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⑤ 국내 최초 컴퓨터 범죄를 밝히다 : 월간조선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란 똑같은 일을 한다 해도 대개 지방보다는 서울, 지사(支社)보다는 본사 근무를 더 원한다. 또 서울 혹은 본사에서도 권한이 좀 더 크고 인사에도 유리한 이른바 ‘알짜배기 부서’에 자리 잡고 싶어한다. 검사라고 다르랴.

1972년 4월 검사 임관과 함께 나는 뜻밖에도 서울지방검찰청에 배치됐다. 사돈의 팔촌까지 누구 하나 뒤에서 밀어주는 이가 없던 까닭에 사실 서울 발령은 크게 기대하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고맙게도 사법시험 성적(차석)과 사법대학원 졸업성적(수석)이 감안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험성적의 힘은 거기까지였다. 서울지검이라 해도 소년부에 배치된 것이다.

당시 서울지검은 12개 부서로 편제돼 있었다. 공안부, 경제부, 감찰부, 보건부, 강력부, 교통부, 형사1부, 형사2부, 수사지도부, 행협부(행정협정, 즉 미군과의 관계 담당), 소년부, 공판부였다. 권위주의 시대였던 만큼 가장 힘 있는 부서, 그래서 검사들에게 인기 있던 핵심부서는 역시 공안부, 경제부, 감찰부였다. 정권과 체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던 부서답게 여기에는 강력한 연줄과 단단한 경력을 가진 검사들이 우선 배속되게 마련이었다.

반면 행협부와 송무부, 공판부는 상대적으로 별 인기없는 부서들이었다. 나중에 형사부로 통합된 소년부 역시 청소년 범죄를 다루는 곳으로 검찰 내 가장 인기없는 부서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행해진 정기인사에서는 검사들에게 소년부보다 더 인기없는 송무부로 배치됐다. 범죄 수사보다는 검찰이 연관된 민사사건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서울에 근무하는 2년여 가운데 꼬박 1년을 보내야 하는 내근 보직이다 보니 이 또한 검사들에게는 마뜩찮은 부서였다.

송무부 검사 시절, 변호사의 불법 인지해 조사

아무리 초년병 검사라도 그대로 시간만 보내다 다음 인사 때 하릴없이 지방으로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주로 민사소송 사건들을 처리하던 중에 마침 어느 변호사가 개입된, 가볍지 않은 범죄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다. 송무부 검사였던 만큼 사건을 경제부나 형사부 등 수사부서로 넘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도 검사다’라는 생각으로 근무 외 시간 등을 활용해 직접 사건을 수사했다. 그러고는 결국 예의 변호사가 특정 물품의 수입과 관련해 관세 서류를 위조해 국가를 상대로 불법으로 ‘관세 환급 청구’ 소송을 벌인 사실을 밝혀냈다. 자칫 막대한 국고 손실이 발생할 일을 미리 막아낸 것이었다.

송무부 검사가, 그것도 경찰이나 여타 기관에서 검찰로 넘어온 송치사건이 아니라 직접 인지(認知)해서 사건을 해결했다는 사실이 검찰 안팎에 화제가 됐다. 덕분에 이듬해, 그러니까 1973년 8월 있었던 정기인사에서 나는 초년검사로는 드물게 감찰부로 발령이 났다. 감찰부라 해서 검찰 내부에 대한 감찰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공무원 범죄 전반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나중에 특별수사부로 이름이 바뀌는, 그 부서였다.

내가 그렇게 서울지검 감찰부로 발령되기 한 달 전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1973년 7월 9일, 당시 주변을 둘러보아야 저 멀리 한강과 울퉁불퉁 야산밖에 안 보이던 서울 관악구 동작동(현 서초구 반포동)의 어느 널찍한 공터에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인지 그때로서는 희귀하던 자가용 승용차들도 꼬리를 물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대한주택공사(주공)가 짓는 AID아파트 입주자 추첨에 지원한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사람들 사이에 아파트 붐이 뜨겁게 일기 시작할 때다. 생활하기 편리한 데다 깔끔한 서양식 인테리어, 높은 부동산 투자가치(혹은 투기) 등의 이유로 아파트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이날 추첨하기로 돼 있던 반포 AID아파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초 주공 측이 예정한 분양 물량은 1490가구. 무주택자들만이 지원할 자격을 갖는 임대아파트였다. 그러나 온갖 편법·불법 지원자들까지 포함해 수천 명이 몰려 이날 입주 경쟁률은 6대 1에 육박했다.

