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묻고, 중개인 있어 부동산과 비슷… 부동산에는 각종 세금, 미술품은 면세
⊙ 10억짜리가 100억, 100억짜리가 10억 되는 고무줄 가격 속성
⊙ 미술품 과세 첫해… 상징성 외에 효과 없을 듯
⊙ 10억짜리가 100억, 100억짜리가 10억 되는 고무줄 가격 속성
⊙ 미술품 과세 첫해… 상징성 외에 효과 없을 듯
전두환(全斗煥) 전(前) 대통령의 자택을 비롯해 아들 재국씨 소유의 회사·농장 등에서 400여 점의 미술품이 쏟아져 나왔다. 조세포탈·횡령·배임죄로 수감된 이재현(李在賢) CJ회장은 그룹 임직원들의 이름으로 고가 미술품을 사들인 정황이 검찰에 포착됐다. 또 미술품이다. 지난 2008년 삼성그룹의 비자금 특검에서도 미술품은 핫 이슈였다. 그룹이 비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미술품을 활용하지 않았느냐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쯤 되면 ‘고가(高價) 미술품=비자금’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생긴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가 미술품은 언제부터 비자금 조성의 한 축이 됐을까. 재벌가 사모님들의 놀이터로 인식되는 미술관과 갤러리, 금권(金權)의 얽히고 설킨 역학관계를 추적했다.
최고봉의 사치 수단
고가 미술품 세계는 철저히 ‘있는 자들만의 세상’이다. 일반 서민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20년째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A씨의 말이다.
“초보 컬렉터에게 그림 값을 얘기하면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 뒤에 하는 말이 ‘그림이 그렇게 좋아요? 그 돈 모아서 빌딩을 사는 게 낫지 않나’라며 주저주저합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고가 미술품은 빌딩 정도는 갖고 있는 분들이 하다하다 들어오는 분야거든요’라고요. 일반인의 시각에서 접근하면 이해를 할 수 없는 세계죠.”
30년째 작품을 구입하고 있는 컬렉터 B씨는 미술품을 ‘최고봉의 사치(Ultimate Luxury)’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렵고 황당한 것이 미술입니다. 미술품은 사치의 최고 꼭짓점에 있습니다. 아파트·빌딩 사고, 외제차 여러 대 굴리고, 요트 타고, 몇백만 원짜리 와인 마시고, 사치라는 것을 하다하다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이 미술품 시장입니다.”
—왜 그럴까요.
“폼 나니까요. 미술품은 지성을 갖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재화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지성에 대한 굶주림이 큽니다. 문학에 대한 안목은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알 수 없죠. 자신의 지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미술품밖에 없습니다. ‘K회장 방에 누구 그림 있더라’는 얘기 자체로 끝난 겁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죠. 자본력과 지성, 교양을 보여주는 총 집합체가 미술품입니다. 람보르기니, 요트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지만 미술은 다릅니다. 미국·유럽의 최고 상류층은 미술관 이사들입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작품을 보고, 사고, 사회에 기증하고, 그제야 자격이 생기는 명예 자리입니다. 그들만이 누리는 폼 나는 사회죠.”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빌딩을 소유한 이가 몇 명이나 될까. 이들의 말을 뒤집어보면 국민의 대다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소리다. 미술계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삼청동 화랑 대표 A씨는 “미술품은 절대 민중의 것이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가장 힘있는 이들이 미술품을 소유했다. 주술이 강했을 때는 제사를 관장했던 제사장, 종교의 힘이 커지면서 교황, 다시 왕실이 소유했다 최근에는 자본가가 소유하게 됐다. 역사가 입증한 셈이다”고 말했다.
미술품 컬렉터이자 업계에 종사했던 B씨의 말 또한 비슷하다.
“미술품은 대중화된 적이 없고, 될 수가 없습니다. 미술의 대중화란 미술관에 가서 관람료 내고 구경하는 것, 집 안에 장식용으로 몇백만 원짜리 액자를 거는 정도입니다. 미술품은 늘 대중과 멀리 있었고, 대중과 멀어야만 그 가치가 있는 겁니다. 월급쟁이에게 연봉 털어서 작품 한 점 구입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그렇게 작품을 모아 컬렉터가 되라고 조언할 수 있을까요. 미술품의 대중화라는 것은 특정 계층만 누리는 세계라는 불편한 진실에서 벗어나고자 그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C씨는 “우리나라 경매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의 90%는 500만원 이하의 작품들이다. 미술에 애정이 있다면 직장인도 컬렉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연봉이 어느 정도면 가능하냐’고 묻자 “1억원 이상 정도면”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재산가치에 대해서는 “작품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면 최소 1000만원짜리 이상은 사야 한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미술품이라는 것은 그 문턱이 많이 낮아져 봐야 서민과는 거리가 멀다는 소리다.
갤러리라는 공간이 주는 무언의 압박
미술시장의 세 축은 화가(조각가)와 그들의 작품을 사려는 컬렉터, 그리고 둘 사이를 잇는 화상(畵商·그림 장수)이다. 화상이 그림을 팔기 위해 진열하고 관람토록 하는 공간이 화랑(畵廊)이다.
지난 8월 7일 삼청동에 위치한 갤러리현대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잠시 기자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작품을 보고 싶다’고 하자 “1층만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이곳에는 제주도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화가 이왈종의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기자가 미술에 문외한이어서겠지만 갤러리는 영 낯설다. 그림은 얼마나 가까이서 봐야 하는지, 한 작품을 보는 데 몇 분 정도를 할애해야 하는지, 그림 가격은 물어야 예의인 건지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액자를 걸어놓은 새하얀 벽면이 주는 무언(無言)의 압박이었다.
갤러리현대 옆에 위치한 금호미술관에서는 ‘아트피스: 예술로 힐링하는 법’이라는 설치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관람료는 성인 4000원. 미술관 직원은 “설치 미술전(展)이어서 그림이 한 점도 없는데 괜찮으냐”고 묻더니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에 작품이 있고, 순서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둘러보면 된다”고 말했다. 소정의 입장료를 내서인지 이번에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갤러리 문고리를 잡아당길 때 왠지 주저하게 되는 마음, 그것은 기자만의 심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현대미술 컬렉터이자 캐나다 토론토 요크대학의 도널드 톰슨(Donald Thompson) 교수의 《은밀한 갤러리》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사람들이 갤러리의 창문을 통해 미술작품을 보는 모습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벨을 누르려다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만다. 안에 있는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특별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위압적인 분위기에 위축돼 갤러리 문턱을 넘지 못할 뿐이다. 혹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갤러리 딜러가 자신을 무슨 훼방꾼 대하듯 하면 어쩌나, 아니 자신을 바보로 알고 무시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것이다. (중략) 으레 딜러는 뒤를 쫓아다니며 자신들끼리 사용하는 용어로 온갖 설명을 해댄다. 딜러들은 ‘미술관급 품질’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 말은 작품 구입은 아예 꿈도 꾸지 말하는 의미다. 슈퍼스타급 갤러리로 불리는 곳은 시시한 사람들은 발도 못 붙이게 만드는 심리적 장벽을 더욱 높이 쌓고 있다.>
화랑 수수료 다 각각
화상들은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화랑에 걸어놓고 컬렉터들을 유혹한다. 화랑이 작가와 컬렉터의 연결고리를 하는 것은 1차 시장 거래다. 작품이 팔리면 통상 원작자와 화랑은 5대 5로 나눠갖는다. 1000만원 작품이 팔리면 원작자가 500만원, 화상이 500만원을 갖는 것이다. 작가가 유명해지면 원작자와 화상 간에 7:3까지 격차가 벌어진다.
2차 시장은 재판매 시장으로 컬렉터와 딜러(화상 또는 경매), 그리고 미술관이 서로 작품을 구입·판매·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몇 차례 비자금 창구로 지목된 고가 미술품 거래는 바로 2차 시장을 두고 하는 얘기다. 화랑은 미술품의 원래 소유주와 작품을 산 소유주에게 통상 각각 10%씩을 받는다. 이 커미션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더 받기도, 못 받기도 한다. 경매를 통하는 경우에는 양쪽에서 10%의 수수료(fee)를 비교적 일정하게 받는다. 수수료 기준이 없고, 물론 작품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화랑 대표이자 미술 강의를 하는 D씨의 얘기다.
“경력이 없으면 아무리 특출나다 해도 호당(관제엽서 크기, 풍경화 가로 22.7cm × 14cm) 많게 받을 수 없습니다. 캔버스에 금가루로 도배를 했다 해도 말입니다. 호당 10만원 정도 쳐줍니다. 화랑 전시회를 보면 작가 소개에 수상경력·작품 출품 이력·해외 전시 등의 경력이 빼곡합니다. 그 경력이 그 작가 작품의 가격을 결정합니다.”
—경력이 없는 작가 그림은 비쌀 수가 없군요.
“그림 값을 결정하는 평론가들이 있는데, 그들이 정하는 기본 기준 역시 같습니다. 어느 대학 출신, 미술전 수상경력, 비엔날레 출품 등 경력을 쌓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후대에 길이 남는 작품을 남긴 작가도 초기부터 그림이 비싸게 팔린 것이 아닙니다. 작가 사후(死後)에는 그의 작품이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얼마나 새로운 작품이었는지, 심지어 그 작품을 소유했던 이가 누구였는지가 복합돼 작품가가 정해집니다. 철저하게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입각해서입니다. 작품이 좋다고, 의미 있다고 평가받았어도 그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고가가 될 수 없죠.”
