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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의 픽션과 팩트 사이

영화 〈택시운전사〉, ‘실화의 재구성’이라지만…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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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기사 김사복과 독일 기자의 만남은 우연? 필연? …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김사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르겐 힌츠페터)
⊙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박정희 정권 때부터 수차례 방한 … DJ·YS와 인터뷰도
⊙ 공수부대 ‘앉아쏴’ 집단발포로 비무장 시민 다수 사망 장면, 영화 러닝타임 1시간 42분·44분·
    46분·47분쯤 나와
⊙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 “시위 군중들의 공격으로 인해 발포” (피의자 신문조서)
1980년 5월 21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에 버려진 차량들. 항의시위에 사용되었던 택시 버스 등 많은 차량들이 파손된 채 거리에 방치되어 있다.
  송강호 주연의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 돌풍을 이어 가고 있다. 〈택시운전사〉 제작진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에 두었다고 주장한다. 영화 첫 장면에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는 검정 바탕에 흰색 자막이 나온다.
 
  앞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영화 〈변호인〉(2013)은 ‘실제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허구임을 밝힌다’는 자막이 나온다. 10년 전 개봉된 광주 5·18을 다룬 〈화려한 휴가〉(2007) 역시 ‘실제 사건을 극화했다’고 밝히고 있다.
 
  〈변호인〉이 ‘허구’, 〈화려한 휴가〉가 ‘극화’라며 픽션의 느낌을 확실히 주지만 〈택시운전사〉는 ‘실화의 재구성’이라는 다소 모호하고, 팩트에 가깝게, 허구적인 느낌이 덜 주는 장치를 썼다.
 
  ‘실화의 재구성’은 어떤 뜻일까. 사실을 뼈대로 그 사이에 작가의 의도를 담은 살을 집어넣어 하나의 사실관계를 재창조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택시운전사〉는 다큐가 아니라 허구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이다. 영화는 영화로 봐야지, 정색을 하고서 사실이란 잣대를 들이대선 곤란하다. 다만 영화 제작사 측이 ‘실화의 재구성’이라고 한 이상 팩트와 픽션, 뼈대와 살을 구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1. 택시운전사 김사복과 독일 기자 힌츠페터의 운명적 만남
 
영화 〈택시운전사〉 홍보 포스터.
  영화 속 서울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은 딸과 사는 홀아비다. 개인택시를 하는데 벌이가 시원치 않다. 밀린 월세가 10만원이나 된다. 어느 날 기사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다른 테이블에 앉은 동료 기사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김포공항에서 광주까지 외국인을 태워 주고 10만원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김만섭은 선수를 쳐서 김포공항으로 향한다.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치만)를 만난 그는 자신이 소개받은 택시기사라고 거짓말을 한다. 만섭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길을 나선다. 오직 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렇다면 실제 인물 택시운전사 김사복과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는 어떻게 만났을까.
 
  힌츠페터의 증언에 따르면, “김사복이라는 한국 사람이 (내가)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가 도쿄에서 서울에 도착할 무렵 서울에서 그를 안내할 사람이 김사복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의미다. 누가 두 사람을 연결시켜 줬는지는 미스터리다.
 
  힌츠페터는 독일 공영방송 NDR-ARD TV 기자로 도쿄특파원을 지냈던 인물이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한국을 수차례 찾았고 김대중·김영삼 등 야당 정치지도자와 인터뷰한 적이 있다. 영화 속 독일 기자 피터는 한국을 처음 찾은 것으로 설정돼 있으나 실제 인물 힌츠페터는 한국을 자주 찾았고 주로 야당 인사들과 접촉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카메라에 담은 5·18 광주 현장〉 참조)
 
 
  2. 광주현장의 외신기자는 힌츠페터 한 명뿐?
 
  영화 속 독일 기자 피터는 광주 현장을 찾기 위해 혼자 방한(訪韓)하지만 실제로는 필름 편집자, 음향효과 담당자와 함께 방한했다.
 
  또 1980년 5월 20일 화요일 아침 일찍 ‘김사복’이 모는 서울택시를 타고 광주로 내려갈 때는 도쿄에서 온 또 한 사람의 독일인 취재기자가 동승했다.
 
  영화에는 힌츠페터 외에 외신기자가 보이지 않는다. 독일 기자만 계엄군을 뚫고 광주에 몰래 들어온 것처럼 설정돼 있다. 그러나 당시 광주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외신기자가 다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시민들은 외신기자를 열렬히 환영했는데 그 이유는 국내 언론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 때문이었다. 국내 언론은 탄압과 검열로 광주 실상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5·18 당시 광주의 실상을 해외에 첫 타전한 이는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 심재훈 기자였다. 심 기자는 5월 21일 프랑스 《르몽드》 기자인 필립 퐁스(Philippe Pons)와 함께 서울 조선호텔에서 렌터카를 빌려 광주로 향했다.
 
