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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최순실 스캔들

최태민 전기(傳奇) 1979. 10. 26부터 1994. 5 사망까지

박근혜 주변을 유령(幽靈)처럼 떠돌아다니는 최태민의 그림자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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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동조사본부 조사 후 강원도 21사단에 격리됐던 최태민
⊙ 선우련 전 공보비서관 “최태민이 영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 전두환에게 부탁
⊙ 전두환, “최태민 문제는 나도 해결하지 못하겠다”
⊙ 군부대에서 풀려난 최태민은 독일로 갔나?
⊙ 육영재단 사태 등에 다시 등장하는 이름 최태민
⊙ 전두환 미납 추징금 강제 환수는 최순실의 복수극인가
⊙ 근혜, 근령, 지만 3남매 갈등의 원인이 된 최태민
⊙ 세월호 사건 발생일에 ‘청와대 굿판’은 없었다
  영애(令愛)였던 박근혜 양이 아버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국장(國葬)을 마치고 서울시 중구 신당동 62-43번지 사저(私邸)로 돌아온 때는 1979년 11월 21일이다. 11월 3일에 있었던 국장을 마친 지 18일 만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7세. 청와대에서 산 기간이 훨씬 길었던 그에게 신당동 사저는 참으로 낯설었을 것이다. 낯설어서 더 고립무원을 느꼈을 그였지만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청와대에 머물렀을 때나 집으로 돌아와서도 최태민이라는 이름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유령처럼 배회했다고 할까.
 
  1994년 5월 최태민이 사망하기 전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중요한 시기마다 최태민이라는 이름은 박근혜의 주변을 유영(游泳)했다. 동생 근령씨에게 이사장직을 물려줘야 했던 1987년 9월부터 1990년 11월까지 3년여 지속된 ‘육영재단 사태’ 때 최태민이라는 이름은 ‘박근혜 이사장을 배후 조종하는 인물’로 ‘공식’ 등장했다.
 
  최태민이 죽은 후에도 아버지 사후 18년간의 정치적 은둔 기간을 접고 박근혜가 정치에 뛰어든 몇 달 후 치러진 1998년 4월 대구・달성 보궐 선거에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한나라당 경선에서, 그리고 2012년 대선에서 그의 이름은 박근혜를 공격하는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그만큼 박근혜의 주변을 맴도는 최태민이라는 이름은 반대 세력들이 보기에는 어둠 그 자체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최태민 비리 조사가 있었던 1977년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었던 선우련(鮮于煉)씨는 박 대통령의 국장이 끝난 후 근혜 양이 옮겨갈 신당동 사저 수리 현장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당시 그는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전두환(全斗煥)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만났다고 한다.
 
  선우련씨는 이때의 이야기를 비망록에 남겼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국장이 끝난 직후에 근혜 양 등이 신당동 집으로 옮기기 위해 집수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신당동 집에 갔다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만났다. 그는 신당동 집수리를 직접 감독하고 있었다.
 
  “전 장군, 내가 부탁할 것이 있소. 3년 전에 박 대통령이 나에게 최태민을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는데, 그게 몇 달 못 가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소. 최태민이 다시 영애를 따라다니는 것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깨끗하게 처단해야 했었는데, 영애가 부탁하는 통에 내 마음이 아파 보고를 못 하고 오늘에 이르렀소. 그게 이제는 박 대통령의 언명이 아니라 유언이 되고 말았소. 합수본부장이니 그 힘으로 최태민이 영애에게 접근 못 하도록 해주시오. 방법은 전 장군이 알아서 해주시고.”
 
  그런 부탁을 하고 난 이틀 뒤에 나는 다시 전 장군을 만났다.
 
  “선우 의원, 최태민 문제는 나도 해결하지 못하겠습니다. 선우 의원 얘기를 듣고 영애에게 최태민 처리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 말씀을 드렸더니, 영애가 ‘최태민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나한테 맡겨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각하도 계시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영애의 부탁을 거역하겠습니까.”
 
  “여보, 영애가 최태민에게 현혹돼 그를 거세하라는 건데 그걸 영애에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전 장군의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면박을 주었다. 몇 달 뒤 확인해 보니 전 장군은 결국 최를 강원도 산골로 쫓아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비망록에 따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태민 문제는 나도 해결하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그는 그 문제 해결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1. 최태민은 10·26 후 감옥에 갔나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10·26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5공화국 등장 후 실세로 불리기도 했던 허화평(許和平)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은 최근 《월간조선》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했다.
 
  “10·26 후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합수부)장의 지시로 최태민에 대한 조사를 했다. 사기, 횡령 등의 비리 혐의가 발견됐다고 들었다. 조사 후 강원도 전방에 있는 21사단으로 보내 6개월간 사회와 격리시켰다. 삼청교육대로 보낸 것은 아니었다. 격리시킴으로써 세상 경험이 없는 박근혜를 보호한다는 차원이었다.”
 
