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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또다시 등장한 장준하 타살說의 허구

두개골 골절과 골반 골절은 ‘타살’이 아니라 ‘추락사’의 결정적 증거!

글 :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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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격자 김용환氏, 1975년 수사·1988년 경기도경·1993년 민주당·2002년과 2004년 의문사委 조사…
    5審도 모자라 6審까지 할 기세
⊙ 이미 확인된 ‘두개골 함몰 골절’만 집중 부각… 새로운 추락 증거인 ‘골반 골절’은 외면
⊙ 현재 의혹대로라면 단독산행 유도→마취→무의식 상태→가격→추락 모든 경우의 수 맞춰야
⊙ 주삿바늘 자국 발견한 유족 측 검안醫 “협심증 때문에 주사를 맞았을 것… 크게 신경 쓰지 않아”
⊙ 일상적 접견 기록 내세워 “청와대가 사건 통제한 증거”라 주장하는 野圈
⊙ 1993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수사와 무관한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의 잡담을 근거로 타살 단정
최근 공개된 고(故) 장준하 선생의 유골 사진. 전문가들이 밝힌 유골의 특이사항은 지름 6~7cm 크기의 두개골 원형 골절과 오른쪽 골반 골절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8월 1일, 고(故) 장준하(張俊河·1918~1975) 선생의 유골에 대한 검사가 사망 37년 만에 이뤄졌다.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에 조성 중인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移葬)하면서 그의 죽음은 다시 한 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검사 결과를 처음 보도한 《한겨레》는 8월 15일자 신문에 “장준하 선생 두개골서 6cm 뻥 뚫린 구멍”이란 제목과 함께 총 3면에 걸쳐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신문은 이후 20일까지 총 5일 동안 신문 1면을 통해 소위 ‘장준하 타살 의혹’을 집중 보도했다.
 
  고인(故人)은 생전(生前)에 광복군 장교, 《사상계》 창간인, 제7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재야운동가였다. 박정희(朴正熙) 유신(維新) 정권 시절인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수사결과 사인(死因)은 등반 중 추락에 의한 뇌진탕으로 발표됐다.
 
고(故) 장준하 선생.
  사건 18년 후인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명백한 타살사건”이라고 단정하면서 ‘의혹’에 대한 조사활동이 수차례 시행됐으나, ‘명백한 타살 증거’는 방송 이후 19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한겨레》 보도 직후 민주당은 진상조사와 박근혜(朴槿惠)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사과를 촉구하고 나섰다. 당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박 후보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손학규(孫鶴圭) 경선후보는 “타살이라면 박근혜 후보는 석고대죄하고 후보직을 사퇴하라”고 했고, 정세균(丁世均) 후보는 “친일파 박정희에 의한 독립군 장준하 타살이면 박근혜 대통령은 불가하다”고 비난했다.
 
  언론과 야권은 유골을 내세워 37년 전 죽음을 ‘사실상 타살’로 단정하는 듯한 기사와 주장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장준하 선생 부활은 유신 부활 막으라는 불호령”, “박정희가 그리 두려운가?”, “장준하 의문사, 누군가의 사전계획 따라 실행”, “독재가 민주주의 살해” 등 발언이 그대로 기사 제목으로 보도됐다.
 
  의혹의 정점을 찍은 것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지난 9월 1일 방송이다. 1993년 이후 19년 만에 다시 ‘장준하 추락사’를 취재한 방송은 “의학자 29명의 자문과 추락 실험 등 ‘입체적 분석’을 통해 사망 경위를 추적했다”며 “이제라도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벽을 거두고 지난 37년 동안 유족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결론지었다.
 
  《월간조선》은 19년 전 장준하 타살 의혹에 대해 심층보도를 한 바 있다. 잊혔던 사건과 의혹이 최근 유골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대선정국과 맞물려 정쟁(政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두개골에 묻힌 ‘골반 골절’
 
장준하 선생이 1966년 10월 민중당 대구 유세 중 “박정희 대통령은 밀수왕초”란 발언으로 구속되기 전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번 의혹 제기의 핵심은 유골이다. 전문가들이 밝힌 유골의 특이사항은 지름 6~7cm 크기의 두개골 원형 골절과 오른쪽 골반 골절이다. 유골 사진을 처음 공개한 《한겨레》는 “망치 가격이 확실하다”는 유족 측의 입장을 1면 제목으로 선택했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의 이윤성(李允聖) 교수가 이장 당시 작성한 검시 소견서에는 “머리뼈와 오른쪽 관골의 골절은 둔체에 의한 손상이지만 이 손상이 가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모든 언론은 두개골에 남은 원형 함몰 흔적에 집중했다. 네 조각이 난 골반 골절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사실 ‘두개골 함몰’은 37년 전 수사 당시 이미 확인된 내용이다. 수사 당국은 ‘우측 후두부 함몰 골절’을 결정적 사인으로 적시했다. 유족 측의 요구로 사체를 검안했던 의학박사 조철구(趙澈九)씨는 소견서에 “직접 사망의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 골절상으로 인한 두개강 내 손상”으로 기록한 바 있다.
 
