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보고] 철학자들이 말하는 한국사회의 正義와 公正 : 월간조선

서울대 철학과 황경식(黃璟植) 교수는 인생(人生)을 ‘100m 경주’에 빗대어 정의(正義)와 공정(公正)을 설명한다. 경기 전 출발선의 위치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스타트 라인에서 까마득한 결승선을 향해 손차양을 하고 있지만, 일부는 50m 전방, 소수의 몇몇은 90m 혹은 95m 전방에서 운동화 끈을 죄고 있다. 황 교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날 수 있을까” 반문한다.

인생이란 경기는 원래가 불평등(不平等)하다지만, 그런 불의(不義)가 세세대대로 대물림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손자에게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불평등을 바통으로 넘긴다. 꼴찌는 꼴찌를 낳는다.

이명박(李明博) 대통령이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친서민 공정사회’를 언급한 뒤 정의와 공정의 문제는 어느새 우리 사회의 중심 화두가 됐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부정의와 불공정에 지쳐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特採)를 비롯해 전관예우·청탁·뇌물·로비·비자금 조성 등 ‘반칙의 저수지’였던 부산저축은행 사태까지, 국민들은 불의한 현실에 분노하며 자괴감에 빠져든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정의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출간 11개월 만에 밀리언셀러로 등극했다. 김영사는 지난해 5월 출간된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난 4월 18일 출고기준으로 100만부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불공정한 人生이란 경기

지난 5월 21일 이례적으로 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의와 공정사회’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 것도 그런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철학자들은 “왜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가?” 반문하며 불의한 자본주의와 토지, 교육, 가족문제를 고민했다. 한국철학회 회장인 대전대 철학과 송인창(宋寅昌) 교수의 말이다.

“정의에 대한 일반 대중의 폭발적 관심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까요? 정의는 정말 사회적 불균형과 불공정의 심화가 야기한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고, 또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함과 권력독점 현상을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의 질문은 메아리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몹시 후벼 판다.

인간은 누구나 서로 다른 잠재능력을 가지고 각기 다른 환경의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누가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느냐는 순전히 우연의 결과다.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는 이를 ‘자연의 복권추첨’이라 명명(命名)했다.

왜 정의와 공정의 문제가 생겨나는가?

지난해 8월 내한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 그의 책은 ‘정의와 공정사회’에 대한 관심과 함께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사실, 민주주의는 기회균등을 강조한다. “능력 있는 누구나 기회가 주어진다”는 식이다.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게다가 실패하는 것은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개인의 능력 탓이지 사회를 탓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타고난 재능과 같은 ‘천부적(天賦的) 운(運)’과 사회적 지위와 같은 ‘사회적(社會的) 운’의 영향을 그대로 둔 채 기회균등의 원칙을 얘기할 수 없다.

물론, 상전의 자식은 상전이 되고, 노비의 자식은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 ‘재능 있으면 출세하라(careers open to talents)’는 식의 기회균등은 다소 진일보된 체제일지 모른다.

황경식 교수는 그러나 “천부적 운과 사회적 운의 영향력이 그대로 방치된 채 내세워진 기회균등의 원칙은 ‘형식적 기회균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국가는, 국가(國家)라는 이름이 남부끄러운 ‘경찰국가’에 불과하다. “가진 자의 재산을 못 가진 자들로부터 보호하는 ‘경비국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황 교수의 말이다.

“재능이 있으면 출세할 수 있다는, 이른바 자연적 자유체제(system of natural liberty)는 평등한 자유를 전제로 한 자유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이 체제는 ‘모든 사람이 유리한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형식적 기회균등에 불과하지요. 그러니 자산(資産) 분배 역시 자연적·사회적 우연성에 의해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지요.”

사회적·천부적 행운을 그대로 방치한 채 형식적 기회균등을 내세우는 자연적 자유체제, 사회적 행운을 최대한 완화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평등체제(liberal equality)만으로는 ‘공정한 경기와 운의 중립화(中立化)’를 보장할 수 없다.

