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이 남성보다 2배 잘 걸려… 자살률은 남성＞여성
⊙ 심각한 불면증·집중력 저하·체중 감소
⊙ “가장 암울하지만 가장 희망적인 병이다”
⊙ 심각한 불면증·집중력 저하·체중 감소
⊙ “가장 암울하지만 가장 희망적인 병이다”
36세 주부 정현주(가명)씨는 올 초부터 난데없이 우는 일이 잦다. TV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문득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나’라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편, 시댁과 불화가 있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일상이었는데 그냥 자주 생각이 많아지고 울컥하는 것이었다. 밤에 쉽게 잠을 잘 수 없었고,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과 유치원에 가는 아이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다. 식욕은 떨어졌고 체중도 조금씩 줄었다. 온몸에 기운이 없었고 일상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친정에 맡긴 뒤부터는 증상이 심해졌다. 아침·저녁 구분이 없어졌고 하루 한 끼도 먹지 않는 날이 늘었다. ‘어서 마음을 추슬러서 친정에서 아이를 데려와야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무기력한 자신보다는 아이가 외할머니에게 있는 것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째 씻지도 않고 한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날도 많았다.
정씨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내가 굳이 이대로 살아서 뭐하나.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남편과 함께 정신과를 찾은 정씨는 ‘중증 우울장애’ 판정을 받고 곧장 병원에 입원했다. 3주간 입원했던 그는 현재 정기 상담과 함께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
우울증이 현대인의 관심사가 된 지는 오래다.
지난 2011년 우리나라에서 우울증 때문에 병원을 찾은 사람이 53만5000명이다. 우울증 환자 중에서 평생 병원을 한 번이라도 찾는 비율이 3분의 1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수백만 명의 국민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 최근의 통계는 더욱 암울하다.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평생 한 번 이상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전체의 4%(2001년)에서 5.6%(2006년), 6.7% (2011년)로 매년 늘고 있다. 최근 1년간 우울증에 걸린 사람 역시 8.3%(2006년)에서 10.2%(2011년)로 5년 만에 14.3%가 늘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은 치료가 가능한 병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마음의 감기’라고 불리는 우울증에 대해 취재했다.
우울감과 우울증은 다르다
우울증의 정확한 명칭은 ‘우울장애’다. 정신질환 장애 중에서 ‘기분장애’에 속하는 병이다.
보건복지부가 나누는 주요 정신질환은 25개다.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많이 걸리는 정신장애는 ‘알코올 의존 및 남용’(평생 유병률 13.4%)이다. 두 번째는 강박장애·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공황장애·광장공포증 등의 ‘불안장애’(평생 유병률 8.7%)이고, 주요우울장애(우울증)·양극성장애(조울증) 등의 ‘기분장애’(7.5%)가 뒤를 잇는다. 그 외에 ‘니코틴 사용장애’, 건강염려증 등 ‘신체형 장애’, 정신분열·단기정신병 등 ‘정신병적 장애’의 순(順)이다.
요즘 자살·우울증이라는 단어가 흔히 사용돼서인지 스스로 ‘나 우울증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지만 ‘우울한 기분’과 ‘우울증’은 다르다.
전홍진(全弘鎭)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의 설명이다.
“짜증나는 일이 생기거나 날씨가 우중충할 때 기분이 다운(down)되는 것은 우울감입니다. 정신적으로 정상인 사람들도 외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우울하다고 모두 우울증을 앓는 것은 아니죠. 우울증은 통상 2주 이상 우울한 기분이 지속되고, 즐거움에 대한 욕구 자체가 상실돼 정신이나 신체적 기능이 저하되는 병입니다. 일시적인 우울감을 겪는 사람은 외부에서 기쁜 일이 생기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어린애들이 앞에서 재롱을 떨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에너지 자체가 떨어진 겁니다. 우울감이 심해도 외부에서 벌어진 어떤 일로 인해 즐거움이 느껴진다면 우울증일 확률이 낮습니다.”
채정호(蔡正浩) 가톨릭대학 교수가 정의하는 ‘우울증’은 이렇다.
“정서적으로 우울한 것은 병이 아닙니다. 일례로 평생 우울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울로 인해 주어진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기능은 하는데 본인이 그 과정이 너무 괴로우면 병입니다. 또 자해를 하거나 타인에게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으면 우울로 인한 병이라고 정의합니다. 우울하니까 병인 것이 아니라, 우울로 인해 기능이 떨어지면 병입니다.”
대다수가 불면증… 젊은 여성은 오히려 잠 늘어
우울증은 현재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우울증 증상 역시 다양하다. 원인도 모르고, 증상이 다양해서 우울증 치료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통적인 몇 가지 증상이 있으니, 첫 번째는 불면증이다. 환자들의 대부분은 심각한 수준의 불면증을 호소한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잠을 자도 자주 꿈을 꾼다. 전홍진 교수는 “우울증 환자들은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다고 어려움을 호소한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반대로 말해 ‘내가 우울증이 아닐까’ 의심되는 사람 중에서 밤에 잠도 잘자고, 낮에 개운하다면 우울증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소리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보통 20대 젊은 여성 우울증 환자들은 평소보다 오히려 잠을 많이 자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들의 설명이다.
우울증의 공통적인 또 다른 증상은 심각한 수준의 집중력 저하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가령 ‘100 빼기 7’을 시키면 끝까지 답하는 이가 드물다고 설명했다. 어떤 일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에 공부가 어렵고, 일상생활이 힘들다. 주위 사람들이 ‘꼭 기억하라’며 중요하다고 했던 얘기를 금세 잊어버리고,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 무기력하다고 느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간혹 나이가 많은 우울증 환자들에 대해서는 주위에서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대신 ‘치매나 알츠하이머가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똑같이 기억력이 감퇴됐다고 해도 이들 병과는 차이가 있다.
전홍진 교수는 “알츠하이머 환자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지만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기억력이 저하된 것 때문에 무척 괴로워한다”고 차이를 설명했다. 이 외에 갑자기 식욕과 성욕이 줄고, 단기간에 체중이 주는 등 각종 신체 증상이 동반되는 것이 우울증의 증상이다.
얼굴에서 희로애락이 사라진다
환자들 중에는 자신의 우울증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바라보면 우울증 환자를 감별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불면증, 기억력 저하, 식욕 감퇴 외에 몇 가지 징후가 있어서다.
