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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사할린(Sakhalin) 동포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무리 추워도 봄이 되면 새싹을 틔우는 풀잎 같아요”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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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할린 주정부 탄생 이래 처음으로 한인주간 선정, 1주일 동안 한인문화축제 열려
⊙ 5년 전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 건립한 위령탑, 이제는 사할린의 명소 돼
⊙ 부지런하고 교육열 높은 한인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사할린 상류층으로 부상
⊙ 러시아에 동화돼 가는 3·4세들, 한국어 배워야 민족성 유지할 수 있어
지난 10월 18일 한강포럼 회원들이 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망향의 언덕’에서 위령탑 건립 5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무너진 부두에서 배를 기다리니/마음만은 살 갈 곳/귀국 날의 희망 속에//훨훨 나는 갈매기야 너를 보니 부러워라/철모르는 파도야 너를 보니 눈물 난다//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날아가니/고향 생각 간절한 내 마음 전해 주렴’
 
  사할린 남쪽 항구도시 코르사코프에 위치한 ‘망향의 언덕’에 비가(悲歌)가 울려 퍼진다. 음유시인 허남영씨가 자작시에 곡을 붙인 ‘아버지의 노래’다. 허씨는 러시아 자유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포 2세다. 러시아식 발성 탓인지 그의 노래가 묘하게 심금을 울린다. 위령탑 건립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수백 명이 모인 행사장이 일순간 숙연해진다. 저 멀리 푸른 바다를 굽어보듯 솟아 있는 금속 재질의 위령탑이 10월의 햇살에 시리도록 부시다.
 
  지난 10월 18일부터 24일까지 러시아 사할린에서 열린 ‘제1회 사할린 한국문화축제, 한류열풍’ 현장을 둘러보고 왔다. 이번 행사는 사할린 주(州)정부가 현지사회에 기여한 한인들의 공로를 인정해 역사상 처음으로 ‘한인주간’을 선포하고 개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김춘자(金春子) 우리말방송국 국장은 “사할린 주정부가 한인주간을 선포했다는 것은 한인들의 위상이 그만큼 격상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뿌듯해했다.
 
  이번 행사는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서 거행된 위령탑 건립 5주기 추도식을 시작으로 음악 축전과 미술품 전시회, 3·4세들의 우리말 경연대회, K팝 뮤직페스티벌, 한국요리 축제, 한국전통음악 축제, 태권도 시범공연 등이 1주일 동안 쉴 새 없이 펼쳐졌다. 주정부 주도 아래 한강포럼과 현지 한인회 및 우리말방송국이 힘을 보태 진행된 행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고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한국의 오페라 공연을 관람한 후 그 수준에 놀라면서 즐거워하는 러시아인 부부.
  코르사코프는 사할린의 주도(州都)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자그마한 항구도시인 이곳의 부두는 사할린 한인들의 한(恨)과 눈물이 서려 있는 곳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조국이 해방되자 사할린 한인들은 귀국선을 타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이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부두 근처 언덕에 올라 배가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배는 오지 않고 추위와 허기(虛氣)만 찾아왔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일부는 굶거나 얼어서 죽고, 일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일부는 살길을 찾아 사할린 전역에 흩어져 한국인도 일본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무국적자로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다.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은 사할린 동포들의 슬픈 역사가 집약돼 있는 곳이다. 한강포럼은 고국을 그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된 동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2006년 이 언덕에 높이 10m의 위령탑(慰靈塔)을 세웠다. 직경 183cm, 두께 33mm의 파이프로 배 모양을 형상화한 이 위령탑은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조각가 최인수(崔仁壽)씨 작품이다.
 
  최씨는 “2006년 서울대 미학과 김문환(金文煥) 교수의 소개로 한강포럼과 함께 이곳에 왔다가 뜻이 좋아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가스플랜트 건설 수주로 사할린에 진출한 대우건설이 자재를 대 주고 운송을 도와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거센 비바람에도 부식되지 않는 특수강 재질의 위령탑은 무게만 10t에 이른다고 한다.
 
  한강포럼은 정·재계와 문화예술계 저명인사들이 1995년 발족한 후 조용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오고 있는 사교단체다. 현재 2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도서출판 ‘삶과 꿈’의 김용원(金容元) 대표(《조선일보》 편집국장, 대우전자 사장 역임)가 회장직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대우전자 사장, 한양로터리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김용원 회장은 위령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2005년 우리말방송에 방송기자재를 지원하면서 11명의 회원이 처음으로 사할린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황량한 이 언덕에 올라 고국을 그리다 죽어 간 수많은 선조들 이야기를 듣고 가슴으로 울었던 생각이 납니다. 이듬해인 2006년 저희는 이 조각을 ‘우리의 과거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세우기로 했고, 1년간의 제작기를 거쳐 2007년 건립했습니다. 건립 5년 만에 다시 찾은 이곳에 꼿꼿하게 서 있는 탑을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또한 사할린에 계신 우리 동포들의 잘사는 모습에 같은 한민족으로서 긍지를 느낍니다.”
 
