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작품이 감동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獻身)의 결과나 또는 모든 걸 버렸다는 살신(殺身)의 노작(勞作)이라면 판사의 근엄한 판결문은 메마른 회색빛 심판을 거칠게 쏟아낸 잿빛 도구일 뿐.”(법무관 출신 A변호사)
“애당초 사법연수원 교육부터 판결문은 무색투명하게, 감정의 개입 없이 쓰도록 교육받았어요. 심지어 단문(短文)이 아니라 ‘~고, ~며’로 길게 써야 한다고 배웠지요. 그게 평가기준이었고 예비판사들이 그런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 난해한 글쓰기가 당연시된 것이었습니다.”(현직 판사 B씨)
⊙ 사법시험 2차 합격자들, 독서를 즐긴다는 이 몇 안돼 읽었다고 답한 이의 독서분야도 추리소설이나
재테크 쪽이 대부분
⊙ 로스쿨과 사법연수원 강좌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문장론 강좌가 있어야 양형(量刑)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연계하는 것도 방법
⊙ 판결문에서의 어쭙잖은 위로와 충고는 월권
“애당초 사법연수원 교육부터 판결문은 무색투명하게, 감정의 개입 없이 쓰도록 교육받았어요. 심지어 단문(短文)이 아니라 ‘~고, ~며’로 길게 써야 한다고 배웠지요. 그게 평가기준이었고 예비판사들이 그런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 난해한 글쓰기가 당연시된 것이었습니다.”(현직 판사 B씨)
⊙ 사법시험 2차 합격자들, 독서를 즐긴다는 이 몇 안돼 읽었다고 답한 이의 독서분야도 추리소설이나
재테크 쪽이 대부분
⊙ 로스쿨과 사법연수원 강좌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문장론 강좌가 있어야 양형(量刑)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연계하는 것도 방법
⊙ 판결문에서의 어쭙잖은 위로와 충고는 월권
- 판사와 판결문은 어떤 관계일까. 판사는 명(名)판결을 뛰어넘어 명판결문을 쓰기 위해 기꺼이 며칠 밤이라도 새울까. 사진은 2009년 5월 21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존엄사 소송 관련 전원합의체 최종 판결 모습.
지난 2000년 무렵의 일이다. 변호사 엄상익(嚴相益)씨가 법정(法庭)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고 있던 정을병(鄭乙炳·1934~2009)씨와 만났다. 정씨는 5·16 당시 ‘국토건설단’에 끌려가 경험했던 강제노역 실상을 소설로 썼다가 문인간첩으로 몰려 옥살이까지 한 강골(强骨)의 문인이다.
그는 엄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판사들이 내면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능력이 있을까요? 예전에는 법문학부(法文學部)라고 해서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을 함께 공부시켰는데 지금은 왜 법만 외우게 해 수학답안지 같은 판결문을 쓰게 할까요?”
그의 말은 판결문이 법조문(法條文)의 복잡한 공식에 따라 풀어내는 수험생들의 획일적인 답안지와 같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정씨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무죄(無罪)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판사들의 문장력 부족 때문이 아닐까요?”
기자는 두 사람의 대화 중 정을병씨가 언급한 ‘무죄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판사들의 문장력 부족 때문’이란 말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 말이 사실일까.
판사들의 판결문을 구해 읽어 보았다. 그리고 판사 출신 변호사와 현직 판사를 두루 만났다. 그들에게 판결문 쓰기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져 보았다.
소설가에게 글은, 《칼의 노래》를 쓴 작가 김훈(金薰)의 말을 빌리자면, 일기단필(一騎單匹)의 경기병(輕騎兵)과도 같다. 소설가는 매일 수많은 적(敵)에 둘러싸여 전쟁을 치른다. 그의 적은 출판사이고, 무시무시한 평론가이며 매스컴의 위력을 등에 업은 기자다. 또 그의 적은 냉혹한 독자들이다.
그렇다면 판사와 판결문은 어떤 관계일까. 둘의 관계는 전투적 긴장관계로 맺어진 대상일까. 판사는 명(名)판결을 뛰어넘어 명판결문을 쓰기 위해 기꺼이 며칠 밤이라도 새울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취재 과정에서 느낀 판사들의 판결문 쓰기는 전사(戰士)로서의 글쓰기와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법무관 출신 A 변호사는 기자에게 “소설가의 작품이 감동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獻身)의 결과나 또는 모든 걸 버리는 살신(殺身)의 노작(勞作)이라면 판사의 근엄한 판결문은 메마른 회색빛 심판을 거칠게 쏟아낸 잿빛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일까.
판사들에게 글쓰기란
판사들의 쓰기 공부는 어떻게 이뤄질까. 사법연수원 교재인 《민사실무Ⅱ》(2004)에 나오는 판결문 작성요령 중 일부다.
<… 민사판결서의 구성에 관하여는 이미 여러 선배 법관들이 그동안의 오랜 실무경험을 통하여 이룩하여 놓은 일정한 틀이 있는바, 이러한 틀을 익혀 판결서를 작성하는 작업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재판 그 자체, 즉 삼단논법의 논리상식에 따라 실체법이 정하는 구성요건인 법률사실을 확정하여 이를 소전제로 하고 여기에 대전제인 법령을 적용하여 결론으로서 그 법령이 정하는 법률효과의 존부 및 내용을 판단하는 작업이다. …>
판사들에게 글쓰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적혀 있다. 글쓰기보다 중요한 것이 ‘논리상식(삼단논법)’이라고 말한다.
현직 판검사인 사법연수원 교수들이 예비 법조인에게 ‘글쓰기가 어렵지 않다’고 가르쳐서일까. 비록 많은 진화(進化)를 거쳤다고 하지만 여전히 판결문은 고약하다. 일본식 문체에다 딱딱하고 난해하며 때론 엉터리 번역문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다. 판결문에 판사들의 고뇌와 인간적 소회(所懷)를 담은 문장을 찾기란 무척 어렵다. 판사들은 냉혈한(冷血漢)일까. 소설가 정을병씨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판결문에는 사람의 땀 냄새와 눈물, 고뇌하는 판사의 모습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엄 변호사는 지난해 사법시험 3차의 면접관으로 예비 법조인을 만났던 경험담을 들려줬다.
“판사와 검사가 되겠다는 이에게 ‘학창시절, 독서를 얼마나 했느냐’고 물어보았어요. 뜻밖에도 독서를 즐긴다는 이가 몇 안됐고, 즐겨 읽었다고 답한 이의 책도 추리소설이나 재(再)테크 분야가 다수였어요.
이런 질문도 던져 봤어요. ‘가장 아팠을 때와 가장 슬펐을 때는 언제이며 무엇 때문이었느냐’고요. 긴 얘기가 오갔지만 제 마음에 쏙 드는 답이 없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의 ‘아픈 경험’이 부족하고 독서량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과거에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문학적 소양까지 갖춰 법을 배우게 했지요. 지금은 살이 없는 뼈만 다룹니다. 그러니 (판사가) 문장력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엄 변호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미국의 경우, 대학시절 교양학부에서 엄청난 독서훈련을 거쳐 로스쿨에 진학합니다. 외국의 대법원 판결문을 읽으면, 우리나라 판사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문장이 나옵니다. 어떤 경우는 판결문이 단편소설 형식을 빌리거나 시(詩)로 형상화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판결문이란 국민이 읽고 재미있어하며 그 속에서 삶의 교훈을 얻게 해야 합니다.”
판사, 맹아자가 되다
몇 해 전 법원 내부 정보통신망(코트넷)에 오른 <해외사법소식(46호)>에 아주 이색적인 판결문 한 편이 실렸다. 캐나다 출신 배리 데이비스(Barry Davies) 판사가 시(詩)로 쓴 판결문이었다. 이 판결문은 서울북부지법 최영헌(崔英憲) 부장판사가 번역해 올렸다고 한다.
<코프리노호(號)는 작은 목조 바지선을 이끌고서 케이프 빌을 벗어나 서녘으로 향했다.
두 척의 배는 바람을 타고서 순조롭게 조용하고 평온한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바지선과 본선을 잇는 견인선이 시야에서 벗어날 줄 모르며 함께 밤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카마나를 지났을 때 거센 바람이 불자 바다는 더 이상 예전의 바다가 아니었다.
작은 바지선은 이내 가라앉고 말았지만 코프리노호는 가라앉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바지선을 전복하게 하였을까?
갑판원이었을까 아니면 갑판의 풍우방책이었을까?