정신과 의사들은 동료의 얼굴에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없다면 우선 우울증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다. 흔한 증상 중 하나가 ‘무표정’이기 때문이다.
전홍진 교수의 설명이다.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한 환자들을 보면 무표정합니다. 얼굴에 희로애락이 없죠. 무표정은 가끔 화난 듯한 표정으로 비칩니다. 앞모습보다 옆모습에서 금세 알 수 있습니다. 표정이 없어지는 것은 도파민(신경전달물질)과 관련 있어서입니다. 식사시간인데도 식욕이 없다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아지면 신경 써서 봐야 합니다.”
―또 다른 증상이라면요.
“보통 직장인들은 업무를 하고 난 뒤 저녁으로 갈수록 몸이 피로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오전에 몸이 축 늘어지고 오히려 오후로 갈수록 나아집니다. 몸의 리듬 탓으로 분석됩니다만 유독 아침에 힘들어하면 우울증일 수 있습니다.”
―연령대별로 증상이 다릅니까.
“기본적인 것은 비슷하다고 봐야 하는데 나이가 젊을수록 양극성 장애가 많습니다. 기분이 위아래로 왔다갔다해서 양극성이라고 하는데 흔히 조울증이라 부르죠. 양극성 장애는 짜증이 나다가 기분이 업(up)되는 등 자기만의 사이클을 갖고 움직입니다. 20대 초·중반 여성의 우울증은 보통 양극성과 우울증의 중간 형태를 띱니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밤낮이 바뀌고, 주로 야행성이 됩니다. 생리 일주일 전에 기복이 심하다가 생리가 시작되면 없어지기도 합니다. 단 것이나 빵, 햄버거, 국수 등을 자주 찾아서 뚱뚱해지기도 합니다. 대인관계가 불안한 것이 특징입니다.”
“변하면 의심해라”
김석호(가명)씨는 요즘 중학생 아들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소 부모에게 말대꾸도 않는 착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툭하면 툴툴거리기 일쑤다. 부모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발끈하고 예민하게 군다. 전교 석차도 많이 떨어졌다.
김씨는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갑자기 별종처럼 굴기 시작했다”며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했다. 학교 교사를 통해 들려오는 얘기도 ‘같은 반 친구들과 싸운다’, ‘수업태도가 산만해졌다’는 등 부정적인 것이었다. 김씨와 함께 병원을 찾은 아들은 뜻밖에도 ‘우울증’으로 판정됐다.
이명수 서울정신보건센터장은 “좋은 변화든 안 좋은 변화든 달라지는 것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이 센터장은 청소년들에게서 보이는 변화들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간단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용하던 애가 난폭해지거나 난폭한 애가 조용해지는 것 모두 문제입니다. 공부를 안 하던 아이가 갑자기 머리에 싸 묶고 공부한다고 부모가 무작정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변화의 이면에 우울증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술을 마시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등 리액티브(반응적)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또 다른 청소년 우울증의 특징이라면요.
“치료약에 대한 반응이 비교적 떨어집니다. 매일 왕따당하는 아이가 우울증 치료제를 준다고 갑자기 좋아질 리 없잖습니까. 치료를 하다 보면 어른들은 ‘우울하다’는 표현을 쓰지만 청소년들은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말합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힘들다고 구체적인 문제를 얘기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힘들다’는 것이 ‘우울함’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가족보다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충을 잘 털어놓기 때문에 학교 교사들이 우울증의 조기 발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 왜 걸리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학자들은 생물학적, 유전적, 환경적 요인으로 나눠서 우울증을 이해하고 있다.
생물학적 요인이라면 우리의 뇌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다. 뇌 중에서도 감정을 전달하는 신경전달 물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호르몬 불균형이 발생해 우울증을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흔히 ‘세로토닌’이 제 기능을 못 한다고 하는 것이 생물학적 추론의 하나다.
뇌 신경전달 물질의 기능 저하로 생겨
채정호 교수는 “우울증 환자들의 뇌를 찍어 보면 호르몬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울증의 발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호르몬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결과”라고 말했다.
때문에 채 교수는 “우울증은 정신장애가 아니라 전신(全身)장애”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뇌는 1000억 개 이상의 세포로 구성돼 있다. 그 안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조직화돼 있는데, 뇌는 이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전기적 성질을 띤 화학물질을 사용한다. 이 화학물질이 신경전달 물질이다. 뇌에서 나오는 호르몬은 현재 알려진 것만 150가지다. 뇌는 하나의 우주다.
채정호 교수의 설명이다.
“우울증을 뇌의 신경전달 물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생기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호르몬이 적게 나오거나 많이 나오는 것이라면 그 호르몬을 보충해 주면 끝납니다. 문제는 호르몬 양이 아니라 제대로 조절이 안 된다는 거죠. 코카인 등의 마약은 특정 호르몬을 한꺼번에 많이 나오게 해서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약입니다. 항우울제는 어떤 호르몬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튜닝이 안 되는 것을 적절하게 기능 하도록 만드는 약이기 때문에, 항우울제를 먹는다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성질이 각기 다른 것도 뇌 호르몬으로 설명됩니까.
“올림픽을 볼 때 그냥 무덤덤하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긴장하면서 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차이가 이런 것을 만든다고 봅니다. 흥분제인 노르에피네프린(신경전달 물질)이 많은 사람은 똑같은 자극에도 좀 더 자극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성격이나 양육에 따라 달라지지만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우울증을 얘기할 때 세로토닌 얘기를 많이 하는데 세로토닌 부족 문제만은 아닙니다.”
―세로토닌이 많은 음식물을 먹으면 우울증이 낫는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세로토닌은 신경하부 중추에 있는 신경전달 물질로 뇌 호르몬 조율을 담당합니다. 우울증의 생물학적 원인으로 세로토닌의 부족을 얘기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제 기능을 못 하는 겁니다. 혹 우울증 치료법으로 세로토닌이 부족하니까 세로토닌을 만드는 전구물질을 많이 먹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스스로 치료하기는 거의 힘들어
우울증은 스스로 진단하기도, 스스로 치료를 하기도 사실상 불가능한 질병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전홍진 교수의 얘기다.
“자신이 우울증이라고 스스로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서 상당수는 임상적으로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우울증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울증을 앓아도 병원을 찾지 않죠.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환자와 치료가 필요치 않은 우울감 환자를 선별하는 것이 우선 중요합니다.”