  이에 화답하듯 코르사코프시 부시장 나탈리아 씨는 기념사에서 “사할린 코르사코프 시민을 대표해 탑을 세워 준 한강포럼 측에 감사드린다”며 “‘망향의 언덕’은 이제 한인들뿐 아니라 많은 이가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고 말했다. 건립 부지를 제공한 코르사코프시 당국은 위령탑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해 관리하고 있다. 시 홍보책자 맨 앞 페이지에도 위령탑이 소개돼 있었다.
 
 
  한국 오페라 공연에 감동
 
한국의 클래식 음악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 성악가 김인혜·강무림 교수(오른쪽부터).
  행사 주간 첫날인 10월 18일 저녁 6시에는 유주노사할린스크 시내 체호프 센터에서 오페라, 민요, 가요 공연이 펼쳐졌다. 시내 중심부에 자리한 체호프 센터는 580석 규모로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를 기리기 위해 세운 극장이다.
 
  체호프는 1890년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던 중 유형지였던 사할린 섬에 들러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여행기 《사할린 섬》을 출간했다. 대륙에서 상당한 인기를 끈 이 책 덕분에 사할린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고, ‘유형수의 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도 상당히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극장은 공연 10여 분을 남겨 놓고 빈 좌석 없이 꽉 찼다. 러시아인 관객이 한인 관객 못지않게 많았다. 러시아인들은 성악가 김인혜(金鱗惠) 전 서울대 교수와 강무림(姜茂林) 연세대 교수가 꾸미는 오페라에 열광했다. 한곡 한곡 열창이 이어질 때마다 기립박수와 더불어 “앙코르”가 터져나왔다.
 
  1시간여의 공연이 끝난 후 만난 러시아인 제니스·마리아 부부는 “한국의 오페라 수준에 깜짝 놀랐다”며 “한국은 경제만 발전한 나라인 것으로 알았는데 문화적으로도 매우 성숙한 나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할린 문화부 주최 뒤풀이 현장에서 만난 김인혜·강무림 교수는 “한강포럼 주선으로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공연했지만 이곳 사할린 관객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다”며 “무료공연이어서 더 큰 보람을 느낀다”고 공연소감을 전했다.
 
  이번 공연을 주선한 신갑순 ‘삶과 꿈 체임버오페라 싱어즈’ 대표는 “사할린 주정부 승격 후 65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한인주간 행사이니만큼 세계적인 성악가들을 통해 대한민국의 오페라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싶었다”며 “10월에는 한국에도 문화행사가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두 분을 어렵게 모셨는데 이곳 사할린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워 뿌듯하다”고 했다.
 
  김춘자 우리말방송국 국장은 “사할린에서 한국의 성악가들이 오페라 공연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사할린에서 열린 공연은 전통가요이거나 민요 위주였어요. 클래식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죠. 문화예술적으로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러시아인들이 깜짝 놀라는 걸 보고 한국의 오페라 파워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한인들 사할린 상권 장악
 
사할린 동포들의 삶을 담은 사진집 《동토의 민들레》의 작가 윤주영 전 장관.
  연일 계속되는 행사장 곳곳은 한인과 그들의 친구인 러시아인들로 북적댔다. 그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같은 민족인 양 동화돼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중 검은머리의 한인 여성과 금발의 러시아 여성이 오랜만에 만난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잡채를 먹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사뭇 진지해 보여 통역을 부탁하니 “‘우리 집은 지난주에 김장을 했는데, 너희 집은 어떻게 했느냐’고 러시아 여성이 묻자 ‘더 추워지기 전에 빨리 해야 하는데 아직 못해서 걱정’이라고 한인 여성이 답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현지 한인들에 따르면 페레스트로이카 전만 해도 한인들을 ‘김치’로 지칭하며 “김치는 가라”고 조롱했던 러시아인들이 지금은 김치를 더 즐겨 먹는다고 한다. 김치뿐 아니라 사할린에 많이 나는 고사리와 머위를 재료로 한 나물요리와 김이나 미역 등의 해초를 이용한 해물요리까지도 현지인 식탁의 주요 메뉴가 된 지 오래라고 한다.
 
  한식의 현지침투 현상은 중상류층이 주로 이용하는 시내 백화점이나 마트는 물론 중하류층이 많이 찾는 재래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점마다 김치와 나물반찬이 즐비했다. 김장철이어서인지 시장에는 무와 배추가 넘쳐났다.
 
