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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추적

금감원 聖域 건드린 소송에서 이긴 社外이사

태광산업은 의혹을 덮기 바빴고, 금감원은 이에 대한 공개를 거부했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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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명계좌·내부자거래 비리 잡고도 사측 비협조로 감사 역할 못해
⊙ 금감원까지 조사결과 공개 거부하자 3년 소송
⊙ “소송의 일부에서 졌을 뿐, 달라진 것 없다”(금감원 법무팀)
  지난 2008년 1월의 어느 날.
 
  태광산업의 한 전(前) 직원이 이 회사의 대표감사위원을 찾아왔다. 이 직원의 얘기는 이랬다. 본인의 계좌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거액의 돈이 거래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의 조사를 받고 법적 책임을 지게 될까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이 직원의 얘기로 태광산업에서 불법(不法) 차명거래가 있다는 의혹을 갖게 된 감사는 회사 측에 소명 자료를 요청했다. 회사는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태광산업이 금감원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감사는 금감원에 자료 공개를 요청했다. 역시 답은 없었다. 금감원은 이 감사의 정보공개 요청에 대해 마치 ‘성역(聖域)’을 건드렸다는 식(式)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결국 감사는 금감원에 정보공개를 하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3년여간 지루한 법정 다툼을 벌였다. 대법원은 지난 2012년 11월, 금감원의 상고(上告·2심 판결에 대한 불복 신청)를 기각했다. 이 감사는 지금 본인이 3년7개월 전에 금감원에 요청했던 자료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금감원을 상대로 승소한 이는 당시 태광산업의 감사위원이자 사외이사였던 전성철(全聖喆) IGM세계경영연구원 대표이사 회장이다.
 
  전 회장은 “대기업 대부분에 사외이사가 있지만 회사가 작정하면 사외이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실질적으로 없다”며 “나와 같은 불행한 사외이사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 금감원과 싸웠다”고 밝혔다.
 
 
  태광산업 前 직원의 폭로로 시작
 
  도대체 태광산업에서, 그리고 금감원에서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지난 5년간의 행적을 되짚어 봤다.
 
  시작은 태광산업에서 근무했던 이 모씨의 폭로였다. 이씨는 지난 2007년 6월에 전 직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당신 명의로 금융계좌를 개설해 채권 거래를 했었는데, 증권회사에 가서 이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명의가 도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씨는 사측에 “앞으로 불법적인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했다. 알고 보니 몇 명의 전·현직 직원들이 같은 사안으로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은 터였다. 이씨가 직접 금융기관에 가 보니, 한 곳에서 본인 명의의 계좌로 20억원 가까운 자금이 유입돼 채권 거래 중이었다. 이씨는 태광산업 대표이사에게 내용증명을 보냈다. ‘나도 모르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설명과 위법(違法) 행위로 인한 민·형사상의 책임은 태광산업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박명석(朴命錫) 당시 대한화섬 대표이사가 그를 찾아왔다. 박 대표는 “무단으로 명의를 도용한 것을 인정한다. 사용된 자금은 이호진(李豪鎭) 회장 돈이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위반과 관련된 처벌의 책임은 금융사 직원 몫이다. 구두로 사죄할 수 있으나 서면으로 남기는 것은 껄끄러우니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 떠났다.
 
  이씨는 자신의 항의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앞서 금감원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 동료를 만났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일부다. 이씨가 법원에 제출한 녹취록이다. 편의상 이씨를 A씨, 동료 직원을 B씨라고 지칭한다.
 
  A: 너, 옛날에 금융감독원 가서 두 시간 동안 고문당했다며?
 
  B: 응.
 
  A: 나도 아주 그거 겁나 가지고 말이야. 야, 그때 정 선배랑 같이 갔냐?
 
  B: 아니, 내가 제일 먼저 스타트 때리고…. (중략)
 
  A: 두 시간 동안 무슨 고문을 당하냐?
 
  B: 뭐 했던 질문 또 하고 또 하고, 그런 거지 뭐.
 