300만원짜리가 반 년 만에 3000만원(1988년)
국내 최초의 컬렉터로는 논 800만 평의 자산가였던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62년 작고) 선생을 꼽는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간송은 막대한 자산을 우리나라 문화재를 사들이는 데 쏟아붓고, 간송미술관을 건립했다. 오늘날 우리 문화재가 해외로 반출되는 것을 막은 혁혁한 공을 세운 이로 추앙받는다. 당대 간송과 엎치락뒷치락하며 골동품 등 고미술품을 모았던 이가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李秉喆) 회장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미술품의 3대 축 중 화상(화랑 주인)으로는 한국 풍경화의 대가인 고(故) 이대원(李大源) 화백이 열었던 반도화랑(1956년 개관·반도호텔 자리)을 꼽았다. 사실상 국내 최초의 상업 화랑이자 당대 화가들의 데뷔장소였다는 것이다. 고 김환기(金煥基) 화백, 고 박수근(朴壽根) 화백, 고 이중섭(李仲燮) 화백 등이 이곳에 작품을 걸었다. 국내에 주재하는 외교관 부인들이 주요 컬렉터였고, 1970년대 들어 현대화랑·명동화랑·진화랑 등이 생겨났다.
알음알음으로 형성된 미술계는 1980년대에 호황기를 맞는다. 문예진흥법에 따라 1986년, 건축비의 1%를 미술장식에 쓰도록 했기 때문. 아시안게임(1986년), 서울올림픽(1988년)을 거치면서 미술계는 사상 유례없는 호황기였고, 강북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던 화랑들이 신사동·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강남구 청담동 소재 화랑 주인 D씨의 말은 이를 뒷받침한다.
“고객 한 분이 1988년 3월에 고 장욱진(張旭鎭) 화백 작품을 300만원에 샀는데 12월에 박명자(朴明子) 갤러리현대 대표가 3000만원에 되팔라고 하더랍니다. 고객이 딱히 작품을 팔 필요가 없었는데 6개월 만에 가만히 걸려 있는 그림이 10배가 오른 거잖아요. ‘300만원짜리 9개 더 사자’는 심정으로 팔았답니다. 다음 해 봄에 화랑 전시에 가보니 자기가 판 그림에 1억5000만원이라고 써 있더랍니다.”
미술품을 30년 이상 모은 컬렉터 B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철저하게 그림을 ‘재테크’ 차원에서 모으는 이다.
“1988년도에 전 재산을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몇몇 작품은 사고 나서 한두 달 만에 10배가 오르더군요. 당시에는 장욱진 화백과 김흥수(金興洙) 화백 그림이 많이 올랐습니다. 계속 작품 가격을 보면서 추격 매수를 했습니다.”
—추격 매수라뇨.
“그림은 주식과 같습니다. 30년 동안 세 번 정도밖에 경험하지 못하긴 했는데, 그림 가격이 자고 나면 오르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림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철저히 비례합니다. 작고한 작가여서 작품의 공급이 없는데 사고자 하는 수요가 한순간 오르면, 그 작품 값은 계속 올라가는 겁니다. 시장 전반의 흐름, 선호하는 작가, 주식 공부 하듯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600만원 주고 산 장욱진 그림을 2년 뒤에 1억2000만원에 팔았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미술품에 대해 재테크니, 비자금이 흘러들어가는 곳이니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림은 1970~80년대부터 부(富)를 물려주는 수단이었고, 투자 가치가 있는 현물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당시 그림 값이 10~20배 오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컬렉터들의 취향 역시 다양해졌다.
미술사를 가르치는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특정 트렌드가 있었다. 30호 미만의 노란색이 들어간 풍경화는 거실에 걸기 좋은 그림이라서 인기였다. 꽃·해·달이 들어간 그림이나, 어머니·누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작품들, 거실용·주방용 등 용도에 맞는 그림을 선호했다. 1990년대 들어 눈이 서양화되면서 미니멀한 것들, 추상적 작품들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재벌이 고가 미술품에 꽂힐 수밖에 없는 이유
미술품이 재테크 수단이 된 지 오래되었다고 하니, 몰랐던 이로서 할 말은 없다. 1980년대 후반에 ‘억대’가 넘는 그림이 있었고 실거래됐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서울 시내에는 여전히 ‘연탄불’을 때는 아파트가 많았다는데 말이다.
상류사회 사람들은 왜 이렇게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던 것일까. 컬렉터 B씨는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림만큼 부피가 작고 가볍고 비싼 물건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할 때 그림을 많이 싸서 떠났습니다. 돈이 되니까 들고 간 겁니다. 폴 세잔(Paul Cezanne·프랑스 화가)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The Card Players·1893년 작)은 2011년에 2억5000만 달러(약 2850억원)에 팔렸습니다. 잭슨 폴락(Jackson Pollack·미국 화가)의 <넘버5>(No.5·1945년 작)는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4000만 달러(약 1575억원)에 팔렸죠. 2000억원의 재산을 손에 들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핸들링이 쉽습니다. 과장하자면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100억짜리 물건은 미술품뿐입니다. 더구나 미술품은 흔적이 없으니 부자들에게 딱입니다.”
—어떻게 흔적이 없습니까.
“미술품 거래는 100% 현금으로 이뤄집니다. 컬렉터와 화상이 현금을 주고받고 물건만 양수하면 끝입니다. 주식은 계좌에 자금이 흘러들어간 내역, 사고 판 내역이 남습니다. 부동산은 등기부등본상에 명의자가 있고 거래 내역이 드러납니다. 미술품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습니다. 김모씨가 샀다고 해서 그림 뒤에 ‘김모씨 소유’라고 써 있지 않습니다. 미술품은 세금을 회피하기 쉽고, 명화는 사는 순간부터 계속 오릅니다. 경기에 따라 다소 들쑥날쑥할 수는 있지만 다른 품목에 비하면 둔감하죠. 보석은 사는 순간에 값이 절반으로 떨어질 수 있지만 그림은 오히려 사는 순간부터 값이 오를 수 있습니다.”
—수요공급의 원칙이라지만 떨어질 리는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 명화는 앞으로 꾸준히 오를 것으로 봅니다. 세잔, 피카소, 고갱의 작품은 더 이상 공급이 없는데 새로운 부자들은 끊임없이 태어납니다. 미술관에 걸린 작품은 살 수 없으니, 부자들은 시장에 풀린 명화를 계속 사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겁니다. 우리나라의 자산가는 재벌그룹이니 재벌가가 이 시장에 뛰어드는 겁니다.”
—재벌가 중에 미술품 컬렉션에 관심없는 곳은 없습니까.
“무식해서, 잘 몰라서 관심이 없을 수는 있습니다. 한두 시간이라도 미술품 시장에 대해 강의를 듣게 되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 교양, 재벌이 추구하는 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시장이니까요. 게다가 세제 혜택이 좋으니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미술품 시장은 사실상 면세(免稅) 구역이더군요.
“문화를 전파한다는 차원에서 세계적으로 세금을 매기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개인(또는 기업)이 미술품을 기증하면 오히려 세제 혜택을 줍니다. 세금을 매길 근거가 별로 없습니다. 언제, 얼마에 샀는지가 기본인데, 화랑은 쉬쉬합니다. 그림을 샀을 때 취득세가 없고, 재산세도 물리기 까다롭습니다. 만약 20만 달러에 샀는데, 현재 추정치가 100만 달러라고 치면 어디에 근거해서 재산세를 물릴 겁니까. 그림을 아직 팔지 않았으니, 그 차익인 80만 달러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물리기 어렵죠. 그림을 자식한테 물려준다 해도 뚜렷이 과세할 근거가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전혀 없을까요.
“물려준 그림이 굉장히 화제가 돼서 사고판 흔적을 많은 이가 추적해 왔다거나, 자식이 탈세(脫稅)를 해서 사정 당국의 추적 대상이 되어 왔다거나 하면 문제가 될 수 있죠. 나중에 미술품을 놓고 ‘얼마에 샀어?’, ‘누구에게 물려받았어?’라고 물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비자금을 만들어 고가 그림을 사거나, 고가 그림을 이용해 비자금을 만든다는 식(式)의 인식이 나올 수밖에 없잖습니까.
“미술품 가격은 고무줄입니다. 10억짜리 작품이 100억원이 될 수 있고, 100억원짜리가 10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회사가 해외의 개인에게 실제로 30억원에 그림을 매입했지만 50억원을 송금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차익분은 고스란히 비자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림을 사는 행위 자체는 불법(不法)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과정이 일대 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의 손을 거쳤다면 밝혀낼 길이 없습니다. 그림은 한 그림당 가격이 정해지고, 정해진 값이 없는 속성상 음성적 거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술품 담보대출을 논의했던 우리은행
미술품을 구매하는 것은 정말 흔적이 남지 않을까. 취재 과정에서 만난 갤러리 대표들에게 물었더니 대부분 수긍했다. 통상 금전(金錢) 거래가 오가면 컴퓨터 엑셀파일에든, 수첩에든 기록하기 마련이다. 계좌이체 내역이 통장에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모님’들을 상대하는 한 갤러리 대표는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림은 하루에 하나씩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한 달에 하나를 팔 수도 있습니다. 기록을 해야 할 만큼 거래가 자주 있지 않고 자기 수첩에 기록하면 모를까 공식적으로 남기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미술품이 돈세탁 창구로 쓰여서 검찰조사를 받게 되면요.
“압수수색을 한다고 해도 사무실에서 별로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미술품 매매가 이뤄진 지 10년쯤 됐다면 더하죠. 화랑 주인이 얼마에 사고팔았는지 기억을 못한다는데 거기에 어떤 법적 책임을 물을 겁니까. 꼬리표가 달린 돈이라면 컬렉터와 화상만 관여하지 않습니다. 사전에 변호사가 다 낍니다.”
