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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조갑제의 30여년에 걸친 진실 추적이 이끌어낸 이수근은 역시 간첩이 아니었다!

‘간첩의 대명사’ 이수근, 死刑집행 49년 만에 ‘死後 無罪’ 선고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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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월 이수근 체포했던 이대용 전 주월공사로부터 “이수근은 간첩 아니다” 얘기 듣고 추적 시작… 1989년 《월간조선》 3월호에 기사 실어

‌⊙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 1967년 3월 판문점에서 북한 경비병의 총격 뚫고 극적 귀순
⊙ 이수근,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등의 비인격적 대우와 감시에 남한 체제에 대해서도 환멸… 1969년 1월 변장하고 탈출했다가 월남에서 체포, 그해 7월 처형
⊙ 이수근에게 위조여권 만들어 줬던 배경옥씨, 21년간 복역… 2006년 과거사委 진상규명 결정, 2008년 재심 판결에서 무죄 받아
⊙ 이수근, “나는 북쪽과 남쪽 체제를 다 경험… 중립국에 가서 통일방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다”… 南北 모두 중간지대 인정하지 않아
변장을 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이수근은 월남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압송되어 왔다. 사진=조선DB
  탈출한 지 51년, 사형(死刑)이 집행된 지 49년, 《월간조선》이 간첩이 아니라는 보도를 한 지 29년, 종범(從犯)이 무죄(無罪)를 선고 받은 지 10년이 흘러 ‘간첩 이수근(李穗根)’은 서류상 무죄(無罪)가 되었다. 그 사이 사건 관련자들은 죽거나, 병들거나, 망가졌다. 사건이 시작될 때 31세의 청춘이었던 이는 이제 80세의 노인이 되어 있다.
 
  2018년 10월 11일 이수근 간첩 혐의 사건에 대한 재심(再審) 선고가 있었다. 사형집행을 당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수근을 대신해 재심을 이끌어온 사람은 이모부인 이수근과 함께 간첩으로 몰렸던 처조카 배경옥(裵慶玉)씨다. 이수근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 주고 서울에서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로 들어가는 여정을 동행한 죄로, 그는 이수근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21년간 복역했다. 1989년 12월 23일에 출소한 이후 그는 줄곧 이 사건에 매달렸다. 80년에 가까운 그의 인생에서 전성기인 30~40대를 감옥에 묻어 버렸다. 출소 이후 30년의 삶은 누명을 벗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었다. 50년의 세월을 이 사건과 함께 보내는 사이 그는 혼자가 되었고, 장애인이 되었고, 80세의 노인이 되었다. 오늘 그 여정의 끝자락에 와 있다.
 
  하루 사이에 아침 기온이 6도까지 떨어진 10월 11일 오전, 쌀쌀한 날씨만큼이나 서울중앙지방법원 425호 법정 앞은 썰렁했다. 배경옥씨는 공판 예정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해 법정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49년 만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선고에 관심을 가진 언론은 별로 없었다. 몇몇 기자가 먼저 와 있던 배씨를 알아보고 질문을 했다. 전날 배씨는 ‘이수근 간첩사건 재심 최종 선고’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공판 일정 등을 직접 A4용지 한 장에 펜으로 적어, 법원 청사 2층에 있는 기자실 내부 게시판에 붙였다. 배씨가 스스로 작성한 보도자료인 셈이다. 이수근은 한때 ‘간첩’의 대명사였지만 세월이 그 기억도 지워 무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 無罪!
 
2018년 10월 11일 이수근 사건 재심 판결 전 공판을 기다리는 배경옥씨.
  법정 안 방청석도 텅 비었다. 10시20분 공판 시간이 다가오자, 3명의 판사가 자리를 잡았다. 검사의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피고인도 변호인도 없었다. 이미 사망한 이수근의 직계 가족이 남한에는 없다. 이 사건의 유일한 재심청구권자는 공익(公益)의 대표자인 ‘검사’다. 이 사건의 공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2008년 재심을 통해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았던 배경옥씨도 처조카라는 이유로 재심청구권자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그는 2008년 재심 이후 곧바로 이모부 이수근의 명예회복을 위한 싸움을 이어 갔다. 검찰이 주범인 이수근에 대한 재심청구를 미루는 사이 검사의 직무유기에 대한 고소, 1인 시위 등이 계속되었고 작년 검찰의 재심청구, 개시 결정, 그리고 오늘의 선고에 이르기까지 10년이 지났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 사건번호 ‘2017재고합41’ 사건 담당 김태업 부장판사는 담담하게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수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죄는 국가보안법위반죄, 반공법위반죄, 공문서위조죄, 위조공문서행사죄, 외국환관리법위반죄였다. 49년 만의 재심 판결은 30여분 만에 끝났다. “주문(主文), 피고에 대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재판부는 1969년의 판결은 ‘이수근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위장 귀순한 간첩임을 전제로, 군사기밀 탐지, 국가기밀 탐지 및 수집, 반국가단체 활동, 대한민국 탈출 등의 행위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및 반공법 위반 혐의를 적용한 것이었으나,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원심(原審)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제3국으로 가기 위해 대한민국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위조 여권을 만들고, 미화(美貨) 환전 후 취득 신고를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중앙정보부는 영장 없이 피고인을 강제 연행해 불법 구금하고, 고문 구타 등의 가혹행위 등 인권을 유린했다”고 인정했다. “중앙정보부 및 검찰 측이 제출한 피고인들의 진술서는 모두 이런 고문과 폭행에 의한 허위자백일 개연성이 충분하고, 따라서 증거능력을 상실한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첫 공판이 열리기 전날 대공분실로 끌려가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고, 재판 당일에도 중정(中情) 요원들이 법정을 둘러싸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한 만큼 당시 법정에서 한 진술도 강요된 것으로 의심할 만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조잡한 암호문 ▲난수표가 없는 점 ▲이수근의 취득 정보가 의미 있는 국가기밀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 ▲당시 홍콩에 도착해서 충분히 북한영사관 등으로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캄보디아로 향한 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보낸 미안하다는 편지 ▲중정 감찰실의 폭행·폭언·협박을 견디기 어려워했다는 점 ▲이수근 사형집행 후 북한에서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강연이 열렸다는 점 등을 근거로, 이수근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위장 귀순 간첩이라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런 무죄 이유는 기자가 《월간조선》에 여러 차례 썼던 내용이기도 하다.
 