  A: 아, 누구 돈이냐?
 
  B: 응, ‘누구 돈이냐’, ‘나는 모른다’.
 
  A: 나도 그런 걸(금감원에서 어떤 조사를 하는지) 알아야지. 나중에 내 사업해서 큰 돈 왔다갔다 할 때, 갑자기 너 예전에 30대 때 무슨 돈이 있어서 채권 장사 했냐고 물어보면, 그때 가서 ‘모르겠는데요. 이거 이호진 돈인가 보네. 회사에서 횡령한 건가 본데 나는 모릅니다’, 이러면 말이 되냐?
 
  B: 그러니까, 걔네가 했다, 김 모 감사가 시킨거다, 나는 모른다, 이러는거지.(중략)
 
  A: 금융감독원에서 그냥 넘어가? 뻔한 돈을?
 
  B: 몰라, 뭐 알아서 돈을 썼겠지.
 
  A: 송 모가 그러는데 검찰에서도 골치 아프다고 그러더라?
 
  B: 어, 나도 검찰에 걸렸잖아. 나도.
 
  A: 그래서, 너 가지 말래? 회사에서? 검찰에서 전화 오니? 통지서 날라오니?
 
  B: 통지서 날라왔지. 협조 안 하면 법적으로 어쩌구 저쩌구.
 
  A: 근데 안 갔는데 아무 말 없어? 검찰에서?
 
  B: 안 갔는데 그 다음 날 아무 말 없데.
 
  A: 회사에다 얘기하니까 뭐래?
 
  B: 박 모한테 얘기했더니, 이거는 무마시켰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
 
  A: 검찰에다 무마시켰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된대?(중략)
 
  A: 근데 이게 왜 발각된 거니?
 
  B: 이게, 채권 장사를 우리가 많이 했잖아, 솔직히. 돌리면서 그거를 한 사람이 한 게 아니라, 그 채권 산 거를 딴 사람이 팔고, 그런 식으로 막 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한 거지. 처음에는 채권 때문에 걸린 게 아니라 증권, 쌍용 주식을 많이 산 거야.
 
  A: 채권 장사에서 돈을 번 거 가지고?
 
  B: 응. 흥국생명에서는 이제 인수할 걸 아니까 내부자료 거래 정보가 걸린 거지. 주가가 확 뜨니까. 부산 애들이 그거를 사들인 거야. 다 위에서 시킨 거지. 그러니까 돈이 어디서 나왔나 추적을 해 보면 다 나올 거 아냐. 판 사람은 서울에 있는데 산 사람은 부산에 있고 막 얽힌 거야.
 
  A: 내부정보 증권거래법 위반도 그게 큰 죈데 ….
 
  B: 그러니까 선물거래법, 증권거래법 다 걸렸더라고.
 
  이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용된 증권계좌, 녹취록을 들고 장하성(張夏成)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를 찾았다. 장 교수는 당시 태광산업의 대표 감사위원인 전성철 회장을 연결시켜 줬다. 전 회장은 지난 2007년 2월부터 3년의 임기로 태광산업의 대표감사위원 겸 사외이사를 맡고 있었다.
 
 
  전성철 회장, ‘장하성 펀드’ 요청으로 태광에 발 들여놔
 
금감원을 상대로 한 소송서 승소한 전성철 IGM세계경영연구원 회장.
  전성철 회장이 태광산업 이사회 멤버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태광의 석연치 않은 내부자거래 때문이었다.
 