—은행 거래 내역은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은행 기록은 뒤질 수 있지만 그 돈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친구한테 그림을 팔고 대금을 받은 것이지만, 갤러리 주인이 친구에게 꾼 돈이라고 주장하면 그뿐입니다. 경매를 통해서 낙찰받은 그림은 기록이 남지만, 화랑을 통해서 거래한 미술품은 그때그때마다 다 다릅니다.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잣대가 없습니다. 매매가 끝난 뒤 분쟁이 일어나서 한 명이 주장하면 모를까, 그 전에 제3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갤러리의 수입·지출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얘기네요.
“화랑은 면세 사업입니다. 법인이 화랑을 통해 미술품을 구입하는 경우, 미술관에서 사는 경우, 고객 중에서 세금 신고를 해야 한다고 먼저 요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금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매출을 신고하는 화랑은 없다고 봐야 하죠?
“당연하죠.”
미술품에 대한 여러 질문에 대해 업계 사람들은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말을 했다. 아무리 ‘아트’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기준이 없어도 되는 것인가. 미술품이 재테크로 활용된다는 얘기가 나오자, 지난해 은행연합회 여신전문위원회에서 회의가 열렸다. ‘미술품 담보 대출 상품’에 대한 논의였다.
우리은행 관계자의 말이다.
“미술품 담보대출은 결과적으로 흐지부지됐습니다. 미술품 시장이 알면 알수록 뭐 하나 분명한 것이 없었습니다. 담보는 우선 담보평가기관과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달랐습니다. 몇 개 작품을 샘플링해서 협회를 찾아갔는데, 누구는 1억원이라고 하고, 누구는 3억까지 나간다고 했습니다. 뭘 기준으로 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담보물인 서화나 도자기를 보관할 곳이 은행 내에 마땅치 않은 것도 애로사항이었습니다. 또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담보를 처분해야 하는데, 처분할 수 있는 공개 매각 장치가 부족했습니다. 미술협회도 한 창구로 일원화돼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제각각이었습니다. 만일 담보물이 위작 시비에라도 휘말리면 은행 입장에서는 보호받을 곳도 없고요. 결국 토론 끝에 흐지부지됐습니다.”
몇억 원짜리 그림 혼수의 의미
요즘 SBS에서 방영되는 <황금의 제국>이라는 드라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재벌 대표가 국회의원에게 로비를 하기 위해 황금 백자를 한 점 건넨다. 대표는 국회의원에게 “백자가 마음에 안 드시면 시장에 내놓으시라. 저희가 원하는 금액으로 되사오겠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을까.
컬렉터 B씨는 “중국의 미술시장 규모가 2000년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 10조원대라고 추산한다. 시장 규모가 큰 중국에서는 최근까지 사용하는 로비 방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장 규모가 작고, 너무 올드(old)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재벌가가 아닐지라도 대한민국의 많은 자산가는 그림을 각종 수단으로 활용한다. 신사동 한 갤러리 대표의 얘기다.
“있는 집에서 그림을 혼수로 보내는 건 흔한 일입니다. ‘누구누구의 80년대 작품을 찾아달라’는 얘기를 합니다. 고객 중 얼마 전 혼사 치른 집에 ‘어떻게 해서 보냈느냐’고 물으니 ‘누구 작품 하나랑~’ 이런 식으로 얘기를 시작해요. ‘누구 작품’이라는 말을 할 때 벌써 끝난 겁니다. 그 작품 가격이 얼마 정도인지는 화랑에 물어보면 금세 알 수 있거든요. ‘딸 가진 부모지만, 몇억짜리 보낼 정도니까 우리 딸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는 얘기를 미술품이 대신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림은 신분상승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 집안의 수준을 알려주는 것이니까요. 모피, 핸드백이나 현금 주는 것보다 훨씬 폼 나잖습니까.”
청담동 한 갤러리의 고객은 얼마 전 ‘1000만원짜리 그림’이라고 가격을 콕 찍어서 주문했다. 화랑 관계자의 말이다.
“며느리한테 1000만원을 주고 싶은데 수표 끊어서 주면 너무 없어 보이니까 그림으로 주고 싶다는 겁니다. 1000만원이라고 가격을 찍어서 말하기에 정확히 그 가격에 맞는 그림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희 화랑 이름 쓰고, 인보이스에 가격 적어서 보냈죠. 있는 집 사모님들 중에는 며느리 손 끌고 와서 ‘그림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 분들도 꽤 됩니다.”
그림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과시의 수단’이 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종종 생긴다. 몇 년 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 한 아파트의 ‘사모님’들이 차례차례 한 화랑을 찾았다.
“한 집에 놀러갔다가 걸려 있던 그림이 좋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드러내놓고 어디서 샀느냐고 묻지 않고 알음알음으로 알아보고 화랑을 찾아간 겁니다. 모르는 척하면서 ‘누구 그림 있어요?’ 물어보고 앞다퉈서 산 겁니다. 한때 그 아파트 라인 한 줄이 O작가 그림을 다 산 적이 있습니다.”
예술이면서 돈 되는 것은 미술품뿐
예술에는 소설도 있고, 음악도 있고, 발레도 있다. 그들과 미술의 차이점은 뭘까. 한 청담동 갤러리 대표는 이 질문을 하자마자, “예술이면서 돈 되는 것은 미술품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거에 음악을 논하는 것이 지성의 상징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기술의 발달로 이 시대는 끝났습니다. 유명 지휘자가 연주하는 유명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CD를 틀면 들을 수 있습니다. 음악은 음악회에 직접 가서 보고 즐기는 것과 귀에 이어폰 꽂고 즐기는 차이가 별로 없거든요. 미술은 다릅니다. 컴퓨터 화면으로 그림을 보는 것과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천지차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되는 유일한 예술이 된 겁니다.”
<오페라의 유령>의 작곡가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는 “나는 미술작품을 얻기 위해 음악을 한다”고 했다고 한다.
컬렉터 B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할리우드 배우와 같습니다. 가령 안젤리나 졸리를 커다란 화면에서 보는 것과 한 집에서 먹고, 자고, 대화하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게다가 그림은 감가상각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오르는 예술품이니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림 값이 드라마틱하게 오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던데요.
“확률은 낮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식이나 부동산의 습성과 마찬가지죠. 잘만 하면 10배, 100배 오를 수 있는 것이니 빠지는 겁니다. 작품 10점 중에 3점의 가격이 오르면, 그 3점 작품이 10점을 커버하는 구조입니다. 아트 투자의 맛을 알면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돈과 예술성, 투자는 구분할 수 없다. 그림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과연 그림인지, 그 그림의 값인지 끊임없이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이순자, 김환기 작가 작품 많이 사들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미술품의 감정가를 두고 말들이 많다. 한국미술정보개발원에서는 지난 8월 몇몇 미술계 인사가 모여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그림 값이 100억원대라며 말이 많지만 5억원대 정도”라고 말했다. ‘채널A’는 지난 8월 6일,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미술 압수품의 감정 총액은 최소 29억원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전두환 압수 미술품 목록’에 대해 묻자 대부분 반응이 비슷했다.
그중 한 관계자는 “전두환 일가 그림을 보고 벌써 세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그림이 비자금으로 사용된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이순자(李順子) 여사가 김환기 작가 그림을 많이 모았다는 것은 업계 사람은 다 압니다. K·H갤러리가 이 작품을 많이 판 것으로 알고 있어요. 검찰이 발표한 전두환 일가의 미술품 리스트를 보니까 김환기 화백 작품이 한 점뿐이었습니다. 이 여사 손에 한두 점만 있을 리가 없거든요. 지난 40년 동안 그 작품 가격은 꾸준히 올랐습니다. 이 여사 손에서 떠나 벌써 몇 차례 돌았다는 얘기입니다. 벌써 세탁이 끝났다는 소리죠. 화랑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자유당 시대 비자금은 박수근 작품에 갔고, 이후 비자금 중 일부는 김환기 화백 작품에 갔다고들 합니다.”
—말을 안 한다 뿐이지 업계에 소문이 파다했다는 겁니까.
“상수도와 하수도가 있잖습니까. 하수도가 없으면 물이 더 썩습니다. 하수도에 유입되는 일부가 미술품·골동품·보석입니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건 컬렉터가 작가에게 직접 접촉해서 사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요. 결국 화랑이라는 매개체를 끼고 있기 때문에 들리는 소문이 많습니다. 화상들이 입이 무겁다고는 하지만요. 고가 그림 하나를 사고파는 것은 컬렉터, 화랑, 또 화랑이 끼고 있는 변호사들이 모두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화랑 대표 D씨는 “이번 전두환 일가의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3개의 화랑이 국세청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S갤러리와 ‘사모님’들이 거래할 수밖에 없던 까닭
미술품 매매가 성사되는 공간은 화랑과 경매장이다.
세계 최고의 화랑으로는 연매출 1조원으로, 금세기 세계 미술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가고시안 갤러리(gagosian·뉴욕 맨해튼 소재)를 꼽는다. 미술품 경매시장은 크리스티(Christie’s·1766년 설립)와 소더비(Sotheby’s·1774년 설립)가 양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옥션이 지난 1998년 첫 경매를 시작해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을 열었다. 지난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의 낙찰가를 기록해 숱한 화제를 모았다. 경매가 오픈된 공간은 맞지만, 낙찰자에 대한 보안은 필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빨래터>의 경우, 낙찰받은 이가 박연구 삼호산업 회장이라고 신상이 공개됐다. 박 회장은 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스폰서인 박연차(朴淵次) 태광실업 회장의 형이다. 이후 <빨래터>는 실소유주가 박연차 회장이 아니겠느냐는 논란과 위작(僞作) 시비에 한동안 시달렸다.
우리나라 미술품계의 큰손들은 화랑과 경매에서 작품을 구매한다.
