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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 분석

수정된 초등 6학년생 1학기 국정 사회 교과서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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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朴正熙는 지우고, 북한에는 관대한 시각… 文在寅 정권 입맛에 맞게 수정
“발행사에 ‘누가 수정했느냐’ 물어보니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답 돌아와”(박용조 교수)


⊙ 학계와 시민사회 뜻 모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초등 6학년생들에게 ‘1948년 건국’은 오답이고 ‘1919년 건국’은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적폐
⊙ 북한 김일성과 소련의 책임을 소련 책임으로만 돌려
⊙ “다른 편에 속하는 사람이면 아무리 功이 커도 過만 보는 당파성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박정희”(송복 연세대 교수)
⊙ 정치에 휘말리는 게 두려워 침묵하는 것일뿐… 구조적으로 乙의 입장인 발행사는 교육부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어
⊙ 교육부의 압력을 받은 발행사가 가지고 있던 집필자 도장 도용해 허위 공문 만들었을 가능성
⊙ 교육부 “편찬기관(진주교대)과 발행사 간에 벌어진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
  올해 신학기 초등 6학년생들이 사용하는 1학기 국정 사회 교과서(사회 교과서)가 현 문재인 정부 역사관에 맞게 수정된 것으로 드러났다. 《월간조선》이 2017년 12월 교육부가 승인해 반영한 사회 교과서 수정 사항 213건(단순수정 50건·내용수정 163건)을 분석한 결과, 1948년 8월 15일에 대한 표현을 모두 ‘대한민국 수립’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고치는 등 정권 입맛에 맞게 수정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8·15 광복과 대한민국 수립을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모두 수정(9군데)
 
올해 신학기부터 사용되는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정 사회 교과서(왼쪽). 지난해까지 사용된 교과서(오른쪽)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했지만, 새 교과서는‘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대한민국 수립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수정한 것부터 살펴보자. 수정 전 교과서에는 ‘8·15광복과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 총 9번(5, 107, 108, 110, 111, 113, 115, 117, 119페이지) 나오는데, 이를 모두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바꿨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 1948년 중 어느 해를 대한민국이 수립된 해로 볼 것인지에 대해 학계와 정치권에서 논쟁 중이다. 1919년을 대한민국 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임시정부 법통을 부인하는 건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란 주장이다. 또 1919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국왕에게 대한민국이 자주통치 국가가 됐음을 문서로 통보했다는 점도 이유로 든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곧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라는 논리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의 이야기다.
 
  “대한민국 건국 시점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1차 자료는 1919년 임시의정원 회의록과 1948년 제헌국회 회의록이다. 임시의정원 회의록은 국호를 제정하고 영토와 국민을 규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세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제헌국회 회의록은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점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민주 정부가 미국이 세워 준 것이 아니라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역사를 토대로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정부 수립을 주도한 인사들이 대한민국이 1919년 건국됐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하다.”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을 진정한 국가의 출범이 아니라고 본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임시정부와 상관없이 1947년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이루어졌고, 1948년 또 한 번의 유엔총회 결의에 의거해 ‘한반도상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19년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태동이었음을 부인하진 않지만, 건국 과정일 뿐 국민, 영토, 주권이 확립된 1948년이 자유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건국된 해라고 본다.
 
  김구 선생도 임시정부 수립 자체를 건국이라 생각지 않았다. 건국은 임시정부의 목적이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1941년 11월 28일 ‘건국강령’을 공포했다. 임시정부를 세우고 적(敵)과 혈전을 벌여 나라를 회복하는 과정인 ‘복국(復國)’을 거쳐 적의 통치기구를 박멸하고, 중앙정부와 의회의 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건국(建國)’을 최종 목표로 선언했다.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해방 무렵 만든 조직 이름도 건국준비위원회였다.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5월 10일 우리 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95%가 넘는 국민이 선거에 참여해 자결권을 행사한 ‘민주혁명’의 결과로 수립됐다. 또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받음으로써 근대 국제 정치 체제에서 처음 주권국가로 인정받았다. 대내외적 측면에서 근대국가로서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됐다고 봐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 등에서 “우리 건국은 1919년”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없이 광복이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생각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해 오늘의 번영을 가져온 ‘1948년’의 의의를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뜻을 모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초등 6학년생들에게 ‘1948년 건국’은 오답이고 ‘1919년 건국’은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힘써 청산한다는 구(舊)시대의 적폐라는 지적이다.
 