  당시 보안사에 근무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이었던 이학봉(李鶴捧) 전 의원도 《신동아》 2007년 6월호와의 인터뷰에서 허 이사장과 같은 취지의 증언을 했다.
 
  이 전 의원은 “합수부에서 최태민 목사를 조사했나” 하는 질문에 “조사했다”고 하면서 “그를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삼청교육대는 아니다. 조사해 보니 최태민씨는 조용하게 자숙(自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강원도에 오래 두지는 않았다”고 했다.
 
  최태민을 다룬 일부 언론이나 간행물 등은 최태민이 합수부의 조사를 받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1년 이상 있었던 것으로 보도하거나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합수부의 최태민 조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허 이사장이나 이 전 의원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최태민은 격리 차원에서 전방 부대에 6개월간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삼청교육대 교육이 1980년 8월부터 본격화한 점을 감안하면 최태민에 대한 격리 조치 해제는 80년 8월 이전일 것으로 추론된다.
 
  허 이사장과 이 전 의원의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다. 허 이사장은 “합수부 조사에서 최태민씨의 사기, 횡령 등의 비리 혐의가 밝혀졌다고 들었다”고 증언했지만 이 전 의원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중정(중앙정보부) 수사내용에는 최태민 목사가 여러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하는 질문에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고 답한다. 인터뷰 시점에서 27년 전의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아닐 수도 있지만 전후 맥락을 보면 최태민의 비리가 없었던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하지만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를 추적한 《태자마마와 유신공주》(김수길 저)라는 책자에서는 《동아일보》 1990년 11월 23일자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최태민은 1980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돼 변호사법 위반,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태민의 비리 혐의를 부인했다. 다음은 재선 의원 시절이던 2002년 《월간조선》 4월호와의 인터뷰 중 관련 대목이다.
 
  —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선우련씨의 증언에 따르면, 최태민씨가 도(道)경찰국장, 도지사에게까지 호통을 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고, 재벌 총수들이 최씨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자신에게 청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죠. 5공 정권이 끝나고 청문회를 했잖아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20년이 흘렀어요. 온갖 이야기를 끌어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 중상모략을 할 수 있습니다. 들어보면 ‘그러냐’ 이럴 수도 있어요. 문제는 그게 사실이냐는 거예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최 목사가 큰소리쳐서 권력을 휘두르고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면, 벌써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했다고 얘기가 다 나왔을 겁니다. 최 목사에게 사기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오잖아요. 그것 하나가 백 마디 얘기를 다 해주는 것 아닌가요.”
 
  — 최씨의 횡령건수가 14건, 2억2000만원이라는 합수부 수사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보내든지 책임을 물었겠죠. 말도 많고 모함도 많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권력이 무서워서 그랬다 쳐요. 그 후 저도 청와대에 있다가 반대편에서 얼마나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 저한테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당했다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이상의 사례들을 정리하면 최태민이 비리 혐의로 합수부의 조사를 받은 것은 맞지만 구속까지는 안 됐던 것 같다. 대신 최씨가 감옥생활이나 다름없이 군부대에 격리돼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2. 박근혜는 전두환에게 최태민 석방을 요청했나
 
2013년 7월 16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에 대해 강제집행에 나선 검찰 관계자들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 전 대통령 사저 내 재산을 압류한 뒤 차량에 싣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강원도 전방 부대에 6개월간 격리돼 있던 최태민은 어떻게 풀려나게 된 것일까. 항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의 격리 조치 해제를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박 대통령은 이를 부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월간조선》 2002년 4월호와 인터뷰한 내용 중 관련 대목이다.
 
  — 최태민 목사가 신군부에 구속돼서 강원도 인제로 쫓겨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을 상대로 석방운동을 하셨나요.
 
  “그런 적이 없어요. 제가 말한다고 됩니까. 그때 ‘유신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최 목사를 한 번 더 조사했지만, 혐의가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양반이 감옥에 간 게 아니고 무슨 군부대에 가 있었어요. 문제가 있었으면 진짜 감옥에 갔든지, 돈을 물어냈든지 그렇게 됐겠죠.”
 
  다음은 허화평 이사장의 증언이다.
 
  “최태민의 일로 박근혜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부탁의 말을 전했을 수는 있지만 나를 거친 것은 아니다. 했다면 다른 사람을 거쳐서였을 것이다. 10·26 후 박근혜 영애가 있는 신당동의 사저를 찾아간 일이 있다. 영애는 쓸쓸하게 혼자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영애에게 최태민과의 관계, 새마음봉사단을 정리해 달라고 했다. 정리하지 않으면 박정희 대통령에게 누(累)가 되고 영애에게도 해가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런 내 말에 대해 영애는 최태민에 대한 말은 없이 ‘새마음봉사단은 국가를 위한 단체인데 왜 해체를 해요?’라고 말했다.”
 
