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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9주년 기념 남북 청년 유해 발굴

자유는 피와 땀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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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69주년 맞아 北 인민군 출신 등 남북 청년 40명 유해 발굴
⊙ “70년 전엔 양쪽에서 올라왔지만, 오늘은 같은 방향으로 올라갔다”
⊙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남북이 서로 잘 지내는 것보다 힘이 필요하다”
지난 6월 25일 강원도 홍천 가리산에서 남북한 출신 청년들이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하기 전 태극기를 향해 묵념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69주년을 맞아 강원도 홍천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탈북 북한 군인 출신을 비롯해 남북한 출신 청년들이 홍천군 가리산 일대에서 육군 제11기계화보병사단 충무대대 국군 장병들과 유해 발굴 작업을 함께 한 것이다.
 
  이날 강원도 홍천의 날씨는 유난히 더웠다. 전날 서울에서 온 남북 출신 청년들은 아침 일찍 산행을 준비했다. 행사 관계자는 “남북 출신 청년 각각 20명씩 40명이 참석했다”고 말했다.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캠프’는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주관하고 국방부의 후원으로 3박 4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40명의 남북 출신 대학생들은 서울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북한 관련 프로그램과 대학교 동아리 공지를 통해 캠프에 참가하게 됐다.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캠프’는 강원도 육군과학화훈련단 견학으로 시작됐다. 이후 유해 발굴과 전차대대 방문, DMZ 둘레길 돌아보기 등의 여정으로 진행됐다.
 
  남북 출신 청년들은 6월 25일 아침 일찍 버스로 가리산 초입까지 이동했다. 이날 유해 발굴이 진행된 곳은 1951년 5월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가리산 전투의 벙커 고지다. 벙커 고지 전투는 1951년 5월 16일부터 21일, 중공군의 제5차 공세 당시 미 제2사단 제38연대가 춘천 북방의 벙커 고지(778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12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전투다.
 
  미 제38연대는 벙커 고지 일대에 중포화력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이로써 연대는 벙커 고지 동쪽의 속사리와 강릉 선까지 돌파구를 형성한 중공군이 홍천 방면으로 더는 진출하지 못하게 했다. 이 전투로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곧 반격 작전을 전개하게 됐다.
 
  전쟁 발발 69년을 맞아 남북 출신 청년들이 이 고지를 방문한 것이다. 청년들은 버스에서 내려 벙커 고지까지 40분 정도 등산했다. 이 행사에 참석한 최진식 학생은 소감에서 “69년 전에는 남북 청년들이 서로 반대 방향에서 올라와 전투를 벌였을 텐데 오늘은 서로가 하나의 길로 내려온 것이 너무 인상 깊었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명춘(가명) 학생은 “처음에는 느낌이 묘했다. 69년 전에는 적으로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는데 지금은 서로 친구가 되어 이 길을 간다는 것이 너무 가슴 뛰는 일”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육군 11사단 충무대대 군인과 남북한 출신 청년들이 함께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남북 출신 청년들이 유해 발굴 장소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였다. 국방부 유해발굴단 단원들과 제11기계화보병사단 충무대대 장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군 장병들은 청년들을 반갑게 맞았다. 청년들은 도착 이후 그곳에 마련된 태극기 앞에서 순국 장병에게 묵념을 한 뒤 가리산 전투와 벙커 고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가리산 전투에 대한 육군 7군단 유해 발굴 3팀 김수영 팀장의 설명이다.
 
  “6·25 당시 이곳에 춘천에서 홍천으로 넘어가는 가락고개(가락 터널)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중공군은 이곳을 보급로로 사용할 목적으로 가리산을 탈환하기 위해 치열한 공격을 벌였다. 당시 이 지역엔 중공군 2개 군단이 들어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15군과 12군단에서 3개 사단씩 나누어 6개 사단과 북한군이 공격을 펼쳤다. 매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뺏고 뺏기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국군과 미군이 무사히 지켜낸 곳이다.”
 