 
  북한에 관대하게 수정
 
남북협상 기간 김일성(왼쪽)과 함께 걷고 있는 김구.
  북한에 관대하게 내용이 수정되거나 삭제되기도 했다.
 
  116페이지 ‘그러나 북한이 국제 연합의 결정을~’이 ‘그러나 소련이 국제 연합의 결정을~’로 바뀌었다. ‘북한은 남북한 총선거를 하도록 한 국제 연합의 결정을 거부하고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였고, 1948년 9월에 북한 정권을 수립하였다(118페이지)’가 ‘38도선 이북에서는 1948년 9월에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북한 정권을 수립하였다’로 고쳐지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사실만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7년 7월 제2차 미소(美蘇) 공동위원회가 결렬됐다. 미국은 1947년 9월 19일 국제연합(UN) 사무총장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의제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다. 소련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안이었던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UN에 넘겼다. 미국은 UN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게 하자고 제안했다. 또 남북한의 인구 비례에 따라 국회의원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남한 인구는 북한의 두 배에 달했지만, 소련은 반대했다. 인구 비례로 국회의원을 뽑을 경우 남한 영향 아래로 들어갈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UN은 소련의 반대에도 한국의 독립문제를 1947년 11월 14일 ‘43:0, 기권 6’으로 통과시키고 1948년 3월 31일에 남북한 총선거를 한다고 결의했다. 38선 이북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이 UN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했다. 소련과 김일성은 1946년 2월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3월 토지 개혁을 하는 등 사실상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과 소련은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했다는 역사의 비난을 면하고자 남한의 추이를 주목하면서 속도 조절을 하고 있었다. UN은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남한은 UN 임시 한국위원단(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의 감시하에 시행된 자유 총선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수립했다. 북한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별개의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선포했다.〉
 
  역사적 사실로 봤을 때 ‘북한이 국제 연합의 결정을~’을 수정할 것이었으면 ‘소련이 국제 연합의 결정을~’이 아닌 ‘소련과 북한 김일성이 국제 연합의 결정을~’로 바꿨어야 한다. 또 ‘북한은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한 국제 연합의 결정을 거부하고’라는 문구를 삭제한 것은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려 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들게 한다.
 
  116페이지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한 김구는~’이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인하여 한반도가 분단될 것을 염려한 김구는 ~’으로 수정되기도 했는데, 김구 선생이 통일정부를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 등이 남한만의 총선거에 찬성한 이유는 앞서 설명했지만, 소련과 김일성이 1946년 2월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3월 토지 개혁을 하는 등 사실상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노선은 ‘분단 악(惡)’이고, 이에 반대한 김구의 남북 협상 노선은 ‘통일 선(善)’이라는 주장은 중대한 사실 오인(誤認)이다.
 
  국사학계의 원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승만은 ‘국제 감각이 뛰어난 현실주의자’, 김구는 ‘통일정부를 추구했던 이상주의자’다. 두 사람(이승만·김구)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볼 필요는 없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이제는 꿈과 불가피성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내용은 총 세 군데 수정됐는데 다음과 같다.
 
  〈118페이지: 그리고 헌법에 따라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은 ~ 국내외에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국회에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은 ~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128페이지: 이승만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각계각층의 시민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되었다→ 3월 15일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학생 김주열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 김주열이 시위를 진압하였던 경찰들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분노한 시민들은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다.
 