 
  “제 운명인 거죠…”
 
  재판부는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위법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해 간첩이라는 오명을 쓴 채 생명권을 박탈당함으로써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점에 대해 진정으로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마무리했다. 이수근이 위장 귀순한 간첩이며 북한의 지령을 받고 북한으로 복귀할 계획이었다는 49년 전의 판단은 이날 판결로 모두 부정되었다. 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명예 회복이다.
 
  2008년 자신에 대한 재심 무죄 선고 당시 눈물을 흘리며 “기뻐야 하는데 허무하다”라고 했던 배경옥씨는 이날은 조용하였다. 여기까지의 시간이 고되었을 뿐 ‘무죄’ 판결은 당연하게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검찰이 재심을 청구하였으므로 이 선고를 받아들여 무죄는 확정된다). 배씨는 “이젠 억울함, 분노 같은 감정도 지나온 것 같습니다.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제 운명인 거죠…”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늘이 끝이 아닙니다. 이제 또 시작이죠”라며 선고 후 사건 기록 열람을 하러 간다며 바쁜 걸음을 옮겼다.
 
  이모부 이수근을 대신한 손해배상청구 등 또 다른 법적 다툼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에서 이수근 간첩 사건에 대한 조작 의혹을 처음 보도했던 기자는, 이후 사건 조작이 ‘의혹’이 아닌 ‘사실’로 인정되기까지 29년 동안 이 사건과 동행해 왔다. 출소하자마자 기자를 찾아왔던 배경옥씨와의 인연도 28년이다.
 
 
  자유를 향한 탈출
 
이수근은 1967년 3월 22일 오후 5시23분 판문점 군사정전회의 본회의장(뒤의 콘세트) 앞에 대기한 밴크로프트 준장의 세단차에 뛰어올라 귀순했다.
  1967년 3월 22일 오후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씨가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다. 같은 날 열린 판문점 제242차 회담에 북한 기자로 참관했던 그는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별고문인 제임스 리에게 탈출 의사를 밝혔다. 보고를 받은 미군 장교들은 탈출 방법을 논의했고 그 결과를 이수근에게 몰래 알렸다. 본회의가 끝나고 양측 대표들이 퇴장하기 시작할 무렵, 이수근은 유엔 군사정전위원 밴크로프트 준장 차량에 뛰어올라 탔다. 북한 경비병들은 권총을 뽑아 들고 위협사격을 하며 차량을 뒤쫓았다. 북한 경비초소는 차단기를 내렸으나, 차단기를 부수고 그대로 달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벗어났다. 최고위층 인사가 귀순한 순간이었다.
 
  이수근이 북한을 탈출한 1960년대 후반은 남북한 간 체제 대결이 극에 달했던 시대다.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기도 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으로 기억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숙청이 진행되었다. 조선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은 1967년 2월 북한군 창설기념일 때 군(軍) 부대를 방문한 김일성을 취재한 보도에서 김일성이 열렬히 환영받은 내용만 쓰고, 5분간의 연설 내용은 생략하였다가 비판을 받았다. 이런 지적들이 반복되면서, 그는 ‘당(黨)이 나의 충성심을 의심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곧 숙청될 것’을 예상했다. 이게 이수근의 탈출 동기였다.
 
이수근은 1967년 4월 1일 신문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귀순동기를 밝혔다.
  그는 1967년 4월 1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북한에는 사색의 자유마저 없고, 탈출이 스스로 택한 자유의 길이었다”며 “북한에 두고 온 세 자녀와 처가 한국에 와서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이어졌다. 중앙정보부는 1년 동안 이수근을 관찰하고 관계관회의를 거쳐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이에 따라 이례적으로 정보부 7국 1급 판단관으로 대우해 북한 정세 분석 및 국민승공(勝共) 계몽사업에 투입했고, 우석대학교 조교수 이강월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겉으로는 남한에 잘 정착한 성공한 귀순자로 보였던 그가 1969년 1월 27일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붙인 뒤, 위조여권을 만들어 준 처조카 배경옥씨와 함께 남한을 탈출, 홍콩으로 갔다가 1월 31일 월남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착륙한 여객기 안에서 이대용(李大鎔) 공사 팀에게 붙들려 서울로 송환된 것은 귀순 이상의 충격이었다.
 
 
  사형 선고 받고도 항소 포기
 
  중앙정보부는 2월 13일, ‘이수근이 위장 귀순을 하였다가 난관에 부딪히자 피고인 배경옥을 포섭해 입북(入北)할 목적으로 탈출하였다’는 요지의 수사 발표를 했다. 정보부는 그의 월남 동기와 사상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계속 주시해 왔으며, 이면적 감시 강화와 내사를 통해 그의 탈출 계획을 파악, 끈질긴 추적 끝에 해외에서 이들을 검거하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그놈이 그럴 줄이야…’라는 제목이 사회면 머리에 실렸고, ‘사형도 모자란다’, ‘흉물스런…’ 따위의 원색적인 반응이 그대로 기사화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당국의 무리한 수사와 재판의 일사천리식 진행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 됐다. 그해 4월 10일 1차 공판, 4월 24일 2차 공판, 5월 2일 구형 공판, 5월 10일 선고 공판. 서울형사지법은 이수근·배경옥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외삼촌인 이수근의 탈출을 도운 혐의로 구속되었던 김세준(金世埈·당시 연세대 합격생)씨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의 발표 이후 선고까지 3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그야말로 속전속결 진행이었다.
 