  두개골 함몰 골절은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때는 물론, 같은 해 9월에 공개된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의 활동보고서, 2002년과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이른바 ‘의문사’ 조사 때마다 직접적인 사인으로 지목됐다. 이에 대해 과거 정부나 수사 당국에서 반론을 제기한 적은 없다. 당시 검안 소견에서 분명히 드러난 직경 약 6cm의 함몰 골절 외상(外傷)이 이번 유골 검사를 통해 ‘확인’된 셈이다.
 
  오히려 새롭게 발굴된 사실은 골반 골절이다. 사건 이후 의혹을 제기해 왔던 이들은 한 목소리로 “두부(頭部) 외에 골절이 없다”며 타살 의혹을 제기해 왔다. 사망 당시 조철구씨의 검안 소견은 골반부는 물론 경부(목), 흉부(가슴), 복부(배), 요부(허리) 등 모든 부분에서 골절상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서술한 바 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머리 외엔 골절이 없다”는 사안을 의혹에 대한 근거로 제시했다. 다음은 보고서 중 일부다.
 
  “14m 정도 높이의 암벽에서 추락 시 발생해야 할 골절이나 열창 손상이 전혀 없었으며, 안면부 등 신체 노출 부위가 바위에 부딪히거나 긁힌 흔적 또한 전무했다는 참고인들의 진술을 봤을 때 사체 상태만 놓고 보더라도 장준하가 추락하여 사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골반 골절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
 
  당시 위원회의 결정문도 비슷한 판단을 내놓았다.
 
  “장준하는 위 높이에서 추락하였음에도 후두부에 함몰 골절상을 입은 외에 외상을 거의 입은 바 없는 등 사체 상태가 깨끗하였고, 착용한 의복에도 미끄러진 흔적이나 긁힌 흔적이 없어 위 지점에서 추락사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양승규(梁承圭) 전(前)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은 2005년 쓴 “장준하 선생, 그 죽음의 진실은?”이란 제목의 글에서 ‘위원회 활동보고서’를 인용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사체는 귀 뒤쪽 두개골 함몰 골절상 외 다른 골절상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시신의 모습이 깨끗하였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로 보아 75m(실제 추락지점은 14m) 높이에서 추락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한겨레》는 지난 8월 15일 첫 유골 검사 기사에서 ‘뻥 뚫린 두개골 구멍’에 대해선 집중적으로 보도했지만, 골반 골절은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이윤성 교수가 밝혀내지 못해서인지, 유족 측이 밝히지 않아서인지, 담당기자가 취재과정에서 제외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유골 사진이 공개되기까지 이틀간 국내 모든 언론은 ‘두개골 6cm 구멍’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한겨레》는 8월 16일 오후 인터넷판을 통해 유골 사진과 검시 소견서를 공개했다. 소견서는 “가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명시했고, 이를 작성한 이윤성 교수는 “37년 된 유골을 눈으로만 보고서 머리뼈 손상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사 제목엔 유족 측의 주장인 “망치 가격 확실”이란 내용만 실렸다. 이튿날 지면에 실린 같은 기사의 수정된 제목도 이 교수의 소견 중 “뒷머리 함몰에 의한 사망” 부분만 뽑혔다.
 
  이윤성 교수는 이후 인터뷰에서 골반 골절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8월 18일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 교수는 “오른쪽 볼기뼈(골반) 골절을 발견하고 추락이 개입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골반 골절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추락) 가능성을 높게 본다. 인위적 가격 뒤 절벽으로 장 선생을 추락시켰거나, 강제로 떠밀어서 바닥 근처의 돌에 부딪혔을 가능성 모두 있다. (추락이라도) 환경 등에 따라 (골절 부위가) 적을 수도 있다. (사망 당시) 부검을 했다면 폐나 간 같은 장기가 터진 모습이 관찰됐을 수 있다. 지금도 가격에 의한 타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제대로 사인을 밝히려면 독극물 조사도 해봐야 한다.”
 
 
  “역사적·사회적 소견”
 
1967년 5월 대통령선거법위반 혐의로 수감됐다 24일 만에 출감한 장준하 선생.
  이 교수는 사인의 과학적 추론 방법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975년 장 선생 사망 당시 부검을 해야 했었다.”
 