삼청동 소재 갤러리 A대표는 “수십 년 동안 컬렉션을 해온 부류는 화랑을 주로 이용하고, 신흥 IT재벌이나 금융계 사람들은 경매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컬렉터와 화상의 관계는 특별하다. 단순히 돈이 오가는 관계가 아니다.
화상이 “이 작품을 하면 나중에 돈이 된다”고 제안하면, 컬렉터는 그의 말을 믿고 따른다. 그런데 이들 화랑 간의 관계는 참으로 미묘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관계자는 ‘화상의 출신 배경’을 꼬집었다. 그의 얘기다.
“외국은 귀족 출신이 화랑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몰락한 귀족이지만 과거에 선대로부터 받아온 작품이 있으니까 그 작품을 파는 겁니다.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귀족 출신이라는 무형의 백그라운드가 그에게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금력을 앞세운 유대인들이 화랑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화랑 대표를 한번 보세요. 인사동 언저리에서 심부름하고, 화가들 얼굴 좀 아는 사람, 사환 출신, 국졸, 동대문에서 미역 장사하던 사람들이 환골탈태해 화랑 주인이 됐습니다. 어려워도 출판계는 나름 엘리트들이 갔는데, 이 바닥은 그렇지 못했던 겁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철학이 없는 사람들이 했으니, 그림을 예술품보다는 사고파는 돈벌이 수단으로 많이 인식했죠. 그런데 우리나라 컬렉터들은 대대로 부자인 분들이니까, 어떻게 국졸 출신이 국내 재벌가, 부자들을 문화적으로 리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서미갤러리 같은 곳이 뜰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 관계자의 얘기에 따르면 서미갤러리 홍송원 관장은 원래 부잣집 딸로 여동생은 재벌가로 시집을 갔고, 본인 역시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사환 출신인 화랑 주인들과 애초에 ‘신분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던 1980년대 후반에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큰 집에서 살 정도였다. 그는 유독 ‘눈’이 좋았다. 뭐를 하든 예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단팥죽 하나를 끓여도, 소파 하나를 바꿔도, 조명 한 개를 골라도 그가 손을 대면 음식 맛이,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의 이런 ‘손재주’는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고, 재력가 집의 며느리인 친동생의 소개 등으로 재벌가와 안면을 트는 계기가 됐다.
이 관계자는 “갤러리 관장이 컬렉터들을 위해 집안 시중까지 드느냐는 얘기는 말이 안 된다. 재벌가 시중을 든 것이 아니라 대소사가 있을 때 도와준 것이었다”고 전했다. S그룹 혼사 때 며느리의 혼수를 고르러 다닌 이가 그였다. 그는 이런 ‘눈’ 덕에 갤러리를 시작했는데 사업 수완이 좋았다. 재벌가 사모님들에게 수천만 원대의 핸드백을 척척 선물했고, 그렇게 재벌가 사모님들이 ‘마음의 빚’을 갖도록 친분을 쌓아갔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말이다. 결국 홍송원 관장이 뜰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재벌가 사모님들과 비슷한 취향, 그리고 전혀 없는 집 며느리가 아니라는 백그라운드가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얘기다.
<행복한 눈물>의 진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고가 그림 중 하나는 <행복한 눈물>이다. 2008년 삼성이 특검을 받을 때 나온 이 작품은 미국의 대표 팝아티스트인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작품이다. 이제는 전 국민이 아는 그림이지만, 서미갤러리가 이 작품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715만 달러에 낙찰받을 때 이 그림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金勇澈) 변호사는 2008년 특검 때, 삼성이 비자금으로 이 작품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는 “그림은 내가 산 작품”이라고 맞받아쳤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행복한 눈물>에 비자금이 흘러들어갔느냐 여부는 흐지부지됐다.
김용철 변호사가 특검 이후에 낸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의 대목이다.
<홍라희는 삼성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미술계의 큰손이 됐다. 2003년 기획팀 정보 부서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FIU(금융정보분석원)는 ‘서미갤러리를 운영하는 홍송원이라는 사람이 대형금융거래를 너무 자주한다’며 혐의 거래로 보고했다. 구조본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홍송원을 캐면, 이건희 집안 여자들이 다 나오기 때문이다. 홍라희(洪羅喜), 이명희(李明熙·신세계 회장), 박현주(朴賢珠·대상홀딩스 부회장), 신연균(申硯均·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부인) 등이 홍송원의 주요 고객이었다. 이들은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이나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홍송원을 보내서 그림을 사들였는데, 그 규모가 연간 550억~600억원어치였다. 이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홍라희가 산 것이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행복한 눈물> 사건의 진실은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재벌가 사모님들 중에는 변덕이 심하고 그런 분들이 있어요. 서미갤러리와 홍라희 여사가 돈독한 관계가 된 지 10년이 넘었으니까 서로 믿는 사이였죠. 크리스티 경매장에 좋은 작품 나왔으니까 하기로 얘기가 끝나서, 홍송원씨가 낙찰을 받았죠. 그런데 낙찰 가격이 너무 높았는지 어떤 이유에서든 서로 얘기가 달라진 모양이에요. 홍송원 입장에서는 크리스티에 낙찰 금액을 넣어야 하는데 사정이 다급해졌고, 일단 홍라희 여사한테 곧장 입금해 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결국 그림(행복한 눈물)은 손에 들어왔는데 갈 곳이 없어진 거죠. 그림 가격이 워낙 크니까요. 결국 홍송원이 알음알음으로 10억원 정도씩 투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행복한 눈물>을 위한 펀드처럼 된 거군요.
“네. 제가 아는 분이 여기에 돈을 넣었다는 얘기를 해서 알게 됐습니다. <행복한 눈물>을 낙찰받은 크리스티에는 홍라희 여사 돈이 들어갔는데, <행복한 눈물> 그림이 서미갤러리에 걸려 있었던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10억원씩 7~8명이 모아서 홍라희 여사께 대금을 갚았고, 그림은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있었던 겁니다.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까, 갤러리에 있었던 거죠. 그러다 특검이 시작되고 그림의 존재가 알려지니까, 투자자들도 불안해진 겁니다. 결국 조용히 국내를 빠져나가 뉴욕 맨해튼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처분됐습니다. <행복한 눈물>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에게는 일정 이득을 얹어서 되돌려줬습니다. 그게 진실이에요.”
해외 작품=달러
우리나라 부자들의 해외 미술품 사랑은 유별나다.
지난해 11월 관세청이 내놓은 ‘미술품 수입동향’에 따르면 미술품 수입은 매년 증가 추세다. 지난 2011년 1월~2011년 12월까지 통관된 미술품은 1500억원(23만3057점)대였는데, 지난 2012년 1월부터 8개월 만에 1230억원(23만3067점)어치가 들어왔다고 한다. 관세청 관계자는 “통상 9%의 관세가 부과되지만 미술품은 무관세 품목”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미술품의 경매를 주도했던 한 관계자가 쓴 칼럼은 이렇다.
<2001년 뉴욕대학교 두 명의 교수가 ‘투자수단으로서의 미술품 가치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가 있다. 125년 동안 4차례 전쟁과 27번의 경제 불황이 있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차 대전(1913~1918년)에 미국·영국의 주가는 25% 떨어졌다가 1920년에는 1913년의 94%까지 회복됐다. 같은 기간 미술품 가격은 주가보다 낙폭이 적었고, 전쟁에서 회복된 1920년대 1913년 가격의 125%를 상회했다. 2차 대전 이후인 1946년 미국과 영국의 주가는 전쟁 전의 107%, 100%까지 회복됐는데, 미술품 가격은 오히려 30% 올랐다고 한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미술품 가격은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삼청동 소재 갤러리 A대표의 고객 중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재벌가 사모님들이 많다. 고객 중 한 명이 “10억짜리 김환기 작품이 있는데, 그 그림을 팔고 돈을 보태서 리히터(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독일의 추상화가) 작품을 사고 싶다”고 했다.
A씨의 말에 따르면 ‘10억짜리 김환기 그림’은 김환기 작품 중에서도 0.01%에 드는 최고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말이다.
“그런 얘기 들으면 안타깝죠. 김환기 최고 작품 팔아서 리히터 작품 사고 싶다는 얘기잖아요. 우선 김환기 작품 팔아서 살 수 있을 만한 리히터 그림이 없고, 150만 달러짜리 리히터는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고객들은 조심스럽게 해외 작가 작품을 사고 싶다고 합니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쉽죠.”
—해외 작가 작품을 유독 선호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미술품은 현금화하기가 용이한데 특히 해외 작품은 달러가 되니까 선호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달러에 대해 갖고 있는 강박관념이 미술시장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물론 재테크 수단으로서도, 김환기보다는 리히터가 나을 수 있습니다. 김환기 작품을 팔 때 예상 수요자가 50명이라면 리히터 작품은 제일 좋은 수준이 아니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4000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림은 신뢰의 문제예요. 어음이랑 똑같습니다. 액면가를 얼마나 쳐주느냐의 문제잖아요. 서구애들은 어음을 써진 값의 80%를 쳐주는데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못 믿는 겁니다. 국내 작가 작품 가격을 높이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서로서로 못 믿기 때문에 틈만 나면 해외 작품으로 눈을 돌리는 겁니다. 일종의 ‘야구장 효과’죠. 한 명이 일어나서 보면 그 사람을 앉혀야 하는데 욕하면서 다 같이 일어서잖아요. 비싼 외국 작품을 사는 이유는 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자신없는 이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일이죠.”
미술품 과세 첫해
올해는 미술품에 대해 첫 세금을 매기는 해다.
