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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국사교과서 논란과 노근리 사건

글 :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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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의 대상인 과거의 사건들과 추세들은 엄격한 대조 실험 불가능… 왜곡 가능
⊙ “역사 교과서에 실린 노근리학살 사건은 피란민을 ‘인간방패’ 삼아 전선 돌파하려던
    인민군의 전술이 근본원인일 것”
⊙ 노근리 사건은, 현대사를 정확히 아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卜鉅一
⊙ 69세.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 저서: 《역사가 말하게 하라》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역사 속의 나그네》
    《비명을 찾아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등.
6·25전쟁 당시 충북 영동군 노근리 학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방한한 미국측 노근리 사건 대책단장 루이스 칼데라 육군성장관(가운데)과 한국측 대표들이 2000년 1월 20일 노근리 학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람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훈을 얻는 것은 중요하고 교훈은 과거의 경험에서 얻을 수밖에 없는데, 과거의 경험을 다루는 학문이 바로 역사학이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런 실용적 차원보다 훨씬 근본적인 수준에서 중요하다. 폴란드 역사학자 콜라코프스키(Leszek Kolakowski)의 말대로, “우리는 처신이나 성공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우리가 광대하고 영원한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이므로, 자신을 알기 위한 노력은 세상을 긴 시평(時平) 속에서 널리 살펴야 한다. 세상은 참으로 넓고 오래되었다.
 
  이 우주의 시공(時空)은 대략 138억년 전에 생겼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태양계는 50억년 전에 생겼고 지구는 45억년 전에 생겼다. 40억년 전 즈음에 최초의 생물이 나타났다.
 
 
  역사의 범위
 
  한 번 생명체가 나타나자, 많은 종(種)들이 빠르게 진화(進化)해서 분화(分化)했다. 그런 진화에서 결정적 사건은 세포 안에 유전자(遺傳子)들이 그냥 들어 있는 원핵(原核)생물에서, 즉 박테리아에서, 막 안에 유전자들이 들어 있는 진핵(眞核)생물로의 진화다. 그런 세포들이 협력해서 하나의 개체를 만들면서, 다세포생물들이 나왔다. 따라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박테리아들의 집합체다. 우리 유전자들도 원래는 박테리아들의 유전자들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박테리아들과 공생한다. 그런 박테리아들의 유전자들은 우리 자신의 유전자들보다 적어도 100 곱절은 많으리라고 추산된다. 우리가 자신을 제대로 알려면, 생물들이 진화한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500만년 전에서 700만년 전 사이에 인류와 침팬지가 나뉘었다. 동아프리카에서 침팬지의 한 무리가 다른 무리들과 단절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해서 인류가 나왔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현생 인류는 15만년 전부터 20만년 전 사이에 나타났다. 그들은 대략 7만년 전부터 동아프리카로부터 다른 대륙들로 퍼지기 시작해서, 다른 형태의 인류들을 완전히 대치(代置)했다.
 
  기원전 9500년경에 서남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길들이기(식물의 재배와 동물의 사육)가 시작되었다. 이라크의 동북부, 터키의 동남부, 시리아의 서부, 그리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어지는 지역은 산악이 많아 ‘산악 측면(Hilly Flanks)’이라 불리는데, 이 지역엔 길들이기에 적합한 식물들과 동물들이 많았다. 산악 측면에서 나온 농업 기술은 지중해 지역과 유럽 대륙으로 퍼졌다. 동아시아의 농업은 산악 측면보다 2000년가량 늦은 기원전 7500년경에 중국의 황허(黃河)와 양쯔강(揚子江)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현생 인류가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3만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로 보인다. 한반도에 농업 기술이 들어온 것은 기원전 1500년 전으로 여겨지는데,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상한이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아쉽게도, 이 시기에 한반도와 랴오둥(遼東)에 자리 잡았던 정치 세력들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중국의 사서(史書)들에 나온 단편적 기록들에 의존해서 그들의 삶을 엿볼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 몇백만 년은 우주 역사나 지구 역사에서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한반도 사람들의 역사 몇천 년은 인류 역사에서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긴 세월의 맥락에 놓고 살펴야, 비로소 우리가 일상적으로 역사라 부르는 ‘한반도의 최근 역사’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고 우리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균형 감각을 갖추게 된다.
 