  유골은 가장 과학적·객관적인 증거다. 가격인지 추락인지 확정할 수 없는 두개골 함몰과는 달리 골반 골절은 추락을 확실히 입증했다. 하지만 여론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골이 마치 ‘결정적 타살 증거’인 듯 ‘타살설’을 키웠다. 그리고 줄줄이 엮인 의혹 제기 기사엔 박근혜 후보를 비난한 내용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한 달에 걸쳐 ‘타살 의혹’ 여론을 주도했던 《한겨레》의 한 칼럼 내용 중 일부다.
 
  “37년 동안 장준하 선생이 왜 죽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의학적 소견은 여전히 ‘의혹’이지만 역사적·사회적 소견은 ‘타살’이에요. 억울하고 비통한 모든 죽음에 분노할 줄 아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최우리 《한겨레》 기자, ‘키워드 놀이’ 中)
 
  보름 동안 이어져 온 타살 의혹의 정점을 찍은 것은 지난 9월 1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장준하, 그 죽음의 미스터리’ 편이다. 제작진은 과거 제기됐던 여러 의혹을 정리해 사실상 타살 가능성에 비중을 둔 듯한 결론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방송을 별생각 없이 보면 여러 과학적·객관적 증거가 타살을 완벽히 입증한 듯하지만, 구체적인 논리 전개 과정을 보면 의문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큐멘터리 방송의 특성상 반전(反轉) 효과는 곳곳에 주어질 수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 전체가 갈팡질팡하면 방송을 보는 이에겐 혼란만 가중된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알고 싶다〉 내용은 처음엔 두개골을 내세워 둔기에 의한 살인인 것처럼 보이다가, 골반 골절이 추락의 증거라는 전문가들의 소견에 의해 ‘가격 후 추락’으로 무게가 옮겨진다. “대상(피해자)이 움직인다면 테두리가 분명한 원형 함몰이 나올 수 없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나오자 ‘무의식 상태의 가격’이 새롭게 제기된다.
 
 
  “外傷은 존재했다”
 
  SBS는 무의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팔과 엉덩이의 주삿바늘 자국을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의학적인 분석을 접고 목격자에 대한 의혹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그것이 알고 싶다〉 사회자의 발언이다.
 
  “가격이냐, 추락이냐. 팽팽히 맞서던 전문가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교집합을 이뤘습니다. 이 유골의 골절이 가격에 의한 것이든 추락에 의한 것이든 장준하씨는 그 이전에 이미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사체에서는 의문의 주사 자국이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의 섣부른 추리는 경계하고자 합니다. 당시 부검이 이뤄지지 않아 이 주삿바늘의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적할 단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외상의 존재 여부에 대한 설명도 명확하지 않았다. 방송은 시신에서 외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추락했다는 사람이 한 군데 찢어지거나 긁히거나 아무 외상을 볼 수가 없었다”는 유족의 증언을 인용해 “몸에서 이상하리만큼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구르거나 찢긴 흔적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했다.
 
  사회자는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 구르거나 미끄러진 흔적이 전혀 없다”고 못을 박았고, 방송에 출연한 다수 전문가도 외상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소견을 밝혔다. 하지만 사망 직후 사체검안 소견서엔 분명 외상이 존재한다고 기록돼 있다.
 
  사망 당시 유족 측의 요구로 사체를 직접 검안한 조철구씨의 소견서에 따르면, 시신의 안면부엔 얼굴 전체에 좌상, 찰과상, 열창 등의 외상이 있으며, 우측 콧구멍에서 출혈이 확인됐다. 후흉부(등) 우측엔 위에서 아래로 향한 ‘모래에 긁힌 것 같은’ 빗살 모양의 찰과상이 확인됐다. 또 요부(허리) 및 골반부(엉덩이) 우측과 우측 대퇴 후면부(넓적다리 뒤쪽)에도 등과 같은 방향의 찰과상이 존재했다. 양측 액와부(겨드랑이)엔 ‘방사선상의 피하익혈상’(放射形 皮下溺血로 추정)이 발견됐다.
 
  조철구씨의 검안 소견서는 타살 의혹을 제기해 온 야권과 언론이 수차례 인용한 바 있는 주요 증거자료 중 하나다. 그는 1993년 5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당시 부검의로서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지만, “심정적으로는 타살”이라고 밝힐 정도로 재야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려고 했다.
 