  1969년 5월 10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수근은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 항소(抗訴)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항소만료 기간인 5월 17일이 지나도록 항소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고 말았다. 이수근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은 1969년 7월 2일 오전이었다. 귀순한 지 833일 만에, 형이 확정된 지 두 달도 안 된 날에, 더구나 종범인 배경옥 등 피고인들의 항소심이 서울고법에 계류 중인데도 주범(主犯)을 사형 집행해 버린 것은 사법관행에 있어 그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주범이 사형된 뒤에 종범들에 대한 항소심과 상고심이 진행되었다. 1969년 12월 23일 대법원의 상고(上告) 기각으로 배경옥은 무기징역, 김세준은 징역 5년이 확정되었다.
 
 
  “그는 간첩이 아닙니다”, 이대용 공사의 말 한마디에 시작된 사건 추적
 
이대용 前 주월공사.
  20여 년 동안 간첩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이수근 사건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건 본 기자가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에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쓰고부터였다. 이 기사는 이수근을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하였던 이대용(李大鎔) 공사의 증언을 뼈대로 삼아 주로 정보부 간부들을 대상으로 취재한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 대해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인 방준모씨가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 《월간조선》 기자 조갑제, 그리고 이대용씨를 상대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으나 1994년 2월 24일 무혐의 처리되었다.
 
  1986년 1월 8일 기자는 ‘한국 내 미 CIA’ 관련 취재 차 서울 여의도에 이대용씨의 사무실을 찾아갔었다. 당시 그는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이었다. 1969년 1월 31일 오전 이수근을 비행기에서 끌어내릴 당시 그는 주월 한국대사관의 공사 직함(육군 준장)을 가진 중앙정보부 월남책임자였다.
 
  이대용 전 공사는 1975년 4월에 사이공이 함락될 때 탈출하지 못하고 두 대사관 직원과 함께 억류돼 5년 동안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철수할 수 있었지만 대사가 먼저 가 버린 상황에서 남아 있는 한국 교민들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일부러 헬기를 타지 않았던 사람이다.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과 이스라엘 상인 아이젠버그의 중계에 의한 비밀접촉 끝에 이 공사 일행은 1980년 4월에 풀려나 귀국했었다.
 
  그날 기자가 이대용 이사장을 찾은 것은 이수근의 체포 작전에 미국 CIA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취재 말미에 이 이사장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 한마디를 던졌다.
 
  “이수근이가 간첩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지요.”
 
  “언젠가는 제가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 그는 간첩이 아닙니다.”
 
  이대용 이사장은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메모 책들을 꺼내며 “여기에 다 적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밝힐 단계가 아니다”면서도 당시 상황을, 내키지 않는 듯, 그러나 자신만의 비밀로 안고 있기에는 안타까운 듯 뱉어 내었다.
 
  이수근이 이대용 공사에게 붙잡힌 직후 자포자기 상태에서 쏟아 놓았다는 말은 이러했다는 것이다.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에서도 자유가 없더군요. 나를 매일 감시하고 수시로 불러서 북쪽과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때리고, 내 발을 향해 권총을 쏴 위협을 하지 않나… 울분을 술로 달랬는데, 다음 날 아침 속이 아파 물을 달라고 하면 아내도 냉대하고….”
 
  “남한이 북쪽보다야 백 번 낫지요.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한이 바로 지옥이지요. 그래서 탈출했는데 남쪽도 틀렸어요. 자유도 없고, 독재고 해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어요. 남쪽, 북쪽을 다 경험한 것을 책으로 쓰면 한 40만에서 100만 달러는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대용 이사장을 만난 1986년엔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란 기사를 써도 잡지에 실릴 시국이 아니었다. 기억만 해 두기로 하였다. 그 석 달 뒤 기자는 ‘한국의 사형집행 실상’을 취재하다가 고중렬(高重烈)씨를 만났다. 그는 서울구치소에서 20여 년간 사형수 교화담당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백 명의 사형집행에 참여한 이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고씨가 먼저 이수근 이야기를 꺼냈다. 이수근은 사형집행 때 많은 간첩들이 그러했듯 “김일성 만세!”를 부르지도, 신문이 보도했듯 “자유대한 국민들을 배신하여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유언은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인 뜻이 ‘나는 북도 남도 싫어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다. 남북 양 체제에서 생활한 경험을 살려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흐름이었습니다.”
 
  이수근이 남겼다는 마지막 말은 이대용 공사가 얘기해 준 이수근의 말과 거의 일치했다. 고(高)씨를 만난 지 두 달쯤 지나 김형욱(金炯旭) 아래에서 정보부 국장을 지낸 모씨를 만난 자리에서 기자는 또 이수근에 대해 듣게 된다.
 
  “내가 이수근을 맡아 관리했던 적이 있었지요. 사이공에서 붙들려 와서 조사를 받는 자리에 내가 갔더니, 그는 나를 붙들고 펑펑 울면서 감찰실장 욕을 하더군요.”
 
 
  중앙정보부의 실책, 이수근의 행방 이틀간 몰라
 
  이수근이 아내 이강월(당시 36세)에게는 알리지 않고 북에 있는 본처의 이종 조카인 배경옥(당시 29세)씨와 함께 서울 성북구 삼양동 233의 3번지에 있던 자기 집을 나와 위조여권의 주인공 오제녕(吳濟寧) 행세를 하면서 행선지를 태국으로 하여 김포발(發) 홍콩행(行) 캐세이퍼시픽 항공사(CPA)의 여객기에 몸을 실은 것은 1969년 1월 27일 오후 5시30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다음 날 밤에야 비로소 이수근이 자취를 감춘 사실을 알아냈다. 이수근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감찰실 직원이 1월 27일에 실시된 부내 승진시험에 참여하느라고 이틀간이나 이의 행방을 놓쳐 버렸던 것이다.
 
