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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최순실 스캔들

최태민 전기(傳奇) 1975~1979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대통령도 최태민을 이길 수 없었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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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41년사 대해부(大解剖)
⊙ 국졸 학력에 경찰-군인-언론인 하다 ‘영세계 칙사’를 자처한 사이비 교주
⊙ 이름 여덟 번 바꾸고 아내는 다섯 명
⊙ 기독교의 선지자 같은 ‘영세계 칙사’ 혹은 ‘태자마마’ 자처… 훗날 자기 몸에는 흰색 피가
    흐른다 해, 신라시대 최초의 불교 순교자 이차돈(異次頓)을 본뜬 ‘최차돈’이라 불려
⊙ ‘나무자비조화불’ 외치면 만병통치… 불교 고승들도 ‘조화불’이 뭔지 몰라
⊙ 육영수 여사 생전에도 최태민은 박근혜 주변을 서성거렸다
1977년 3월 박근혜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가 새마음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경로병원 개원식에서 봉사단 총재인 최태민과 함께 테이프를 끊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와해될 위기를 맞고 있다. 최태민(崔泰敏·1912~1994)과 딸 최순실(崔順實·1956년생)이 대(代)를 이어 41년간 대통령 주변에 도사린 채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정을 농단하며 막대한 부(富)를 챙긴 사실이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당시 중앙정보부와 국군보안사령부에서 만든 자료와 언론보도를 바탕으로 그의 정체를 밝힌다.
 
 
  1. 최태민은 박정희 대통령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다
 
  최태민의 원적(原籍)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서동 34번지이다. 월남(越南)해서는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삼호리 532번지를 본적(本籍)으로 삼았다. 보안사가 ‘최태민 관련 자료’라는 파일을 만들 당시 주소는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689-25번지이다. 파일에 최태민의 전직(前職)은 대한민국 봉사단 총재로 돼 있다.
 
  최태민은 1912년 5월 5일생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대통령보다도 다섯 살이 많았다. 최태민의 아버지는 최윤성(崔崙成), 어머니는 김윤옥(金崙玉)이다.
 
 
  2. 최태민의 학력은 국졸이다
 
  최태민의 학력은 국졸(國卒)이다. 1927년 3월 황해도 재령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유일하다. 당시 학적부에 최태민의 이름은 최도원(崔道源)으로 돼 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그의 어머니가 선녀(仙女)가 어린아이를 자기 품에 맡기는 태몽(胎夢)을 꿨다는 것이다.
 
 
  3. 최태민의 경력 = 경찰+군인+스님+목사+학교장+정당인+언론인?
 
  최태민은 1942년부터 황해도경 고등과장 서포라는 인물의 추천으로 순사(巡査)가 된다. 일제 치하에서 경찰이 됐다는 것은 수단이 비상하다는 뜻이다. 그는 1945년 8월 광복이 될 때까지 순사를 하다 1945년 9월 남쪽으로 내려와 이듬해인 1946년 3월 다시 강원도경에 취직했다. 이때 사용한 이름은 최상훈(崔尙勳)이다.
 
  1947년 3월에는 대전경찰서로 옮겨 경사(警査)가 됐다. 한 달 후인 1947년 4월에는 인천경찰서로 옮겨 경위(警衛)로 승진했다. 이때 그가 맡은 직무는 ‘사찰주임’이었다. 그는 2년 만에 경찰 생활을 끝냈다. 그가 자유당 시절 사찰주임으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태민은 1949년 군인으로 변신한다.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으로 일하다 6·25가 터진 1950년 7월에는 해병대 비공식 문관이 된다. 1년 뒤인 1951년 3월에는 사단법인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이 되는데 이때는 최봉수(崔峰壽)라는 이름을 썼다. 최태민은 1953년 초 부산에 있던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이 됐다가 휴전되자 그해 9월 서울로 환도(還都)했다.
 
  최태민은 1954년 초 김제복(金濟福)과 결혼했는데 여자 문제로 가정불화가 나자 경상남도 동래군 금화사로 도피해 승려가 됐다. 삭발 승려가 된 뒤 그의 이름은 다시 최퇴운(崔退雲)으로 바뀐다.
 
  1년 후인 1955년 4월 최태민은 중 생활을 끝내고 부산으로 돌아와 다섯 번째 처였던 임선이(林先伊)와 결합한다. 그해 그는 양산군에 개운중학교라는 비인가 학교를 만든 뒤 교장이 됐으나 이 학교 역시 얼마 안 가 폐교됐다.
 
  최태민은 1956년 12월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이 됐다가 1957년 2월에는 국민회 경남도본부 사업부장으로 취직한다. 1958년 2월 서울로 이사 온 최태민은 1959년 6월 승려 경력을 바탕으로 전국 불교회 부회장이 된 뒤 1960년 5월 한국복지사회 건설회를 만들어 회장에 취임한다. 1963년 5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창당한 공화당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1965년 7월에는 대한근민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회장이 된다.
 
  1965년 1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이 됐으나 그해 2월 15일 서울지검에서 유가증권 위조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자 도피해 잠적했다. 그의 도피생활은 약 4년간 계속됐다. 이 같은 최태민의 경력을 보면 ‘경찰+군인+승려+회사원+학교장+복지단체 회장+정계(공화당)+언론인’이라는 직함이 복합됐음을 알 수 있다. 사기꾼의 전형적인 행태다.
 
 
  4. 최태민의 이름은 8개다
 
  최태민은 모두 8번 이름을 바꿨다.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 총재로 취임하면서부터다. 그는 이름으로 먼저 쓰고 2년 뒤인 1977년 3월 9일 호적에서도 최태민으로 이름을 고쳤다.
 
  최태민의 본명은 최도원이며 월남해서는 최상훈, 부산에서는 최수봉, 절에 들어가서는 최태운으로 천주교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을 때는 공해남(孔亥南)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방민(方敏)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는데 본인은 계시에 의해 개명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방민이라는 이름을 쓸 때 최태민은 사이비 교리 ‘영혼합일법’을 설파하고 다녔다. 한때는 원자경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5. 최태민은 왜 이름을 자주 바꿨나
 
  《인사이더월드》라는 매체가 1990년대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가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개명(改名)을 자주한 이유는 이렇다. 이 매체는 제보자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썼다.
 
  젊은 시절부터 최태민을 알고 있다는 사람이 본사에 전화해 온 제보에 따르면 최태민이 월남하여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순사 노릇을 하면서 황해도 지역의 애국독립운동가들과 가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런 사실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이름을 바꾸었을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가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려 경찰이 됐다는 정반대의 설(說)도 있으나 사실은 알 수 없다.
 
  최태민처럼 그 자식들도 이름을 자주 바꾸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의 장본인 최순실도 지금 이름은 최서원이며, 그 딸 정유라도 원래 이름은 정유연이었다.
 
 
  6. 최태민은 다섯 번 결혼했다
 
  최태민은 3남 6녀로 모두 9명의 자식을 뒀다. 최태민 본인의 자식은 8명이고 최순영(崔順英·1947년생)이라는 딸은 다섯 번째 처 임선이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입적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의 기록에 최태민은 모두 다섯 번 결혼한 것으로 돼 있다. 본처에게서 장남이 태어났고, 둘째 처에게서 아들과 딸 하나씩을, 셋째 처에게서 딸 하나를, 네 번째 처에게서 아들 하나를 뒀다.
 
  최태민이 가장 많은 아이를 낳은 것은 임선이와 결혼했을 때로 모두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중 한 명이 최순실이다. 최순실은 9남매 가운데 순서상으로 5녀이며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 50번지에서 1956년 6월 23일 태어났다.
 
 
  7. 최태민은 사이비 종교 교주인가
 
  최태민이 사이비 종교를 창시한 때는 서울지검에 쫓겨 4년간 도피생활을 한 뒤부터였다. 그는 1969년 초 서울 중구의 천주교 중림성당에서 ‘공해남’이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2년 뒤 그는 서울시 영등포구 방화동 592-7번지 호국사에서 불교에 기독교-천도교를 합친 영세계(靈世界)를 만들었으며 영세계의 교리를 전달하는 곳을 영세계 칙사관이라고 불렀다. 그는 ‘방민’이라는 이름으로 독경(讀經)과 안찰(按擦) 기도를 통해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 칙사는 선지자(先知者) 혹은 예언자(豫言者)와 같은 의미다.
 
 
  8. 최태민은 어떻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었나
 
  4년에 걸친 문제의 잠적 기간 동안 그는 계룡산에 들어가 심령학, 최면술을 터득했다는 보도가 있으나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영세계는 시작이 매우 황당하다.
 
  그는 한국이 앞으로 세계의 종주국이 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가 ‘한국의 산천은 아름답고 물이 맑아서 그 물을 마시고 자란 사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 세계를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즉 좋은 물을 가진 나라여서 세계의 종주국이 된다는 허황한 논리다.
 
 
  9. 최태민이 주장한 영세계, 영혼합일법은 무엇인가
 
대전시 일대에 1973년 7월달에 뿌려진 홍보전단.
  보안사 자료에는 최태민이 1973년 5월 대전시 현대예식장에서 영세계 칙사를 자칭하면서 영혼합일법을 설교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같은 해 11월에는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67-5 대현빌딩 3층에 전세로 입주한 뒤 같은 방법으로 ‘원자경’이라 자칭하며 사이비 행각을 벌였다.
 
  1974년 5월 최태민은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2동 122-6번지에 전세 들어 같은 행각을 이어갔는데 이번에는 ‘태자마마’라 칭하며 사람들을 홀렸다. 당시 ‘태자마마’를 추종하는 신도들은 약 3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해 8월 최태민은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54-5번지로 옮겨 같은 행각을 반복했다. 그해는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의 흉탄에 쓰러진 날이다.
 
  《월간조선》은 최태민이 대전에서 뿌린 광고문안 원본 사진을 입수했다. 원문(原文) 그대로 옮겨본다.
 