  뉴욕에 본사를 둔 자산운용회사인 ‘라자드’는 지난 2005년 한국사무소를 설립해 서울에 진출했다. 라자드펀드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주도해 설립한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일명 장하성펀드)의 운용을 맡게 됐다. 지배구조가 불투명한 기업의 지분을 인수해 투명한 이사진을 구성하는 등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게 이 펀드의 목적이다. 장 교수가 제안하고 주도해 일명 ‘장하성펀드’로 불렸다. 이 펀드가 처음 투자한 곳이 태광산업 계열사인 대한화섬이었다. 라자드는 지난 2006년 1월 이후 장내 매수를 해서 대한화섬 지분 5.05%를 확보했다. 라자드는 처음부터 경영에 참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라자드는 보고서에서 ‘대한화섬 경영회사의 운영, 소액주주 권리개선, 더 독립적인 회사 이사회, 계열사 간 거래에 관한 투명성 개선 등의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라자드펀드는 이호진 회장 일가가 비상장회사에 편법 지원하는 것을 눈치채게 됐다. 전성철 회장의 법정대리인인 이경훈(李慶勳) 법무법인 이림 대표의 얘기다.
 
  “태광이 케이블 지분을 갖고 있다가 이호진 회장의 자녀가 만든 비상장회사에 지분을 슬슬 넘기는 작업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라자드펀드가 인지하고 문제 제기를 했죠. 그러면서 이호진 회장 일가가 일부 시정할 것은 하고, 향후에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게 한다는 계약을 했습니다. 그 계약 중 하나가 경영의 공정, 투명성 확보 차원에서 주주인 라자드펀드가 지명한 감사위원을 선임하라는 것이었는데, 그 추천인이 바로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회장이었죠.”
 
전성철 회장이 감사 겸 사외이사를 맡았던 태광산업.
  전성철 회장은 이때까지 태광의 오너인 이호진 회장과 친분이 전혀 없었고, 태광에 대해 날선 잣대를 들이대려는 생각도 없었다.
 
  전 회장은 KTF사외이사(2002~ 2004년) 를 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개혁론자’라고 말하는 그가 ‘예스맨 사외이사’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KTF 사외이사였던 지난 2002년 말에 이런 일이 있었다. 전 회장이 KTF 이사회에 참석하기 전에, 사내 임원이 그를 찾았다. 그는 전성철 당시 사외이사에게 ‘남중수(南重秀) 사장을 차기 사장으로 내정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어차피 결정된 사안이니 ‘거수기(擧手機)’ 사외이사를 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전성철 회장은 이 얘기를 듣고 동의를 거부했다. 그는 “사장추천위원회에서 어떤 절차와 심의를 거쳤는지 그간의 과정을 얘기하고, 후보자 세 명을 인터뷰한 후에 결정해야 한다”고 고집부렸다. 결국 당시 경기도 수원에 있던 사장추천위원회장이 급히 서울로 올라오고, 이사회는 세 명의 후보를 모두 인터뷰했다. 결과는 남중수 사장이었지만, 전성철 회장은 그런 일련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가 태광산업의 대표감사위원 겸 사외이사로 갔을 때에도 심정은 같았다. 하지만 태광 측의 분위기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전성철 회장은 “이사회에 참석해 보니 사외이사들을 존중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호진 회장은 이사회 첫날 잠깐 앉아 있다가 나간 뒤, 이후 이사들과 식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오너의 태도가 그랬고, 어떤 일을 제안해도 건설적으로 하겠다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지난 2007년 1월 당시 이 회사의 사외이사는 전성철 회장 외에 남익현 (南益鉉)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유국형(柳國衡) 동문당 P&I 전무, 이재인(李載仁) 대한화섬 감사였다. 이 회사의 자산은 1조6058억원, 2006년 연매출 1조2076억원, 순적자 630억원이었다. 주주는 이호진 회장이 전체의 15.14%, 조카 이원준씨 11.08%, 매제 이재훈·봉훈씨 각각 1.23%, 모친 이선애씨 0.12%, 외삼촌 이기화씨 0.94% 등 친인척 지분이 총 29.97%였다.
 
 
  태광측 해명 15차례 요청했지만 명쾌한 답 못들어
 
태광산업의 오너 이호진 회장.
  태광산업 이사회에 참석한 지 1년여 만에 우연히 제보자의 얘기를 듣게 된 전성철 회장은 사내에서 석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전성철 회장이 크게 의심한 것은 ▲회사가 전·현직 임직원의 명의를 도용해 금융 서류를 위조하고, 수천억 원대 금융거래를 했다는 의혹 ▲회사가 쌍용화재를 인수하기 전에 회사의 주식을 대량 매수하는 대규모 내부자거래를 했다는 의혹 등 두 가지였다.
 