임대아파트여서 팔거나 재임대할 수 없는데도 당시 360만원(22평 기준)이던 아파트 가격이, 이미 추첨도 하기 전에 100만원 넘는 웃돈이 붙었을 정도였다. 버스비가 30원, 검사인 내 월급이 5만원 선이던 시절이다. 그러니 아파트 추첨에서 뽑힌다는 것은 곧 일확천금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당연히 아파트 추첨이 있는 곳에는 으레 신청자가 몰렸다.

아파트 이름에 ‘AID’란 생소한 말이 붙은 것은 그것이 미국 국제개발처(U.S. Agency of International Development)의 차관(借款)을 들여와 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70년대를 통틀어 나라도 국민도 손에 쥔 것이 전혀 없던 시절, 경제 기반을 쌓기 위해 우리는 외국의 원조에 의지해야 했다. 그것이 이른바 차관경제였다. 특히 이날 추첨하기로 한 반포 아파트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한강 남쪽에 건설되는 대단위 단지였다. 17만 평에 이르는 넓은 땅에 그때 돈으로 240여억 원을 투입하는 엄청난 공사였다. 그런 만큼 이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인기도 지원율도 높았다. 그러나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반드시 범죄가 따른다.

컴퓨터 再추첨으로 결론난 반포 AID아파트 청약

반포 AID아파트 입주자를 뽑는 이날 추첨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원시적이기 짝이 없는 수동(手動) 방식으로 진행됐다.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 안에 일일이 지원자의 번호를 써넣은 은행(銀杏) 알을 넣어두고 경찰관이 지켜선 가운데 추첨자(주택공사 직원)가 무작위로 은행 알을 뽑아 번호를 외치면, 다른 한 사람(역시 주공 직원)이 이를 벽 높이 걸어둔 게시판에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당첨된 번호들은 주공 본사에서 정리해 신문사에 넘기고, 이튿날 신문은 이를 그대로 공시 보도했다.

사람들이 운집한 혼란 속에 이 같은 방식으로 전 과정이 처리되다 보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추첨 현장에서 게시된 결과와 신문에 보도된 공시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등 이런저런 문제들이 불거졌다. 추첨에 지원했다 떨어진 사람들이 이에 거세게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는 등 일이 커지자 주공 측은 착오를 인정하고 재추첨을 결정했다.

전체에 대해서는 아니고, 점검 결과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된 150여 세대를 다시 추첨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로부터 석 달 지난 1973년 10월 재추첨이 진행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법이 달라졌다. 사람이 추첨하는 것을 못 믿겠다 하여 컴퓨터 추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국내에 컴퓨터가 처음 도입되고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서울 정부종합청사 지하 1층에 과학기술처 산하 중앙전자계산소 컴퓨터 설비가 설치돼 있었다. 집채만 한 컴퓨터 본체에 그 처리방식도 지금에 비하면 대단히 졸렬한 것이었다.

특정한 자료들을 집어넣어 최종 계산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컴퓨터에 명령어와 자료목록을 따로따로 입력해야 했다. 자료입력에는 이른바 데이터 카드가, 명령어 입력에는 프로그램 카드가 필요했다. 이들 카드 위에 쓰인 특정번호에 여직원들이 일일이 펀칭(기계로 구멍뚫기)으로 표시를 하고, 이 카드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기계장치인 컴퓨터가 일을 처리하는 데다, 정부기관이라는 신뢰감에 주공 측은 중앙전자계산소에 반포아파트 재추첨을 의뢰했다. 150여 세대만을 놓고 2600여 명이 지원, 1차 추첨 때보다 무려 3배 이상 높아진 17대 1의 경쟁률로 10월 20일 재추첨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순조롭게 일이 진행돼 반포 AID아파트 입주자 추첨은 아무런 문제없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내가 서울지검 감찰부로 발령 나고 두 달여 지났을 때였다.

술자리에서 확인한 AID아파트 부정추첨

1970년대에 지어진 반포 AID아파트.

검사 두 사람이 한 방을 쓰던 시절, 감찰부 말석(末席)으로 배속된 나는 선임인 남문우 검사(현 변호사)와 책상을 나란히 놓고 있었다. 11월 말쯤인가, 남 검사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알아보라”며 한 가지 첩보를 귀띔했다. 정부 기자재 조달 과정에서의 예산 낭비 및 횡령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부가 외국에서 컴퓨터 설비를 수입하면서 당초 예정했던 것보다 값싼 중고 불량품을 대거 들여왔으며 거기서 남는 돈을 누군가 착복했다는 줄거리였다.

