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현 SK회장 지시로 1974년 장학재단 설립… 570명의 박사 배출
⊙ 최태원 2대 이사장, 아시아연구센터 설립해 학자들 교류 지원
⊙ 박인국 사무총장, “재단 출신 중에서 순수과학 분야 노벨상 나올 것”
⊙ 최태원 2대 이사장, 아시아연구센터 설립해 학자들 교류 지원
⊙ 박인국 사무총장, “재단 출신 중에서 순수과학 분야 노벨상 나올 것”
- 2년반 공사 끝에 완공한 SK 한국고등교육재단 건물.
‘VERITAS, 배움과 나눔.’
서울의 대표적 번화가인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에 책을 켜켜이 쌓아 놓은 듯한 조형물이 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밤이 되면 ‘Veritas(진리)’라고 쓰인 책에 환한 조명이 비친다. 그리고 그 조형물 뒤로 지난 4월에 준공식을 가진 ‘한국고등교육재단’ 빌딩이 세련된 모습을 자랑한다. 많은 사람은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지 못한다. 이름만 보면 정부가 문화 전파를 위해 만든 재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실상은 다르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은 고(故) 최종현(崔鍾賢) SK그룹 회장이 1974년에 장학사업을 하고자 세운 재단이다. 지난 39년 동안 미국 톱 스쿨에서 공부한 박사 570여 명에게 장학금을 줬다. 하지만 재단의 명칭이나 빌딩 어디에서도 재단이 SK그룹의 후원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찾기 어렵다. SK가 소리소문 없이 티내지 않고 재단을 운영해서다. SK그룹 입장에서 이 장학재단은 ‘성역’이다. 재단은 올해 빌딩 완공을 계기로 그동안의 지식을 대중과 나누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나눔 전파’ 역할은 주(駐) 유엔(UN)대표부 대사를 지낸 박인국(朴仁國)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 맡고 있다.
어디에도 SK 표시가 없는 빌딩
박 총장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신축 빌딩 얘기로 시작했다. 빌딩의 외관이나 내부 모두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하기 때문이다.
“출범 당시 재단의 목적은 장학 사업에 초첨이 맞춰졌습니다. 이후 최태원(崔泰源) SK그룹 회장이 이사장을 맡으면서 국제학술포럼을 여는 것으로 영역을 넓혔고, 이제 우리가 쌓아 온 지식을 세상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전파하려면 공간부터 필요하죠. 교통이 편리하고,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곳, 학문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고려해 지은 것이 이번에 오픈한 재단 빌딩입니다. 원래 250평 규모에 만들어진 재단 빌딩을 헐고 주변 250평을 더 사들여서 2년 반 공사 끝에 탄생했습니다. 건물 안에 500평의 콘퍼런스홀, 전자정보도서관, 국제회의장을 갖춰 지식 나눔을 할 수 있는 하드웨어 조건도 갖췄습니다.”
―빌딩 밖의 조형물이 인상적이더군요.
“교육백년대계(敎育百年大計) 조형물은 우리 재단의 지상 과업입니다. ‘나무를 키우듯 인재를 키운다’가 저희 모토예요. 사옥 곳곳을 보면 학문을 장려하고 지식을 나누겠다는 재단의 생각이 녹아 있습니다.”
―SK가 재단을 만들었는데 어디서도 SK 흔적을 찾기가 어렵네요.
“건물 완공 단계에서 건물 한쪽에 SK를 상징하는 나비 모양의 ‘행복날개’라도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최태원 회장의 생각은 다르더군요. 외부에 떠들썩하게 나서지 않고, 점잖게 장학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이 재단만큼은 SK그룹과 독립된 곳으로 남겨 두겠다는 의지가 분명했습니다. 이곳이 SK그룹의 지원으로 100% 운영되지만, 어디에서도 SK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오너의 확고한 생각 때문입니다.”
박 총장의 건물 자랑은 이후 계속됐다. 그와 함께 빌딩 곳곳을 훑어보니 공연히 하는 말은 아니었다. 특히 500평 규모의 지하 3층 콘퍼런스홀은 벽면 전체에 책이 둘러쌓여,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외국 명문대 도서관에 온 느낌이었다.
신축 건물의 위용답게 재단은 오는 7월 16일에 거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진핑 새정부의 과제’라는 주제로 중국, 한국의 학자들 200~3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9월에는 한국과 중국, 미국의 연구기관 3자 간 콘퍼런스를 계획 중이다.