  영세계(靈世界)에서 알리는 말씀
 
  찾으시라!! 그리고 들으시라!!
 
  대한민국은 세계주인국이 될 운세(運勢)를 맞이했다는 칙사(勅使)님의 권능(權能)과 실증(實證)의 말씀을
 
  슬프도다!! 지나간 역사!!
 
  대한민국을 가리켜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필리있느냐 병든 고목(古木)에서 잎이 돋을리 있느냐고 쓰러져가는 민족정신을 실랄하게 꼬집어 뜯었는가하면 한수 더떠 어느 정치가는 구린내와 썩은냄새가 부산항 20리까지 난다고 짐승취급을 했던 6·25당시 외국인들의 신문기사가 지금도 그 활자들이 펄펄 뛰는듯이 선합니다.
 
  심지어는 국토(國土)와 성(姓)까지 빼았기며 가진 서러움과 모욕을 당하면서 살아온 이 민족의 한(恨)이 이제 세계주인국이라는 찰란한 엄연한 현실이 우리 민족앞에 놓여졌읍니다.
 
  이에 영세계칙사관(靈世界勅使館)에서는 지난 5월 13일자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그리고 당국의 집회허가를 얻어 대한민국을 세계주인국으로 정해놓으신 조물주(造物主)의 뜻을 칙사님께서 사명을 선포 한바 있읍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로서는 미국하버드대학 철학교수는 대한민국에서 성자(聖者)가 태어나 인류를 지배하게 된다고 선언하고 입산(入山)하여 현재 토굴 생활을 하고있으며 세계종교사상 유례없는 인파가 모인 서울 5·16 광장에서 부흥사 빌리 그레함 박사는 대한민국을 영적종주국이라고 했읍니다.
 
  이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안이드래도 영적으로 밝으신 분이나 기도을 게을리 하지않고 계시는 분은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 이 사실을 조물주로부터 소명(召命)받으신 칙사님께서 사명을 완수코자 이 고장에 오셔서 이미 이 땅위에 보내신 그분의 성자(聖者)와 선택된 수많은 인재를 찾아 모시고자 하는 일념에서 아래와 같이 안내 하오니 어느 분이나 찾아오셔서 조금도 부담없이 상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조물주의 역군(役軍)으로서 인류를 위해 앞장 서실분(단 남녀노소학력불문)
  2. 태몽을 받고 출생 하신분
  3. 현몽(顯夢)을 받고 계시는 분
  4.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계시는 분
  5. 신앙 없이 방황하시는 분
  6. 신이 들렸거나 신이 쓸려 있는분
  ※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분
  ※ 각종 재난으로 고민하시는 분
  ※ 사업과 상업을 경영하시는 분으로서 상담 하실분
  ※ 자신의 신상문제나 종교문제 등으로 상담 하실분
 
  ⊙ 다 보시고 절대로 휴지로 쓰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기 1973년 7월 일
  대전시 선화1동 동사무소 앞
 
  영세계칙사관 드림

 
  최태민의 글을 읽으면 맞춤법도 제대로 맞지 않고 무엇보다 무슨 얘기인지 논리가 갈팡질팡이다. 속셈은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을 꾀어 뭔가를 뜯어내겠다는 것인데 바야흐로 그의 마수(魔手)에 당대 최고 권력자의 딸이 걸려들 찰나였다.
 
 
  10. 영세계의 교리는 무엇인가
 
1973년 5월 《대전일보》 광고면에 실린 최태민 ‘영세교’의 광고 문안.
  이에 대해 《월간조선》은 1973년 5월 13일 《대전일보》 4면에 게재된 광고문안을 입수했다. 광고 내용을 보면 최태민이 창시했다는 영세계의 교리가 여러 종교의 잡탕임을 알 수 있다. 원문 그대로 인용해 본다.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
 
  근계시하
 
  귀체만복하심을 앙축하나이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년간 이루지 못하며 바라고 바라든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합니다
 
  장소 대전시 대흥동 현대예식장
  일시 5월 13일 오후 4시
 
  또한 모든 종교지도자께서는 영세계 법칙을 전수받으시와 만인에게 참된 공헌하시기 바랍니다.
 
  더우기 난치병으로 고통받으시는 분께 현대의학으로 해결치 못하여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난치병자와 모든 재난에서 고민하시는 분은 즉시 오시어 상의하시라.
 
  칙사님의 임시 숙소
  대전시 대사동 190
  케블카에서 200m 지점 감나무집

 
  이 광고를 보면 최태민은 불교+기독교+천도교를 적당히 섞어 ‘영세계’라는 종교를 만들었으며, 자신은 조물주, 즉 하나님의 칙사로 이 땅에 내려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바야흐로 석가모니 부처, 예수와 동격(同格)에 선 것이다.
 
 
  11. 최태민의 만병통치술은 ‘나무자비조화불’?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출간된 책 《태자마마와 유신공주》를 보면 사망한 사이비 종교 연구가 탁명환씨가 대전의 최태민 숙소를 찾아 목격한 내용이 나온다. 이 책 14~15페이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이에 따르면 이때 최태민은 스스로를 ‘원자경’이라 불렀다.
 
  최태민의 숙소 벽에는 색색의 둥근 원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것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나무자비조화불’이라는 주문을 계속 외우면 만병통치할 수 있고 도통(道通)의 경지에 이른다는 주장이었다. 그게 그가 말하는 ‘영세계의 법칙’이었다. 예정된 시각에 그의 행사는 열렸다. 각종 난치병 환자들이 마지막에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모였다. 그 안에는 계룡산 주변의 신흥종교 교주들과 무속인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들 중에는 그 앞에서 ‘나무자비조화불’을 계속 외우면서 그 원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면 일종의 최면술로 신기하게도 통증이 없어졌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최태민의 박수무당 노릇에는 신기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의 앞에서는 다른 박수와 무당들이 벌벌 기고 엎드려 절부터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를 만난 후 그들의 신기가 떨어져 그 업을 작파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고도 한다.
 
  《월간조선》은 충청남도 예산 수덕사 주지를 지낸 옹산스님을 비롯한 여러 명의 승려에게 ‘조화불’이라는 보살이 있느냐고 물었다. 스님들은 한결같이 ‘자비’라는 말은 쓰지만 ‘조화불’은 없다고 했다.
 
 
  12. 최태민은 어떻게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했나
 
  최태민은 대담하게도 1975년 3월 육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영애(令愛-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꿈에 육 여사가 나타나 근혜 양을 도와주라고 하였다”는 요지의 편지를 최태민은 모두 세 차례 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경재 한국자유총연맹 총재가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쓴 《김형욱 회고록》을 통해 처음 알려진다.
 
  마침내 그해 3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은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렀다. 보안사 보고서는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은데, 《인사이더월드》라는 잡지에 대화 내용이 자세하게 보도됐다.
 
  최태민은 편지 속에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고 자신은 목사라고 했으며 한국의 기독교계와 불교가 부패해서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비분강개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를 잃고 마음이 허전했던 박근혜는 최태민의 그런 편지를 받고 최태민을 만나서 그의 능숙한 달변에 매력을 가졌던 모양이다.
 
  이때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3시간에 걸쳐 시국을 논하고 한국 종교계를 설명하면서 나라를 위한 운동을 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후부터 박근혜는 최태민에게 상당한 자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최태민이 박근혜를 만나고 나온 얼마 후부터 영세교(영세계칙사관) 간판은 내려진다.

 
  또 다른 보도는 이렇다.
 
  최태민은 위로편지에서 박근혜의 마음을 상당히 어루만지는 투로 하면서 자신을 계룡산에서 도통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어젯밤 꿈에 국모(國母)님(육영수 여사)이 나에게 현몽하여 우리 큰딸을 잘 부탁한다. 큰딸은 나라의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런 편지를 드린다고 했다. 이 편지를 받은 박근혜는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여러 가지 말을 들었으며 그때부터 최태민에게 상당히 의지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 언급한 《태자마마와 유신공주》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편지의 내용과 그들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편지의 내용은 ‘현몽’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자마마가 유신공주의 신임으로 사회 유명인사로 행세할 때 그는 저명한 신학대학의 학장인 목사와 친분관계를 맺고 1년여 동안 일주일에 2~3회씩 만난 적이 있다. 그 목사가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태자마마’는 “육 여사와 박근혜만이 알고 있는 둘만의 비밀을 썼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비밀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으며 그 비밀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육 여사와 교감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 자체가 허황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적인 교감에 대해서 그것을 믿건 안 믿건 그에 대한 신뢰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진위 여부를 확인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 목사는 “최태민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최태민은 ‘예언적 능력과 투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적어도 무당이 작두를 타는 것보다 훨씬 높은 능력이었다고 한다.
 
 
  13. 최태민의 넷째 딸로 박 대통령과 성심여고 동창으로 알려진 최순득의 역할은?
 
  최순득이라는 인물은 최태민의 넷째 딸로 1952년생이다. 그는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생했다. 그의 이름은 뒷부분에 나오는 최태민 비리에 등장한다. “봉사단 장부상 3000만원 지출 기장 없이 경로병원 장부에 전액 입금된 양 허위 기장한 후 1977년 4월 27일부터 8월 27일까지 경로병원 경리과장인 차녀 최순득과 공모, 4회에 걸쳐 병원자금 424만원 인출”이라는 대목이다.
 
  그가 성심여고 동창인 점을 이용해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을 연결시켜 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보안사 파일에는 최순득이 1977년 대한구국봉사단에서 근무했다고 기록돼 있다.
 
  2007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최태민의 관계를 폭로한 뒤 고소당해 실형을 산 김해호 목사가 거론한 ‘최씨 일가의 전횡 항목’에도 최순득은 등장한다. 그의 부동산이 포함된 것이다. 최순득이 최순실에 이어 등장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치명타가 될 것이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최순득은 박 대통령과 성심여고 동창으로 알려졌지만 성심여고 측에서는 부인하고 있다.
 
