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해자 대부분 “성희롱인 줄 몰랐다”, “장난으로 한 말인데 어떻게…”
⊙ 성희롱은 손해배상 민사소송만 가능, 증거부족 피해자들의 길고 힘겨운 투쟁
⊙ 법원, 엉덩이 치며 “상사 잘 모셔라”고 말하면 성희롱
⊙ 男→女 아닌 女→男/男→男 성희롱, 주변 무관심에 피해자 운다
⊙ 성희롱은 손해배상 민사소송만 가능, 증거부족 피해자들의 길고 힘겨운 투쟁
⊙ 법원, 엉덩이 치며 “상사 잘 모셔라”고 말하면 성희롱
⊙ 男→女 아닌 女→男/男→男 성희롱, 주변 무관심에 피해자 운다
- 성희롱 및 성추행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정치인이 지난해 도지사선거 후보로 공천받자 시민들이 이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였다.
최근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학교(충남 부여 소재 4년제 국립대)가 한 교수의 성희롱 논란으로 시끄럽다. 올 초 한 졸업생이 미대 김모 교수의 성희롱 발언을 문제 삼은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 학교는 감사를 통해 지난 5월 해당 교수의 해임을 결정했다. 그러나 일부 교수 및 학생들이 이에 반발하는 한편 교수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는 등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다.
학생이 문제 삼은 해당 교수의 발언은 “(여성이) 가슴 밑에 볼펜을 끼워 봐서 떨어지면 아직 젊고, 안 떨어지면 처지고 늙은 것”이라고 하고, 또 한 학생에게는 “너는 눈썹이 까만데 겨털(겨드랑이털)도 그러냐”고 말한 것 등이다.
김 교수는 “문제 발언들은 인물 데생 수업 중 아침방송 내용을 인용하는 등 인체의 특성과 관련해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것인데 앞뒤 다 자르고 특정 발언만 강조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다른 미대 교수는 “미술수업, 특히 인물화 수업에서는 수업 특성상 신체에 대한 언급이 잦다”며 “일일이 성희롱이라 하면 미술 수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고, 일부 교수들은 김 교수 해임이 ‘교권침해’라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심지어 김 교수가 전(前) 정권에 협조적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주변인들마저 있다. 김 교수는 현재 해당 학생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과 해임무효 청구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 발언들이 성적인 의미가 없는, 단순한 농담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성희롱과 관련된 문제점들을 함축하고 있는 사건이다. 대학이나 직장 등에서 권력을 가진 자(상사, 교수 등)가 약자인 부하직원이나 학생을 상대로 성적 불쾌감을 가질 수 있는 발언을 쉽사리 하고 있다는 점, 또 진실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사회 통념상 일반적인 발언을 모함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 몇 개월간 뉴스에 오르내린 성희롱 사건만 해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강용석 의원은 성희롱 발언으로 의원직을 상실할 유죄판결을 받았고, 성희롱 가해자로 몰린 명문대 교수는 자살을 택했으며, 성희롱 거짓 증언을 강요당한 공단 여직원은 자살했다. 서로 부딪치며 살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대체 무엇이 성희롱일까.
그때그때 다른 법원의 성희롱 기준
국가인권위원회가 접수한 성희롱 진정건수는 2005년 60건, 2006년 107건, 2007년 165건, 2008년 151건, 2009년 212건, 2010년 336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법적으로 성희롱이 성립하느냐에 대한 판단은 국가인권위원회, 노동부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법원이 하지만, 성희롱 사건은 그 사례가 워낙 다양해 재판으로 간다 해도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현행법상 성희롱을 규정하고 있는 법은 여성발전기본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3가지뿐이다(박스1 참조). 형법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 성범죄와 관련된 법에는 성희롱이 명시돼 있지 않다. 즉 성희롱은 강간, 성추행 등과 달리 형사소송이 불가능하고 손해배상 등 민사소송만 가능하다.
세 법률 모두 성희롱의 기준으로 ‘(가해자의) 성적인 언동’, ‘(피해자의)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만을 명시하고 있다. 무엇이 성적(性的)인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 굴욕감과 혐오감을 판단하는 기준은 판사의 재량인 것이다. 최근의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 7월 7일, 대구지법은 “제자를 성희롱한 교수를 해임한 것은 정당하다”며 대구교육대 모 교수가 대학총장을 상대로 낸 해임 취소 소송에서 대학 측의 손을 들어 줬다. 이 교수는 학생 면담시 자신의 성관계 경험담이나 포르노물에서 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등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2008년 해임됐다. 대구지법은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는 국가공무원법이 정한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한 것인 만큼 해임처분은 위법이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지난 6월 15일 서울고법은 “육체관계나 신체특징 등을 언급하지 않은, 다소 과한 친절이나 호감이 표현된 문자메시지는 성희롱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 대학의 교수 홍모씨는 제자에게 “함께 여행가자”, “요동치는 그리움” 등 부적절한 문자메시지를 보내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서 성희롱을 이유로 정직처분을 받고 이에 대한 무효 소송을 내 승소했다.
2010년 4월, 삼성전기는 수원지법 성남지원으로부터 사내 여직원 성희롱 사건으로 34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는 당시 부서장이 엉덩이를 손으로 치며 “상사를 잘 모시라”고 발언했으며, 사무실에서 뒷목이나 어깨를 만지는 등 성희롱을 당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사회통념상 일상적인 농담의 수준을 넘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정도로, 직장 내 성희롱으로 볼 수 있다”며 “회사와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반적으로 성희롱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추행과 성폭행 등에 해당돼 형법상 유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사업가 A씨는 지난 2005년 한 골프장의 식당에서 여종업원에게 폭탄주 러브샷을 요구하며 골프장 사장과의 친분관계를 내세워 신분상의 불이익을 가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거부하는 종업원의 목을 팔로 껴안고 러브샷을 한 A씨는 ‘강제추행죄’로 2008년 3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추행’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법적인 성희롱의 성립요건은 ‘업무 관련’
이 밖에도 다양한 판례가 있지만(박스2 참조) 판례들을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모든 성희롱 판례가 직장 또는 학교 안에서 벌어진 성희롱 사건인데, 그렇다면 ‘강용석 의원의 여대생 성희롱 사건’이나 공공장소에서의 성적인 언동 등 ‘불특정 다수를 향한 성희롱’은 법적인 성희롱이 아닐까? 또 성희롱의 성립요건에 대해 일반인들은 ‘상대방이 성적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로 알고 있는데, 피해자가 성적 불쾌감을 느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 가해자가 신체와 직접 관련된 언급을 하지 않았다면 성희롱이 성립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93년 서울대 교수의 조교에 대한 성희롱 사건 이후부터다. 당시 법원이 3000만원 손해배상을 선고, 피해자의 손을 들어 주면서 ‘손 한 번 잡는데 3000만원이냐’라는 말이 유행하는 등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성희롱이 처음 법제화된 것은 1999년으로 1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성희롱의 범위와 판단기준을 둘러싼 문제가 시빗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성희롱의 정의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을 찾았다. 진흥원은 여성정책과 관련한 국책연구·교육기관으로 양성평등 정책교육과 성희롱 예방교육 전문강사 양성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진흥원 이상화 교수는 “일반적으로 성희롱은 업무상 성희롱을 의미한다”며 “불특정 다수를 향한 성희롱은 성적인 폭언이므로 성폭력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적으로 성희롱은 업무와 관련된 관계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아나운서 하려면 다 줄 생각 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문제가 된 이른바 ‘강용석 성희롱 사건’에서 강용석 의원은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강 의원의 ‘죄목’은 성희롱이 아닌 집단모욕죄다. 이 교수의 설명이다.