대체로 정부의 조달 부문에는 대단위 예산이 투입되는 까닭에 얽힌 돈이 상당히 크다. 더욱이 반드시 공무원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만약 무슨 문제가 있게 되면 사태의 심각성도 작지 않다. 심상치 않은 사건이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일들을 놔두고 이 일에 매달렸다. 우선 컴퓨터에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정부에만 컴퓨터가 도입됐던 시점이어서 자연스럽게 내사 단계에 접촉한 이들은 모두 공무원이었다.

아직 공식 수사가 아닌, 내사 단계였기 때문에 주로 술자리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컴퓨터를 둘러싸고 돌아가던 이야기를 얻어듣는 방식을 취했다. 며칠 그렇게 서소문과 광화문 주변 술집을 돌아다니며 사실을 확인한 결과, 사건의 내용은 처음 첩보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이야기였다. 바로 얼마 전 있었던 반포 AID아파트의 부정추첨이었다.

경쟁 과정에서 누군가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보게 되면,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불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불만은 언제 어떤 형식으로든 밖으로 삐져나오게 마련이다. 반포 AID아파트 재추첨을 진행했던 중앙전자계산소 직원들 사이에서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컴퓨터 추첨에 관여했던 일부 직원들이 컴퓨터를 조작해 자신이 당첨되거나, 다른 이를 당첨되게 해주고 뇌물을 받아 한 몫씩 단단히 챙긴 정황이 포착됐다. 거기에 끼지 못한 다른 직원들이 나와 여러 차례 만나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질시와 부러움 가득한 속내와 저간의 사정을 하나씩 둘씩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런 소문, 혹은 그런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당 아파트 추첨에 지원했던 서울 시민들 나아가 아파트를 선망하던 국민 전체가 들고 일어날 사건이었다. 정부의 컴퓨터 조달 문제가 아닌, 컴퓨터를 이용한 범죄 쪽으로 나는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無泊 2일간의 막걸리 공격으로 실토 받아내

먼저 주택공사와 중앙전자계산소로부터 아파트 추첨과 관련된 제반 자료를 넘겨받아 면밀히 검토했다.

조작이 있었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그것이 이루어졌는지 알아내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회계장부 같은 것이야 얼마든지 조사와 추적을 통해 문제점을 밝혀낼 수 있지만, 컴퓨터 분야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자료 조사를 통해 밝혀진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다름 아닌 중앙전자계산소 직원들이 재추첨 과정에서 무려 8명이나 당첨됐다는 사실이었다.

17대 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보이는 가운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특정한 한 기관에서 무려 8명이나 무더기로 당첨됐다는 점, 특히 그것이 바로 컴퓨터 추첨을 담당한 전자계산소 당사자들이란 점에서 모종의 부정이 있었으리란 심증은 확실했다. 과연 어떻게 조작이 이루어진 것일까.

컴퓨터를 좀 안다는 외부 전문가들을 데려다 과연 실제로 조작이 이루어졌는지, 또 그렇다면 어떻게 조작이 이루어졌는지 알아보려 했으나 참으로 쉽지 않았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모든 자료를 기억하거나 저장하지만 당시 컴퓨터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다.

한 달여에 걸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범행 과정을 입증할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지혜를 짜내고 짜내다 결국 가장 원시적인 수사기법, 즉 ‘사람’에 의존하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던 컴퓨터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로 한 것이었다. 일단 처음에 컴퓨터 추첨 관련 부정 의혹을 제보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캐 보기로 했다.

수사의 무대는 검찰청사의 내 책상에서 다시 광화문 술집들로 옮겨졌다. 이미 한 달 이상 수사가 길어지면서 해가 바뀌어 1974년 2월 초로 접어든 무렵이었다. 당초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 여러 사람 가운데 가장 유력한 제보자를 한 사람 선별해 그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어디 끝까지 가보자 하는 심정으로 그를 붙들고 경기여고 앞의 한 허름한 선술집에서 이틀 동안 막걸리 잔을 비워댔다.

무엇이 됐든 결정적인 한마디를 얻어들어야 했던 나로서는 아무리 술이 올라도 먼저 취해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전자계산소 직원 또한 술이 보통 센 게 아니었다. 웬만큼 마시면 나가떨어지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박 2일로 권커니 잣거니 술을 퍼 마신 끝에 월요일 새벽이 돼서야 속된 말로 그의 필름이 끊겼다. 비로소 그의 가슴 속에 담겼던 이야기들이 터져나왔다. 그와 친분이 있던 직장 동료들의 비리여서 차마 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내용들이 술의 힘에 밀려 나온 것이었다.