  적어도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의 대행자로 자신을 찾아온 허화평 이사장에게 최태민 구명을 요청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새마음봉사단은 80년 11월 강제 해산됐다.
 
  당시 정보기관에 있었던 한 인사는 최근 사석(私席)에서 허 이사장과는 다른 말을 했다.
 
  “합수부 조사에서 비리가 드러난 최태민의 현금과 주식 등을 압수했다. 하지만 땅 등 부동산 일부는 처리하지 못했다. 최태민으로부터 압수한 현금과 주식 등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최태민을 삼청교육대로 보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좌우간 군부대로 보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근혜 양이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군부대에 격리당한 최태민을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최태민은 풀려났다. 그 후 최태민은 통일교의 도움을 받아 독일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석에서 이 5공 시절 정보기관에 있었던 인사와 같은 증언을 하는 사람들은 꽤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공식적인 인터뷰 요구에는 응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태민 석방 요청이 있었다는 설(說)이 그냥 설로 그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에 ‘박근혜의 최태민 석방 요청’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석방을 요청한 기록은 김계원 전 비서실장에 관한 것뿐이다. 5공 시절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박철언 전 의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김계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가석방 문제는 박근혜 양의 건의도 있고 하니 형 집행 정지로 석방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3. 전두환 미납 추징금 강제 환수는 최순실의 복수극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허화평 이사장은 11월 2일 TV 조선 〈강적들〉에 출연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2013년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미납 추징금 강제 환수에 나서게 된 배경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많은 언론이 지금까지 왜 전두환 대통령과 박근혜 현 대통령이 원수가 되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낸 자서전에는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5공 때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덕분에 대통령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인간적 섭섭함은 있을 수도 있다.”
 
  이어서 허 이사장은 최태민 이야기를 꺼낸다.
 
  “지금 보니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 뒤에서 여러 가지를 했다면, 최순실의 원수는 전두환이다. 전두환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최태민)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쫓아냈기 때문이다.”
 
  최순실이 아버지 최태민에 대한 복수심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복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이 2016년 5월 24일자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배경도 최태민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허 이사장은 복수극의 주인공을 최태민의 딸인 최순실에게 두고 있고 김충립씨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두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다음은 그 인터뷰를 부분 발췌한 것이다.
 
  — 이학봉 전 단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은 언제였나.
 
  “2011년 1월이었다. 이학봉 전 단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얘기했다. ‘김충립 말에 의하면 박근혜 후보가 각하에게 엄청난 오해를 가지고 있고, 광주 문제도 빨리 풀라고 한다.’ 그랬더니 전두환 대통령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학봉 전 단장이 ‘사실’을 얘기했다. 이런저런 잘못 8가지를 말이다.”
 
  — 그 잘못이 뭔지 얘기해 달라.
 
  “박근혜 대통령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첫째, 5·18이 끝나고 5월 28일 부정축재 조사 대상 35명을 발표할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넣었다. 돌아가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넣은 것이다. 이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니라 이학봉 전 단장이 한 일이다. 돌아가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명단에 넣었다는 것은 곧 박근혜 양의 부정축재를 조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나 억울하겠나? 아버지도 죽었는데 부정축재로 조사까지 받아야 한다니….
 
  둘째, 최태민 목사를 조사했다. 최태민 목사를 서빙고에 잡아놓고 일주일 정도 강도 높게 조사했다. 박근혜 양과의 루머도 조사했다. 김재규(8대 중앙정보부장)가 죽기 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박근혜 양과 최태민 목사 간에 부정이 많다고 보고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혼났다’고 얘기했지 않나.”
 
  — 최태민 목사 조사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완전히 찍힌 것인가.
 
  “보통 찍힌 게 아니다. 김재규가 박근혜 양과 최태민 목사 간에 비행이 많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것을 묵살했다.(중략) 전방 부대에서 풀려난 최태민 목사가 그동안 서빙고에서 조사받은 일, 전방 부대에 감금된 일들을 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불었다. 그러니 박근혜 양이 ‘우리가 무슨 죄가 있나? 김재규가 우리를 씹은 것인데, 이학봉이 다 조사해서 죄가 없는데도 왜 최태민 목사를 죄인처럼 가둬놓느냐’고 감정이 틀어졌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복수극’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출판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아버지가 이루셨던 일을 폄하하고 무참히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무덤 속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인신공격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는 등의 말로 5공 세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판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가장 최근에 예방한 때는 2004년 8월 한나라당 대표 취임 직후다. 그 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확정 후에는 전 전 대통령을 찾지 않았다.
 