“국내법에서 성희롱은 지위, 고용, 업무 등과 관련된 경우에 발생합니다.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이에서 이뤄진 성적 언동은 추행, 모욕, 명예훼손 등의 법 적용을 받게 되죠.”
‘업무상’이라는 용어가 모호하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교수는 “한 직장 내에서 이뤄진 경우로 국한해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직접적인 업무관계뿐만 아니라 협력업체, 파견, 인턴사원, 면접, 회식 및 회식 후 귀가시, 수업, 공공기관 민원인 등 업무와 연관성이 있는 경우라면 모두 성희롱이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입사원 면접시 면접관의 성적 언행이나 학원강사의 성적 언행 등도 성희롱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업무상의 성희롱은 육체적인 추행이나 폭행이 수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보다는 강도가 약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적 약자의 고용 및 생계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더욱 심각한 성범죄”라며 “효과적인 예방 및 처벌을 위해 성희롱과 관련한 법적 창구를 일원화시키고 양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성희롱 사례들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일반적으로 회사 내 윤리위원회 등에서 1차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사내에서 해결되지 않을 경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게 된다. 인권위원회는 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성희롱 여부를 판단, 사업장에 시정권고 결정을 내린다. 시정권고 결정이 이행되지 않으면 피해자는 가해자와 사업주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물론 사건 발생 후 바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성희롱 행위의 고의성과 강도 여부에 따라 사업주에 대한 교육 권고 또는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결정할 수 있다. 최근 2년 사이 인권위에서 300만원 이상의 손해배상이 결정된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자.
―자동차매매상사 사장 A씨는 직원 B씨에게 “꿈속에서 네가 찾아와 옷을 벗었다”, “너랑 나랑 작품(아이) 하나 만들자” 등의 문자메시지를 수차례 보냈다. 또 업무 도중 B씨의 손이나 귓불을 만지곤 했다. A씨는 “문자메시지는 모두 노래 가사이거나 B씨를 기분좋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성적 감정을 가지고 보낸 것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B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컨설팅회사 상사 C씨는 모 직원 송별회차 간 노래방에서 부하직원 D씨에게 블루스를 추자고 강요하며 몸을 밀착했고, 다른 날 회식 이후 같은 차를 타고 있던 D씨의 가슴을 누르며 만졌다. C씨는 성적 언동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D씨가 C씨에게 “용서할 수 없고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꼈으며, 상처가 되었다”고 보낸 이메일을 근거로 성희롱이 확인됐다.(D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논술학원 강사 E씨는 학원 근처 식당에서 F씨를 비롯한 제자들과 식사 및 술자리를 가졌는데, E씨는 동료강사 및 연예인 등과의 성관계 경험을 자세히 반복해서 말했고, F씨에게 “살이 너무 없어 그거 할 때 남자가 아프니 살 좀 쪄야겠다”고 말했다. 또 식사 후 “배가 부르다”는 F씨에게 “내 애는 아닌데 누구 애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E씨는 이런 말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장난으로 한 말이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수강생들이 E씨의 언행을 증명했다.(F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자동차공업사 직원 G씨는 회사 오너 H, 사장 I, 전무 J에게 “관계를 싫어하지 않게 생겼는데 왜 남자친구가 없냐”, “무릎 베개를 해 달라”, “내가 전화를 하면 자다가도 받아라”, “나는 여자가 없으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고, 엉덩이·손·허리도 지속적으로 터치당했다. H씨 등은 G씨에게 호감이 있어 한 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G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의료컨설팅회사 직원 K씨는 사장 L씨로부터 매일 휴대전화와 문자로 “사랑한다”, “마음을 받아 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자신이 지인과 만나는 자리에 쫓아와 울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L씨는 업무상 문자와 연락을 했고, 좋은 감정을 표현했을 뿐 괴롭히거나 성적 발언을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K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새마을금고 간부직원 M씨는 직원단합대회에서 부하직원 N씨의 방에 들어가 끌어안으려 했고, 회식을 빙자해 저녁을 먹자고 한 후 모텔에서 쉬다 가자고 말했다. 또 M씨는 자주 술자리를 만들어 늦게까지 N씨를 잡아 두었으며, 차로 태워다 준다고 한 후 잠이 든 N씨를 만지기도 했다. M씨는 평소에도 “내 물건은 꺼지지 않는 촛불”, “술집 여자는 말 잘 듣는데 우리 여직원은 안 그렇다”는 등의 성적 언행이 잦았다. M씨는 모든 술자리에 N씨도 흔쾌히 응했으며, N씨가 종종 업무에 무책임했다고 주장했다.(N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女→男, 男→男 성희롱 늘어
한편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성희롱, 동성 간 성희롱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까지 인권위에 신고된 성희롱 751건 중 6건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성희롱 사건이었으며, 남성 간 성희롱도 14건에 달했다. 이미 2002년 대법원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성희롱에 대해 손해배상을 결정한 바 있다(박스 2-2). 고위직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여→남 성희롱이 늘어나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직도 “사내 녀석이 그까짓 것 갖고 뭘…”이라는 고루한 사고방식에 젖어 무관심한 경우가 많아 피해자의 고통이 더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충주청소년교육센터장을 역임했으며 성희롱 전문강사로 활동 중인 박경화씨는 “남성 대상 성희롱의 경우 남성들이 공론화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이 많은 여성분들이 있는 곳은 젊은 남성에게 언어·신체적으로 성희롱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어느 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여교사가 총각 교사를 껴안고, 엉덩이를 치곤 하더라고요. 남교사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교사는 자기 아들보다도 어리다며 멈추지 않았어요. 여교사는 성희롱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여교사들이 많다 보니 다들 웃고 넘기고요. 이럴 땐 교육을 통해 가해자-피해자임을 설명하고 사과하도록 하면 다시 원만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교육이나 시정이 없었다면 남교사는 계속 고통을 당했을 겁니다.”
