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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탐구

만주와 李承晩·朴正熙, 金日成

글 : 류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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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 만주사변 문제 논의하는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해 《만주의 한국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 통해 한국 독립 문제제기
⊙ 만주사변 이후 만주는 ‘무장독립운동 공간’에서 ‘동양의 엘도라도’로 변모
⊙ 만주군 출신 朴正熙, 日帝가 만주에 이식했던 근대화 모델을 경제발전에 응용
⊙ 토벌군에 쫓겨다니던 김일성, ‘번영’을 경멸하는 체험을 바탕으로 빈궁한 ‘유격대 국가’ 건설

류석춘
1955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 《전통과 현대》 편집위원,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역임. 現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기념재단 부이사장 / 《막스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한국의 시민사회-연고집단, 사회자본》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등 저술
1933년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 앞에 선 이승만. 그는 국제연맹에서 만주사변에 대해 논의하는 기회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만주국(滿洲國)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후원으로 만주에 성립한 국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남만주에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주에 관동군(關東軍)을 주둔시키며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만주의 토착 군벌 장쭤린(張作霖)은 일본의 후원을 받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 장제스(蔣介石)의 북벌(北伐)에 대항했으나,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여긴 일본에 의해 폭살당하고 만다. 이로 인해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중국 국민당과 손잡고 일본에 저항했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 군부(軍部)와 우익세력은 아예 만주를 식민지화하여 자원과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관동군 중심으로 만주침략 계획을 수립한 일본은 1931년 9월 펑톈(奉天) 외곽의 류탸오후(柳條湖)에서 관동군 관할인 만주철도를 스스로 파괴하고, 이를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트집 잡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의 전격적인 군사작전으로 만주 전역을 장악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1912년 신해혁명으로 폐위(廢位)된 청(淸)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만주국의 형식적인 지도자로 내세우고, 수도를 신징(新京・長春)으로 하여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러허(熱河) 4성(省) 주민 약 3000만명을 통제하는 위성국가를 세웠다. 이 시점에 만주로 이주한 한인(韓人)의 규모는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다.
 
 
  리턴조사단
 
일본의 만주침략을 조사한 리턴조사단은 1932년 〈중국정부의 항의〉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국제연맹에 제출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 일본의 만주 침략이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이에 따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영국인 V. A. G. R. 불워-리턴(V. A. G. R. Bulwer-Lytton)을 단장으로 하고 미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영국 대표 각 1인이 참여하는 6인 위원회를 구성해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이 리턴조사단은 1932년 10월 만주문제에 관한 최종 보고서 〈중국 정부의 항의(Appeal by the Chinese Government, 일명 Lytton Report)〉를 국제연맹 이사회에 제출했다.
 
  1933년 2월 24일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본회의는 이 보고서를 기초로 일본군의 만주 철병(撤兵)과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主權)을 확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일본은 이에 반발해 같은 해 3월 27일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전시(戰時)체제로 전환하여 1937년 중일(中日)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차례로 일으켰다.
 
이승만이 펴낸 소책자 《만주의 한국인들》.
  이승만(李承晩)은 이 국제연맹 회의를 활용해 한국의 독립이 필요함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1933년 1월 5일부터 제네바로 넘어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이 만주 평화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담은 《만주의 한국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이라는 영문(英文)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는 국제연맹 사무국으로 하여금 각국 대표들에게 이 책자를 배포토록 하는 한편, 관련된 언론 인터뷰도 적극 수행했다.
 
  전체가 35쪽 분량인 이 소책자는 표지 상단에 ‘이승만 박사가 코멘트를 붙인 리턴보고서 발췌(Extracts from the Lytton Report with Comments by Dr. Syngman Rhee)’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이승만은 이 소책자의 머리말에서 출판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소책자의 목적은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 언론,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의 편에 서고자 하는 모든 사람과 단체들이 극동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쟁점이라고 ‘리턴보고서’가 지적한 한인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함이다.”
 