“중국이 세계의 새로운 축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오는 7월에 중국 학자들을 불러들여 시진핑 정부의 정치·외교 부문의 과제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일 겁니다. 한국 학자들을 여기에 참여시켜 중국을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9월에는 시진핑 정부의 경제·금융개혁 등에 대해 한·중·미 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을 겁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 한자리에서 떠오르는 핫이슈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이런 토론을 통해 가까운 이웃으로서의 중국, 또 글로벌 파워집단으로서의 중국을 구별해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시아끼리 교류” 주장한 최태원 이사장이 아시아센터 만들어
장학재단이 무슨 학술포럼까지 주최하느냐고 할는지 모른다. 재단의 초창기 업무가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 해외유학을 하도록 하는 장학사업이었다면, 요즘 재단의 업무는 국제 학술사업 분야에 쏠려 있다. 1년 예산이 170억원인데, 집행 영역을 보면 장학사업 대(對) 국제 학술사업이 4대6 정도다. 고 최종현 회장의 뒤를 이어 2대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최태원 회장의 의지 때문이다. 최 회장은 지난 1998년 이사장으로 취임했을 때부터 향후 아시아가 미국, 유럽 못지않게 시대의 화두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박인국 총장의 얘기다.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최 회장이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아시아 국가들끼리 교류가 거의 없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최 이사장의 눈에는 우리나라나 중국이 미국, 유럽 국가들과 일대일로는 학문적인 관계가 돈독하지만, 아시아 국가들끼리의 교류가 없어 보인 겁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센터를 만들어 아시아 국가들의 친목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태원 이사장은 지난 2001년부터 아시아연구센터 설립을 본격화했다. 오늘날의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 국가이지만 1990년대 후반의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박 총장은 1996~1999년 북한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원 자격으로 여러 번 북한을 오갔다. 그의 말이다.
“불과 15년 전에 중국이 어땠는 줄 아십니까? 베이징에 국제공항이 없었습니다. 톈진국제공항에 내려서 톈진에서 베이징까지 연결된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공항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을 가진 도시를 학문교류의 장(場)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재단의 국제포럼 사업이 무르익을수록 그때 최 이사장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할 정도죠.”
최태원 이사장이 표방한 ‘아시아연구센터’의 목적은 아시아 국가 간에 학술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해 아시아 학문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센터 구축 비용은 모두 재단이 대고, 센터 이사장은 재단과 해당 학교 측이 선임한 인물이 공동으로 맡기로 했다.
그 결과 베이징의 베이징대(2003년 설립)와 칭화대(2002년), 중국사회과학원(2002년), 상하이의 푸단대(2002년), 선양의 랴오닝대(2002년), 항저우의 저장대(2011년), 울란바토르의 몽골국립대(2001년), 하노이의 베트남국립대(2001년), 방콕의 태국풀라롱콘대(2002년) 등 총 17개 지역에 아시아연구센터를 만들었다. 이들 센터는 여태까지 총 3239건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아시아 지식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시아 학자 670명, 국내에 6개월 이상 거주시키며 민간외교
최태원 이사장이 공을 들인 것은 국제학술교류 지원사업이다. 매년 50여 명의 아시아 학자를 한국에 초청해 사회과학, 인문과학, 에너지 분야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최 이사장은 만 50세 이하 박사학위를 소지한 아시아 지역의 대학교수, 연구원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도록 문을 넓혔다. 이들에게 연간 3000만원의 연구지원금과 숙소, 항공료, 상해보험, 건강보험 일체를 재단에서 지원한다. 재단의 이런 프로그램으로 국내에 6개월~1년씩 머물다 간 학자들이 무려 670여 명이다. 단순 계산으로 재단이 200억원 이상의 돈을 아시아 학자들을 국내에 머물게 하는 데 쓴 셈이다. “대체 무슨 의미냐”는 질문에 박인국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다문화, 글로벌 시대를 맞아 ‘문명 간의 대화’를 해야 합니다. 외국 학자들에게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 가는 길에 잠시 공항에 내렸던 곳 정도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을 알려면 최소 1주일이라도 체류해야죠. 외교관 시절에 만난 EU(유럽연합)의 고위 관료가 이러더군요. ‘한국에서 정말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강남역이라는 곳에 가 보니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걷게 되더라. 그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고요.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외국인들에게 신기할 수 있습니다. 인파에 묻혀 떠밀려 걷는 경험 역시 우리만의 자산입니다. 아시아의 학자들에게 돈 주고, 숙소를 제공하면서 한국을 알리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또 외국 학자들의 시각으로 우리를 냉정하게 진단하는 계기도 됩니다.”
세계 석학들 모으는 SK재단
한국에서 6개월 이상 살았던 학자들은 지난 2012년 7월에는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에서 살아 본 중국 학자가 보는 한국’이라는 주제의 포럼을 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류(韓流)에서부터 한국의 언론, 사회, 철학, 법률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가 다뤄졌다. 약 1200명이 참석했는데, 최태원 이사장이 직접 포럼을 참관해 관심을 보였다.
SK의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세계의 석학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포럼의 주최자다. 포럼이 열리는 장소는 서울이 아닌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이지만, 이 행사는 엄연히 SK 교육재단이 주관한다. 최태원 이사장이 심혈을 기울여 출범시킨 학술대회의 명칭은 ‘베이징포럼’과 ‘상하이포럼’이다.
‘베이징포럼’은 지난 2004년 베이징대에서 세계적인 저명학자 500여 명을 초청해 창설됐다. 대주제는 ‘문명의 조화와 공동번영’이었다. 이듬해인 지난 2005년에는 푸단대에서 ‘상하이포럼’이 창설됐다. ‘경제 글로벌화와 아시아의 선택’이 대주제였다.