―어떻게 선별합니까.
“우울증은 갑상선이나 내분비 질환, 암의 초기 증상과 비슷한 형태로 옵니다. 암에서 물질이 분비되는데 우울증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뇌종양 환자가 우울증 환자로 비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올해 병원을 찾은 환자 중 4명이 실은 우울증이 아니라 뇌종양을 앓고 있었습니다. 뇌종양이 뇌의 전두엽에 나타나서 그런 것으로 추정되고 있죠. 이 외에 파킨슨과 치매 초기가 우울증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이런 요소들을 고려해 봅니다. 문진법과 피검사, 우울증에 걸릴 만한 요인 등을 통해서 최종 진단을 하지만, 이보다는 임상 의사의 경험에 비추어 환자의 말투, 행동, 표정 등으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증을 일으킨 원인이 분명하고, 심각한 우울감에서 비롯된 우울증이라면 스스로 긍정적인 생각을 함으로써 변화를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의사들의 대체적인 소견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치료법은 약물치료와 상담치료의 병행이다. 김동현 신경정신과 원장의 얘기다.
“항우울제를 최소 3개월 정도 복용하면서 상담치료를 병행합니다. 항우울제를 길게 몇 년 동안 먹어야 하는 환자도 있죠. 항우울제를 복용하면서 과거 어떤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현재의 스트레스 요인, 사회심리학적 요인, 왜곡된 생각 교정 등 상담을 일주일에 1번 정도 1대 1로 진행합니다. 이 외에 광선치료 등이 병행된다고 하지만 아주 극히 일부분에서 시행됩니다.”
전홍진 교수는 “우울증 치료를 시작한다고 해서 우울한 기분이 금세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우울증 치료를 하면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은 없어집니다. ‘나쁜 생각(자살)이 드느냐’고 지속적으로 얘기해서 우선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 막습니다. 치료 시작 후 2주 정도가 되면 통상 환자들이 의사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이후 치료를 하는 데 통상 6개월 정도면 좋아지고, 스스로 우울한 기분이 들지 않고 불면증 등 증상이 없어지면 완치가 됐다고 판정합니다.”
0세도 우울증 걸린다
학계의 시각으로 보면 우울증은 ‘0세에서 100세’ 누구든 걸릴 수 있는 병이다. 미국에서 고아집단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결과다.
채정호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고아원에서 한 집단에 대해서는 보모가 아기들을 안아서 우유를 먹여주고 틈이 나는 대로 스킨십을 했다고 한다. 다른 한 집단은 아기 입에 우유병만 물려놓고 일절 안아주지 않았다. 1년 뒤 이들 두 집단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보모의 스킨십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생명 유지 차원에서 우유만 먹은 집단의 아기들은 점점 우유를 빨아들이는 힘이 약해졌다. 아기들이 우유 빠는 힘이 약하다는 것은 삶에 대한 애착이 없어지는 무기력증으로 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영아우울증’이라 명명했다.
채 교수는 “우울증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걸릴 수 있다. 미국의 실험 결과는 아기들에게 체온을 전하지 않고 단순히 먹을 것만 주면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다”고 했다.
현재 우울증으로 병원치료를 받은 최연소 환자는 5세 유치원생으로 돼 있다.
전홍진 교수의 설명이다.
“어린 나이에 우울증을 앓는 경우는 통상 가족에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 부모로부터 우울증에 걸리는 유전자를 받은 것이 아니라 부모의 상황에 의한 외부 요인으로부터 아이가 영향을 받은 거죠. 조사결과 어린 우울증 환자의 대부분은 산후우울증을 겪은 여성의 자식이었습니다. 산후우울증 환자들이 감정 기복이 심한 상태에서 아이를 기르면, 그 기운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됩니다. 결국 그것이 축적되어 어린 나이에 우울증으로 발현되는 겁니다.”
우울증은 유전병이 아니다. 우울증을 유발할 만한 소인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사들의 설명이다.
채정호 교수의 얘기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한 번의 큰 충격으로 생기지만 우울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적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인해 어느 날 폭발한다고 보는 것이 맞죠. 우울증은 유전병이 아니며, 우울증 소인이 있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경우 나중에 우울증으로 발현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울증에 잘 걸릴 만한 사람이라면요.
“까칠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나중에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잘 울고, 낯가림이 심하고, 잘 놀라고, 기본적으로 정서가 다운되며 부정적 생각이 많은 아이들이 커서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또 이런 성향을 가진 아이 중에 외부 요인에 크게 반응하는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인이 있는 아이들이라고 해도 부모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합니다. 가령 ‘너는 왜 이렇게 예민하냐’,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느냐’는 등의 자극적인 질문은 우울증에 걸리게 합니다. 까칠하고 기본적으로 정서가 다운된 아이들에게도 ‘잘할 수 있다’는 긍정적 피드백을 지속해 주면 우울증 소인이 많아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노인우울증 느는 추세
충남광역정신보건센터는 요즘 75세 노인 전체와 65세 독거·저소득층 노인을 대상으로 우울증 선별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도내 자살률이 노년층으로 갈수록 높아져서다.
충남광역정신보건센터 김도윤 팀장 얘기다.
“보건진료소 직원이나 조사원이 경로당을 돌거나 직접 노인들의 댁을 방문해서 정신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타지로 떠나고 혼자 지내는 노인 숫자가 많다 보니 조사원의 방문만으로도 반가워하는 분들이 많죠. 이분들의 생활 만족도나 행복지수 등을 체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노인 우울증 고위험군이라고 판단되면 추가 조사를 시행하고, 우울증으로 판명나면 정신보건센터까지 연결시키는 서비스를 합니다.”
우울증 중에서도 60대 이상의 노인 우울증이 최근 들어 다른 연령보다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우울증의 1년 유병률에서 60대 이상은 2.5%(2006년)에서 3%(2011년)로 늘었다. 30대는 2.1%에서 1.8%로 줄었고, 50대는 3.6%로 2006년과 2011년이 같았다.
이명수 서울정신보건센터 센터장은 “노인에겐 병고, 빈고, 외로움(고독), 할 일이 없는 네 가지 고통이 있다. 이들 요인이 우울증을 유발하는데 사회적으로 이들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가에서는 우울증을 심각한 질병으로 생각하고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일례로 서울시에서는 지난 2005년부터 서울시정신보건센터를 만들어 ‘서울 정신건강 2020’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명수 센터장의 얘기다.