소득세법 개정에 따라 올 1월부터 미술품 매매 차익을 ‘기타소득’으로 분류해, 지방세를 포함해 22%의 세금이 부과된다. 물론 허술한 규정이다. 살아 있는 작가가 아닌 숨진 작가에 대해, 또 6000만원 이상의 작품에만 과세한다. 또 보유기간에 따라 최고 90%까지 필요한 경비를 공제해 준다. 결국 1000만원의 차익이 생겼다면 보관 유지비 등으로 900만원까지 인정해 주고, 나머지 100만원에 대해서만 22%인 22만원을 과세한다는 것이다. 취재에 응한 미술계 사람들은 올해의 과세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업계 사람들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7000만원짜리 작품 가격을 5999만원으로 맞추고, 또 보유기간을 최대한 늘리는 등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며 “미술품에 대해 감시의 눈초리로 보겠다는 차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미술품 과세 정책으로 세수(稅收) 확보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미술계에 대한 경고 등으로 해석해야 한다. 문화관광부에 일정 수준 이상의 미술품에 대해서는 등록제를 실시하는 등, 당국이 미술품에 들어가는 검은돈을 차단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예술과 돈은 멀수록 좋다’고 외치며 미술의 상업성에 저항한 작가들이 있다. 대지미술가인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나선형 방파제’는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호 땅위에 흙과 소금을 달팽이처럼 뱅뱅 돌아가게 늘어놓은 흙 조각이다. 갑부라도 이 작품은 살 수 없고, 또 오늘날은 바람, 비에 씻겨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란다. 하지만 이런 대지미술가들의 얘기가 화젯거리가 될 정도로, 오늘날 미술품과 금권(金權)은 한 몸이나 다름없다.⊙
최고봉의 사치 수단
고가 미술품 세계는 철저히 ‘있는 자들만의 세상’이다. 일반 서민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20년째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A씨의 말이다.
“초보 컬렉터에게 그림 값을 얘기하면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 뒤에 하는 말이 ‘그림이 그렇게 좋아요? 그 돈 모아서 빌딩을 사는 게 낫지 않나’라며 주저주저합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고가 미술품은 빌딩 정도는 갖고 있는 분들이 하다하다 들어오는 분야거든요’라고요. 일반인의 시각에서 접근하면 이해를 할 수 없는 세계죠.”
30년째 작품을 구입하고 있는 컬렉터 B씨는 미술품을 ‘최고봉의 사치(Ultimate Luxury)’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렵고 황당한 것이 미술입니다. 미술품은 사치의 최고 꼭짓점에 있습니다. 아파트·빌딩 사고, 외제차 여러 대 굴리고, 요트 타고, 몇백만 원짜리 와인 마시고, 사치라는 것을 하다하다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이 미술품 시장입니다.”
—왜 그럴까요.
“폼 나니까요. 미술품은 지성을 갖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재화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지성에 대한 굶주림이 큽니다. 문학에 대한 안목은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알 수 없죠. 자신의 지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미술품밖에 없습니다. ‘K회장 방에 누구 그림 있더라’는 얘기 자체로 끝난 겁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죠. 자본력과 지성, 교양을 보여주는 총 집합체가 미술품입니다. 람보르기니, 요트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지만 미술은 다릅니다. 미국·유럽의 최고 상류층은 미술관 이사들입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작품을 보고, 사고, 사회에 기증하고, 그제야 자격이 생기는 명예 자리입니다. 그들만이 누리는 폼 나는 사회죠.”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빌딩을 소유한 이가 몇 명이나 될까. 이들의 말을 뒤집어보면 국민의 대다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소리다. 미술계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삼청동 화랑 대표 A씨는 “미술품은 절대 민중의 것이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가장 힘있는 이들이 미술품을 소유했다. 주술이 강했을 때는 제사를 관장했던 제사장, 종교의 힘이 커지면서 교황, 다시 왕실이 소유했다 최근에는 자본가가 소유하게 됐다. 역사가 입증한 셈이다”고 말했다.
미술품 컬렉터이자 업계에 종사했던 B씨의 말 또한 비슷하다.
“미술품은 대중화된 적이 없고, 될 수가 없습니다. 미술의 대중화란 미술관에 가서 관람료 내고 구경하는 것, 집 안에 장식용으로 몇백만 원짜리 액자를 거는 정도입니다. 미술품은 늘 대중과 멀리 있었고, 대중과 멀어야만 그 가치가 있는 겁니다. 월급쟁이에게 연봉 털어서 작품 한 점 구입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그렇게 작품을 모아 컬렉터가 되라고 조언할 수 있을까요. 미술품의 대중화라는 것은 특정 계층만 누리는 세계라는 불편한 진실에서 벗어나고자 그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C씨는 “우리나라 경매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의 90%는 500만원 이하의 작품들이다. 미술에 애정이 있다면 직장인도 컬렉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연봉이 어느 정도면 가능하냐’고 묻자 “1억원 이상 정도면”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재산가치에 대해서는 “작품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면 최소 1000만원짜리 이상은 사야 한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미술품이라는 것은 그 문턱이 많이 낮아져 봐야 서민과는 거리가 멀다는 소리다.
갤러리라는 공간이 주는 무언의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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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포탈, 횡령과 배임으로 구속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차명으로 미술품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 8월 7일 삼청동에 위치한 갤러리현대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데스크에 있는 직원이 잠시 기자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작품을 보고 싶다’고 하자 “1층만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이곳에는 제주도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화가 이왈종의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기자가 미술에 문외한이어서겠지만 갤러리는 영 낯설다. 그림은 얼마나 가까이서 봐야 하는지, 한 작품을 보는 데 몇 분 정도를 할애해야 하는지, 그림 가격은 물어야 예의인 건지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액자를 걸어놓은 새하얀 벽면이 주는 무언(無言)의 압박이었다.
갤러리현대 옆에 위치한 금호미술관에서는 ‘아트피스: 예술로 힐링하는 법’이라는 설치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관람료는 성인 4000원. 미술관 직원은 “설치 미술전(展)이어서 그림이 한 점도 없는데 괜찮으냐”고 묻더니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에 작품이 있고, 순서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둘러보면 된다”고 말했다. 소정의 입장료를 내서인지 이번에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갤러리 문고리를 잡아당길 때 왠지 주저하게 되는 마음, 그것은 기자만의 심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현대미술 컬렉터이자 캐나다 토론토 요크대학의 도널드 톰슨(Donald Thompson) 교수의 《은밀한 갤러리》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사람들이 갤러리의 창문을 통해 미술작품을 보는 모습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벨을 누르려다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만다. 안에 있는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특별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위압적인 분위기에 위축돼 갤러리 문턱을 넘지 못할 뿐이다. 혹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갤러리 딜러가 자신을 무슨 훼방꾼 대하듯 하면 어쩌나, 아니 자신을 바보로 알고 무시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것이다. (중략) 으레 딜러는 뒤를 쫓아다니며 자신들끼리 사용하는 용어로 온갖 설명을 해댄다. 딜러들은 ‘미술관급 품질’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 말은 작품 구입은 아예 꿈도 꾸지 말하는 의미다. 슈퍼스타급 갤러리로 불리는 곳은 시시한 사람들은 발도 못 붙이게 만드는 심리적 장벽을 더욱 높이 쌓고 있다.>
화랑 수수료 다 각각
화상들은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화랑에 걸어놓고 컬렉터들을 유혹한다. 화랑이 작가와 컬렉터의 연결고리를 하는 것은 1차 시장 거래다. 작품이 팔리면 통상 원작자와 화랑은 5대 5로 나눠갖는다. 1000만원 작품이 팔리면 원작자가 500만원, 화상이 500만원을 갖는 것이다. 작가가 유명해지면 원작자와 화상 간에 7:3까지 격차가 벌어진다.
2차 시장은 재판매 시장으로 컬렉터와 딜러(화상 또는 경매), 그리고 미술관이 서로 작품을 구입·판매·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몇 차례 비자금 창구로 지목된 고가 미술품 거래는 바로 2차 시장을 두고 하는 얘기다. 화랑은 미술품의 원래 소유주와 작품을 산 소유주에게 통상 각각 10%씩을 받는다. 이 커미션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더 받기도, 못 받기도 한다. 경매를 통하는 경우에는 양쪽에서 10%의 수수료(fee)를 비교적 일정하게 받는다. 수수료 기준이 없고, 물론 작품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화랑 대표이자 미술 강의를 하는 D씨의 얘기다.
“경력이 없으면 아무리 특출나다 해도 호당(관제엽서 크기, 풍경화 가로 22.7cm × 14cm) 많게 받을 수 없습니다. 캔버스에 금가루로 도배를 했다 해도 말입니다. 호당 10만원 정도 쳐줍니다. 화랑 전시회를 보면 작가 소개에 수상경력·작품 출품 이력·해외 전시 등의 경력이 빼곡합니다. 그 경력이 그 작가 작품의 가격을 결정합니다.”
—경력이 없는 작가 그림은 비쌀 수가 없군요.
“그림 값을 결정하는 평론가들이 있는데, 그들이 정하는 기본 기준 역시 같습니다. 어느 대학 출신, 미술전 수상경력, 비엔날레 출품 등 경력을 쌓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후대에 길이 남는 작품을 남긴 작가도 초기부터 그림이 비싸게 팔린 것이 아닙니다. 작가 사후(死後)에는 그의 작품이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얼마나 새로운 작품이었는지, 심지어 그 작품을 소유했던 이가 누구였는지가 복합돼 작품가가 정해집니다. 철저하게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입각해서입니다. 작품이 좋다고, 의미 있다고 평가받았어도 그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고가가 될 수 없죠.”
300만원짜리가 반 년 만에 3000만원(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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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
업계 관계자들은 미술품의 3대 축 중 화상(화랑 주인)으로는 한국 풍경화의 대가인 고(故) 이대원(李大源) 화백이 열었던 반도화랑(1956년 개관·반도호텔 자리)을 꼽았다. 사실상 국내 최초의 상업 화랑이자 당대 화가들의 데뷔장소였다는 것이다. 고 김환기(金煥基) 화백, 고 박수근(朴壽根) 화백, 고 이중섭(李仲燮) 화백 등이 이곳에 작품을 걸었다. 국내에 주재하는 외교관 부인들이 주요 컬렉터였고, 1970년대 들어 현대화랑·명동화랑·진화랑 등이 생겨났다.