  역사학은 과학의 방법론을 지니지 못했다. 역사학의 대상인 과거의 사건들과 추세들은 엄격한 대조 실험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실과 반사실(counterfactual)을 역사가가 마음속으로 비교하는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에 의존한다.
 
  게다가 역사학은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 자신의 이론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생물학이나 사회과학이 나름으로 마련한 이론들을 빌려 쓴다. 그러다 보니, 일관된 방법론이 적용되기 어렵고, 생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한 지식이 빈약할 수밖에 없는 역사가들은 문제의 본질을 밝혀내는 통찰 대신 ‘사소한 설명’에 그친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역사학의 근본적 문제로 지적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따라서 어떤 뛰어난 역사 해석도 완전히 증명할 수 없고 어떤 그른 역사 해석도 완전히 논파(論破)할 수 없다. 자연히, 과학적 방법론에 따른 엄격한 검증 과정을 통해서 그른 이론들이 제거되고 현상들을 보다 잘 설명하는 가설들이 나오는 진화 과정이 역사학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역사의 왜곡
 
  사정이 그러하니, 역사는 왜곡되기 쉽다. 역사적 사실들이 워낙 방대하므로, 어지간한 역사가라면 역사에서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듯한 사실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사정은 늘 악용되게 마련이어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왜곡된 역사들이 씌어졌고, 특히 적대적 세력에 대한 증오와 비방이 역사로 둔갑하는 일들이 잦았다.
 
  20세기 초엽 전체주의(全體主義)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역사 왜곡은 조직적이 되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교리조차 부인하고 오로지 지도자의 뜻을 따른다. 그리고 지도자가 제시하는 사회적 목표에 온 사회적 자원을 투입한다. 당연히 ‘절차적 안정성’이 없어서 모든 것들이 지도자의 뜻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되고 어제의 사실이 오늘은 허위가 되는 일이 늘 나온다.
 
  전체주의가 시도하는 것은 역사의 조작을 통한 시민들의 통제다. 조지 오웰은 이 점을 통찰했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
 
  스탈린 치하의 공산주의 러시아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역사의 조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도자의 뜻에 맞도록 역사를 조직적으로 끊임없이 바꾸는 일에선 북한이 으뜸이다.
 
  북한 정권의 선동선전의 영향을 직접 받으며, 국내 친북(親北) 세력의 영향력이 큰지라, 우리 사회에서 나온 역사서들 가운데 적잖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 이번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은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AP통신의 노근리 사건 보도
 
  좌파(左派) 지식인들에 의한 역사 왜곡은 보통시민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다. 모든 사건들에 대한 조사와 서술이 왜곡되어서,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깊은 지식인들도 모르는 새 왜곡된 사실들로 우리 역사를 구성하게 된다.
 
  전형적인 것은 근년에 국제적 주목을 받아 중등 역사 교과서에도 실린 노근리 사건이다. 이번 역사 교과서 논쟁에서 우파(右派) 지식인들은 편향된 검인정 교과서들이 노근리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어 미군의 양민학살을 강조하면서도 북한군의 조직적인 양민학살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했다.
 
  북한군의 양민 학살을 언급하지 않은 책은 교과서가 될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노근리 사건이 실제로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이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우리 사회의 통념과 달리, 노근리 사건은 양민학살 사건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1999년 9월 29일 미국 통신사 AP(Associated Press)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하순에 한국의 노근리에서 미군이 한국 피란민들을 대규모로 죽였다는 주장을 보도했다. AP는 “미군이 힘없는 민간인 수백 명에게 기관총을 쏘았고, 제1기병사단의 노병(老兵) 6명이 자신들이 민간인들에게 총을 쏘았다고 증언했으며 다른 6명이 그런 상황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AP는 당시 노근리에 주둔했던 7기병연대 2대대 소속 노병으로 확인된 에드워드 데일리와의 대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이어 1999년 12월 29일 AP는 후속 보도를 통해 “미군 제트기들이 적군 잠입자들을 품고 있다는 의심에서 민간인 옷차림의 한국인 집단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인 생존자들의 탄원
 