  전성철 회장은 지난 2008년 2월부터 관련 사항에 대한 정보를 공개할 것을 15차례에 걸쳐 태광 측에 했다. 가타부타 말이 없던 태광은 전 회장이 공문을 여덟번 넣고서야 답을 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당사는 제보 혐의와 관련해 내부거래에 관여한 바도 없고, 당사의 자금이 이러한 행위를 위해 달리 사용된 사실도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체적인 자료가 있겠지만, 사실이 아니기에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감사위원에게 줄 자료가 없다. 관련 당국 조사가 진행 중인데, 위 혐의 내용과 무관하다는 점이 증명될 것으로 사료된다.>
 
  태광은 로펌 ‘김앤장’을 내세워 ‘사측이 굳이 감사위원의 요청에 응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서류까지 내려보냈다. 하지만 전성철 회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전 회장은 “관련 당국 조사가 진행 중이라면 그와 관련된 서류가 있지 않으냐. 상법과 정관에 따라 회사 감사로서 충실하기 위해서니 관련 자료를 달라”고 재차 요청했다. 그런데 그는 이 요청을 ‘감사위원회’ 명의가 아닌, 단독 ‘감사위원 겸 사외이사’ 자격으로 했다. 왜냐하면, 감사위원회 명의로 요청하려면 다른 두 명의 감사위원과 의견 일치를 봐야 하는데, 그 두 명의 감사위원은 사측과 친분이 두터운 이들이었다. 이경훈 법무법인 이림 대표의 얘기다.
 
  “나머지 두 명의 감사가 이호진 회장 내지는 회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감사위원회가 감시, 검토, 시정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위원회 자격으로 일을 하려고 해도, 내부 합의회에서 2대1로 계속 전성철 회장이 깨졌죠. 그러다 보니 협조요청도 대표감사위원 겸 사외이사 자격 단독으로 하게 된 것이고, 사측에서 계속 자료 요청을 거부한 겁니다. 현행법으로는 사외이사나 감사위원이 이사회나 감사위원회를 통하지 않고, 1인 독자 자격으로 조사에 착수할 수 없으니까요. 결국 사외이사나 감사위원 1인이 대주주나 경영진의 위법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나머지 감사가 사측의 편을 들면 조사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전성철 회장의 ‘외로운 싸움’은 계속됐다. 태광은 마지못해 지난 2008년 9월, 또 다른 답변서를 보내 왔다.
 
  태광산업은 “흥국생명이 쌍용화재를 인수하기 전에 주식을 대량 매수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차명계좌를 도용당했다는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자금의 실소유자가 누군지 몰랐고, 단지 당시 태광산업 감사였던 고(故) 김 모씨의 요청에 의해 계좌를 빌려 줬다고 했다. 고 김 모씨는 이호진 회장의 모친인 이선애씨를 개인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 자금은 이선애씨의 개인 자금이고, 회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감사의 법적 책임
 
전성철 회장이 소송할 당시 금융감독원의 수장이었던 김종창 원장.
  회사 측의 답변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한 전성철 회장은 결국 지난 2009년 1월부터 태광산업 대표이사 이호진, 오용일 대표이사, 이선애 이사는 물론, 다른 감사위원들에게까지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2월에는 태광산업 전년도 감사보고서에 서명 날인을 거부했다. 감사보고서에 본인이 제기한 의혹이 ‘주석(註釋)’ 형식으로 언급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보고서 어디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없어서다. 전성철 회장을 제외한 회사의 이사회는 똘똘 뭉쳤다. 태광산업 이사회는 전성철 회장이 발의한 의혹과 관련된 일체의 사실조사 안건을 부결시켰다. 전성철 회장의 얘기다.
 