 
  ‘유영철 흉기’까지 등장시킨 SBS
 
1974년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한 장준하 선생(오른쪽)에게 함석헌 선생이 병세를 묻고 있다.
  4·19 직후 고려대 의대 학생 신분으로 민주당 인천시당 청년부장에 임명된 이후 야당에 몸담아 온 그는 인터뷰 당시 민주당 인천시 서구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1996년엔 국민회의 후보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3년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의 주삿바늘 자국 증언도 그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법의학, 신경외과, 해부학 등 국내 전문가 88명에게 자문을 요청했고, 그중 29명이 공식 답변을 보내왔다”며 “전문가와 함께 보다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방송은 29명 중 각각 몇 명이 추락, 가격, 독극물 등의 의견을 제시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SBS는 추락에 의한 두개골 골절을 재현한다며 삶은 달걀을 떨어뜨리는 실험 장면을 보여줬다. “원형 함몰 골절에 사용된 둔기는 지름 6cm의 끝이 둥근 해머일 가능성이 있다”며 괴한이 긴 해머 자루를 들고 내려치는 모습을 실루엣으로 수차례 내보냈다. “산중에서 해머 같은 장비를 갖고 있다면 사람들 눈에 띄어야 한다”는 의문에 대한 답으로 연쇄살인범 유영철(柳永哲)이 범죄에 사용했다는 짧은 망치 자루에 큰 해머를 이어 붙인 흉기 사진도 보여줬다.
 
  방송은 “엉덩이와 머리에만 골절을 입는 추락 자세는 총 네 가지가 있다”며 실제 사람이 뛰어내리는 실험을 시행했고, 편견을 배제한다며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에릭 바틀링크 교수에게 고인에 대한 일체의 정보를 주지 않고 자문까지 요청했다. 바틀링크 교수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추락 시 몸을 보호하려는 부상이 보이지 않는 아주 특이한 경우”라며 “추락할 때 의식이 없거나, 죽었거나, 독극물에 중독됐다면 수평으로 추락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틀링크 교수는 세 가지의 가정을 얘기했지만, 사회자는 곧바로 “독극물과 같은 외부 요인을 검토해 봐야 한다는 얘기”라며 자연스럽게 주삿바늘 자국 의혹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갔다. “퇴원 후엔 병원에 간 적이 없고, 주사도 맞은 적이 없다”는 부인의 증언까지 방영한 후, 제작진은 “더 이상의 섣부른 추리는 경계한다”며 추적을 중단했다.
 
 
  故人의 협심증은 외면하는 언론
 
1993년 민주당 장준하선생사인규명 조사위원회 활동보고서에 실린 사체 검안의 조철구씨의 소견.
  유족의 요청으로 사체를 검안하던 중 주삿바늘 자국을 직접 발견하고 이를 최초로 증언했던 조철구씨는 이미 1993년에 이 흔적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사체 검안 당시부터 주삿바늘 자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며 이렇게 증언했다.
 
  “주삿바늘 자국에 상당히 의문을 갖는데 나는 그 당시 그 점에 대해 의문을 안 가졌다. 그 양반(장준하)이 건강치 않고 협심증도 있어서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제일 의심을 갖더라. 주사 놓고 기절시킨 뒤 추락사로 가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사인을 밝혀내기 위해 실제 사람이 뛰어내리는 실험을 하고 미국의 법의학 전문가까지 인터뷰했지만, 고인이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는지 여부에 대해선 부인의 증언 한마디로 끝내버렸다. 1시간에 가까운 방영시간 중 ‘협심증’이란 단어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장준하 선생이 생전에 심장협심증과 간경화를 앓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구속됐지만, 같은 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1974년 12월 4일 《경향신문》의 “장준하씨 어제 출감”이란 기사 내용 중 일부다.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이 확정, 영등포구치소에서 복역 중인 전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장준하씨가 법무부의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3일 하오 10시50분 출감했다. 고혈압과 협심증 등으로 형집행이 정지되어 수감 10개월20일 만에 출감한 장씨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 107 조광현 내과병원 203호실에 입원했다.”
 
  서울대학교병원이 제공한 의학정보에 따르면, 협심증 환자는 대부분 급성 통증 또는 운동이나 활동 시에 발생하는 통증을 호소한다. 주로 “가슴을 쥐어짠다”, “가슴이 싸한 느낌이 든다”고 호소하며, 가슴의 정중앙 또는 약간 좌측 부위에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드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흉통(胸痛)을 호소하면서 갑작스런 실신이나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내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대부분 급성으로 광범위한 부위에 걸쳐서 심근 허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협심증 전문가들의 소견
 
  의학정보만으론 근거가 부족해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봤다. 인터뷰 대상은 서울시 소재 유명 대학병원의 순환기내과 교수 2명이다. 한 명은 1970년대에 의사 생활을 시작한 베테랑이고, 다른 한 명은 1990년대 의사가 돼 현재 협심증 치료 전문의로 활동 중인 인물이다. 편견을 배제하기 위해 환자에 대한 정보는 그들에게 알리지 않고, 의학적 소견만 답해 줄 것을 요청했다.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은 협심증 환자는 흉통과 함께 호흡곤란, 어지러움, 현기증 등을 호소할 수 있으며, 무리한 운동을 하면 드물지만 갑자기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수술이나 치료 경과에 따라 증상이 없어질 수는 있지만, 완치가 어렵고 재발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다음은 문답 내용이다.
 
