhee Scholarship)’ 사업을 동지회의 영구 사업으로 결정, 지금까지 매년 장학생을 선발·지급하고 있다. 그동안 동지회에서 지급한 장학금은 100만 달러에 달한다.
 
  하와이 한인들의 교육사업에 헌신한 이승만 박사를 기념할 목적으로 시작된 동지회의 이승만 박사 장학사업은 관계자들의 헌신으로 탄탄한 재정 상태를 유지하면서 매년 10여 명의 학생에게 넉넉한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2021년은 동지회가 조직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앞으로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칠지 예상할 수 없지만, 100주년을 맞이하는 동지회의 모습이 사뭇 기대된다.
 
 
  세대교체로 어려움
 
  동지회와 우남숭모회는 2015년 이승만 박사 서거 50주기 추모행사를 와이알루아의 컨트리클럽에서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때를 제외하고 하와이에서 공식적인 추모행사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난 7월 19일 정오 한인기독교회 독립기념관에서 양효직 담임목사의 기도로 조촐한 이승만 박사 추모 모임이 시작됐다. 추모회는 참석한 분들이 돌아가면서 이승만 박사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누리던 자유를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승만 박사를 떠올리며, 이승만 박사의 자유투혼(自由鬪魂)의 정신을 되돌아보면서 위기에 놓인 조국의 현실에 절망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질 수 있는 감동의 시간이었다.
 
  한인기독교회와 동지회는 매년 3월 26일 한인기독교회에서 이승만 박사 탄생행사를 성대하게 치러왔다. 이 아름다운 전통이 한인기독교회와 동지회를 통해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라면 단연코 7월 20일 있었던 ‘이승만 박사 장학금’ 수여식 참관이었다. 장학금 수여식은 태평양함대사령부에 인접한 군(軍)부대 시설에서 있었다. 이날 행사를 위한 모든 준비는 미 육군에 복무 중인 탐 림, 다이안느 림 남매가 맡았다. 이들은 이승만 박사 장학금 수혜자이자 동지회 회원이기도 하다.
 
  특별 게스트를 비롯하여 행사의 사회를 맡은 에드먼드 황 동지회장은 장학금 수혜자들에게 이승만 박사의 업적을 설명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게 된 아이들은 감사의 마음을 표하면서 당당하게 자신들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본토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직업을 구하여 정착할 것이다. 그 가운데 소수는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봉사하겠다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탐 림 남매처럼.
 
  현재 동지회를 이끌고 있는 에드먼드 황 회장은 하와이에서 출생한 이민 3세다. 그의 할아버지 황계신은 아내 및 자녀와 함께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하와이 이민 1세대다.
 
  현재 동지회는 회원들의 고령화(高齡化)와 세대교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년층 회원들을 중심으로 신규회원 영입 등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눈치다. 동지회의 미래는 동지회 설립 취지와 역사를 잘 이해하고 계승·발전시키려는 의지와 신규회원 영입에 달려 있다고 본다.
 
  문득 이런 어려움을 장학사업과 연계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동지회 임원 부인들과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굳이 하와이에 거주하지 않아도 장학금 수혜자를 당연직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제안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이승만 박사의 절친한 친구였던 보스윅의 저택.
  이번 여행의 성과 중 하나는 이승만 박사와 절친인 보스윅의 저택을 찾아본 것이다. 장의사던 보스윅은 1920년 이승만 박사가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갈 때 그의 밀항(密航)을 도운 인물이다.
 
  그가 사후(死後)에 저택을 종교재단에 기증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찾아보기는 처음이다. 상당한 규모의 저택을 흔쾌히 사회에 기증하는 이들의 기부문화에 놀라게 된다. 이승만 박사는 하야(下野) 후 종종 이 저택을 방문해 외로움을 달랬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보스윅은 영결식장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1923년 9월, 이승만 박사는 임대 교사(校舍) 시절을 청산하고 칼리히 지역에 신축한 학교로 이전했다. 1922년 칼리히 지역의 땅을 매입하고, 1923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한인기독학원 교사와 남녀기숙사를 완공해 이전한 것이다. 이곳 부지는 1950년 매각되어 ‘한국의 MIT’ 인하공과대학 설립의 종잣돈이 되었다.
 
  칼리히로 이전하기 전, 이승만 박사는 1918년 9월 현재의 알리이올라니초등학교에 있던 건물을 월(月) 60달러에 임차해 한인기독학원 문을 열었다. 우남숭모회에서는 한인기독학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알리이올라니초등학교는 이승만 박사가 이곳에서 시작한 한인기독학원의 역사를 학교 역사의 일부로 가르친다. 이 학교를 방문해 운 좋게 교장선생님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학교 사무실로 안내되어 한인기독학원 사진을 보며 ‘닥터 리’와 한인기독학원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정권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역사가 뒤바뀌는 우리나라의 개탄스러운 역사 인식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이승만 박사가 숨을 거둔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마지막으로 이승만 박사가 서거한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을 찾았다. 입원자 가족 외에는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다. 사전(事前)에 양해를 구하지 못한 우리 일행은 건물 비상계단을 이용해 이 박사가 거처하던 2층 병실 옆에 마련된 옥외 휴식공간까지 올라갔다. 내부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요양병원 직원들 눈에 띄기 전에 얼른 철수해야 했다.
 
  그곳에서 멀리 펼쳐진 태평양을 바라다보았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바다를 말년의 이승만 박사도 바라보며 고국 산천을 그리워했으리라. 그렇게 보내드려 가슴이 저리고 죄송하기만 했다. 당신께서 그토록 사랑한 이 민족과 이 나라를 하늘에서 수호신이 되어 지켜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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