그는 상사가 ‘당한’ 사례도 소개했다. “젊은 교사들이 자기들끼리 음담패설을 하기에 본인이 왕따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교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가장 야한 음담패설을 찾아서 교사들 노는 데 가서 자기도 한번 히트 쳐 보자며 한 겁니다. 그랬는데 그 자리에서 성희롱이라고 발끈한 교사가 있었던 거지요. 사실 합의된 성적 언행은 성희롱이 아니죠. 그래도 의도하지 않은 성희롱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은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군대 내 성희롱 등 동성 간 성희롱도 피해자가 자살까지 하는 등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이경환 변호사는 “여성과 남성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이런 인식 때문에 피해자는 더욱 힘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성희롱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여성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성적 언행을 남성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성의 민감성을 좌시해서는 안됩니다. 남성은 조직문화에 어느 정도 순응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성 피해자가 성희롱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오히려 여성보다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물론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여성만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강간과 달리 피해자의 성별에 구별을 두고 있지 않지만, 남성 피해자의 경우 사회통념 때문에 남모를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죠.”
성희롱 여부를 푸는 고차방정식
흔히 ‘성희롱은 당사자가 불쾌해하면 무조건 유죄’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 학교 회식사건의 경우(박스2-3) 여성들에게만 술을 따르라 요구한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법원은 판결했고, 유부남 교수가 여대생에게 “보고 싶다”거나 “(단둘이) 같이 여행가자”라고 보낸 문자메시지 역시 ‘해고사유가 될 만한 심각한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주체도 법원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서수정 여성인권팀장은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피해자의 관점을 기초로 한다”며 ▲업무와 무관한 사적 만남이나 모임에서의 성희롱 ▲서로 원하거나 합의된, 또는 성적 굴욕감을 수반하지 않은 성적 언동 ▲일반적인 성차별적 발언이나 폭언은 업무상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불쾌함을 느끼고도 명확히 거부의사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합의된 언동’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만큼 거부의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 팀장은 덧붙였다.
신체나 성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다고 성희롱죄를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기 판례의 경우 성적인 의미를 담은 ‘상사 잘 모시라’는 말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법원이 판단하기도 했다. 또 국가인권위는 ▲퇴폐음란 장소에서의 회식 ▲제3자를 통해 전해 들은 모욕적인 성적언동 ▲노골적 성적 관계의 제안 등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성희롱 성립 여부는 한두 명이 판단하기 어려운 데다 증거불충분으로 애꿎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만큼 애초부터 업무상 사이에서 성적 농담은 자제하는 것이 상책이다. 카드사 지점장 성희롱 해고사건(박스2-1)에서 회사 측 변호를 맡았던 김성수 지평지성 변호사는 “지점장이란 사내에서 성희롱 같은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지위인데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오랜 조직문화의 관행상 여직원의 몸을 건드리며 성적인 언동을 하는 것이 과거엔 ‘격려’나 ‘작은 실수’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사회가 이 같은 관행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원에서 판단해 준 것이지요. 최근 법원은 성희롱으로 인한 해고에 대한 구제신청은 받아 주지 않는 추세입니다. 성희롱하려면 ‘일자리를 걸고 하라’는 것입니다.”
성희롱 사건을 자주 취급하는 한 변호사는 “남성들은 성희롱 문제를 가볍게 생각했다가 역(逆)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희롱 사건의 경우 증거 수집이 쉽지 않고 회사에 물의를 일으키기 때문에 성희롱 피해자(일반적으로 여성과 약자)에게 불리하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이 같은 현실이 역으로 남성 혹은 상사를 옭아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증거 없이 증인만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거짓증언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고, 시끄러워지는 것을 꺼리는 회사 측으로부터 확실한 증거나 조사 없이 부당한 징계나 해고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성희롱 가능성 높아
현행법상 근로자 1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는 연 1회 이상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지만, 성희롱 진정건수와 사건수는 줄어들지 않는 만큼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신문주 한국정책분석평가협회장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직문화가 성희롱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며 “성희롱이란 매우 명료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늘 ‘했다, 안했다’라는 주장과 변명이 되풀이되는 만큼 구체적인 행동보다 행위자의 의식과 행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 회장은 성희롱을 “제도적·사회적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야비하고 은밀한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의 설명이다. “평소 점잖거나 학식이 풍부한, 계급이 높고 여성들에게 잘해 주기로 소문난 사람에게서 성희롱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요즘은 국회의원, 도지사, 군수 등의 성희롱 사건도 계속 일어나고 있죠. 이런 지도층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야단나겠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전히 지배자 위주의 조직문화가 자리 잡고 있고, 지배자들은 양성평등이라는 ‘지식’은 있으면서도 ‘의식’화는 돼 있지 않은 겁니다. 여성들의 일과 생활, 생각과 의식을 내 딸·내 아내라는 생각 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에서 진솔하게 바라볼 때 진정한 양성평등 의식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서수정 여성인권팀장은 “성적 농담이나 신체접촉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잘못된 직장문화가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조직문화 때문에 예전에는 직장 내에서 성희롱이 발생해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피해자 개인이 감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권위에 접수된 성희롱 사건의 대부분은 직장 내 상하관계에서 발생했어요. 직장 내 상급자는 인사권을 갖고 있거나 피해자의 직무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피해자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됩니다. 따라서 사업주나 직장 내 상급자들을 중심으로 잘못된 직장문화를 개선하고, 가해자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서 팀장은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해 관련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게 될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보복이나 불이익을 염려해 무대응이나 애매모호한 답변을 한 후 진정서를 제출한다면 피해관계를 밝히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상대에게 잘못을 명확히 인지시켜 준 후 진정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해자 측에서 정확한 증거가 될 만한 문자 메시지, 녹취 등을 보관하고 있다면 진정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훨씬 커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인지하여 성희롱 피해를 당하더라도, 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희롱 개념 교육, 2차피해 예방 강화해야
성희롱을 근본적으로 예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희롱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것은 사람들이 성희롱 자체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변신원 교수는 “성희롱으로 물의를 빚은 사람들은 대부분 성희롱이 정확히 뭔지 모르는 상태고, 성적 의도가 없었으며 재수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이다.