  “처음부터 태광산업을 압박하거나 복잡한 소송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제보자의 얘기가 신빙성이 있었고, 회사에 대해 감시 업무를 해야 할 감사로서 알아야 할 사안이기에 자료 요청을 했습니다.”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외이사가 반대했는데, 이사회에 참석했군요.
 
  “회의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주주총회에서 이와 관련된 얘기를 하고, 곧장 이사회에 갔을 때는 분위기가 말할 나위 없이 험악했습니다. 한때 사외이사 자리를 내놓을까 고민했고, 지인들에게 묻기도 했죠. 막상 사퇴를 하려니까 그간의 노력이 허무해서 참았는데 제가 사외이사를 그만둔 다음에 태광 비리 사건이 터졌잖습니까. 그때 그만뒀더라면 혼자 죄책감이 시달렸을 겁니다.”
 
  —회사가 감사위원의 요청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습니까.
 
  “직접 감사위원 겸 사외이사를 해 보니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자료를 요청해도 사측이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면 법으로 강제하기 어렵고, 설령 자료를 받아서 검토를 하기 위해 직원 한 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해도 회사가 거절하면 그뿐입니다. 사외이사의 대부분은 다른 본업이 있고, 한두 달에 한 번씩 이사회에 참석하다 보니 한계가 있죠. 게다가 회사 측이 사외이사를 존중하거나, 사외이사 업무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저처럼 다른 감사위원들과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는 경우라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죠.”
 
  —그래서 거수기 사외이사, 사외이사 무용론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회사 입장에서 경영자와 친한 사람을 사외이사에 앉히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회사 직원들이 24시간 매달려서 내놓은 결과물을 두어 달에 한 번 이사회에 참석하는 이가 부결시키기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 파트타이머(이사회 멤버)가 상주 직원보다 지식이 많기는 어렵잖습니까. 그렇다 보니 부결률이 낮고, 외부에서 거수기라고 비판합니다. 미리 와서 설명하기 때문에 사외이사의 부결률이 높을 수가 없죠. 더구나 비즈니스에 대한 판단은 누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KB금융이 푸르덴셜생명을 사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는 이견이 있지만, 비리는 다릅니다. 이 사건은 제보자의 명확한 근거에서 시작된 정보였죠. 비리는 특정인이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한 절도 행위입니다. CEO(최고경영자)가 직원 명의를 도용해 차명계좌를 운영했다는 것 자체가 범죄행위를 입증하는 겁니다. 만일 사외이사나 감사 제도가 없다면 이런 범죄행위에 대한 차단이 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사건처럼 감사위원이 회사 내부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자료를 달라는데 거부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참 못 미치는 일이죠.”
 
  —사외이사 제도가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사외이사나 감사위원에 대한 법적 부담감, 책무를 더 부여해야 합니다. 회사의 비리 발생을 알고도 눈 감은 감사위원이 있다면 그 책임을 더 물어야 하고, 또 그만큼 감사위원에게 권한을 줘야 합니다. 제가 이번에 요청한 것은 감사가 독자적으로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을 지원하라는 거였습니다. 감사가 회사에 책임을 묻는 기본 자료만 달라는 것이었죠. 지금처럼 감사가 사측에 어떤 자료를 요청해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면, 어떤 감사가 제대로 업무를 하겠습니까. 감사가 낙하산 자리다, 사외이사는 거수기다라는 비판에 앞서 그들에게 명확한 법적 책임을 물리고, 그만큼 권한을 더 주는 것이 경제 민주화죠.”
 
 
  사외이사란 자리의 한계
 
태광그룹 해고 노동자와 민노총 관계자들이 이호진 회장 비자금 조성과 관련해 구속수사를 요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외이사와 감사위원 제도가 도입된 것은 지난 1998년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에 정부는 기업경영의 감시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의 대형 상장법인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 회사의 경영을 직접 담당하는 이사 이외에 외부 전문가들을 이사회 구성원으로 선임해, 대주주의 전횡을 방지하려는 목적이다. 감사위원은 사외이사와 함께 도입됐는데, 감사위원회는 이사회 안에 있는 위원회 중 하나다. 사외이사가 감사위원회 멤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외이사의 역할을 두고는 말들이 많다.
 