 
  이승만의 만주문제 해법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이승만은 이 소책자에서 “한국과 만주 문제는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으로 시작해, 만주에 이주한 한인의 규모, 이들의 이주 사유, ‘만보산사건’으로 대표되는 한인과 일본인 및 중국인과의 갈등, 갈등의 배경이 되는 국적 문제,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근본적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또한 이 때문에 일본이 일으킨 여러 비인도적 만행과 군사적 첩보활동까지도 낱낱이 설명했다. 이승만은 이와 같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만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주민 각자가 국적을 선택하도록 하고, 또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만주국 문제에 대한 제네바 활동은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공동으로 출판한 《국역 이승만 일기》에 등장하는 당시 일기의 몇몇 구절만 살펴보아도 만주 문제에 정통한 이승만의 판단을 가감 없이 살펴볼 수 있다.
 
  〈1933년 1월 13일 일기, 주 제네바 미국 영사 길버트와의 대화:
  “1910년 강대국들은 일본의 세계 정복 계획을 알지 못했다. 단지 한국을 희생하면 일본이 이에 만족하고 만주에서 개방정책을 펼칠 것이라고만 믿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전 세계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한국은 일본의 침략 야욕의 첫 번째 단계이고, 만주가 다음 단계이며,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1933년 2월 4일 일기, 국제연맹 노르웨이 대표 랭 박사와의 대화:
  “일본은 만주국이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한인들도 포함하여 서류에 서명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면서, 국제연맹 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에 ‘리턴보고서’가 틀렸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서류를 반박할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를 국제연맹에 제출하려고 하는데 뉴스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준 공문 자격으로 제출하길 원한다. 사무국에 이를 회원국들에 돌리도록 요청하려면 중국보다는 다른 회원국이 제출하길 바라며, 이것이 현재로서는 내가 바라는 전부라고 답했다.”〉
 
  〈1933년 2월 13일 일기:
  “나는 2월 13일부터 국제연맹이 만주의 모든 한인들을 비(非)일본인으로 선언하여 중국이나 그들이 원하는 다른 나라로 귀화할 수 있도록 최소한 그들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리턴보고서’를 근거로 문건을 작성했다. ‘리턴보고서’에는 일본이 중국인의 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가 국제연맹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며 문건을 준비해왔다.〉

 
 
  독립군의 무장투쟁 공간에서 ‘엘도라도’로
 
1940년 6월 만주제국 황제 푸이(오른쪽)는 도쿄를 방문했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도쿄역까지 그를 마중 나왔다.
  1932년 만주국 건국 이전의 만주는 중·일 및 러·일의 갈등과 그 틈을 이용한 한인들의 무장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공간이었다. 독립운동은 특히 3·1운동 직후인 1920년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일본의 집중적인 공격에 노출된 한인 독립군은 1921년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으며 급속히 위축되었다.
 
  한편, 중국은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만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은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해나가다가 결국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체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만주국 건국 이후 치안이 확보되면서 만주는 ‘기회의 땅’으로 다시 태어났다. 만주국은 일본·조선·만주·몽골·중국의 오족협화(五族協和)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권(實權)은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인 국무총리 및 각부(各部) 대신들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경제적으로도 일본이 만철(滿鐵·남만주철도주식회사)을 비롯한 국가적 사업의 이권(利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닛산(日産)을 중심으로 일본이 설립한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滿業)가 개발을 주도했다.
 
  일본의 군수(軍需)물자 확보와 보급을 위한 각종 개발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면서 만주는 점차 동양의 ‘엘도라도’로 변신했다. 만주국의 활력은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대거 끌어들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시작할 때까지 만주는 번창했다. 그러나 결국 관동군이 패퇴하면서 푸이는 체포되었고 ‘만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朴正熙 근대화의 기원은 만주
 
왼쪽부터 한석정의 《만주 모던》, 카터 J. 에커트의 《Park Chung Hee and Modern Korea; The Roots of Militarism·1866~1945 》, 강상중·현무암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지난 몇 년 사이에 사라진 만주국과 1948년 건국해서 ‘세계사적 성공’을 거둔 우리나라, 즉 대한민국의 관계를 주제로 한 책이 많이 나왔다. 다음의 세 가지 책이 대표적이다.
 