  취재에 동행한 윤주영(尹胄榮) 전 문화공보부 장관은 “사할린이 21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외교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그는 1980년대 후반 현직에서 물러나 사진작가로 변신했다. 이후 세계 오지를 누비며 작품활동을 하던 중 1991년 사할린 동포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 그는 “당시에는 사할린에 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1991년부터 1992년까지 3회에 걸쳐 사할린을 방문했어요. 한·러수교 이전이라 일본에 있는 변호사를 통해 비자를 얻은 후 니가타현(新潟縣)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힘들게 왔지요. 페레스트로이카 직후인 1991년에는 식량사정이 나빠 거리마다 식량배급을 기다리는 이들로 장사진을 이뤘고, 한인들은 언 손을 호호거리며 노점에서 채소를 팔았지요.”
 
  윤 전 장관은 1990년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개인전을 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네팔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은 이 사진전으로 그는 일본 3대 사진상 중 하나인 이나노부에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그리고 수상 후 2년 내에 해야 하는 수상기념전(展)에 <동토의 민들레-사할린에 버려진 사람들>을 출품했다. 이 전시는 당시 일본 <마이니찌신문>이 이례적으로 신문 1면을 할애해 보도했고, 한일 양국에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귀국 문제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낡고 허름한 상가가 즐비했던 거리엔 현대식 건물의 백화점과 마트가 들어섰고, 온갖 식료품이며 공산품이 넘쳐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화점과 마트의 주인이 대부분 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한 동포는 “유주노사할린스크뿐만 아니라 사할린 전역의 주요 상권은 한인들이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에 버림받고 고국에 외면당했으며 냉전시대 내내 차별 받아 온 한인들이 어떻게 러시아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은 이번 축제 기간 내내 행사장을 찾은 한인 1세와 2세들을 통해 풀 수 있었다.
 
 
  낮엔 탄광서, 밤엔 농장서 일해
 
한인들이 운영하는 유주노사할린스크의 임페리얼 팰리스 호텔(오른쪽)과 가가린 호텔.
  이번 행사 기간 한국에서 초청된 공연단의 항공료와 숙박비는 전액 사할린 주정부에서 지원했다. 공연단은 유주노사할린스크에 있는 가가린 호텔과 임페리얼 팰리스 호텔에 묵었는데, 규모나 시설 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 두 호텔의 주인은 모두 한인이다. 50실 규모의 임페리얼 팰리스는 임용군 사할린한인회장이 경영하고 있고, 60실 규모의 가가린 호텔은 정해성(鄭海成) 씨가 운영 중이다.
 
  임용군 회장은 1953년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아버지 임만한(1917년生)씨와 어머니 노학이(1922년生)씨 사이의 3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83년과 1993년에 작고한 부모의 고향은 경북 경산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돼 근교 탄광에서 탄부로 일했어요. 낮엔 탄을 캐고 밤엔 집에서 채소랑 돼지를 키우며 손발이 닳도록 일했지만 딸린 식솔이 많다 보니 우리 집은 늘 가난했죠. 저 또한 먹고살기 위해 통신대학을 다니며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임 회장은 하바로프스크 경제대학을 다니며 용접, 자동차 정비, 트럭 운전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부업으로 돼지를 키우고 꽃도 재배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집을 지어 팔았고, 중고차를 정비해 팔아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는 지금 살고 있는 3층짜리 주택은 물론 호텔도 건축자재를 직접 등짐 져 나르며 지었다고 한다.
 
  호텔을 짓고 난 후에는 관광업에 종사하기 위해 모스크바 서비스·관광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현재 호텔과 레스토랑 외에 건축업 등 여러 가지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 제5대 한인회장에 당선돼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살고 있다.
 
  가가린 호텔의 안주인 권행자(權幸子·64)씨는 영주귀국해 부산 센텀시티에 살고 있다. 부산은 평생 한국 땅을 그리워하다 생을 마친 부모님의 고향이라고 한다. 권씨의 아버지 권임술(1912년 生)씨는 강제징용이 아닌 먹고살기 위해 1930년대 초 일본을 거쳐 사할린에 들어왔고 화부(火夫)로 일했다. 이후 첫 번째 남편과 사별한 권씨의 어머니와 재혼해 2명의 전부(前夫) 소생까지 3남5녀를 키웠다.
 
