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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끝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전쟁 ④ 일본

“이번 한일 협상이 위안부 문제 해결의 마지막 기회”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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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이 가즈오 일본 공산당 위원장, “일본 정부는 이미 과거 담화에서 강제연행 인정,
    불편한 과거 숨기지 말아야 한다”
⊙ 양징자 전국행동 대표,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들은 할머니들, (일본 측 사과를) 할머니들이
    받아들인다면 한국 국민들도 받아들여야”
⊙ 일본 언론의 허술했던 ‘요시다 증언’ 검증 과정
  오랜만에 찾은 나리타 공항은 기억과 조금 달랐다. 어쩌다 도쿄를 방문해도 하네다 공항을 주로 이용해 온 터였다(나리타 공항은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국제공항이고, 하네다 공항은 김포공항에 비유할 수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꼭 7년 만이었다. 공항 입국장은 기억보다 좀 더 낡아 있고, 중국인이 상당히 많았다. 11월 첫주, 단풍 구경하기 딱 좋은 날씨여서일까 관광객이 넘쳐났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한글’이었다. 방향을 지시하거나 장소를 표시하는 표지판마다 한국어 표기가 있었다. 일본어를 몰라도 들고 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한일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경색되어 있는 시기이기 때문일까. 새삼스레 표지판 속 한글이 눈에 더 띄었다.
 
 
  일 언론, “한일 정상회담 아베 외교의 승리”
 
  일본에서도 위안부 문제는 연일 화제였다. 11월 2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정상회담 때문이었다. 사실상 박 대통령 집권 후 첫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떤 논의가 오갈까에 눈길이 쏠렸다. 회담 후 발표 내용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양국은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 한국 언론은 회담 결과를 건조하게 보도했지만 일본 언론은 떠들썩했다.
 
  보도 방향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위안부 논의보다 정상 회담 자체에 더 비중을 두고 보는 관점이다. 특히 ‘승부’의 시각에서 회담을 보는 듯한 기사가 많았다. 예를 들면 《주간 신조》는 ‘박근혜 대통령의 패배는 위안부 공포(空砲)’라는 제목으로 머리기사를 실었다. 위안부 문제가 아무 결과 없는 ‘헛방’이었다는 소리다. ‘위안부 문제의 뚜렷한 해결 없이 정상회담을 성사했으니 아베 외교의 승리다’는 식으로 쓴 언론도 있었다. 일본 우익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쩌면 속이 시원해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같이 한일 관계 개선에는 도움되지 않는 기사다.
 
  ‘이 기회에 위안부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 털고 가자’는 시각도 있다. ‘아베 총리가 자필로 사죄 편지를 써 들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뵈면 어떨까’라며 구체적으로 제의하는 정치평론가가 있을 정도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주장은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는 위안소와 위안부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정부 차원의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한국인(조선인) 위안부와의 배상 문제는 1965년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정(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서 모두 해결됐다는 주장이다.
 
  협정 제2조 1항이 문제의 조항이다. 원문을 보자.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원문 그대로 인용함)
 
  배상 문제와 함께 ‘사과 문제’가 있다. 일본 측은 고노 담화(1993년)와 무라야마 담화(1995년)를 통해 거듭 사과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한국에 사과를 계속해야 하느냐’는 주장의 발판도 바로 이 두 담화다. ‘사과 피로’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에 대한 한국 측의 반응은 이렇다.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도 없었을뿐더러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지 않느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피해자가 납득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사과가 완성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다.
 
 
  아베엔 반대해도 위안부 인정 않는 일본인들
 
김부자 도쿄외대 교수.
  문득 궁금해졌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사회의 속내는 무엇일까. 김부자 도쿄외국어대학교 교수를 만나 제일 처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재일교포인 김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 더해, 젠더(性) 문제의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통찰해 왔다. 한국인 출신이면서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라면 일본인의 속내를 조금은 더 꿰뚫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김 교수는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었다는 걸 인정하거나 직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김 교수의 말이다.
 
  “이건 어떤 내셔널리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좌익과 우익 혹은 보수와 진보의 구분과 상관이 없어요. 아베 정권에 반대하지만 위안부 문제에는 미온적인 사람들이 그 예입니다.”
 