  우선, 한석정의 책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체제의 기원》은 제목 그대로 ‘발전국가(發展國家)’ 대한민국을 만든 박정희(朴正熙)의 근대화(近代化)가 만주의 근대화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설명하는 책이다. ‘하드코어’ 사회과학에 ‘삽화’와 같은 다큐멘터리를 접합해서 이 책은 ‘1960년대 대한민국’이 ‘1930년대 만주국’의 복사판임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독자들이 읽기에 부담되지 않는 터치로 그러나 집요하게 두 국가에서 벌어진 일들이 얼마나 같은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다음, 에커트의 책은 제목이 《Park Chung Hee and Modern Korea; The Roots of Militarism・1866~1945》이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박정희와 현대 한국: 군사주의의 뿌리, 1866~1945》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31~1945년 일본 군국주의 물결에 편승한 군사주의의 인적·제도적 확산 과정과 특성에 초점을 맞춘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정점에 박정희가 있다. 이 책 역시 만주에서의 경험이 박정희의 근대화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어책이라는 제약으로 국내의 일반 독자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朴正熙와 기시 노부스케
 
일본이 만주에 세운 쇼와철강 공장. 일본의 만주 경영은 후일 박정희 근대화의 모델이 됐다는 연구가 많이 나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강상중・현무암이 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는 일본 고단샤(講談社)에서 출간한 〈흥망 세계사〉 시리즈 18권 《대일본 만주제국의 유산》(2010)을 완역하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한용이 ‘만주국과 만주친일파 그리고 박정희’라는 해제를 덧붙인 책이다.
 
  우선, 일본어판 제목과 한글판 제목이 다른 사실부터 주목해야 한다. 한글판 제목은 일본어판 제목에 비해 박정희를 ‘친일파(親日派)’라고 낙인찍는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마지막에 덧붙인 박한용의 ‘해제’ 또한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비난하기 위한 글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에 대한 정의를 최대한 확대해석하면서, 친일파가 세운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는 나라, 즉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는 식의 인식이 널리 퍼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출판한 《친일인명사전》은 이 단체가 선정한 총 4389명의 인물에 관한 이른바 친일행적을 담고 있다.
 
  친일 문제에 관해서는 노무현(盧武鉉) 정부하에서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시적인 법적 기구로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 보고서가 그나마 국가의 권위하에 작성된 공식 기록이다. 시기를 나누어 3차에 걸쳐 발표한 보고서에는 총 1006명의 친일인사가 등장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에 비해 규모가 약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강상중·현무암의 책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단체의 ‘연구실장’이 이 책에 ‘해제’를 덧붙였을 터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든 박정희와 전후(戰後) ‘일본의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라는 두 인물이 과거 만주국의 역사와 유산(遺産)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만주 인맥’이 중심이 된 ‘친일파’가 박정희를 정점으로 권력을 잡아 병영국가적(兵營國家的)인 국력배양과 총력안보(總力安保)를 추구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전개한 배경에 만주국의 유산이 있고, 나아가서 그 유산을 제공해준 주인공이 바로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으로 활약한 기시 노부스케라고 주장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에서 “전전(戰前)에는 국가개조의 혁신관료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전후(戰後)에는 보수합동(保守合同)을 만들어낸 주인공으로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라 일본의 고도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미일(美日)안보조약 개정도 주도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한국사 初有의 남성적 국가’의 등장
 
만주국의 선전사진. 조선·중국·일본·러시아·몽골 어린이들의 모습을 통해 다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모습을 선전하고 있다.
  이 세 책은 모두 공통적으로 만주국이 사회 진출의 기회가 막힌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신천지(新天地)’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1931년 만주사변이 벌어질 즈음 만주에는 이승만이 지적했듯이 이미 100만명에 가까운 한인이 이주한 상황이었다.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에는 경제적 활력으로 이주한 한인의 수가 더욱 늘어났다. 금(金)을 찾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그리고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찾아 식민지 청년들이 만주로, 만주로 떠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과 함께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도 일본의 군인이 되는 길이 열렸다. 박정희는 그런 기회를 잡으려던 젊은이 중 한 사람이었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연대)의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에게 ‘만주체험’은 과연 무엇이었나? 세 책이 공유하는 핵심 관심사다.
 