 
  14. 최태민이 육영수 여사 생전부터 박근혜에게 접근했다?
 
2004년 8월 15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동생 근령, 지만씨 등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치러진 고 육영수 여사 3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모습.
  《월간조선》은 지난 2010년 6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씨와 장시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박근령씨는 “제가 들은 이야기는 어머니(육영수)가 (살아)계실 때 박 대표(박근혜)한테 자꾸 최 목사란 사람이 접근해서 한번 만나기를 원하고 자꾸 좋은 얘기를 해주겠다고 하는 걸 어머니께서 만나지 못하도록 하신 적이 있었다고 해요. ‘저분이 또 행사장에 왔네’라고도 하셨고 그걸 제게 얘기했는데 제가 확인 작업을 해보려고 하는데 ‘오프더 레코드’로 나중에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회가 있으면”이라고 말했다.
 
  당시 육성(肉聲)녹음을 조금 더 풀어본다.
 
  — 육 여사가 살아계실 때부터?
 
  “예.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어딜 가면 자꾸 박 대표한테 호감을 갖고. 처음엔 고맙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불필요한 만남은 주변에서 막게 되잖아요. 그래서 그걸 굉장히 막았다는, 우리 근혜가 목사를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친척 중의 한 분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 만나지 못하게 했다면 이미 그때 만난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행사장에서 한두 번. 청와대 생활이라는 게 신원도 알아야 하고 잘못되면 책임을 지잖아요. 청와대 생활하는 가족들은 통제를 받지요. 자유롭게 만난 건 아니지만 유난히 박 대표를 만나려고. 그때 대학생 시절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1974년이면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박 대표는 서강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때 전자공학과에서 1등을 해서 좋아하셨죠. 그렇게 외국에 보내달라고 해도 안 보내주시던 분들이 ‘그래 1등도 했고 이 정도면 외국에 나가 공부할 나이도 됐으니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대학교 때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수석 졸업했고 외국 유학까지 갔다 왔고 아버지로부터 나라를 경영하는 법을 배운 분이 그 정도 사리분별이 어려웠을까요?
 
  “우리같이 갈 곳, 안 갈 곳 다 다니면서 안 해도 될 경험까지 다 한 사람들은 잘 안 속죠. 아버지도, 아버지가 나라를 잘 경영하겠다고 하셨어도 결국 김재규 중정부장이 그렇게 하리라고 상상을 못 하신 거죠. 시간을 두고 확인 작업이 이뤄져서 입증되기 전에는 영원히 묻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죠.”
 
  — 대학 졸업 후 박 대표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비서 역할을 했다고 하던데요.
 
  “잔심부름을 했죠. 동생이니까 비서들이 하기 어려운 심부름이 사적으로 있을 수도 있고요.”
 
  — 그때 최태민의 존재를 전혀 몰랐습니까.
 
  “저는 그때 상당히 언니를 도와주는 정말 참 훌륭한, 그렇게 언니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고,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 친국을 했다면 최태민 관련 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됐다는 거네요.
 
  “최 목사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여성들이나 과부들, 또 재정적인 문제가 진정됐다든지 그런 것들이 쌓이고 여기저기서 들어오니까. 중정에도 들어오고 청와대에도 들어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박 대표를 봐서 하기가 어려웠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어떻게 해서 터져 나왔어요. 아버지께서 그 내용을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언니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아버지께서도 ‘딸이 그렇게까지 주장하니 그 부분은 내가 좀 더 확인하고’.…”
 
  — 그 일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언니도 ‘최 목사님은 그럴 분이 아니신데…’라며 굉장히 괴로워하고.”
 
  — 그때 언니 말을 믿었습니까.
 
  “저는 언니 말을 믿어야죠.”
 
  — 육 여사가 최태민의 접근을 막았고요.
 
  “언니는 그때 잘 알고 만난 적은 없었을 것 같고요. 행사장에서 그쪽은 이분을 기억해도 반대로는 기억 못 하는 경우겠죠.”
 
  — 육 여사가 돌아가신 후에 최태민이 봉사단에서 전횡을 일삼으니까 친국이 이뤄졌고?
 
  “그때는 전횡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구국봉사단을 하면서 잡음이 있었고 그걸 확인하겠다고 나선 거죠. 언니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그 당시, 활동을 많이 하던 시기가 아니었어요. 우리가 행사장에 나갈 일이 없었어요. 졸업하고 행사장에 부모님하고 같이 나가면 ‘아이고, 우리 근혜 양이 이렇게 예쁘시고, 착하시고…’라면서 지나친 관심을 보였는데, 그러다 보니까 누가 어머니께 ‘저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하니까 어머니도 유심히 ‘왜 내 딸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일까’ 그런 것도 있었을 거고. 그래서 어머니께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정확한 건 알지 못하신 상황에서 유달리 내 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이상해 보였겠죠. 그런 얘기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박 대표는 최태민의 실체를 몰랐나요?
 
  “정확하게 다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육영재단에서 아주 작은 부분인데요. 소설 같아서 얘기하는 것도 우습지만 우리 직원들은 단순하고 복잡한 얘기를 할 줄 모릅니다. (최태민이) ‘나는 최차돈’이야. 아, 최차돈이라고 하지 않고 내 몸을 찌르면 흰 피가 나온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별명을 ‘최차돈’이라고 지어줬습니다. 막 그렇게 웃으면서 얘기를 했는데 돌아서서는 언니한테 가서 ‘나를 이렇게 음해할 수 있습니까?’ 언니는 ‘왜 그러세요, 목사님’ 하고 물으면 최태민 목사는 ‘아니, 내가 몸에서 흰 피가 나온다고 했다는 거예요’라고 하고 언니는 또 어디 가서 ‘목사님 몸에서 흰 피가 나온다고 음해를 한답니다’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죠.”
 
 
  15. 최태민, 육 여사 빙의(憑依)로 박근혜 마음 사로잡았다?
 
  전기영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 총회장은 최근 《월간조선》 및 《국민일보》 등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박근혜에게 최태민이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죽은 육영수가 나타나 ‘내 딸 근혜가 우매하니 당신이 그녀를 도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박근혜가 최씨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까만 승용차들이 최씨가 도를 닦는 곳에 왔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던 박근혜 앞에서 최씨가 육영수의 영혼이 빙의됐다면서 그녀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박근혜가 기절하고 입신(入神)을 했다.
 
  입신에 대해 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입신이란 말은 최태민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입신은 교계(敎界) 용어다. 예컨대 환상을 본다거나, 천국이나 지옥을 본다든가, 뜨거운 성령 체험, 신들렸다는 등. 놀란 박근혜가 그때부터 최씨를 신령스런 존재로 보게 됐다고 한다.
 
 
  16. 최태민 “박근혜와 나는 영(靈)의 세계 부부”
 
김재규는 10·26 후 재판 과정에서 구국봉사단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전 목사는 시중에 나돌고 있는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가 (최태민에게 두 사람이 연인관계냐고) 물은 적이 있다. 최씨가 ‘내가 나이가 있는데…’라고 반문하더라. 나이도 많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인 것 같았다. ‘박근혜와 나는 영의 세계 부부이지, 육신의 부부는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추문이 끊이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조사를 지시해 직접 이른바 ‘친국’을 했다.
 
  전 목사는 심지어 최태민이 전 목사의 손을 자신의 성기(性器)에 갖다 대며 “내가 이런데 육신의 부부일 수 있느냐”고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17. 박정희 대통령 비서관의 육성 증언
 
  육영수 여사 서거 이전에 최태민이 박근혜나 청와대와 관계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태민이 육영수 여사가 현몽했다는 편지를 제2부속실로 보냈고 육영수 여사를 오래 모셨던 ○행정관은 그 편지 내용이 황당해서 그냥 버릴까 하다가 ‘큰 영애가 똑똑하니까 알아서 판단하겠지’라고 생각해서 전달했다.
 
  의외로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을 만나자고 했고 이후 관계가 형성됐다. ○행정관은 최태민이 비리를 저지르는 등 문제를 일으키자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다 청와대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불러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하게 됐다.
 
  유신 말기 박정희 대통령이 기독교계의 비판을 받고 있을 때, 최태민은 임진각에서 구국기도회를 여는 등 박 대통령에게 영합하는 행사를 많이 열었다. 서울 아현동에 새마음병원을 열어 빈민을 상대로 무료 진료를 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런 훌륭한 일을 하는 목사가 있다”고 자주 얘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독교계가 나를 비판하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도 있느냐?”고 관심을 보였지만 큰 관심은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마음병원 일을 열심히 말하자 그날 밤 특별한 일정이 없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럼 한 번 가보자”며 아현동 병원으로 찾아갔다. 가보니 아현고가도로 옆에 가건물이나 다름없는 음침한 건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병원 현황 정도를 보고받고 바로 나오셨다. 박정희 대통령과 최태민이 함께 찍었다는 사진은 이때 찍은 사진이다. 이후 최태민을 청와대로 부르거나 만난 적은 없다.
 
  ‘친국’ 사건 때는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얘길 들었다. 김재규가 중정 국장(백광현)을 한 명 대동하고 들어와 보고했고 보고서를 본 박정희 대통령은 탄식하다가 바로 박근혜를 불러들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이 그런 사람이 아니다”면서 “아버지는 딸하고 정보부 말 중에서 어느 쪽을 더 믿느냐?”는 식으로 항의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기가 막혀 하다가 “모두 나가라”고 했다.
 
 
  18.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최태민을 아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전 실장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박근혜와 만난 적이 없었다. 1980년대 초 김기춘 검사가 앞서 말한 ○비서관에게 부탁해서 식사를 같이한 후 알게 되었고, 정치를 하면서 가까워졌다.
 