  139페이지: 이승만 정부는 파괴된 여러 시설들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였다. 미국이 지원한 식량과 물자는 전후 복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하여→ 정부는 파괴된 여러 시설들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였다. 미국은 이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원조하였다. 우리나라는 경제를 일으키기 위하여〉
 
 
  핵 포기할 생각 없어 보이는 북한
 
  148페이지에 있던 ‘북한은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문장은 아예 삭제됐다.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은 여전히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다. 남북 정상회담, 미·북 정상회담에 대한 보도가 나온 이후, 한국 사회는 장밋빛 물결과 희망으로 넘쳐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북한의 비핵화(非核化)가 이루어질 전망이 밝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종전(終戰) 선언이나 평화 체제, 또는 상징적 조치가 북한을 ‘보통 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북한은 과거 비핵화 협상 때마다 ‘단계적 해결’을 내세워 왔다. 북한이 한 단계씩 비핵화 조치를 할 때마다 한·미가 즉각적으로 보상을 제공하는 ‘행동 대 행동’ 방식이다. 하지만 이에 따른 2005년 9·19 공동성명과 2007년 2·13 합의, 2012년 2·29 합의는 번번이 북한의 합의 파기로 실패했고 매번 북한의 핵실험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출신 북한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주장이다.
 
  “북한의 비핵화는 여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이라크 후세인이 핵개발에 실패했고, 미국의 공격에 타도당하고 처형된 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역사상 비핵화에 동의한 유일한 독재자, 리비아 카다피 대령의 운명도 그렇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카다피는 서방국가의 간섭으로 우월한 공군력을 쓰지 못했고 혁명군을 폭격하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패전했고 비참하게 살해됐다. 북한은 카다피가 핵을 보유했더라면 서방국가들이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함으로써 리비아 공군력을 마비시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미국이 북한 정권의 안전을 보장할 경우에 비핵화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있지만, 미국이 북한 정권 안전을 보장할 능력은 없다. 물론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내에서 혁명이 발발할 경우, 미국이 불가침 약속을 지킴으로써 북한 정권을 도와줄 수 있을까? 특히 북한 정권이 공군력이나 중무장 병력을 동원해 혁명 세력을 참혹하게 진압하고, 혁명 세력이 리비아처럼 국제사회의 지원과 개입을 요구한다면 미국이나 한국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북한이 강대국들에 필요한 양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핵무기뿐이다. 핵을 포기한 북한은 수많은 약소국 중 하나가 될 뿐이다. 그래서 김정은도, 그 측근들도 ‘비핵화의 길’을 ‘죽음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여길 것이다.”
 
  미국 국제정치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도 《조선일보》 3월 28일 자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1%라고 했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바보같이 미국을 너무 믿었다.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한 결과가 무엇이었나. 이런 사정을 아는데도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까. 북한은 절대 하지 않는다. 중국도 그렇게 하라고 압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전술핵무기가 철수한 것은 냉전해체 분위기에 따른 것인데 잘못된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한 것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큰 실수였다.”
 