  정보부는 배경옥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던, 이수근의 누이 이신성(李信星)씨의 아들 김세준(당시 22세)씨를 28일 밤에 연행해 이수근의 행방을 추궁했다. 김(金)씨는 삼촌 이수근을 김포공항까지 전송하여 그가 간 곳을 알고 있었으나 다음 날(29일)까지 행선지를 대지 않아 정보부에서는 이수근이 국내에 있는지 해외로 나갔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공의 대사관에서 이대용씨가 본부(정보부)로부터 긴급 전문(電文)을 받은 것은 29일 새벽이었다. 그 내용은 이수근과 처조카 배경옥이 해외로 탈출했으니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이대용 공사는 직원들을 탄손누트 공항과 여관촌, 이민국으로 보냈다.
 
  29일 오전 8시에 또 한 통의 전문이 날아왔다. 이수근이 이세준이란 가명으로 월남에 잠입한 것 같으니 체포하라는 지시였다. 이대용 공사 팀이 월남 이민국의 입국자 명단을 조사해 보니 이세준은 28일 오전 9시15분에 CPA편으로 사이공에 도착, 17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다낭으로 갔음이 밝혀졌다. 이세준을 잡아와서 조사해 보니 그는 이수근이 아니라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청룡부대 중대장까지 지낸 사람으로 확인됐다. 29일 오후에 비로소 이수근이 오제녕 이름으로 된 위조 여권을 갖고 출국했다는 전문이 이대용 공사 앞으로 날아왔다. 정보부는 만 이틀이 지나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었다.
 
  이수근과 배경옥씨는 27일 홍콩에 도착, 이틀 밤을 호텔에서 보낸 뒤 29일에 목적지를 캄보디아로 변경한다. 원래 이수근은 태국이 아니라, 비자 없이도 얼마간 머물 수 있는 유럽 쪽으로 가기를 원했다. 예약 가능한 유럽행 비행기편이 마땅치 않았다. 일단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가, 배경옥씨는 사이공으로 들어가고, 이수근은 보다 안전한 스위스 같은 나라로 가서 몇 달 지낼 계획이었다.
 
  29일 오후 이수근과 배경옥은 프놈펜행 CPA를 타기 위해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곧 공항을 지키고 있던 한국영사관 직원들에게 발각돼, 한바탕 격투가 벌어졌고, 모두 현지 경찰에 연행되었다. 홍콩 경찰은 1월 31일 아침, 사이공을 경유하는 프놈펜행 CPA 여객기에 이수근과 배씨를 태워 출국시켰다. 김형욱 정보부장은 사이공 공항에서 이들을 붙들 계획이었고 사이공의 이대용 공사에게 긴급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이대용 공사는 월남의 티우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해 비행기의 이륙을 지체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미국에서 티우 대통령과 함께 교육을 받은 이후 친구가 된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대용씨는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려갔고, 티우 대통령 지시로 아직 이륙하지 않고 있던 비행기에서 이수근과 배씨를 끌어내렸다.
 
 
  이수근, 김형욱 앞으로 편지 남겨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
  1987년의 민주화를 계기로 언론자유가 만개하자 기자는 이수근 사건을 본격적으로 취재하였다. 1989년 초 이대용 공사를 두 번째로 만났을 때, 그는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정보부 안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며 일기장을 펼쳐 놓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수근 사건 뒤 티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제가 따라왔지요. 그때 김형욱 부장이 나를 불러 당부를 하더군요. ‘이수근이가 이중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이 공사가 더 잘 알지 않소. 그렇다고 이수근이를 살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몇 사람밖에 안 되니 절대로 보안에 부쳐야 합니다.’ 신문에 보니 이수근은 한 2년쯤 징역을 살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수근의 소지품 중에는 영한사전, 한영사전, 기초영문법, 중국어 4주간이 있었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가려 했다면 이게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다가 스위스 같은 유럽의 중립국으로 가서 살려고 했다고 하더군요. 사전류는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죠.”
 
  이 내용은 2008년 배경옥 및 김세준씨가 청구한 이 사건에 대한 재심판결문에서도 북한으로 탈출할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근거로 적시되어 있다. 판결문에는 “이수근이 북한으로 탈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홍콩에 있는 북한영사관이나 중공을 통하여 탈출하는 것이 용이함에도 굳이 중립국인 캄보디아행을 고집한 점”도 지적하였다. 이수근은 탈출하면서 조카 김세준에게 정보부장 김형욱에게 보내는 편지도 남겼다. ‘감찰실에서 당하는 온갖 수모와 신체에 가해지는 폭행에 인간으로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해외로 나왔다. 지금 여러모로 바쁜 시기에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 그동안 부장님께서 베풀어 주신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 정세가 바뀌면 귀국하겠다’는 요지였다. 이는 홍콩행 비행기에 오른 뒤 김세준이 우체통에 넣은 것이다. 자신의 탈출을 정보부에 자진 신고하는 것과 같은 이 편지는, 이후 재판 과정에서 정보부의 고의 누락으로 증거로 제출되지 못했다.
 
  이수근씨는 편지를 남길 정도로 자신을 평소에 아껴 준 김형욱 부장에게 인간적인 미안함을 전했으나, 김형욱은 그런 이씨를 철저히 세상에서 묻어 버렸다. 이수근을 수중에 넣자 귀순자 관리의 실패 사례를 성공담으로 둔갑시킨다. 결국 이 사건은 ‘이중간첩의 철저한 배신’, ‘그런 간첩을 끈질기게 추적해 온 정보기관의 노력’으로 포장되어 언론에 소개되고 국민여론을 들끓게 했다.
 
  이수근과 배경옥 등에 대한 수사과정은 고문, 그리고 사실 조작 과정이었다. 그렇게 조작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언론 발표, 속전속결 재판, 신속한 사형 집행이 이어졌다.
 