박인국 총장은 “세계적인 수준의 포럼을 열어 재단의 브랜드 밸류(brand value)를 키워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포럼을 개최하는 비용은 재단이 내고, 베이징대나 상하이대는 포럼 장소인 대강당을 빌려줍니다. 강당 대관을 제외하면 100% SK 장학재단의 주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 겁니다. ‘한국에서 하는 행사가 아닌데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할는지 모릅니다. 서울에서 포럼을 한다면 그런 석학들이 쉽게 한자리에 모일까요? 포럼 발표자에 대해 강의료 한푼 주지 않습니다. 제공되는 것은 이코노미클래스 왕복 비행기표뿐이지만, 그들은 포럼에 참석합니다. 베이징이라는 도시가 주는 힘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국과 베이징대라는 브랜드를 활용하고 재단과 융합시키고 있습니다. 포럼이 열리는 곳이 서울이냐 베이징이냐는 중요치 않죠.”
이곳 포럼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은 유명인사들이다. 지난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마이클 스펜스(Michael Spence) 미 뉴욕대학교(NYU) 경영대학원 교수(2007년 상하이포럼), 토니 블레어(Tony Blair) 전(前) 영국총리(2007년 상하이포럼), 케빈 러드(Kevin Rudd)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2012년 베이징포럼), 199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멀리스(James Mirrlees) 전 옥스퍼드대 교수(2009년 상하이포럼),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2005년 상하이포럼) 등이 연설을 했다.
삼성 신입사원 월급 10만원일 때, 공부만 하라고 월 5만원 지급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초창기 업무였던 우수 학생에 대한 장학사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단 일을 맡고 있는 박인국 총장은 한때 재단의 ‘해외유학 장학생’이었다. 그는 지난 1978년에 재단 장학생 시험을 통과하고 한동안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재단의 초기 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얘기다.
“미 버클리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이홍영(李鴻永) 교수가 SK 교육재단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됐을 때 우리나라는 인구 2000만~3000만명에 박사학위 소지자가 18명뿐이었답니다. 박사학위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한 분야를 깊이 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이들이 18명뿐이라면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죠. 이 교수는 인재를 양성하려면 파워하우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대학이고, 대학을 리드하는 것이 교수라고 말했습니다. SK 교육재단의 존재의미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고 최종현 회장 역시 대학 교수를 길러 내는 것이 국가를 근대화시키는 첩경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세계 학문의 중심이 미국이었으니까, 우리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을 미국에서 공부시키면 자연스럽게 나라는 부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장학사업에 뜻을 두고 시작한 재단은 초기 최장집(崔章集) 고려대 명예교수, 김인철(金仁哲) 성균관대 교수 등 이미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던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사업을 시작했다. 고 최 회장이 시카고대 석사 출신이다 보니 그 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후배들을 먼저 지원한 것이다. 1977년에야 본격적으로 장학생을 뽑았고, 박 총장은 1978년에 뽑혔다. 박지향(朴枝香) 서울대 교수, 염재호(廉栽鎬) 고려대 부총장이 ‘SK장학생’ 동기다. 학생들 사이에서 재단 장학생으로 뽑히는 것은 꽤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박인국 총장의 얘기다.
“재단 장학생으로 뽑히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학교 성적, 지도교수 추천서는 물론 재단에서 자체적으로 보는 시험을 통과해야 되니까요.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재단에서 영어교육 등을 시켰고 선발된 순간부터 장학금을 줬습니다. 삼성의 신입사원 월급이 10만원이었는데, 재단에서 유학 준비금 명목으로 월 5만원을 줬습니다. 하숙비 내고 용돈까지 됐으니 큰돈이었죠. 다른 일은 신경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박인국 총장은 재단 장학생으로 뽑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바람에 학자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선발된 ‘SK 동기생’들은 대부분 미국 대학에 진학했다.
미 프린스턴대학원으로 키우려 했던 고 최종현 회장
특이한 점 중 하나는 미국 학교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은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먼저 학생을 뽑고, 그 뽑은 학생들을 공부시켜서 미국 학교 입학을 허가받는 시스템이다.
“삼성은 입학허가서를 받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우리는 39년 전부터 우리의 전통 시스템으로 사람을 뽑고 1년 정도 교육시켰습니다. 통계학·원어민 강좌 등 유학에 필요한 것을 전부 제공했습니다.”
―입학허가서를 받은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과 재단이 선발한 뒤에 대학원 입학허가서를 받도록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입학허가서를 받은 학생을 지원하는 것은 미국의 기준을 따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재단은 우리 손으로 인재를 뽑고, 추리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독려하겠다는 겁니다. 우리의 시각에서 인재를 뽑겠다는 거죠. 미국 대학 입학허가를 준비하는 과정에게 먼저 유학 가 있는 선배들과 링크시켜 주면서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재단이 치르는 시험이 인재를 찾아낼 만큼 변별력이 있나요.