  그들이 광주에 도착하자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변의 군중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영했다”고 한다. 심 기자는 훗날 “우리가 개선장군 같았다”고 회고했다. “시민군의 협조는 놀라웠고 우리는 자동차의 외부를 하얀 종이로 빈틈없이 두른 다음 외신 취재 차량임을 표시했을” 정도였다.
 
  취재를 마친 심 기자 일행은 광주 시민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전남 화순을 거쳐 순천으로 갔다. “기사를 송고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순천”이라는 시민군 공보담당자의 권고를 따랐던 것이다. 순천으로 가는 길에 “화순 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을 차량에 가득 싣고 나오는 시민군과 마주치기도 했고 복면을 쓴 채 무장한 시민군들이 도망치는 경찰을 붙잡아 차에 태우고 질주하는 모습도 보았다”고 한다.
 
  순천에서 보낸 두 기자의 광주발 기사는 《뉴욕타임스》와 《르몽드》의 1면 톱을 장식했다. 5·18 광주의 참상이 최초로 전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심재훈의 〈광주사건은 폭동이 아니라 봉기였다〉 참조)
 
 
  3. 계엄군 통제를 뚫기 위한 거짓말
 
1980년 5·18 당시 광주 현지에 내려가 취재 중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경험 많고 노련한’ 운전사 김사복과 힌츠페터는 5월 20일 광주로 내려갔다. 고속도로 입구에 ‘출입통제’라는 표지가 있었지만 “김사복은 그걸 무시한 채 텅 비어 있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고 한다. 군데군데 우회로 표지가 계속 나타났지만 김사복은 광주로 곧장 달렸다.
 
  광주로부터 30km 떨어진 호남터널에 이르렀을 때 중무장한 계엄군과 수십 대의 탱크가 그들을 막았다.
 
  결국 그들은 광주로 우회하는 ‘샛길’을 찾아 헤매야 했다. 모든 길이 통제된 상황이었다. 영화 속 ‘김만섭과 피터’는 한 가지 꾀를 내어 계엄군을 속이는데 “비즈니스(수출) 때문에 광주에 가야 한다”고 둘러댄다. 그러나 실제 인물 ‘김사복과 힌츠페터’는 “직장 상사를 잃어버려 그를 찾으러 광주에 들어가야 한다”고 계엄군을 속였다.
 
  〈우리 팀(독일 공영방송 NDR-ARD TV 도쿄지국·편집자)의 책임자는 사실 우리 여행(광주 취재·편집자)이 준비 중일 때 도쿄 사무실을 빠져나온 이래로 이 여행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렸던지 군인들은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직장 상사를 찾기 위해 광주로 들어가려 한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우리는 그 어려운 관문을 마침내 통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p.125, 《5·18 특파원 리포트》)
 
  그러나 광주로 가는 낯선 국도 역시 모래와 돌, 여러 파편들이 부분 부분 뒤덮여 있었을 정도로 길이 거칠고 험했다. 그러나 노련한 김사복은 “어렵지 않게 장애물을 통과”했다. 그는 영화 속 김만섭의 대사처럼 “돈 워리, 돈 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김사복-힌츠페터’보다 하루 늦은 5월 21일 광주로 갔던 《뉴욕타임스》 심재훈 기자와 《르몽드》 필립 퐁스 기자는 ‘서광주 톨게이트’로 당당히 광주로 들어갔다. ‘김만섭-피터’가 고속도로 통행을 금지당해 ‘샛길’과 ‘국도’로 광주에 진입했던 것과 대조된다.
 
 
  4. 영화 속 ‘김만섭과 피터’를 쫓는 ‘사복 조장’이 실제 인물?
 
2003년 5월 18일에 방영됐던 KBS 다큐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에 출연한 위르겐 힌츠페터.
  영화 속 ‘사복 조장’(최귀화)은 시종 김만섭과 피터를 뒤쫓는다. 유일하게 영화 속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악한이다. 몽둥이와 총으로 비무장 시민들을 위협하고 때린다. 그리고 광주 실상이 담긴 피터의 촬영 필름을 빼앗기 위해 두 사람을 추적한다.
 
  그러나 영화와 달리 5·18 당시 실제로 김사복과 힌츠페터를 쫓는 군인이나 경찰은 없었다. ‘사복 조장’은 그저 영화 속 악역일 뿐이다. 군인들이 외신기자들을 죽였거나 취재를 방해하고 거칠게 다루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松永成太郞)의 증언에 따르면, 5월 26일 택시를 타고 광주에 들어갔는데, 광주와의 경계선에 군인이 검문을 하고 있었고 그가 여권을 보여주자 별 문제 없이 통과가 됐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헨리 스코트 스톡스(Henry Scott Stokes) 서울특파원 역시 5월 26일 동료 심재훈 기자와 《르몽드》 필립 기자와 광주에 갔다는 기록도 있다.
 