 
  고문, 조작, 부실재판
 
  2008년 재심판결문에는 배경옥씨에 대한 고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계속 의자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은 것을 비롯하여 의자에 묶인 채 고개가 뒤로 젖혀진 다음 얼굴에 수건이 씌어진 후 물을 붓는 식의 물고문을 당하였고, 양손 또는 양발에 전기선을 연결시켜 놓은 채 속칭 228 전화기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으로 전기고문을 당하였고, 그 외 구타는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한쪽 어깨가 내려앉았고, 왼쪽 다리는 감각이 없으며, 당시 발로 차인 가슴 부위의 갈비뼈가 으스러졌는지 지금도 만져 보면 뾰족한 것이 잡힐 정도이며….”
 
  이수근 등이 강제로 연행되어 10일 이상 불법 구금되어 있는 동안, 가족들에게는 일절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다.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고, 검찰에 송치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 이후에도 접견이 차단되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구치소에 상주하며 이들을 감시하고 격리시켰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법원의 접견금지 결정에 따라 가족 면회가 금지되었다. 국선변호인이 선정되었으나 공판기일이 임박해 이루어져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배경옥씨도 “1 심 때 국선변호인이 한 번 접견하러 왔었는데 잘될 것이니 건강히 잘 있으라는 것 외에는 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고 진술했다 .
 
  재판부가 이수근씨가 간첩이었다고 단정하여 사형선고를 내리는 데 있어서 유일한 물증(物證)은, 이수근이 배경옥을 시켜 김일성 앞으로 우편발송했다는 암호문이었다. 이것 외에는 모두 자백이나 정황뿐이었으므로, 공정한 수사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면 모두 증거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즉 이 암호문의 진실성이 뒤집어지면 ‘유죄’로 결론짓기 어려운 구조를 가진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제시한 암호문의 내용은 허술했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였다.
 
  〈배은망덕하고 고향을 떠난 불효자식(이수근 자신)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잘못을 뉘우치고 사업을 하겠습니다. 여기에 약(북괴에 도움이 되는 재료)을 구해 놓았으니 인편(북괴 지도원)을 보내 주십시오…〉
 
  이 암호문을 사건 약 8개월 전 배경옥을 통해 성경책 속에 감추어 홍콩에서 모스크바 천주교회에 우편 발송토록 했다는 것이다.
 
  최고급 간첩이라는 자가 김일성에게 직접 암호문을, 그것도 우편으로 보냈다? 항소심에서 배경옥은 ‘암호문이 들어 있는 성경책을 우송했다면 홍콩우체국에 발송 근거가 명기되어 있을 것’이라며 사실조회를 신청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외면했다.
 
  1969년 5월 10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이수근은 항소만료 기간인 5월 17일이 지나도록 항소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수근은 그때 서울 구치소 특별감방에서 교도소 직원이 아닌 정보부 직원의 감시하에 있었다. 항소의 뜻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보부의 허가 없이는 법원에 전달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수근은 선고일로부터 두 달도 되지 않은 7월 2일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공범인 배경옥, 김세준에 대한 재판이 고등법원에 계류 중이었다. 공범의 재판이 진행 중인데 주범을 먼저 사형시켜 버린 예는 문명국에선 절대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토록 무리하면서까지 서둘러 사형시켜 버린 이유는 뭘까. 이수근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오는 것이 김형욱은 그렇게도 두려웠을까. 내가 취재를 하던 때는 그 또한 고인(故人)이었다. 1979년 10·26 사건 직전, 김재규의 명령으로 프랑스에서 정보부의 암살팀에 의하여 시신(屍身)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20년 만에 찾아온 희망-《월간조선》
 
필자는 《월간조선》 1989년 3월호에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썼다.
  〈1973년 11월 3일에 재이감된 광주교도소에서 16년이 지났다. 서른하나의 건강한 청년이었던 나는 어느덧 50대로 접어들었다. 1988년 12월 20일 신문을 읽던 나는 무기수 배경옥이 20년형으로 감형된 것을 알았다. 감정의 변동은 없었다. 차갑고 축축하고 좁은 감방 속에서 기쁨이나 슬픔 같은 인생의 감정을 내던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앞으로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은 지난 20년보다 길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힘도 없었다. 단 한 가지 남은 희망은 20년간 닫혀 있던 진실이 진실로서 열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1990년 3월호 《월간조선》, 이수근 조카 배경옥의 수기 “나는 간첩이 아니었다” 중)
 
  1989년 기자가 이 사건의 문제점을 《월간조선》 3월호를 통해 처음 보도했을 때, 이 소식은 광주교도소에서 20년째 복역 중이던 배경옥씨에게도 닿았다. 어느날 교도관이 자신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며 슬쩍 알려줬다고 한다. 배경옥씨는 바로 교도소장을 찾아갔다.
 
  “나에 대한 기사인데 당연히 내가 읽어야 되질 않느냐 하고 따졌습니다. 교도소장은 잠시 곤혹스러워하더니, 가져가지는 말고 사무실 안에서만 읽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심정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20년 동안 아무도 억울한 이 일에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는데… ‘결국 진실은 누군가에 의해 밝혀지게 되어 있구나’ 하는 희망이 처음 생겼습니다.”
 
  배씨를 찾아 나서기 전, 기자는 그가 비록 무기(無期)징역 선고를 받았으나 오래 전에 풀려나 서울 어디에선가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배씨가 한 일은 이수근에게 오제녕의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만들어 준 일뿐이었기 때문에, 시국사범처럼 감형(減刑), 형집행정지, 사면 등등의 특례조치로 훨씬 전에 옥문을 나와 살고 있으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31세에 구속됐던 배씨는 51세의 초로의 나이에도 여전히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는 1988년에 무기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돼 1989년 12월 22일에 만기 출소했다.
 