“재단 장학금으로 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직접 사회과학·인문과학 등 분야별로 시험 문제를 냅니다. 대학교 성적과 신뢰할 수 있는 교수의 상세한 추천서는 기본이죠. 대학 성적은 요즘 서울대 기준으로 4.5점 만점에 4.0은 기본입니다. 재단 시험의 역사가 긴 만큼 한국의 지식사회를 이끌어 갈 인재인지 아닌지 변별력이 있다고 봅니다. 경쟁률도 치열합니다. 경제·경영 전공은 1~2명을 뽑는데 50명 정도가 지원합니다. 나중에 미국 학교에 지원할 때 재단의 이름이 들어가면 미국 학교에서 그 학생을 눈여겨보죠.”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이라는 것이 미국 학교 입학허가를 받는 데 유리한 겁니까.
“재단의 영어 명칭인 ‘KFAS(Korea Foundation for Advanced Studies)’는 미국 학교에서 브랜드화(化)한 지 오랩니다. ‘KFAS’의 스폰을 받는다고 하면 일단 높게 평가합니다. 40여 년의 전통 있는 재단에서 한 사람을 믿고 스폰싱을 하는 것이니까요. 고 최종현 회장은 재단을 운영하면서 프린스턴대학의 대학원(Academic Institute of Advanced Study)을 꿈꿨습니다. 아인슈타인 등 당대의 석학들이 모여 깊이 있는 학문을 했던 곳이잖습니까. 우리의 영어 명칭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40여 년간 큰 뜻을 품고 우리의 존재를 알려 왔기에, 요즘 미국 입학허가 부서에 ‘KFAS’ 명함을 내밀었을 때 적어도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웃음).”
―미국의 톱 스쿨에서 허가서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쉽지만 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재단이 각 분야별로 톱 스쿨을 선정해 그 학교의 허가서를 받을 때에만 장학금 전액을 지원합니다. 선발한 학생들의 80~90%는 대개 1~2년 이내에 해당 학교의 입학허가서를 받습니다.”
―재단 장학생으로 뽑힌 이들이 모두 한 학교에 지원을 하면 그들끼리 경쟁하는 것 아닙니까.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톱 스쿨 세 곳에만 추천서를 써 줍니다. 본인들이 학교를 고르는 과정에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고민하죠.”
요즘도 매년 7월 말이 되면 각 대학 및 신문에 한국고등교육재단의 광고가 실린다. ‘해외유학 장학금을 지급할 사회과학과 순수자연과학, 정보통신 분야의 인재를 찾는다’는 것이 내용이다. 재단의 장학생이 되고 또 미국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면, 재단은 교육비 및 체재비 일체를 준다. 대략 1년에 5만~6만 달러다.
“SK재단 출신 중 노벨상 후보 여럿 거론”
―재단이 유명 대학의 박사 출신을 길러낸다는 것이 과거처럼 큰 의미가 있을까요.
“그건 기본 철학에 대한 이슈입니다. 미국 소프트파워의 힘은 박사학위 자체가 아니라 대학에서 어느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그 몰두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대학과 교수들의 연구가 미국을 지키는 큰 축이고, 여전히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보다 사회가 다양화하고, 비즈니스·예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죠. 그들 모두가 박사학위를 딸 필요는 없지만 학문의 연구는 어떤 식으로든 꼭 필요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학문이란 지금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시키는 이음목입니다.”
―제가 아는 분은 비슷한 재단을 운영하는데 장학사업이 요즘 시대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고 있던데요.
“우리가 하는 사업은 자선 차원의 장학사업이 아닙니다. 천재에 가까운 수준의 우수한 학생 중에서 학문을 하겠다는 이들을 지원하는 겁니다. 학문을 하고 싶지만 여타의 사정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브레인을 모으는 것, 또 그들이 오로지 공부만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장학사업입니다.”
―어찌 됐든 SK 돈으로 유학하는 것인데 어떤 조건이 있지 않나요.
“전혀 없습니다. SK 돈으로 유학했지만 이후에 SK그룹에 돌아와 근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은 10명 정도 있어요(웃음). 예전에는 무언(無言)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귀국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다음에 조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묵시적인 교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마저 없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학문에 무슨 국경이 있습니까. 재단 장학금으로 박사 받아서 하버드 교수를 하면 우리에게도 좋습니다. 그들이 1년에 일주일이라도 한국에서 특강을 하면, 1년 내내 서울의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재단 출신’에 대한 박인국 총장의 자부심은 상당했다. 실제로 지난 39년간 재단 장학금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570명이 넘는다. 미 하버드대(71명)·스탠퍼드대(64명)·시카고대(41명)·매사추세츠공대(MIT·37명)·버클리대(32명)·미시간대(29명) 등 내로라하는 학교의 박사 출신들이다. 현재 190여 명의 학생들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서, 재단이 배출한 톱 스쿨 박사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박 총장은 “재단 장학금으로 공부한 사람 중에서 순수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이 여럿 된다. 세계적인 학자를 배출한다는 재단의 성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질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SK재단 후원으로 유학을 다녀온 이들은 ‘홈커밍데이(Home Coming Day)’ 형식을 빌려 1년에 1~2번씩 모인다. 보통 100~200명은 참석한다고 한다.