  “저희 아버지는 소처럼 착하고 부지런한 분이셨어요.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집에 와서 온갖 채소를 가꾸어 새벽에 시장에 내다 팔았지요. 일반학교(초·중·고과정)에 다닐 때 어린 마음에 옆집에 살던 러시아인 친구를 부러워한 적이 있어요. 우리 집은 마당을 텃밭으로 가꿔 호박이며 가지, 오이 등 온갖 채소를 기르는데, 그 친구 집은 마당을 정원으로 가꿔 예쁜 꽃과 나무가 가득했지요.”
 
  권씨네뿐만 아니라 한인 집 마당에는 어디나 꽃 대신 채소가 자랐다. 한인들은 야채를 재배한 후 먹고 남은 것을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모았다. 반면에 러시아인들은 마당엔 꽃을 심고 채소는 사다 먹었다. 권씨는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바지런을 떨며 가꾼 채소 덕분에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권씨는 이르쿠츠크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재학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 정씨는 같은 대학 전기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결혼 후 사할린으로 돌아온 부부는 전공을 살려 각각 화력발전소와 화학연구소에서 근무하다 페레스트로이카 직후 변화를 직감하고 지금의 자리에 호텔을 지어 관광업에 뛰어들었다. 한인으로서는 최초였다고 한다.
 
  슬하에 두 딸을 둔 부부는 영주귀국 후 사업을 둘째딸에게 맡기고 양국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권씨는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부모님을 보고 자란 덕택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고, 아끼고 저축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륙에서 공부하기 위해 밀항
 
한인들이 시장에서 김치 등의 한식 반찬을 팔고 있다.
  성공한 한인 중에는 권씨처럼 영주귀국 후 양국을 자유로이 오가며 사는 경우가 꽤 되었다. 그중 경기도 김포로 귀국한 최정순(崔正順)씨로부터 초대를 받아 유주노사할린스크 시내 외곽에 있는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남편 김욱남(金旭男)씨와 사할린에 오면 머문다는 집은 대지가 3300㎡(1000평)는 족히 넘어 보였고, 초현대식 2층 건물로 지어진 주택도 고급스러웠다.
 
  최씨의 안내로 2층 거실에 올라 창문을 여니 자작나무 숲에 둘러싸인 집 주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주택공사가 한창이었고, 멀지 않은 곳에 한국의 타운하우스 같은 고급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씨는 “유전과 가스전이 개발되면서 미국과 영국의 기업들이 들어와 경치 좋은 이곳이 고급 주택가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넓디넓은 집 뒤뜰은 각종 채소를 심는 밭으로 잘 가꿔져 있었다. 밭에는 각각 비닐하우스와 유리로 된 온실이 두 동 있었는데, 상추와 들깨가 한 여름인 양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최씨는 “한인들은 잘살게 된 지금도 채소는 직접 가꿔 먹는다”며 “중국인들이 들어와 대량으로 재배해서 파는 채소는 농약을 너무 많이 쳐서 보기에만 좋지 건강엔 나쁘다”고 말했다. 최씨가 직접 재배하고 채취한 채소와 나물로 만든 반찬으로 점심을 먹으며 부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는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북서쪽으로 395km 거리에 위치한 우글레고르스크에서 나고 자랐다. 부부의 부모 역시 아버지들은 탄광에서 일했고, 어머니들은 채소를 가꾸고 닭과 돼지 등의 가축을 치며 자식들을 키웠다. 1945년생인 김씨와 1948년생인 최씨는 운 좋게 한인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한글을 익혔다.
 
  “소련시대 민족통합 정책으로 사할린 전역에 있는 한인학교가 폐쇄된 것이 1964년입니다. 저와 아내는 다행히도 폐쇄 직전에 8학년 과정을 모두 마쳤지요. 이후 하바로프스크 공업대학에서 건축을, 이르쿠츠크 전기대학에서 전기를 공부했습니다. 당시 국적이 없어서 밀항(密航)으로 사할린을 빠져나갔지요.”
 
최정순·김욱남 부부. 결혼을 앞둔 1968년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다.
  소련시대 무국적자였던 한인들은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같은 주의 도시에서 도시를 가는데도 수시로 검문을 받을 만큼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대학을 대륙으로 진학하고 싶었던 김씨는 물류선 컨테이너 속에 몰래 숨어들어 하루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열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로 갔다고 한다.
 
  “한인학교 시절부터 연애를 한 아내와는 서로 품앗이로 학비를 대며 대학을 마쳤어요.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아내가 꽁치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고, 아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제가 농장에서 일을 했지요. 대학 졸업 후에는 펄프회사에서 전기 관리자로 근무했고요.”
 