  ○비서관은 이번 사태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젊은 시절 최태민에게 빠졌을 수는 있어도 국회의원 하고 그러면서 경륜도 쌓이고 달라졌기를 기대했는데, 40년 넘도록 거기서 헤어나지 못할 줄은 몰랐다. 나이 60이 넘어서 저러는 건 본인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19. 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은 영세계칙사관의 후신(後身)
 
  최태민은 영세계칙사관의 간판을 내리고 나라를 위한 여성들의 구국봉사라는 슬로건 아래 이미 자신을 추종하던 신도들을 데리고 활동을 개시한다. 영애라는 대어(大魚)에게 집중하기 위해 사이비 종교 교주 행세를 그만둔 셈이다.
 
  최태민은 1975년 4월 10일 대한구국선교단이란 간판을 달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장 조현종(趙賢宗) 목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마침내 최태민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최태민은 1975년 4월 29일 대한구국선교단 총재로 취임하면서 1976년 12월 10일, 이 단체를 대한구국봉사단으로 바꾼다.
 
  이 단체가 활동할 때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참석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 스스로가 최태민의 후원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근혜의 등장으로 최태민 주변에는 사람과 돈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최태민은 한술 더 떠 박근혜 대통령이 ‘명예총재’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각 기업체나 정부기관을 상대로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기업체와 정부기관은 박근혜라는 존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최태민의 요구에 응했다.
 
  중앙정보부가 이와 관련해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75년 4월 29일 박근혜의 후원으로 자신의 심복 및 사이비 종교인 중심으로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고 최태민이 총재로 취임하고 박근혜가 명예총재로 하여 구국선교를 빙자하여 매사에 박근혜의 명의를 팔아서 이권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 금품 징수로 이권 단체화하면서 치부(致富)한 자임.
 
 
  20. 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이 박정희의 지시였나?
 
  CBS는 이와 관련해 최근 주목할 만한 보도를 했다. CBS에 따르면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 총회장 전기영 목사는 “구국선교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진보 기독교 세력에 대항하는 단체를 만들라는 지시로 탄생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CBS의 보도 내용이다.
 
  박정희가 보니 기독교 세력이 강해요. 기독교 세력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니까 박정희가 이거와 대결할 수 있는 기독교 단체를 만들라고 해서 박정희가 최태민에게 지시해서 만든 게 구국선교단이에요.
 
 
  21. 대한구국선교단 내의 대한구국십자군(救國十字軍)의 정체는?
 
1975년 6월 21일 배재고교 교정에서 열린 한국 구국십자군 창군식에서 구국선교단 명예총재인 박근혜와 최태민 총재가 구국십자군을 사열하고 있다.(박근혜 오른쪽 거수경례하는 이가 최태민)
  최태민은 구국선교단 산하단체로 대한구국십자군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1975년 6월 21일 오후 2시 배재고등학교에서 창군식(創軍式)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해 최태민과 나란히 단상에 앉아 있는 사진이 여러 언론에 보도됐다.
 
  이 단체는 구세군(救世軍)을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하고 중세의 십자군(十字軍)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후술과 같이 남아 있는 영상자료를 보면 구국십자군 복장은 군인과 같은 느낌을 준다.
 
  본지는 이 대한구국십자군의 취지 및 목적 원문을 입수했다.
 
대한구국십자군 헌장 내용.
  세계 역사는 격동하고 있어 어제의 이웃이었던 크메르와 월남이 어이없게도 붉은 세력에 의해 먹혀버린 참담한 양상이 오늘의 현실이며 우리나라의 정책도 북괴의 붉은 군대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송두리째 앗아가려고 하늘로, 바다로, 심지어 땅밑으로 땅굴을 뚫고 도전해 오는 이때 가만히 앉아서 구국이니, 멸공이니 하는 말이나 생각만으로는 이 위기를 넘길 수 없고 더욱더 국민들 사이에 전염병과 같이 만연되어 가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부조리로 인한 정신적 해이는 북괴 침략의 앞잡이가 되는 것으로 확신하여 아래와 같은 목적으로 구국십자군을 창설하는 바이다.
 
  목적 1. 승공의 유일한 길은 신앙으로 통일된 정신무장의 길임을 깊이 깨달아 전국 복음화 운동에 앞장선다.
 
  2. 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 성업에 앞장설 것이며 북한이 수복된 후 사회질서 정화에 앞장선다.
 
  3. 사회 부조리의 정화 운동에 행동으로 앞장선다.
 
  가. 선량한 교인을 우롱하는 사이비한 종교 일소에 앞장선다.
  나. 퇴폐풍조 일소에 앞장선다.
  다. 사회 부조리 제거에 앞장선다.
 
  4. 구국대열에 목숨을 걸고 앞장선다.
 
  위와 같은 목적으로 우리는 주께서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통치하시는 날까지 헌신한다.
 
  구국십자군의 진로는 다음과 같은 대원 선서문 정신에 입각하며 다음 선서문을 참고하여 주시고(선서 황영식 강화도 대표)
 
  ‘선서’
 
  세계는 자유와 평화를 오랫동안 소망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폭력과 위협은 지구상 모처에서 감행되고 있다.
 
  양심은 무색하게 되어가고 권력과 금력의 지배력은 자행되고 있으며 인간과 생활 이상의 가치 또한 매몰되어 가고 있다.
 
  새로운 대사에 돌입하는 이 시대에 있어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우리 38선에 인접하고 있는 북괴는 인지사태 이후 남침야욕을 더욱 감행하고 있어 3천만 국민은 안도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우리 기독교 청년신도들은 분연히 궐기하여 멸공구국에 용진하는 대한구국선교단에 가입하여 이 단이 창립하는 구국십자군 대열에 솔선 참가하여 오늘 창군의 영광을 가지며 기독교 신앙으로 굳게 뭉쳐 총화단결 멸공구국에 전심전력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 십자군은 한국의 복음화에 진력하여 사회 윤리 정화, 명랑사회 조성에 힘써 민족의 정신 정립으로 조국통일 성업에 이바지하여 나아가 세계평화 건설 유지에 기여할 것을 다짐한다.
 
  오늘 십자군에 참가한 우리 일천 명의 젊은 사자들은 금후 2백만 대한민국의 용감한 기독교 청년들 전원 십자가 대열에서의 참가를 기하면서 정신무장을 굳게 하여 멸공 구국통일 위업의 달성과 아울러 세계평화에의 기여를 위하여 헌신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
 
  앞으로 구국십자군은 대략 다음과 같이 지역조직을 확대할 방침입니다.
 
  각 시도에 군단을 설치하고 시군면에 지군단을 설치하며 20만 십자군 조직을 목표로 조직 확대한다.

 
  원문을 읽어 보면 하나도 논리가 맞지 않으며 장황하기 그지없다. 그저 ‘구국통일’ ‘총화단결’ ‘승공’ ‘퇴폐풍조 일소’처럼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는 단어들을 열심히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의식했다는 방증이다.
 
  또한 최태민 자신이 사이비 종교 교주이면서 ‘선량한 교인을 우롱하는 사이비 종교 일소’를 구국십자군의 목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야말로 코믹한 대목이다.
 
 
  22. 최태민은 왜 대한구국선교단을 대한구국봉사단으로 바꿨는가
 
  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은 횡령 사기 행각으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이런 소식이 정보기관에 입수되자 최태민은 변신의 필요를 느꼈다. 이때 도움을 준 것이 K 전 문공부 장관이라고 한다. K 장관과 가까워지면서 최태민은 자선병원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주도록 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대한구국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대한구국봉사단은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학비를 대주고 나라 일꾼으로 키운다는 거창한 슬로건도 내걸었다.
 
 
  23. 최태민은 왜 1977년 10월 5일 총재직을 사퇴했는가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을 대한구국봉사단으로 개칭해 총재 자리에 앉은 지 10개월 만에 스스로 총재직을 사퇴한다. 대신 1978년 2월 22일 대한구국봉사단을 사단법인으로 개편해 박근혜 대통령을 총재로 취임시킨다.
 
  보안사 파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최태민은 복잡한 여자관계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 등으로 원성이 고조되자 박근혜를 현혹하여 막후에서 봉사단을 관장하여 오다가 1978년 2월 22일 봉사단을 사단법인으로 개편 발족, 박근혜가 총재로 취임 이래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재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4. 최태민은 진짜 목사인가… “10만원 주고 목사 타이틀 땄다”
 
  이를 두고 지금까지 최태민은 목사를 사칭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최근 CBS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종합총회 총회장 전기영 목사가 그가 실제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월간조선》 역시 전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전 목사는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사이비 행보를 보인 최태민이 어떻게 예장 종합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됐는지에 대해 “당시 종합총회 총회장 조현종이 최태민에게 주술가가 돼서는 세상에 먹히지 않는다며 목사 안수를 받을 것을 제안했고 신학교육 과정 없이 바로 안수를 줬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종합총회는 교단법에 총회장이 모든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며 “당시는 총회가 가난해서 10만원 받고 목사 안수를 남발할 때였다”고 했다. 최태민이 돈으로 목사 자격을 샀다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CBS에 따르면 전 목사가 최태민을 더 잘 알게 된 계기는 총회 신학교에서 교단법 강의를 하던 전 목사가 종합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1979년 종합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전 목사는 부총회장 임명까지 받았다.
 
  전 목사는 “교회 헌법을 가르치다 보니까 여기서 목사 안수를 받으라고 해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조 목사도 총회장이고 최태민도 총회장이었다. 문공부에 10번인가 등록돼 있었다”며 “조 목사가 가난하니까 최태민에게서 돈을 얻어 쓰기 위해서 최태민에게 총회장을 물려준 것”이라고 말했다.
 
  CBS는 “전 목사 말대로라면 당시 종합총회가 돈에 매수돼 최태민의 사교 행각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라고 보도했다. 전 목사는 종합총회에서 부총회장 임명을 받은 뒤 최태민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는 종합총회와 도저히 같이할 수 없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태민 역시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행적을 감췄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최태민을 수사했던 때와 맥을 같이한다.
 