“성희롱 가해자와 대화해 보면 그 사람들은 본인의 주장을 믿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는 매우 불쾌했다는데, 본인은 그런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고, 그렇게 들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증언하는 경우도 많고요. 가해자는 지금까지 흔히 해 왔던 일인데 재수없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재의 성희롱 예방교육이 좀 더 현실화돼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특히 조직의 고위직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변신원 교수는 “대부분의 가해자가 조직의 대표나 간부 등 고위직입니다.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을 포함해서요. 그런데 사업장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해마다 한들 이런 분들은 참석하질 않아요. 정당에서 해도 사무처 직원들만 오고, 회사에서 교육하면 직원들만 참석합니다. 또 성희롱은 대체로 대기업보다 영세한 사업체에서 더 심각하게 일어나는데 이런 곳에는 현실적으로 제대로 된 교육이 불가능해요. 교육을 의무적으로 하는 것보다 활용도 높은 교육을 개발, 실시해야 합니다.”
이경환 변호사는 “성희롱을 줄이려면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성희롱 처벌이 법제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사건화된 것이 많지 않은 이유는 피해자가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생계가 걸린 일이기 때문이지요. 인권위나 법정에서 이긴다 한들 그 후에 정상적인 조직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피해자는 그만두고 가해자는 버젓이 다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제도적 방법이 필요합니다.”
인권위 차별조사관 김은미 과장은 “회사에 다니는 상태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진정하러 오는 사람은 참다 참다 회사에서 나와서 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설명했다. “성희롱 문제를 제기하면 인사상 불이익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왕따나 업무소외 등 2차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많은 가해자들이 성희롱 공론화 이후 성적 괴롭힘이 아닌 인격적·업무적인 괴롭힘을 자행하고 있고요. 또 성희롱은 은밀한 곳에서 이뤄지고 증거가 남지 않아 법정이나 인권위에서 시비가 가려지기 어렵기 때문에 피해자는 계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희롱 발생시 피해자와 가해자를 업무적으로 격리하고 조사시 비밀을 보장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호원대 법경찰학부 황현락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성희롱 사건에서 사회적 징벌제가 강화돼 수백억 원의 합의금을 선고하기도 한다”며 “국내법은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액이 적고 그마저 법적 효력이 부족한 인권위 시정권고가 대부분인 만큼 성희롱을 범죄로 간주해 형법에 포함시키는 방법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희롱이 가져온 또 다른 피해
최근 일어난 성희롱 관련 두 건의 자살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희롱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준다. 그것도 성희롱 피해자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과 상사의 성희롱 관련 증언을 강요당한 인물이 자살했다는 사실은 주변에 큰 충격을 안겼다.
지난 6월 말, 부천시설관리공단의 한 여직원이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숨졌다. 이 여직원은 자살 직전까지 트위터를 통해 “(직장에서 조사중인) 성희롱 사건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복인사 및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수차례 주장했다. 부천시설관리공단은 공단 내 모 부장의 여직원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며 이 여직원을 증인으로 요청했는데, 공단 내부 일부 인사들이 그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과 관계없는 여성의 목숨까지 앗아간 셈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성희롱 혐의로 신고당한 고려대 정모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 교수와 같은 과의 여성 조교 A씨는 팔을 잡히는 등 신체적인 성희롱을 당했다며 지도교수인 B씨와 함께 고려대 양성평등센터에 정 교수를 신고했다. 정 교수는 징계결정 통지를 받은 다음 날 자신의 연구실에서 억울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숨졌다. 유서에는 A씨와 B씨, 학교 측 모두 자신과 연락을 피했고 설명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상대방에게 성적인 수치심을 갖게 하는 성희롱은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조직 내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성희롱을 숨기기 위해, 또 성희롱을 엉뚱한 방법으로 이용하기 위해 더 큰 비리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점은 성희롱 관련 법제도 및 교육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학생이 문제 삼은 해당 교수의 발언은 “(여성이) 가슴 밑에 볼펜을 끼워 봐서 떨어지면 아직 젊고, 안 떨어지면 처지고 늙은 것”이라고 하고, 또 한 학생에게는 “너는 눈썹이 까만데 겨털(겨드랑이털)도 그러냐”고 말한 것 등이다.
김 교수는 “문제 발언들은 인물 데생 수업 중 아침방송 내용을 인용하는 등 인체의 특성과 관련해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것인데 앞뒤 다 자르고 특정 발언만 강조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다른 미대 교수는 “미술수업, 특히 인물화 수업에서는 수업 특성상 신체에 대한 언급이 잦다”며 “일일이 성희롱이라 하면 미술 수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고, 일부 교수들은 김 교수 해임이 ‘교권침해’라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심지어 김 교수가 전(前) 정권에 협조적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주변인들마저 있다. 김 교수는 현재 해당 학생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과 해임무효 청구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 발언들이 성적인 의미가 없는, 단순한 농담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성희롱과 관련된 문제점들을 함축하고 있는 사건이다. 대학이나 직장 등에서 권력을 가진 자(상사, 교수 등)가 약자인 부하직원이나 학생을 상대로 성적 불쾌감을 가질 수 있는 발언을 쉽사리 하고 있다는 점, 또 진실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사회 통념상 일반적인 발언을 모함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 몇 개월간 뉴스에 오르내린 성희롱 사건만 해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강용석 의원은 성희롱 발언으로 의원직을 상실할 유죄판결을 받았고, 성희롱 가해자로 몰린 명문대 교수는 자살을 택했으며, 성희롱 거짓 증언을 강요당한 공단 여직원은 자살했다. 서로 부딪치며 살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대체 무엇이 성희롱일까.
그때그때 다른 법원의 성희롱 기준
국가인권위원회가 접수한 성희롱 진정건수는 2005년 60건, 2006년 107건, 2007년 165건, 2008년 151건, 2009년 212건, 2010년 336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법적으로 성희롱이 성립하느냐에 대한 판단은 국가인권위원회, 노동부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법원이 하지만, 성희롱 사건은 그 사례가 워낙 다양해 재판으로 간다 해도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현행법상 성희롱을 규정하고 있는 법은 여성발전기본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3가지뿐이다(박스1 참조). 형법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 성범죄와 관련된 법에는 성희롱이 명시돼 있지 않다. 즉 성희롱은 강간, 성추행 등과 달리 형사소송이 불가능하고 손해배상 등 민사소송만 가능하다.