  부인 최씨는 블라디보스토크종합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졸업과 동시에 김씨와 결혼했다. 우글레고르스크 학교에서 15년 동안 교편생활을 한 최씨는 남편을 따라 유주노사할린스크로 이주하면서 교직을 그만두고 지질학연구소에서 일했다. 남편 김씨는 건설회사를 다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사업을 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생하고 있던 차에 처남을 통해 한국에서 온 사업가를 한 분 알게 되었어요. 한국 국적 소유자로서는 사할린에 첫발을 디딘 사업가로 알고 있는데, 그분이 하루는 저를 통역 삼아 시장을 한 바퀴 돌더니 한국에서 아이들 장난감을 떼어다 팔면 돈이 되겠다고 하더군요. 그분 도움으로 장난감 수입 도매업을 시작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장난감으로 큰돈을 번 그는 다음엔 사무용품, 그 다음엔 초코파이와 라면 등의 식품군으로 사업을 확장해 큰 수익을 올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초코파이와 라면 공장이 생긴 현재는 무역업을 접었다. 이후 시작한 레스토랑과 식품점을 지금은 딸이 운영하고 있고, 아들은 생선 가공공장을 차려 해마다 규모를 키워 가고 있다.
 
 
  사할린 최초 사립대 설립
 
사할린 경제법률정보대학 강영복 총장과 그의 딸 강 라디에스다 씨.
  충북 제천으로 영주귀국한 강영복(姜永福·1944년生)씨는 교육사업으로 성공한 경우. 그는 사할린 최초의 4년제 사립대학인 경제법률정보대학 설립자이자 총장이다. 6개 학부 13개 전공이 개설돼 있는 이 대학에는 현재 교수 80여 명과 학생 3000여 명이 공부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할린 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한 강 총장은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에 기대를 걸고 지금의 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한인으로 모스크바대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의 인생여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강 총장은 홈스크에서 태어나 돌린스크에서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의 부모는 자식의 앞날을 위해 일찌감치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그 덕에 중·고교 졸업 후 모스크바대에 진학해 한인으로서는 드물게 에너지 전공 박사가 됐다.
 
  “학부 과정은 쉽게 마쳤지만 대학원 과정은 어렵게 통과했어요. 군 복무 후 군수산업 관련 논물을 썼는데 검열에 걸렸지요. 논문 주제를 매니지먼트로 바꿔 소련이 붕괴되는 혼란을 틈타 제출한 덕에 겨우 통과할 수 있었지요.”
 
  학부 졸업 후 그는 사할린으로 돌아와 전기발전소에서 일했다. 이 발전소에는 당시 한인이 한 명 더 있었다. 본사 통제부에 소속돼 있던 이수진씨다. 후에 사할린 이산가족회장을 지낸 이수진씨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수진씨는 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요직에 있었어요. 실력이 월등해 뽑힌 것이었죠. 그런데 그가 휴가를 간 사이 공산당원 회의가 있었고, 회의 도중 정전이 일어나 난리가 났어요. 공산당 제1비서가 발전소를 상대로 책임 소재를 추궁하는 과정에 이수진씨 존재를 알게 되었죠. 당 비서는 ‘중요한 자리에 한인이 왜 있느냐’며 사고 당시 있지도 않았던 이씨를 해고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그 시절 한인에 대한 차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강 총장은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전소를 그만두고 사할린 전문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90년 지금의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국립대에서는 교육의 한계를 느껴 사립대를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부인 정순덕씨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사립대를 운영하기란 쉽지 않다. 초기에는 5년마다 교수와 학생들이 허가시험을 치러야 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경과민으로 강 총장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을 정도. 영주귀국하게 된 것도 강 총장의 건강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재 강 총장을 대신해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이는 장녀 강 라디에스다이다. 그녀는 “우리 대학에는 현재 대학원 과정이 개설돼 있고, 미국·일본·중국 등에서 온 교수들이 재직 중”이라며 “한국 대학과의 자매결연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일본 이름으로 살아
 
경북 의성이 고향이라는 전채련씨.
  사할린에서 성공한 후 영주귀국해 양국을 오가며 여유롭게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식들과 헤어지기 싫어 영주귀국을 포기한 채 사할린에 남은 이도 있었다. 사할린 동포 1세대에 속하는 전채련(全彩蓮·1931년生)씨와 김공주(金公珠·1927년生)씨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전씨는 1939년 오빠를 따라 젖먹이 어린 남동생을 품고 있던 어머니와 함께 사할린으로 왔다. 연락선을 타고 일본을 거쳐 마카로프에 도착하기까지 죽을 고생을 다했다고 한다.
 
  “수없이 토하고, 추위에 덜덜 떤 기억밖에 없어요. 마카로프에 도착한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바다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위가 매서웠지요.”
 