  K그룹의 K대표이사는 외부 회사의 단골 사외이사다. 그는 솔직하게 한계점을 털어놨다.
 
  “1998년에 갑자기 사외이사 제도가 시행되면서 처음에는 적당한 인물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친분이 있는 회사 CEO가 ‘사외이사를 급히 구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당신이 사업을 해 본 사람이니 사외이사를 해 달라’고 해서 첫번째 회사 이사회 멤버가 됐습니다. 구색 맞추기로 시작한 사외이사였기 때문에 이사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사회 시간에 맞춰 참석하고, 얘기 듣고, 찬성 선언하고, 거마비 받아서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사회 멤버 대부분이 임기 이후에 재임했고, 제가 다른 회사의 사외이사로 가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외이사가 용돈 벌이로 쏠쏠하다’는 얘기가 들리자, 2000년대 중반부터는 사외이사를 서로 하겠다는 이들이 생겼죠. 이렇게 선임된 사람들이 이사회 멤버인데, 오너 경영인의 뜻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이경훈 변호사는 “경제현실상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참여연대나 시민단체는 대의(大義)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니까 소액주주소송을 하고, 감사를 통해 해당 회사를 감시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렇지 않은 사외이사나 감사위원이 회사에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배상·반환소송을 하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들어가는 모든 비용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나가고, 개인적으로 받을 혜택이 없잖습니까. 그렇다고 너무 소홀하게 하면 나중에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 아예 사임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직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택하기보다 직무 수행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는 거죠. 저는 회사에 대한 외부의 감시, 주주감시, 주주대표소송 등이 활성화되고 투명한 기업경영을 위해서는 일정 경제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사측을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승소할 경우 얼마의 금액을 보상받고, 또 그중 일부는 변호사에게 돌아간다는 식으로 인센티브 시스템이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감원의 석연찮은 정보공개 거부
 
  전성철 회장은 사측이 협조하지 않자, 2009년 3월에 금감원에 정보공개법에 의거해 관련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하지만 금감원은 “본건은 내부 검토 과정에 있는 사안이고, 개인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사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전 회장은 “금감원의 자료 제출 거부가 이번 소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됐다”고 했다.
 
  “태광산업 측에서 해당 금융기관이 조사 중이라고 했으니, 태광에서 자료를 받지 못하면 조사 기관에서 받으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금감원이 공개할 거라고 생각했군요.
 
  “당연하죠. 명분이 너무 확실했습니다. 제보자가 명의 도용, 은행거래 내역, 녹취록 등 모든 물증을 이미 줬거든요. 차라리 태광은 이해가 갔습니다. 피의자 입장에서야 불리한 것을 숨길 수 있지만 이를 감독하는 금감원이 비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러 요청 사항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금감원이 태광산업에 대해 조사했지만 양측이 직접 받은 교신은 없다는데, 사실이냐 아니냐’가 주안점이었습니다. 오고간 자료가 있는지 없는지는 해당 부서랑 1분만 얘기하면 될 일인데, 금감원이 개인 보호 차원에서 답변을 거부한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마치 관리감독 기관으로서의 자신들의 성역에 도전을 하느냐는 식으로 단칼에 거절한 겁니다.”
 
  전성철 회장은 금감원의 반응을 보자마자, 곧장 소송을 시작했다. 전 회장은 자신이 요청한 사안이 정보공개법에 위반되는 사안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이경훈 변호사의 얘기다.
 