또 다른 의문은…
보험 측면에서 볼 때 과연 누구에게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을까?>
이 판결문은 바지선과 본선 사이에 벌어진 전복사고의 배상 사건을 다룬 것이었다. 번역문이긴 하나 전혀 판결문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에 대해 엄 변호사는 “한국 판결문의 경우 일본식 용어와 문체가 판사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사법연수원에 가면, 일본 판사들이 100년 전 쓴 일본식 문장이 하나의 문례(文例)가 되어 예비 법조인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피고인은 ○○에 종사하는 자인바…’ 식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으며 판검사들은 점점 우리말과 우리글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맹아자(盲啞者)가 되어 갑니다. ‘법’은 지켜도 ‘문법(文法)’은 외면하게 되는 셈이지요. 왜 있잖아요, 미국 가서 어설프게 영어 배워 귀국한 사람의 말 속에 튀어나오는 영어단어처럼 말이에요.”
서울중앙지법 정재훈(鄭載勳) 판사는 ‘법원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대학시절, 대법원 판결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고, 용어가 어려웠던 탓도 있겠지만 역시 문장이 너무 길어서였던 것 같다. 그때 느낀 것은 ‘역시 대법원 판결을 쓰신 분들은 내공이 고강하셔서 유난히 호흡이 길고, 그래서 이렇게 긴 문장을 쓰시는구나’라는 희화적인 소감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일심법원 B 판사는 사법연수원 시절 판결문 쓰기 교육을 이렇게 회고했다.
“만약 사법연수원 교수가 ‘소송 당사자가 읽기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애당초 연수원 교육부터 판결문은 무색투명하게, 감정의 개입 없이 쓰도록 교육받았어요. 심지어 단문(短文)이 아니라 ‘~고, ~며’로 길게 써야 한다고 배웠지요. 그렇게 안 쓰면 연수원 평가에서 감점을 받게 됩니다.”
지난 2008년 11월 3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판결문 간이화 세미나’에서 <민·형사 판결문의 보완 방향>을 발표한 국어생활연구원 김희진(金希珍) 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판결문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 거칠수록 더욱 반듯해지고 명료해지고 간결해지고 쉬워질 것입니다. 판결문을 만드는 사람의 가장 큰 소임은 모든 이가 이 판결문 읽기를 즐기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감성에 호소하는 미국의 판결문 例
‘미국 증거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법학자 존 위그모어(John Wigmore·1863~1943)는 1908년 모든 법률가가 숙지해야 할 문학작품 100권을 추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왜 많은 책 중에서 문학서적만 100권을 꼽았을까. 국가인권위원장을 역임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안경환(安京煥) 교수는 <미국에서의 법과 문학운동>이란 논문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공동체의 문제를 고심하는 모든 학문의 출발점은 인간의 기본적 심성에 대한 성찰이다. 법도 문학도 인간의 기본적 심성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한다는 상식적 이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정립과 분화가 가속화된 20세기 이전에는 ‘지식인’이 인문학적-통합적 지식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위그모어는 100권의 문학작품을 추천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법률가는 자신이 담당한 사안이 일반적 사상과 문학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숙지해야 할 특별한 직업적 의무가 있다.’
그가 언급한 ‘특별한 직업적 의무’가 무엇인지는 추측으로 알 수 있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처럼, 죄인도 신(神)의 신비스러운 계획의 일부이며, 가장 비천하고 비참한 모습에서 성스러움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버드대 헌법학 교수 출신으로 1939년부터 1962년까지 미국 연방대법원장을 역임한 필릭스 프랭크퍼터(Felix Frankfurter·1882~1965)는 법률가를 꿈꾸는 한 소년에게 이렇게 충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법학도가 되기 이전에 문학작품을 포함한 인류의 고전에 접근하는 노력을 쏟아야 한다. 법률가는 지성인이어야 한다.”
법률가의 특별한 직업적 의무는…
다음에 소개할 ‘불쌍한 조슈아(poor Joshua)!’로 알려진 판결문은 독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명문장으로 법조인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 사법연수원 수석교수와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역임한 법무법인 바른 박철(朴徹) 변호사의 번역과 설명으로 소개한다.
1984년 3월 미국 위스콘신주(州) 위너바고 카운티에서 조슈아 드샤니라는 4살 아이가 아버지(랜드 드샤니)에게 얻어맞아 뇌를 크게 다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아이는 평생을 중증 지체아 시설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조슈아 부모는 1980년 이혼했고 같은 해 아버지는 조슈아를 데리고 위너바고 카운티로 이사했다. 1982년 1월부터 위너바고 카운티 사회복지국은 조슈아의 친지, 이웃, 병원으로부터 아동학대가 의심된다는 여러 건의 보고를 받았다. 카운티 당국이 조사했으나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번번이 조슈아는 아버지에게 보내졌다. 그 후에도 조슈아는 몇 차례 더 병원에 실려 갔고 아동학대 의심 보고가 접수됐지만, 사회보호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마침내 회복 불가능한 뇌손상을 당하게 된 것이다.
조슈아의 어머니는 연방지방법원에 자신과 아들의 이름으로 카운티 사회보호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심과 이심에서 모두 패소했고 결국 사건은 연방대법원으로 갔다.
이 사건에서 제기된 법률문제는 ‘위너바고 카운티 사회보호국이 조슈아를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보호국이 적극적으로 조슈아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에 있었다. 박 변호사는 “미국의 연방헌법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만을 규정할 뿐, 국가권력에 의한 자유와 권리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이 판결의 다수의견은, 수정헌법 14조를 예로 들어 ‘학대받은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조처를 취할 의무를 카운티 당국에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상고를 기각하는 쪽이었다.
불쌍한 조슈아!
그러나 반대(소수)의견을 편 대법관들은 “사회보호국의 행위는 아동학대에 가담한 행위로 볼 수 있다”는 논리로 맞섰다. 그들 중 대법관 블랙먼(Blackmun)은 판결문의 반대의견 마지막 문단에 ‘불쌍한 조슈아!’로 시작되는 감성적 의견을 남겼다.
<오늘 이 법원은 ‘자연적 동정심(natural sympathy)에 흔들리지 않은 채 법의 냉철한 신탁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식 속에서 이 법원 자신은 메마른 형식주의 속으로 물러나 이 사건의 진실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진실에 적용하여야 할 법규범도 인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중략)
불쌍한 조슈아! 무책임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불한당이며, 비겁하고, 무자비한 아버지로부터 계속적인 폭행을 당한 피해자, 그리고 그를 위험한 궁지에 방치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고받고 알고 있으면서도, …(중략)…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피고로부터 버림받은 피해자입니다. 조슈아가 평생 심각한 정신지체 상태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미국 국민의 생활에 대한 슬픈 보고서이며 이제 죽어버린 애국적 정열과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위대한 선언으로 가득 찼던 미국 헌법 원칙들의 슬픈 현주소입니다.>
박철 변호사는 “블랙먼 대법관이 적은 반대의견은 미국 판결문 중에서도 예외적인 감성적 글에 속하지만 판결문 쓰기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통상적 사건에서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필요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5% 정도는 특별한 딜레마 상황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법학적 논리사고만으로 정답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법학 대신 윤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 몇몇 법과대학과 사법연수원에서 법률문장론 강좌가 생기기는 했지만, 강의 소재와 방법에서 별다른 발전이 있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로스쿨과 사법연수원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문학이론 강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교육방법은 어떨까요? 양형(量刑)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연계하는 방법인데, 주어진 사안에 대한 양형의견과 양형이유를 글로 적어 보고, 다른 사람의 양형의견과 양형이유를 비교해 토론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러니까 ‘장발장’의 절도범행에 대한 양형의견과 양형이유를 다양한 시각에서 작성해 보는 것도 글쓰기 훈련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학적 글쓰기, 아니 판사의 고뇌가 담긴 판결문은 그저 단순하게 ‘멋’을 부려 본 것에 불과한 것일까. 투박하고 딱딱한 논리적 판결문에 담긴 문학적 표현이 기껏 ‘개발에 주석편자’에 불과한 것일까. 박 변호사는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건축의 역사를 보면, 기능의 측면만을 강조해 건물을 짓지는 않았습니다. 기능만을 생각했다면 인간의 역사라는 게 감동이나 감탄이 많지 않았을 겁니다. 건축물에 멋을 부리면, 돈이 더 들 수도 있겠지만, 때론 그런 개성이 구조물의 생명이 되기도 하지요. 결국엔 그런 노력이 좀 더 세련된 문화, 세련된 사회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眞景山水畵와 문학 판결문
박철 변호사가 대전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2006년 9월 27일, ‘문학 판결문’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병든 아내를 수발하던 75세 노인이 충남 연기군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의 임대차 계약자는 노인의 딸이었다. 아내를 곁에서 지키느라 한시도 자리를 뜰 수 없어 늙은 아버지는 딸에게 계약서를 대신 쓰라고 부탁했다.