  〈그의 출소를 기다리는 이는 팔순이 다 된 노모와 자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중병을 얻은 동생들뿐이었다. 그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은 것은 동생 배경수(裵慶壽)의 경기도 하남시 집에 도착하고 난 후였다. 동생은 직업군인이었으나 형이 간첩으로 낙인찍히면서 중위로 강제 예편되었다. 당시 서울 충무로에서 조그마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동생네는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내일은 뭘 할까 생각했어요. 그때서야 내가 교도소를 나왔구나, 사회참관하러 나왔을 때처럼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밤 저는 날이 밝는 대로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장님부터 찾아뵈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2004년 1월호 《월간조선》, “배경옥의 출소 뒤 삶 / 서철인 기자”)
 
 
  이모부 李穗根의 출현으로 꼬여 버린 裵慶玉의 삶
 
  인간의 운명은 사소한 사건으로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 수가 있다. 배경옥씨가 그런 경우였다. 크레인 정비 기술자로 잘나가던 그가 당시 근무하고 있던 회사는 사이공에 진출해 있는 미국 건설회사 퍼시픽 아키텍트 엔지니어(PA&E)였다. 박명옥(朴明玉)씨와 결혼해 신혼 생활 중이었던 그가 사이공에 간 것은 1966년 봄. 그는 아내의 첫 출산을 목전(目前)에 둔 채 출국했다.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보수는 잔업 수당까지 월(月) 50만원이었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100만원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중장비 정비소를 운영하고픈 배씨의 꿈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적어도 이수근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가 이수근을 처음 만난 것은 1968년 4월, 동생의 결혼식 참석차 잠시 한국에 들어왔을 때다. 결혼식 날 저녁 배씨네 식구들은 예고 없이 들이닥친 낯선 손님 두 명을 맞았다. 한 사람은 생사조차 알 길 없는 이모의 남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수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들 가족을 찾아 이씨를 집까지 안내해 준 정보부 직원이었다.
 
  배씨의 어머니 김모씨의 막냇동생이었던 김순배(金順培)씨는 이수근이 탈출할 때 북녘에 남기고 온 본처이다.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개성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이모와는 6·25 전쟁 이후 소식이 끊겨 생사도 알 수 없었는데, 이모부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아이 셋을 낳아 키우던 이모와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북에 남겨 두고 귀순한 이모부에 대한 배씨의 감정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그가 이수근을 다시 만난 것은 같은 해 여름이었다. 트럭 사업 문제로 급히 귀국했다가 1968년 8월 22일 지인이 홍콩으로 출국하는 것을 공항까지 동행하여 전송하였는데, 택시 안에 여권이 든 작은 가방을 놓고 내렸다. 배씨의 운명은 그날 이후 꼬이고 말았다.
 
  여권 재발급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리는 사이 종암동 집으로 놀러온 이수근을 다시 만났다. 그날 이후 둘은 서울 근교에 있는 산과 절에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수근은 술을 많이 마셨다. 그때마다 남한 생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모부는 중립국인 스위스로 가서 자신이 경험한 남한체제와 북한체제의 장단점을 글로 쓰고 싶다 하셨어요. 그렇게만 되면 북에 있는 가족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제3국에 가서 글을 쓰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서로 유리한 내용을 담아 달라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거라는 거였어요. 위법인 걸 알면서도 이모부가 위조여권을 습득하도록 도와준 것은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이모부의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5년간 독방생활, 失語症
 
  홍콩을 경유해 이수근은 스위스로, 그는 월남으로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하고 함께 출국한 게 1969년 1월 27일 오후 5시30분이었다. 이수근의 여권에는 오제녕이라는 이름과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단 자신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그의 막내 여동생 배인향(裵仁香)씨조차 이수근을 전혀 못 알아볼 정도로 완벽한 변장이었다.
 
  이수근을 급하게 사형 집행함으로써 그의 입을 막았던 정보부는, 배경옥의 입도 두려워했던 것 같다. 5년 동안 독방(獨房)생활을 했다.
 
  “짧은 운동 시간 외에는 도무지 바깥바람을 쐴 기회가 없었습니다. 독방에 오래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제대로 발음한다고 하는데 실제 소리는 말더듬이처럼 더듬거리거나 웅얼웅얼하는 것으로 들리는 겁니다. 무서웠습니다. 영영 말을 못하게 될까봐 혼자서 작은 창을 보며 미친 듯이 중얼거리곤 했어요.”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배씨는 두 번 수술을 받았다. 한 번은 탈골된 어깨뼈를 잘라내는 수술이었고, 또 한 번은 복부에 자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어깨뼈 수술은 팔을 비틀고 잡아당긴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을 오랫동안 참고 참다 한 것이었다. 의사는 탈골 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나머지 빠진 어깨뼈 틈으로 살이 들어차 뼈를 잘라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수술로 인해 그의 어깨는 한쪽이 짧은 기형이 되었다. 그의 온 몸은 여전히 상처투성이다. 80세의 그는 지금까지도 뜸과 같은 스스로 익힌 민간요법으로 고문 후유증을 완화시키고 있다.
 
  그는 감옥에서 그림으로 마음을 달랬다. 1985년 전남지역 교정(矯正)상품 전시회 한국화 부문에서 동상을 받은 데 이어 1988 년 광주직할시 미술대전에서 입선했다. 아침이면 덮고 잔 담요가 입김 때문에 얼어 있을 정도로 추웠다는 감옥에서 붓을 쥐고 산수화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는 배경옥씨.
 
  그는 출소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팔자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림 그리기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였다. 옥중에서 열관리기능사 2급 자격증까지 땄건만 그는 어디에도 취직할 수 없었다. 신원조회를 하면 나오는 ‘빨간줄’ 때문이었다. 막노동판에서도 나이 든 그를 달갑게 생각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일거리가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다. 더 이상 동생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건 당시 김포공항에 배웅 나왔던 막내 여동생 인향씨는 평생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단순히 배웅 나온 걸 가지고 간첩 탈출을 방조한 중죄로 몰아붙여 원래 있던 심장병이 악화된 것이다.
 