 
  25. 최태민은 박근혜를 이용해 어느 정도 돈을 뜯어냈는가
 
  보안사 자료에는 최태민이 돈을 모은 과정이 자세하게 나온다
 
  최태민은 1978년 7월 14일 운영비 조달 목적으로 대한통운㈜ 회장 최원석(崔元碩) 등 10명의 실업인을 운영위원으로 위촉, 운영위원회를 발족한 이래 계속 증원하여 1979년 10월에는 국내 재벌급 실업인을 거의 망라해 60명 선에 육박, 1인당 입단 찬조비 2000만~5000만원에다 매월 200만원씩 운영비를 조달했다.
 
  이와 별도로 장학기금, 새시대지 운영기금 및 기타 행사 지원비 등 명목으로 수천만 원씩 개별적으로 갹출했다.(운영위 멤버가 아닌 기업체에 대하여도 박근혜의 이름을 팔아 동일한 명목으로 수천만 원씩 갹출)
 
  위 운영위원 등으로부터 갹출한 막대한 자금과 행정기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업무 기능이 유사한 정부 육성 단체인 부인회, 주부클럽, 어머니회 등의 조직을 잠식하는 등 무리한 조직 확대와 사업 추진으로 각종 마찰과 부작용을 야기하면서 각 시-도-리동(里洞)에 이르기까지 조직을 확대해 300만명의 단원을 확보했다.
 
  이 기간조직을 주축으로 대학·고·중·국교·유치원 및 약사회·의사회 등 10개 참가 단체와 각 직장 봉사대 등을 망라, 새마음 인구 2000만명을 호언하면서 충(忠)·효(孝)·예(禮) 등 국민도의 앙양과 사회봉사사업을 표방, 각종 사업을 추진하여 왔으나 ▲무리한 행사 준비로 예산 낭비와 부담 과중 ▲기능과 역할에 상응한 사업비를 자체 조달보다는 각 기업체 및 행정지원 대외의존으로 민관폐 막심 ▲최태민 등 봉사단 간부의 각종 부조리 자행 및 월권행위 등으로 참여인물이나 관민으로부터 공히 내면적인 호응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민적 빈축을 초래하여 왔다. 최태민은 그간 롯데·신라·도큐호텔 및 국일대한반점 등을 무대로 매일같이 정(政)·관(官)·재(財)·언론계 등 각계 중진인사와 접촉, 초호화판으로 행세하면서 박근혜를 빙자한 이권개입, 금품수수 등으로 치부 및 엽색 행각으로 물의를 야기하여 오다가 은신 중에도 박근혜와는 은밀히 연락을 유지, 후견인 역을 계속 자행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은신(隱身)중’이라는 말이다. 최태민은 중앙정보부가 자신의 약점을 수사하자 한동안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지냈다. 그러면서도 박근혜 대통령과는 연락하면서 정보부의 수사망을 피해왔다. 어느 정도 수사가 끝나자 최태민은 추종자들을 시켜 박 대통령을 충동, “최태민 총재가 없으면 봉사단은 운영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박 대통령의 귀에 계속 들어갔다.
 
 
  26.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이었나?
 
  신기수 전 경남그룹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1979년에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이었느냐는 질문에 “운영위원 명단을 구해서 보면 알 것이다.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 등 전경련 이사들은 대부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으로 위촉됐다. 나도 당시 전경련 이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구국봉사단에 기부금을 얼마나 냈느냐는 질문에 “많이 내지는 않았다. 운영위원들이 일괄적으로 얼마씩 내는 정도였다. 일 년에 몇백만 원에서 많아야 1000만, 2000만원 정도였다. 그나마 1980년대 초 보안사에서 구국봉사단을 해체시켜 더 이상 돈을 낼 일이 없게 됐다”고 했다.
 
 
  27. 최태민의 구체적 비리내용
 
  다음은 보안사 자료에 나오는 최태민의 비리내용이다. 횡령액은 14건으로 모두 2억2135만6000원이다. 40년 전이니 지금의 가치로 치면 수백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 횡령
 
  〈1〉 1976년 8월 16일 구국봉사단 대지 및 건물 구입 시 주택채권 465만원 상당을 매수, 자가은신
 
  〈2〉 1976년 1월 29일 봉사단 공금에서 처(妻) 주택구입자금으로 1000만원 지출
 
  〈3〉 1977년 6월 14일부터 8월 29일 사이 봉사단 공금에서 자녀 등록금 등 도합 238만원 지출
 
  〈4〉 1976년 8월 14일부터 1977년 4월 15일까지 봉사단 공금에서 비서이자 정부(情婦)인 김모에게 3회에 걸쳐 생활비 등으로 220만원 지출
 
  〈5〉 1976년 7월부터 1977년 6월 25일 봉사단 공금에서 또 다른 정부 김모 여인에게 2회에 걸쳐 460만원을 가옥구입비 등으로 지출
 
  〈6〉 1976년 9월 7일부터 1977년 1월 초순 사이 주모 여인에게 5회에 걸쳐 봉사단 공금에서 무상공여
 
  〈7〉 봉사단 장부상 3000만원 지출 기장 없이 경로병원 장부에 전액 입금된 양 허위 기장한 후 1977년 4월 27일부터 8월 27일까지 경로병원 경리과장인 차녀 최순득과 공모해 4회에 걸쳐 병원자금 424만원 인출
 
  〈8〉 1977년 3월 17일부터 6월 7일까지 3회에 걸쳐 국민은행 관악지점에 봉사단 공금 6000만원으로 처 임선이 명의 3구좌를 정기예금하여 은닉
 
  〈9〉 1976년 11월 3일부터 1977년 8월 25일까지 서울농협 불광지소에 봉사단 공금 합계 1억5516만6000원을 2~3회에 회전분산한 후 가명 이송자, 임부전, 김기옥 명의 26구좌로 정기예금, 통지예금, 정기적금하여 은닉
 
  〈10〉 1975년 8월 봉사단 전 총재 처 영애에게 주택매수 대금 100만원 지출
 
  〈11〉 1976년 3월 2일 봉사단 수위 임옥락에게 생활보조비로 200만원 지출
 
  〈12〉 1976년 11월 처 임선이에게 2회에 걸쳐 감자 사업자금으로 1000만원 지출
 
  〈13〉 1977년 3월 14일 장녀 최순영에게 개인아파트 분양자금조로 200만원 지출
 
  〈14〉 1977년 5월 처 임선이 명의로 브라사 승용차 1대 구입, 대금 300만원 지출
 
  ★ 사기(1건, 2000만원)
 
  1975년 5월 중순 총재 비서실장 임재희에게 불하해 주기로 약속한 장수(長水)탄광 규석이 1963년 김덕승에게 불하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임재희에게 줄 명목으로 봉사단이 기증받은 것같이 가장하고 김덕승으로부터 하급 규석 2만 트럭분 취득
 
  ★ 변호사법 위반(11건, 9420만원, 토지 14만1330평 등)
 
  〈1〉 1976년 6월 중순 성광교회 원병은 목사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서울 성북구 석관동 시유지 50평을 동 교회 부지로 불하해 주고 그 대가로 동 부지 시가 1할 상당액을 받기로 약속, 불하 실패
 
  〈2〉 1975년 5월 중순 총재 비서실장 임재희에게 국세청장에게 청탁하여 전북 장수군 소재 장수광산 규석을 불하받아 준다는 명목으로 300만원 받기로 약속, 그중 170만원 수수
 
  〈3〉 1975년 9월 15일경 전 2군 감찰참모 이규항(李圭恒) 대령의 처에게 국방부 장관에게 청탁하여 이규항을 준장으로 진급시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원 수수
 
  〈4〉 1976년 6월 4일 한신공영 사장 김형종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서울시 비상유류저장탱크 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5000만원 수수
 
  〈5〉 1976년 11월 5일 원고 이순화 피고 현대건설 간 강남구 압구정동 소재 모래 채취로 인한 손해배상소송에 관하여 현대건설과 5억~6억원에 화해시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동 화해금에서 토지 매수대 2억원, 생활비 300만원, 소송경비 등을 제한 잔액을 받기로 약속
 
  〈6〉 1976년 7월 21일 위 이순화에게 강남구청장에게 청탁하여 등기부상에만 동인 명의로 있고 지적(地籍)이 없는 강남구 압구정동 잡종지 26만8661평의 지적을 찾아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동 잡종지의 반을 기증받기로 약속
 
  〈7〉 1976년 10월 초순 한국소방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이명용에게 내무부 차관에게 청탁하여 소방기구 신규 제조 허가를 억제해 주고 동 기구검정권을 동 조합에 주도록 해준다는 조건으로 200만원 수수
 
  〈8〉 1976년 10월 22일 중앙건어물㈜ 대표 정호범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동사에 농수산물 도매시장 개설허가를 내어주고 허가 후는 신규 허가 억제와 유사 매매행위를 단속하도록 해준다는 대가로 1976년 12월 22일부터 1977년 4월 22일까지 5회에 걸쳐 1700만원 수수
 
  〈9〉 1977년 2월 21일 김봉남에게 경기도로부터 안양종축장(토지 7만788평, 건물 36동)을 봉사단 명의로 수의 계약, 매수하여 준다는 대가로 동 토지 7000평과 동 지상건물 36동을 받기로 약속
 
  〈10〉 1976년 8월 중순 전 중정(中情) 강원지부장 김준교의 처에게 남편을 중정에 복직시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김준교로부터 2차에 걸쳐 150만원 수수
 
  〈11〉 1976년 10월 초순 최경복에게 울산시장에게 청탁하여 울산시 동천강 병영교 밑 하천 토사채취 허가를 봉사단 부산지단(地團) 명의로 받아주겠다고 하고 허가되면 2000만원 받기로 약속
 