  젊은 세대라면 어떨까. 아베 정권하의 ‘안보법’ 혹은 ‘전쟁법’(법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전쟁법’이라 부른다) 사태에서 새롭게 부상한 이들이 있다. 바로 ‘SEALDs’다. SEALDs는 ‘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의 약자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긴급행동’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꽤나 오랜만이다. 실질적으로 전공투(全共鬪·전학공투회의)가 사그라든 1970년 이후 처음이다. 참가한 학생은 아직까지 소수지만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미국의 ‘Occupy Wall Street’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다. 《문예춘추》 11월호는 ‘보수는 SEALDs에 완패입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자는 SEALDs 측에 위안부 문제 취재라는 취재 목적을 밝히고 인터뷰 요청을 했다. 대면 인터뷰가 곤란하다면 이메일 인터뷰라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SEALDs 측은 요청을 거절했다. ‘사정상’이라고 했을 뿐 구체적인 이유를 따로 밝히진 않았다. 이유가 궁금했다. 김 교수는 “역사 문제에 관해 SEALDs가 표명한 입장을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SEALDs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표시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 문제 전반에 대해 성명을 낸 적은 있어요. 거기엔 일본 사회가 ‘만주사변 이후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주사변은 1931년에 일어났어요. 그렇다면 그 전의 행동은 어떻다는 겁니까. 전쟁법에 반대한다는 SEALDs마저도 역사인식이 이런 것은 잘못된 역사교육 탓이 큽니다. 위안부 문제는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실려 있지도 않아요.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 겁니다.”
 
 
  병환 중인 송신도 할머니
 
  사실 기자가 만나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이 모든 논의의 당사자, 바로 위안부 생존자다. 일본에는 한 분의 한국인 위안부 출신 생존자가 살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외부로 알려진 위안부 생존자는 한 명이라고 해야 한다. 더 계실 수도 있지만 과거를 밝히지 않고 살고 계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72년, 한국인 위안부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위안부 문제를 증언한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살다가 1991년에 돌아가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에 살고 계신 송신도 할머니는 만날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현재 입원 중이다. 특별한 병이라기보다는 노환 때문이다. 심장이 안좋아져 입원했는데, 입원 후에 더 몸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한때 치매 증세까지 나타났지만, 현재는 정상으로 돌아와 재활 중이라고 한다. 1922년생, 벌써 아흔을 훌쩍 넘겼으니 무리도 아니다. 할머니 대신 양징자 대표를 만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이하 전국행동)의 공동대표인 양씨는 송 할머니 곁을 20년 넘게 지켜 왔다. 양 대표에게서 송 할머니가 살아온 길을 들을 수 있었다.
 
  양 대표와 할머니는 1992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양 대표는 ‘종군위안부 우리 여성 네트워크’(위안부 네트워크)라는 모임에서 활동 중이었다. 여기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우리 동네에 위안부 출신 여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스스로 연락한 게 아니라 주변 사람의 제보였기 때문에 단체에서는 피해자로 추정되는 분에게 연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취재해 책을 쓰기도 한 가와다 후미코 씨가 개인적으로 할머니를 찾아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와다 씨에게 “조선 여자와 변호사가 함께 찾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조선 여자’가 재일교포 양징자씨였다. 30대 중반의 여자 변호사와, 30대 후반의 양 대표가 방문하자 할머니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흥’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나이 지긋한 남자 변호사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조선인 여성을 기대했으리라. 2박3일 동안 이어진 할머니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할머니는 중간중간에 재일 조선인의 욕을 했다고 한다. 대단한 건 아니고 “너도 매운 걸 먹니. 조선인은 매운 것만 먹어서 멍청해지는 거다”라는 둥 소소한 험담이었다. 도발하듯이 3일 내내 얘기 중에 조선인 욕을 했다. 3일째 되는 날 할머니는 양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구나” 왠지 그때 할머니 눈 속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고 양 대표는 표현했다.
 
  할머니를 돕는 사람들은 일본 정부에 소송을 걸자고 할머니를 설득했다. 결국 1993년 5월 소송이 시작됐다. 소장을 정식으로 제출하기 전에 할머니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양 대표에게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충청남도 논산 출신이다. 12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할머니는 16세 때 집을 나왔다. 어머니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을 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여성이 다가와 “전쟁터에 가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따라간 끝이 위안부였다. 일본군과 함께 중국을 떠돌며 7년간 위안부 생활을 했다. 우리에겐 해방, 일본엔 패전의 해인 1945년, 어느 일본군이 다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자”고 했다고 한다. 부부인 것처럼 결혼증명서를 이용해 무사히 중국을 빠져나왔다. 일본에 돌아오자 그 군인은 할머니를 버렸다. “미군 매춘부라도 하라”는 말을 남겼다. 할머니는 그 길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가해자의 땅에서 가해자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었을까. 위안부 생활 7년을 죽지 않고 살아낸 스물세 살 여인이 기차 아래로 몸을 던질 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도 할 수 없다.
 