황 교수는 롤스의 견해를 빌려 “사회적 행운을 완화시키고, 천부적 행운까지도 사회적 약자를 가장 먼저 배려하는 민주주의적 평등체제(democratic equality)가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 제각기 다른 100m 출발선의 위치를 뜯어고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적 평등체제는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과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차등의 원칙’이란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고 극대화시키는 경우에 한해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한다. 황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정의사회를 지향한다면 공정성에 함축된 절차적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갖는 형식적 정의를 지양해야 합니다. 공정성에 함축된 평등주의적 요소를 보완함으로써 실질적 정의를 구현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는 절차상의 공정성과 결과적 공평성이 보완된 명실상부한 정의사회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절차상 최대의 자유와 기회가 개방되어 있는 동시에 결과적인 형평과 복지가 고려되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주택, 너무도 일상적이고 친숙한 부조리

한국사회의 가장 흔하며 일상적인 부조리가 바로 ‘아파트’다. 한국인의 의식속에는 ‘땅과 집’을 통해 부를 일구려는 부조리가 잔재해 있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의 아파트 단지 모습.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일상적이고 친숙한 부조리가 있다. 바로 ‘아파트’로 불리는 ‘주택’을 말한다.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李承煥) 교수는 “주택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지만, 철학자들은 아무도 여기에 담겨 있는 모순과 부조리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가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 제공하는 학술정보 서비스(RISS)에서 ‘아파트’를 검색하니, 각종 학위·학술 논문 등이 2만여 건에 달했다. 또 ‘주택’을 검색하니 5만9000여 건, ‘토지’는 5만5000건, ‘부동산’은 3만8000여 건이었다. 사회학·행정학·경제학·법학 등 인접 학문 분야에서는 ‘땅과 집’에 대해 오래 전부터 진지한 관심을 보여 왔지만, 철학분야 논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예외적으로 황경식 교수가 2006년 《철학연구》에 발표한 <소유권은 절대권인가>라는 논문이 있다. 황 교수는 이 논문에서 ‘토지소유권은 절대권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의 필요와 자유, 그리고 복지의 원칙에 의거해 소유권의 범위와 한계가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듣기에 따라선 자본주의에 역행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철학자들의 무관심을 이승환 교수는 이렇게 진단한다.

“경제개발이 시작된 후 40여 년에 걸쳐 증폭돼 온 주택 관련 모순(矛盾)과 부조리(不條理)는 공기처럼 서서히, 그러나 너무도 만연하게 유포되어 철학자들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무감각해진 것은 아닐까요? 가장 일상적이고 친숙한 곳에서 자라나는 부조리에 입을 닫고 침묵하는 일은 철학자들마저 도덕불감증을 앓고 있거나, 아니면 이러한 부조리의 수혜자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하우스 푸어’는 탐욕의 문제일까, 무능력의 문제일까

이승환 교수는 한국사회의 ‘하우스 푸어(house poor)’ 현상에 주목한다. 하우스 푸어는 주택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게 대출을 받았지만 상환하느라 실질소득이 줄어 빈곤하게 사는 이를 말하는 신조어(新造語)다.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왜 ‘하우스 푸어’가 생겨나는 걸까요? 개인의 탐욕 때문일까요, 무능력 때문일까요, 아니면 운이 나쁜 탓일까요? 중산층 수준의 돈을 벌면서도 만성 부채에 시달리는 ‘하우스 푸어’의 문제를 과연 개인의 ‘탐욕’이나 ‘무능력’ 또는 ‘운수소관’으로 돌려버려도 되는 것일까요?”

‘자유지상주의자’(시장만능주의, 경제적 자유주의와 같은 의미)들은 주택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양극화 현상을 그저 ‘시장의 원리’ 또는 ‘자발적 교환의 원리’로 치부한다. 그러곤 정의와 불의(부정의), 또는 공정과 불공정의 잣대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들에 의하면 (주택시장을 포함한) 시장에서의 ‘독과점’은 경쟁의 필연적 산물이고 시장경제의 자연스런 귀결일 따름이다.