  2012년 대선 후보 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대리인 격인 인사가 연희동을 방문해 “박근혜 후보가 지금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된 첫날 행보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과 대조된다.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과도 비교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강제 환수가 본격화한 것도 박근혜 대통령의 관련 발언 이후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6월 11일 국무회의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전직 대통령 추징금 문제는 과거 10년 이상 쌓여온 일인데 역대 정부가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제야 새 정부가 의지를 갖고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이 발언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을 환수하기 위한 검찰수사가 시작됐던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만약 전두환 전 대통령 미납 추징금 강제 환수에 개인감정이 개입했다면 최태민 문제보다는 박 대통령의 5공에 대한 섭섭함이 작용했을 개연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4. 최태민은 군부대에서 풀려난 후 통일교의 지원으로 독일로 갔나
 
  앞서 말한 5공 시절 정보기관 관계자는 “최태민이 군부대에서 풀려난 후 통일교의 도움을 받아 독일로 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또 “독일로 간 최태민은 그곳에서 수년간 장기 체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소한 드러난 공식 자료들을 바탕으로 볼 때 최태민이 군부대에서 풀려난 후 독일로 가서 수년간 장기 체류를 했다거나 통일교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1980년 초중반 군부대에서 풀려난 후 최태민의 이름이 한동안 사라졌다가 대중에게 다시 회자되기 시작한 시기는 1987년 육영재단 사태가 시작될 때인 것으로 보아 한국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군부대에서 풀려난 직후에도 박근혜 대통령과 계속 접촉했다는 주장도 있다. 동생 근령씨의 주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당동 사저에서 1982년 8월 성북동으로 이사한다.
 
  《월간조선》 2010년 8월호에는 박근령씨 인터뷰 기사가 게재됐는데 당시 근령씨의 요청으로 최태민과 관련된 부분은 싣지 않았다. 당시 녹취록을 근거로 ‘조선펍’이 11월 1일자에서 그때 빠졌던 내용을 소개했다. 그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다.
 
  — 성북동 시절에도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 전 대표의 일에 관여했나.
 
  “새마음봉사단 일과 관련해 거의 매일 의논을 한 걸로 안다. 그런데 육영재단 사건 때문에 후에 들은 구호를 보면 최태민 목사가 오해 받을 일들을 했다는 것이다. 전횡(專橫)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 (최태민 목사가) 성북동 집에 여러 차례 드나들었나.
 
  “최 목사가 성북동으로 직접 오지는 않았고 측근들을 통해 편지 등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언니가 최 목사를 만나기 위해 제가 직접 차를 운전해 최 목사 측근의 집으로 동행한 적이 몇 번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시기는 1982년 10월 27일이다. 1990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른바 ‘육영재단 사태’는 3년 이상을 끌며 진행됐다. 육영재단 사태는 1987년 9월부터 시작됐는데 당시 육영재단 직원들은 재단 운영에 불만을 품고 집단행동을 벌였다. 이때 직원들이 내건 피켓 등에는 “최태민 목사와 그의 딸(순실)이 재단 운영에 관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태민의 딸 순실은 당시 육영재단이 발행하던 《어깨동무》 등의 편집에 간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직원들이 이들 부녀의 전횡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아 사태가 발생하기 오래전부터 두 부녀가 육영재단 일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초기부터 최태민이 재단 운영에 간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수년간 독일 장기 체류는 시간상 불가능한 일이다.
 
  육영재단 사태를 심층 보도했던 《여성중앙》 87년 10월호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 해산된다. 최태민과 박근혜는 이후로도 관계를 지속했다. 박근혜가 1983년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최태민의 전횡 의혹이 다시 등장한다. 이사장은 박근혜였지만 최태민에게 보고해야 박근혜의 결재를 받을 수 있었고 그의 딸 최순실도 당시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통일교가 최태민의 독일 체류에 도움을 주었다는 정보기관 관계자는 그 이유를 “같은 사이비 이단 세력으로 취급받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태민에 대해 비판적인 추적과 그 추적의 기록을 자신이 발행하던 《현대종교》 1988년 5월호에 기사로 남긴 탁명환 종교문제연구소장은 최태민이 통일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다음은 탁 소장의 기사 중 ‘통일교엔 알레르기성 반응 보여’라는 소제목의 통일교와 관련한 부분이다.
 
  최씨는 통일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였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것들, 아무도 함부로 건들 수 없다면 우리가 해야지요. 우리 십자군을 동원해가지고 규탄 데모를 하고 적극적인 저지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로니컬하게도 구국선교단이 통일교 계통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아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리하여 1976년 7월 31일, 《크리스찬신문》에 낸 광고에서 ‘또한 우리 구국선교단과 통일교를 동일시하거나 마치 유관(有關)기구같이 오해하는 풍설이 나돌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으나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우리 대한구국선교단에 대해서 운운하는 인사에게는…’라고 하여 강변하고 있다.
 