세월이 흘러, 임대의무 기간이 지나자 대한주택공사는 임대주택을 전부 분양하기로 결정했다. 임대주택법에서 ‘우선분양 권리자’는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무주택 임차인이다. 그런데 딸은 충북 청주에서 다른 주택을 이미 소유하고 있어 그 임대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없었다. 물론 실제 거주하던 늙은 아버지도 계약서상의 임차인이 될 수 없었다. 주공은 노인에게 집을 비워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다.
일심법원은 주공의 손을 들어 줬다. 계약서상, 임차인이 딸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노인의 손을 들었다.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당시 주심 판사였던 박 변호사는 판결문 말미에 이런 글을 담았다.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 모두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중략)
가을 들녘에는 황금 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 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그는 이 판결문을 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척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한 사람이 걸린 단순한 사건이었지만 가벼이 여길 사안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당시 야간 가을산행을 많이 할 때였지요. 관사(官舍) 뒷산에 올라가 판결구상을 하는데 마침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어요. 그때의 심경을 사족처럼 뒷부분에 넣은 것입니다.”
판결문이 메마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속성
그러나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고 결국 결론이 뒤집혀 주택공사가 이기게 됐다. 그래서 박 변호사에게는 더 아쉽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 라디오 프로에 소설가 김훈이 ‘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해 이렇게 답하더군요. 육하원칙에 따라 기사를 쓰다 보니, 늘 회의가 들더라는 겁니다. 기사에 담을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싶었다는 얘기지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보세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진경’(眞景·실제의 경치)이 아닙니다. 자신이 산에서 느끼는 기상(氣象)을 표현한 것이 진경이지요. 제가 판결문에 담고 싶었던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반론도 존재한다. 광주지법 판사 출신의 이재교(李在敎) 변호사는 “메마른 법 논리보다 따스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사건, 그런 충고가 위로가 되는 사건은 형(刑)이 가벼운 사건, 소년범 사건 유형”이라며 “하지만 그런 사건에서의 따뜻한 말도, 법정에서 애정이 실린 말을 해야지 판결문으로 하는 것은 대부분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다.
“대부분의 사건은 판사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한 이상 그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어쭙잖은 위로는 오히려 패소한 또는 유죄판결을 받은 당사자의 부아만 돋울 수 있습니다. 충고는 자칫 월권이고, ‘판사면 판사지, 뭔데 충고야!’ 하는 비난을 살 수도 있어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형 건평씨가 법정에서 꾸지람과 충고를 들은 후 몹시 불쾌해했다는 보도가 있었지요.
판결문은 그 의미가 명확해야 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말보다는 명징(明澄)한 문장을 취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메마르다, 냉정하다는 평을 받게 되지만 판결문의 본질상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 봅니다.”
이 변호사는 ‘판사들의 난해한 판결문이 성역(聖域)이라면 성역을 깰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법조인도 모르는 판결문
“법조문이 어렵다는 지적엔 수긍이 가지만, 판결문이 어렵다는 지적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신문기사보다는 어렵지요. 법률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법률용어는 비법률가에게 낯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판결문이 어렵다는 지적은 주로 민사·가사 사건의 판결문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민사·가사 재판은 분쟁해결이 목적이고 판결문은 그 분쟁해결의 결론을 설명하는 문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거기에 군더더기가 붙으면 내용이 산만해지고 판결문 기능에 충실하기 어려워요. 나름대로 쉽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판결문의 속성상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판결문 속성이 지닌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판사들이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쉬운 판결문을 쓸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기자 역시 판결문 읽기가 어렵다. 판결문을 쉽게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집중해서 여러 번 고쳐 읽어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읽기능력이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법률지식이 부족해서일까. 판결문에 담긴 법리전개 과정 자체가 어려워 판결문을 제대로 해독해 내지 못하는 것일까.
C 변호사는 이런 경험담을 들려줬다. 언젠가 부동산 귀속 문제를 두고 민사재판이 벌어졌다. 재산분쟁인 만큼 지루한 법적 공방이 계속됐고 결국 판결은 해를 넘겼다. 그런데 애매한 판결문이 문제였다. 원고와 피고 측 변호사끼리 “판시 내용에는 우리 쪽에 부동산이 귀속됐다”며 다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서로 이겼다고 다투던 변호사들은 결국 판결문을 들고 담당 재판부를 찾아갔다. 예외적 경우라고 해도 판결문의 난해함은 법조인 역시 마찬가지인 셈이다.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역임한 박동섭(朴東涉) 변호사는 난해한 판결문 문장을 고친 글을 한글학회지에 기고하면서 “판사들의 생각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고 충고한 일이 있다.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피고들은 1987. 5. 말경 원고와 사이에, 그 시경(時頃) 소외(訴外) 최문철이 원고로부터 금 12,000,000원을, 변제기를 1988. 9. 10.로 정하여 차용함에 있어서 피고들이 소외 최문철과 연대하여 원고에게 위 차용금을 변제하기로 하는 내용의 보증 계약을 체결하였다.> (서울 민사지법 1993. 6. 24. 선고 93가단 2967 판결, 글자 수 106자)
아무래도 읽기가 어렵고 알 듯 말 듯하다. 박동섭 변호사는 이 판결문을 아래와 같이 고쳤다.
<원고가 1987. 5. 말경, 최문철에게 돈 1200만 원을 빌려 주면서, 돈 갚을 날을 1988. 9. 10.로 정하였고, 그때 피고들은 위 채무의 연대 보증인들이 되었다.> (글자 수 65자)’
작고한 서울대 국어교육과 김광해(金光海) 교수는 판결문이 어렵고 난해한 이유를 ‘판사들의 국어실력과 작문능력 미숙에 원인이 있다’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문법(文法)’이라는 말의 뜻은 현대국어의 문장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곧 ‘말에 관한 법’이라는 뜻이다. 법조계가 모름지기 법을 관장하는 기관이라면 특히 현대국어의 문장구성 원리인 ‘문법’도 솔선해서 잘 지켜야 할 것이다.>(논문 <법조계의 글쓰기에 대한 진단과 대책> 중 일부)
김 교수는 생전 “안개 같은 생각들을 조리 있는 문장으로 바꾸는 기술이 바로 국어문장 구사력”이라며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판결문들은 내용이 난해해서라기보다 국어 문장으로서의 완성도가 미진한 까닭에 정확한 뜻을 알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문장 앞에서는 그 어떤 독자라도 안개 낀 들판을 헤매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판결문 고쳐 쓰기의 例
김광해 교수는 “판결문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황”이라고 규정하며 대법원 판결요지를 국어 어법에 맞게 고쳐 쓴 일이 있다. 다음은 2003년 4월 22일 자 대법원 판결요지다.
<의료법은 제30조 제2항에서 의료인이나 의료법인 등 비영리법인이 아닌 자의 의료기관개설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제66조 제3호에서 이를 위반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바, 의료법이 의료의 적정을 기하여 국민의 건강을 보호 증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위 금지규정의 입법취지는 의료기관 개설자격을 의료전문성을 가진 의료인이나 공적인 성격을 가진 자(이하 의료인 등이라고 한다)로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건전한 의료질서를 확립하고, 영리목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국민 건강상의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보이는 점이다.(이하 생략)>
긴장하여 읽지 않으면 의미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김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고쳤다.
<의료법은 제30조 제2항에서 의료인이나 의료법인 등 비영리법인이 아닌 자가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같은 법 제66조 제3호에서는 이를 위반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을 둔 취지는 이러한 의료법 규정을 두어 적정한 의료 혜택이 돌아가게 함으로써 국민의 건강을 보호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위 금지규정의 입법 취지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는 자격을 의료 전문성을 가진 의료인이나 공적인 성격을 가진 자(이하 의료법인 등이라 한다)로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건전한 의료질서를 확립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국민 건강상의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이렇게 고치니 한결 이해하기 쉽다.
서울서부지법 송명호(宋明浩) 판사는 서울남부지법에 근무하던 2009년 9월 ‘민사판결문 간이화 연구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판결문의 난해성 문제에 관한 논의>)을 준비하며, 당시 그가 맡았던 사건의 판결문 초안을 고쳐 다시 쓴 일이 있다. 그가 쓴 초안은 이러했다.
<후소의 소송물이 전소의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소에서 확정된 권리관계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정반대의 사항을 소송물로 삼은 경우에는 확정된 전소판결의 기판력이 미치게 되고 이러한 모순관계로 인한 기판력의 작용은 후소에서 전소판단과 다른 주장을 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작용도 포함하며 …>
송 판사는 이 판결문 초안을 아래와 같이 고쳐 보았다.