  ★ 비리(13건)
 
  〈1〉 1975년 9월 27일 한신공영 사장 김형종에게 대한화재보험협회 이사장 오임근에게 청탁하여 동 협회 청사 신축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7000만원 수수 ※1000만원은 수수한 증거 없음
 
  〈2〉 1976년 1월 17일 이승규의 처로부터 1948년 이후 이승규와 변호사 김완섭 간에 소유권 다툼이 있는 서대문구 연희동 산2번지 임야 15만 평에 대한 기증서를 받고 봉사단이 동 임야의 소유권을 취득하면 동인에게 1억1500만원을 지급하기로 약속
 
  〈3〉 1976년 2월 8일경 안산산업 대표 안성익에게 동 공장을 봉사단 십자군 군복(180만 벌분) 납품공장으로 지정해 주고 동 대가로 200만원 수수
 
  〈4〉 1976년 4월 16일 동일공영㈜ 사장 백영수에게 동인이 부산~제주 간을 운항키 위하여 일본 삼정조선에서 건조한 ‘호버크라프트’ 고속 여객선을 도입할 시 승객 유치 관계로 대한항공이 반대하면 무마해 주겠다 하고 그 대가로 십자군 군복 2만 벌분 대금 1억원의 기증서를 받음
 
  〈5〉 1976년 9월 초순 서울관광㈜ 대표 진기식에게 대덕·연기 지역구 차기 공화당 국회의원 입후보자 공천을 받게 해준다고 하고 1976년 9월 17일부터 12월 10일까지 5회에 걸쳐 500만원 수수
 
  〈6〉 1977년 3월 24일 흥아타이어㈜ 사장 강병중에게 구국봉사단 부산지단장에 임명해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원 수수
 
  〈7〉 1977년 5월 8일경 동대문시장 상인 방덕환 외 8명에게 박근혜 명예총장 대구새마음갖기 발대식 참석 시(5월 11일) 비행기에 동승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전세비 부담 명목으로 100만원 수수
 
  〈8〉 1978년 2월 6일 동원탄좌개발㈜ 상무 이전배로부터 경로한방병원 운영비를 빙자, 1000만원 수수
 
  〈9〉 1978년 2월 8일 미원㈜ 사장 한현석으로부터 임명산을 통하여 3000만원 수수
 
  〈10〉 1978년 4월경 당시 봉사단 자문위원 한정희(파리제과점주)에게 자금조달을 강요, 동녀가 기업체로부터 갹출한 200만원 수수
 
  〈11〉 1978년 4월경 봉사단 운영비를 빙자, 구로공단 이사장 최명헌을 통하여 평안섬유㈜에서 500만원, 협진양행에서 300만원 계 800만원 수수
 
  〈12〉 1978년 5월 6일 봉사단 운영비를 빙자, 요업개발㈜에서 500만원, 국제보세㈜에서 500만원, 대협에서 500만원 계 1500만원 수수
 
  〈13〉 1978년 7월경 대한통운㈜ 회장 최원석을 봉사단 운영위원으로 발탁해 주는 조건으로 금품을 수수하고 임명 후 수시로 100만원씩 수수
 
  ★ 이권 개입
 
  〈1〉 1978년 12월 30일 부산시가 시행하는 서면지하상가 건설공사(공사비 58억원) 업자 지명에 개입, 공사 능력이 없는 대현실업㈜이 지명토록 하기 위해 박근혜 비서관 김도룡(金道龍)으로 하여금 박근혜의 의도임을 빙자, 부산시 기획관리국 및 건설국장에게 압력작용하여 동사를 가인가자(假認可者)로 선정
 
  〈2〉 1979년 1월 21일 진주시장에게 진주시 도시계획에 저촉된 신흥고무공장에 대하여 구획 재조정, 해제를 요구하는 서신 발송
 
  ★ 융자 알선
 
  〈1〉 1978년 3월 동산유지㈜에 대한 은행융자 알선 등 후원 조건으로 동사 명예회장에 취임, 동년 10월 서울신탁은행 등을 작용 10억여 원의 융자 알선하고 거액 수수
 
  〈2〉 1979년 1월 31일 김규태를 통하여 김원기 재무부 장관에게 한성기업(대표 오희창) 등 2개 업체에 각 5억원씩 은행융자를 청탁하여 제일은행에서 융자하기로 내락
 
  〈3〉 1978년 1월 초순 부실 금융실업인 조치 대상자 이수복이 경영하는 아시아중석㈜에 은행융자 알선 및 해외여행 제한조치 해제 주선을 조건으로 동사 회장직 취임을 내락하고 1978년 12월 18일 박근혜 비서관 김도룡으로 하여금 재무부 등 관계관에게 청탁, 이수복의 서독 헬텔사와의 중석가공 합작회사 설립 추진을 위해 동인의 출국을 주선

 
 
  28. 최태민이 농락한 여인들은 얼마나 되나
 
  최태민의 집에는 정치인, 고위 관리들도 드나들었으며 그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구국여성봉사단에는 운영위원회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이 운영위원회 멤버가 되기 위해 유명 여성들과 인기 연예인들이 몰려들었으며 기업가 부인들도 그의 집 주변을 기웃거렸다고 한다.
 
  다음은 보안사 파일에 나오는 최태민의 여성 농락 사례다.
 
  〈1〉 김모 여인(당시 27세)
 
  1972년 하수부터 1976년 초순까지 영등포 옥호(屋號) 불상의 여관, 세검동 옥수장, 신촌 신성여관 및 대전 시내 에덴여관 등에서 전후 10회 성교(性交)
 
  1976년 1월 초부터 4월 초까지 총재실에서 주 3회 정도 포옹, 키스 등 애무행위
 
  〈2〉 강모 여인(당시 45세)
 
  1975년 8월부터 12월 10일까지 총재실에서 수시 키스, 포옹 및 애무하고 동녀의 손으로 ○○를 만지게 하는 등 음란행위
 
  〈3〉 김모 여인(당시 31세)
 
  1976년 4월부터 1977년 5월까지 세검동 옥수장(방갈로), 신촌 신성여관 등에서 3회에 걸쳐 성교코자 하였으나 ○○ ○○○로 실패. 동 기간 중 총재실에서 수시 키스, 포옹 등 애무 및 음란행위
 
  〈4〉 김모 여인(당시 41세)
 
  1976년 3월 26일 영등포 금성호텔 302호실에서 정교(情交)하려다 ○○ ○○○로 ○○를 빨게 하는 등 음란행위
 
  〈5〉 지모 여인(당시 40세)
 
  1976년 8월 6일부터 9월 중순까지 총재실에서 4회에 걸쳐 키스, 포옹하고 ○○를 빨게 하는 등 음란행위
 
  〈6〉 주모 여인(당시 24세)
 
  1976년 8월 초순부터 1977년 6월 하순까지 총재실에서 4회에 걸쳐 키스, 포옹, 유방 및 음부를 만지면서 주 여인에게 강제로 ○○를 빨게 하는 등 음란행위
 
  〈7〉 윤모 여인(당시 42세)
 
  최태민으로부터 검찰에 피소된 자신의 사기사건 선처 조건 등으로 스스로 몸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고 이를 거절할 경우 해임 등 보복이 두려워 1978년 5월 14일 사직공원 옆 옥호 미상의 호텔에서 최태민이 성기 불발기로 윤 여인의 ○○와 유방을 빨면서 ○○○을 ○○에 삽입, 음란행위. 1978년 5월 21일 전시(前示) 호텔서 성기 발기로 약 20분간 성교
 
  〈8〉 최모 여인(당시 35세)
 
  봉사단 기획관리실장실 및 건물관리실장실에서 중요 업무 협의를 가장, 문을 잠그고 음란행위 또는 호텔에서 통정. 최 여인은 정조 제공으로 최태민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도산에 직면한 남편의 경영업체를 최태민의 지원으로 회복
 
  〈9〉 한모 여인(당시 51세)
 
  조직국장실 또는 호텔 등에서 통정설
 
  〈10〉 노모 여인(당시 25세)
 
  총재실 또는 호텔 등에서 통정설
 
  〈11〉 왕모 여인(당시 42세)
 
  남편의 국회의원 공천 문제로 접근, 총재실 또는 호텔 등지에서 통정설
 
  〈12〉 신모 여인(당시 43세)
 
  유정회 국회의원 공천, 박근혜 총재에게 간청 공천 따냄. 남편이 대학 운영자임을 기화로 접근, 상당한 액수의 돈을 최태민에게 바쳤다고 함. 총재실 또는 지방출장 중 호텔 등에서 통정설

 
 
  29.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왜 최태민 수사를 결심했나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최태민에 주목한 것은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전 국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사전에 약속된 ‘비밀 연락 루트’가 있었다고 《경향신문》은 최근 보도했다.
 
  즉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치는 편지를 봉한 뒤 다시 겉봉에 조상호(曺相鎬) 당시 의전수석비서관에게 보내는 편지로 밀봉하는 형식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취하면 김정렴(金正濂)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열어보지 않고 박 대통령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 경로로 신문사로 들어온 제보 내용을 ‘최태민에 대한 99가지 의혹’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보냈다. 박 대통령은 이 문서를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넘겼으나 차지철 실장은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그런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977년 또 다른 《경향신문》 기자로부터 최태민에 관련된 내용을 보고받고 은밀히 최태민을 조사, 보고서를 만들어 박 대통령에게 넘긴다.
 
  박 대통령은 딸의 치부(恥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보고서를 받은 뒤 부끄러움과 노여움이 교차해 낯빛이 몇 번이나 붉으락푸르락 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보부가 이런 일도 조사하나…. 알았어. 그대로 두고 나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계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1998년 《월간중앙》 11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에게 갑자기 최태민이를 아는가? 하고 물으셨다. 김재규한테 들었다는 소리는 안 하고 “예 압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놈이 말이야 근혜를 홀려가지고 내가 혼을 좀 내줬지” 하셨다. 경상도 사투리로 “도깨비한테 홀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나. 대통령은 “근혜가 그놈한테 홀려 도무지 시집가려고 해야 말이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재혼할 수 있겠나” 하셨다.
 