이승환 교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이 그럴듯하지만 과연 부동산 또는 토지의 독과점으로 발생하는 타인의 불행 또는 이익침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이냐”고 반문하며 “투기에 의해 지가(地價) 상승으로 얻어지는 지가 차액은 과연 개인의 ‘노력’을 통해 얻은 정당한 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의 말이다.

“한국의 국민(또는 서민)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택문제와 관련해 불의의 핵심은 단연코 ‘토지 불로소득’입니다. 그렇다면 불의의 시정책은 바로 토지 불로소득을 환수 또는 차단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해요. ‘건설족(族)’ 또는 ‘개발 5적’의 부패 네트워크를 연결해 주는 핵심 고리 역시 토지 불로소득입니다. 천문학적인 부동산 불로소득의 일부가 건설업체로부터 정치권과 관료에게 뇌물로 공여되며, 언론에 분양광고비와 기자 관리비로 쓰입니다. 건설족의 부패 네트워크를 차단하는 첩경도 바로 토지 불로소득의 환수에 있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정의와 공정이 홀대받아

한신대 철학과 윤평중(尹平重) 교수는 정의와 공정을 훼손하는 실체가 ‘신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자유시장경제는 과연 정의롭고 공정한가”라고.

윤 교수는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시장적 경쟁논리가 삶의 전 영역을 잠식하면서 시민들의 생활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신자유주의로 기울어진 시장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웅변한다”고 규정한다.

사실, 시장이, 아니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윤 교수는 “시장의 역학과 법칙을 다루는 실증주의적 현대 주류경제학은 ‘효율성’이 시장의 지상명령이라는 이유로 경제학적 탐구와 공정성을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 앞에 ‘천박한’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누가 뭐래도, 한국사회는 분단과 전쟁의 폐허 위에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2010년 상반기 기준으로 세계 7위의 수출액을 기록했고, G20 정상회의를 주최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왜 이리 그늘이 짙은 것일까. OECD 국가 최고의 자살률, 형편없이 낮은 국민행복지수, 미래에 대한 총체적 불안, 극심한 국론분열과 사회적 불신이 혼재한다. 윤 교수는 “다수의 고위공직 후보자가 낙마한 인사청문회는,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불법과 반칙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이들이 시샘어린 부러움의 대상일지언정 존경받지 못하는 현실은, 지도층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라고 탄식한다. 그의 계속된 말이다.

“나라 전체가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리던 그 시절, 정의와 공정성은 너무 홀대받았습니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르게 된 지금, 정의라는 가치와 공정한 사회제도의 중요성에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됐어요. 원론적으로 말해, 정의와 공정성은 한국사회를 도약케 할 무형의 가치이자, 사회운영의 원리이며 공동체적 삶의 질서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양극화가 심화돼 많은 시민이 박탈감과 중압감을 호소한다면 좋은 사회, 좋은 나라일 수 없어요.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하지만 시민적 우정과 신뢰 대신 적의와 불신이 넘치는 나라가 선진화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 여성의 남성 성희롱엔 달리 반응하나

지난 5월 21일 국내 철학자들이 성균관대에 모여 ‘정의와 공정사회’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족은 공정한가.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은 정의롭고 공정한가. 이화여대 철학과 김혜숙(金惠淑) 교수는 “최근의 공정사회 논의에서도 여성의 관점은 대체로 배제되었다”고 불만스러워한다. 왜 그럴까.

정의의 문제를 공적(公的) 사회제도의 덕목으로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남성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정의론 안에 여성문제가 문제로 잡히지 않았고, 남성 경험은 보편적 인간 경험으로 포장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성 관점에서 정의의 문제가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족과 가정을 규정하고 규제하는 법적·윤리적 규율과 행동규범, 권리와 의무의 규정, 재화의 소유와 분배, 자기주장 권리와 인정, 의사소통의 구조 등을 살펴야 한다. 남성 중심의 기존 가치관을 모두 뒤집어 탐색해야 할 만큼 지난한 과제인지 모른다. 김 교수는 “그만큼 여성차별의 근거가 우리의 일상 안에서 존재하는 뿌리는 깊다”고 설명한다.