  ―건강 악화로 입원 후 8개월쯤 지나면 병원에 장기간 갈 필요가 없나.
 
  “풍선 확장술이나 스텐트 삽입술 등 수술을 통한 치료가 잘 된다면 증상은 없어지지만, 언제든 다시 좁아질 수 있다. 약물치료는 계속 하는 것이 좋다.”
 
  ―1970년대에도 수술로 치료했나.
 
  “현재 많이 실시되는 수술 기법은 1990년대 이후에 도입된 방식이다. 1970년대엔 주로 약물로 치료했다.”
 
  ―약물은 반드시 링거로 맞아야 하나. 팔이나 엉덩이에 주사를 맞는 경우는 없나.
 
  “1970년대 당시엔 협심증이 지금과 달리 보기 드문 환자였다. 먹는 약부터 시작해 링거로 주입하는 약, 팔이나 엉덩이에 주사를 놓는 경우 모두 가능했다.”(1990년대에 의사 생활을 시작한 전문의는 팔이나 엉덩이에 주사를 놓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들의 소견만으로 “협심증을 앓았던 장준하 선생이 등산 중 정신을 잃고 추락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의혹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를 총동원한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고인의 지병을 쉽게 외면한 이유는 왜일까.
 
  방송 제작진은 “섣부른 추리는 경계한다”며 추적할 단서가 사라졌다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오히려 확고해졌다. 단 1회 충격에 의한 두개골 골절과 인공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골반 골절이란 단서의 결론은 추락사밖에 없다.
 
  방송은 “주삿바늘에 의한 무의식 상태에서 두개골 가격 후 추락한 듯”이란 묘한 뉘앙스로 취재를 진행한 후 유골에 대한 추적을 중단하고, 사고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金龍煥)씨로 화제를 전환했다. 의학적 분석을 끝내고, 정황 분석이 시작된 셈이다.
 
 
  의문사委, 목격자 金씨 조사한다며 자일에 매달아
 
지난 9월 1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주삿바늘에 의한 무의식 상태에서 두개골 가격 후 추락한 듯”이란 묘한 뉘앙스로 취재를 진행한 후 “섣부른 추리는 경계한다”며 유골에 대한 추적을 마쳤다(방송화면 캡처).
  목격자 김씨에 대한 정황은 대부분 과거에 이미 제기됐던 의혹들에 대한 재연(再演) 수준이었다. 방송은 장준하 선생의 국회의원 출마 때 자원봉사 후 4년 동안 당을 떠났다가 갑자기 나타나 장 선생의 이튿날 산행 여부를 물었다는 점, 홀로 일행을 떠난 장준하 선생이 산행 중 군인 2명과 만났다는 점, 조심성이 많았던 장 선생이 무모하게 하산을 시도했다는 점 등을 설명했다.
 
  사고 현장의 소나무에 대한 김씨의 진술이 바뀐 것도 지적했다. 1975년 고인의 장례식장에서 녹음된 김씨의 증언 중 “나무 윗부분을 잡으셔서 어떻게 잘못 뛰셨는지 기억이 안 나고… 제가 여기서 보았을 때 나무가 휘는 것은 봤어요”란 내용과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소나무가 휜 것을 본 적이 없고, 휜 소나무가 있다는 말을 지금까지 한 적이 없다”고 증언한 내용을 대조한 결과였다.
 
  방송은 목격자 김씨의 사고 후 행적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경력 20년 이상의 베테랑 산악팀을 동원해 37년 전 사건 당일 동선을 직접 따라가는 실험을 진행했다. 장준하 선생이 하산길로 택했다는 길은 수직에 가까운 벼랑으로 하강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목격자 김씨가 약사봉 등반을 한 것은 사고 당일이 처음이었다. 사고 18년 만에 실시된 민주당의 재조사 과정에서 그는 답사 중 정확한 산행경로와 추락지점을 찾지 못했다. 이는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도 “김씨가 수차례 재조사를 받으면서 단 한 번도 계곡으로 가는 길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김씨는 사고 현장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에 대해 “장준하 선생 사망 때 동행했던 다른 산악회원도 찾지 못했다”며 “난생처음 가봤던 산에서 벌어진 사고 현장을 어떻게 곧바로 찾아내겠느냐”고 반박했다. 김씨는 2004년 8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재조사 과정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1기 때였는데 아마 그때가 2002년 5월 31일이었을 겁니다. 약사봉 현장 조사를 가서 선생님이 떨어진 장소를 찾는데, 나는 의문사위(委)가 떨어진 곳이라고 얘기하는 곳이 내가 보기에는 아니었어요. 나는 다른 쪽을 가리켰더니 그곳으로 내려가라는 거예요. 내 나이도 있고 혈압 때문에 건강이 안 좋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일을 타고 내려가라는 거예요.
 