  그러나 박정희를 기술하는 방식과 내용은 책마다 다르다.
 
  한석정은 박정희의 개발체제가 만주국의 근대화를 이어받은 사실을 비교적 중립적으로, 그러나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방식으로 이른바 ‘성(性)인지(認知)감수성’을 도입해 설명한다. 저자는 제1장 ‘만주 모던으로의 길’에서 스스로 3장을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사 초유(初有)의 남성적 국가의 등장,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계보에서 만주국이 차지하는 위치, 만주국을 소환한 배경인 냉전과 한일수교 등을 짚어보고 1960년대 ‘재건’에 침윤된 만주국의 ‘건국’ 에토스 등을 통해 한국 발전국가의 역사적 맥락을 젠더 관점에서 논의한다”(73쪽). 이어지는 3장 ‘건국과 재건’의 텍스트는 ‘만주와 남성성’(176~188쪽) 및 ‘국가와 폭력’(189~202쪽) 등과 같은 ‘젠더감수성’에 민감한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6장 ‘신체의 각성’에서도 같은 시각으로 자료를 분석한다.
 
  ‘한국사 초유의 남성적 국가’는 저자가 말하는 ‘근대’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국가의 등장을 강조하는 말일 뿐이다.
 
  이 말은 독일의 비스마르크 체제, 프랑스의 나폴레옹 체제, 그리고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와 같이 근대 국가를 만들어낸 절대주의 국가의 특성이 메이지유신을 거친 일본과 만주국에서 반복되었고, 마침내 한국에서 박정희 체제로 구현(具現)되었다는 주장과 동일한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을 하는 데 페미니즘을 동원하고 또 젠더 시각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이 개념들은 그냥 군더더기일 뿐이다. ‘권위주의’ 혹은 ‘국가주의’와 같은 담론(談論)만으로도 논지를 전개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朴正熙의 근대화 윤리
 
만주국 정부의 건국 5주년 기념 포스터. ‘식민지 근대’로 발전하는 만주의 모습을 담았다.
  이에 반해 에커트의 책은 박정희 근대화를 좌우에서 서로 달리 보는 관점에서 빠져나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성을 가진 군사적 지향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첫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둘째, 국가적인 차원에서 부(富)와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무제한적으로 사적(私的)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감시하고 통제하고 계획을 세워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하면 된다’와 같은 정신적 헌신이 필요하다.
 
  넷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당사자는 국가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업에 자발적인 동시에 규율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에커트는 대한민국 근대화를 추동(推動)한 박정희의 정신세계가 바로 만주국에 뿌리를 둔 이와 같은 근대화 윤리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여, 그러면서도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설명하고 있다.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것은 강상중·현무암의 책이다. 이 책은 전후 일본과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떠올라 두 나라를 발전시키고, 또 서로 협력하게 만드는 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두 사람이 1945년 8월 해체된 만주국이 남긴 유산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 주장 자체가 그리 문제 될 이유는 없다. 앞의 두 책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저자들의 선입견(先入見)이 만들어내는 해석의 편향성이 심각하다. 저자들은 특히 박정희의 근대화와 전후 일본의 발전이 국가를 중심으로 진행된 우익 독재의 산물이기 때문에 부정해야 한다는 논지를 편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발전과 박정희의 근대화는 세계적인 찬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절대다수의 국민이 지지를 보낸 선택이다. 전후 일본의 발전에 대한 일본 국민의 자부심도 마찬가지 증거다.
 
  이 객관적 사실을 저자들은 ‘귀태(鬼胎)’라는 지극히 부정적인 용어로 비틀어 덮는다. ‘귀태’란 ‘태어나선 안 될 아이’라는 뜻을 가진 부정적 단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는 표현과 정확히 궤를 같이하는 용어다.
 