일상에서 여성을 하나의 자유롭고 존엄한 인격을 지닌 개인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일은, 공정사회를 이루기 위해 여성 자신이나 남성에게 있어 매우 기본적인 일이다. “탈권위주의 사회 안에서도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는 불공정한 인간관계가 여자와 남자의 관계이고, 이 관계를 자연의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제도화시키는 데 비대칭적 권력관계가 가족입니다.”

김 교수는 “인간을 대상처럼 소유하거나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다른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체득하는 일은 가정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성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것을 익히지 않으면, 정의론의 원칙이 위배돼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고, 설사 성희롱을 해도 성희롱으로 여기지 않는 일이 발생합니다. 심지어 차별을 행하는 가해자이면서도, 자신이 가해자임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어요. 또 서로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그것을 사랑과 관심의 표현, 즐거운 행위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지요.”

한국의 많은 남성은 호스티스가 나오는 술집에서 여성을 희롱하는 일이 인권(人權)과 관련이 없으며,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허용된 쾌락과 서비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 접대부를 희롱하는 일에는 달리 반응한다. 마치 남성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로, 즉 남성의 인권과 권위를 침해하는 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여성은 성매수를 하는 남성보다 더 많은 사회적 비난을 받는다.

김 교수는 “남성 접대부의 존재에 대해 남성들이 느끼는 모욕감을 여성 접대부에 대해 여성들이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남성들은 잘 하지 못한다”며 “이는 사적 유희와 쾌락의 문제일 뿐 인권의 문제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노한다.

“순결한 여자와 불결한 여자의 이분법을 만들어 죄의식을 가리며, 여성 자신들 또한 이런 이분법을 내면화시켜 인권의 문제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태도는 여성을 천시하고 성적 수단화해 왔던 우리의 뿌리 깊은 전통과도 연관이 있으며, 가족 내에서 고착화된 불평등한 여성, 남성의 관계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김 교수는 “여성의 문제를 배제한 정의론은 불완전한 것이니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자”고 한다.

교육, 정의를 막는 가장 큰 敵

정의의 문제는 교육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정의와 공정사회를 막는 가장 큰 적(敵)이 교육인지 모른다. 등수를 매겨 줄을 세우고, 지력(知力)만 앞세운 비싼 사교육에 학생들은 점수와 성적이 정의라고 착각한다.

한국교육이 정의와 공정을 등진 원인은 무엇일까. 연세대 교육학과 김인회(金仁會) 명예교수는 “오늘의 한국교육 속에는 조선시대 유교(儒敎)교육에서 물려받은 획일적 보수주의와 일제 식민지교육의 유산(遺産)인 문화적 열등감, 군국주의적 관료주의, 위계적 가치관이 포함돼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강화된 목적 제일주의, 기능주의, 배금주의 가치관, 그리고 1980년대부터 교육계에 뿌리내려 온 좌파세력의 사회주의적 가치관 등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모든 가치들의 공통적 특징은 정의와 공정을 표방한 ‘일원적 획일주의’이다. 학생을 위한 다양한 학교와 학제, 교육과정이 생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 교수는 “한국교육이 겉으로는 정의와 공정사회 지향을 표방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방향으로만 치닫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정의와 공정의 기준을 일원론적으로만 생각하고 절대화하려는 20세기적 의식으로부터 먼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또 “21세기 오늘의 사회·문화·환경에서 교육현상의 다원성과 다양성을 외면한 채 획일적 가치질서에 종속하도록 길들이려 드는 권위주의적 발상을 토대로 한 고전적 이상주의(또는 위선주의) 교육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음은 한국철학회가 <정의와 공정사회>를 주제로 지난 5월 21일 성균관대 다산경제관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 발표된 논문들 중 일부를 골라 요약한 것이다.

公正한 경기와 運의 中立化
서울대학교 철학과 황경식 교수

우리 사회는 ‘원천적 불평등’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 혹은 관리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 사회도 이 같은 불평등이나 격차를 다소간 약화 내지 완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우나 그 성과는 미미하다.