  산악회 회원 4~5명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산악회 회원 한 명과 함께 자일에 매달렸는데 흔들리면서 그 사람은 팔을 다치고 나는 바위에 부딪혔어요. 거기서 죽을 뻔한 거죠. 내가 다른 쪽이라고 소리를 쳐도 의문사위 사람들은 절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그 지역을 찾느라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모릅니다. 그날 등산화 끈이 다 끊어졌어요. 집에 돌아와서 탈진했어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방송은 사건 정황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후 유족의 인터뷰를 통해 “장준하씨 가족은 지난 37년간 오로지 김씨의 입 하나만 보고 살아왔다”며 “장준하씨의 아내는 평생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았을 김씨가 오히려 안쓰럽다고 말한다”고 했다. 사회자의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장준하씨의 유골이 자신의 진술과는 다른 얘기를 털어놓고 있다는 것을 목격자 김씨는 알까.”
 
  유골에 대한 “섣부른 추리는 경계한다”며 사건 당일 정황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다가 갑자기 유골이 김씨의 진술과 다른 얘기를 한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결국 방송 제작진은 목격자 김용환씨를 직접 찾아나섰다. 김씨는 “다 종결된 것”이라며 “답변할 의무도, 얘기할 것도 없으니 빨리 돌아가라”며 역정을 냈다. 계속된 제작진의 인터뷰 요청에 그는 “누구에게도 당당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선생님을 잘 못 모셨다는 그런 양심의 가책…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 내가 신입니까. 어떻게 막지 못한 걸… 참 그것도 운명이라고 할까.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을 어떻게 뭐로 풀라는 겁니까.”
 
  방송은 “장준하씨의 유골과 김씨의 진실게임은 끝나지 않았다”며 사고 현장 인근 부대 수사과에서 근무하다 현장에 다녀온 군인이 들었다는 “민간인 사고이니 종결지으라”는 상부의 지시와 사고 직후 의혹을 제기했던 《동아일보》 현장 기자들이 취재중단 압박을 받거나 소환된 사례를 제시했다.
 
  방송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의 발언을 인용해 장준하 선생의 사망에 정보기관이 개입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장준하 선생을 생전에 집요하게 감시했던 중앙정보부의 보고문이 8월 17일 밤 9시 이후엔 전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보안사령부의 움직임도 묘했다”고 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을 부인했던 105 보안부대장이 결국 진술을 번복했고, 그 보안부대장이 보안사령관에게 긴급히 보고를 올린 후 다음 날 진종채(陳鍾埰)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했다고 접견일지에 기록됐기 때문이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이미 한 차례 제기된 바 있는 진 보안사령관과 박 대통령의 독대 기록은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 이어 지난 9월 13일 민주당 백재현(白在鉉)·김현(金玄) 의원이 보도자료를 통해 ‘재(再)공개’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상적 접견 기록 내세워 “청와대가 사건 통제”
 
  두 의원은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다음 날인 1975년 8월 18일, 오후 4시43분부터 5시30분까지 47분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진종채 보안사령관이 단독 회동한 사실이 청와대 의전일지를 통해 밝혀졌다”며 “당시 청와대 의전일지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과 진 사령관이 만날 당시 일지에 ‘보고차’로 쓰여 있는 것을 볼 때 보고 내용은 보안사가 작성한 장준하 선생 관련 보고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8월 19일에도 박 전 대통령은 시체 수습을 담당할 법무부 장관 및 언론 담당인 문공부 장관을 만난 데 이어 참석자가 기록되지 않은 ‘대책회의’를 열었다”며 “이는 청와대가 장준하 선생 사망 사건을 통제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통신사 《뉴시스》는 “특히 당일 오후 2시부터는 박 전 대통령 주재하에 2시간에 걸쳐 대책회의를 진행했다는 기록도 확인됐다. 게다가 8월 21일에는 박 전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단독 면담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며 “백재현·김현 의원은 보도자료에서 ‘장준하 선생 사망이 청와대에 의해 조정·통제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며 ‘이 같은 청와대 의전일지 기록은 범국민적조사위원회 설치와 특별법 제정을 통해 사건을 재조사해야 하는 근거’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백·김 두 의원이 근거로 제시한 자료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접견일지 중 일부다. 당시 보안사령부 관련 역사에 정통한 한 학계 인사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접견일지는 청와대에 불러 만난 인사들에 대한 기록일 뿐”이라며 “보안사령관의 경우 접견기록과 관련 없이 대통령과 독대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연히 날짜가 비슷한 것을 두고 암살 의혹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며 “백 번 양보해 청와대가 장준하 선생의 사망에 직접 개입했다고 가정해도, 사건 전엔 수개월 동안 한 차례도 만나지 않다가 사건 직후 한 번 만난 게 더 이상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월간조선》은 지난 2008년 2월 해당 접견일지 16년치 전체를 정밀 분석해 보도한 바 있다. 총 3만9318회에 이르는 접견 내용을 ‘한국조직학회’에 의뢰해 면담 인사들을 시기별·분야별로 나눠 수치화했다. 참고로 두 의원이 ‘장준하 선생 관련 보고의 근거’로 내세운 ‘보고차(報告次)’란 적요(摘要)는 접견일지 전체에서 ‘초치(招致)’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다.
 