  이 책은 이 ‘귀태’라는 말로 도배가 되어 있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된 책의 각 장, 각 절의 제목마다 귀태라는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예컨대 제1장 ‘제국의 귀태들’, 제2장 4절 ‘만주가 낳은 귀태들’, 제3장 ‘만주제국과 제국의 귀태들’, 제4장 1절 ‘되살아나는 귀태들’, 6절 ‘귀태들의 한일유착’ 등이다. 물론 박정희를 말할 때는 이 귀태라는 단어에 ‘친일파’와 ‘독재자’가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박정희의 血書
 
만주국 선전화보에 묘사된 만주군.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일본군의 보조부대에 불과했다.
  이 책은 또한 1940년 만 23세의 나이에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의 초기 경력을 두고 ‘친일파’의 결정적 증거로 삼는다.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상황이라는 상식적 해석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1975년 29세의 나이에 박정희 유신정권 치하에서 유신헌법을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무현, 그리고 1980년 6월 27세의 나이에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역시 유신헌법을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문재인도 ‘독재의 앞잡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어야 한다. 박정희는 안 되고 노무현·문재인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박정희가 1939년 만 22세의 나이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썼다는 혈서(血書) 문제도 마찬가지다. 1939년 3월31일자 《만주신문》 보도는 제목을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교사로부터’라고 달고 있다.
 
  “29일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증명서와 함께 ‘목숨 바쳐 봉공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를 동봉하여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로 시작한 기사는, “달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 위해 군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고, 군관학교의 입학 연령 자격은 16세 이상 19세 이하로 되어 있어,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동군(同君)에게는 유감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기로 함”이라고 마무리되고 있다.
 
  요약하면 ‘일사봉공(一死奉公)’이라는 혈서에도 불구하고 나이 제한 때문에 지원이 거절되었다는 보도다. 혈서가 입학에 미친 영향이 아리송해지는 대목이다. 혈서를 동봉해 지원한 그해 박정희는 군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 후 1939년 후반 세 번째 지원서를 보낸 박정희는 결국 시험을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만주국 선전포스터. 만주국 국기 뒤에 보이는 일본의 욱일기가, 만주국의 실제 주인은 일본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박정희는 같은 해 10월 무단장(牧丹江) 성(省)에 있는 만주군 6관구 사령부로 가서 시험을 치른다. 이 시험에 합격한 박정희는 마침내 1940년 4월 신징에 있는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해 어릴 때부터의 꿈인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강상중·현무암의 책은 이 혈서 기사를 근거로 박정희를 친일파로 단정한다. 그렇다면 유신시절 대학생들이 공안당국에 잡혀가 ‘전향서’를 쓴 것도 ‘유신의 앞잡이’가 되는 근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나이라는 조건이 장벽이 되자 박정희는 혈서까지 쓰면서 군인이 되고자 했다. 살기 위해 전향서를 쓴 것과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혈서로 쓴 내용 자체는 당시 모든 한국인이 아침마다 외워야 했다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와 하등 다를 것도 없는 판에 박힌 내용이다.
 
  그러나 혹자는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일은 ‘강요에 의한 친일’이고, 혈서는 ‘자발적인 친일’이지 않냐?”고 토를 달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노무현과 문재인도 강요에 의해 유신시대, 그리고 전두환 시대에 사법시험에 응했는가? 그것도 재수, 삼수까지 하면서? 모두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이의 입장에서 주어진 조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선택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박정희는 안 되고 노무현·문재인은 되는가?
 
  《문재인의 운명》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나는 ‘헌법과목’에서 거의 최고 득점을 했다. 그것으로 나머지 과목의 낮은 점수를 만회해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다.”
 
  유신헌법 공부 열심히 해서 합격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박정희 혈서와 무엇이 다른가?
 