시스템을 통한 인재육성이 효과적
최태원 이사장이 이끄는 SK 교육재단은 장학사업과 국제 학술대회의 바탕 위에 본격적인 지식 나눔을 계획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도서관 같은 재단 건물을 만든 것도 이를 염두에 둬서다. 이미 대학교수가 고등학교를 찾아 특강을 하고 있고, 내년 초부터는 전국의 소외계층 학생들을 이 곳에 불러 강의를 할 예정이다. 또 국제포럼의 발표 내용을 동영상 매체를 통해 실시간 보도하고, 대중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세계 유명 대학과 싱크탱크들의 강의를 멀티미디어로 제작해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박인국 총장은 “인재육성은 개인이 하기 어렵다. 재단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중점적으로 육성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며 “첨단 IT(정보통신)기술의 바탕 위에 지식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일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대표적 번화가인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에 책을 켜켜이 쌓아 놓은 듯한 조형물이 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밤이 되면 ‘Veritas(진리)’라고 쓰인 책에 환한 조명이 비친다. 그리고 그 조형물 뒤로 지난 4월에 준공식을 가진 ‘한국고등교육재단’ 빌딩이 세련된 모습을 자랑한다. 많은 사람은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지 못한다. 이름만 보면 정부가 문화 전파를 위해 만든 재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실상은 다르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은 고(故) 최종현(崔鍾賢) SK그룹 회장이 1974년에 장학사업을 하고자 세운 재단이다. 지난 39년 동안 미국 톱 스쿨에서 공부한 박사 570여 명에게 장학금을 줬다. 하지만 재단의 명칭이나 빌딩 어디에서도 재단이 SK그룹의 후원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찾기 어렵다. SK가 소리소문 없이 티내지 않고 재단을 운영해서다. SK그룹 입장에서 이 장학재단은 ‘성역’이다. 재단은 올해 빌딩 완공을 계기로 그동안의 지식을 대중과 나누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나눔 전파’ 역할은 주(駐) 유엔(UN)대표부 대사를 지낸 박인국(朴仁國)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 맡고 있다.
어디에도 SK 표시가 없는 빌딩
박 총장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신축 빌딩 얘기로 시작했다. 빌딩의 외관이나 내부 모두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하기 때문이다.
“출범 당시 재단의 목적은 장학 사업에 초첨이 맞춰졌습니다. 이후 최태원(崔泰源) SK그룹 회장이 이사장을 맡으면서 국제학술포럼을 여는 것으로 영역을 넓혔고, 이제 우리가 쌓아 온 지식을 세상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전파하려면 공간부터 필요하죠. 교통이 편리하고,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곳, 학문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고려해 지은 것이 이번에 오픈한 재단 빌딩입니다. 원래 250평 규모에 만들어진 재단 빌딩을 헐고 주변 250평을 더 사들여서 2년 반 공사 끝에 탄생했습니다. 건물 안에 500평의 콘퍼런스홀, 전자정보도서관, 국제회의장을 갖춰 지식 나눔을 할 수 있는 하드웨어 조건도 갖췄습니다.”
―빌딩 밖의 조형물이 인상적이더군요.
“교육백년대계(敎育百年大計) 조형물은 우리 재단의 지상 과업입니다. ‘나무를 키우듯 인재를 키운다’가 저희 모토예요. 사옥 곳곳을 보면 학문을 장려하고 지식을 나누겠다는 재단의 생각이 녹아 있습니다.”
―SK가 재단을 만들었는데 어디서도 SK 흔적을 찾기가 어렵네요.
“건물 완공 단계에서 건물 한쪽에 SK를 상징하는 나비 모양의 ‘행복날개’라도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최태원 회장의 생각은 다르더군요. 외부에 떠들썩하게 나서지 않고, 점잖게 장학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이 재단만큼은 SK그룹과 독립된 곳으로 남겨 두겠다는 의지가 분명했습니다. 이곳이 SK그룹의 지원으로 100% 운영되지만, 어디에서도 SK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오너의 확고한 생각 때문입니다.”
박 총장의 건물 자랑은 이후 계속됐다. 그와 함께 빌딩 곳곳을 훑어보니 공연히 하는 말은 아니었다. 특히 500평 규모의 지하 3층 콘퍼런스홀은 벽면 전체에 책이 둘러쌓여,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외국 명문대 도서관에 온 느낌이었다.
신축 건물의 위용답게 재단은 오는 7월 16일에 거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진핑 새정부의 과제’라는 주제로 중국, 한국의 학자들 200~3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9월에는 한국과 중국, 미국의 연구기관 3자 간 콘퍼런스를 계획 중이다.