  가리산 전투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국방부 유해 발굴 감식단의 유해 발굴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유해 발굴 감식단은 2000년 4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목적으로 육군에 의해 시작됐다. 이후 2007년 국방부 소속으로 창설된 이 부대는 육·해·공군과 해병대 전몰장병의 유해를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격전지 대부분은 산악 지역이다. 발굴병과 감식병은 전원 육군에서만 차출했다. 이 밖에 발굴단 본부의 조리병과 보급병, 행정병, 수송병, 안장·영결식을 위한 자체 의장병인 영현병 또한 소속된 개별 소대에서 차출됐다.
 
  설명을 들은 남북 출신 청년들은 군인들과 함께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청년들과 군인들은 3인 1조로 조심스럽게 삽질을 시작했다. 군인들은 삽질이 서툰 친구들에게 차분히 설명해주며 일을 해나갔다. 처음엔 조금 어색해했지만 청년과 군인들은 금방 하나가 되었다. 군인 중에도 남북 출신 청년과 비슷한 나이 또래들이 많았다.
 
  11사단 충무대대 2중대 서영준 상병은 “4주간 작업을 진행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남북한 출신 대학생들이 와서 함께하니 더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면서 “특히 6·25전쟁 69주년인 오늘 북한 출신 대학생들이 와서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함께 하니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지완 병장은 “정신적으로 뜻깊은 시간이었다. 특히 북한 출신 대학생들과 함께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선배 전우들의 유해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보낸다는 것이 더욱 소중한 경험인 것 같다”며 “처음 북한 출신 청년들이 온다고 했을 때 어색하지 않을까 라는 걱정부터 했다. 그러나 정작 만나서 함께해보니 일도 잘하고 한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기자도 장병, 대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삽질을 해보았다. 남북 출신 대학생과 장병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육체적으론 힘들었지만, 마음은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서인 학생은 “유해 발굴은 참전용사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평화를 지키는 군인 장병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며 “참전용사들을 조국의 품으로 모셔오는 것은 평화롭게 사는 우리가 해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을 정말 열심히 해주는 군인 장병들이 너무 고마웠고, 그들의 노고에 대해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됐다”고 했다.
 
  남북 출신 청년들은 이날 오전 9시경부터 오후 2시까지 군인들과 함께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작업 도중 6·25전쟁 당시 사용된 총기 부품은 발견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청년들이 철수하고 30분도 되지 않아 그곳에서 무명전사의 팔뼈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날 작업을 함께 했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류수은 팀장은 “남북한 출신 대학생들이 전사자 유해가 발견되는 현장을 목격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전사자의 뼈가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생들이 함께 열심히 한 덕분”이라며 “대학생들이 아니었으면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에게는 군인 여러분이 적이고 원수였다”
 
군인·청년들이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6·25전쟁 당시 잔여물을 찾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해 발굴 작업을 마친 청년과 군인 장병에게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다. 작업이 끝나고 이들은 청무대대에 모여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군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는 청년들에게 장병들이 설명해줬고, 북한 출신 청년들이 북한에 대해 얘기도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북한 출신 청년 중에는 특별한 학생이 있었다. 군 복무 중에 탈북한 강유 군이다. 강군은 평양시 동대원구역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17세에 군 복무를 시작했다. 강원도 금강군 13사단 민경대대에서 복무했다. 강군은 부대에서 약초병이었다. 아마 남한군에는 약초병이라는 보직이 없을 것이다. 약초병은 북한군에서도 공식 보직은 아니다. 하지만 1990년대 북한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는 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군인들은 자체적으로 식량을 해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 군부대 내에서 인원을 차출해 약초 등을 채취하는 보직이 비공식적으로 생긴 것이다. 이들은 훈련보다 매일 산으로 올라가 산삼과 도라지 등 다양한 약초를 닥치는 대로 채취한다. 강군은 그러던 중 남한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한국으로 탈북을 한 것이다.
 