<이전 소송에서 권리관계가 이미 확정되었는데도 그러한 권리관계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정반대의 사항을 소송물로 하는 소송이 또다시 제기되는 경우에는, 이미 확정된 이전 소송에 관한 판결의 효력(즉, 기판력)이 나중 소송에 그대로 미치게 된다. 이러한 모순관계로 인한 기판력의 작용으로 인하여 나중 소송에서 이전 소송에서의 판단 내용과 다른 내용의 주장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고치기 전 글에는 판결문이 난해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후 송 판사는 사건 당사자가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D 변호사는 법률용어와 관련한 법정다툼 경험담을 상세히 들려줬다.
“가끔 법정 발언을 두고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나죠. 민사소송에서 한 소송당사자가 ‘돈을 갚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이해 못할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변제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럼 당사자는 ‘갚았다니까요!’라고 반박합니다. 판사는 변제의 법적 효과까지 고려해 ‘변제냐니까’하고 다시 추궁해요. 그 의미를 모르는 당사자는 ‘갚았다는데, 왜 판사는 계속 뚱딴지 같은 말만 하느냐’고 생각합니다.
판사들의 머릿속에는 의미가 통하는 말이라도 법률적 의미를 하나 더 추구합니다. 언어의 충돌, 불일치가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의뢰인과 법률상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설명해 주지만 ‘뭔 소리냐’는 눈빛입니다. 테이프 레코드처럼 다시 반복해 설명해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이 사람, 바보 아니냐?’ 하고 화가 나다가도 ‘아, 내가 바보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어요. 그런 경험을 거치며 저는 제가 쓰는 말과 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배웠던 법률문장을 다 버리고 다시 문장공부를 시작했어요.”
판결문에 대한 법조인 3명의 논리
여기서 소설가 정을병씨가 말한 ‘무죄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판사들의 문장력 부족 때문인 것 같다’는 말을 다시 음미해 보자. 엄상익 변호사의 말이다.
“판결문이 난해하다는 것은 판사가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도 사실이 뭔지 모르고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누구나 글을 쓸 때, 본질을 꿰뚫고 있으면 짧고 명쾌하게 씁니다. 판결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초동(법원) 주변에는 ‘판결문이 난해하면 패소한 당사자의 상소율이 높아진다’는 말이 회자합니다. 판사들이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쓴 판결문이면, 상소하는 게 당연하죠. 난해하면 상소율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난해하면 (판사가) 실체를 모른다는 뜻이죠.”
―법학의 고유한 성격이 까다롭고 난해하기 때문에 판결문도 어려운 것은 아닐까요.
엄 변호사는 “문학에서 ‘정의’나 ‘평등’과 같은 딱딱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하느냐”며 “정의를 드러내기 위해 수필이나 소설도 딱딱하게 써야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판사는 판결문을 마치 동사무소 민원용지에 써넣듯, ‘범죄사실’과 ‘증거의 요지’, ‘법령의 적용’에 따라 씁니다. 보통 범죄사실 부분은 검사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베낍니다.
그러면 판사가 유죄판결문을 쓸 때 머리 쓸 게 하나도 없게 됩니다. 무죄판결을 하려면, 판사의 논리와 이유, 생각을 치밀하게 판결문에 담아야 합니다. 저도 판결문을 써 봤지만, 무죄판결문 하나를 쓰려면 유죄판결문 수십 건보다 힘듭니다. 검사의 논리, 증인의 엇갈리는 진술, 경찰의 수사결과까지 범죄구성요건을 철저하게 따지고 들어가야 하지요. 판사로서는 사건을 꿰뚫어야 할 만큼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부담이 크지요. 실력 있는 판사가 아니면 무죄판결문을 쓰기가 쉽지 않지요.”
무죄 판결이 안 나오는 이유
서울의 일심법원 E 판사는 기자와 만나 ‘판결문을 난해하게 쓰는 원인은, 생각을 문장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문의 기초가 부족한 데다 권위 있어 보이게 써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가세한 탓’이라는 지적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쉬운 말을 어렵게 표현하는 것은, 본인이 소송당사자보다 ‘지위가 높다’는 의식에서 일반인의 표현을 가급적 피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누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말을 했겠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표현을 판결문에 그대로 쓰기는 곤란하죠. 예를 들어 ‘원고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말을 했겠느냐. 피고가 말하는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쓰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판사가 실제 판결문에 ‘원고가 바보가 아닌 이상~’이란 말을 집어넣었어요. 나중 그 판결문을 읽은 어느 판사가 우스갯소리로 ‘나라면 바보 대신 우자(愚者)로 썼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재교 변호사는 “판결문을 친절한 안내문처럼 쓸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과거 1960~70년대 권위주의 시절에는 판결문이 권위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판결문은 원고와 피고 또는 검사와 피고인의 주장 중 어느 한편을 받아들여 판단하는 구조를 취합니다. 원고 승소 또는 패소, 피고인의 유죄 또는 무죄, 이런 식이지요. 이렇게 판결문의 내용이 법이라는 권위를 이용하여 판단하고, 단죄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판결문을 친절한 안내문처럼 쓸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당사자로서는 권위적으로 느끼기 쉽습니다. 이는 판결문의 기능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속성입니다.”
이회창 대법관의 노력
대법관을 역임한 자유선진당 이회창(李會昌) 대표의 판결문 작성 이야기는 이미 판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대표는 좋은 판결문을 많이 써 후배 판사들의 귀감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빼어난 글솜씨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1981년 이 대표가 대법관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신문》 사회면에 이런 기사가 올랐다.
‘아직도 이런 난삽한 판결문이 쓰이고 있다. 국민과 소송당사자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들로…’로 시작되는 기사는, 이 대법관의 판결문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 판결문은 대법원 판사로서 그가 처음 쓴 전원합의부 판결문이었다.
그 기사를 두고 그는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자존심마저 상했다. 동료 대법관에게 어찌나 미안했던지 함께 하던 식사 자리에서 사과 발언까지 했다.
“저 때문에 신문에서 대법원 판결이 이런 욕을 먹게 돼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쓰는 판결문에 그처럼 문제가 많다면 대법관직을 그만두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찌 보면 그의 판결문은 당시 법관들이 관행적으로 써 왔던 판결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판결 자체보다 판결문을 두고 비판하는 기자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쩌면 판결문에 진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판결문을 건네며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 보라고 부탁했다. 아내 역시 그 판결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대법관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문장을 쉽고 간결하게 쓰는 훈련을 시작했다. 아내가 트레이닝 코치가 되었다. 문장과 단락들은 짧게 단축됐고, 법조계의 관행이었던 난해한 표현들도 평이하게 고쳐졌다. 한문식 표현들도 가능하면 쉬운 말로 고쳤다.
그런 과정을 겪고 다시 예전 판결문을 살펴보았더니 스스로 딱한 마음마저 들었다고 한다.
그 후 판결문 쓰기에 더욱 공을 들였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마음으로 판결문 쓰기에 임했다. 이를테면, 이유의 설명이나 논리의 전개과정에서도 상투적인 문구를 피하고 진솔한 논리와 사유를 전개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제한된 일과 시간 내에서 판사실에 앉아서만 처리할 수 있는 일의 분량을 훨씬 넘어서게 마련이었다. 개인 시간을 더욱 쪼갤 수밖에 없었다. 출퇴근하는 차 속에서, 퇴근 후 집에서, 출장길에서 판결자료를 가지고 다니며 읽고 또 썼다. 언젠가 그런 그에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왜 그처럼 열심인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되나?”
그는 말없이 웃었지만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열심히 해야 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 그것은 최고법원의 법관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로스쿨과 사법연수원 커리큘럼에 인문학을 포함해야
서울행정법원장과 서울중앙지법원장을 역임한 ‘법무법인 충정’의 이우근(李宇根) 대표 변호사는 법조계 주변에서 ‘인문학 전도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한때는 문학도였고 판사 시절, 야간 신학대학을 다녔으며 오케스트라 지휘자, 칼럼니스트, 예술의전당 이사라는 다양한 직함도 갖고 있다. 사법연수원 수석교수 시절, 연수원가(歌)를 직접 작곡했고 명예신학박사답게 교양서 《톨레랑스가 필요한 기독교》와 두 권의 묵상집을 펴냈다.
이 변호사는 “빼앗긴 자유,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으려는 이웃의 호소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법률가는 분쟁당사자들에게 평화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법의 사도(使徒)”라고 한 종교법학자 한스 동부아(Hans Dombois)의 말을 자주 되새긴다. 그의 말이다.