  전씨 가족은 마카로프에서 바다가 녹기를 기다려 큰아버지가 있는 우글레고르스크로 갔다. 당시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다 심하게 다쳐 한국으로 가고 없었다고 한다. 길이 엇갈려 이산가족이 된 셈이다.
 
  “아버지는 한국에 간 후 소식이 끊겼어요. 결국 15세밖에 되지 않은 오빠가 가장이 되어 식구를 먹여 살렸습니다. 오빠 위로 있던 언니는 열여섯에 경주로 출가해 한국에 남았지요. 몇 해 전 모국 방문단으로 한국에 가서 언니를 만났는데, 90이 다 되어 동생을 알아보지도 못하더라고요. 아버지 소식은 듣지도 못했습니다.”
 
  전씨는 우글레고르스크에서 사촌들과 함께 일본 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당시 학교에 들어가느라 바꾼 이름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며 러시아 여권을 보여줬다. 여권에는 ‘전채련’이 아닌 ‘니시오 다에코’라는 일본식 이름이 표기돼 있었다.
 
  “한국에서 저는 ‘귀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일본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한국 호적에 오른 ‘채련’으로 불렸고요. 그런데 지금은 귀현이도 채련이도 아닌 다에코로 살고 있습니다. 러시아건 한국이건 제 여권이나 신분증을 보는 분들은 제 이름을 보고 ‘일본 사람이냐’고 묻곤 해요. 그럴 때면 솔직히 많이 창피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전씨 가족은 우클레고르스크, 돌린스크, 브이코프 등지를 떠돌며 살았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고, 아버지가 있는 고국에 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코르사코프 언덕에서 귀국선을 기다렸지만 끝내 배는 오지 않았다. 1947년,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오빠마저 탄광에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등생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했던 전씨는 어머니의 주선으로 1948년 결혼했다. 경기도 안성 출신이었던 남편은 병원에서 일했다.
 
  “결혼 후 생긴 지 얼마 안된 한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당시 사할린에는 사범학교가 없어서 유주노사할린스크에 있는 한인학교에서 교원 강습을 받은 후 근무하게 되었지요.”
 
  전씨는 1996년 세상을 떠난 남편과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이 중 장남은 20대에 대륙에 공부하러 갔다가 사고로 사망했고, 장녀는 결혼해 대륙에 살고 있다. 차녀는 한국에서 미망인(未亡人)이 된 외손녀의 아이를 봐주러 한국에 있고, 막내아들은 사할린에 살고 있으나 며느리가 중풍에 걸려 시어머니인 전씨를 챙길 여력이 없다. 전씨는 “다 늙어서 생판 모르는 남과 한국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우리처럼 어쩔 수 없이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에게도 보상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아무도 없는 고향엔 뭐 하러 가나”
 
김공주씨.
  부친 고향이 경북 칠곡인 김공주씨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조센진’이라며 탄압을 밥먹듯이 하는 일본인들이 싫어 사할린으로 왔다고 한다.
 
  “언니가 여섯 살, 내가 한 살이던 해에 사할린에 왔어요. 아버지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막노동을 했지요. 나중에는 대장간에서 일을 했는데, 심장이 나빠져 일을 그만두어야 했어요. 그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을 했지요.”
 
  김씨는 19세에 남편 김풍길(1918년生)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부부는 토마토, 오이, 가지 등 농사를 지어 4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현재 장남은 KGB 요원으로 근무하고, 장녀는 사할린 수산물 회사에서 회계를 맡고 있다. 의사인 차녀는 결혼 후 미국에 살고,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는 막내는 아직 미혼인 까닭에 김씨와 함께 살고 있다. 남편은 1982년 밭에서 토마토 모종을 하던 도중 고혈압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씨는 “손자들에게 한국에 가면 집도 주고 생활비도 준다더라고 하니까 ‘여기 있으면 집도 없고 굶느냐’며 ‘아무도 없는 그곳에 뭐 하러 가느냐’고 말려서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 고향에서 온 분은 없느냐”고 묻더니 갑자기 노래 한 소절을 읊조렸다. 제목이 ‘꽃 한 송이’라는 노래인데 상처 많은 사할린 한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슬프고 아렸다.
 