“중국이 세계의 새로운 축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오는 7월에 중국 학자들을 불러들여 시진핑 정부의 정치·외교 부문의 과제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일 겁니다. 한국 학자들을 여기에 참여시켜 중국을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9월에는 시진핑 정부의 경제·금융개혁 등에 대해 한·중·미 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을 겁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 한자리에서 떠오르는 핫이슈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이런 토론을 통해 가까운 이웃으로서의 중국, 또 글로벌 파워집단으로서의 중국을 구별해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시아끼리 교류” 주장한 최태원 이사장이 아시아센터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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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국 재단 사무총장. |
박인국 총장의 얘기다.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최 회장이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아시아 국가들끼리 교류가 거의 없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최 이사장의 눈에는 우리나라나 중국이 미국, 유럽 국가들과 일대일로는 학문적인 관계가 돈독하지만, 아시아 국가들끼리의 교류가 없어 보인 겁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센터를 만들어 아시아 국가들의 친목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태원 이사장은 지난 2001년부터 아시아연구센터 설립을 본격화했다. 오늘날의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 국가이지만 1990년대 후반의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박 총장은 1996~1999년 북한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원 자격으로 여러 번 북한을 오갔다. 그의 말이다.
“불과 15년 전에 중국이 어땠는 줄 아십니까? 베이징에 국제공항이 없었습니다. 톈진국제공항에 내려서 톈진에서 베이징까지 연결된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공항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을 가진 도시를 학문교류의 장(場)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재단의 국제포럼 사업이 무르익을수록 그때 최 이사장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할 정도죠.”
최태원 이사장이 표방한 ‘아시아연구센터’의 목적은 아시아 국가 간에 학술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해 아시아 학문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센터 구축 비용은 모두 재단이 대고, 센터 이사장은 재단과 해당 학교 측이 선임한 인물이 공동으로 맡기로 했다.
그 결과 베이징의 베이징대(2003년 설립)와 칭화대(2002년), 중국사회과학원(2002년), 상하이의 푸단대(2002년), 선양의 랴오닝대(2002년), 항저우의 저장대(2011년), 울란바토르의 몽골국립대(2001년), 하노이의 베트남국립대(2001년), 방콕의 태국풀라롱콘대(2002년) 등 총 17개 지역에 아시아연구센터를 만들었다. 이들 센터는 여태까지 총 3239건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아시아 지식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시아 학자 670명, 국내에 6개월 이상 거주시키며 민간외교
최태원 이사장이 공을 들인 것은 국제학술교류 지원사업이다. 매년 50여 명의 아시아 학자를 한국에 초청해 사회과학, 인문과학, 에너지 분야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최 이사장은 만 50세 이하 박사학위를 소지한 아시아 지역의 대학교수, 연구원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도록 문을 넓혔다. 이들에게 연간 3000만원의 연구지원금과 숙소, 항공료, 상해보험, 건강보험 일체를 재단에서 지원한다. 재단의 이런 프로그램으로 국내에 6개월~1년씩 머물다 간 학자들이 무려 670여 명이다. 단순 계산으로 재단이 200억원 이상의 돈을 아시아 학자들을 국내에 머물게 하는 데 쓴 셈이다. “대체 무슨 의미냐”는 질문에 박인국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다문화, 글로벌 시대를 맞아 ‘문명 간의 대화’를 해야 합니다. 외국 학자들에게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 가는 길에 잠시 공항에 내렸던 곳 정도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을 알려면 최소 1주일이라도 체류해야죠. 외교관 시절에 만난 EU(유럽연합)의 고위 관료가 이러더군요. ‘한국에서 정말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강남역이라는 곳에 가 보니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걷게 되더라. 그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고요.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외국인들에게 신기할 수 있습니다. 인파에 묻혀 떠밀려 걷는 경험 역시 우리만의 자산입니다. 아시아의 학자들에게 돈 주고, 숙소를 제공하면서 한국을 알리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또 외국 학자들의 시각으로 우리를 냉정하게 진단하는 계기도 됩니다.”
세계 석학들 모으는 SK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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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2년에 열린 베이징포럼에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
SK의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세계의 석학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포럼의 주최자다. 포럼이 열리는 장소는 서울이 아닌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이지만, 이 행사는 엄연히 SK 교육재단이 주관한다. 최태원 이사장이 심혈을 기울여 출범시킨 학술대회의 명칭은 ‘베이징포럼’과 ‘상하이포럼’이다.
‘베이징포럼’은 지난 2004년 베이징대에서 세계적인 저명학자 500여 명을 초청해 창설됐다. 대주제는 ‘문명의 조화와 공동번영’이었다. 이듬해인 지난 2005년에는 푸단대에서 ‘상하이포럼’이 창설됐다. ‘경제 글로벌화와 아시아의 선택’이 대주제였다.
박인국 총장은 “세계적인 수준의 포럼을 열어 재단의 브랜드 밸류(brand value)를 키워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포럼을 개최하는 비용은 재단이 내고, 베이징대나 상하이대는 포럼 장소인 대강당을 빌려줍니다. 강당 대관을 제외하면 100% SK 장학재단의 주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 겁니다. ‘한국에서 하는 행사가 아닌데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할는지 모릅니다. 서울에서 포럼을 한다면 그런 석학들이 쉽게 한자리에 모일까요? 포럼 발표자에 대해 강의료 한푼 주지 않습니다. 제공되는 것은 이코노미클래스 왕복 비행기표뿐이지만, 그들은 포럼에 참석합니다. 베이징이라는 도시가 주는 힘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국과 베이징대라는 브랜드를 활용하고 재단과 융합시키고 있습니다. 포럼이 열리는 곳이 서울이냐 베이징이냐는 중요치 않죠.”