“우울증을 예방하고 조기 발견하는 것, 또 3차 예방으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빨리 고치는 것이 센터의 목적입니다. 자살을 예방하는 안전망을 구축하고, 소아청소년을 포함해 일반 시민들이 정신질환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
청소년 우울증의 조기 발견자가 될 수 있는 교사들을 교육하고 자살예방센터를 운영 중이다. 갑자기 충동적 생각이 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전국 어디서든 공통번호(1577-0199)를 통해 정신보건전문요원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다. 24시간 365일 운영이다.
또 이 센터가 만든 블루터치(www. blutouch.net)에 접속하면 우울증은 물론 알코올 중독, 청년정신건강 등을 스스로 검진받을 수 있다.
우울증과 알코올 만나면 최악
요즘 신문 사회면을 보면 자살 소식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 자살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울증을 앓았다고 보도된다. ‘자살=우울증’으로 비친다.
전문가들은 이런 말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울증 환자가 모두 자살로 끝을 맺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채정호 교수의 얘기다.
“인간이 사명감이나 명분 때문에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면 죽는 당시에는 우울했다고 봐야죠.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한 번 죽어나 볼까?’라는 심정으로 죽지는 않습니다. 정신적 평온과 균형감이 깨진 상태죠. 하지만 인간은 한 가지 희망만 있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 희망을 부모나 친구, 교사, 심지어는 매스컴에서라도 확인받으면 죽지 않습니다.”
우울증을 앓는 이는 남자보다 여자가 두 배 정도 많다. 여성들이 출산, 폐경 등을 겪으면서 호르몬 기복이 심해져 그렇다는 가설이 있으나, 정확한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이는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많다. 전홍진 교수의 얘기다.
“같은 우울증이라도 기운이 없으면 자살할 힘도 없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기운조차 없는 거죠. 남성이 여성보다 충동적이고, 힘이 센 데다 알코올 노출 빈도가 높아 자살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우울증과 알코올이 만나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삼성서울병원을 찾은 한 환자의 케이스는 이랬다.
“우울한 기분이 계속돼서 술을 먹고는 새벽에 깼는데 터널 속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공허하고 지옥에 빠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암담하게 느껴지다 보니 죽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알코올 금단 현상’ 겸 ‘우울증’이다.
가톨릭대학병원 정신과의 채정호 교수는 “우울증 환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위험행위”라고 했다.
“알코올은 사람의 모든 기능을 저하시킵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것은 자기 기분을 자제시키는 빗장이 풀어져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성향을 자제시키는데 술을 먹으면 그 조절 능력이 마비되는 거죠. 성범죄가 늘고 비이상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입니다. 술을 아예 많이 먹으면 성관계가 안 되는 것도 극도의 기능 저하 때문입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술 한 잔 먹고 풀자’는 말은 쥐약과도 같습니다. 술이 깰 때까지 같이 있어줄 것이 아니면 마시면 안 됩니다. 술 마시고 한참 얘기하고 즐겁게 지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살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으로 저하돼 있는데 알코올로 인해 더 기능을 저하시키는 경우죠. 알코올 중독자들은 우울증에 잘 걸립니다.”
참 다행인 것 중 하나는 우울증 환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에 자살하는 확률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전홍진 교수는 “우울증 외에 정신병적인 증상이 동반된 환자를 제외하고는 치료를 받는 중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환자는 거의 없었다”며 “환자나 가족이 스스로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産後우울증의 심각성
정신과 의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울증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 자체가 무기력증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도 베란다로 향하거나, 약을 먹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조차 귀찮고 무기력해서 그대로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다. 따라서 우울증 환자들의 대부분은 폭력적인 성향이 거의 없다. 오히려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탓하는 식인데, 예외가 있으니 바로 산후우울증이다. 전홍진 교수의 설명이다.
“우울증 환자의 대부분은 기운이 없고 의욕이 떨어지고 밥 먹기조차도 귀찮을 정도로 무기력합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을 공격하거나 폭력적이 되기 어렵죠. 하지만 산후우울증은 다릅니다. 본인이 우울한 이유가 바로 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기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갓난아기를 아파트에서 던져버렸다든지 하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호주에서는 산후우울증을 빨리 치료하자는 공익광고를 공중파 TV를 통해 내보내고 있을 정도로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우울증의 가장 큰 적을 ‘사회적 편견’이라고 꼽았다.
의사들은 “우울증은 정신병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채정호 교수의 얘기다.
“법에서 말하는 정신병은 사이코시스(psychosis)로, 현실감각이 없는 정신분열병을 말합니다. 정신분열, 환청 등 정신장애로 정신과를 다니는 환자는 전체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정신병적 증상이 겹쳐져 자살을 할 경우, 정신병적 범주에 넣을 수는 있죠. 하지만 ‘저런 분이 우울증을 앓았나?’ 싶을 정도로 멀쩡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이들 자체를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는 풍조가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문턱이 있죠. 우울증 치료를 받은 기록으로 인해 살아가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전홍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가 집중력 저하인데 효과적으로 치료를 받으면 일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우울증 환자 중에는 타고난 기질이 창조적인 사람이 많아서, 오히려 사회적으로 큰 몫을 해내는 이들이 많죠. 미국의 유명한 한 음악가는 기분이 들뜰 때는 다작(多作)을 했고 우울증을 앓았던 시절에는 단 한 곡을 작곡했는데, 그 한 곡이 평생의 명곡이 됐습니다. 노인들은 병원을 쉽게 찾는데, 오히려 치료를 받고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병원 문을 열기를 꺼려 해서 우려됩니다. 정신치료가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식으로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하루아침에 회복할 가능성도 있는 병
보건복지부는 지난 5월에 ‘정신건강증진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주요 골자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환자를 정신질환자 범위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우울증 환자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병을 인지하고도 병원을 가지 않는 사례를 줄이기 위해 정신질환자에서 제외키로 했다”며 “정부에서 그 중요성을 인지한 만큼 보험회사에서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는 사람들을 잘 받아주지 않는 현재의 관행을 과감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우울증이 오늘날 현대의 심각한 질병임은 분명하다. 뇌 호르몬 조절능력 저하로 인한 질병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원인 역시 알려진 바 없다. 어떤 치료를 얼마나 받아야 회복이 되는지도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전문의들은 우울증 환자들은 반드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선 병원 치료 중에 극단적인 자살 등의 선택을 하는 이가 극히 드물고, 치료를 통해 상태가 호전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채정호 교수의 말이다.