마이클 애커먼 미 육군 감찰감(중장)이 이끄는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은 1999년 10월 29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터널 현장을 방문, 조사했다.
  이 보도의 내용이 심각한 문제임을 인식한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조사단은 15개월에 걸쳐 국립기록보관소(National Archives) 소장 문서 100만 페이지 이상을 살폈고, 200명가량 되는 미국인 증인들과 대담했으며, 한국인 증인 76명의 대담 기록과 구술 증언들을 분석했다. 아울러 신문 기사들, 4만5000통가량 되는 공중 촬영 영상 및 다른 법의학 조사 결과들을 면밀히 조사했다.
 
  이 기간에 한국 정부도 조사단을 꾸려 진상을 조사했다. 2000년 1월엔 미국 육군장관이 노근리 현장을 방문해서 증인들의 얘기를 듣고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어 육군장관은 김대중 대통령과 조성태 국방장관을 예방하고 조사에 관해 논의했다.
 
  마침내 2001년 1월 11일 미국 육군부는 〈노근리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먼저 조사의 한계를 인정했다. “불행하게도, 50년의 경과는 이 특정 사건을 둘러싼 모든 사실들을 우리가 알 가능성을 크게 줄인다. 심적 외상, 나이, 그리고 매체들을 포함한 다수 요소들이 한국과 미국의 증인들의 회상에 영향을 미쳤다.”
 
  노근리 사건의 생존자들이 1997년 9월 10일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낸 청원에 따르면, 한국인 증인들의 진술은 대략 아래와 같다.
 
  〈1950년 7월 25일 미군이 충북 영동군 영동읍의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 500~600명을 마을에서 철수시켰다. 미군 병사들은 마을 사람들을 하가리의 마른 시내 바닥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밤을 지내라고 명령했다.
 
  7월 26일 아침 호송한 미군들은 사라졌지만, 마을 사람들은 경부선을 따라 서쪽으로 걸었다. 마을 사람들이 황간면 노근리 가까이 이르렀을 때, 도로방어 진지의 미군 병사들이 그들을 막았다. 미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경부선 철길 위로 올라가도록 한 다음 그들의 몸과 소지품들을 조사했다. 이어 미군들은 미군 항공기들과 무선으로 교신해서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조금 뒤에 항공기들이 날아와 폭탄과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100명가량이 죽었다. 생존자들은 철길 아래의 작은 배수구로 피신했다. 미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배수구에서 몰아내어 근처의 철길 터널(railroad overpass)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터널의 양 입구에서 4일 동안 (1950년 7월 26~29일) 총을 쏘았다. 이 총격으로 300명가량이 추가로 죽었다.〉
 
 
  피란민 행렬과 북한군의 위장 침투
 
  노근리 사건을 부른 요인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피란민들이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밀려 남쪽으로 후퇴하는 미군들을 따라나섰다는 사실과 북한군이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미군 지역으로 침투하는 전술을 썼다는 사실이다.
 
  침입해 오는 북한군에 대한 두려움은 남한 전역에 퍼져서, 남한 주민들의 다수는 승리한 북한군을 환영하는 대신 패배한 국군과 낯선 미군을 따라나서서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피란민들이 좁은 도로를 메워서 미군 부대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후방에서 준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은 심각한 도로 상황을 악화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선동해서 피란하도록 만들었다.
 
  북한군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민간인 복장으로 피란민에 섞여 미군 후방으로 침투했다. 그들은 유격전을 펴면서 미군의 후방 기지들과 시설들을 파괴했고 미군 부대들을 뒤에서 기습했다. 심지어 피란민들을 인간방패로 삼아 앞세우고 국군과 미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곤 했다.
 