정의론자 존 롤즈에 따르면 운이란 천부적·사회적 우연이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단지 행운이든가 불운일 뿐이다. 하지만 타고난 원천적 불평등은 단지 자연적 사실일 뿐, 정의는 우리가 이 같은 자연적 사실을 인간적 관점에서 처리하고 관리하는 방식에 대해 평가할 경우 문제가 달라진다. 롤즈에 따르면 정의는 ‘타고난 운의 중립화 내지 균등화(neutralizing, equalizing Luck)’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롤즈에 있어 정의로운 사회는 사회적 행운만이 아니라 천부적으로 불운하게 타고나는 자연적·유전적 운에 대해서도 보상하는바, ‘최소 수혜자(the least advantaged) 최우선 배려’에 바탕한 민주적 평등체제(democratic equality)다. 이상과 같은 해석에 의거할 경우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은 단지 ‘절차주의적 정의관’이라기보다는 절차상의 공정성은 물론이고 정의의 구현 과정에서 절차상의 제약 내지 한계를,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라는 결과상의 보상 내지 조정을 통해 ‘결과적 공평성’도 동시에 보장하고자 하는 정의관이라 할 수 있다.

공정과 공평의 차이는?

공정(公正)과 공평(公平)은 영어 ‘Fairness’로 번역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말 용어법상으로 볼 때 공정은 보다 과정과 관련된 절차주의적 어감을 갖는다. 반면 공평은 평등 내지 형평을 함축하는바, 보다 결과주의적 어감을 지닌 말이라 생각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에게는 ‘공정과세’보다는 ‘형평과세’나 ‘공평과세’가 자연스러우며, ‘공평한 게임’이나 ‘공평한 룰’보다는 ‘공정한 게임’이나 ‘공정한 룰’이 보다 편하게 들린다. 공정은 글자 그 자체로서도 ‘공적 정당성(rightness)’ 내지 ‘공적 올바름’을 의미한다면, 공평은 ‘공적 형평성(equity)’ 내지 ‘공적 평등성’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또한 공정은 자칫 형식적 평등에 그칠 우려가 있으며 공평은 실질적 평등의 요구에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롤즈의 정의론은 평등한 자유원칙이나 기회균등의 원칙에 의해 출발선상에서의 공정과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라는 차등원칙에 의해 종착선상(finish line)에서의 공평을 요구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한다면 공정성이 함축된 절차적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갖는 형식적 평등을 지양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공평성에 함축된 평등주의적 요소로 보완함으로써 실질적 평등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토지 불로소득과 분배정의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 교수

주택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자, 중산층 서민들에게는 재산목록 제1호에 해당하는 경제적 비중을 차지한다.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부지런히 노력해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얻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 아무리 근면하게 노력해도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동산 가격 탓에 그간 모은 돈만으로는 치솟는 주택가격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주택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투기’에 남다른 능력이 있거나, 아니면 무리해서라도 ‘대출’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사람은 성실하게 노력하다 겨우 집 한 채 장만하고서 만성부채에 시달리는 데 비해, 다른 어떤 사람은 별다른 직업도 없이 복덕방에만 드나들다가 근면한 중산층이 평생 저축해도 모을 수 없는 엄청난 소득을 얻게 된다. 피땀 흘려 얻은 ‘노력소득’보다 투기를 통해 얻은 ‘불로소득’이 몇 배나 큰 이런 경제현실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토지 불로소득은 정당화될 수 없어

정부는 피땀 흘려 번 ‘노력소득’에 대해서는 수백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면서 정작 부동산 투기를 통해 발생한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미미한 정도의 세금만 부과한다.

심지어 상속세까지 줄여 주면서 부동산 투기자들의 불로소득과 대물림을 용인해 주고 있다. 과연 ‘노력소득’에 대한 과세율이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율보다 현격하게 높은 이러한 조세정책은 정의로운 것일까.