 
  30. 최태민은 10·26사태의 구실로도 이용됐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뒤 1980년 1월 28일 육군교도소에서 자필로 ‘항소 이유서 보충서’를 써서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 서류는 당시 육군교도소 변후연 상사의 검열을 거쳤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본인이 결행한 10·26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그것이 박 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어서 서면으로 하는 진술 보충서 속에 남기고자 합니다.
 
  ▲구국여성봉사단 사건과 박근혜의 문제=구국여성봉사단이란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 앉아 있으면서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 단체들의 커다란 원성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은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앙정보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안전국장을 시켜서 자세히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나 박 대통령은 국가기관의 보고서는 믿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불쾌감을 보이면서 자신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조사한 후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를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근혜를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고 박근혜를 지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기관의 조사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조사 보고서는 중앙정보부 제6국 안전국 금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김재규는 당시 박 대통령에게 최태민 비리 사실을 보고하면서 7개 항의 건의를 하려 했다고 한다.
 
  첫째, 큰 영애는 구국봉사단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회계장부도 똑똑히 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 많은 기업체로부터 명목 없는 돈을 헌납받고 있습니다.
  넷째, 최태민이라는 자는 사기꾼이며 전직 경찰관 출신으로 종교인이 아닙니다.
  다섯째, 그는 여러 명의 여자를 첩으로 거느리고 있습니다.
  여섯째, 최태민은 구국봉사단 여자 간부들하고도 문제가 있습니다.
  일곱째, 이런 단체에 큰 영애가 관련하면 대통령 각하의 이미지 손상을 가져옵니다.
 
 
  31.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은 왜 최태민 비리를 외면했나
 
차지철 전 경호실장.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동향(同鄕)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데 최태민이라는 존재로 둘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시작됐다.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바로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육 여사가 문세광에게 살해당한 뒤 청와대 자기 사무실 근처에 최태민의 사무실을 차려줬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차지철은 한때 박근혜에게 주의를 줬으나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너무 깊숙이 빠져 있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묵인하는 상태였으며 심지어 변호까지 해줬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1977년 9월 12일 최태민에 대한 이른바 ‘친국’이 열렸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김재규를 불러 이야기를 들은 뒤 다시 차지철을 불렀다. 회의를 하고 난 다음 차지철에게 큰 영애(박근혜)가 ‘최태민은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데 이상한 사람으로 모략한다’고 매달렸다. 차지철은 왜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그렇게 집착하는지 처음에는 몰랐다”고 보도했다.
 
  이 친국을 기점으로 차지철은 김재규를 박정희로부터 차단했다. 김재규뿐만 아니라 장관 등 국무회의 멤버들도 박정희를 만나려면 차지철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됐다. 바야흐로 최태민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았고 이것이 10·26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32. 최태민에게 폭행당한 청와대 경호실 박근혜 경호원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최태민의 비리를 은밀하게 조사해 작성한 보고서를 읽은 청와대 경호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보고서 내용에 격분, 마침 최태민이 청와대에 들어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가는 것을 보고 최태민을 경호실로 끌고 갔다. 이 경호원은 ‘영애 근처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멀리 떠나라’고 윽박지르며 몇 차례 발길질을 했다.
 
  그런 며칠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경호원은 정부 다른 부처로 발령 나 경호실을 떠나게 됐다. 그런데 경호실을 떠나자 최태민은 자신의 보디가드들에게 시켜 이 경호원에게 심한 폭력을 가했다. 그야말로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였다.
 
 
  33.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아버지의 친국을 이겼나
 
  당시 차지철은 김재규와의 경쟁심 때문인지 ‘경호실 정보기구’라는 것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정보수집을 했다고 《경향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나중에 목사가 된 조광작이라는 인물이 정보를 총괄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친국이 끝날 즈음 딸을 상당히 높은 톤으로 나무란 뒤 최태민과 손을 끊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차지철이 운영하던 청와대 경호실 내의 정보조직에 별도 조사를 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사실을 안 박근혜 대통령은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주일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아버지가 불러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단식투쟁 비슷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며칠 동안 화가 나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딸의 ‘결사항거’에 굴복하고 말았다. 당시 주변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미도 없는 것이 불쌍해서 그대로 두니 집안어른들이 잘 타일러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박 대통령은 어머니(고 육영수 여사)도 없고 대통령 옆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애처로워 더 이상은 (최태민 문제를) 말하지 않고 덮어두었지만 상당히 고심을 했다고 한다. 해결책으로 친척들에게 ‘근혜를 시집보낼 자리를 찾아보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다.
 
 
  34. 최태민의 숨은 단체 ‘근화봉사단’과 ‘동양신학교’는?
 
  전기영 목사에 따르면 최태민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자신을 찾아와 “이제부터 일을 시작한다. 앞으로 박근혜씨가 대통령으로 나올 게 틀림없는데 나를 도와주시오. 여태 봐도 당신만큼 청렴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 목사는 “최씨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동양신학교(만남의교회)라는 곳으로 나를 불렀다”면서 “동양신학교는 최태민과 종합총회 조 목사가 만든 곳으로, 성경도 발간하고 통신교재도 만들었던 곳인데 당시 홍모 목사가 학장이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최태민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테니 나에게 근화봉사단을 맡아달라”고 하면서 “조흥은행 안국동 지점에 원금 13억, 이자 9000만원이 있는데 이것을 사용하라고 제안했다. 당시 최태민씨 얼굴을 보니 귀신들린 것 같았다”며 “너의 정체가 뭐냐 꾸짖으면서 내쫓았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전기영 목사와 최태민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CBS와 《국민일보》에 보도된 내용의 일부분을 인용해 본다. 《월간조선》 역시 전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전 목사의 발언을 재확인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을 의지했는가.
 
  “맞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최태민의 주술의 영을 그대로 딸 최순실과 사위 정윤회가 이어받았다. 선무당이 국가를 잡은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들의 주술에 홀렸다. 주술을 모르면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할 수 없다.”
 
  — 최씨가 신학을 하지 않았다고 했나.
 
  “그렇다. 한번은 예배 때 축도를 못 해 옆에 있는 목사가 축도 문구를 적어주었다. 최씨가 ‘축도’라고 크게 외치는 모습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최씨의 말을 듣다 보면 종교에 대해 아는 것은 많았다. 천주교 얘기도 많이 했고…. 특히 글을 잘 쓰고 붓글씨를 잘 썼던 기억이 난다.”
 
  — 그럼 최씨는 왜 목사 안수를 받았을까.
 
  “기독교를 이용하려 했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반(反)정부 투쟁을 하던 기독교 세력을 견제했다. 그래서 최씨가 박 대통령의 명을 받든 것이다. 최씨는 어용단체인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었고 총재에 취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명예총재를 맡았다. 자금을 계속 지원받은 것으로 안다.”
 
  — 최씨는 교단에서 스스로 나갔는가.
 
  “쫓겨났다. 최씨는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을 주면서 지금 최순실이나 정윤회가 하는(박근혜 대통령을 돕는) 일을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최씨는 주술적인 행위를 많이 했다. 특히 기독교 신학에 벗어나는 짓을 계속해 교단에서 쫓겨난 것이다.”
 
  — 최씨가 주술가요? 무당이라고 했는데.
 
  “현재 대한민국은 성경 민수기 이야기와 흡사하다. 점술가의 계략에 미혹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숭배하는 음행에 빠지게 됐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즉시로 그들에게 염병이 임해 2만4000명이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하면 우리 기독교 원로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최태민 같은 사람이 생긴 것이라고 본다. 나부터 회개기도를 드린다. 입이 백 개라도 말 못 할 사람이 교계에 참 많다.”
 
  — 최씨의 교계 활동을 증언해 달라.
 
  “최씨는 영이 다른 사람이다. 산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었다. 목사가 되고 서울 강남에 ‘만남의교회’라는 200평(660m2)쯤 되는 교회를 세웠다. 신학교도 설립했다. 그의 딸 최순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몬테소리 유치원 큰 것을 차렸다. 나를 끌어들이려 했지만 귀신들린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 거절했다. 하나님이 아닌 신을 찾고 주술적인 말을 하도 많이 하길래 ‘이놈아, 네 정체가 무엇이냐. 누구 앞에서 재주를 부려’라고 소리쳤더니 얼굴이 찌그러지면서 저리 도망가더라.”
 
 
  35. 10·26사태, 최태민 인생 최대의 위기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종교연구가 탁명환씨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최태민은 1979년 10·26사태 직후 서울지검 도(都)모 검사의 지휘 아래 수사를 받게 됐다고 한다. 수사 장소는 서울 신촌의 S호텔과 청계천 7가의 S호텔이었다. 한 달 동안 진행된 수사에서 엄청난 비리가 드러났고 마지막 단계로 최태민이 소환됐다.
 
  최태민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박근혜 양이 아는 일”이라며 잡아떼고 책임을 떠넘겼다. 최태민이 비리사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박근혜 양이 개입됐다고 진술하자 수사진은 난감해졌다. 수사결과 행방이 밝혀지지 않은 돈은 15억원가량이었는데 최태민이 “예금통장을 근혜 양이 가지고 있다”고 진술하는 바람에 결국 수사결과를 발표하지 못했다.
 
 
  36. 박근혜 대통령과 《월간조선》 기자의 일촉즉발 인터뷰
 
  《월간조선》은 2002년 4월호에 최태민과 관련,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과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인터뷰를 보면 지금까지 최태민과 관련된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원문 그대로 문답(問答)을 옮긴다.
 