[인터뷰] 시이 가즈오 위원장
 
“불편한 역사를 숨기는 것은 일본인의 자부심을 내팽개치는 일”

 
   양당 독재체제가 공고했던 일본 정치에 변화가 시작되는 걸까. 일본 공산당의 약진이 그야말로 눈부시다. 제1야당인 민주당이 방향을 못잡고 비틀대는 사이 중의원(미국의 하원)과 참의원을 합쳐 21석을 확보하며 제3야당으로 올라섰다. 제2여당은 유신당이다.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공산당 위원장(당대표에 해당)은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을 가진 정치인이다. 일본의 지인들 몇몇에게 시이 위원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긍정적인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공산당 소속만 아니었다면 총리도 됐을 인물”이라고 답한 사람도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터뷰를 위해 기자가 직접 만나 보니 사고가 정연하고 신념이 굳은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자신의 생각을 상대가 거부감이 들지 않게 부드럽고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이 위원장과 공산당의 입장을 묻자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고노담화를 재검토하겠다는 것은 역사를 위조하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라는 중대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단지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고노담화 전체를 흔드는 것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일방적 주장입니다. 사실 위안부 강제연행 같은 명백한 범죄행위를 지시하는 공문을 정부나 군이 작성하거나, 혹은 작성했다 하더라도 패전하면서 남겨뒀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1992년 가토 고이치 당시 관방장관이 발표한 가토담화에서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정부(군)의 관여를 인정한 바 있습니다.”
 
  시이 위원장은 위안부 문제의 논의 과정과 일본 정부의 오류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천착해 온 듯했다. 기자의 느낌으로는 한국의 웬만한 정치인들은 따라갈 수 없는 지식 수준이었다.
 
  일본 공산당은 당명에서 받는 인상과 달리 북한이나 소련, 중국공산당 등과 관계가 없다. 중국식의 무장혁명노선은 1955년에 일찌감치 포기한다고 결의했고, 북한과는 1980년 아웅산 테러를 계기로 절연했다. 시이 위원장에게 ‘그럼에도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고수하는 이유’를 물었다.
 
  “일본의 다른 당은 전후에 이름을 바꿨습니다. 전쟁범죄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지요. 공산당은 일관되게 전쟁에 반대해 왔습니다.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시이 위원장은 ‘약진’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듯했다. 한국에도 번역된 그의 저서의 제목도 《새로운 약진의 시대를 지향하며》다. 이유를 물었다.
 
  “일본 사회에는 전진에서 더 나아간 약진이 필요합니다. 공산당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통해 약진을 실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는 정부의 정당 보조금이나 기업의 후원금을 받지 않아요. 그 대신 기관지인 《아카하타(赤旗)》를 발행하고 있지요. 아카하타의 유료 구독자 수가 120만명이 넘습니다. 정치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소식을 담는 종합지이지요. 당원이 아닌 일반인들도 구독합니다. 배달은 당원들이 합니다.”
 
  시이 위원장은 “불편한 역사를 숨기는 것이야말로 일본인의 자부심을 내팽개치는 일”이라고 했다. 자부심을 지키는 방법에 대한 그의 생각에 더 많은 일본인들이 동의하는 날이 온다면 동북아 평화는 생각보다 강고하게 자리 잡을지 모른다.
 