  스톡스에 따르면, 광주에 당도하기 전 여러 차례 군 검문소를 지났고, 계엄 군인들이 차를 세워 서류를 훑어보았으며, 이들 일행이 기자라는 것을 설명했지만 군인들은 “한번 흘깃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스톡스가 광주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도 샛길이나 국도 대신 고속도로로 갔다. 물론 광주 톨케이트에서 계엄군 바리케이드를 만났다. “이 방어벽에는 정부 편에서 배치한 젊은 군인들 한 떼가 미제 가죽끈이 달린 전투복 차림에 따분한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계엄군이 외신기자 일행을 위협적인 얼굴로 대했다면 ‘따분한 얼굴’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외신기자를 향해 “공수부대원들이 M16을 갈겼다”는 증언도 있다.
 
  AP통신 테리 앤더슨(Terry Anderson)은 5월 27일 광주 취재 도중 공수부대원 두 명이 그를 향해 M16을 쐈다고 증언했다. “내 귀에서 겨우 몇 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첫 번째 탄환이 맞았다”고 했다. 그의 증언록(〈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며〉)에 따르면 “정부는 분명히 이 여관(앤더슨이 머물던 숙소·편집자)에 외국 특파원들이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는데, 아무도 군인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지 않았던가, 아니면 그들이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쏘아대는 것 같았다”고 주장했다.
 
 
  5. 공수부대원들의 ‘집단발포’, 진실은?
 
부상당한 시민이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 중인 모습.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했다.(KBS 영상 캡처)
  공수부대원들의 집단발포에 대한 시민들의 증언은 영화 러닝타임이 1시간 40분이 지날 즈음, 병원 신(scene)에서 나온다. 다음은 병원 신에 나오는 대사다.
 
  “여기 좀 봐주서라. 총 맞았어라.”
 
  “아이고, 성님. 어쨌었게라, 잉. 이것들이 참말로 사람들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작정을 해렸구만요, 잉.”
 
  “공수놈들이 막 총을 갈겨 버렸다니께요.”
 
  “총 맞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니께요.”

 
  장면이 바뀌고 전남도청 앞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집단발포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장면이 영화의 하아라이트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비무장 시민들이 슬로 장면으로 클로즈업되고, 콩 볶는 듯한 총성과 함께 장중한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집단발포 장면은 1시간 42분·44분· 46분·47분쯤 계속 이어진다. 시민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구조하러 가면 다시 공수부대원들이 집단발포하는 식이다.
 
5·18 당시 광주 시민군의 모습.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했다.(KBS 영상 캡처)
  이와 관련,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는 2003년 5월 18일에 방영됐던 다큐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는 바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지칭한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이 한국은행 그쪽 … 한국은행인가 제일은행인가 하는 장소에서, 계엄군이 앉아쏴 자세로 도열해 있고 말하자면 정조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길로 나서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몇 명이라고 해야 할까. 1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와서, (공수부대원들이) 정조준을 하고 있는 그 앞에서, 막 태극기 흔들며 ‘전두환 계엄군 물러가라’고 악담 섞인 구호를 외치면, 그러면 공수부대원들이 정조준해 쏩니다. 대여섯 사람이 쓰러지면 (시민들이 총에 맞은 이들을) 끌어내요. 그러다 다시 태극기를 흔드는 이들이 등장하면 다시 총성이 울리고 대여섯 사람이 쓰러지고 또 끌어내고 … 이런 상황이 몇 번이고 되풀이됐어요. 그 장소에서 얼마나 죽었느냐는 확인이 안 됩니다.”
 
  힌츠페터는 훗날 광주를 떠올리며 “당시 시민군의 구호는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였다. 그들은 정말 죽을 준비가 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힌츠페터의 이 증언이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상황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광주의 비극을 담은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영상이 독일 공영방송 NDR-ARD TV를 통해 보도되는 모습이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를 수사한 검찰의 판단은 이 영화나 김영택 기자의 증언과는 사뭇 다르다. 다음은 1995년 작성된 검찰의 수사기록 중 일부다.
 
  〈… 5월 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 경찰 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공격에 대응하여 돌진하는 차량에 발포하였고, 그 와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와 같은 발포 경위에 비추어 위 발포가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임.
 