  강군은 “정말 휴전선을 넘을 당시 비무장지대 지뢰와 철조망으로 인해 겁이 났다. 하지만 남한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새 달려 남한 GP에 도달했다. 그때 너무 행복했다”고 말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제가 북한에서 군 복무를 할 때 여러분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생활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적이라고 생각했던 여러분 앞에서 얘기하는 것이 놀랍다. 제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은 여기 계신 군인 여러분이 초소를 잘 지켜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강군의 얘기가 끝나고 남북 출신 청년과 장병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오늘 벙커 고지에서 유해 발굴을 같이 한 조끼리 자리했다. 청년들은 군인들의 생활에 대해 물어봤으며, 군인들은 탈북 청년들에게 북한에 대한 얘기, 탈북 과정 등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남북 출신 청년과 군인들의 대화에 방해될까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군인 장병은 북한 출신 청년들의 탈북 과정을 들으면서 조금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탈북에 성공한 얘기 부분에서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 시간이 끝나고 장병들의 소감을 듣는 시간도 마련됐다. 테이블마다 한 명의 장병이 앞으로 나와 소감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장병은 남북한 출신 청년들과의 하루가 즐거웠다는 얘기를 했다. 한 장병은 북한 출신 청년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서슴없이 얘기해줘서 고맙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특히 북한 출신 청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울먹인 장병도 있었다.
 
  이어 남북한 출신 청년들의 소감 발표도 있었다.
 
  고예린 학생은 “사실 캠프를 우연히 재미로 참가하게 됐다. 유해 발굴을 4회 정도 했다. 그전에는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다”고 운을 뗐다.
 
  “군인들에 대해서도 가벼운 생각을 했다. 군은 남자들이 가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지난해 유해 발굴 때에 1시간 반 정도 험한 산을 올랐다. 그러면서 이 길 언제 끝나나, 빨리하고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유해 발굴 작업 중 수류탄을 발견했다. 무서웠다. 실제 전쟁이 난다면 내 옆에 있는 군인들이 군장을 메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단되어 있지만 같은 민족을 향해 총을 겨눠야 한다니까 겁이 났다. 그 이후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게 됐다. 내 오빠도 얼마 전까지 군인이었다. 군인 여러분께 감사하고,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군 생활이 많이 힘들겠지만 우리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자부심을 가지고 유해 발굴을 열심히 해주면 좋겠다.”
 
  김광명(가명) 학생도 북에서 현역 군인이었다. 김군은 군 소속 권투선수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이날 김군은 조금 특별한 소감을 말했다. 그의 말이다.
 
  “여러분은 나의 적이었다. 군에서 여러분을 원수라고 배웠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사죄드린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동족이 총을 맞대고 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이번에 참여하면서 전사하신 수많은 분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구나, 이분들 덕분에 자유가 있는 이 땅에서 편하게 살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희생된 분들과 여기 계신 장병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렇게 소통의 시간이 끝나니 밖에는 어둠이 깔렸다. 청년들은 서둘러 버스에 올라 숙소로 출발했다. 6월 25일, 하루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 군인들이 밖으로 나와 버스 앞에 도열(堵列)했다. 군인들은 버스가 출발하자 박수를 치며 손을 흔들었다. 이 모습을 본 학생들도 함께 창밖의 군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자유와 평화,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얻어낸 것
 
남북한 출신 청년들이 충무대대를 방문해 군인들과 소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북한 출신 청년과 함께한 1박 2일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간 유해가 발굴되거나 극적(?)인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남들이 쉬는 방학을 이용해 유해 발굴을 온 학생들이 존경스러웠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수습되지 못한 호국 영령은 13만명으로 추정된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1만여 구의 유해가 발굴됐지만,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132구에 불과하다.
 
  유해발굴감식단 김대수 소령은 “발굴도 어렵지만,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이 어렵다.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인식표 도장,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이 있다면, 이를 통해 유족을 찾을 수 있지만 잘 발견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신원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유해의 DNA와 유족의 DNA를 비교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들이 부족하다 보니 사업에 어려움이 있다. 전쟁이 일어난 지 69년이 됐다. 그동안 전사자 직계가족이 돌아가시거나 결혼을 안 하신 분들도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지형이 바뀐 것도 어려움 중 하나”라고 말했다.
 
  1박 2일 동안 기자가 느낀 것은 자유는 공짜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피와 땀으로 지켜지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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