세 법률 모두 성희롱의 기준으로 ‘(가해자의) 성적인 언동’, ‘(피해자의)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만을 명시하고 있다. 무엇이 성적(性的)인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 굴욕감과 혐오감을 판단하는 기준은 판사의 재량인 것이다. 최근의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 7월 7일, 대구지법은 “제자를 성희롱한 교수를 해임한 것은 정당하다”며 대구교육대 모 교수가 대학총장을 상대로 낸 해임 취소 소송에서 대학 측의 손을 들어 줬다. 이 교수는 학생 면담시 자신의 성관계 경험담이나 포르노물에서 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등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2008년 해임됐다. 대구지법은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는 국가공무원법이 정한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한 것인 만큼 해임처분은 위법이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지난 6월 15일 서울고법은 “육체관계나 신체특징 등을 언급하지 않은, 다소 과한 친절이나 호감이 표현된 문자메시지는 성희롱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 대학의 교수 홍모씨는 제자에게 “함께 여행가자”, “요동치는 그리움” 등 부적절한 문자메시지를 보내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서 성희롱을 이유로 정직처분을 받고 이에 대한 무효 소송을 내 승소했다.
2010년 4월, 삼성전기는 수원지법 성남지원으로부터 사내 여직원 성희롱 사건으로 34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는 당시 부서장이 엉덩이를 손으로 치며 “상사를 잘 모시라”고 발언했으며, 사무실에서 뒷목이나 어깨를 만지는 등 성희롱을 당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사회통념상 일상적인 농담의 수준을 넘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정도로, 직장 내 성희롱으로 볼 수 있다”며 “회사와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반적으로 성희롱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추행과 성폭행 등에 해당돼 형법상 유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사업가 A씨는 지난 2005년 한 골프장의 식당에서 여종업원에게 폭탄주 러브샷을 요구하며 골프장 사장과의 친분관계를 내세워 신분상의 불이익을 가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거부하는 종업원의 목을 팔로 껴안고 러브샷을 한 A씨는 ‘강제추행죄’로 2008년 3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추행’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 [박스 1] ▣ 현행법상 성희롱의 정의 여성발전기본법 제3조 제4호 ‘성희롱’이란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국가기관·지방자치단체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공공단체(이하 ‘국가기관등’이라 한다)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言動) 등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 -상대방이 성적 언동이나 그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행위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제5호 ‘성희롱’이라 함은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그 밖의 요구 등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제3조 제4호 ‘직장내 성희롱’이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
법적인 성희롱의 성립요건은 ‘업무 관련’
 |
| 강용석 의원은 대학생들과 가진 토론회 뒤풀이 자리에서 성희롱을 한 것으로 알려져 출당조치 및 ‘집단모욕죄’ 유죄판결을 받았다. |
한국에서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93년 서울대 교수의 조교에 대한 성희롱 사건 이후부터다. 당시 법원이 3000만원 손해배상을 선고, 피해자의 손을 들어 주면서 ‘손 한 번 잡는데 3000만원이냐’라는 말이 유행하는 등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성희롱이 처음 법제화된 것은 1999년으로 1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성희롱의 범위와 판단기준을 둘러싼 문제가 시빗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성희롱의 정의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을 찾았다. 진흥원은 여성정책과 관련한 국책연구·교육기관으로 양성평등 정책교육과 성희롱 예방교육 전문강사 양성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진흥원 이상화 교수는 “일반적으로 성희롱은 업무상 성희롱을 의미한다”며 “불특정 다수를 향한 성희롱은 성적인 폭언이므로 성폭력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적으로 성희롱은 업무와 관련된 관계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아나운서 하려면 다 줄 생각 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문제가 된 이른바 ‘강용석 성희롱 사건’에서 강용석 의원은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강 의원의 ‘죄목’은 성희롱이 아닌 집단모욕죄다. 이 교수의 설명이다.
“국내법에서 성희롱은 지위, 고용, 업무 등과 관련된 경우에 발생합니다.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이에서 이뤄진 성적 언동은 추행, 모욕, 명예훼손 등의 법 적용을 받게 되죠.”
‘업무상’이라는 용어가 모호하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교수는 “한 직장 내에서 이뤄진 경우로 국한해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직접적인 업무관계뿐만 아니라 협력업체, 파견, 인턴사원, 면접, 회식 및 회식 후 귀가시, 수업, 공공기관 민원인 등 업무와 연관성이 있는 경우라면 모두 성희롱이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입사원 면접시 면접관의 성적 언행이나 학원강사의 성적 언행 등도 성희롱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업무상의 성희롱은 육체적인 추행이나 폭행이 수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보다는 강도가 약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적 약자의 고용 및 생계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더욱 심각한 성범죄”라며 “효과적인 예방 및 처벌을 위해 성희롱과 관련한 법적 창구를 일원화시키고 양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박스 2] ▣ 성희롱에 대한 주요 법원 판례 1. 2008.7.10 대법원 “상습적 성희롱 가해자의 해고는 정당하다” 한 카드회사의 A지점장이 2003년부터 본인 지휘하 8명의 여직원을 상대로 14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성희롱 행위를 한 사건. 가해자는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여직원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오빠야, 내가 너 사랑하는지 알지” 등의 말을 했고, 토요일 저녁 여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집이 비었으니 놀러오라”고 말했다. 또 수차례 근무시간에 여직원을 갑자기 껴안는 행위를 했고, 회식시 여직원의 귀에 입술을 대거나 엉덩이를 치는 행동을 했다. 2005년 카드사는 징계위원회를 열고 A씨를 해고했지만 그는 이에 불응,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내려지자 A씨는 이에 항소했고, 서울고법은 “A가 회사발전에 성실히 기여하는 등 공헌을 한 점에 비춰 볼 때 해고는 가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고법은 “A의 행위가 격려의 의미 또는 직원에 대한 애정표시에 해당한다 볼 수 있으며, 실적을 축하하는 회식에서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행동한 점을 볼 때 징계 사유인 ‘현저한 고의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사건에 “A가 징계해고되지 않고 계속 근무하는 것은 피해자들의 고용환경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키는 결과”라며 원심파기 결정을 내렸다. 2. 