“우울증은 정말 치료하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영적인 것 등 너무 많은 것이 어울러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암처럼 근원적인 신체의 한 부분이 고장 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회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치료가 어렵지만 하드웨어가 부서진 것은 아니니까요. 심한 우울증 환자가 나중에 회복되고 난 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암은 향후 5년 동안 생존확률이 몇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울증은 아닙니다. 평생 우울증을 앓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하루아침에 드라마틱하게 회복할 가능성도 있지요. 암울하지만 희망적인 병입니다.”⊙
정씨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내가 굳이 이대로 살아서 뭐하나.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남편과 함께 정신과를 찾은 정씨는 ‘중증 우울장애’ 판정을 받고 곧장 병원에 입원했다. 3주간 입원했던 그는 현재 정기 상담과 함께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
우울증이 현대인의 관심사가 된 지는 오래다.
지난 2011년 우리나라에서 우울증 때문에 병원을 찾은 사람이 53만5000명이다. 우울증 환자 중에서 평생 병원을 한 번이라도 찾는 비율이 3분의 1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수백만 명의 국민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 최근의 통계는 더욱 암울하다.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평생 한 번 이상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전체의 4%(2001년)에서 5.6%(2006년), 6.7% (2011년)로 매년 늘고 있다. 최근 1년간 우울증에 걸린 사람 역시 8.3%(2006년)에서 10.2%(2011년)로 5년 만에 14.3%가 늘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은 치료가 가능한 병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마음의 감기’라고 불리는 우울증에 대해 취재했다.
우울감과 우울증은 다르다
우울증의 정확한 명칭은 ‘우울장애’다. 정신질환 장애 중에서 ‘기분장애’에 속하는 병이다.
보건복지부가 나누는 주요 정신질환은 25개다.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많이 걸리는 정신장애는 ‘알코올 의존 및 남용’(평생 유병률 13.4%)이다. 두 번째는 강박장애·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공황장애·광장공포증 등의 ‘불안장애’(평생 유병률 8.7%)이고, 주요우울장애(우울증)·양극성장애(조울증) 등의 ‘기분장애’(7.5%)가 뒤를 잇는다. 그 외에 ‘니코틴 사용장애’, 건강염려증 등 ‘신체형 장애’, 정신분열·단기정신병 등 ‘정신병적 장애’의 순(順)이다.
요즘 자살·우울증이라는 단어가 흔히 사용돼서인지 스스로 ‘나 우울증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지만 ‘우울한 기분’과 ‘우울증’은 다르다.
전홍진(全弘鎭)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의 설명이다.
“짜증나는 일이 생기거나 날씨가 우중충할 때 기분이 다운(down)되는 것은 우울감입니다. 정신적으로 정상인 사람들도 외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우울하다고 모두 우울증을 앓는 것은 아니죠. 우울증은 통상 2주 이상 우울한 기분이 지속되고, 즐거움에 대한 욕구 자체가 상실돼 정신이나 신체적 기능이 저하되는 병입니다. 일시적인 우울감을 겪는 사람은 외부에서 기쁜 일이 생기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어린애들이 앞에서 재롱을 떨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에너지 자체가 떨어진 겁니다. 우울감이 심해도 외부에서 벌어진 어떤 일로 인해 즐거움이 느껴진다면 우울증일 확률이 낮습니다.”
채정호(蔡正浩) 가톨릭대학 교수가 정의하는 ‘우울증’은 이렇다.
“정서적으로 우울한 것은 병이 아닙니다. 일례로 평생 우울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울로 인해 주어진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기능은 하는데 본인이 그 과정이 너무 괴로우면 병입니다. 또 자해를 하거나 타인에게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으면 우울로 인한 병이라고 정의합니다. 우울하니까 병인 것이 아니라, 우울로 인해 기능이 떨어지면 병입니다.”
대다수가 불면증… 젊은 여성은 오히려 잠 늘어
우울증은 현재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우울증 증상 역시 다양하다. 원인도 모르고, 증상이 다양해서 우울증 치료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통적인 몇 가지 증상이 있으니, 첫 번째는 불면증이다. 환자들의 대부분은 심각한 수준의 불면증을 호소한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잠을 자도 자주 꿈을 꾼다. 전홍진 교수는 “우울증 환자들은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다고 어려움을 호소한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반대로 말해 ‘내가 우울증이 아닐까’ 의심되는 사람 중에서 밤에 잠도 잘자고, 낮에 개운하다면 우울증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소리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보통 20대 젊은 여성 우울증 환자들은 평소보다 오히려 잠을 많이 자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들의 설명이다.
우울증의 공통적인 또 다른 증상은 심각한 수준의 집중력 저하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가령 ‘100 빼기 7’을 시키면 끝까지 답하는 이가 드물다고 설명했다. 어떤 일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에 공부가 어렵고, 일상생활이 힘들다. 주위 사람들이 ‘꼭 기억하라’며 중요하다고 했던 얘기를 금세 잊어버리고,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 무기력하다고 느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간혹 나이가 많은 우울증 환자들에 대해서는 주위에서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대신 ‘치매나 알츠하이머가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똑같이 기억력이 감퇴됐다고 해도 이들 병과는 차이가 있다.
전홍진 교수는 “알츠하이머 환자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지만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기억력이 저하된 것 때문에 무척 괴로워한다”고 차이를 설명했다. 이 외에 갑자기 식욕과 성욕이 줄고, 단기간에 체중이 주는 등 각종 신체 증상이 동반되는 것이 우울증의 증상이다.
얼굴에서 희로애락이 사라진다
환자들 중에는 자신의 우울증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바라보면 우울증 환자를 감별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불면증, 기억력 저하, 식욕 감퇴 외에 몇 가지 징후가 있어서다.
정신과 의사들은 동료의 얼굴에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없다면 우선 우울증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다. 흔한 증상 중 하나가 ‘무표정’이기 때문이다.