 
  박정희를 유신독재, 인권유린의 장본인으로 그려
 
5·16 군사정변을 설명하는 사진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온 사진에서 중앙청을 장악한 군인들 사진(아래)으로 바꿨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서술도 대폭 바뀌었다. 130페이지 ‘당시 정부가 4·19 혁명 이후 나온 각계각층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군인들이 국민 생활의 안정과 공산주의 반대를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잡았다’는 ‘당시 정부가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세운 계획을 이유로 군대를 축소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을 구실로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차지하였다’로 고쳐졌다. 132페이지 ‘이러한 가운데 박정희 정부는 권력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 유신 헌법에 따른 통치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는 ‘시위를 처리하는 방법을 두고 권력 내부에서 갈등이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 유신 독재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로 바꿨다. 140페이지 ‘수출 100억 달러 달성(1977년)’ 사진은 ‘1980년대 자동차 수출 사진과 전자 산업(반도체)의 발달 사진’으로 교체됐고, 박정희 전 대통령 얼굴이 나온 사진은 모두 빠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功)과 과(過)가 있는 인물이다. 질식할 것 같은 사회 통제와 자유의 구속은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고통을 줬다. 비극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 82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79년 1647달러로 급증했다. 수출은 4100만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늘어났다. ‘은둔의 나라’였던 한국은 자유무역시장의 세계 질서를 성공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로 사회 구조도 달라졌다. 1961년 국민의 63%가 1차산업에 종사하던 농업사회는 1979년 63.4%가 제조업과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박정희 시대의 변화는 양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하면 된다’ ‘잘살아 보자’는 정신은 무기력해져 있던 국민을 뛰게 했다. 다시는 가난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근대화의 영웅’과 ‘무자비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박정희 이후의 한국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포항제철소와 관련한 내용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온 포항제철소 착공식 사진을 포항종합제철소에서 처음 쇳물이 쏟아지던 순간 기뻐하는 사람들(1973년) 사진으로 수정했다.
  수정된 교과서를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쿠데타의 주역이고 굴욕외교, 유신독재, 인권유린의 장본인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다른 편에 속하는 사람이면 아무리 공(功)이 커도 과(過)만 보는 당파성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박정희”라고 지적했다.
 
 
  세계에 전파된 새마을운동 내용도 삭제
 
삭제된 새마을운동 사진. 수정된 교과서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새마을운동에 대한 내용설명도 삭제됐다.
  우리 농촌을 바꾸고 세계에 전파된 새마을운동 내용은 완전히 삭제됐다. 140페이지에 있던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부는 도시에 비해 낙후된 농촌을 발전시키려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였다.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도시, 직장, 공장으로 확산되어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방식을 바꾼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내용을 없앤 것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2015년 11월 ‘지구촌 새마을 지도자 대회’ 참석차 방한했는데, 당시 그는 “새마을운동의 ‘캔 두(can do·할 수 있다)’ 정신이 있다면 세계 절대 빈곤을 종식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삭스 교수는 “한국은 절대 빈곤을 겪은 지 50년 만에 빈곤 종식이란 위업을 달성했다”고도 했다. 새마을운동중앙회 홈페이지에는 새마을운동을 배운 외국인들의 소감문이 올라와 있다. 올리베이라 앙골라 국가보훈부 농업부장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발전을 이루고자 했던 한국 사람들의 용기와 노력을 배웠다”고 썼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라술 씨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 함께 잘사는 정신을 깨달았다”고 적었다. 우간다의 아키로르 씨는 “지역사회를 발전시킬 새로운 에너지와 노하우를 습득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은 새마을운동과 관련한 공적개발원조(ODA) 신규 사업을 추진하지 않고 있다. 코이카는 정부의 개도국 지원 업무를 하는 곳이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관계자는 “근면·자조·협동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다. 새마을운동 해외 보급은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국제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땅에 묻으려 한다. 아무리 박정희가 이룬 모든 걸 역사에서 지우려 한다 해도 이건 너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군위안부 명칭 포함
 
  교과서에는(99페이지) ‘일본군위안부’라는 명칭도 포함됐다. 기존 교과서에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설명은 있었지만, ‘일본군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초등학생들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넣지 않았다. 이번 교과서에는 위안부 사진과 함께 ‘식민지 한국의 여성들뿐 아니라 일제가 점령한 지역의 여성들까지 강제로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고통을 당하였다’는 설명이 함께 들어갔다.
 
  문재인 정부는 2015년 한·일 간에 외교 협상을 통해 일본 총리가 공식 사과하고 일본 정부 공식 예산으로 위로금을 지급하는 합의를 한 것을 부정한다. 이 합의로는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군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이런 시각을 반영한 것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2015년 합의는 최종적·불가역적이란 비외교적 표현이 들어간 문제가 있지만, 우리 역대 정부의 위안부 협상 목표를 상당수 달성했다.
 
 
  비공개 긴급회의록 보니
 
박용조 진주교대 교수.
  ‘수정·보완 대조표’를 보면 수정한 213건 대부분은 정정 주체가 ‘편찬기관(진주교대)’으로 적혀 있다. 이 교과서 연구·집필 책임자인 박용조 진주교대 교수가 수정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박 교수는 “본인 모르게 수정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가 수정한 것일까.
 