“법은 사실을 추구합니다. 법률 용어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언어인데, 이때 실체적 진실이란 객관적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문학은 그걸 뛰어넘는 삶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현실을 균형 있게 바라보기 위해 객관적 사실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 인간관계의 진실을 파악하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법만으론 부족합니다. 판사는 인문학과 종교적 품성을 갖춰야 차원 높은 판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예로 들었다. 라스콜니코프와 소냐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두 사람은 사형수와 창녀다. 둘 다 사회의 암적 존재인 셈이다.
“법이 파악한 사실만 따진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반(反)사회적 인격의 만남이지만, 문학의 영역에서는 지고지순의 연인입니다. 문학은 비록 허구지만 그 속에 녹아든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세계를 보려면 법학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고교시절, 문예반에서 교지를 만들며 시와 소설을 썼고 대학시절에는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도 이청준, 도스토옙스키,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의 소설가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판사 시절, 퇴근하며 사건기록을 한 보따리 챙겨 와 판결문을 썼다. 문장은 간결하게, 만연체 같은 긴 문장을 피했고 주어와 술어를 분명하게 썼다. 불필요한 우회적 표현도 삼가려 노력했다. 후배 판사들에게도 간결한 문장쓰기를 강조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판결문에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표현을 ‘해야 한다’로 고쳐 썼어요. 다 일본식 문장이거든요. 후배 판사들의 판결문에 ‘위 김갑동’은 어쩌고, ‘위 김갑동’은 저쩌고 하는 표현이 수두룩하기에, ‘위’자를 하나만 남기도 다 지웠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김갑동이란 이름은 하나의 고유명사인데, 도대체 판결문 속에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몇 명 등장하느냐’고요. 그런 글은 아무도 안 읽습니다. 저는 길게 이어진 문장을 7~8개 단위로 끊어 쓰려 했고, 주술(主述)관계를 명확히 하려 했어요.”
―판사들의 땀과 고뇌가 담긴 판결문을 기대할 순 없나요.
“판사가 삶의 진실을 고뇌하고 이를 판결문에 담을 수는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면 설익은 것이 돼 오히려 진실을 흐리게 만들 수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판결은 절대 훈시가 돼선 안 됩니다. 일간지에 ‘판사가 피고인을 준열히 꾸짖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꾸짖을 수야 있지만, 그게 도가 지나쳐서 인격에 대해 판단까지 해선 곤란합니다.”
법학은 경험과학 판결문에 문학적 향기 담아야
이우근 변호사는 “법학은 이론과학이 아니라 경험과학”이라며 “경험이 많을수록 좀 더 익은 판결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군대 안 간 사람은 20대에 단독판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변호인은 물론 사건당사자들도 불안합니다. 속으로 ‘저 사람이 뭘 알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판결에는 축적된 경험과 안목이 녹아 있어야 합니다. 이론만으론 부족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법령이나 법조문, 판결문을 국어어법에 맞게 고쳐야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며 “판사들은 법률용어를 순화시킬 우리말을 모르고, 국어학자들은 우리말은 알지라도 법을 모른다”고 했다.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 가곡은 참 아름답습니다. 시인이 쓴 시도 주옥 같아요. 그런데 시는 우리 운율, 곡은 서양기법으로 작곡하니 시에다 곡을 붙이기가 까다로워요. 그런데 서양의 음악전문학교에 가 보세요. 성악과나 작곡과는 실기만 가르치는 교수만 있는 게 아니라 시학(詩學)을 가르치는 시인교수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야 시의 운율과 음악의 선율이 일치하는 곡을 부를 수 있고 작곡할 수도 있어요. 슈만이나 슈베르트가 왜 당대 최고일까요? 바로 시적 운율과 음악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변호사는 “로스쿨과 사법연수원 커리큘럼에 인문학과 문학을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판사가 법 기술적 판단만 잘해선 곤란합니다. 인격적 고뇌가 담긴 판결과 판결문을 쓰기 위해선 인문학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판결문은 법 문서이지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문학적 향기를 담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선 곤란합니다.”⊙
그는 엄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판사들이 내면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능력이 있을까요? 예전에는 법문학부(法文學部)라고 해서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을 함께 공부시켰는데 지금은 왜 법만 외우게 해 수학답안지 같은 판결문을 쓰게 할까요?”
그의 말은 판결문이 법조문(法條文)의 복잡한 공식에 따라 풀어내는 수험생들의 획일적인 답안지와 같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정씨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무죄(無罪)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판사들의 문장력 부족 때문이 아닐까요?”
기자는 두 사람의 대화 중 정을병씨가 언급한 ‘무죄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판사들의 문장력 부족 때문’이란 말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 말이 사실일까.
판사들의 판결문을 구해 읽어 보았다. 그리고 판사 출신 변호사와 현직 판사를 두루 만났다. 그들에게 판결문 쓰기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져 보았다.
소설가에게 글은, 《칼의 노래》를 쓴 작가 김훈(金薰)의 말을 빌리자면, 일기단필(一騎單匹)의 경기병(輕騎兵)과도 같다. 소설가는 매일 수많은 적(敵)에 둘러싸여 전쟁을 치른다. 그의 적은 출판사이고, 무시무시한 평론가이며 매스컴의 위력을 등에 업은 기자다. 또 그의 적은 냉혹한 독자들이다.
그렇다면 판사와 판결문은 어떤 관계일까. 둘의 관계는 전투적 긴장관계로 맺어진 대상일까. 판사는 명(名)판결을 뛰어넘어 명판결문을 쓰기 위해 기꺼이 며칠 밤이라도 새울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취재 과정에서 느낀 판사들의 판결문 쓰기는 전사(戰士)로서의 글쓰기와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법무관 출신 A 변호사는 기자에게 “소설가의 작품이 감동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獻身)의 결과나 또는 모든 걸 버리는 살신(殺身)의 노작(勞作)이라면 판사의 근엄한 판결문은 메마른 회색빛 심판을 거칠게 쏟아낸 잿빛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일까.
판사들에게 글쓰기란
판사들의 쓰기 공부는 어떻게 이뤄질까. 사법연수원 교재인 《민사실무Ⅱ》(2004)에 나오는 판결문 작성요령 중 일부다.
<… 민사판결서의 구성에 관하여는 이미 여러 선배 법관들이 그동안의 오랜 실무경험을 통하여 이룩하여 놓은 일정한 틀이 있는바, 이러한 틀을 익혀 판결서를 작성하는 작업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재판 그 자체, 즉 삼단논법의 논리상식에 따라 실체법이 정하는 구성요건인 법률사실을 확정하여 이를 소전제로 하고 여기에 대전제인 법령을 적용하여 결론으로서 그 법령이 정하는 법률효과의 존부 및 내용을 판단하는 작업이다. …>
판사들에게 글쓰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적혀 있다. 글쓰기보다 중요한 것이 ‘논리상식(삼단논법)’이라고 말한다.
현직 판검사인 사법연수원 교수들이 예비 법조인에게 ‘글쓰기가 어렵지 않다’고 가르쳐서일까. 비록 많은 진화(進化)를 거쳤다고 하지만 여전히 판결문은 고약하다. 일본식 문체에다 딱딱하고 난해하며 때론 엉터리 번역문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다. 판결문에 판사들의 고뇌와 인간적 소회(所懷)를 담은 문장을 찾기란 무척 어렵다. 판사들은 냉혈한(冷血漢)일까. 소설가 정을병씨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판결문에는 사람의 땀 냄새와 눈물, 고뇌하는 판사의 모습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엄 변호사는 지난해 사법시험 3차의 면접관으로 예비 법조인을 만났던 경험담을 들려줬다.
“판사와 검사가 되겠다는 이에게 ‘학창시절, 독서를 얼마나 했느냐’고 물어보았어요. 뜻밖에도 독서를 즐긴다는 이가 몇 안됐고, 즐겨 읽었다고 답한 이의 책도 추리소설이나 재(再)테크 분야가 다수였어요.
이런 질문도 던져 봤어요. ‘가장 아팠을 때와 가장 슬펐을 때는 언제이며 무엇 때문이었느냐’고요. 긴 얘기가 오갔지만 제 마음에 쏙 드는 답이 없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의 ‘아픈 경험’이 부족하고 독서량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과거에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문학적 소양까지 갖춰 법을 배우게 했지요. 지금은 살이 없는 뼈만 다룹니다. 그러니 (판사가) 문장력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엄 변호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미국의 경우, 대학시절 교양학부에서 엄청난 독서훈련을 거쳐 로스쿨에 진학합니다. 외국의 대법원 판결문을 읽으면, 우리나라 판사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문장이 나옵니다. 어떤 경우는 판결문이 단편소설 형식을 빌리거나 시(詩)로 형상화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판결문이란 국민이 읽고 재미있어하며 그 속에서 삶의 교훈을 얻게 해야 합니다.”