전홍진 교수의 설명이다.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한 환자들을 보면 무표정합니다. 얼굴에 희로애락이 없죠. 무표정은 가끔 화난 듯한 표정으로 비칩니다. 앞모습보다 옆모습에서 금세 알 수 있습니다. 표정이 없어지는 것은 도파민(신경전달물질)과 관련 있어서입니다. 식사시간인데도 식욕이 없다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아지면 신경 써서 봐야 합니다.”
―또 다른 증상이라면요.
“보통 직장인들은 업무를 하고 난 뒤 저녁으로 갈수록 몸이 피로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오전에 몸이 축 늘어지고 오히려 오후로 갈수록 나아집니다. 몸의 리듬 탓으로 분석됩니다만 유독 아침에 힘들어하면 우울증일 수 있습니다.”
―연령대별로 증상이 다릅니까.
“기본적인 것은 비슷하다고 봐야 하는데 나이가 젊을수록 양극성 장애가 많습니다. 기분이 위아래로 왔다갔다해서 양극성이라고 하는데 흔히 조울증이라 부르죠. 양극성 장애는 짜증이 나다가 기분이 업(up)되는 등 자기만의 사이클을 갖고 움직입니다. 20대 초·중반 여성의 우울증은 보통 양극성과 우울증의 중간 형태를 띱니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밤낮이 바뀌고, 주로 야행성이 됩니다. 생리 일주일 전에 기복이 심하다가 생리가 시작되면 없어지기도 합니다. 단 것이나 빵, 햄버거, 국수 등을 자주 찾아서 뚱뚱해지기도 합니다. 대인관계가 불안한 것이 특징입니다.”
“변하면 의심해라”
김석호(가명)씨는 요즘 중학생 아들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소 부모에게 말대꾸도 않는 착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툭하면 툴툴거리기 일쑤다. 부모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발끈하고 예민하게 군다. 전교 석차도 많이 떨어졌다.
김씨는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갑자기 별종처럼 굴기 시작했다”며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했다. 학교 교사를 통해 들려오는 얘기도 ‘같은 반 친구들과 싸운다’, ‘수업태도가 산만해졌다’는 등 부정적인 것이었다. 김씨와 함께 병원을 찾은 아들은 뜻밖에도 ‘우울증’으로 판정됐다.
이명수 서울정신보건센터장은 “좋은 변화든 안 좋은 변화든 달라지는 것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이 센터장은 청소년들에게서 보이는 변화들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간단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용하던 애가 난폭해지거나 난폭한 애가 조용해지는 것 모두 문제입니다. 공부를 안 하던 아이가 갑자기 머리에 싸 묶고 공부한다고 부모가 무작정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변화의 이면에 우울증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술을 마시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등 리액티브(반응적)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또 다른 청소년 우울증의 특징이라면요.
“치료약에 대한 반응이 비교적 떨어집니다. 매일 왕따당하는 아이가 우울증 치료제를 준다고 갑자기 좋아질 리 없잖습니까. 치료를 하다 보면 어른들은 ‘우울하다’는 표현을 쓰지만 청소년들은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말합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힘들다고 구체적인 문제를 얘기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힘들다’는 것이 ‘우울함’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가족보다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충을 잘 털어놓기 때문에 학교 교사들이 우울증의 조기 발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 왜 걸리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학자들은 생물학적, 유전적, 환경적 요인으로 나눠서 우울증을 이해하고 있다.
생물학적 요인이라면 우리의 뇌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다. 뇌 중에서도 감정을 전달하는 신경전달 물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호르몬 불균형이 발생해 우울증을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흔히 ‘세로토닌’이 제 기능을 못 한다고 하는 것이 생물학적 추론의 하나다.
뇌 신경전달 물질의 기능 저하로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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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정호 가톨릭대 교수. |
때문에 채 교수는 “우울증은 정신장애가 아니라 전신(全身)장애”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뇌는 1000억 개 이상의 세포로 구성돼 있다. 그 안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조직화돼 있는데, 뇌는 이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전기적 성질을 띤 화학물질을 사용한다. 이 화학물질이 신경전달 물질이다. 뇌에서 나오는 호르몬은 현재 알려진 것만 150가지다. 뇌는 하나의 우주다.
채정호 교수의 설명이다.
“우울증을 뇌의 신경전달 물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생기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호르몬이 적게 나오거나 많이 나오는 것이라면 그 호르몬을 보충해 주면 끝납니다. 문제는 호르몬 양이 아니라 제대로 조절이 안 된다는 거죠. 코카인 등의 마약은 특정 호르몬을 한꺼번에 많이 나오게 해서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약입니다. 항우울제는 어떤 호르몬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튜닝이 안 되는 것을 적절하게 기능 하도록 만드는 약이기 때문에, 항우울제를 먹는다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성질이 각기 다른 것도 뇌 호르몬으로 설명됩니까.
“올림픽을 볼 때 그냥 무덤덤하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긴장하면서 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차이가 이런 것을 만든다고 봅니다. 흥분제인 노르에피네프린(신경전달 물질)이 많은 사람은 똑같은 자극에도 좀 더 자극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성격이나 양육에 따라 달라지지만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우울증을 얘기할 때 세로토닌 얘기를 많이 하는데 세로토닌 부족 문제만은 아닙니다.”
―세로토닌이 많은 음식물을 먹으면 우울증이 낫는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세로토닌은 신경하부 중추에 있는 신경전달 물질로 뇌 호르몬 조율을 담당합니다. 우울증의 생물학적 원인으로 세로토닌의 부족을 얘기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제 기능을 못 하는 겁니다. 혹 우울증 치료법으로 세로토닌이 부족하니까 세로토닌을 만드는 전구물질을 많이 먹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스스로 치료하기는 거의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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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교수. |
전홍진 교수의 얘기다.
“자신이 우울증이라고 스스로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서 상당수는 임상적으로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우울증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울증을 앓아도 병원을 찾지 않죠.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환자와 치료가 필요치 않은 우울감 환자를 선별하는 것이 우선 중요합니다.”
―어떻게 선별합니까.