제보자는 술자리 실토 내용 전혀 기억 못해

한마디로 컴퓨터 프로그램 담당자가 특정인이 반드시 당첨되도록 임의로 프로그램 카드를 삽입하여 최종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산출되도록 조작한 것이었다. 범행을 주도한 사람은 역시 예상대로 중앙전자계산소 직원인 J씨였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문가이던 그는, 주택공사에서 전자계산소에 아파트 추첨을 의뢰하자 지인들로부터 거액의 사례금을 받아 챙기고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나아가 그의 동료인 중앙전자계산소 직원들이 당첨된 것도 역시 J씨의 그 같은 컴퓨터 조작 덕분이란 것도 밝혀졌다.

물론 그때까지도 나는, 실제 기술적으로 어떻게 그런 컴퓨터 조작이 이뤄졌는지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분명한 것은 컴퓨터에 입력한 카드(input) 가운데 25매가 출력(output) 때는 사라지고 없었다는 점, 그리고 범행의 주도자가 누구이며, 그가 어떻게 범행을 실행해 나갔는지 흐름을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이 기회를 통해 뒤늦게 밝히는 것이지만, 술자리에서 그런 세세한 이야기를 모두 쏟아놓았던 제보자는 나중에 술이 깼을 때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그 자신이 그처럼 동료의 비리를 모두 털어놓았다는 죄책감에 두고두고 시달리는 것보다는 아예 그런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게 오히려 홀가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제보자와 술자리에서 나왔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한겨울 아침해가 훤하게 밝아오던 무렵, 술에 취한 상대방을 근처 여관에 데려다 눕혀놓고 나는 청사로 부랴부랴 돌아왔다. 술기운이 전혀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이윽고 그날 오후, 나는 수사관들을 보내 J씨를 즉각 검찰로 연행해 왔다.

검사 생활을 하는 동안 느낀 것이지만, 수사에서도 보이지 않는 기(氣)가 반드시 작용한다. 검사가 이미 사건의 흐름을 모두 알고 피의자를 대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대충 넘겨짚어 피의자를 윽박지르는 것은 확실히 결과가 다르다. 검사가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피의자는 처음부터 검사의 기에 눌려 십중팔구 꼼짝 못하고 범행을 자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자를 잡아들이거나 마지막 자백을 받아내기 전까지, 검사는 철저한 준비와 노력을 통해 사실 여부를 미리 파악하고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또 그렇게 해야 마주앉은 범죄자도 검사에게 마음으로 승복(承服)한다. 피의자를 잡아다 놓고 검사의 권한으로 무지막지하게 윽박질러 범행을 자백받을 경우, 대개 사건은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범죄자는 마음으로 승복하지 못하고 검사에게 원망과 원한을 갖게 되기 십상이다. 수사의 어려움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중앙전자계산소 직원들의 조직적 범죄

검찰에 연행된 그날 J씨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물어보는 내게, 사건의 전모에 대해 순순히 실토했다. J씨는 AID아파트 추첨에 지원한 지인 10여 명으로부터 “당첨되게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적게는 15만원에서 많게는 50만원까지 돈을 받아 챙겼다고 했다. J씨 자신과 그의 윗사람인 K사무관도 당첨자 명단에 들게 했다. J씨로서는 이래저래 크게 한탕 챙긴 셈이었다. 나아가 그는 중앙전자계산소의 동료 직원 몇몇도 무난히 당첨되게 했다. 이 같은 그의 컴퓨터 조작으로 부정하게 당첨된 이들은 25세대에 이르렀다.

조작된 프로그램 카드 25매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예의 25세대분이 무조건 당첨되게 한 다음 나중에는 그렇게 조작했던 25매가 감쪽같이 삭제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입력 때 카드와 출력 때 카드 수에서 25매 차이가 난 이유와 과정이 명백히 드러났다.

자기 부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관리자들이 돌아가는 낌새를 모를 리 없을 터였다. 나는 J씨를 계속 추궁했고 그는 새로운 진술을 내놓았다. 그가 속한 부서의 책임자인 서기관 K과장과 K사무관이 J씨의 컴퓨터 조작 사실을 알고도 뇌물을 상납받고는 이를 눈감아준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조직의 아랫사람은 부정한 돈을 받아먹고 비리를 저지르고 상사는 이를 묵인한 전형적인 공무원들의 오직(汚職) 범죄였다.

검찰에 연행된 이들 세 사람은 조사과정을 거쳐 뇌물수수 및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40대 초반으로 Y대를 나와 과학기술처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공무원으로 꼽히던 K과장, 역시 30대 중반으로 앞날이 탄탄하던 젊은 공무원들… 한순간 발을 헛디뎌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상황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검찰총장의 엄명

검찰의 AID아파트 추첨 비리수사를 특종 보도한 임백 《조선일보》 기자.