 
  아들과 마지막 통화
 
배경옥씨는 출소 후인 《월간조선》 1990년 3월호에 옥중 수기를 기고했다.
  얼마 전 기자의 사무실을 찾아온 배경옥씨와 재판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그림 이야기로 옮겨갔는데, 갑자기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미술에는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아들 훈이도 저를 닮아서인지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담담하게 얘기하는 아들 휘훈(輝勳)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배씨가 구속당할 때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휘훈(당시 4세)과 장녀 진희(珍姬·당시 1세)를 두고 있었다. 이들과는 1973년 11월 이후 소식이 끊겼다. ‘간첩의 자식’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출소 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찾았다. 부인은 전(前) 남편이 아이들을 단념하고 살기를 바랐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가 20여 년 만에 나타난다면 아이들에게 큰 충격이 될 거라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우연히 만난 처제에게서 들었다.
 
  출소 이듬해인 1990년 여름, 느닷없이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날이 올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아들은 전화를 끊었다. 다섯 살 때 이후 처음 들어본 목소리였다. 장학생으로 혼자서 대학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총장 추천으로 취업까지 했다니 참 대견한 아들이었다. 아들에게 그가 한 말은 “미안하다”였다.
 
  1990년 8월 아들 휘훈 군은 첫 봉급을 탄 지 며칠 안 되던 날에 무주구천동의 계곡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해 버렸다. 그와 통화한 지 꼭 1주일 후였다.
 
  배경옥씨는 출소 후 이수근과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배(裵)씨는 출소 직후 기자의 소개로 1990년 3월호 《월간조선》에 ‘나는 간첩이 아니었다’는 수기를 썼다. 기자는 1991년 10월호 《월간조선》에 탈북한 전 북한 노동당 간부 김정민(金正敏)씨의 증언을 담은 기사를 실었다.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
 
  “이수근의 가족은 북한에서 숙청되었고, 그가 남한에서 처형된 후 노동당 간부들에게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제목의 강연이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배경옥씨는 이수근이 진정으로 귀순하였다는 증거를 얻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국가기록원(당시 정부기록보존소)을 수시로 드나들며 수사기록 열람 및 확보에 주력했고, 청와대·안기부·국민고충처리위원회·검찰 등 민원을 넣을 수 있는 기관엔 다 민원을 제기했다.
 
  1994년에 《월간조선》(12월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수근의 탈출을 도왔던 유엔군 정전위 직원 제임스 리 씨는 이수근이 위장귀순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1997년 기자는 황장엽(黃長燁) 선생과 함께 탈출했던 김덕홍(金德弘)씨로부터 “나도 북한에서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강연을 들었다”는 증언을 얻었다.
 
  배경옥씨는 2005년 7월 13일에 이 사건의 재심을 법원에 신청했다. 그때만 해도 재심 개시 결정을 얻어 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재심 신청은 이진우(李珍雨) 변호사(전 국회의원)가 맡아서 했다. 이 변호사는 《월간조선》에 실린 배경옥씨에 대한 기사를 읽고 무료 변론에 나선 것이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자 배경옥씨는 2005년 12월 2일 진실규명 신청을 냈고, 위원회는 이듬해 4월 25일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 개시를 의결했으며, 2006년 12월 19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게 재심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위와 같은 조사 결과, 위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이수근이 귀순하였을 당시 행한 전략신문 결과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이수근을 중앙정보부의 판단관으로 채용하여 국민승공 계몽 사업에 활용하였으나, 이수근이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 및 재북(在北) 가족의 안위(安危)에 대한 염려 등으로 피고인 배경옥과 함께 한국을 출국하자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 처형하여 귀순자인 이수근의 생명권이 박탈된 비인도적, 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결정한다.〉
 
 
  재심
 
  비로소 국가기관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2007년 2월 26일 법원은 배경옥·김세준 두 사람이 신청한 재심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법원은 재심 결정문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피고인들을 영장 없이 불법 구금하였고, 그 수사과정에서 피고인들에게 구타와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하여 형법 제124조 소정의 직권남용감금죄와 제125조 소정의 독직가혹행위죄를 범하였음”을 인정한 후, “수사관들이 저지른 위 직무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되어 형사소송법 제422조 소정의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재심대상 판결에는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에서 정한 재심사유가 있다”고 했다.
 
  2008년 12월 29일 서울고등법원 제6 형사부(재판장 박형남, 판사 박선준 김상규)는 선고를 했다. 재판장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수근이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라는 점과 관련하여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증명력이 없는 것이어서, 위 각 증거들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원심 판결 중 피고인들에 대한 부분을 파기한다. 피고인 배경옥을 징역 1년6월에 처한다. 원심판결 선고 전의 구금일수 99일을 피고인 배경옥에 대한 위 형에 산입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 배경옥에 대한 각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 반공법 위반의 점 및 피고인 김세준은 각 무죄.”
 
 
  재심 후 10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39년 만의 재심 판결은 법리상 “주범 이수근도 간첩이 아니었다”고 선언한 셈이지만 그가 고인이므로 누군가는 별도의 재심을 청구해야 했다. 검찰은 배경옥씨 판결에 대한 상고를 포기하여 고법 선고는 확정되었다. 재심에서 배경옥씨에게 선고된 징역 1년6월은 여권을 위조한 범죄에 대한 형량이다. 배경옥씨는 징역 20년을 살고 나왔으므로 1년6개월을 제한 기간만큼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이 된다. 2008년 재심에서 종범이었던 배씨에 대한 무죄 판결로 주범인 이수근에 대한 재심도 쉽게 진행될 줄 알았으나 10년간의 법적 투쟁이 필요했다.
 