“우울증은 갑상선이나 내분비 질환, 암의 초기 증상과 비슷한 형태로 옵니다. 암에서 물질이 분비되는데 우울증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뇌종양 환자가 우울증 환자로 비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올해 병원을 찾은 환자 중 4명이 실은 우울증이 아니라 뇌종양을 앓고 있었습니다. 뇌종양이 뇌의 전두엽에 나타나서 그런 것으로 추정되고 있죠. 이 외에 파킨슨과 치매 초기가 우울증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이런 요소들을 고려해 봅니다. 문진법과 피검사, 우울증에 걸릴 만한 요인 등을 통해서 최종 진단을 하지만, 이보다는 임상 의사의 경험에 비추어 환자의 말투, 행동, 표정 등으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증을 일으킨 원인이 분명하고, 심각한 우울감에서 비롯된 우울증이라면 스스로 긍정적인 생각을 함으로써 변화를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의사들의 대체적인 소견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치료법은 약물치료와 상담치료의 병행이다. 김동현 신경정신과 원장의 얘기다.
“항우울제를 최소 3개월 정도 복용하면서 상담치료를 병행합니다. 항우울제를 길게 몇 년 동안 먹어야 하는 환자도 있죠. 항우울제를 복용하면서 과거 어떤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현재의 스트레스 요인, 사회심리학적 요인, 왜곡된 생각 교정 등 상담을 일주일에 1번 정도 1대 1로 진행합니다. 이 외에 광선치료 등이 병행된다고 하지만 아주 극히 일부분에서 시행됩니다.”
전홍진 교수는 “우울증 치료를 시작한다고 해서 우울한 기분이 금세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우울증 치료를 하면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은 없어집니다. ‘나쁜 생각(자살)이 드느냐’고 지속적으로 얘기해서 우선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 막습니다. 치료 시작 후 2주 정도가 되면 통상 환자들이 의사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이후 치료를 하는 데 통상 6개월 정도면 좋아지고, 스스로 우울한 기분이 들지 않고 불면증 등 증상이 없어지면 완치가 됐다고 판정합니다.”
0세도 우울증 걸린다
학계의 시각으로 보면 우울증은 ‘0세에서 100세’ 누구든 걸릴 수 있는 병이다. 미국에서 고아집단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결과다.
채정호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고아원에서 한 집단에 대해서는 보모가 아기들을 안아서 우유를 먹여주고 틈이 나는 대로 스킨십을 했다고 한다. 다른 한 집단은 아기 입에 우유병만 물려놓고 일절 안아주지 않았다. 1년 뒤 이들 두 집단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보모의 스킨십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생명 유지 차원에서 우유만 먹은 집단의 아기들은 점점 우유를 빨아들이는 힘이 약해졌다. 아기들이 우유 빠는 힘이 약하다는 것은 삶에 대한 애착이 없어지는 무기력증으로 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영아우울증’이라 명명했다.
채 교수는 “우울증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걸릴 수 있다. 미국의 실험 결과는 아기들에게 체온을 전하지 않고 단순히 먹을 것만 주면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다”고 했다.
현재 우울증으로 병원치료를 받은 최연소 환자는 5세 유치원생으로 돼 있다.
전홍진 교수의 설명이다.
“어린 나이에 우울증을 앓는 경우는 통상 가족에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 부모로부터 우울증에 걸리는 유전자를 받은 것이 아니라 부모의 상황에 의한 외부 요인으로부터 아이가 영향을 받은 거죠. 조사결과 어린 우울증 환자의 대부분은 산후우울증을 겪은 여성의 자식이었습니다. 산후우울증 환자들이 감정 기복이 심한 상태에서 아이를 기르면, 그 기운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됩니다. 결국 그것이 축적되어 어린 나이에 우울증으로 발현되는 겁니다.”
우울증은 유전병이 아니다. 우울증을 유발할 만한 소인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사들의 설명이다.
채정호 교수의 얘기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한 번의 큰 충격으로 생기지만 우울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적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인해 어느 날 폭발한다고 보는 것이 맞죠. 우울증은 유전병이 아니며, 우울증 소인이 있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경우 나중에 우울증으로 발현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울증에 잘 걸릴 만한 사람이라면요.
“까칠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나중에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잘 울고, 낯가림이 심하고, 잘 놀라고, 기본적으로 정서가 다운되며 부정적 생각이 많은 아이들이 커서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또 이런 성향을 가진 아이 중에 외부 요인에 크게 반응하는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인이 있는 아이들이라고 해도 부모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합니다. 가령 ‘너는 왜 이렇게 예민하냐’,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느냐’는 등의 자극적인 질문은 우울증에 걸리게 합니다. 까칠하고 기본적으로 정서가 다운된 아이들에게도 ‘잘할 수 있다’는 긍정적 피드백을 지속해 주면 우울증 소인이 많아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노인우울증 느는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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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정신보건센터에서 운영하는 정신건강 검진 사이트 블루터치(www.blutouch.net). |
충남광역정신보건센터 김도윤 팀장 얘기다.
“보건진료소 직원이나 조사원이 경로당을 돌거나 직접 노인들의 댁을 방문해서 정신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타지로 떠나고 혼자 지내는 노인 숫자가 많다 보니 조사원의 방문만으로도 반가워하는 분들이 많죠. 이분들의 생활 만족도나 행복지수 등을 체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노인 우울증 고위험군이라고 판단되면 추가 조사를 시행하고, 우울증으로 판명나면 정신보건센터까지 연결시키는 서비스를 합니다.”
우울증 중에서도 60대 이상의 노인 우울증이 최근 들어 다른 연령보다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우울증의 1년 유병률에서 60대 이상은 2.5%(2006년)에서 3%(2011년)로 늘었다. 30대는 2.1%에서 1.8%로 줄었고, 50대는 3.6%로 2006년과 2011년이 같았다.
이명수 서울정신보건센터 센터장은 “노인에겐 병고, 빈고, 외로움(고독), 할 일이 없는 네 가지 고통이 있다. 이들 요인이 우울증을 유발하는데 사회적으로 이들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가에서는 우울증을 심각한 질병으로 생각하고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일례로 서울시에서는 지난 2005년부터 서울시정신보건센터를 만들어 ‘서울 정신건강 2020’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명수 센터장의 얘기다.
“우울증을 예방하고 조기 발견하는 것, 또 3차 예방으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빨리 고치는 것이 센터의 목적입니다. 자살을 예방하는 안전망을 구축하고, 소아청소년을 포함해 일반 시민들이 정신질환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
청소년 우울증의 조기 발견자가 될 수 있는 교사들을 교육하고 자살예방센터를 운영 중이다. 갑자기 충동적 생각이 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전국 어디서든 공통번호(1577-0199)를 통해 정신보건전문요원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다. 24시간 365일 운영이다.