  피란민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심각함을 깨달은 미군 당국은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한국경찰이 피란민을 통제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이 정책에 따라, 7월 26일 미 8군 사령부는 ▲피란민들의 전투선(battle lines) 월경(越境) 상시 금지 ▲장성급 장교의 승인 없이 마을 사람들을 철수시키는 행위 금지 ▲필요한 지역과 노선에서 피란민들을 소개시키는 한국경찰이 따라야 할 절차 및 ▲민간인 야간 이동의 완전 금지로 이루어진 ‘피란민 이동 통제 계획’을 마련해서 전파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급습으로 허물어진 한국경찰 조직이 교전 지역의 피란민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많은 피란민이 북한군의 침투 작전에 이용되고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비극을 낳았다.
 
 
  1950년 7월 22~29일 상황
 
  미군 제1기병사단은 1950년 7월 22일 영동 서북쪽의 대전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한 미군 제24보병사단과 교체해서 전선을 맡았다. 예하 7기병연대는 7월 22일에 포항에 상륙했고 7월 25일엔 영동 동쪽에서 같은 사단의 5기병연대를 지원했다. 7월 26일 새벽 7기병연대 2대대는 북한군에 포위되고 있다는 두려움에 명령 없이 노근리 근처로 혼란스럽게 물러났다. 그들은 26일 늦은 밤까지 그 지역에서 포기된 병력과 물자를 회수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피란민들이 공중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는 시간에 그곳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7기병연대 1대대는 7월 26일 오후에 노근리 근처에 닿았다. 그들은 5기병연대 병력과 교체해서 2대대 동쪽을, 즉 2대대의 후방을 점령했다.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7기병연대는 북한군과 교전 상태에 있었고 29일에 후퇴했다. 이 기간에 7기병연대는 노근리의 서쪽과 남쪽엔, 즉 영동 쪽엔 아군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조사단은 미군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철수시켰다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설명할 길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조사단은 마을 사람들이 이동하도록 강요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황급한 퇴각 중에 이미 가득 찬 도로들에 400명의 피란민을 더해서 포화된 상황을 악화시킬 목적으로 병사들이 그들의 지정 이동 경로에서 대략 3마일을 벗어나 임계리 마을까지 찾아갈 타당한 군사적 이유는 없었다. 아울러, 피란민 집단 속에 섞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북한군 잠입자들에 대한 널리 퍼진 지식과 두려움을 고려하면, 병사들이 이 철수를 수행했을 것 같지 않다.”
 
 
  노근리 근처에 대한 공중 공격은 있었나?
 
  한국인 증인들은 7월 26일 정오 경에 미군들이 무전기로 미군 항공기들과 교신해서 철로 위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도록 했고 조금 뒤에 항공기들이 날아와 폭탄과 기관총으로 그들을 공격했으며, 이 공중 공격으로 100명가량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조사단은 해당 시간과 장소에 대한 공중 공격을 뒷받침할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황간 인접 지역에 대한 미국 공군의 공중 공격으로 기록된 것은 7월 27일에 있었다. 이것은 ‘우군 오폭(friendly fire)’이었는데, 07시15분에 F-80기 한 대가 7기병연대 1대대의 지휘소를 실수로 기총소사한 것이었다.
 
  우군 오폭이 나오자, 7기병연대장은 자기 지역의 우군 오폭을 막기 위해 전술공군통제반(Tactical Air Control Party·TACP)을 배속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엔 1기병사단에 1개 TACP만이 배속되었다. 이 TACP는 7월 26~29일 기간에 노근리 근처에 있지 않았다.
 
  TACP는 차량에 설치된 AN/VRC-1 무전기로 공군 부대들 및 항공기들과 교신할 수 있었다. 반면에, 보통 육군 병사들은 무전기로 항공기와 교신할 수 없었다. 육군 부대가 공군 부대에 공중 공격을 요청할 수는 있었지만, 그런 요청은 육군과 공군의 계통을 거쳐야 하므로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따라서 미군 병사들이 항공기들과 교신해서 철로 위의 한국 피란민들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고, 곧바로 미군 항공기들에 의한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한국인 증인들의 진술은 사실일 수 없다.
 