  일본군인에게 버림받고 자살 시도
 
송신도 할머니 곁을 20년 넘게 지켜 온 양징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 대표.
  기차에서 뛰어내렸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할머니를 구해 준 사람이 그녀를 어느 조선인에게 데려갔다. 거기서 ‘함바집’(건설 현장에 딸려 있는 식당)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함바집 주인 또한 조선인이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그와 함께 살았다. 18살 연상의 그를 할머니는 때론 아버지처럼 여기며 살아온 듯하다. 두 사람은 식은 안올렸지만 실질적인 부부처럼 살았다. 할머니는 내내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어머니가 자신을 강제로 결혼시키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35년을 부부처럼 살았지만, 육체관계는 없었다고 한다. 양 대표는 “아마 할머니는 성관계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할아버지(남편)와는 그런 관계를 맺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과거를 일찌감치부터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스스로 들려줬단다. 주섬주섬 지난 세월을 들려주는 여자 옆에서 남자는 이를 죽이느라 불 위에서 옷을 털고 있었단다. 남자는 울면서 옷을 털었고 여자는 이가 죽는 걸 신기해하며 응시했다. 두 사람은 할머니를 버린 일본 군인의 집에도 찾아갔다고 한다. 낯선 나라의 낯선 집의 위치를 할머니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군인은 그곳에 없었다. 여자를 강간하고 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형무소에 있었단다.
 
  1981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다시 혼자가 됐다.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러 동네 관청(동사무소)을 찾았다. 여기에서 할머니와 직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급기야 경찰까지 왔단다. 할머니는 경찰의 권총을 뽑아들고 지역 의원에게 총을 겨눴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말. “나는 중국까지 가서 국가를 위해 싸운 여자야!”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전쟁 통에 여자가 중국까지 가서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할머니가 위안부였다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였다. 동사무소 쪽에서는 민단에도 연락했다. 위안부 네트워크에 할머니의 존재를 제보한 이가 바로 그때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간 민단 관계자였다.
 
  할머니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잠을 자기 위해 이불에 누워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양 대표는 ‘할머니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갑자기 환하게 웃더니 바로 잠이 들었다. 그 순간 양 대표는 결심했단다. ‘지금까지 아무도 할머니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구나. 나라도 할머니에게 엄마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다.’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자신의 어머니를 끊임없이 욕했다. 엄마가 억지로 결혼시키려 했기 때문에 자신이 도망을 쳐야 했고 결국 위안부가 되었다는 식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한이 너무도 컸다. 그 한 속에는 자신의 한도 더해졌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을 하며 몇 명의 아이를 낳았다.
 
  1993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재판이 시작됐다. 할머니가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소송을 시작하고도 5년쯤 흐른 어느 날 할머니는 “재판하기로 한 게 잘한 것 같다. 재미있어. 당신들 때문에 재미있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소송 과정을 영상으로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영화가 바로 〈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 안해룡 감독이 제작해 2009년 개봉했다. 제목이 암시하듯 할머니는 재판에서 졌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할머니의 상고를 기각했다.
 
  할머니의 시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011년 쓰나미가 몰려 왔을 때 할머니는 미야기현의 오나가와라는 해안에 살고 있었다. 쓰나미 피해를 상당히 입은 지역 중 하나다. 할머니는 쓰나미도 이겨 냈다.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에 할머니가 어느 병원에 계시는지는 공개하지 않는다고 양 대표는 설명했다.
 
  할머니는 양 대표를 만난 후에도 줄곧 ‘조선’의 것들을 부정했다고 한다. 누가 한복을 입힌 인형을 선물해 주면 “예쁜 인형도 많은데 왜 이런 인형이냐”며 밀쳐버리고, 조선말도 다 잊어버렸다고 했단다. 그런데 잊어버린 게 아니었나 보다. 할머니가 최근 병원에 입원하고 치매 증상이 왔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할머니가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하게 됐다고 한다. 한국어로만 말했다. 활동가들 중 재일교포인 양 대표만 할머니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괜찮아졌다.
 
 
  “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
 
도쿄에 있는 WAM(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은 위안부 증언과 관련 서류들을 모으고 있다.
  양 대표에게 지금까지 할머니 곁을 지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다. 양 대표는 “재판이 끝난 직후”라고 답했다. 양 대표의 말이다.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지고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졌지만 이런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재판에는 졌지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소송을 하며 당당히 활동가로 일어선 할머니를 보며 보람을 느꼈어요. 얼마 전에는 할머니가 퇴원하면 저의 집 가까이에서 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할머니를 돌보는 사람들 중 제가 유일한 재일교포거든요. 할머니는 전에 ‘동포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어요. 사람에 대한 믿음을 되찾으신 것 같다는 걸 느낄 때 보람을 느껴요. 하지만 아직 최종적으로 해결이 안 됐으니 아직 진정한 보람은 느낄 수 없지요.”
 
  —할머니를 지원해 온 모임인 ‘재일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위안부재판모임)’은 회원이 몇 명인가요.
 