  최태민씨는 아무튼 통일교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오히려 그의 활동이 계속되었더라면 통일교는 곤욕을 치렀을 것이라는 짐작은 평소 그의 언동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훗날 최태민과 통일교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탁명환 소장이 기사를 쓴 1988년 이전까지 통일교와 최태민은 밀접한 관계를 갖지는 않았던 것 같다.
 
 
  5. 박근혜 대통령은 80년대에 독일에 자주 갔거나 장기 체류했나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를 ‘사적(私的) 관계’로 해석하는 이들은 최태민이 군부대에서 풀려난 후 함께 독일로 갔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놓기도 한다. 이 설은 최태민이 독일에 장기 체류했을 가능성이 작았던 것 이상으로 더 작다.
 
  비록 박근혜 대통령이 부친 서거 후 은둔의 세월을 살기는 했지만 이는 ‘정치적 은둔’이지 사회적 은둔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러난 공식적인 기록만 봐도 그렇다. 박 대통령은 1980년 3월 영남학원 이사로 취임했다가 다음달인 4월에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그해 11월에는 학내분규로 영남학원을 사퇴하지만 1982년 10월에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7년간 재임한다. 당시 직원들이 “박근혜 이사장이 주 2회 결재했다”는 증언을 하는 걸 보면 박 대통령은 최소 주 2회는 육영재단 사무실에 출근했다는 얘기가 된다. 적어도 80년대에는 해외에서 장기 체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오랫동안 수행했던 인사도 박근혜 대통령이 1980년대에 독일에 체류했을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는 “80년대 초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면서 “독일을 다녀왔으면 여러 차례 식사 중에 단 한 번이라도 언급이 있었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비서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다른 인사도 “1980년대 초중반에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을 왕래하거나 체류한 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역시 80년대 초반 박근혜 대통령과 자주 접촉했던 인물이다.
 
 
  6. 최태민은 조직을 만드는 데 귀재(鬼才)였나
 
구국선교단 시절의 최태민.
  박근혜 대통령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1988년에는 부모님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 및 기념관 건립 추진위를 발족시켰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했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추모하는 영화 〈사랑의 등불〉을 육영재단이 운영하는 어린이회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1988년 한 해 동안 전국에서 15만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1990년 6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담은 《겨레의 재단》을 간행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국방, 외교, 과학기술, 새마을 등 8장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담은 이 책은 520쪽에 달한다.
 
  89년에는 《근화보》라는 월간신문을 발행했다. 창간호는 24면에 2만 부를 찍었다. 유신 말기에 조직된 ‘새마음봉사단’을 연상케 하는 ‘근화봉사단’도 조직해 단원 배가(倍加) 운동을 벌였는데 1989년 한 해 동안 단원 목표가 50만명이었다고 한다. 새마음봉사단은 유신시절 최태민이 만든 ‘구국선교단’이 모체(母體)다. 79년 5월 출발한 새마음봉사단의 총재는 박근혜 대통령이었고 최씨는 명예총재였다. 근화봉사단을 조직하는 일을 맡아서 한 이가 최태민이었다.
 
  최태민이 구국선교단을 만든 때는 1975년 4월이다. 이 단체는 1976년 12월 구국봉사단으로, 1979년 5월에는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존속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태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 목사는 청와대 시절 새마음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1988년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왔을 뿐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기념사업회는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 및 기념관 추진위’다. 이 기념사업회가 ‘근화봉사단’이라는 조직을 만들 때 최태민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최소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의 조직 능력을 믿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7. 박근혜가 육영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이유는 최태민 때문이었나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 사진=육영재단
  박근혜 대통령 3남매 간의 갈등이 알려진 육영재단 사태는 1987년 9월에 시작됐다.
 
  육영재단은 1969년 4월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1970년 7월 서울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개관, 이때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도 인수했다. 1975년 10월에 광진구 능동으로 이전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곤란을 겪던 재단은 박근혜 대통령이 1982년 10월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표면적으로는 잘 돌아가는 듯했다. 그런데 1987년 9월부터 직원들이 집단행동에 들어가며 최태민 문제를 제기하는 등 내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시 최태민은 육영재단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89년 근화봉사단 조직 직전에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 및 기념관 추진위’의 고문 자격으로 재단 업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1월 8일자로 발행한 《주간경향》은 당시 육영재단에서 일했던 사람의 증언을 통해 최태민 일가가 재단 문제에 1983년부터 관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최씨 일가의 전횡이 1983년 최태민의 여동생, 즉 최순실의 고모가 들어오면서 시작된 것으로 기억했다”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태자마마와 유신공주》는 육영재단과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은 최태민을 겨냥하여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일주일 동안 농성을 하였다.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 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의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순희(박 대통령의 제자, 숭모회 회장)씨는 “최태민씨가 자기의 측근들로 육영재단의 이사진을 교체하여 박근혜를 속이며 전횡을 일삼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뒤로는 ‘박근혜는 내 로봇이다’는 음해를 하고 다녔었다”고 말했다.
 