판사, 맹아자가 되다
몇 해 전 법원 내부 정보통신망(코트넷)에 오른 <해외사법소식(46호)>에 아주 이색적인 판결문 한 편이 실렸다. 캐나다 출신 배리 데이비스(Barry Davies) 판사가 시(詩)로 쓴 판결문이었다. 이 판결문은 서울북부지법 최영헌(崔英憲) 부장판사가 번역해 올렸다고 한다.
<코프리노호(號)는 작은 목조 바지선을 이끌고서 케이프 빌을 벗어나 서녘으로 향했다.
두 척의 배는 바람을 타고서 순조롭게 조용하고 평온한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바지선과 본선을 잇는 견인선이 시야에서 벗어날 줄 모르며 함께 밤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카마나를 지났을 때 거센 바람이 불자 바다는 더 이상 예전의 바다가 아니었다.
작은 바지선은 이내 가라앉고 말았지만 코프리노호는 가라앉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바지선을 전복하게 하였을까?
갑판원이었을까 아니면 갑판의 풍우방책이었을까?
또 다른 의문은…
보험 측면에서 볼 때 과연 누구에게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을까?>
이 판결문은 바지선과 본선 사이에 벌어진 전복사고의 배상 사건을 다룬 것이었다. 번역문이긴 하나 전혀 판결문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에 대해 엄 변호사는 “한국 판결문의 경우 일본식 용어와 문체가 판사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사법연수원에 가면, 일본 판사들이 100년 전 쓴 일본식 문장이 하나의 문례(文例)가 되어 예비 법조인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피고인은 ○○에 종사하는 자인바…’ 식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으며 판검사들은 점점 우리말과 우리글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맹아자(盲啞者)가 되어 갑니다. ‘법’은 지켜도 ‘문법(文法)’은 외면하게 되는 셈이지요. 왜 있잖아요, 미국 가서 어설프게 영어 배워 귀국한 사람의 말 속에 튀어나오는 영어단어처럼 말이에요.”
서울중앙지법 정재훈(鄭載勳) 판사는 ‘법원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대학시절, 대법원 판결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고, 용어가 어려웠던 탓도 있겠지만 역시 문장이 너무 길어서였던 것 같다. 그때 느낀 것은 ‘역시 대법원 판결을 쓰신 분들은 내공이 고강하셔서 유난히 호흡이 길고, 그래서 이렇게 긴 문장을 쓰시는구나’라는 희화적인 소감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일심법원 B 판사는 사법연수원 시절 판결문 쓰기 교육을 이렇게 회고했다.
“만약 사법연수원 교수가 ‘소송 당사자가 읽기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애당초 연수원 교육부터 판결문은 무색투명하게, 감정의 개입 없이 쓰도록 교육받았어요. 심지어 단문(短文)이 아니라 ‘~고, ~며’로 길게 써야 한다고 배웠지요. 그렇게 안 쓰면 연수원 평가에서 감점을 받게 됩니다.”
지난 2008년 11월 3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판결문 간이화 세미나’에서 <민·형사 판결문의 보완 방향>을 발표한 국어생활연구원 김희진(金希珍) 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판결문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 거칠수록 더욱 반듯해지고 명료해지고 간결해지고 쉬워질 것입니다. 판결문을 만드는 사람의 가장 큰 소임은 모든 이가 이 판결문 읽기를 즐기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감성에 호소하는 미국의 판결문 例
‘미국 증거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법학자 존 위그모어(John Wigmore·1863~1943)는 1908년 모든 법률가가 숙지해야 할 문학작품 100권을 추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왜 많은 책 중에서 문학서적만 100권을 꼽았을까. 국가인권위원장을 역임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안경환(安京煥) 교수는 <미국에서의 법과 문학운동>이란 논문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공동체의 문제를 고심하는 모든 학문의 출발점은 인간의 기본적 심성에 대한 성찰이다. 법도 문학도 인간의 기본적 심성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한다는 상식적 이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정립과 분화가 가속화된 20세기 이전에는 ‘지식인’이 인문학적-통합적 지식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위그모어는 100권의 문학작품을 추천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법률가는 자신이 담당한 사안이 일반적 사상과 문학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숙지해야 할 특별한 직업적 의무가 있다.’
그가 언급한 ‘특별한 직업적 의무’가 무엇인지는 추측으로 알 수 있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처럼, 죄인도 신(神)의 신비스러운 계획의 일부이며, 가장 비천하고 비참한 모습에서 성스러움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버드대 헌법학 교수 출신으로 1939년부터 1962년까지 미국 연방대법원장을 역임한 필릭스 프랭크퍼터(Felix Frankfurter·1882~1965)는 법률가를 꿈꾸는 한 소년에게 이렇게 충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법학도가 되기 이전에 문학작품을 포함한 인류의 고전에 접근하는 노력을 쏟아야 한다. 법률가는 지성인이어야 한다.”
법률가의 특별한 직업적 의무는…
 |
| 박철 변호사. |
1984년 3월 미국 위스콘신주(州) 위너바고 카운티에서 조슈아 드샤니라는 4살 아이가 아버지(랜드 드샤니)에게 얻어맞아 뇌를 크게 다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아이는 평생을 중증 지체아 시설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조슈아 부모는 1980년 이혼했고 같은 해 아버지는 조슈아를 데리고 위너바고 카운티로 이사했다. 1982년 1월부터 위너바고 카운티 사회복지국은 조슈아의 친지, 이웃, 병원으로부터 아동학대가 의심된다는 여러 건의 보고를 받았다. 카운티 당국이 조사했으나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번번이 조슈아는 아버지에게 보내졌다. 그 후에도 조슈아는 몇 차례 더 병원에 실려 갔고 아동학대 의심 보고가 접수됐지만, 사회보호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마침내 회복 불가능한 뇌손상을 당하게 된 것이다.
조슈아의 어머니는 연방지방법원에 자신과 아들의 이름으로 카운티 사회보호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심과 이심에서 모두 패소했고 결국 사건은 연방대법원으로 갔다.
이 사건에서 제기된 법률문제는 ‘위너바고 카운티 사회보호국이 조슈아를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보호국이 적극적으로 조슈아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에 있었다. 박 변호사는 “미국의 연방헌법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만을 규정할 뿐, 국가권력에 의한 자유와 권리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이 판결의 다수의견은, 수정헌법 14조를 예로 들어 ‘학대받은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조처를 취할 의무를 카운티 당국에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상고를 기각하는 쪽이었다.
불쌍한 조슈아!
그러나 반대(소수)의견을 편 대법관들은 “사회보호국의 행위는 아동학대에 가담한 행위로 볼 수 있다”는 논리로 맞섰다. 그들 중 대법관 블랙먼(Blackmun)은 판결문의 반대의견 마지막 문단에 ‘불쌍한 조슈아!’로 시작되는 감성적 의견을 남겼다.
<오늘 이 법원은 ‘자연적 동정심(natural sympathy)에 흔들리지 않은 채 법의 냉철한 신탁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식 속에서 이 법원 자신은 메마른 형식주의 속으로 물러나 이 사건의 진실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진실에 적용하여야 할 법규범도 인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중략)
불쌍한 조슈아! 무책임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불한당이며, 비겁하고, 무자비한 아버지로부터 계속적인 폭행을 당한 피해자, 그리고 그를 위험한 궁지에 방치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고받고 알고 있으면서도, …(중략)…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피고로부터 버림받은 피해자입니다. 조슈아가 평생 심각한 정신지체 상태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미국 국민의 생활에 대한 슬픈 보고서이며 이제 죽어버린 애국적 정열과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위대한 선언으로 가득 찼던 미국 헌법 원칙들의 슬픈 현주소입니다.>
박철 변호사는 “블랙먼 대법관이 적은 반대의견은 미국 판결문 중에서도 예외적인 감성적 글에 속하지만 판결문 쓰기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통상적 사건에서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필요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5% 정도는 특별한 딜레마 상황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법학적 논리사고만으로 정답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법학 대신 윤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 몇몇 법과대학과 사법연수원에서 법률문장론 강좌가 생기기는 했지만, 강의 소재와 방법에서 별다른 발전이 있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로스쿨과 사법연수원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문학이론 강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교육방법은 어떨까요? 양형(量刑)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연계하는 방법인데, 주어진 사안에 대한 양형의견과 양형이유를 글로 적어 보고, 다른 사람의 양형의견과 양형이유를 비교해 토론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러니까 ‘장발장’의 절도범행에 대한 양형의견과 양형이유를 다양한 시각에서 작성해 보는 것도 글쓰기 훈련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학적 글쓰기, 아니 판사의 고뇌가 담긴 판결문은 그저 단순하게 ‘멋’을 부려 본 것에 불과한 것일까. 투박하고 딱딱한 논리적 판결문에 담긴 문학적 표현이 기껏 ‘개발에 주석편자’에 불과한 것일까. 박 변호사는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건축의 역사를 보면, 기능의 측면만을 강조해 건물을 짓지는 않았습니다. 기능만을 생각했다면 인간의 역사라는 게 감동이나 감탄이 많지 않았을 겁니다. 건축물에 멋을 부리면, 돈이 더 들 수도 있겠지만, 때론 그런 개성이 구조물의 생명이 되기도 하지요. 결국엔 그런 노력이 좀 더 세련된 문화, 세련된 사회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眞景山水畵와 문학 판결문
박철 변호사가 대전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2006년 9월 27일, ‘문학 판결문’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병든 아내를 수발하던 75세 노인이 충남 연기군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의 임대차 계약자는 노인의 딸이었다. 아내를 곁에서 지키느라 한시도 자리를 뜰 수 없어 늙은 아버지는 딸에게 계약서를 대신 쓰라고 부탁했다.