  ‘그 누가 버렸나/가엾은 꽃 한 송이/마음대로 꺾었으면/버리지를 말아야지’
 
 
  한국어 말하기 대회 “할 말 있어요”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한 골로바노브 끼릴(맨왼쪽)이 아시아나항공이 협찬한 한국 왕복 티켓을 부상으로 받고 있다.
  남한 면적보다 조금 작은 사할린 섬에는 100여 민족 60만명이 산다. 이 중 한인은 전체 인구의 5% 정도인 3만여 명이다. 이제 1세대는 대부분 한국으로 영주귀국하거나 세상을 떠나고 2, 3, 4세대가 러시아인을 비롯해 우크라이나인, 키르기스스탄인, 카자흐스탄인, 중국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과 섞여 살아가고 있다. 사할린 한인의 미래가 궁금해 3, 4세대 젊은이들을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K팝 페스티벌 현장에서 만났다. 두 행사는 사할린 국립대에서 열렸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은 한국어 말하기 대회는 사할린 국립대 한국어과와 한국어교육원(원장 박덕호)이 공동 주최하고 있다. 이날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남혜경 사할린 국립대 한국어과 교수는 “우리 대학에서 한국어 교육이 시작된 것은 사할린 사범대 시절이던 20년 전 사학과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면서부터”라고 설명했다.
 
  박덕호 원장은 인사말에서 “이 대회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참가자들 실력이 매년 향상되고 있다”며 “지난해부터는 주정부와 공동 개최하게 돼 앞으로 대회 수준이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대회 참가자는 사할린 전역 일반학교(초·중·고 과정)에 재학 중인 일반부 9명과 사할린 국립대 한국어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부 6명이었다. 이 중 절반은 러시아인이었다.
 
  일반부 참가자는 ‘할 말 있어요’라는 주제로 3분 동안 스피치를 했고, 대학생부는 각자 주제를 정해 5분 동안 스피치했다. 그 결과 일반부 우승은 유주노사할린스크시 9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야나카와 미순 양이 차지했다. 미순 양은 아무리 추워도 봄이 되면 새싹을 틔우는 풀잎의 강인한 생명력을 낯선 땅 사할린에 뿌리 내린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에 비유해 큰 감동을 주었다. “지금은 영주귀국해 한국에 살고 계시지만 가족이 함께 있었으면 할 때가 많다”는 말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전하기도 했다.
 
  대학생부 우승은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라는 주제로 의미 있는 발표를 한 우꼴로바 다리아(한국어과 5년) 양이 차지했다. 다리아 양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등의 한국 속담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니 좀 더 심사숙고해 말하자”는 뜻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전체 참가자를 통틀어 단 1명에게 주는 대상은 ‘한국과의 인연’을 주제로 감동과 더불어 완벽한 한국어 구사 능력을 선보인 골로바노브 끼릴(한국어과 4년) 군이 차지했다. 러시아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웃으면 초승달 눈이 되는 선한 이미지의 끼릴은 어딘지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 궁금증은 “저는 1년 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다녀왔고, 우연한 계기로 KBS의 ‘1박2일’에 출연했다”는 말로 해소되었다.
 
  끼릴은 “러시아인도 한국인도 아닌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고 늘 우울했는데, 한국에서 좋은 친구를 사귀면서 밝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며 “대학원 과정은 한국에서 밟고 싶다”고 말했다.
 
사할린 한인 강제이주 약사

  1905년 : 러·일 강화조약 결과 러시아가 일본에 남사할린 양도
 
  1919년 : 조선인 광원 500명 남사할린 노동자로 파견
 
  1939~1943년 : 일본의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탄광 개발과 벌목을 위해 조선인 남자 1만6113명 강제 동원, 이후 탄광 노동자 가족 사할린으로 이주
 
  1944년 : 조선인 광원 3192명 일본에 배치해 가족 간 생이별
 
  1945년 : 소련 대일(對日) 선전포고 뒤 남사할린 점령
 
  1946년 : 사할린 거주 조선인 4만3000명으로 집계
 
  1946년 : 미·소(美蘇) 귀환협정으로 일본인 29만여 명 귀환, 제일조선인은 ‘비(非)국민’으로 간주돼 송환 대상에서 제외
 
  1956~1959년 : ‘일·소(日蘇) 공동선언’ 발표 후 일본인과 결혼한 한인과 가족 2300여 명 일본 귀환
 
  1990년 : 한·러 수교, 개인적인 노력으로 7명 영주귀국
 
  2000년 : 사할린 거주 한인 1세대(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 978명(489세대) 경기도 안산 고향마을로 영주귀국(일본이 주택건설 자금 32억1700만 엔 지원, 한국은 부지 제공)
 