토지 불로소득은 투기를 초래하며, 투기로 인한 지가상승은 개인이 열심히 일해서 번 ‘노력소득’을 침해한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토지 소유자에게 임대료 또는 매매대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투기로 인해 토지가격이 상승하면 투기가 발생치 않았을 때보다 더 많은 임대료나 매매대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이는 노동을 통하여 벌어들인 ‘노력소득’을 정당한 노력 없이 ‘불로소득’을 즐기는 유한계급에게 갖다 바치는 일이 된다. 이는 명백하게 ‘노력소득’에 대한 침해이며, 자유주의의 제1원칙인 ‘불침해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토지가치의 상승은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업적 노력에 의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도로·기차역·전철·관공서·공공시설의 건립 등과 같은 정책적 조치로 인해 토지가치가 상승한다. 따라서 공동체의 정책적 조치로 인해 발생하는 토지가치 상승분은 공동체 전체의 몫이지 개인의 몫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토지가치의 상승으로 얻어지는 소득 앞에는 ‘불로’(不勞·unearned)라는 관형어를 붙이는 것이다. 공동체의 정책적 조치로 인한 토지가치 상승분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므로 개인은 이를 전유(專有)할 수 있는 도덕적 자격(desert)을 결(缺)하고 있을 뿐 아니라, 토지라는 유한재를 독과점(獨寡占)해 얻게 되는 불로소득은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타인의 노력소득을 침해한다. 토지 불로소득은 ‘불침해의 원칙’이라는 자유주의의 원리 그 자체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자유시장경제는 과연 정의롭고 공정한가?
한신대 철학과 윤평중 교수

자유시장경제와 공정성의 상관관계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공정성의 세 원리를 해명해 보자. 공정성의 첫 원리는 경쟁의 출발과 과정에 있어서의 투명함과 형평성인데, 이것이 공정성의 필요조건인 공평성이다. 두 번째 원리는 그런 과정을 거쳐 얻어진 결과의 격차에 대한 인정이다. 즉, 결과의 창출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한 주체가 상응하는 몫을 가져가는 것이 더 정의롭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결과의 차이는 한 사회에서 합당한 것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세 번째 원리는, 패자와 약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공평성에 결과적 격차의 승인과 약자보호가 더해져야 공정성이 정립된다.

이와 함께 ‘시장의 철학’ 역시 세 가지 명제로 압축된다. 첫째,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필연적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자유와 풍요의 증대는 정치적 자유의 공간과 기회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둘째, 시장적 교환의 자발성의 이면에 있는 강제성과 불평등성이 비록 사실이기는 하지만 일면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셋째, 시장경제의 자원배분과 민주주의적 자원배분은 상당한 정도의 공통성과 중요한 차이점을 내포한다.

종합적으로, 시장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현대사회의 지속과 발전을 위해서도 시장이 근원적으로 중요함을 증명한다. 시장에 대한 믿음이 절대화되어 가는 사태는 분명 잘못이지만,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 다른 제도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근본주의를 외친 신자유주의가 파국에 이른 상황도 시장의 본질적 중요성이라는 현대적 삶의 진실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도 자유시장경제가 答이다

결론적으로, 공정성의 세 원리와 시장철학의 세 원리는 다음과 같이 교차한다. 공정성은 크게 경쟁의 출발과 과정의 공평성, 합당한 결과의 격차, 사회적 약자 보호로 요약된다. 그런데 경쟁의 출발점과 과정에서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의 처지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는 불공평을 고치라는 압력 앞에 끊임없이 노출되며, 그런 압력이 실질적 위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제도가 바로 입헌민주정체(政體)이다. 또한 자유시장은 신분이나 우연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입각한 재화와 용역의 창출을 제도화하므로, ‘합당한 결과의 차이’를 제일 잘 충족시킨다. 시장질서와 긴장관계를 맺으면서 동행하는 민주질서는 분배격차가 다수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부단히 환기시킨다. 나아가 사회양극화나 대규모 실업사태 등이 자유시장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역사상 어떤 경제체제보다 자유시장경제가 자유와 인권, 의식주의 기초여건을 더 성공적으로 보장해 온 것도 명백한 사실(史實)이다.