  박근혜가 출근할 때마다 최태민이 따라다녔고, 어느 누구도 최태민이 입회하지 않으면 박근혜를 만날 수 없으며, 모든 결재는 최태민을 통해야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태민은 별의별 사람들을 다 데려와 육영재단의 간부급으로 임명하고, 기존 직원 140여 명을 최태민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해고하였다고 한다.
 
  최의 다섯째 딸 최순실도 그녀가 운영하는 초이유치원과 자매결연을 하고, 그 핑계로 어린이회관에서 세력을 과시하였다.
 
  부녀가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한다고 직원들과 마찰이 심했다.
 
  1990년 10월 28일 육영재단 직원 100여 명이 모여 “최태민 물러가라”는 시위를 벌였다.

 
  육영재단 사태는 박근혜 당시 이사장을 지지하는 근화봉사단과 동생 박근령씨를 지지하는 숭모회의 유인물 공방전으로도 이어진다.
 
  〈박근령씨는 숭모회라는 이름의 음모단체를 동원, 70만 근화봉사단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일구어온 육영재단과 기념사업회의 운영권을 찬탈하려 하고 있다.〉(근화봉사단)
 
  〈희대의 사기꾼인 최태민 근화봉사단 고문이 박근혜 이사장을 배후에서 조종, 육영수 여사가 동심을 키우기 위해 설립한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하고 있다.〉(숭모회)

 
  박근혜 당시 이사장의 형제인 근령씨와 지만씨 역시 육영재단 사태의 원인을 최태민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은 ‘오마이뉴스’가 2007년 8월 입수해 공개한 탄원서 형식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박근령·박지만씨 남매가 1990년 8월 14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들 남매는 “최태민씨 손아귀에서 저희 언니와 저희들을 건져주십시오” 하는 내용의 호소를 하고 있다. 중요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진정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대통령의 유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고 또 함부로 구원을 청할 곳도 없었습니다.”
 
  “최씨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언니인 박근혜의 청원(최태민씨를 옹호하는 부탁 말씀)을 단호히 거절해 주시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묘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주셔야만 최씨도 다스릴 수 있다고 사료되며 우리 언니도 최씨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자신의 사퇴가 최태민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한국일보》 11월 8일자는 박 대통령의 이사장직 사퇴와 관련한 당시 발언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최근 건강이 악화되고 심신이 피곤해 물러난 것뿐이다. 사퇴의 진의(眞意)를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지 못한 데서 물의가 빚어진 것이다. 지난 10월 16일 전후 동생과 협의한 끝에 부모의 유업(遺業)을 잇는 데 동생이 적격이라고 판단, 이사장직을 물려주기로 했으며 동생도 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육영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이렇다 할 대외적 직책을 맡지 않았다. 1979년부터 맡았던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직이 전부였다. 한국문화재단은 국제 간 학술문화 교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으로 주된 활동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최순실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가 이 재단의 부설 연구원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91~97년까지 어머니 추도식은 물론 아버지 추도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추도식은 동생 박근령씨의 주도로 치러졌다. 그녀는 모든 것을 걸어 잠그고 침잠했다. 일기 형식의 수필집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1993년)과 《내 마음의 여정》(1995년)을 보면 당시 그의 내면세계를 알 수 있다.
 
  〈한 시간 전의 분노도 잊어버리고 말면 이미 분노가 아닌 것을, 그 좋지도 않은 짐 덩어리를 계속 마음속에 품으면서 못내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1991년 9월 21일)
 
  〈친인척은 핏줄로 연결되어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듯이 그러한 연결은 강한 인연이지만, 그것도 배신 등으로 인해 끊어질 수 있는 법이다.〉(1992년 12월 7일)
 
  〈울지만 진정으로 울지 않고, 고통 속을 지나가지만 고통을 그냥 느끼는 척하고, 사랑하지만 이성을 잃을 만큼 집착하지 않고, 소유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무대 뒤에 다시 맡겨질 소도구들이니 애착을 갖지 않는다.〉(1993년 2월 26일)

 
  이후로 1995년 9월 정수장학회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1997년 말 정치에 뛰어들기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삶은 조용했다. 최태민은 1994년 5월 1일 사망했다. 97년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한 인물은 최태민의 사위이자 그의 딸 최순실의 남편이었던 정윤회였다.
 