또 이 센터가 만든 블루터치(www. blutouch.net)에 접속하면 우울증은 물론 알코올 중독, 청년정신건강 등을 스스로 검진받을 수 있다.
우울증과 알코올 만나면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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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코올 중독자들은 우울증에 잘 걸리며, 우울증 환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다. |
전문가들은 이런 말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울증 환자가 모두 자살로 끝을 맺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채정호 교수의 얘기다.
“인간이 사명감이나 명분 때문에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면 죽는 당시에는 우울했다고 봐야죠.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한 번 죽어나 볼까?’라는 심정으로 죽지는 않습니다. 정신적 평온과 균형감이 깨진 상태죠. 하지만 인간은 한 가지 희망만 있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 희망을 부모나 친구, 교사, 심지어는 매스컴에서라도 확인받으면 죽지 않습니다.”
우울증을 앓는 이는 남자보다 여자가 두 배 정도 많다. 여성들이 출산, 폐경 등을 겪으면서 호르몬 기복이 심해져 그렇다는 가설이 있으나, 정확한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이는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많다. 전홍진 교수의 얘기다.
“같은 우울증이라도 기운이 없으면 자살할 힘도 없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기운조차 없는 거죠. 남성이 여성보다 충동적이고, 힘이 센 데다 알코올 노출 빈도가 높아 자살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우울증과 알코올이 만나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삼성서울병원을 찾은 한 환자의 케이스는 이랬다.
“우울한 기분이 계속돼서 술을 먹고는 새벽에 깼는데 터널 속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공허하고 지옥에 빠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암담하게 느껴지다 보니 죽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알코올 금단 현상’ 겸 ‘우울증’이다.
가톨릭대학병원 정신과의 채정호 교수는 “우울증 환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위험행위”라고 했다.
“알코올은 사람의 모든 기능을 저하시킵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것은 자기 기분을 자제시키는 빗장이 풀어져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성향을 자제시키는데 술을 먹으면 그 조절 능력이 마비되는 거죠. 성범죄가 늘고 비이상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입니다. 술을 아예 많이 먹으면 성관계가 안 되는 것도 극도의 기능 저하 때문입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술 한 잔 먹고 풀자’는 말은 쥐약과도 같습니다. 술이 깰 때까지 같이 있어줄 것이 아니면 마시면 안 됩니다. 술 마시고 한참 얘기하고 즐겁게 지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살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으로 저하돼 있는데 알코올로 인해 더 기능을 저하시키는 경우죠. 알코올 중독자들은 우울증에 잘 걸립니다.”
참 다행인 것 중 하나는 우울증 환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에 자살하는 확률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전홍진 교수는 “우울증 외에 정신병적인 증상이 동반된 환자를 제외하고는 치료를 받는 중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환자는 거의 없었다”며 “환자나 가족이 스스로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産後우울증의 심각성
정신과 의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울증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 자체가 무기력증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도 베란다로 향하거나, 약을 먹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조차 귀찮고 무기력해서 그대로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다. 따라서 우울증 환자들의 대부분은 폭력적인 성향이 거의 없다. 오히려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탓하는 식인데, 예외가 있으니 바로 산후우울증이다. 전홍진 교수의 설명이다.
“우울증 환자의 대부분은 기운이 없고 의욕이 떨어지고 밥 먹기조차도 귀찮을 정도로 무기력합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을 공격하거나 폭력적이 되기 어렵죠. 하지만 산후우울증은 다릅니다. 본인이 우울한 이유가 바로 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기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갓난아기를 아파트에서 던져버렸다든지 하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호주에서는 산후우울증을 빨리 치료하자는 공익광고를 공중파 TV를 통해 내보내고 있을 정도로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우울증의 가장 큰 적을 ‘사회적 편견’이라고 꼽았다.
의사들은 “우울증은 정신병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채정호 교수의 얘기다.
“법에서 말하는 정신병은 사이코시스(psychosis)로, 현실감각이 없는 정신분열병을 말합니다. 정신분열, 환청 등 정신장애로 정신과를 다니는 환자는 전체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정신병적 증상이 겹쳐져 자살을 할 경우, 정신병적 범주에 넣을 수는 있죠. 하지만 ‘저런 분이 우울증을 앓았나?’ 싶을 정도로 멀쩡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이들 자체를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는 풍조가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문턱이 있죠. 우울증 치료를 받은 기록으로 인해 살아가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전홍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가 집중력 저하인데 효과적으로 치료를 받으면 일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우울증 환자 중에는 타고난 기질이 창조적인 사람이 많아서, 오히려 사회적으로 큰 몫을 해내는 이들이 많죠. 미국의 유명한 한 음악가는 기분이 들뜰 때는 다작(多作)을 했고 우울증을 앓았던 시절에는 단 한 곡을 작곡했는데, 그 한 곡이 평생의 명곡이 됐습니다. 노인들은 병원을 쉽게 찾는데, 오히려 치료를 받고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병원 문을 열기를 꺼려 해서 우려됩니다. 정신치료가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식으로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하루아침에 회복할 가능성도 있는 병
보건복지부는 지난 5월에 ‘정신건강증진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주요 골자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환자를 정신질환자 범위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우울증 환자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병을 인지하고도 병원을 가지 않는 사례를 줄이기 위해 정신질환자에서 제외키로 했다”며 “정부에서 그 중요성을 인지한 만큼 보험회사에서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는 사람들을 잘 받아주지 않는 현재의 관행을 과감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우울증이 오늘날 현대의 심각한 질병임은 분명하다. 뇌 호르몬 조절능력 저하로 인한 질병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원인 역시 알려진 바 없다. 어떤 치료를 얼마나 받아야 회복이 되는지도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전문의들은 우울증 환자들은 반드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선 병원 치료 중에 극단적인 자살 등의 선택을 하는 이가 극히 드물고, 치료를 통해 상태가 호전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채정호 교수의 말이다.
“우울증은 정말 치료하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영적인 것 등 너무 많은 것이 어울러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암처럼 근원적인 신체의 한 부분이 고장 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회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치료가 어렵지만 하드웨어가 부서진 것은 아니니까요. 심한 우울증 환자가 나중에 회복되고 난 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암은 향후 5년 동안 생존확률이 몇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울증은 아닙니다. 평생 우울증을 앓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하루아침에 드라마틱하게 회복할 가능성도 있지요. 암울하지만 희망적인 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