공정사회를 외치는 정부에 비판적인 시중(市中)의 반응은 국가와 정부의 존재이유를 돌아볼 때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정의와 공정성을 사회적 화두로 승격시키는 데는 두 세대에 가까운 땀과 희생, 사회적 학습과 성찰의 과정이 소요되었다. 결국 국가뿐만 아니라 자유시장경제도 공정성의 원리 앞에 열려 그 요구를 담아낼 수 있어야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고 근원적으로 정당화가 가능하다.

여성을 포함하는 정의론: 일상적 삶 안에서의 정의
이화여대 철학과 김혜숙 교수

얼마 전 고대 의대생 3명이 여자 동급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 여학생은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 끔찍한 배신감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 유사 사건의 발생을 막는 일은 우리 사회 모두가 져야 하는 부담이 되었다.

최근의 공정사회 논의에서 여성의 관점은 대체로 배제되었다. 그것은 남성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정의론 안에 여성문제가 문제로 잡히지 않았고, 남성 경험은 보편적 인간 경험으로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기존 정의론은 정의의 문제를 공적 사회제도의 덕목으로 한정시킨 채, 가정 또는 가족, 일상적 인간관계, 성(젠더와 섹슈얼리티)을 정의의 영역에서 배제했다.

가정과 우리의 생활문화를 살피지 않으면 여성문제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부정의를 포착하는 레이더에 잘 잡히지 않는 특성이 있다. 여성의 삶과 관련한 부(不)정의의 문제가 과거에는 정치·경제적 자원의 분배나 교육과 직업의 기회와 주로 관련된 것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사회적 실천 안에서 발생하는 여성혐오와 여성비하, 성적 대상화와 같은 문화적 태도에 보다 깊이 연관되어 있다. 법을 바꾸는 일보다 생활문화와 습관, 감정, 욕망을 바꾸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 발원되는 부정의는 근절되지 않은 채로 뿌리 깊게 남아 있게 된다.

성(sexuality)과 재생산과 관련한 문제는 흔히는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공적 영역 안의 정의의 문제로는 설정되지 않았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가 주로 남성의 관점에서 사회제도의 문제로서 다루어졌고, 또 대개는 분배적 정의의 문제로 환원되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매춘, 성폭력, 성희롱, 임신과 양육의 문제는 분배적 정의에 관심을 가진 남성이론가들의 논의 지평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 젠더와 성(sexuality)은 사회를 조직화하는 매우 기본적인 요소이다. 정의론이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모여 사는 일에 대한 근본적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어떤 정의론이든 간에 이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가족과 같이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을 정의의 영역으로 편입하고 일상생활의 민주화, 일상적 관계의 민주화 등을 말하고자 한다면 정의를 사회제도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 품성의 차원에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감은 반복적 행위의 수행을 통해 습득되는 품성 또는 덕과 같은 것이다. 습관으로서의 이러한 품성은 가정 내에서만이 아니라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길러진다는 점에서 단순한 자연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효성심이나 충성심, 웃어른에 대한 공경심, 아랫사람에 대한 자애심, 친구에 대한 의리와 같은 것은 여러 반복적 수행과 형식적 의례를 통해 길러졌던 유가 사회의 대표적 사회적 감정이다.

‘가족’을 正義 영역에 포함해야

법은 아무리 정의롭다고 해도 일상의 모든 면에 개입할 수가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개인적 관계의 정의로움은 개인적 품성으로서의 정의로운 태도와 비형식적 문화규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반복적 말과 행위를 통해 습득하고 내면화시키게 되는 태도와 품성, 또는 덕으로서의 정의감, 공정한 인격은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매우 중요한 밑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실천적 지, 체득된 지는 가정과 초급학교 교육에서 강조돼야 하는 점이다. 인간을 대상처럼 소유하거나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다른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그리고 모든 인간이 고유한 인격으로서 평등한 존재임을 체득하는 일은 가정에서부터, 일상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