  “재판 당시에는 800여 명이었고 지금은 500명가량 됩니다. 위안부재판모임은 대표도 없고 사무실도 없어요. 회비로 운영되는데 그 돈은 운영진의 식비나 교통비 같은 데는 쓰지 않아요. 순전히 집회를 열거나 뉴스레터를 제작하고 할머니를 지원하는 데에만 쓰지요. 일본의 시민단체 상당수가 그런 식으로 운영됩니다. 풀뿌리 활동이라고 할까요.
 
  일본 내에서 위안부 관련 운동의 역사는 대략 연대순으로 구분됩니다. 1990년대에는 일본 내에서 위안부 관련 소송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에 줄줄이 패소했지요.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일본군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戰犯)법정’을 준비했고요(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은 민간 차원에서 연 일종의 모의 재판이었다). 이때 새로운 여성 활동가들이 합류했어요.”
 
  국제법정을 주도했던 이는 여성운동가 마쓰이 야오리(松井やより) 씨였다. 아사히(朝日)신문 기자 출신으로 위안부 운동에 헌신한 그의 뜻을 이어받아 탄생한 것이 바로 웜(WAM·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박물관)이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일본에서 ‘의견서 채택 운동’이 시작됐지요?
 
  “2007년에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 결의안이 채택됐어요. 유럽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지요. 일본에서도 한번 해보자 해서 의견서를 발표하는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2008년 3월에 일본 지방 시의회로서는 처음으로 효고현 다카라즈카 시의회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의견서’를 채택했어요. 시의회 차원으로 중앙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 실시와 피해자의 존엄 회복을 위해 성실한 대응을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후 의견서 채택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졌어요.
 
  위안부 관련 문제를 다루는 모임들의 연합인 전국행동이 결성된 것도 이때쯤입니다. 2009년에 민주당 정권이 출범했지요.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거든요. 2010년에 전국행동이 출범했고 이후 1년에 두 번 정도 모여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허술했던 日 언론의 ‘요시다 증언’ 검증
 
와타나베 미나 WAM 사무국장이 요미우리 신문의 과거 위안부 보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등 일본의 일부 우익단체가 위안부 관련 시위를 하기도 했지요. 요즘은 어떤가요.
 
  “요즘은 재특회보다는 ‘나데시코 액션’이라는 단체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데시코 액션은 재특회처럼 물리적인 협박을 하지는 않아요. 제네바나 뉴욕의 유엔(UN) 사무실로 가서 시위를 하는 식이지요. 시위 현장에 가 보면 젊은 여성들이 많아요. 화려하게 꾸미고 나온 모습들이 저희 쪽 위안부 지원 모임과 대조적이에요.
 
  사실 일본 우익들은 지금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역사 문제에 비교적 가장 전향적이었던 《아사히신문》마저 ‘요시다 세이지’ 증언보도를 철회했잖아요. ‘사과 피로’라는 말도 공공연히 하고 있어요. 심지어는 《아사히신문》도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어요. 사과를 몇 번이나 했다고 사과 피로라는 말을 하나요?”
 
  요시다 세이지 씨는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동원부장으로 일했다고 알려져 있다. 요시다 씨는 1983년 쓴 책 《나의 전쟁범죄, 조선인 강제연행》에서 자신이 제주도에서 어떻게 위안부 여성들을 모집했는지 생생히 기술했다. 강제연행이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게 바로 문제의 ‘요시다 증언’이다. 요시다 씨는 지난 2000년 사망했다.
 
  지난해 8월 5일 아사히신문은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보도를 철회했다. 철회의 변은 이랬다.
 
  〈요시다가 제주도에서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는 증언은 허위라고 판단하고 기사를 취소한다. 당시 허위의 증언이란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사히신문》 내에 위안부 관련 특별취재팀을 꾸려 계속 취재를 해나간다고도 했다.
 
  후지TV도 지난해 제주도를 찾아 일명 ‘요시다 증언 검증 취재’를 했다. 방송 내용 또한 요시다 증언이 ‘허위’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 77세의 해녀는 “그런 이야기를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87세의 해녀는 “마을에서 50명이 끌려갔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고 답했다.
 
  과연 요시다 증언은 허위일까. 기자는 일련의 검증 행렬 이후 제주대학교의 교수로부터 취재 뒷얘기를 전해들었다. 당시 일본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 교수였다.
 