알음알음으로 형성된 미술계는 1980년대에 호황기를 맞는다. 문예진흥법에 따라 1986년, 건축비의 1%를 미술장식에 쓰도록 했기 때문. 아시안게임(1986년), 서울올림픽(1988년)을 거치면서 미술계는 사상 유례없는 호황기였고, 강북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던 화랑들이 신사동·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강남구 청담동 소재 화랑 주인 D씨의 말은 이를 뒷받침한다.
“고객 한 분이 1988년 3월에 고 장욱진(張旭鎭) 화백 작품을 300만원에 샀는데 12월에 박명자(朴明子) 갤러리현대 대표가 3000만원에 되팔라고 하더랍니다. 고객이 딱히 작품을 팔 필요가 없었는데 6개월 만에 가만히 걸려 있는 그림이 10배가 오른 거잖아요. ‘300만원짜리 9개 더 사자’는 심정으로 팔았답니다. 다음 해 봄에 화랑 전시에 가보니 자기가 판 그림에 1억5000만원이라고 써 있더랍니다.”
미술품을 30년 이상 모은 컬렉터 B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철저하게 그림을 ‘재테크’ 차원에서 모으는 이다.
“1988년도에 전 재산을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몇몇 작품은 사고 나서 한두 달 만에 10배가 오르더군요. 당시에는 장욱진 화백과 김흥수(金興洙) 화백 그림이 많이 올랐습니다. 계속 작품 가격을 보면서 추격 매수를 했습니다.”
—추격 매수라뇨.
“그림은 주식과 같습니다. 30년 동안 세 번 정도밖에 경험하지 못하긴 했는데, 그림 가격이 자고 나면 오르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림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철저히 비례합니다. 작고한 작가여서 작품의 공급이 없는데 사고자 하는 수요가 한순간 오르면, 그 작품 값은 계속 올라가는 겁니다. 시장 전반의 흐름, 선호하는 작가, 주식 공부 하듯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600만원 주고 산 장욱진 그림을 2년 뒤에 1억2000만원에 팔았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미술품에 대해 재테크니, 비자금이 흘러들어가는 곳이니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림은 1970~80년대부터 부(富)를 물려주는 수단이었고, 투자 가치가 있는 현물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당시 그림 값이 10~20배 오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컬렉터들의 취향 역시 다양해졌다.
미술사를 가르치는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특정 트렌드가 있었다. 30호 미만의 노란색이 들어간 풍경화는 거실에 걸기 좋은 그림이라서 인기였다. 꽃·해·달이 들어간 그림이나, 어머니·누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작품들, 거실용·주방용 등 용도에 맞는 그림을 선호했다. 1990년대 들어 눈이 서양화되면서 미니멀한 것들, 추상적 작품들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재벌이 고가 미술품에 꽂힐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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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경매회사인 뉴욕 소더비 경매현장. 지난 2007년 11월, 제프쿤수의 조각 <하트>가 2100만 달러에 팔리고 있다. |
상류사회 사람들은 왜 이렇게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던 것일까. 컬렉터 B씨는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림만큼 부피가 작고 가볍고 비싼 물건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할 때 그림을 많이 싸서 떠났습니다. 돈이 되니까 들고 간 겁니다. 폴 세잔(Paul Cezanne·프랑스 화가)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The Card Players·1893년 작)은 2011년에 2억5000만 달러(약 2850억원)에 팔렸습니다. 잭슨 폴락(Jackson Pollack·미국 화가)의 <넘버5>(No.5·1945년 작)는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4000만 달러(약 1575억원)에 팔렸죠. 2000억원의 재산을 손에 들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핸들링이 쉽습니다. 과장하자면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100억짜리 물건은 미술품뿐입니다. 더구나 미술품은 흔적이 없으니 부자들에게 딱입니다.”
—어떻게 흔적이 없습니까.
“미술품 거래는 100% 현금으로 이뤄집니다. 컬렉터와 화상이 현금을 주고받고 물건만 양수하면 끝입니다. 주식은 계좌에 자금이 흘러들어간 내역, 사고 판 내역이 남습니다. 부동산은 등기부등본상에 명의자가 있고 거래 내역이 드러납니다. 미술품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습니다. 김모씨가 샀다고 해서 그림 뒤에 ‘김모씨 소유’라고 써 있지 않습니다. 미술품은 세금을 회피하기 쉽고, 명화는 사는 순간부터 계속 오릅니다. 경기에 따라 다소 들쑥날쑥할 수는 있지만 다른 품목에 비하면 둔감하죠. 보석은 사는 순간에 값이 절반으로 떨어질 수 있지만 그림은 오히려 사는 순간부터 값이 오를 수 있습니다.”
—수요공급의 원칙이라지만 떨어질 리는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 명화는 앞으로 꾸준히 오를 것으로 봅니다. 세잔, 피카소, 고갱의 작품은 더 이상 공급이 없는데 새로운 부자들은 끊임없이 태어납니다. 미술관에 걸린 작품은 살 수 없으니, 부자들은 시장에 풀린 명화를 계속 사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겁니다. 우리나라의 자산가는 재벌그룹이니 재벌가가 이 시장에 뛰어드는 겁니다.”
—재벌가 중에 미술품 컬렉션에 관심없는 곳은 없습니까.
“무식해서, 잘 몰라서 관심이 없을 수는 있습니다. 한두 시간이라도 미술품 시장에 대해 강의를 듣게 되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 교양, 재벌이 추구하는 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시장이니까요. 게다가 세제 혜택이 좋으니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미술품 시장은 사실상 면세(免稅) 구역이더군요.
“문화를 전파한다는 차원에서 세계적으로 세금을 매기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개인(또는 기업)이 미술품을 기증하면 오히려 세제 혜택을 줍니다. 세금을 매길 근거가 별로 없습니다. 언제, 얼마에 샀는지가 기본인데, 화랑은 쉬쉬합니다. 그림을 샀을 때 취득세가 없고, 재산세도 물리기 까다롭습니다. 만약 20만 달러에 샀는데, 현재 추정치가 100만 달러라고 치면 어디에 근거해서 재산세를 물릴 겁니까. 그림을 아직 팔지 않았으니, 그 차익인 80만 달러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물리기 어렵죠. 그림을 자식한테 물려준다 해도 뚜렷이 과세할 근거가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전혀 없을까요.
“물려준 그림이 굉장히 화제가 돼서 사고판 흔적을 많은 이가 추적해 왔다거나, 자식이 탈세(脫稅)를 해서 사정 당국의 추적 대상이 되어 왔다거나 하면 문제가 될 수 있죠. 나중에 미술품을 놓고 ‘얼마에 샀어?’, ‘누구에게 물려받았어?’라고 물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비자금을 만들어 고가 그림을 사거나, 고가 그림을 이용해 비자금을 만든다는 식(式)의 인식이 나올 수밖에 없잖습니까.
“미술품 가격은 고무줄입니다. 10억짜리 작품이 100억원이 될 수 있고, 100억원짜리가 10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회사가 해외의 개인에게 실제로 30억원에 그림을 매입했지만 50억원을 송금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차익분은 고스란히 비자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림을 사는 행위 자체는 불법(不法)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과정이 일대 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의 손을 거쳤다면 밝혀낼 길이 없습니다. 그림은 한 그림당 가격이 정해지고, 정해진 값이 없는 속성상 음성적 거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술품 담보대출을 논의했던 우리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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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미술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장욱진 화백의 마북리 화실 모습. |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모님’들을 상대하는 한 갤러리 대표는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림은 하루에 하나씩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한 달에 하나를 팔 수도 있습니다. 기록을 해야 할 만큼 거래가 자주 있지 않고 자기 수첩에 기록하면 모를까 공식적으로 남기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미술품이 돈세탁 창구로 쓰여서 검찰조사를 받게 되면요.
“압수수색을 한다고 해도 사무실에서 별로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미술품 매매가 이뤄진 지 10년쯤 됐다면 더하죠. 화랑 주인이 얼마에 사고팔았는지 기억을 못한다는데 거기에 어떤 법적 책임을 물을 겁니까. 꼬리표가 달린 돈이라면 컬렉터와 화상만 관여하지 않습니다. 사전에 변호사가 다 낍니다.”
—은행 거래 내역은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은행 기록은 뒤질 수 있지만 그 돈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친구한테 그림을 팔고 대금을 받은 것이지만, 갤러리 주인이 친구에게 꾼 돈이라고 주장하면 그뿐입니다. 경매를 통해서 낙찰받은 그림은 기록이 남지만, 화랑을 통해서 거래한 미술품은 그때그때마다 다 다릅니다.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잣대가 없습니다. 매매가 끝난 뒤 분쟁이 일어나서 한 명이 주장하면 모를까, 그 전에 제3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갤러리의 수입·지출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얘기네요.
“화랑은 면세 사업입니다. 법인이 화랑을 통해 미술품을 구입하는 경우, 미술관에서 사는 경우, 고객 중에서 세금 신고를 해야 한다고 먼저 요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금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매출을 신고하는 화랑은 없다고 봐야 하죠?
“당연하죠.”
미술품에 대한 여러 질문에 대해 업계 사람들은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말을 했다. 아무리 ‘아트’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기준이 없어도 되는 것인가. 미술품이 재테크로 활용된다는 얘기가 나오자, 지난해 은행연합회 여신전문위원회에서 회의가 열렸다. ‘미술품 담보 대출 상품’에 대한 논의였다.