  《월간조선》은 자유한국당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위원들의 비공개 긴급회의록을 입수했다. 3월 13일 열린 비공개회의에는 박 교수가 참석했다. 회의록을 보면, 누가 어떤 이유로 교과서 내용을 수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회의록 내용을 요약, 대화체로 재구성)
 
  〈박용조 교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부로부터 교과서에 대해 압력(박근혜, 문재인 정부 모두)을 받았으나 거부했습니다. 2009년 교육과정(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의해 교과서를 썼는데, 2015년 정부에서 (대한민국 수립으로)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집필자와의 논의를 통해 대한민국 수립으로 썼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9월 교육부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수정 요청했으나, 교육자로서 근거가 없어 거부했습니다. 교육부가 정치로부터 바람막이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 나서서 압력을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3월 6일 자 《조선일보》 보도를 통해 213건이 바뀐 사실을 인지, 교육부에 확인했더니 발행사(지학사)가 보내 온 공문에 집필 대표자 도장이 찍힌 협의록이 붙어 있었다고 했습니다.(국정교과서는 매년 민원이 제기된 사항이나 오·탈자가 있으면 내용이 수정된다. 민원이 접수되면 해당 내용을 연구·집필 책임자가 다른 집필자들과 협의해 수정할 사항을 정하고 통상 발행사(출판사)를 통해 교육부에 공문으로 수정 승인을 요청한다.) 저는 모르는 일이라 지학사 측에 누가 수정했느냐고 물어보니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발행사는 구조적으로 을의 입장입니다. 교육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지요.
 
  조훈현 의원: 교육부가 직접 (수정을) 요구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박용조 교수: 대한민국 수립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수정하라는 건이 유일합니다.
 
  이종배 의원: 213곳이 수정됐는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박용조 교수: 예민한 부분, 될 수 있으면 생략돼야 할 부분들이 포함되거나 부각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안부나, 유신독재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각인되기 쉬운 단어였습니다. 초등학생의 수준에서 완화해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종배 의원: 교육부에서는 수정을 주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공문에 붙어 있는 협의록에는 3인의 집필자의 도장이 찍혀 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박용조 교수: 도용됐다고 생각합니다.
 
  전희경 의원: 3인의 집필자의 도장이 찍혀 있는데, 나머지 두 명은 이 사실을 알았나요.
 
  박용조 교수: 도장은 발행사에 맡겨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2015~2016년에 (제) 도장이 있음을 발행사로부터 들었습니다.
 
  전희경 의원: 협의록을 보면 일시, 장소가 기록되어 실제 회의가 이뤄진 것처럼 돼 있습니다.
 
  박용조 교수: 실제 회의는 없었습니다.
 
  곽상도 의원: 그간 수정 기록은 이메일로 주고 받았습니까.
 
  박용조 교수: 네. 하지만 이번 6학년 교과서 수정 기록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메일 기록을) 제출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의원: 그동안 어떻게 대응했나요.
 
  박용조 교수: 정정 요구자가 편찬기관으로 돼 있는데, 이를 교육부로 바꾸라고 요청(전화)했습니다. 하지만 답변이 없습니다.
 
  김세연 의원: 누구와 통화를 했나요.
 
  박용조 교수: 교과서정책과 ○○○ 연구사입니다.
 
  곽상도 의원: 먼저 지학사의 공문서 위조 혐의를 밝히고, 이후 교육부의 공범 여부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갑을 관계가 확실할 경우 교육부가 지시했다는 사실은 밝히기 어렵습니다.
 
  전희경 의원: 지학사가 문제를 뒤집어쓰지 못하게 출판사가 책임을 지도록 (경제적 압력) 하면 이실직고할 것입니다. 박 교수님 말고 다른 집필자도 증언할 수 있습니까.
 