  다만, 7월 28일 밸리 포지 호에서 발진한 해군기들이 노근리 지역으로 유도되어 7기병연대 전방 철로 터널 속에 숨은 북한군을 공격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50년 8월 6일자 및 9월 19일자 노근리 지역 항공 사진들을 본 판독 전문가들은 공중 폭격의 흔적이 없다는 데 합의했다. 기총소사 흔적에 관해서는, 한 전문가만이 흔적이 있다는 의견이었고 나머지 4명의 전문가들은 흔적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이런 정황들과 증거들을 고려해서, 조사단은 “기총소사가 1950년 7월의 마지막 주에 노근리 근처에서 있었을 수 있고 한국인 민간인들을 다치거나 죽게 했을 수 있지만, 그런 공중 공격은 한국인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적 공격이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상황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증인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린다. “미국조사단은 노근리 근처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지만, 모든 이용 가능한 증거들을 고려하면, 1950년 7월의 마지막 주에 노근리 인근에서 있었던 북한군의 진출과 미군의 철수에 앞섰거나 또는 동시적이었던 소화기 사격, 포병 및 박격포 사격 및 기총소사의 결과로 수(數) 미상(未詳)의 한국인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친 것은 명백하다. … 민간인들의 죽음과 부상은 어느 곳에서 일어났든 전쟁에 내재하는 불행한 비극이며 의도적 살해가 아니었다.”
 
  7기병연대 병사들이 한국인 민간인들을 의도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결론은 중요한 정황적 증거에 의해 떠받쳐진다. 7월 27일 7기병연대를 지원하던 77야전포병대대의 대대장이 7기병연대 2대대 지역을 찾아서 보병 부대가 충분한 화력 지원을 받는지 확인했다. 그날엔 육군 야전군 사령관실의 관찰조가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7기병연대 지역을 찾았다. 그리고 AP 기자를 포함한 7명의 저명한 기자들이 7기병연대 전선을 시찰했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노근리 근처에서 많은 한국인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의 증거를 보지 못했다.
 
  반면에, 북한군이 7월 28일에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삼아 미군을 공격했을 가능성은 작지 않다. “7기병연대 1대대의 지휘관은 (7월 28일) 온종일 연대 지역의 우측과 좌측을 뚫으려는 북한군의 시도들을 보고했다. 보고들은 북한 인민군이 그들의 공격 시에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들로 삼아 앞세우고 떠밀었음을 시사했다.”
 
 
  미군은 노근리에 없었다
 
  이 논점에 관한 조사단의 의견은 단호하다. “노병들의 진술들, 문서들, 그리고 문서들의 부재를 포함한, 모든 이용 가능한 증거들에 바탕을 두고서, 미국조사단은 미군 지휘관들이 1950년 7월 25일에서 29일 사이에 노근리 인근에서 피란민들에게 사격하라는 구두 또는 문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본다. 조종사들은 노근리 인근에서 민간인 피란민들을 공격하고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미국 육군 기록엔 한국인 민간인들에 대한 사격을 허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서들이 있다. 그러나 조사단은 그것들이 노근리의 지상 사격과 관련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1950년 7월 24일 10시에 기록된 8기병연대 전문(電文)철에 나온 축약 전문이다.
 
  “피란민들은 전선을 넘지 못하게 함. 선을 넘으려는 모든 자들에게 사격함. 여인들과 아이들의 경우엔 신중하게 할 것.”
 
  이것은 8기병연대에서 제1기병사단 본부로 파견된 연락장교가 본대에 보낸 전화통신문이다. 이 전문은 제1기병사단 본부나 8기병연대의 예하 부대에서 기록하지 않았다. 5기병연대 및 7기병연대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전문은 사단이 마련하고 있는 피란민에 대한 방침을 연락장교가 잘못 전해 듣고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8기병연대는 7월 26일에 노근리 지역에서 황간으로 물러났다.
 
  또 하나는 1950년 7월 27일에 제25보병사단장이 지휘관들에게 보낸 비망록(memo)이다.
 
  “한국경찰은 첨부된 투명도에 표시된 파란 선들 사이의 지역에서 모든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고 철수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들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에 따라 행동을 취해야 한다.”
 