우리은행 관계자의 말이다.
“미술품 담보대출은 결과적으로 흐지부지됐습니다. 미술품 시장이 알면 알수록 뭐 하나 분명한 것이 없었습니다. 담보는 우선 담보평가기관과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달랐습니다. 몇 개 작품을 샘플링해서 협회를 찾아갔는데, 누구는 1억원이라고 하고, 누구는 3억까지 나간다고 했습니다. 뭘 기준으로 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담보물인 서화나 도자기를 보관할 곳이 은행 내에 마땅치 않은 것도 애로사항이었습니다. 또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담보를 처분해야 하는데, 처분할 수 있는 공개 매각 장치가 부족했습니다. 미술협회도 한 창구로 일원화돼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제각각이었습니다. 만일 담보물이 위작 시비에라도 휘말리면 은행 입장에서는 보호받을 곳도 없고요. 결국 토론 끝에 흐지부지됐습니다.”
몇억 원짜리 그림 혼수의 의미
요즘 SBS에서 방영되는 <황금의 제국>이라는 드라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재벌 대표가 국회의원에게 로비를 하기 위해 황금 백자를 한 점 건넨다. 대표는 국회의원에게 “백자가 마음에 안 드시면 시장에 내놓으시라. 저희가 원하는 금액으로 되사오겠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을까.
컬렉터 B씨는 “중국의 미술시장 규모가 2000년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 10조원대라고 추산한다. 시장 규모가 큰 중국에서는 최근까지 사용하는 로비 방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장 규모가 작고, 너무 올드(old)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재벌가가 아닐지라도 대한민국의 많은 자산가는 그림을 각종 수단으로 활용한다. 신사동 한 갤러리 대표의 얘기다.
“있는 집에서 그림을 혼수로 보내는 건 흔한 일입니다. ‘누구누구의 80년대 작품을 찾아달라’는 얘기를 합니다. 고객 중 얼마 전 혼사 치른 집에 ‘어떻게 해서 보냈느냐’고 물으니 ‘누구 작품 하나랑~’ 이런 식으로 얘기를 시작해요. ‘누구 작품’이라는 말을 할 때 벌써 끝난 겁니다. 그 작품 가격이 얼마 정도인지는 화랑에 물어보면 금세 알 수 있거든요. ‘딸 가진 부모지만, 몇억짜리 보낼 정도니까 우리 딸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는 얘기를 미술품이 대신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림은 신분상승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 집안의 수준을 알려주는 것이니까요. 모피, 핸드백이나 현금 주는 것보다 훨씬 폼 나잖습니까.”
청담동 한 갤러리의 고객은 얼마 전 ‘1000만원짜리 그림’이라고 가격을 콕 찍어서 주문했다. 화랑 관계자의 말이다.
“며느리한테 1000만원을 주고 싶은데 수표 끊어서 주면 너무 없어 보이니까 그림으로 주고 싶다는 겁니다. 1000만원이라고 가격을 찍어서 말하기에 정확히 그 가격에 맞는 그림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희 화랑 이름 쓰고, 인보이스에 가격 적어서 보냈죠. 있는 집 사모님들 중에는 며느리 손 끌고 와서 ‘그림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 분들도 꽤 됩니다.”
그림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과시의 수단’이 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종종 생긴다. 몇 년 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 한 아파트의 ‘사모님’들이 차례차례 한 화랑을 찾았다.
“한 집에 놀러갔다가 걸려 있던 그림이 좋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드러내놓고 어디서 샀느냐고 묻지 않고 알음알음으로 알아보고 화랑을 찾아간 겁니다. 모르는 척하면서 ‘누구 그림 있어요?’ 물어보고 앞다퉈서 산 겁니다. 한때 그 아파트 라인 한 줄이 O작가 그림을 다 산 적이 있습니다.”
예술이면서 돈 되는 것은 미술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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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7년 5월 22일, 국내 최초의 경매장인 서울옥션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2천만원에 낙찰됐다. |
“과거에 음악을 논하는 것이 지성의 상징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기술의 발달로 이 시대는 끝났습니다. 유명 지휘자가 연주하는 유명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CD를 틀면 들을 수 있습니다. 음악은 음악회에 직접 가서 보고 즐기는 것과 귀에 이어폰 꽂고 즐기는 차이가 별로 없거든요. 미술은 다릅니다. 컴퓨터 화면으로 그림을 보는 것과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천지차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되는 유일한 예술이 된 겁니다.”
<오페라의 유령>의 작곡가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는 “나는 미술작품을 얻기 위해 음악을 한다”고 했다고 한다.
컬렉터 B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할리우드 배우와 같습니다. 가령 안젤리나 졸리를 커다란 화면에서 보는 것과 한 집에서 먹고, 자고, 대화하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게다가 그림은 감가상각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오르는 예술품이니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림 값이 드라마틱하게 오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던데요.
“확률은 낮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식이나 부동산의 습성과 마찬가지죠. 잘만 하면 10배, 100배 오를 수 있는 것이니 빠지는 겁니다. 작품 10점 중에 3점의 가격이 오르면, 그 3점 작품이 10점을 커버하는 구조입니다. 아트 투자의 맛을 알면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돈과 예술성, 투자는 구분할 수 없다. 그림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과연 그림인지, 그 그림의 값인지 끊임없이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이순자, 김환기 작가 작품 많이 사들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미술품의 감정가를 두고 말들이 많다. 한국미술정보개발원에서는 지난 8월 몇몇 미술계 인사가 모여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그림 값이 100억원대라며 말이 많지만 5억원대 정도”라고 말했다. ‘채널A’는 지난 8월 6일,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미술 압수품의 감정 총액은 최소 29억원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전두환 압수 미술품 목록’에 대해 묻자 대부분 반응이 비슷했다.
그중 한 관계자는 “전두환 일가 그림을 보고 벌써 세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그림이 비자금으로 사용된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이순자(李順子) 여사가 김환기 작가 그림을 많이 모았다는 것은 업계 사람은 다 압니다. K·H갤러리가 이 작품을 많이 판 것으로 알고 있어요. 검찰이 발표한 전두환 일가의 미술품 리스트를 보니까 김환기 화백 작품이 한 점뿐이었습니다. 이 여사 손에 한두 점만 있을 리가 없거든요. 지난 40년 동안 그 작품 가격은 꾸준히 올랐습니다. 이 여사 손에서 떠나 벌써 몇 차례 돌았다는 얘기입니다. 벌써 세탁이 끝났다는 소리죠. 화랑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자유당 시대 비자금은 박수근 작품에 갔고, 이후 비자금 중 일부는 김환기 화백 작품에 갔다고들 합니다.”
—말을 안 한다 뿐이지 업계에 소문이 파다했다는 겁니까.
“상수도와 하수도가 있잖습니까. 하수도가 없으면 물이 더 썩습니다. 하수도에 유입되는 일부가 미술품·골동품·보석입니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건 컬렉터가 작가에게 직접 접촉해서 사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요. 결국 화랑이라는 매개체를 끼고 있기 때문에 들리는 소문이 많습니다. 화상들이 입이 무겁다고는 하지만요. 고가 그림 하나를 사고파는 것은 컬렉터, 화랑, 또 화랑이 끼고 있는 변호사들이 모두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화랑 대표 D씨는 “이번 전두환 일가의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3개의 화랑이 국세청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S갤러리와 ‘사모님’들이 거래할 수밖에 없던 까닭
미술품 매매가 성사되는 공간은 화랑과 경매장이다.
세계 최고의 화랑으로는 연매출 1조원으로, 금세기 세계 미술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가고시안 갤러리(gagosian·뉴욕 맨해튼 소재)를 꼽는다. 미술품 경매시장은 크리스티(Christie’s·1766년 설립)와 소더비(Sotheby’s·1774년 설립)가 양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옥션이 지난 1998년 첫 경매를 시작해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을 열었다. 지난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의 낙찰가를 기록해 숱한 화제를 모았다. 경매가 오픈된 공간은 맞지만, 낙찰자에 대한 보안은 필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빨래터>의 경우, 낙찰받은 이가 박연구 삼호산업 회장이라고 신상이 공개됐다. 박 회장은 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스폰서인 박연차(朴淵次) 태광실업 회장의 형이다. 이후 <빨래터>는 실소유주가 박연차 회장이 아니겠느냐는 논란과 위작(僞作) 시비에 한동안 시달렸다.
우리나라 미술품계의 큰손들은 화랑과 경매에서 작품을 구매한다.
삼청동 소재 갤러리 A대표는 “수십 년 동안 컬렉션을 해온 부류는 화랑을 주로 이용하고, 신흥 IT재벌이나 금융계 사람들은 경매를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컬렉터와 화상의 관계는 특별하다. 단순히 돈이 오가는 관계가 아니다.
화상이 “이 작품을 하면 나중에 돈이 된다”고 제안하면, 컬렉터는 그의 말을 믿고 따른다. 그런데 이들 화랑 간의 관계는 참으로 미묘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관계자는 ‘화상의 출신 배경’을 꼬집었다. 그의 얘기다.