 
  8. 최태민은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를 만났나
 
  11월 8일 발행 《주간경향》은 육영재단 사태 중 뿌려진 〈7개의 이름을 가진 목사라는 희대의 사기꾼 최태민〉이라는 소책자에 있는 글이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대선 뒤,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노태우 대통령은 각계각층의 인사를 만났다. 대상자에는 박근혜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약속장소인 신라호텔에 박근혜씨는 최태민과 함께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간경향》은 “최태민은 이 자리에서 노태우 당선인에게 박정희가 국부이며 육영수가 국모라는 주장을 폈다고 소책자는 전하고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다.
 
 
  9.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날이 최태민의 기일이었나
 
  《태자마마와 유신공주》는 최태민의 죽음에 대해 만성신부전증이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태민씨는 1993년 말부터 1994년 3월까지 지병인 만성신부전증으로 서울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세 차례 입원, 치료를 받다가 1994년 5월 1일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최순실은 《우먼센스》 94년 4월호와의 인터뷰에서 부친 최태민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 아버님이 돌아가신 게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지난 5월 1일 오전 8시30분경,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남기신 유언은 없었나요.
 
  “당신을 둘러싼 갖가지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받은 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죽음을 앞둔 순간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많이 미안했었다고요. 특히 당신 때문에 어머니가 말 못 할 고통을 당했다는 점을 가장 회한스럽게 생각했어요.”
 
  — 장례식을 알리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알리고 말고 할 게 없잖아요. 그저 평범하게 가족장으로 치렀습니다.”
 
  — 박근혜씨에게도 안 알렸나요.
 
  “알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신문보도를 보고 아셨겠지요. 아버님은 90년 육영재단 분규가 생기기 직전 그곳을 나온 후 박 이사장(최순실씨는 박근혜씨를 이렇게 불렀다)과 연락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당신 때문에 박 이사장이 큰 고통을 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 사인은 무엇이었습니까.
 
  “협심증이었어요. 옛날 말로 ‘화병’이지요. 예전부터 혈압이 높으셨어요. 그런데다 육영재단 분규로 일을 중단하고 집에만 계시는데도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특히 일부 언론이 좀 심하게 아버님을 몰아쳤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화병이 생겼고…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한몫했을 거예요. 가족들이 육영재단과 관련된 일을 그만하라고 부탁했지만 듣지 않으셨어요. 특히 제가 많이 말렸지요. 그러다가 좋은 꼴 못 보고 그곳(육영재단)에서 물러났으니 가족들 보기가 민망하셨겠지요. 말씀도 못 하고 속으로만 그런 고통을 삭이셨어요. 속병만 키우셨던 셈입니다. 더 사실 수 있었는데…”
 
  사망의 원인이 협심증이었든 만성신부전증이었든 최태민이 5월 1일에 사망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세월호 사건 당시 소위 ‘청와대의 7시간’과 관련해 항간에서는 최태민의 기일이라 청와대 부근에서 굿판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지금도 그럴듯하게 떠돌아다닌다. 최태민의 사망일은 1994년 5월 1일이고 세월호 사건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했다. 일단 양력으로 세월호 사건과 최태민의 기일(忌日)은 맞지 않는다. 최태민의 사망일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3월 21일이다. 세월호 사건 발생일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3월 17일이다. 제사를 4일이나 지나서 모시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10. 최태민은 원래 부자였나
 
1979년 6월 10일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 제전’ 행사를 깜짝 방문한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 그의 옆을 당시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장이던 최순실(23)이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다. 사진=뉴스타파 동영상 캡처
  《우먼센스》 1994년 4월호에서 최순실은 자신의 기억 속 아버지를 부유했던 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1912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형제가 3~4명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모두 돌아가셨대요. 혼자서 월남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생애는 친척도 없는 쓸쓸한 것이었을 겁니다. 할아버지(최윤성, 90년 독립유공훈장 받음)는 독립운동 자금책이었는데,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었답니다.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 때문에 이미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재산이 탕진된 상태였다고 해요. 항간에는 저희 아버님이 일제 때 일본 순사로 근무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부가 훈장을 줬겠어요? 어쨌든 아버지는 월남 후 부산에서 건국대학이라 불리던 건국의숙(후에 동아대학교로 흡수됨)을 마치셨죠. 법과를 전공하셨어요. 공무원이나 회사원은 적성에 맞지 않으셨는지 주로 사업을 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주로 서대문구에 살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지금의 기상대 부근에 정원이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살았는데,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탔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아버지 사업은 꽤 잘되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청렴하고 정직하게만 살았다고 강변하진 않겠어요. 당신도 인간이니까 보이지 않는 실수를 하셨겠지요. 하지만 아버지를 둘러싼 각종 모함과 뜬소문이 지나쳐도 보통 지나친 게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돈이나 권력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최순실은 1956년생이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 연도를 미루어 짐작하면 60년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2층 양옥집에 기사가 딸린 자가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펍’ 11월 1일자에는 최순실의 주장과는 다른 박근령씨와의 인터뷰 내용이 있다. 최태민의 재산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한다.
 