  “금감원이 자신의 업무를 실무적으로 성역시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법률 자체에는 그런 성역 지위를 인정해 준 적이 없습니다. 정보공개법은 미국처럼 선진국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들여온 겁니다. 공공기관이 보유·관리하는 정보를 모든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고, 국가안전·개인 사생활·기업의 영업기밀 등에 대해서는 예외 규정을 둔 겁니다. 금감원에서 우리의 요청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모든 이유를 다 걸었더라고요. 마치 ‘니들이 뭔데 금감원을 상대로 이런 자료를 요청하느냐’는 노골적인 반감이었죠.”
 
  전성철 회장은 지난 2009년 7월, 금감원을 담당하는 국무총리 산하의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에 ‘거부처분의 취소’를 청구했다. 하지만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는 ‘정보공개법상 정보공개 청구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전성철 회장의 요청을 거부했다. 잇따라 서울행정법원 역시 ‘정보공개 거부 취소의 소’에 대해 각하(사건 자체를 종결)했다. 결국 전 회장은 지난 2010년 12월, 서울행정법원에 2차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즈음, 3년 임기가 끝나면서 전 회장은 태광산업 감사, 사외이사에서 물러났다.
 
 
  판결 내용 축소 해석하는 금감원
 
태광산업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장하성 펀드’ 측 김선웅 변호사가 2010년 10월 18일, 장하성 펀드가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011년 12월, 전성철 변호사의 손을 들어 줬다.
 
  서울고등법원(김문석 부장판사)은 “금감원은 순수한 관련자의 인적사항 등 일부 정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조사 자료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고등법원 판결 내용은 구체적으로 이랬다. ▲본건의 정보 공개로 인해 관련자의 사생활 비밀이자 자유의 제한 정도가 크지 않은 점 ▲회사 사외이사 겸 대표감사위원의 권리와 책임을 고려할 때 금감원의 조사 관련 정보에 대한 알 권리 충족의 필요성이 큰 점 ▲주식매매 경위나 취득자금 출처 등에 대한 정보는 태광산업의 경영·영업상 비밀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골자다.
 
  금감원은 이후 대법원에 상고했고, 지난 2012년 11월 15일에 대법원은 금감원의 상고를 기각했다. 금감원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 소송에서 전성철 회장이 승리한 것이다. 금융감독원의 증권·금융법령 위반사건에 대한 자료도 공개돼야 하는 정보라는 것을 최초로 천명한 판결이다.
 
  이경훈 변호사는 “그동안 성역시됐던 금감원의 시세조종, 내부자거래 등 불공정 증권거래에 대한 자료가 공개 가능하다는 판결”이라며 “금감원의 조사 업무에 대해 국민이 감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금감원의 공정한 조사 업무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막상 전성철 회장에게 패소한 금감원의 입장은 이들과 다르다.
 
  금융감독원 법무실 관계자의 얘기다.
 
  “전성철씨가 금감원에 요청했던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했고, 재판부가 비공개로 자료를 검토한 뒤 일부 자료에 대해서는 전성철씨에게 전달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이번 판결을 두고 향후 금감원이 모든 정보에 대해 공개해야 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태광산업 경우와 비슷한 유의 정보에 대해서는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안에 따라 다릅니다. 비슷한 유의 정보여도, 해당 회사의 영업 기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라면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 요즘의 추세이다 보니, 재판부가 과거보다 정보의 공개 범위를 넓게 잡지 않나 싶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일반 개인 혹은 회사가 금감원에 요청하는 정보의 상당 부분을 공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전성철씨가 요청한 경우는 받아들이겠지만, 다른 사안은 이번 건과 별개로 다르게 접근돼야겠죠. 크게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전성철 회장은 3년 전에 금감원에 요청한 태광산업에 대한 자료를 현재도 기다리고 있다. 금감원은 “해당 부서에서 준비 중”이라고 했다. 전 회장은 이 자료를 받은 후에 태광산업을 상대로 과거 감사위원이었던 자신에 대한 업무방해죄 등이 성립되는지를 검토할 예정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태광산업과의 법적공방도 벌일 수 있다. 금감원의 고(高)자세는 아직도 변함 없어 보이지만, 집요한 한 사외이사가 자기 주머니를 털어 가며 매달렸던 노력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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