“외국은 귀족 출신이 화랑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몰락한 귀족이지만 과거에 선대로부터 받아온 작품이 있으니까 그 작품을 파는 겁니다.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귀족 출신이라는 무형의 백그라운드가 그에게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금력을 앞세운 유대인들이 화랑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화랑 대표를 한번 보세요. 인사동 언저리에서 심부름하고, 화가들 얼굴 좀 아는 사람, 사환 출신, 국졸, 동대문에서 미역 장사하던 사람들이 환골탈태해 화랑 주인이 됐습니다. 어려워도 출판계는 나름 엘리트들이 갔는데, 이 바닥은 그렇지 못했던 겁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철학이 없는 사람들이 했으니, 그림을 예술품보다는 사고파는 돈벌이 수단으로 많이 인식했죠. 그런데 우리나라 컬렉터들은 대대로 부자인 분들이니까, 어떻게 국졸 출신이 국내 재벌가, 부자들을 문화적으로 리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서미갤러리 같은 곳이 뜰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 관계자의 얘기에 따르면 서미갤러리 홍송원 관장은 원래 부잣집 딸로 여동생은 재벌가로 시집을 갔고, 본인 역시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사환 출신인 화랑 주인들과 애초에 ‘신분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던 1980년대 후반에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큰 집에서 살 정도였다. 그는 유독 ‘눈’이 좋았다. 뭐를 하든 예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단팥죽 하나를 끓여도, 소파 하나를 바꿔도, 조명 한 개를 골라도 그가 손을 대면 음식 맛이,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의 이런 ‘손재주’는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고, 재력가 집의 며느리인 친동생의 소개 등으로 재벌가와 안면을 트는 계기가 됐다.
이 관계자는 “갤러리 관장이 컬렉터들을 위해 집안 시중까지 드느냐는 얘기는 말이 안 된다. 재벌가 시중을 든 것이 아니라 대소사가 있을 때 도와준 것이었다”고 전했다. S그룹 혼사 때 며느리의 혼수를 고르러 다닌 이가 그였다. 그는 이런 ‘눈’ 덕에 갤러리를 시작했는데 사업 수완이 좋았다. 재벌가 사모님들에게 수천만 원대의 핸드백을 척척 선물했고, 그렇게 재벌가 사모님들이 ‘마음의 빚’을 갖도록 친분을 쌓아갔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말이다. 결국 홍송원 관장이 뜰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재벌가 사모님들과 비슷한 취향, 그리고 전혀 없는 집 며느리가 아니라는 백그라운드가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얘기다.
<행복한 눈물>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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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8년 2월 1일, 서울 가회동 서미갤러리에서 열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전. 삼성그룹 미술품 비자금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金勇澈) 변호사는 2008년 특검 때, 삼성이 비자금으로 이 작품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는 “그림은 내가 산 작품”이라고 맞받아쳤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행복한 눈물>에 비자금이 흘러들어갔느냐 여부는 흐지부지됐다.
김용철 변호사가 특검 이후에 낸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의 대목이다.
<홍라희는 삼성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미술계의 큰손이 됐다. 2003년 기획팀 정보 부서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FIU(금융정보분석원)는 ‘서미갤러리를 운영하는 홍송원이라는 사람이 대형금융거래를 너무 자주한다’며 혐의 거래로 보고했다. 구조본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홍송원을 캐면, 이건희 집안 여자들이 다 나오기 때문이다. 홍라희(洪羅喜), 이명희(李明熙·신세계 회장), 박현주(朴賢珠·대상홀딩스 부회장), 신연균(申硯均·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부인) 등이 홍송원의 주요 고객이었다. 이들은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이나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홍송원을 보내서 그림을 사들였는데, 그 규모가 연간 550억~600억원어치였다. 이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홍라희가 산 것이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행복한 눈물> 사건의 진실은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재벌가 사모님들 중에는 변덕이 심하고 그런 분들이 있어요. 서미갤러리와 홍라희 여사가 돈독한 관계가 된 지 10년이 넘었으니까 서로 믿는 사이였죠. 크리스티 경매장에 좋은 작품 나왔으니까 하기로 얘기가 끝나서, 홍송원씨가 낙찰을 받았죠. 그런데 낙찰 가격이 너무 높았는지 어떤 이유에서든 서로 얘기가 달라진 모양이에요. 홍송원 입장에서는 크리스티에 낙찰 금액을 넣어야 하는데 사정이 다급해졌고, 일단 홍라희 여사한테 곧장 입금해 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결국 그림(행복한 눈물)은 손에 들어왔는데 갈 곳이 없어진 거죠. 그림 가격이 워낙 크니까요. 결국 홍송원이 알음알음으로 10억원 정도씩 투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행복한 눈물>을 위한 펀드처럼 된 거군요.
“네. 제가 아는 분이 여기에 돈을 넣었다는 얘기를 해서 알게 됐습니다. <행복한 눈물>을 낙찰받은 크리스티에는 홍라희 여사 돈이 들어갔는데, <행복한 눈물> 그림이 서미갤러리에 걸려 있었던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10억원씩 7~8명이 모아서 홍라희 여사께 대금을 갚았고, 그림은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있었던 겁니다.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까, 갤러리에 있었던 거죠. 그러다 특검이 시작되고 그림의 존재가 알려지니까, 투자자들도 불안해진 겁니다. 결국 조용히 국내를 빠져나가 뉴욕 맨해튼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처분됐습니다. <행복한 눈물>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에게는 일정 이득을 얹어서 되돌려줬습니다. 그게 진실이에요.”
해외 작품=달러
우리나라 부자들의 해외 미술품 사랑은 유별나다.
지난해 11월 관세청이 내놓은 ‘미술품 수입동향’에 따르면 미술품 수입은 매년 증가 추세다. 지난 2011년 1월~2011년 12월까지 통관된 미술품은 1500억원(23만3057점)대였는데, 지난 2012년 1월부터 8개월 만에 1230억원(23만3067점)어치가 들어왔다고 한다. 관세청 관계자는 “통상 9%의 관세가 부과되지만 미술품은 무관세 품목”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미술품의 경매를 주도했던 한 관계자가 쓴 칼럼은 이렇다.
<2001년 뉴욕대학교 두 명의 교수가 ‘투자수단으로서의 미술품 가치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가 있다. 125년 동안 4차례 전쟁과 27번의 경제 불황이 있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차 대전(1913~1918년)에 미국·영국의 주가는 25% 떨어졌다가 1920년에는 1913년의 94%까지 회복됐다. 같은 기간 미술품 가격은 주가보다 낙폭이 적었고, 전쟁에서 회복된 1920년대 1913년 가격의 125%를 상회했다. 2차 대전 이후인 1946년 미국과 영국의 주가는 전쟁 전의 107%, 100%까지 회복됐는데, 미술품 가격은 오히려 30% 올랐다고 한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미술품 가격은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삼청동 소재 갤러리 A대표의 고객 중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재벌가 사모님들이 많다. 고객 중 한 명이 “10억짜리 김환기 작품이 있는데, 그 그림을 팔고 돈을 보태서 리히터(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독일의 추상화가) 작품을 사고 싶다”고 했다.
A씨의 말에 따르면 ‘10억짜리 김환기 그림’은 김환기 작품 중에서도 0.01%에 드는 최고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말이다.
“그런 얘기 들으면 안타깝죠. 김환기 최고 작품 팔아서 리히터 작품 사고 싶다는 얘기잖아요. 우선 김환기 작품 팔아서 살 수 있을 만한 리히터 그림이 없고, 150만 달러짜리 리히터는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고객들은 조심스럽게 해외 작가 작품을 사고 싶다고 합니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쉽죠.”
—해외 작가 작품을 유독 선호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미술품은 현금화하기가 용이한데 특히 해외 작품은 달러가 되니까 선호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달러에 대해 갖고 있는 강박관념이 미술시장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물론 재테크 수단으로서도, 김환기보다는 리히터가 나을 수 있습니다. 김환기 작품을 팔 때 예상 수요자가 50명이라면 리히터 작품은 제일 좋은 수준이 아니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4000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림은 신뢰의 문제예요. 어음이랑 똑같습니다. 액면가를 얼마나 쳐주느냐의 문제잖아요. 서구애들은 어음을 써진 값의 80%를 쳐주는데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못 믿는 겁니다. 국내 작가 작품 가격을 높이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서로서로 못 믿기 때문에 틈만 나면 해외 작품으로 눈을 돌리는 겁니다. 일종의 ‘야구장 효과’죠. 한 명이 일어나서 보면 그 사람을 앉혀야 하는데 욕하면서 다 같이 일어서잖아요. 비싼 외국 작품을 사는 이유는 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자신없는 이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일이죠.”
미술품 과세 첫해
올해는 미술품에 대해 첫 세금을 매기는 해다.
소득세법 개정에 따라 올 1월부터 미술품 매매 차익을 ‘기타소득’으로 분류해, 지방세를 포함해 22%의 세금이 부과된다. 물론 허술한 규정이다. 살아 있는 작가가 아닌 숨진 작가에 대해, 또 6000만원 이상의 작품에만 과세한다. 또 보유기간에 따라 최고 90%까지 필요한 경비를 공제해 준다. 결국 1000만원의 차익이 생겼다면 보관 유지비 등으로 900만원까지 인정해 주고, 나머지 100만원에 대해서만 22%인 22만원을 과세한다는 것이다. 취재에 응한 미술계 사람들은 올해의 과세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업계 사람들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7000만원짜리 작품 가격을 5999만원으로 맞추고, 또 보유기간을 최대한 늘리는 등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며 “미술품에 대해 감시의 눈초리로 보겠다는 차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미술품 과세 정책으로 세수(稅收) 확보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미술계에 대한 경고 등으로 해석해야 한다. 문화관광부에 일정 수준 이상의 미술품에 대해서는 등록제를 실시하는 등, 당국이 미술품에 들어가는 검은돈을 차단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예술과 돈은 멀수록 좋다’고 외치며 미술의 상업성에 저항한 작가들이 있다. 대지미술가인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나선형 방파제’는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호 땅위에 흙과 소금을 달팽이처럼 뱅뱅 돌아가게 늘어놓은 흙 조각이다. 갑부라도 이 작품은 살 수 없고, 또 오늘날은 바람, 비에 씻겨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란다. 하지만 이런 대지미술가들의 얘기가 화젯거리가 될 정도로, 오늘날 미술품과 금권(金權)은 한 몸이나 다름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