  약 4만 차례 면담 중 1만1412회가 장차관과 같은 행정부 관료였다. 다음은 정치인(6420회), 청와대 비서(2226회), 군인(2045회), 중앙정보부장(2028회) 순이다. 군인면담 순위를 살펴보면, 후에 중앙정보부장과 비서실장 등을 지낸 김계원(金桂元) 육군참모총장이 총 105회(군인 시절만 합산)로 가장 많았고, 후에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서종철(徐鐘喆) 육군참모총장과 민기식(閔耭植) 육군참모총장 등이 뒤를 이었다.
 
 
  중정부장, 1975년에만 58차례 접견
 
2004년 1월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관계자들이 장준하 사건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 밝혀진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 대통령 임기 중 보안사령관을 지낸 인물은 김재규(金載圭), 강창성(姜昌成), 김종환(金鍾煥), 진종채, 전두환(全斗煥) 등 총 5명이다. 이들의 면담 순위는 김재규 4위(71회), 강창성 19위(33회), 전두환 27위(17회), 김종환 33위(13회) 순이다. 이번에 논란이 된 진종채 전 사령관은 총 36위까지의 순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통령과의 접견횟수는 해당 인사의 권력과 중요성을 상징한다. 만약 민주당 측이 제기해 온 의혹대로 진 사령관과 박 대통령이 장준하 선생에 대한 비밀스런 회동을 가졌다면, 그리고 이 회동이 타살 의혹과 연관이 있다면, 박 대통령은 다른 보안사령관보다 상대적으로 적게 만났던 부하에게 사건 전 최소 8개월 전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사건 직후 보고만 받은 셈이다.
 
  “8월 19일 시체 수습을 담당할 법무부 장관 및 언론 담당인 문공부 장관을 만난 데 이어 참석자가 기록되지 않은 ‘대책회의’를 열었다”며 “이는 청와대가 장준하 선생 사망 사건을 통제했다는 증거”라고 한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16년간 약 4만 차례 면담 중 약 36.5%인 1만1412회가 행정부 관료와의 면담이다. 대통령이 장관을 만나는 것은 특이사항이 아니다. ‘대책회의’란 단어도 접견일지를 살펴보면 수없이 나오는 키워드 중 하나일 뿐이다.
 
  8월 21일 박 전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단독 면담한 사실을 두고 “장준하 선생 사망이 청와대에 의해 조정·통제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한 것은 심각한 과장이다. 박 대통령은 신직수(申稙秀)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1975년에만 58차례 접견했다. 16년간 만난 총 횟수는 556회에 이른다. ‘일상적인 만남’을 ‘청와대의 음모’로 왜곡한 셈이다.
 
  당시 대통령과 군인, 관료, 중정부장이 만나 실제로 무슨 보고를 받고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는 현재로선 알아낼 방법이 없다. 당시 그들이 장준하 선생에 대한 보고를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접견일지에 적힌 내용만으로 “장 선생의 사망에 청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혹 제기의 범위를 넘어선 ‘상상’이다.
 
 
  1993년 “SBS의 위험천만한 誤報”
 
장준하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했던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취재과정을 정밀 추적한 《월간조선》 1993년 5월호와 목격자 김용환씨의 수기가 실린 《월간조선》 1993년 6월호.
  수많은 논란과 파장을 일으킨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우리는 1993년 이미 두 차례의 방송을 통해 장준하씨 사망 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다”며 “방송이 나간 후 한동안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고 자평했다. 그리고 이어진 사회자의 마지막 멘트는 아래와 같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우리 사회는 너무 먼길을 돌아왔습니다. 이제라도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벽을 거두고 지난 37년 동안 장준하씨의 유족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월간조선》은 1993년 3월 두 차례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재야인사 장준하의 죽음’ 편을 두고 기자 4명으로 구성된 특별취재반을 결성, 정밀 추적한 후 200자(字) 원고지 250장 분량의 기사를 작성, 보도한 바 있다. 당시 기사의 제목은 “SBS의 위험천만한 오보(誤報)”였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1993년 방송에서 “이제 18년 전에 일어났던 이 사건은 단순한 변사 사건도 아니고, 더 이상 의문사도 아니며, 명백한 타살 사건”이라며 그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했다. 당시 ‘결정적 증언’이라며 내세운 법무관의 목소리는 수사에 아무 상관없는 군 법무관 출신 변호사의 잡담이었으며 그것도 몰래 녹음해 방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월간조선》이 지적한 방송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SBS가 신원을 알면서도 밝히지 않았던 ‘추락사의 목격자’ 김용환씨는 지금(18년째) 고교 윤리교사로 재직 중이다. ▲타살 단정에의 결정적 증언을 제공했다는 전 군 법무관은 장준하 변사 사건 수사에 전혀 관계없는 인물임이 판명됐다. ▲SBS 취재팀은 이 법무관 출신 변호사의 잡담을 몰래 녹음했다가 방영했다. ▲이 법무관 출신 변호사는 “책임 없는 말을 몰래 녹음이나 해서 선정적으로 방송하다니, 언론인의 직업윤리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수사검사 서돈양(徐燉洋) 변호사는 “명백한 추락사였다. 외압은 없었다. 가족의 이의제기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19년 만에 다시 ‘장준하 타살 의혹’을 추적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번 방송에서 1993년 《월간조선》의 ‘SBS 오보’ 기사에 대해 반박도,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지적된 군 법무관 출신 변호사의 ‘결정적 증언’ 부분은 빼고 나머지 인사들의 1993년 증언을 프로그램 곳곳에 재방영했다.
 