최초의 컴퓨터 범죄라는 점, 다수 국민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렸다는 점, 서기관과 사무관 등 엘리트 공무원들이 연관됐다는 점, 액수로도 수억 원 규모에 이른다는 점 등등 아파트 부정추첨은 당시로서는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대형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중대한 사건에 대한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기자에게 덜컥 수사 과정을 들키고(?) 말았다.

피의자 J씨를 내 방에 데려다 놓고 막바지 조사를 벌이고 있을 때 불쑥 《조선일보》 검찰 출입기자(임백·후에 사회부장, 출판국장 역임)가 들어온 것이다. 지금이야 서울지검 청사 층층에 이중삼중 보안 문들이 설치돼 검사 방에 드나들기가 어렵지만 그때는 매우 자유로웠다. 수사 사실을 미리 알고 들어온 게 아니라, 우연히 들어왔다 현장을 포착한 것이었다.

무엇을 가리고 숨기고 할 새도 없이 기자에게 아파트 부정추첨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실이 곧이곧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특종을 잡았다고 생각한 임 기자는 곧바로 내 책상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는 대못처럼 그곳에 박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공식 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미리 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의 취재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취재를 마친 임 기자는 ‘큰 거리’를 잡았다며 득의만면(得意滿面) 돌아갔다.

나 역시 간단치 않은 사건을 해결했다는 뿌듯함으로 수사결과를 당시 김일두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의기양양 보고했다. 김 검사장 역시 기뻐하며 다시 김치열 검찰총장에게도 사건과 수사 경위를 보고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김 총장이 화들짝 놀라면서 “절대로 기사가 나가지 못하도록 보안에 만전을 기하라”고 엄명을 내린 것이다. “안 그래도 이미 한 차례 문제가 됐었는데 이번에 또다시, 그것도 공무원들이 개입해서 부정추첨이 이루어졌다고 하면 서울거리가 어떻게 되겠는가. 데모가 벌어지고 기존 당첨 발표된 결과도 전부 무효라고 낙첨자들이 집단소송을 이어갈 텐데, 더욱이 미국의 AID 차관도 끊길지 모른다.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거냐”는 얘기였다.

총장이 펄쩍 뛰는데 말단 초년검사가 어쩌랴. 기자 브리핑은커녕, 나는 오히려 사건에 관한 소식이 한 줄이라도 밖으로 새어나갈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진실이라고 모든 것을 까발려야 할까

그러나 이미 기자가 모든 것을 취재해 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장과 총장에게 수사결과가 보고된 그날(2월 8일) 저녁, 《조선일보》의 다음 날 자 가판(街販) 사회면에 아파트 추첨부정 사건이 사회면 톱기사로 실렸다. 예상했던 대로 다른 신문에는 한 줄도 실리지 않은 특종보도였다.

그런데 검찰 윗선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정작 이튿날 아침에 집마다 배달된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예의 기사가 3단으로 줄어들고 제목만 실린 채 뭐가 뭔지 모를 애매모호한 기사로 둔갑돼 있었다. 그 대신 우리 검찰 내부 사정을 알 리 없던 석간신문들이, 전날 가판에 반짝 보도됐던 《조선일보》 기사에 놀랐는지 2월 9일 오후 일제히 사건을 보도하고 나섰다. 일이 그렇게 되고 나니 검찰로서도 뭐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당초 검찰 수뇌부가 우려했던 것과 같은 소요나 후유증은 전혀 없었다.

반포 AID아파트 부정추첨 사건은 국내 최초의 컴퓨터 범죄라고 해서 그해 연말 언론에 의해 ‘사회를 뒤흔든 10대 뉴스’에도 꼽히면서 거듭 화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아무리 컴퓨터라 해도 결국 그 또한 ‘양날의 칼’인 까닭에 사람의 뜻과 손길에 따라 얼마든지 잘못 쓰일 수 있음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회상해 본다. 당시 29세, 대어를 낚은 1년차 초임검사로서는 참 고민스러운 사건이긴 했다. 진실이라 해서 곧이곧대로 세상에 다 까발리는 일이 과연 언제나 잘하는 처사일까? 아파트 투기 열풍이 세상을 뒤덮던 그때 실제로 서울거리가 시위로 요동치지 않았을까. 사실 아직까지도 그때 사건의 전말을 세세히 공표하는 게 옳은지 여부는 선뜻 결론 내리기가 어렵다.⊙

상단주메뉴

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⑤ 국내 최초 컴퓨터 범죄를 밝히다

0건

사이트 이용안내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