  2000년 : 이후 꾸준히 귀국해 경기도 안산을 비롯해 전국 20개 지역에 거주
 
  2005년 : 일본이 6억 엔 지원해 유주노사할린스크에 ‘한인문화센터’ 건립
 
  2012년 : 현재까지 영주귀국자 누계 6008명
 
  3·4세들은 껍데기만 한인
 
K팝 경연대회 전 춤 연습에 몰두하는 러시아 소녀들.
  다음 날은 사할린 국립대 대강당에서 K팝 부르기 경연 방식의 K팝 페스티벌이 열렸다. 현장 분위기가 말하기 대회 때와는 180도 달랐다. 500석이 넘는 강당이 10대와 20대 젊은이들로 가득 찼고, 여기저기서 귀에 익은 싸이의 ‘오빤 강남스타일’을 흥얼거리는 등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음악축전이 어른들을 위한 축제라면 K팝 페스티벌은 아이들을 위한 파티였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K팝의 열기가 이곳 사할린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열띤 현장에서 기자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방청객에 앉은 한 한인 소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한국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자 옆에 있던 금발의 러시아 소녀가 “내가 할 줄 안다”며 “통역을 해 주겠다”고 나섰다. 이 러시아 소녀의 이름은 ‘일로나’, 유주노사할린스크시 9학교 10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일로나는 “한국인 친구를 통해 K팝을 알게 되었고, K팝이 좋아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어를 알아듣지도 구사할 줄도 모르는 한인 소녀는 “K팝은 좋지만 한국어에는 관심이 없다”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사할린 주재 한 기업인은 “사할린에서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라며 웃었다. 좋게 해석하면 한국어가 글로벌 언어가 되어 가고 있다는 반증이었고, 나쁘게 해석하면 사할린의 한인 3, 4세대는 1, 2세대와 달리 민족성보다 국민성이 강한 러시아인으로 동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남혜경 교수는 “사할린의 한인 3, 4세대는 껍데기만 우리 민족이지 속은 러시아 민족과 같다고 흔히 말하는데, 교육 현장에서 보니 대가족 밑에서 배운 것이 있어서 그런지 한인 아이들은 몸에 밴 예의범절이 러시아 아이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한인 3, 4세대들이 역사나 언어를 모르는 것은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세대들은 소련이라는 사회가 무서워 입을 다물고 살았고, 2세대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직후 먹고살기 바빠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요. 이제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만큼 2세대가 3, 4세대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입니다.”
 
  사할린 우리말방송의 김춘자 국장은 “1964~1968년 사할린 각 지역에 있던 한인학교가 러시아의 민족통합 정책으로 폐쇄되면서 우리말을 잃게 되었다”며 “유주노사할린스크가 25년만에 한국어 강좌를 부활시켜 교육하고 있지만 학교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방송을 통해 보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김 국장의 얘기다.
 
  “사할린 한류 열풍의 진원지는 우리말방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말방송을 통해 KBS가 무료로 제공한 콘텐츠인 <가을동화> <겨울연가> <대장금> 등의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한국 문화가 급속하게 퍼졌거든요. 덕분에 사할린 한인들의 위상은 물론 한국의 위상도 높아졌지요.”
 
 
  언어를 잃으면 민족성도 사라져
 
사할린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세 여성. 왼쪽부터 남혜경 사할린 국립대 교수, 김춘자 우리말방송국 국장, 박순옥 이산가족회장.
  사할린 우리말방송의 역사는 1956년 설립된 라디오코리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소련 당국은 러시아어를 모르는 한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다. 사회주의 교육의 선전기관으로 문을 연 셈이다. 한국인의 정서가 밴 방송을 시작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한·러수교가 이뤄지면서다. 라디오 방송이 TV 방송으로 확장된 데는 김춘자 국장의 힘이 컸다.
 
  이르쿠츠크 외국어대 영문과 출신인 김춘자 국장은 1984년 방송국에 입사했다. 사할린 유일의 한국어 신문인 《새고려신문》에서 한글을 익히며 기자로 활동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김 국장은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던 중 ‘모국어도 영어처럼 잘 구사하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부끄러워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그것이 우리말방송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김 국장은 1988년 러시아 방송을 통해 사할린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광복절 행사며 민족 전통문화 행사를 촬영 보도했다. 1989년에는 사할린 공산당과 자매결연을 맺은 북한 사리원 예술단을 북한에 들어가 취재 보도했고, 1990년에는 KBS와 공동으로 사할린 동포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제작해 큰 화제가 되었다.
 
  우리말방송은 현재 사할린 방송의 일부 시간대를 빌려 자체 제작하거나 KBS로부터 지원받은 콘텐츠를 송출하고 있다. 모든 방송을 우리말로 진행하고 러시아어로 자막처리를 하기 때문에 한국어에 서툰 3, 4세대 아이들도 즐겨 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재정난 때문에 늘 위태위태한 실정이다. 김 국장은 “매년 1억원씩 지원하는 현대홈쇼핑을 비롯해 한강포럼 등 한국의 민간단체들의 도움으로 겨우 유지는 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남혜경 교수는 “언어를 잃으면 민족성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며 “재외동포나 한국 정부에서 어떤 식으로 도울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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