  박용조 교수: 정치에 휘말리는 것을 꺼립니다.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상곤, “편찬기관(진주교대)과 발행사(지학사) 간에 벌어진 일”
 
김상곤 교육부총리는 초등 사회 교과서 ‘집필자 패싱’에 대해 “편찬기관(진주교대)과 발행사(지학사) 간에 벌어진 일”이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김상곤 교육부총리는 3월 19일 초등 사회 교과서 ‘집필자 패싱’에 대해 “편찬기관(진주교대)과 발행사(지학사) 간에 벌어진 일”이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이 교과서 연구·집필 책임자인 박용조 진주교대 교수를 배제한 채 고친 다음 박 교수 도장을 몰래 찍은 서류를 근거로 수정하는 데 교육부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김 부총리는 “발행사가 무슨 실익이 있어서 사문서까지 위조해 가면서 북한, 새마을운동 같은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수정했겠느냐”는 의원들 질문에도 “교육부와는 관련이 없다”고만 답했다.
 
  자유한국당은 3월 27일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를 임의로 수정했다”며 교육부 관계자를 고발했다. 한국당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교육부가)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를 현 정권의 입맛에 따라 수정하면서 집필 책임자를 배제하고 명의까지 도용했다”며 “이에 관련된 성명 불상의 교육부 및 출판사 관계자들을 대검찰청에 형법상 직권남용, 사문서 위·변조 및 동행사 혐의로 고발했다”고 밝혔다.
 
  다음 날인 3월 28일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회’는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비롯해 황우여 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등 25명 안팎을 직권남용과 업무상 횡령·배임 혐의 등으로 수사 의뢰하고, 교육부 공무원 10여 명도 인사 조치하라고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요청했다. 고석규(전 목포대 총장) 조사위원장은 이날 정부 세종청사에서 열린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 결과 발표’ 브리핑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헌법 가치를 위반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정책 집행 과정에서 많은 위법·부당 행위가 있었음을 확인했다”며 “위헌·위법·편법을 총동원해 역사교과서 편찬에 직접 개입한 국정농단 사건”이라고 말했다. 고 위원장은 “국정화 작업을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결정해 추진했고, 이병기 전 실장과 김상률 전 수석 등이 각종 편법을 동원해 작업을 강행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문제점은 없었는지를 살피기 위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다. 편법을 동원해 작업을 강행한 것이라고 국정교과서를 비판한 현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수정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사실이라면 이는 훗날 어떻게 평가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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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눈깔 외눈밖이 하수인 정권    (2018-05-04)     수정   삭제 찬성 : 1   반대 : 0
똑똑한 국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정권 박근혜 대통령 집권당시 는 국격이라도 높았고, 해외살아도 긍지감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문재인 때문에 창피하고 부끄럽기 짝이없다.
국민모두가 교육거부 홈스쿨로 교육해서 학교가 텅텅비어야한다
  뭐꼬    (2018-04-28)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1
갑질이 끝이 없노. 자유민주주의는 어디 가고. 대한민국의 국운이 다 되었는가..
  믿고거르는 조선동아    (2018-04-28)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1
간첩으로 몰려서 친구팔고 일본군장교출신인데 옹호하네
  미르    (2018-04-24)     수정   삭제 찬성 : 7   반대 : 10
정권에 의한 교과서 수정이 또 일어났군요.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공과를 잘 알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끔 해야 하는데 처음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을 세뇌를 시키는 것 같아 씁쓸하네요. 이런 비리는 언젠가 밝혀질 거라 생각합니다.
  이창호    (2018-04-21)     수정   삭제 찬성 : 17   반대 : 4
개 ㅅ ㅐ ㄲ ㅣ ㄷ ㅡ ㄹ! 대한민국의 미래를 자기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좌파정권!
다시 한 번 더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위대한 분이 이나라에 일어서야 한다.
내가 일어나 미래의 대한민국을 개조하고싶다. 현 좌파 정권과 간첩들은 모두다 처리해야한다.
다시는 이 나라에 좌익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씨를 말려야한다.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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