 
  이승만의 고민
 
  이와 같은 편파성은 주(主) 저자인 강상중의 의식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 2015년 3월 25일 《중앙일보》와의 대담에서 강상중은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미진했던 친일청산이 일종의 걸림돌이 되었고, 그것이 정당과 지역 대립 등 다양한 내부 분절(分節)의 큰 리트머스지가 되었다는 거죠. 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이 광복 70년을 맞이해 한일관계 개선과 자국(自國)의 내적(內的) 문제를 고민할 때 해방 후 역사의 진화(進化) 과정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죠”라고 말한다. 현학적(衒學的)으로 에둘러 말하지만 핵심은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이 안 돼서 문제’라는 말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할 일이 많았다. 새로 생긴 나라의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함은 물론 38선(휴전선) 이북의 적과 대치하며, 이들이 지원하고 있던 이남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 이 와중에도 이승만은 친일정리에 필요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1948년 9월 공포했다. 대한민국 국회가 만들어지고 처음 만든 이 법안에 대해 내각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수용했다. 대한민국 1호 법안이다. 공산당과 싸우는 데 필요한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에 제정된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 이승만이 친일청산에 미온적이었다는 평가는 유보해야 한다.
 
 
  親日청산이냐, 親北청산이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기념축전의 이승만. 왼쪽은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 가운데는 맥아더 원수.
  건국 당시 이승만은 친일청산을 ‘일시에 그리고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는 그때의 상황에서 ‘친일청산’보다는 ‘친북(親北)청산’이 더욱 절박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북한의 앞잡이들이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10여 명의 프락치들을 국회에까지 포진시킨 상황에서, 이승만은 ‘과거의 적’ 친일파를 청산하는 과제보다는 ‘현재의 적’ 공산당에 대처하는 과제가 당연히 우선한다고 판단했다.
 
  만약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 활동을 뒷받침하던 특별경찰대가 1949년 6월, 그리고 반민특위 자체가 같은 해 10월 해산되지 않았다면, 친일청산은 해를 넘기며 1950년 6·25전쟁이 날 때까지 계속됐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1950년 6월 시작된 전쟁에서 9월 인천상륙작전을 해보지도 못하고 대구와 부산까지 북한군에 내주면서 지도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친일청산 하다가 나라를 공산세력에 빼앗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이승만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950년 4월 소련으로부터 남침(南侵)전쟁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김일성(金日成)이 박헌영(朴憲永)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박헌영이 스탈린에게 했다는 발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북조선에서 첫 신호를 보내면 남조선 인민들이 집단적으로 봉기할 것”이라고 말하며 남침전쟁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이승만의 ‘친북청산’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상중은 이런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상황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이 전혀 없다. 북한의 위협이라는 문제는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이전은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구조적 문제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강상중은 애써 외면한다. 과거의 상처를 후벼 파 피고름을 만들어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다. 외눈박이다.
 
 
  ‘식민지근대화론’
 
제법 번화한 만주국 시절 펑톈(奉天) 거리의 모습. ‘식민지 근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 이제 종합해보자. 이 세 책의 공통된 주장을 요약하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 만주국을 통해 박정희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이 ‘식민지를 겪으며 근대를 배우고 확산시켰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론은 우리에게 이미 낯설지 않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국내외 학자들이 이 주장에 필요한 증거를 모아 수많은 문헌을 생산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알려진 연구 성과는 전문적인 학술논문이나 학술서적 형식에서는 물론 대중적인 교양서적으로도 꽤 보급되어 이제는 이 용어를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강상중·현무암의 저서는 편파적이다 못해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을 ‘뉴라이트 사관’이라 부르며 학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존재 자체를 아예 제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100% 의기투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귀태’라는 단어까지 동원하여 대한민국의 성공은 물론 일본의 전후 성공을 부정적으로 그린다. 물론 이 공격에는 ‘극우(極右)’라는 단어도 항상 따라다닌다.
 
  그러나 한석정의 말대로 ‘만주국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모체(母體)’였다. 두 나라의 경제발전을 폄하해서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유격대 국가 북한’의 기원
 