세월이 흘러, 임대의무 기간이 지나자 대한주택공사는 임대주택을 전부 분양하기로 결정했다. 임대주택법에서 ‘우선분양 권리자’는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무주택 임차인이다. 그런데 딸은 충북 청주에서 다른 주택을 이미 소유하고 있어 그 임대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없었다. 물론 실제 거주하던 늙은 아버지도 계약서상의 임차인이 될 수 없었다. 주공은 노인에게 집을 비워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다.
일심법원은 주공의 손을 들어 줬다. 계약서상, 임차인이 딸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노인의 손을 들었다.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당시 주심 판사였던 박 변호사는 판결문 말미에 이런 글을 담았다.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 모두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중략)
가을 들녘에는 황금 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 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그는 이 판결문을 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척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한 사람이 걸린 단순한 사건이었지만 가벼이 여길 사안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당시 야간 가을산행을 많이 할 때였지요. 관사(官舍) 뒷산에 올라가 판결구상을 하는데 마침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어요. 그때의 심경을 사족처럼 뒷부분에 넣은 것입니다.”
판결문이 메마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속성
 |
| 이재교 변호사. |
“언젠가 라디오 프로에 소설가 김훈이 ‘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해 이렇게 답하더군요. 육하원칙에 따라 기사를 쓰다 보니, 늘 회의가 들더라는 겁니다. 기사에 담을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싶었다는 얘기지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보세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진경’(眞景·실제의 경치)이 아닙니다. 자신이 산에서 느끼는 기상(氣象)을 표현한 것이 진경이지요. 제가 판결문에 담고 싶었던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반론도 존재한다. 광주지법 판사 출신의 이재교(李在敎) 변호사는 “메마른 법 논리보다 따스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사건, 그런 충고가 위로가 되는 사건은 형(刑)이 가벼운 사건, 소년범 사건 유형”이라며 “하지만 그런 사건에서의 따뜻한 말도, 법정에서 애정이 실린 말을 해야지 판결문으로 하는 것은 대부분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다.
“대부분의 사건은 판사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한 이상 그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어쭙잖은 위로는 오히려 패소한 또는 유죄판결을 받은 당사자의 부아만 돋울 수 있습니다. 충고는 자칫 월권이고, ‘판사면 판사지, 뭔데 충고야!’ 하는 비난을 살 수도 있어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형 건평씨가 법정에서 꾸지람과 충고를 들은 후 몹시 불쾌해했다는 보도가 있었지요.
판결문은 그 의미가 명확해야 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말보다는 명징(明澄)한 문장을 취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메마르다, 냉정하다는 평을 받게 되지만 판결문의 본질상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 봅니다.”
이 변호사는 ‘판사들의 난해한 판결문이 성역(聖域)이라면 성역을 깰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법조인도 모르는 판결문
“법조문이 어렵다는 지적엔 수긍이 가지만, 판결문이 어렵다는 지적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신문기사보다는 어렵지요. 법률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법률용어는 비법률가에게 낯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판결문이 어렵다는 지적은 주로 민사·가사 사건의 판결문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민사·가사 재판은 분쟁해결이 목적이고 판결문은 그 분쟁해결의 결론을 설명하는 문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거기에 군더더기가 붙으면 내용이 산만해지고 판결문 기능에 충실하기 어려워요. 나름대로 쉽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판결문의 속성상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판결문 속성이 지닌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판사들이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쉬운 판결문을 쓸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기자 역시 판결문 읽기가 어렵다. 판결문을 쉽게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집중해서 여러 번 고쳐 읽어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읽기능력이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법률지식이 부족해서일까. 판결문에 담긴 법리전개 과정 자체가 어려워 판결문을 제대로 해독해 내지 못하는 것일까.
C 변호사는 이런 경험담을 들려줬다. 언젠가 부동산 귀속 문제를 두고 민사재판이 벌어졌다. 재산분쟁인 만큼 지루한 법적 공방이 계속됐고 결국 판결은 해를 넘겼다. 그런데 애매한 판결문이 문제였다. 원고와 피고 측 변호사끼리 “판시 내용에는 우리 쪽에 부동산이 귀속됐다”며 다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서로 이겼다고 다투던 변호사들은 결국 판결문을 들고 담당 재판부를 찾아갔다. 예외적 경우라고 해도 판결문의 난해함은 법조인 역시 마찬가지인 셈이다.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역임한 박동섭(朴東涉) 변호사는 난해한 판결문 문장을 고친 글을 한글학회지에 기고하면서 “판사들의 생각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고 충고한 일이 있다.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피고들은 1987. 5. 말경 원고와 사이에, 그 시경(時頃) 소외(訴外) 최문철이 원고로부터 금 12,000,000원을, 변제기를 1988. 9. 10.로 정하여 차용함에 있어서 피고들이 소외 최문철과 연대하여 원고에게 위 차용금을 변제하기로 하는 내용의 보증 계약을 체결하였다.> (서울 민사지법 1993. 6. 24. 선고 93가단 2967 판결, 글자 수 106자)
아무래도 읽기가 어렵고 알 듯 말 듯하다. 박동섭 변호사는 이 판결문을 아래와 같이 고쳤다.
<원고가 1987. 5. 말경, 최문철에게 돈 1200만 원을 빌려 주면서, 돈 갚을 날을 1988. 9. 10.로 정하였고, 그때 피고들은 위 채무의 연대 보증인들이 되었다.> (글자 수 65자)’
작고한 서울대 국어교육과 김광해(金光海) 교수는 판결문이 어렵고 난해한 이유를 ‘판사들의 국어실력과 작문능력 미숙에 원인이 있다’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문법(文法)’이라는 말의 뜻은 현대국어의 문장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곧 ‘말에 관한 법’이라는 뜻이다. 법조계가 모름지기 법을 관장하는 기관이라면 특히 현대국어의 문장구성 원리인 ‘문법’도 솔선해서 잘 지켜야 할 것이다.>(논문 <법조계의 글쓰기에 대한 진단과 대책> 중 일부)
김 교수는 생전 “안개 같은 생각들을 조리 있는 문장으로 바꾸는 기술이 바로 국어문장 구사력”이라며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판결문들은 내용이 난해해서라기보다 국어 문장으로서의 완성도가 미진한 까닭에 정확한 뜻을 알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문장 앞에서는 그 어떤 독자라도 안개 낀 들판을 헤매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판결문 고쳐 쓰기의 例
김광해 교수는 “판결문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황”이라고 규정하며 대법원 판결요지를 국어 어법에 맞게 고쳐 쓴 일이 있다. 다음은 2003년 4월 22일 자 대법원 판결요지다.
<의료법은 제30조 제2항에서 의료인이나 의료법인 등 비영리법인이 아닌 자의 의료기관개설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제66조 제3호에서 이를 위반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바, 의료법이 의료의 적정을 기하여 국민의 건강을 보호 증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위 금지규정의 입법취지는 의료기관 개설자격을 의료전문성을 가진 의료인이나 공적인 성격을 가진 자(이하 의료인 등이라고 한다)로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건전한 의료질서를 확립하고, 영리목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국민 건강상의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보이는 점이다.(이하 생략)>
긴장하여 읽지 않으면 의미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김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고쳤다.
<의료법은 제30조 제2항에서 의료인이나 의료법인 등 비영리법인이 아닌 자가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같은 법 제66조 제3호에서는 이를 위반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을 둔 취지는 이러한 의료법 규정을 두어 적정한 의료 혜택이 돌아가게 함으로써 국민의 건강을 보호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위 금지규정의 입법 취지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는 자격을 의료 전문성을 가진 의료인이나 공적인 성격을 가진 자(이하 의료법인 등이라 한다)로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건전한 의료질서를 확립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국민 건강상의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이렇게 고치니 한결 이해하기 쉽다.