 
  5審도 모자라 6審까지 할 기세
 
  《한겨레》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보도, 그리고 현재 야권에서 주장하는 의혹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중앙정보부는 교사로 위장한 비밀요원 김용환씨를 장준하 선생에게 보내 등산을 유도한 후, 일행이 점심을 준비하는 사이 장 선생 스스로 산행을 나서게 해야 한다.
 
  산행 중 김씨 또는 군과 관련된 제3의 인물이 등장해 장 선생을 못 움직이게 한 후, 독극물 또는 마취제가 들어 있는 주사를 엉덩이와 팔에 놓고 정신을 잃게 해야 한다. 이후 미리 준비한 6cm 해머로 머리를 단 한 방 가격하고 추락시켜야 한다. 이후 검찰, 보안부대, 중앙정보부가 청와대를 중심으로 긴밀히 연계해 사건을 은폐해야 한다.
 
  야권만 공세를 펼치는 것이 아니다.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새누리당 정의화(鄭義和) 의원은 지난 9월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장준하 선생의 주검을 보면서 고인의 죽음을 슬퍼한다. 국회에 들어오기 전부터 국민 한 사람도 억울한 죽음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타살이라고!”란 내용의 글을 남겼다. 그는 다음 날 “장준하님 경우 타살이 아닌 것으로 규명된 게 아니라 실족 추락사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 자칭 목격자라는 사람의 거짓진술과 정보기관의 비협조로 1~2기 의문사 진상조사위에서 규명불능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 의원은 김용환씨를 ‘자칭 목격자’로 규정했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문제는 목격자 김용환씨의 인권이다. ‘거대한 의혹’ 앞에 노출된 ‘목격자 소시민’은 ‘용의자’ 취급을 37년째 당하고 있다. 김씨는 사건 당시를 비롯해 1988년 경기도 경찰국의 사건 재수사, 1993년 민주당 사인규명 조사, 2002년과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등 총 5차례에 걸쳐 30회 이상 불려가 국가기관과 정치인의 신문(訊問)을 받았다. 현재 한국의 정치권과 언론은 ‘5심(審)’도 모자라 ‘6심’까지 할 기세다.
 
  김용환씨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할 말은 이미 다 했고, 더 이상 할 말도 없는데 뭘 더 말하라는 건가”라며 “자기들 입맛에 맞는 말을 할 때까지 나를 괴롭히겠다는 것은 결국 거짓말을 하라는 것 아닌가”라고 토로했다. 김씨의 증언이다.
 
  “사건이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1분만 얘기해도 끝나는 겁니다. 조사는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길고 지루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 출두를 요구하니, 나는 떳떳하고 숨기는 게 없으니 나가야죠. 더 조사할 게 없으니 내 뒷조사까지 했습니다. 가족과 친구 관계는 물론 군생활까지 했어요. 이게 장준하 선생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법은 99% 증거와 1% 의심에도 무죄를 선고한다. 이번 사건을 두고 언론은 논리가 맞지 않는 증거를 내세워 한 개인을 범인으로 조작하고 있다. 고등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직한 평범한 교육자를 사실상 살인범으로 모는 방송, 신문, 정치인, 좌파정권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수차례 의혹을 제기하고도 새로운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한 개인을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악랄하게 괴롭힌 역사가 있었던가.
 
  1993년 SBS의 취재과정을 정밀 추적한 《월간조선》 특별취재반은 기사 말미에 이런 문구를 적었다.
 
  “우리 취재반은 이번 취재를 마치면서 허탈감을 느꼈다. 애초부터 필요가 없었던 취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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