2002.5.3 서울지법 동부지원 “남녀, 상하관계와 상관없이 사내 성희롱이 있었다면 회사가 손해배상해야 한다” 의류제조 및 판매 회사에 미싱보조로 입사한 A씨(남, 미혼)는 같은 생산라인의 직원인 40대 기혼여성 B씨와 C씨에게 수차례에 걸쳐 성희롱을 당했다. B씨와 C씨는 A씨를 등 뒤에서 껴안거나 가슴부분을 만지기도 했고, “영계 같아서 좋다”거나 “A는 내꺼”라는 말을 하며 엉덩이를 만지기도 했다. A씨는 생산부장과 총무이사 등에게 성희롱에 대해 상담했으나, 상사들은 B씨와 C씨의 자인서(自認書)를 받아 오거나 퇴사하라고 했다. A씨는 회사 측의 거듭되는 위협에 겁을 먹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법원은 “근로자가 다른 근로자에게 성희롱을 했다면 회사는 사용자로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며 “또 사직의 의사가 없는 근로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토록 한 것은 해고에 해당하므로, 부당해고의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3. 2007.6.14 대법원 “상대방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성희롱이 성립하지 않는다” 한 초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들의 회식자리에서 교장이 교사들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 주었고, 남교사 3명은 답례로 교장에게 술을 권했으나 여교사 3명은 권하지 않았다. 이에 교감 A씨는 여교사들에게 교장에게 술 한 잔씩을 따라 줄 것을 두 차례에 걸쳐 권유했다. 여교사들은 “교감의 성적 언동으로 성적인 굴욕감을 느꼈다”며 성희롱과 관련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에 법원은 “성희롱이 성립되기 위해 행위자에게 반드시 성적 동기나 의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같은 처지에 있는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이라며 “회식의 성격과 참석자들의 관계, 장소 및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교감의 언행이 사회공동체에서 용인될 수 없는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4. 2006.12.21 대법원 “업무관계와 관련 있는 사이의 성적 언행은 그 강도에 관련 없이 성희롱이다” 모 도지사는 재직 중이던 2002년 도지사 사무실에서 여성 직능단체장을 면담하던 중 가까이 다가가 목과 어깨, 가슴을 만지는 행동을 했다. 도지사 측은 상대방과 직접적인 업무관계가 없는 만큼 성희롱의 요건 중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하여’라는 조항에 해당하지 않으며, 피해자의 주장대로 “겉옷 단추를 풀고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진” 것이 아니라 가슴을 살짝 만졌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해당 요건은 포괄적인 업무관련성을 나타낸 것으로 업무수행시의 성적 언동뿐만 아니라 권한을 남용하거나 업무수행을 빙자해 성적 언동을 한 경우 등 구체적 사정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며 “면담 도중 원고의 성적 언동은 도지사로서의 원고가 직능단체장인 피해자를 면담하는 과정에서 업무관련성이 인정되고, 가슴을 만진 것이 사실인 만큼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성희롱 사례들
 |
| 현행법상 근로자 10인 이상인 사업장은 연 1회 이상 성희롱예방교육을 실시해야한다. 성희롱예방교육을 받고 있는 서울의 한 중견기업 직원들. |
국가인권위원회는 성희롱 행위의 고의성과 강도 여부에 따라 사업주에 대한 교육 권고 또는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결정할 수 있다. 최근 2년 사이 인권위에서 300만원 이상의 손해배상이 결정된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자.
―자동차매매상사 사장 A씨는 직원 B씨에게 “꿈속에서 네가 찾아와 옷을 벗었다”, “너랑 나랑 작품(아이) 하나 만들자” 등의 문자메시지를 수차례 보냈다. 또 업무 도중 B씨의 손이나 귓불을 만지곤 했다. A씨는 “문자메시지는 모두 노래 가사이거나 B씨를 기분좋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성적 감정을 가지고 보낸 것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B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컨설팅회사 상사 C씨는 모 직원 송별회차 간 노래방에서 부하직원 D씨에게 블루스를 추자고 강요하며 몸을 밀착했고, 다른 날 회식 이후 같은 차를 타고 있던 D씨의 가슴을 누르며 만졌다. C씨는 성적 언동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D씨가 C씨에게 “용서할 수 없고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꼈으며, 상처가 되었다”고 보낸 이메일을 근거로 성희롱이 확인됐다.(D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논술학원 강사 E씨는 학원 근처 식당에서 F씨를 비롯한 제자들과 식사 및 술자리를 가졌는데, E씨는 동료강사 및 연예인 등과의 성관계 경험을 자세히 반복해서 말했고, F씨에게 “살이 너무 없어 그거 할 때 남자가 아프니 살 좀 쪄야겠다”고 말했다. 또 식사 후 “배가 부르다”는 F씨에게 “내 애는 아닌데 누구 애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E씨는 이런 말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장난으로 한 말이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수강생들이 E씨의 언행을 증명했다.(F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자동차공업사 직원 G씨는 회사 오너 H, 사장 I, 전무 J에게 “관계를 싫어하지 않게 생겼는데 왜 남자친구가 없냐”, “무릎 베개를 해 달라”, “내가 전화를 하면 자다가도 받아라”, “나는 여자가 없으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고, 엉덩이·손·허리도 지속적으로 터치당했다. H씨 등은 G씨에게 호감이 있어 한 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G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의료컨설팅회사 직원 K씨는 사장 L씨로부터 매일 휴대전화와 문자로 “사랑한다”, “마음을 받아 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자신이 지인과 만나는 자리에 쫓아와 울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L씨는 업무상 문자와 연락을 했고, 좋은 감정을 표현했을 뿐 괴롭히거나 성적 발언을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K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새마을금고 간부직원 M씨는 직원단합대회에서 부하직원 N씨의 방에 들어가 끌어안으려 했고, 회식을 빙자해 저녁을 먹자고 한 후 모텔에서 쉬다 가자고 말했다. 또 M씨는 자주 술자리를 만들어 늦게까지 N씨를 잡아 두었으며, 차로 태워다 준다고 한 후 잠이 든 N씨를 만지기도 했다. M씨는 평소에도 “내 물건은 꺼지지 않는 촛불”, “술집 여자는 말 잘 듣는데 우리 여직원은 안 그렇다”는 등의 성적 언행이 잦았다. M씨는 모든 술자리에 N씨도 흔쾌히 응했으며, N씨가 종종 업무에 무책임했다고 주장했다.(N씨에게 300만원 손해배상)
女→男, 男→男 성희롱 늘어
 |
| 남성의 여성 상대 성희롱뿐만 아니라 여성의 남성 상대 성희롱, 동성간 성희롱도 늘어나고 있다. |
충주청소년교육센터장을 역임했으며 성희롱 전문강사로 활동 중인 박경화씨는 “남성 대상 성희롱의 경우 남성들이 공론화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이 많은 여성분들이 있는 곳은 젊은 남성에게 언어·신체적으로 성희롱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어느 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여교사가 총각 교사를 껴안고, 엉덩이를 치곤 하더라고요. 남교사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교사는 자기 아들보다도 어리다며 멈추지 않았어요. 여교사는 성희롱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여교사들이 많다 보니 다들 웃고 넘기고요. 이럴 땐 교육을 통해 가해자-피해자임을 설명하고 사과하도록 하면 다시 원만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교육이나 시정이 없었다면 남교사는 계속 고통을 당했을 겁니다.”