  ― (박근령씨와 지만씨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 (최씨 일가가) 육영사업, 문화재단, 추모사업에 개입해 회계장부를 조작해 많은 재산을 착취했고, 지금도 최태민 목사의 가족들이 강남 및 전국에 걸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근거는 무엇인가.
 
  “당시 육영재단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최 목사 일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경로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분들이 단기간 내에 부(富)를 축적한 것은 사실이다. 확실한 것은 언니를 만나기 직전 최태민씨는 불광동 월셋집에 살았던 걸로 안다. 최 목사는 언니가 맡고 있는 여러 단체에 관여했다.”
 
  최순실의 주장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는 최태민 일가가 어렵게 살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주간경향》 11월 8일자 육영재단에서 일했던 관계자의 증언 중에도 최태민의 재산 상태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 80년대 초반 상황이다.
 
  “그 무렵 최태민씨가 아버지 상을 당했다. 지금의 (서울) 장승배기에 집이 있었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영안실로 가지 않고 집에서 상을 치렀다. 방문했던 최태민가는 그냥 평범한 보통 가족이었다. 그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놀라운 부를 축적했는데, 그게 최씨 부녀 및 일가친척을 동원해 빼돌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 당시 직원들의 인식이었다.”
 
  최태민의 부의 축적 시기에 대해 《인사이더월드》 91년 1월호는 이 육영재단 관계자의 증언과 다르다.
 
  박근혜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최태민의 여러 행각은 눈부시다. 그는 보통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수단과 행동을 겸비한 사나이였다. 최태민이 구국봉사단과 새마음봉사단 공금에서 횡령하거나 착복한 돈은 총 2억여 원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액수도 김재규의 특별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의 조사에 의해 밝혀진 액수에 지나지 않고, 밝혀지지 않은 실제 액수는 엄청난 금액인지도 모른다.
 
  1970년대 중반 시기에 2억여 원이라는 액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에 2만원이었으며, 서울 시내 불광동이나 갈현동에 있는 소위 ‘후생주택’이나 ‘AID 주택’ 한 채 값이 대략 200만원 정도 나갈 때이다.
 
  그때 2억원이라는 돈의 가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억원 가까이 되는 엄청난 돈이었다. 본사 특별 취재반을 찾아와서 증언해 준 당시 서울시 책임자인 A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의 내로라하는 재벌들이 최태민에게 돈을 갖다주지 못해서 안달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탁명환 전 종교문제 연구소장이 보는 최태민의 축재 방법도 《인사이더월드》에 소개된 내용과 비슷하다. 다음은 탁 소장이 쓴 《현대종교》 88년 6월호 기사다.
 
  … 지독하게도 가난에 찌들어 고생하던 최태민은 대통령 영애 근혜 양을 업고 구국선교단, 구국여성봉사단을 운영하면서 돈을 물쓰듯 했다.
 
  최씨의 아들이 인천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집도 사주고 돈도 풍족하게 주었다. 가끔 손주들을 보면 과자 값이라고 주는 돈이 100만원짜리 수표일 때가 있어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당시 100만원은 10년이 지난 지금으로 친다면 1000만원도 족히 넘으리라.
 
  이것이 사람들이 과장해서 하는 말이라고 친다 하더라도 얼마나 돈을 물쓰듯 하면서 살았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하고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딸을 결혼시켰는데 결혼식장은 그야말로 경제계 정부 관리 등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은 하객이 몰려들었다.
 
  이것은 권력의 냄새만 피워도 쉬파리떼들처럼 몰려드는 당시 권력형 종이호랑이의 단막극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 생생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중략)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재벌급 기업인들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 일과였다. 항상 검은 안경을 끼고서 오만하게 앉아 재벌들에게 전화질을 하면서 꼭 근혜 양을 팔았다.
 
  “명예총재인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협조 부탁한다”고 하면, 재벌들은 모두 꺼벅 죽는 시늉까지 했다. 최씨는 그 엄청난 돈을 챙겨 아현동 고개에 있는 서울신학대학 건물을 매입했다. 그 건물은 당시 너무나 덩치가 크고 비싼 값이라 12년간이나 감히 누구 한 사람 살 엄두도 못 내는 것이었는데 최태민이 나와서 9억원에 매입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90억원이 훨씬 웃도는 돈인데 게다가 수리비 등 3억원을 더해서 12억원쯤 들었으니 120억원짜리 건물인 셈이다.
 
  재벌들의 등을 쳐서 마련한 금싸라기 땅의 임자는 근혜 양과 최태민의 명의로 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태민 가족들의 기억과 주변에서 최태민을 지켜본 사람들의 최태민의 축재 과정을 둘러싼 기억의 간극이 너무 넓다. 그리고 지금, ‘최순실 스캔들’을 보는 청와대와 국민들의 간극도 너무 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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