  배씨는 자신에 대한 재심 판결 직후 곧바로 이씨의 재심도 청구했다. 법원은 2011년 11월 배씨에게 재심청구권이 없다는 이유로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형사소송법 제424조 2항에는 사망한 자의 재심은 검사나 배우자, 직계친족, 형제자매만 청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홀로 귀순해 국내에 가족이 없는 이씨에게는 ‘공익의 대표자’인 검사만이 유일한 재심청구권자가 된다.
 
  배씨는 이에 2013년 11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5명 이상의 담당 검사가 바뀌었으나 아무런 결론을 내지 않았다. 2015년 12월 배씨는 대검찰청에 재심청구 지연에 대한 민원을 제기했다. 2016년 2월에야 검찰은 형사소송법 제420조 5항을 근거로, ‘이수근씨의 죄목을 뒤집을 만한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재심청구 사유가 불충분하다’는 취지로 재심을 청구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배씨의 재심 판결만 가지고 이수근의 재심 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고문 등 불법 수사 사실에 대해서도 “(2008년의) 고등법원의 일부 판단이 확정적인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었다.
 
  이런 검찰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008년 배경옥씨에 대한 재심판결문에는 “이수근이 위장귀순한 간첩으로서 반국가단체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라는 점과 관련하여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증명력이 없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배경옥씨는 검찰의 회신을 받은 이후, 2016년 5월 담당 검사를 직무유기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했다. 재심청구를 상당한 이유 없이 회피하고 있는 데 대한 항의였다. 1인 시위에도 나섰다. “검찰은 사법살인을 당한 이모부 이수근에 대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에 담당 검사를 검찰에 고소하고, 저는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자 1인 시위에 나섰습니다.”
 
  2016년 6월 4일부터 대검찰청 앞을 시작으로 서울시청 앞, 국회 앞에서 그는 1인 시위를 벌여 나갔다. 정권이 바뀌고 2017년 9월 29일, 드디어 검찰은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였다’는 발표를 한다. 대검 관계자는 “그동안은 직권 재심청구를 하지 않아 왔지만 지난 8월 문무일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면서 검찰도 직권 재심청구를 검토하게 됐다”며 “이미 공범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는데도 유족이 없어 재심청구를 못한 이수근씨 등의 경우 형평성 차원에서 검찰이 재심을 청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머니
 
  2008년 자신에 대한 재심판결 이후 거의 10년간의 법적 투쟁 끝에 이루어 낸 주범 이수근에 대한 재심 판결은 1년이 지나 2018년 10월 11일 결정이 내려졌다. 10년 동안 배경옥씨가 했던 일은 재심청구 외에도 많다. 손해배상청구 소송, 국가정보원에 대한 행정소송, 이 외에도 청와대, 국민권익위원회, 국정원, 대검찰청, 법무부 등을 상대로 한 민원제기 등. 기자가 배경옥씨를 만날 때마다 봤던 그의 배낭에는 각종 민원서류, 소송 관련 서류들로 항상 무겁게 채워져 있었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좀 내려놓을 때가 온 걸까.
 
  지난 9월 말경 재심 선고를 앞둔 배경옥씨를 만났다.
 
  “이제 거의 다 왔네요. 기분이 어떻습니까?”
 
  “결론은 무죄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뭐 담담합니다.”
 
  “선고일, 법원에 누가 같이 옵니까? 동생들이라도….”
 
  “아뇨, 혼자입니다.”
 
  그랬다. 그는 감옥에서도 감옥을 나와서도 혼자였다. 출소 후 많은 도움을 줬던 동생들이지만 모두들 사는 게 바쁘기에 자주 볼 수 없다. 재심청구도 가족들 몰래 홀로 준비했었다.
 
  그런 배경옥씨의 곁을 가장 오래 지켰던 사람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김씨는 출소 후에도 아들 곁을 25년간이나 지켰다. 거의 100세까지 살아 낸 것이다. 먼저 떠나보낸 아들 휘훈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얘기하던 그가 어머니 얘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는 늘 저에게 미안한 마음이셨습니다. 어머니의 막내 여동생이 이수근의 본처였으니까요. 어머니는 자신 때문에 이수근과 엮이게 돼 아들의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셨는지… 오히려 제가 죄송한데….”
 
  “사형 선고 받았을 때 어머니한테 제일 죄송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어머니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한낱 미물의 생명도 존중해야 하는데 그때 당시 사람 목숨을 너무 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누구나 귀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새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든 내가 뭘로 태어나야지 작정하고 나온 생명은 없잖아요.”
 
 
  南과 北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본다. 지금 대한민국의 행정, 법 집행자들은 1960년대 말보다 생명을 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인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비인간적 중형 선고를 보면서 이수근을 저승으로 보냈던 고문 및 법률기술자들이 떠오른다. 그래도 한국 현대사의 음지에서 쓰러져 갔고, 양지에서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희망을 가져 본다. 이수근은 목에 밧줄이 걸리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북쪽과 남쪽 체제를 다 경험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립국에 가서 통일방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였습니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대결에서 그런 중간지대는 없었다. 그의 환상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셈이다. 남과 북 사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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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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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    (2018-10-30)     수정   삭제 찬성 : 1   반대 : 3
조갑제가 왠일로 이런 일을 하는가 ? 늙었는가 ? 비로소 인간이 되려는가 ?
  박혜연    (2018-10-22)     수정   삭제 찬성 : 5   반대 : 5
이수근씨가 귀순했을당시 1967년은 북한이 그때만해도 우리나라보다는 잘살았을때이니...!!!
  박혜연    (2018-10-21)     수정   삭제 찬성 : 5   반대 : 3
이수근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한게 조갑제 기자였으니 유가족들의 아픔 영원히 잊혀지지않을겁니다!!!! 월간좇선 이것만큼은 잘쓰셨소이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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