  위의 비망록에서 파란 선들 사이의 지역은 곧 북한군이 점령할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었다. 한국경찰에 대한 지시는 이미 7월 25일 이전에 내려갔다. 따라서 위의 비망록은 전투를 앞두고 한국인 민간인들을 철수시켜 보호하려는 뜻이었다. 어쨌든, 제25보병사단은 1950년 7월 마지막 주에 노근리 지역에서 작전하지 않았다.
 
  공군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조사단과의 대담에서 1950년 7월과 8월에 한국에서 비행한 미국 공군 전투 조종사들은 사격하기 전에 목표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먼저 확인하라는 지침을 따랐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육군 부대 지역으로 접근하는 민간인들을 기총소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의심스러운 증언들
 
  미군 문서들엔 노근리 인근에서 죽거나 다친 한국인 민간인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 미국조사단은 사상자 수를 결정할 수 없었고, 한국조사단에 자료를 요청했다. 한국조사단은 한국인 생존자들의 모임과 영동군청이 1950년 7월의 마지막 주에 노근리 인근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된 사람들이 248명이 된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미국조사단에 통보했다. 미국조사단은 그것이 확인되지 않은 숫자며 너무 많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특히 1950년 8월 6일에 찍은 항공 정찰 사진에 시체나 대규모 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한국 측도 그런 의견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보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믿을 만한 숫자를 제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000년 12월에 한국에서 열린 양국 운영위원회의 회합에서 한국 측은 248명의 숫자를 그대로 제시했다.
 
  미군 노병들 가운데 수백 명의 피란민 시체를 본 사람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에드워드 데일리며, 그의 증언은 AP 보도의 핵심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건 당시 7기병여단 2대대 H중대 소속으로 노근리 지역 전투에 참가했고 미군이 한국인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것에 가담했으며 늘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는 제1기병사단 27병기중대(Ordnance Company)에서 1949년 3월 18일부터 1951년 3월 16일까지 복무했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사건 당시 노근리 근처에 있지 않았다.
 
  7기병연대 소속이었던 델로서 플린트와 유진 헤설먼은 미군이 한국인 민간인들을 공격했다고 AP와의 대담에서 증언했다. 특히 헤설먼은 중대장 멜본 챈들러 대위가 “저 많은 사람들을 어쩌나. 그들 모두를 없애자(The hell with all those people. Let’s get rid of all of them)”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은 미국조사단과의 대담을 거절했다. 7기병연대의 ‘전쟁 일지’엔 두 사람이 전투 초기에 부상해서 후송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플린트는 늦어도 7월 26일 이전에, 그리고 헤설먼은 늦어도 7월 27일 이전에 후송되었다. 따라서 두 사람 다 사건 당시엔 노근리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증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애초에 AP가 자신들의 얘기를 잘못 알아들었거나 일부러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의도적 살해 없었다
 
  한국인 증인들이 고발한 일들은 무척 심각한데, 그들의 증언들은 질과 내용에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한국인 증인들은 절반 이상이 사건 당시 16세 이하였다. 한국인 증인들은 50년이 지났는데도 아주 구체적으로 날짜, 장소 및 군사적 상황을 진술했다. 증인들은 ‘정찰기’나 ‘포병’과 같은 용어들을 써서 상황을 설명했는데, 군대 경험이 없이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특히 어린이들과 부인들이, 그런 전문적 용어들을 썼다는 사실은 그들의 기억이 많이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많은 증언들이 증인 자신의 경험인지 남에게서 들은 얘기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미국조사단은 노근리 사건을 평가할 때,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군은 준비가 전혀 안 된 채 전쟁에 투입되었고 강력한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피란민이 길에 가득 찼던 것도 큰 문제였지만, 북한군이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잠입해서 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펴는 상황은 더욱 큰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피란민들이 희생될 가능성은 클 수밖에 없었다.
 