  — 1980년대에는 뭘 했습니까.
 
  “경로복지병원이라고, 나이 드신 분들 무료로 침도 놔드리고, 치료해 드리고, 육영재단, 장학재단 운영하고 수필집 내고, 아버지 기념사업도 2년여 했어요.”
 
  — 1990년 육영재단 파동이 나면서, 퍼스트레이디 시절에 있었던 최태민 목사와의 얘기가 흘러나왔습니다. 1975년 5월 13일 최 목사가 임진강에서 2000여 명의 청중을 모아놓고 구국기도회를 할 때 거기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명예총재로 추대된 거죠.
 
  “맞아요. 그때 나라가 어려웠어요. 월남사태도 있었고, 국민들이 굉장히 불안해하고 북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을 때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단결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며 기독교 분들이 주축이 돼 하신 거예요. 퍼스트레이디 역할 하면서 좋은 일 하시는 분들 있으면 격려해야 할 책임이 있잖아요.”
 
  — 구국선교단(뒤에 구국봉사단)의 명예총재 하는 걸 아버지에게 허락받았습니까.
 
  “일일이 할 때마다 허락받는 건 아니에요. 하고 나면 말씀드리는 것도 있어요.”
 
  — 최태민씨가 박 의원에게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도와드리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만나게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싶어 하셔서 한 번 청와대에서 만났죠. 여러 가지로 나라를 걱정하시는 생각이 들어, 그분이 선교단을 할 적에 좋은 뜻으로 하니까 도와드리기도 하고 일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했어요.”
 
  — 어머니가 현몽했다는 유의 얘기는 사실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에요. 이런 문제들이 왜 나오냐면, 제가 보궐선거와 총선을 치렀는데 그 상대가 안기부 출신이에요. 자료가 엄청나게 많아서 이런 것 저런 것 마구 공격을 했어요. 한 가지라도 사실이면 제가 국회의원 됐겠습니까. 말할 가치가 없는 주장들이에요.”
 
  — 1975년 5월 24일자 한 일간신문에 ‘기독십자군 창설을 위해 서부전선 5019부대에서 목사 100여 명이 3일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명예총재인 근혜 양이 참석한 가운데 부대장으로부터 수료증을 받고 퇴소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박 의원은 ‘군사훈련을 통해 참 신앙이 무엇이며, 자기 민족,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데 모범이 되었다’고 격려사를 하셨더군요. 목사들을 군사훈련 시키고, 총참모장, 총사령관까지 둔 군대식 ‘구국선교단’이라는 조직이 시대착오적인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비판하는 건 쉽죠. 목사님들이 훈련받고 하는 걸 유치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목사님들이 모두 공부한 분들이고 사회지도층인데 ‘나라 위기에 단결해야 한다. 정신무장 하자’ 노력하는 걸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유치하다고 보면 안 되죠.”
 
  —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선우련(鮮于煉)씨의 증언에 따르면, 최태민씨가 도경찰국장, 도지사에게까지 호통을 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고, 재벌 총수들이 최씨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자신에게 청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죠. 5공 정권이 끝나고 청문회를 했잖아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20년이 흘렀어요. 온갖 이야기를 끌어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 중상모략을 할 수 있습니다. 들어보면 ‘그러냐’ 이럴 수도 있어요. 문제는 그게 사실이냐는 거예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최 목사가 큰소리쳐서 권력을 휘두르고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면, 벌써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했다고 얘기가 다 나왔을 겁니다. 최 목사에게 사기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오잖아요. 그것 하나가 백 마디 얘기를 다 해주는 것 아닌가요.”
 
  — 최씨의 횡령건수가 14건, 2억2000만원이라는 합수부 수사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감옥에 보내든지 책임을 물었겠죠. 말도 많고 모함도 많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권력이 무서워서 그랬다 쳐요. 그 후 저도 청와대에 있다가 반대편에서 얼마나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 저한테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당했다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 1977년 9월 아버님께서 중정부장과 최 목사를 직접 심문했죠.
 
  “모략이 들어가니까. 아버지 성격에 가만 계실 분이십니까. 아버지는 분명히 조사시키고, 더군다나 딸 문젠데. 조사해서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까 없던 걸로 덮으신 거예요.”
 
  — 중정을 제쳐놓고 경호실 정보처에서 다시 최 목사를 조사하려니까, 박 의원이 밥도 안 먹고 일주일간 두문불출해 조사를 포기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적 없어요. 저는 두문불출하고 밥 안 먹고 그런 일 안 해요. 얼마나 엄청난 모략이에요. 제가 편안하게 온실에서 자랐다고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세상이 어떻다는 걸 잘 아는 이유가, 너무 많은 경험을 해서일 거예요.”
 
  — 국가정보기관에서 최 목사의 전력이 의심스럽다,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하면 따르는 게 온당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권고하던 사람이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습니까.”
 
  — 최태민 목사가 신군부에 구속돼서 강원도 인제로 쫓겨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을 상대로 석방운동을 하셨나요.
 
  “그런 적이 없어요. 제가 말한다고 됩니까. 그때 ‘유신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최 목사를 한 번 더 조사했지만, 혐의가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양반이 감옥에 간 게 아니고 무슨 군부대에 가 있었어요. 문제가 있었으면 진짜 감옥에 갔든지, 돈을 물어냈든지 그렇게 됐겠죠.”
 
  — 지금도 대통령 주변의 친인척들이 대통령을 빙자해 축재를 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일이 잦습니다. 사실상의 영부인을 자기 단체의 명예총재로 모신 최 목사가 위세를 이용해서 관에 압력을 가하거나, 건어물 도매상 허가를 내달라거나, 공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개연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런 식으로 저한테 질문하시는 저의(底意)를 의심하고 있어요.”
 
  — 저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저의를 의심합니다. 이분은 돌아가셨어요. 건어물 도매시장 허가를 받아 누가 손해를 봤다든지 한 사실이 있다면, 여러 가지 다 물으실 수 있어요. 그런데 한 건도 사기당한 사람이 없었어요. 김 기자님은 수십 년간 떠돌았던 의혹을 다 열거하면서 묻고, 나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그게 그대로 기사로 나가면 돌아가신 분이나 그 가족은 또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월간조선》이 그분과 무슨 억하심정이 있습니까.”
 
  — 박 의원이 육영재단 이사장을 물러날 때도 최 목사가 전횡을 한다는 얘기가 나왔죠.
 
  “그때도 별별 얘기가 다 나왔잖아요. 최 목사가 한 건이라도 감옥에 갈 만한 일을 했다든지, 피해 본 사람이 있다든지, 권력을 빙자해서 뭐 한 게 없잖아요. 그게 없으면 그다음에는 얘기하면 안 됩니다. 모략하는 사람들 얘기를 책에다 다 내실 겁니까. 왜 그러세요.”
 
  — 왜 이런 식의 인터뷰가 필요하냐면, 이미 박 의원이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의 한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제 개인에 관해 검증하는 것은 좋지만, 세상을 뜬 사람과 그 사람 가족들에 대한 거잖아요. 잘못했으면 세상 떠나고도 욕먹어야죠. 그러나 하나도 없는 것이 밝혀졌는데 모략을 쭉 나열한다는 건 안 되죠.”
 
  — 쭉 나열 안 하겠습니다. 최 목사와 일한 것 때문에 유신시절, 5공시절 마음의 고초를 겪었는데 1990년까지 계속 최 목사의 도움을 받은 이유는 뭡니까.
 
  “그때 저를 도와주고 그런 분들이 별로 없었죠. 아버지가 매도당하던 시절이고, 누가 있었나요. 저를 와서 돕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세상인심이라는 게 그래요.”
 
  — 육영재단 이사장을 물러날 때 다른 분도 아니고, 동생분과 육영재단 직원들이 ‘최태민이 전횡을 하니까 물러나라’고 했지 않습니까.
 
  “전횡해서 뭐 나쁜 일 한 게 있었어요? 그때 육영재단이 얼마나 잘되고 있었는데. 전횡해서 사기를 치고 한 일이 있나요.”
 
  — 같이 일을 한 사실만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그렇게 일할 수 있죠. 재단에 손해날 짓, 또는 사적으로 뭘 챙긴 게 한 건도 없는 겁니다. 10원 한 장이라도 잘못했으면 감옥에 백 번이라도 갔을 분위기였어요.”
 
  — 여성잡지들에 그런 얘기가 쏟아져 나왔는데 왜 법적 대응을 안 했습니까.
 
  “인터뷰에 응하고, 텔레비전에까지 나가서 질문에 다 답했어요. 꼭 법적인 대응을 해야만 합니까.”
 
  — 최 목사가 목사가 되기 전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고 정식 기독교 목사였어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면 내가 상대를 안 했고, 나도 알아볼 것 다 알아보고 했어요.”
 
  —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최태민 목사의 사위를 비서로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박 의원이 아직도 최 목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능력이 되니까 쓰는 거예요. 대개 사람을 쓰고 일을 할 때 가까이 잘 알던 사람들을 쓰는 것 아닌가요.”
 
  — 1980년 이후 동생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는 뭔가요.
 
  “이런저런 게 겹쳤어요. 그 후에는 다 없어지고, 동생들이 선거 때 와서 도와주고, 지금은 제가 정치권에서 하는 일이 잘되도록 안타까워도 하고 도움이 되려고 애를 써요.”
 
  — 자주 만나십니까.
 
  “자주 만나는 건 아닙니다. 저도 바쁘지만 동생들도 다 나름대로 바쁘거든요. 제사 때, 일이 있을 때 만나고 연락하죠.”
 
  1970년대를 화려하게 종횡한 최태민은 이제 박정희 시대를 끝내고 1980년대 들어 전두환-노태우라는 군인(軍人) 대통령 시대를 맞게 된다. 그는 과연 어떻게 재기했으며 박근혜 대통령과는 어떤 관계를 맺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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