소련군 88여단 시절 김일성과 동료들의 사진(맨 위). 왼쪽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靑·중국인), 최현(崔賢), 안길(安吉). 북한은 1964년까지 이 사진을 사용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계청은 삭제하고(가운데 사진), 다시 김일성을 똑바로 선 자세로 가운데 선 모습으로 조작했다(맨 아래 사진).
  앞의 세 책이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이와 같은 주제로 책을 쓰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주제가 하나 더 있다. 다름 아닌 ‘북한’이다. 세 책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박정희 대한민국과 만주국’의 관계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가 바로 ‘김일성 북한과 만주국’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을 적극 옹호해온 한홍구 교수마저 만주에서의 경험이 남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면서 똑같은 상황이 북한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2001년 출판한 논문 〈대한민국에 미친 만주국의 유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흔히 ‘유격대(遊擊隊) 국가’라고 불리는 이북은 주체사상의 시원을 항일무장투쟁에서부터 찾고 있으며, 혁명전통을 주체사상과 더불어 이북 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두 축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사회의 운영에서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미 중요한 연구들이 등장했다.
 
  - 박명림, 2008, ‘박정희와 김일성: 한국적 근대화의 두 가지 길’ 《역사비평》 봄호(통권 82호)
  - 장자환, 2012, 《북한은 남한에게 무엇인가: 거짓의 두 왕국》 선
  - 김용삼, 2016, 《김일성 신화의 진실》 북앤피플. 제6장: ‘박정희와 김일성을 배출한 만주’

 
  이 논문과 책들은 모두 앞에서 지적한 만주국의 ‘군국주의(軍國主義)’ 혹은 ‘권위주의’가 근대화에 미친 영향을 남과 북을 통해 각각 확인하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경우를 비교해 평가한다. 이 글들은 모두 만주의 유산이 남과 북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지만, 남은 이를 긍정적으로 활용한 반면 북은 이를 최악으로 활용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한 결론으로 가는 과정에 특별히 주목해야만 할 대목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와 김일성의 만주 경험에 관한 차별성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김일성의 만주 경험은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 변화 속에서 ‘자유시참변’을 겪으며 참담한 모습이었다. 김일성은 그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소련이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할 때까지 그야말로 생존에 급급한 조건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국적마저도 중국, 소련으로 바꾸고 중공군과 소련군에 의탁하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의 경험에서 만주는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면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척박한 공간이었다. 그는 박정희와 같이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가져다준 만주국의 활기찬 모습을 바라보며 당대 최고 수준의 교육을 통해 그 과정을 이해할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 만주국 군대에 쫓기며 오로지 그러한 번영을 경멸하는 체험을 했을 뿐이다. 한홍구가 말한 북한 ‘유격대 국가’의 원형은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누가 이승만·박정희를 親日派로 모나
 
만주에서 ‘근대’를 경험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대한민국 근대화에 성공했다. 사진은 1976년 5월 31일 포항제철 2고로 화입식의 박정희 대통령.
  만주라는 동일한 유산을 각자 ‘비틀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 남북한의 대결은 결국 남한의 승리로 귀결되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은 ‘유격대 국가’를 만든 만주 체험을 넘어 이제는 이승만이 1941년 책에서 주장했듯, 일본의 천황제(天皇制)를 모방한 전체주의(全體主義) 3대(代) 세습 ‘수령(首領)체제 국가’로 화석화(化石化)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양상훈이 역설적으로 설명한 ‘이승만의 진짜 죄’야말로 친일파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핵심을 담고 있다.(2019년 4월19일자 《조선일보》 칼럼)
 
  〈김일성 정권 수립과 한반도 석권을 계획하고 있던 그들에게 이승만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한국 내 지식층에 압도적이던 좌익 인사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소련은 결국 6·25 남침까지 승인했다. ‘반(反)이승만’의 뿌리는 여기에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친일’ 등은 엉터리로 씌운 모자일 뿐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친일로 몰아가는 세력의 뿌리에는 바로 이 두 지도자에 의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共産化)되지 않은 사실이 한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들의 한풀이 주문이 바로 ‘친일파’ 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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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만    (2019-08-15) 찬성 : 0   반대 : 1
대한민국에서 토착빨갱이 종북빨갱이를 뿌리 뽑으면 대한민국은 자유롭고 번영하며 발전하는 대한민국이 될것이다. 좌익좌파를 뿌리 뽑는데 최 적임자는 홍준표 전 대표이다. 전 국민은 홍준표 전 대표를 지지하여 북한 독재자 김정은 정권을 괴멸 시키자.

20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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