  “제가 했던 답변 중에 앞뒤 맥락을 다 자르고 인용을 했더군요. 게다가 현장취재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70년도 더 전의 일을 현재 생생히 기억할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겠습니까. 현장검증이라는 게 아주 허술했어요. 2주 남짓 머무르면서 제주도 해안을 다 돌면서 취재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도쿄에서 만난 한 재일교포는 요시다 증언을 이제야 재검증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왜 증언의 당사자가 죽고 난 후 아무도 답변할 수 없을 때 검증을 시작하느냐”는 말이다. 일리 있는 문제 제기다.
 
 
  올해가 마지막 기회
 
위안부와 한일 문제를 다룬 주요 언론 보도를 모아온 양석근 CIJ 대표가 일본 언론의 태도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 대표에게 ‘다시 재개된 한일 양국 간의 위안부 문제 협상을 어떻게 전망하는지’ 물었다. 양 대표는 ‘마지막 기회’라고 답했다.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어요. 어떻게든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일본 정부가 내놔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능성이 낮다고 보지만요.
 
  제가 불안한 건, 일본 정부가 ‘인도적인 조치’라며 돈을 내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 같다는 점이에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인도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요? ‘사과 피로’라는 말까지 도는 상황에서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의 제안을 거부하면 일본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게다가 한국의 여론은 어떨까요? 만약 할머니들이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한국 국민들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전 이렇게 생각해요. 이 문제의 당사자는 기본적으로 할머니들입니다. 일본 정부가 어떤 제안을 하는가와 별도로, 할머니들이 받아들인다면 모든 국민이 받아들여야 해요. 할머니들의 피해를 국가의 피해와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 전원이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야겠지요.
 
  저는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씨의 생각에는 분명히 반대해요. ‘그동안 일본이 한 사과가 충분했다’ 이런 얘기가 절대 아니에요. 위안부 문제 해결에서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여론이 불안 요소라는 겁니다.”
 
  도쿄 니시와세다에 있는 WAM을 찾아갔다. 벽에 붙은 위안부 희생자들의 사진을 바라봤다. 젊은 시절이 잘 상상되지 않는 다양한 국적의 슬픈 표정들. 와타나베 미나(渡邊美奈) 사무국장에게 물었다. “만약 이번에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희생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WAM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희생자의 증언과 관련 문서 발굴을 계속하고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나치게 앞서나간 질문이었던 걸까.
 
 
  ‘소녀상’ 불편해하는 일본인들
 
  위안부 문제 활동가가 아닌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재일교포인 양석근 CIJ주식회사 대표를 만나 물었다. 사실 양석근 대표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일반인으로 보기는 힘들다. 오륙년 전부터 일본 언론을 모니터링하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주요 보도들을 스크랩해 왔다. 양 대표는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이야기부터 꺼냈다.
 
  “일본인 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소녀상’입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한국 쪽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할 정도예요. 위안부 문제나 역사 문제에 대해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일단 잘못했다는 것 자체는 대부분 인정합니다. ‘전시에 사람 고기까지 먹었다는데 무슨 짓인들 못했겠느냐. 일본 군인들이 몹쓸짓을 했다는 건 인정한다’는 식이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넘어가자는 거예요. 조상들이 한 짓이니 이제는 지적하지 말아 달라는 게 일반적인 정서입니다.
 
  한일 관계에서 올 연말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가 될 거예요. 한국과 일본이 대립관계에 있는 건 양국 모두에 결코 좋지 않습니다. 지난 7일에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한일 양국 기업 간의 협력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어요. 중국 기업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기업이 협력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힘을 합쳐야 해요.”
 
  기자는 일본 현지에 머무르는 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한 낙관과 비관에 번갈아 휩싸이는 경험을 했다. 일본 사회 전반에는, 한일 양국 사이에 놓인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중국에 아시아의 ‘리더’ 지위를 빼앗길 지경, 아니 어쩌면 벌써 빼앗긴 일본은 한국을 적으로 오래 둘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정권이라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아베 정권이기 때문에’ 일본의 보수층 내지는 우익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비관적인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이번에도 총리 개인의 사과로 그치거나, 돈으로 해결하자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각료회의의 결정하에 사죄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야말로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양국 국민 마음에 서로에 대한 혐오가 지병처럼 자리 잡을지 모른다. 올해는 한일 수교 50주년이 되는 해다. 새로운 반세기가 시작되는 내년에는 복잡한 심경 없이 나리타 공항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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