  분명한 것은 노근리 근처에서 미군이 의도적으로 피란민들을 살해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두려움에 질린 미군들이 피란민들을 위장한 북한군으로 오인해서 사격을 했을 수는 있어도, 의도적으로 피란민에 대해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미군 지휘관은 없었다. “미국조사단이 조사한 문서 증거들도, 미군 노병들의 진술도 한국인 민간인들의 의도적 살해 가정을 떠받치지 않는다. 1950년 7월 하순에 노근리 인근에서 민간인들에게 닥친 것은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은 미국과 한국의 군대에 강요된 전쟁의 비극적이고 깊이 유감스러운 부수물이었다.”
 
 
  미국조사단의 보고서에 대한 평가
 
정은용 노근리 양민학살 대책위원장(오른쪽 손 든 사람)은 1999년 10월 5일 노근리 쌍굴다리 앞 현장에서 국회 행정위 소속 의원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미국조사단의 보고서가 나오자, 예상대로 많은 비판이 따랐다. 가장 거센 비판은 8명의 외부 운영위원들 가운데 하나였던 피트 맥클로스키로부터 나왔다. 그는 노근리 사건은 미군 상부의 발포 명령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조사단의 보고서는 호도(whitewash)’라고 평가했다.
 
  운영위원의 비판인지라, 맥클로스키의 비판은 조사단으로선 특히 아프다. 그가 1951년에 해병대 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해서 무공 훈장들을 받은 노병이라는 사실도 그의 비판에 무게를 실어 준다. 다른 편으로는, 그가 미국의 대표적 반전(反戰)주의자 정치인이었고 은퇴한 뒤 북한을 방문해 적과 ‘화해’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그가 노근리 사건을 1890년에 미국 기병대가 원주민 200명을 사살한 ‘운디드 니(Wounded Knee) 학살’에 비교한 것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노근리 사건과 같은 일을 반 세기 뒤에 제대로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정부의 조사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미국 정부나 미군 당국이 되도록 책임을 지지 않으려 애썼을 것도 분명하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미국조사단의 보고서를 읽어 보더라도, 미국 정부와 미군 당국이 1950년 7월 하순에 노근리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밝혀 보려는 진지한 의지를 지녔고, 그들이 그런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성실하고 부지런히 노력했고, 객관적으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서 공정한 절차와 방법을 따라 평가했으며, 조심스럽고 공평하게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그 보고서가 내놓은 “노근리에서 일어난 사건은 ‘비극적이고 깊이 유감스러운 전쟁의 부수물’이었지 미군에 의한 한국인 민간인들의 학살은 아니었다”는 결론은 아마도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노근리 사건의 본질
 
  미국조사단의 보고서가 강조한 것처럼, 노근리 사건은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온 비극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다른 전쟁들에선 보기 드문 요소 하나가 근본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보고서에 상세히 기술된 것처럼, 북한은 민간인들로 위장하고서 피란민들에 섞여 미군의 후방으로 잠입해서 유격전을 벌였다. 민간인들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피란민들이나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앞세우고 미군이나 국군 진지를 공격했다. 북한군이 그런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전술을 쓰지 않았다면, 노근리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나오는 역사서들은 북한군의 그런 비인간적 전술을 언급하지 않는다. 노근리에서 북한군이 민간인들을 억류하고서 그런 전술을 실제로 썼을 가능성에 대해선 침묵한다. 그저 노근리에서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고 그 책임은 미군에 있으니, 양민학살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이제 정설이 되어서, 누구도 그런 주장에 맞서기 어렵다.
 
  델파이 신전(神殿)에 씌어 있었다는 “그대 자신을 알라”는 충고보다 더 멋진 충고는 드물다. 신탁(神託)을 얻기 위해 신전을 찾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는 사실 덕분에 그 충고에는 또 한 겹의 묘미가 담긴다.
 
  사람의 앞날은 우연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자질과 걸어온 길이 그의 앞날을 대체로 결정한다. 따라서 ‘자신의 앞날을 알고 싶어하면, 먼저 자신의 됨됨이를 들여다보라’고 그 충고는 얘기하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앞날을 가늠하고 보다 합리적 선택들을 하려면, 어느 사회나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체성을 아는 일에서 필수적인 과정이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역사의 왜곡이 심각한 우리 사회에서 현대사를 정확하게 아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서두에 인용한 콜라코프스키의 말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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