그는 상사가 ‘당한’ 사례도 소개했다. “젊은 교사들이 자기들끼리 음담패설을 하기에 본인이 왕따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교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가장 야한 음담패설을 찾아서 교사들 노는 데 가서 자기도 한번 히트 쳐 보자며 한 겁니다. 그랬는데 그 자리에서 성희롱이라고 발끈한 교사가 있었던 거지요. 사실 합의된 성적 언행은 성희롱이 아니죠. 그래도 의도하지 않은 성희롱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은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군대 내 성희롱 등 동성 간 성희롱도 피해자가 자살까지 하는 등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이경환 변호사는 “여성과 남성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이런 인식 때문에 피해자는 더욱 힘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성희롱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여성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성적 언행을 남성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성의 민감성을 좌시해서는 안됩니다. 남성은 조직문화에 어느 정도 순응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성 피해자가 성희롱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오히려 여성보다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물론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여성만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강간과 달리 피해자의 성별에 구별을 두고 있지 않지만, 남성 피해자의 경우 사회통념 때문에 남모를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죠.”
성희롱 여부를 푸는 고차방정식
흔히 ‘성희롱은 당사자가 불쾌해하면 무조건 유죄’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 학교 회식사건의 경우(박스2-3) 여성들에게만 술을 따르라 요구한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법원은 판결했고, 유부남 교수가 여대생에게 “보고 싶다”거나 “(단둘이) 같이 여행가자”라고 보낸 문자메시지 역시 ‘해고사유가 될 만한 심각한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주체도 법원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서수정 여성인권팀장은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피해자의 관점을 기초로 한다”며 ▲업무와 무관한 사적 만남이나 모임에서의 성희롱 ▲서로 원하거나 합의된, 또는 성적 굴욕감을 수반하지 않은 성적 언동 ▲일반적인 성차별적 발언이나 폭언은 업무상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불쾌함을 느끼고도 명확히 거부의사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합의된 언동’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만큼 거부의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 팀장은 덧붙였다.
신체나 성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다고 성희롱죄를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기 판례의 경우 성적인 의미를 담은 ‘상사 잘 모시라’는 말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법원이 판단하기도 했다. 또 국가인권위는 ▲퇴폐음란 장소에서의 회식 ▲제3자를 통해 전해 들은 모욕적인 성적언동 ▲노골적 성적 관계의 제안 등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성희롱 성립 여부는 한두 명이 판단하기 어려운 데다 증거불충분으로 애꿎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만큼 애초부터 업무상 사이에서 성적 농담은 자제하는 것이 상책이다. 카드사 지점장 성희롱 해고사건(박스2-1)에서 회사 측 변호를 맡았던 김성수 지평지성 변호사는 “지점장이란 사내에서 성희롱 같은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지위인데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오랜 조직문화의 관행상 여직원의 몸을 건드리며 성적인 언동을 하는 것이 과거엔 ‘격려’나 ‘작은 실수’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사회가 이 같은 관행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원에서 판단해 준 것이지요. 최근 법원은 성희롱으로 인한 해고에 대한 구제신청은 받아 주지 않는 추세입니다. 성희롱하려면 ‘일자리를 걸고 하라’는 것입니다.”
성희롱 사건을 자주 취급하는 한 변호사는 “남성들은 성희롱 문제를 가볍게 생각했다가 역(逆)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희롱 사건의 경우 증거 수집이 쉽지 않고 회사에 물의를 일으키기 때문에 성희롱 피해자(일반적으로 여성과 약자)에게 불리하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이 같은 현실이 역으로 남성 혹은 상사를 옭아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증거 없이 증인만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거짓증언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고, 시끄러워지는 것을 꺼리는 회사 측으로부터 확실한 증거나 조사 없이 부당한 징계나 해고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박스 3] ▣ 성폭력의 종류  |
여성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성희롱 가능성 높아
현행법상 근로자 1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는 연 1회 이상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지만, 성희롱 진정건수와 사건수는 줄어들지 않는 만큼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신문주 한국정책분석평가협회장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직문화가 성희롱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며 “성희롱이란 매우 명료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늘 ‘했다, 안했다’라는 주장과 변명이 되풀이되는 만큼 구체적인 행동보다 행위자의 의식과 행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 회장은 성희롱을 “제도적·사회적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야비하고 은밀한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의 설명이다. “평소 점잖거나 학식이 풍부한, 계급이 높고 여성들에게 잘해 주기로 소문난 사람에게서 성희롱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요즘은 국회의원, 도지사, 군수 등의 성희롱 사건도 계속 일어나고 있죠. 이런 지도층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야단나겠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전히 지배자 위주의 조직문화가 자리 잡고 있고, 지배자들은 양성평등이라는 ‘지식’은 있으면서도 ‘의식’화는 돼 있지 않은 겁니다. 여성들의 일과 생활, 생각과 의식을 내 딸·내 아내라는 생각 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에서 진솔하게 바라볼 때 진정한 양성평등 의식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서수정 여성인권팀장은 “성적 농담이나 신체접촉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잘못된 직장문화가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조직문화 때문에 예전에는 직장 내에서 성희롱이 발생해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피해자 개인이 감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권위에 접수된 성희롱 사건의 대부분은 직장 내 상하관계에서 발생했어요. 직장 내 상급자는 인사권을 갖고 있거나 피해자의 직무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피해자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됩니다. 따라서 사업주나 직장 내 상급자들을 중심으로 잘못된 직장문화를 개선하고, 가해자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서 팀장은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해 관련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게 될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보복이나 불이익을 염려해 무대응이나 애매모호한 답변을 한 후 진정서를 제출한다면 피해관계를 밝히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상대에게 잘못을 명확히 인지시켜 준 후 진정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해자 측에서 정확한 증거가 될 만한 문자 메시지, 녹취 등을 보관하고 있다면 진정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훨씬 커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인지하여 성희롱 피해를 당하더라도, 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박스 4] ▣ 정치인 및 공직자 성희롱 관련 사건 1. 