이곳 포럼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은 유명인사들이다. 지난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마이클 스펜스(Michael Spence) 미 뉴욕대학교(NYU) 경영대학원 교수(2007년 상하이포럼), 토니 블레어(Tony Blair) 전(前) 영국총리(2007년 상하이포럼), 케빈 러드(Kevin Rudd)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2012년 베이징포럼), 199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멀리스(James Mirrlees) 전 옥스퍼드대 교수(2009년 상하이포럼),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2005년 상하이포럼) 등이 연설을 했다.
삼성 신입사원 월급 10만원일 때, 공부만 하라고 월 5만원 지급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초창기 업무였던 우수 학생에 대한 장학사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단 일을 맡고 있는 박인국 총장은 한때 재단의 ‘해외유학 장학생’이었다. 그는 지난 1978년에 재단 장학생 시험을 통과하고 한동안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재단의 초기 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얘기다.
“미 버클리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이홍영(李鴻永) 교수가 SK 교육재단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됐을 때 우리나라는 인구 2000만~3000만명에 박사학위 소지자가 18명뿐이었답니다. 박사학위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한 분야를 깊이 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이들이 18명뿐이라면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죠. 이 교수는 인재를 양성하려면 파워하우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대학이고, 대학을 리드하는 것이 교수라고 말했습니다. SK 교육재단의 존재의미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고 최종현 회장 역시 대학 교수를 길러 내는 것이 국가를 근대화시키는 첩경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세계 학문의 중심이 미국이었으니까, 우리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을 미국에서 공부시키면 자연스럽게 나라는 부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장학사업에 뜻을 두고 시작한 재단은 초기 최장집(崔章集) 고려대 명예교수, 김인철(金仁哲) 성균관대 교수 등 이미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던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사업을 시작했다. 고 최 회장이 시카고대 석사 출신이다 보니 그 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후배들을 먼저 지원한 것이다. 1977년에야 본격적으로 장학생을 뽑았고, 박 총장은 1978년에 뽑혔다. 박지향(朴枝香) 서울대 교수, 염재호(廉栽鎬) 고려대 부총장이 ‘SK장학생’ 동기다. 학생들 사이에서 재단 장학생으로 뽑히는 것은 꽤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박인국 총장의 얘기다.
“재단 장학생으로 뽑히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학교 성적, 지도교수 추천서는 물론 재단에서 자체적으로 보는 시험을 통과해야 되니까요.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재단에서 영어교육 등을 시켰고 선발된 순간부터 장학금을 줬습니다. 삼성의 신입사원 월급이 10만원이었는데, 재단에서 유학 준비금 명목으로 월 5만원을 줬습니다. 하숙비 내고 용돈까지 됐으니 큰돈이었죠. 다른 일은 신경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박인국 총장은 재단 장학생으로 뽑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바람에 학자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선발된 ‘SK 동기생’들은 대부분 미국 대학에 진학했다.
미 프린스턴대학원으로 키우려 했던 고 최종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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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명문대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지하3층 콘퍼런스홀. 각종 외국서적이 빼곡하다. |
“삼성은 입학허가서를 받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우리는 39년 전부터 우리의 전통 시스템으로 사람을 뽑고 1년 정도 교육시켰습니다. 통계학·원어민 강좌 등 유학에 필요한 것을 전부 제공했습니다.”
―입학허가서를 받은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과 재단이 선발한 뒤에 대학원 입학허가서를 받도록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입학허가서를 받은 학생을 지원하는 것은 미국의 기준을 따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재단은 우리 손으로 인재를 뽑고, 추리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독려하겠다는 겁니다. 우리의 시각에서 인재를 뽑겠다는 거죠. 미국 대학 입학허가를 준비하는 과정에게 먼저 유학 가 있는 선배들과 링크시켜 주면서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재단이 치르는 시험이 인재를 찾아낼 만큼 변별력이 있나요.
“재단 장학금으로 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직접 사회과학·인문과학 등 분야별로 시험 문제를 냅니다. 대학교 성적과 신뢰할 수 있는 교수의 상세한 추천서는 기본이죠. 대학 성적은 요즘 서울대 기준으로 4.5점 만점에 4.0은 기본입니다. 재단 시험의 역사가 긴 만큼 한국의 지식사회를 이끌어 갈 인재인지 아닌지 변별력이 있다고 봅니다. 경쟁률도 치열합니다. 경제·경영 전공은 1~2명을 뽑는데 50명 정도가 지원합니다. 나중에 미국 학교에 지원할 때 재단의 이름이 들어가면 미국 학교에서 그 학생을 눈여겨보죠.”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이라는 것이 미국 학교 입학허가를 받는 데 유리한 겁니까.