  또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중략) 13:00경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 공격해 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하여 첫 발포가 있었고, 다시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 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하였으며, 그 시각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였고,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하였던 공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 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한 사실이 확인되었음.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 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특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
 
  영화 〈택시운전사〉의 집단발포 장면과 김영택 기자의 증언은 비슷하지만 뉘앙스는 확실히 다르다. 〈택시운전사〉는 평화 시위를 하던 시민을 향해 공수부대원들이 ‘앉아쏴’ 자세로 M16을 발포한 것으로 극화(劇化)했고, 김 기자는 “시민들이 공수부대원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악담 섞인 구호를 외치면” 이에 자극받은 공수부대원들이 집단발포한 것으로 증언했다.
 
  그러나 검찰은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으로 발포한 것”으로 판단했다.
 
 
  집단발포, 엇갈리는 증언들
 
1980년 5월 20일 광주민주화운동 사흘째 날의 긴장감 도는 금남로. 진압군과 학생 시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운 채 대치하고 있다.
  그러나 공수부대 현장 지휘관의 집단발포 증언도 존재한다. 지난 5월 15일 《광주일보》는 〈나도 쐈다. 총알 떨어질 때까지 …〉 제하의 단독 기사를 통해 익명의 지휘관을 인터뷰했다.
 
  “5·18 당시 특전사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지대장으로 광주에 투입됐다”고 밝힌 윤성식(가명·60·당시 중위)씨는 “80년 5월 21일 낮 공수부대의 첫 발포는 시위대 버스가 금남로에서 우리가 있던 도청 방향으로 달려들 당시 일어났다”며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무릎쏴, 엎드려쏴’ 자세로 버스 운전기사와 버스 바퀴 등을 조준 사격했다. 당시 시민들은 총을 먼저 쏘지도, 총을 들고 있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 일을 무척 후회한다. 집단 발포가 있기 전 대대본부 행정병 2〜3명이 돌아다니며 장교와 부사관 등 간부들에게 실탄을 분배했다. 우리 63대대에 간부가 100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분배된 실탄은 2000발 안팎이었을 것이다. 실탄 분배의 형식과 의미에 미뤄 이는 상부의 명령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당시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아 (지휘부에서) 도청 철수명령을 내려주길 바랐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철수명령이 내려졌으면 발포도, 시민 희생도 없었을 것이다.” …〉(5월 15일자 《광주일보》 기사 요약)
 
  윤씨의 증언은 김모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의 1995년 5월 29일 검찰 진술조서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1995년 2월 3일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밝힌 내용과 배치된다. 다음은 검사와 김 전투발전부장의 문답이다.
 
  〈… 문(검사): 진술인이 사후에라도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집단발포하게 된 발포명령자는 누구였는가요.
 
  답(김모 전교사 부장):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병력들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위대 쪽에서 장갑차와 버스, 트럭 등이 돌진하여 병력이 그에 치여 사상자가 발생하자 그때부터 병력에 의한 사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전에 병력들에게 실탄이 분배된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현장에서의 사격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사격명령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격명령은 통상 사전에 권총소리라든지 신호탄 발사라든지 하여간 어떤 신호를 특정해 두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그 신호와 동시에 사격을 하는 것인데 당시 현장에서 그러한 신호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
 
 
  광주 5·18의 진실은 …
 
  또 이희성 사령관은 “시위 군중의 공격으로 인해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신문조서 문답이다.
 
  〈… 문(검사): 도청 앞에서 발포를 하게 된 상황은 어떠하였는가요.
 
  답(이희성): 시위 군중들의 공격으로 인해 위급한 상황이 되어 발포한 것입니다.
 
  문: 당시 발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는가요.
 
  답: 자체 보호를 위하여 긴요하지 않으면 발포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므로 시위 군중들이 차량과 장갑차 등으로 군 병력을 공격해 옴에 따라 자위를 위해 발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당시 계엄군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던 사실이 있는가요.
 
  답: 계엄군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적은 없으나 5.21.19:30경 위수령 제15조 제1항에 의거,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면서 그 요건과 절차에 관한 공문을 하달한 바 있으며 발포명령이 없더라도 사병 개개인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발포를 포함한 정당방위적 또는 공격적 자위수단을 강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 그렇다면 당시 계엄군의 발포가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사병 개개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발포가 이루어졌다는 것인가요.
 
  답: 예, 그렇습니다. …〉
 
  ‘실화의 재구성’이라고 밝힌 영화 〈택시운전사〉는 공수부대원들의 집단발포를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집단발포의 진상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군인과 시민·기자의 증언과 검찰의 수사결과가 일치하지 않는다. 진실은 무엇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 차례 “옛 전남도청 인근 전일빌딩 헬기사격을 포함한 5·18 민주화운동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지금 이 시점에서 가능한 조사만이라도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광주 5·18의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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