2002년 우근민 제주도지사 우근민 지사(당시 민주당)는 자신의 집무실로 면담하러 찾아온 여성 직능단체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슴을 만지는 등 성희롱 및 추행을 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 2003년 이경재 한나라당 의원 2003년 당시 국회 여야 대치상황에서 한나라당 이경재 의원은 단상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을 향해 “남의 집 여자가 우리집에 와서 드러누워 있으면 주물러 달라는 얘기 아니냐”고 말했다. 3. 2006년 최연희 한나라당 의원 최연희 의원은 기자들과 가진 저녁식사 자리에서 취중에 한 여기자를 껴안았으며, 이후 “식당 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고 변명했다. 4. 2007년 강재섭 한나라당 의원 강재섭 의원은 여기자들을 포함한 기자들과 점심식사 자리에서 신문 연재소설 <강안남자>를 언급하며 “조철봉(소설 주인공)이 요즘 왜 섹스를 안 하느냐,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던데”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정몽준 대표는 총선 당시 동행한 여기자의 질문에 대답 대신 여기자의 뺨을 손으로 두드려 성희롱·추행 논란에 휩싸였다. 6. 2010년 이강덕 고창군수 이강덕 고창군수(당시 민주당)는 2010년 초 계약직 여직원 김모씨에게 “누드사진을 찍을 생각 있느냐, 지금 찍으면 예쁘겠다”는 말을 했고, 며칠 후 “몸매가 예쁘다, 부모님과 (누드사진에 대해) 상의해 봤느냐”고 재차 묻는 등 성희롱 발언을 했다. 김씨는 경찰에 군수를 고소했으나, 경찰은 형사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했다. 김씨는 국가인권위에 도움을 청했고, 인권위는 2010년 10월 성희롱이 맞다는 결정과 함께 시정권고 결정을 내렸다. 7. 2010년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여기자들과 오찬 도중 한 여성 연예인의 전신성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요즘 룸(살롱)에 가면 ‘자연산’을 찾는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8. 2010년 강용석 한나라당 의원 강용석 의원은 대학생 토론회 뒤풀이 자리에 참석했다가 “아나운서 하려면 다 줄 생각 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여대생을 향해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라는 등의 성희롱성 발언을 했다. |
성희롱 개념 교육, 2차피해 예방 강화해야
 |
| 성희롱은 회사뿐만 아니라 대학 연구실에서도 흔히 일어나고 있다. 한 대학 강의실 앞에서 학생들이 성폭력 교수를 추방하자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성희롱 가해자와 대화해 보면 그 사람들은 본인의 주장을 믿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는 매우 불쾌했다는데, 본인은 그런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고, 그렇게 들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증언하는 경우도 많고요. 가해자는 지금까지 흔히 해 왔던 일인데 재수없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재의 성희롱 예방교육이 좀 더 현실화돼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특히 조직의 고위직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변신원 교수는 “대부분의 가해자가 조직의 대표나 간부 등 고위직입니다.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을 포함해서요. 그런데 사업장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해마다 한들 이런 분들은 참석하질 않아요. 정당에서 해도 사무처 직원들만 오고, 회사에서 교육하면 직원들만 참석합니다. 또 성희롱은 대체로 대기업보다 영세한 사업체에서 더 심각하게 일어나는데 이런 곳에는 현실적으로 제대로 된 교육이 불가능해요. 교육을 의무적으로 하는 것보다 활용도 높은 교육을 개발, 실시해야 합니다.”
이경환 변호사는 “성희롱을 줄이려면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성희롱 처벌이 법제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사건화된 것이 많지 않은 이유는 피해자가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생계가 걸린 일이기 때문이지요. 인권위나 법정에서 이긴다 한들 그 후에 정상적인 조직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피해자는 그만두고 가해자는 버젓이 다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제도적 방법이 필요합니다.”
인권위 차별조사관 김은미 과장은 “회사에 다니는 상태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진정하러 오는 사람은 참다 참다 회사에서 나와서 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설명했다. “성희롱 문제를 제기하면 인사상 불이익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왕따나 업무소외 등 2차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많은 가해자들이 성희롱 공론화 이후 성적 괴롭힘이 아닌 인격적·업무적인 괴롭힘을 자행하고 있고요. 또 성희롱은 은밀한 곳에서 이뤄지고 증거가 남지 않아 법정이나 인권위에서 시비가 가려지기 어렵기 때문에 피해자는 계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희롱 발생시 피해자와 가해자를 업무적으로 격리하고 조사시 비밀을 보장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호원대 법경찰학부 황현락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성희롱 사건에서 사회적 징벌제가 강화돼 수백억 원의 합의금을 선고하기도 한다”며 “국내법은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액이 적고 그마저 법적 효력이 부족한 인권위 시정권고가 대부분인 만큼 성희롱을 범죄로 간주해 형법에 포함시키는 방법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박스 5] ▣ 성희롱 예방 직장인 십계명 1. 상대방이 싫다는 표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2. 평소 동료들 간에 존칭을 사용한다 3. 음담패설을 삼간다 4. 성희롱으로 인한 불쾌한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5. 회식 때 술시중이나 블루스를 강요하지 않는다 6. 직장에서 인터넷 음란 사이트를 보지 않는다 7.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삼간다 8. 고정된 성 역할을 강조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9. 주위에 피해자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돕는다 10. 직장 동료의 신체에 대하여 성적인 평가나 비유를 하지 않는다 (자료 : 여성민우회) |
성희롱이 가져온 또 다른 피해
최근 일어난 성희롱 관련 두 건의 자살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희롱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준다. 그것도 성희롱 피해자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과 상사의 성희롱 관련 증언을 강요당한 인물이 자살했다는 사실은 주변에 큰 충격을 안겼다.
지난 6월 말, 부천시설관리공단의 한 여직원이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숨졌다. 이 여직원은 자살 직전까지 트위터를 통해 “(직장에서 조사중인) 성희롱 사건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복인사 및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수차례 주장했다. 부천시설관리공단은 공단 내 모 부장의 여직원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며 이 여직원을 증인으로 요청했는데, 공단 내부 일부 인사들이 그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과 관계없는 여성의 목숨까지 앗아간 셈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성희롱 혐의로 신고당한 고려대 정모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 교수와 같은 과의 여성 조교 A씨는 팔을 잡히는 등 신체적인 성희롱을 당했다며 지도교수인 B씨와 함께 고려대 양성평등센터에 정 교수를 신고했다. 정 교수는 징계결정 통지를 받은 다음 날 자신의 연구실에서 억울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숨졌다. 유서에는 A씨와 B씨, 학교 측 모두 자신과 연락을 피했고 설명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상대방에게 성적인 수치심을 갖게 하는 성희롱은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조직 내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성희롱을 숨기기 위해, 또 성희롱을 엉뚱한 방법으로 이용하기 위해 더 큰 비리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점은 성희롱 관련 법제도 및 교육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