“재단의 영어 명칭인 ‘KFAS(Korea Foundation for Advanced Studies)’는 미국 학교에서 브랜드화(化)한 지 오랩니다. ‘KFAS’의 스폰을 받는다고 하면 일단 높게 평가합니다. 40여 년의 전통 있는 재단에서 한 사람을 믿고 스폰싱을 하는 것이니까요. 고 최종현 회장은 재단을 운영하면서 프린스턴대학의 대학원(Academic Institute of Advanced Study)을 꿈꿨습니다. 아인슈타인 등 당대의 석학들이 모여 깊이 있는 학문을 했던 곳이잖습니까. 우리의 영어 명칭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40여 년간 큰 뜻을 품고 우리의 존재를 알려 왔기에, 요즘 미국 입학허가 부서에 ‘KFAS’ 명함을 내밀었을 때 적어도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웃음).”
―미국의 톱 스쿨에서 허가서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쉽지만 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재단이 각 분야별로 톱 스쿨을 선정해 그 학교의 허가서를 받을 때에만 장학금 전액을 지원합니다. 선발한 학생들의 80~90%는 대개 1~2년 이내에 해당 학교의 입학허가서를 받습니다.”
―재단 장학생으로 뽑힌 이들이 모두 한 학교에 지원을 하면 그들끼리 경쟁하는 것 아닙니까.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톱 스쿨 세 곳에만 추천서를 써 줍니다. 본인들이 학교를 고르는 과정에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고민하죠.”
요즘도 매년 7월 말이 되면 각 대학 및 신문에 한국고등교육재단의 광고가 실린다. ‘해외유학 장학금을 지급할 사회과학과 순수자연과학, 정보통신 분야의 인재를 찾는다’는 것이 내용이다. 재단의 장학생이 되고 또 미국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면, 재단은 교육비 및 체재비 일체를 준다. 대략 1년에 5만~6만 달러다.
“SK재단 출신 중 노벨상 후보 여럿 거론”
―재단이 유명 대학의 박사 출신을 길러낸다는 것이 과거처럼 큰 의미가 있을까요.
“그건 기본 철학에 대한 이슈입니다. 미국 소프트파워의 힘은 박사학위 자체가 아니라 대학에서 어느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그 몰두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대학과 교수들의 연구가 미국을 지키는 큰 축이고, 여전히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보다 사회가 다양화하고, 비즈니스·예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죠. 그들 모두가 박사학위를 딸 필요는 없지만 학문의 연구는 어떤 식으로든 꼭 필요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학문이란 지금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시키는 이음목입니다.”
―제가 아는 분은 비슷한 재단을 운영하는데 장학사업이 요즘 시대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고 있던데요.
“우리가 하는 사업은 자선 차원의 장학사업이 아닙니다. 천재에 가까운 수준의 우수한 학생 중에서 학문을 하겠다는 이들을 지원하는 겁니다. 학문을 하고 싶지만 여타의 사정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브레인을 모으는 것, 또 그들이 오로지 공부만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장학사업입니다.”
―어찌 됐든 SK 돈으로 유학하는 것인데 어떤 조건이 있지 않나요.
“전혀 없습니다. SK 돈으로 유학했지만 이후에 SK그룹에 돌아와 근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은 10명 정도 있어요(웃음). 예전에는 무언(無言)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귀국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다음에 조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묵시적인 교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마저 없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학문에 무슨 국경이 있습니까. 재단 장학금으로 박사 받아서 하버드 교수를 하면 우리에게도 좋습니다. 그들이 1년에 일주일이라도 한국에서 특강을 하면, 1년 내내 서울의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재단 출신’에 대한 박인국 총장의 자부심은 상당했다. 실제로 지난 39년간 재단 장학금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570명이 넘는다. 미 하버드대(71명)·스탠퍼드대(64명)·시카고대(41명)·매사추세츠공대(MIT·37명)·버클리대(32명)·미시간대(29명) 등 내로라하는 학교의 박사 출신들이다. 현재 190여 명의 학생들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서, 재단이 배출한 톱 스쿨 박사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박 총장은 “재단 장학금으로 공부한 사람 중에서 순수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이 여럿 된다. 세계적인 학자를 배출한다는 재단의 성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질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SK재단 후원으로 유학을 다녀온 이들은 ‘홈커밍데이(Home Coming Day)’ 형식을 빌려 1년에 1~2번씩 모인다. 보통 100~200명은 참석한다고 한다.
시스템을 통한 인재육성이 효과적
최태원 이사장이 이끄는 SK 교육재단은 장학사업과 국제 학술대회의 바탕 위에 본격적인 지식 나눔을 계획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도서관 같은 재단 건물을 만든 것도 이를 염두에 둬서다. 이미 대학교수가 고등학교를 찾아 특강을 하고 있고, 내년 초부터는 전국의 소외계층 학생들을 이 곳에 불러 강의를 할 예정이다. 또 국제포럼의 발표 내용을 동영상 매체를 통해 실시간 보도하고, 대중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세계 유명 대학과 싱크탱크들의 강의를 멀티미디어로 제작해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박인국 총장은 “인재육성은 개인이 하기 어렵다. 재단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중점적으로 육성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며 “첨단 IT(정보통신)기술의 바탕 위에 지식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일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