서울서부지법 송명호(宋明浩) 판사는 서울남부지법에 근무하던 2009년 9월 ‘민사판결문 간이화 연구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판결문의 난해성 문제에 관한 논의>)을 준비하며, 당시 그가 맡았던 사건의 판결문 초안을 고쳐 다시 쓴 일이 있다. 그가 쓴 초안은 이러했다.
<후소의 소송물이 전소의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소에서 확정된 권리관계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정반대의 사항을 소송물로 삼은 경우에는 확정된 전소판결의 기판력이 미치게 되고 이러한 모순관계로 인한 기판력의 작용은 후소에서 전소판단과 다른 주장을 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작용도 포함하며 …>
송 판사는 이 판결문 초안을 아래와 같이 고쳐 보았다.
<이전 소송에서 권리관계가 이미 확정되었는데도 그러한 권리관계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정반대의 사항을 소송물로 하는 소송이 또다시 제기되는 경우에는, 이미 확정된 이전 소송에 관한 판결의 효력(즉, 기판력)이 나중 소송에 그대로 미치게 된다. 이러한 모순관계로 인한 기판력의 작용으로 인하여 나중 소송에서 이전 소송에서의 판단 내용과 다른 내용의 주장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고치기 전 글에는 판결문이 난해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후 송 판사는 사건 당사자가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D 변호사는 법률용어와 관련한 법정다툼 경험담을 상세히 들려줬다.
“가끔 법정 발언을 두고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나죠. 민사소송에서 한 소송당사자가 ‘돈을 갚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이해 못할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변제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럼 당사자는 ‘갚았다니까요!’라고 반박합니다. 판사는 변제의 법적 효과까지 고려해 ‘변제냐니까’하고 다시 추궁해요. 그 의미를 모르는 당사자는 ‘갚았다는데, 왜 판사는 계속 뚱딴지 같은 말만 하느냐’고 생각합니다.
판사들의 머릿속에는 의미가 통하는 말이라도 법률적 의미를 하나 더 추구합니다. 언어의 충돌, 불일치가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의뢰인과 법률상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설명해 주지만 ‘뭔 소리냐’는 눈빛입니다. 테이프 레코드처럼 다시 반복해 설명해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이 사람, 바보 아니냐?’ 하고 화가 나다가도 ‘아, 내가 바보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어요. 그런 경험을 거치며 저는 제가 쓰는 말과 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배웠던 법률문장을 다 버리고 다시 문장공부를 시작했어요.”
판결문에 대한 법조인 3명의 논리
 |
| 엄상익 변호사. |
“판결문이 난해하다는 것은 판사가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도 사실이 뭔지 모르고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누구나 글을 쓸 때, 본질을 꿰뚫고 있으면 짧고 명쾌하게 씁니다. 판결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초동(법원) 주변에는 ‘판결문이 난해하면 패소한 당사자의 상소율이 높아진다’는 말이 회자합니다. 판사들이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쓴 판결문이면, 상소하는 게 당연하죠. 난해하면 상소율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난해하면 (판사가) 실체를 모른다는 뜻이죠.”
―법학의 고유한 성격이 까다롭고 난해하기 때문에 판결문도 어려운 것은 아닐까요.
엄 변호사는 “문학에서 ‘정의’나 ‘평등’과 같은 딱딱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하느냐”며 “정의를 드러내기 위해 수필이나 소설도 딱딱하게 써야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판사는 판결문을 마치 동사무소 민원용지에 써넣듯, ‘범죄사실’과 ‘증거의 요지’, ‘법령의 적용’에 따라 씁니다. 보통 범죄사실 부분은 검사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베낍니다.
그러면 판사가 유죄판결문을 쓸 때 머리 쓸 게 하나도 없게 됩니다. 무죄판결을 하려면, 판사의 논리와 이유, 생각을 치밀하게 판결문에 담아야 합니다. 저도 판결문을 써 봤지만, 무죄판결문 하나를 쓰려면 유죄판결문 수십 건보다 힘듭니다. 검사의 논리, 증인의 엇갈리는 진술, 경찰의 수사결과까지 범죄구성요건을 철저하게 따지고 들어가야 하지요. 판사로서는 사건을 꿰뚫어야 할 만큼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부담이 크지요. 실력 있는 판사가 아니면 무죄판결문을 쓰기가 쉽지 않지요.”
무죄 판결이 안 나오는 이유
서울의 일심법원 E 판사는 기자와 만나 ‘판결문을 난해하게 쓰는 원인은, 생각을 문장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문의 기초가 부족한 데다 권위 있어 보이게 써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가세한 탓’이라는 지적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쉬운 말을 어렵게 표현하는 것은, 본인이 소송당사자보다 ‘지위가 높다’는 의식에서 일반인의 표현을 가급적 피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누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말을 했겠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표현을 판결문에 그대로 쓰기는 곤란하죠. 예를 들어 ‘원고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말을 했겠느냐. 피고가 말하는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쓰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판사가 실제 판결문에 ‘원고가 바보가 아닌 이상~’이란 말을 집어넣었어요. 나중 그 판결문을 읽은 어느 판사가 우스갯소리로 ‘나라면 바보 대신 우자(愚者)로 썼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재교 변호사는 “판결문을 친절한 안내문처럼 쓸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과거 1960~70년대 권위주의 시절에는 판결문이 권위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판결문은 원고와 피고 또는 검사와 피고인의 주장 중 어느 한편을 받아들여 판단하는 구조를 취합니다. 원고 승소 또는 패소, 피고인의 유죄 또는 무죄, 이런 식이지요. 이렇게 판결문의 내용이 법이라는 권위를 이용하여 판단하고, 단죄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판결문을 친절한 안내문처럼 쓸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당사자로서는 권위적으로 느끼기 쉽습니다. 이는 판결문의 기능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속성입니다.”
이회창 대법관의 노력
 |
| 고등법원 판사시절, 세계법관회의에 참석한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이 대표는 법조계 관행이었던 판결문의 난해한 표현들을 짧고 간결하게 고쳐 써 후배 법관들의 귀감이 됐다고 한다. |
1981년 이 대표가 대법관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신문》 사회면에 이런 기사가 올랐다.
‘아직도 이런 난삽한 판결문이 쓰이고 있다. 국민과 소송당사자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들로…’로 시작되는 기사는, 이 대법관의 판결문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 판결문은 대법원 판사로서 그가 처음 쓴 전원합의부 판결문이었다.
그 기사를 두고 그는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자존심마저 상했다. 동료 대법관에게 어찌나 미안했던지 함께 하던 식사 자리에서 사과 발언까지 했다.
“저 때문에 신문에서 대법원 판결이 이런 욕을 먹게 돼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쓰는 판결문에 그처럼 문제가 많다면 대법관직을 그만두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찌 보면 그의 판결문은 당시 법관들이 관행적으로 써 왔던 판결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판결 자체보다 판결문을 두고 비판하는 기자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쩌면 판결문에 진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판결문을 건네며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 보라고 부탁했다. 아내 역시 그 판결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대법관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문장을 쉽고 간결하게 쓰는 훈련을 시작했다. 아내가 트레이닝 코치가 되었다. 문장과 단락들은 짧게 단축됐고, 법조계의 관행이었던 난해한 표현들도 평이하게 고쳐졌다. 한문식 표현들도 가능하면 쉬운 말로 고쳤다.
그런 과정을 겪고 다시 예전 판결문을 살펴보았더니 스스로 딱한 마음마저 들었다고 한다.
그 후 판결문 쓰기에 더욱 공을 들였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마음으로 판결문 쓰기에 임했다. 이를테면, 이유의 설명이나 논리의 전개과정에서도 상투적인 문구를 피하고 진솔한 논리와 사유를 전개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제한된 일과 시간 내에서 판사실에 앉아서만 처리할 수 있는 일의 분량을 훨씬 넘어서게 마련이었다. 개인 시간을 더욱 쪼갤 수밖에 없었다. 출퇴근하는 차 속에서, 퇴근 후 집에서, 출장길에서 판결자료를 가지고 다니며 읽고 또 썼다. 언젠가 그런 그에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왜 그처럼 열심인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되나?”
그는 말없이 웃었지만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열심히 해야 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 그것은 최고법원의 법관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로스쿨과 사법연수원 커리큘럼에 인문학을 포함해야
 |
| 이우근 변호사. |
이 변호사는 “빼앗긴 자유,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으려는 이웃의 호소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법률가는 분쟁당사자들에게 평화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법의 사도(使徒)”라고 한 종교법학자 한스 동부아(Hans Dombois)의 말을 자주 되새긴다. 그의 말이다.
“법은 사실을 추구합니다. 법률 용어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언어인데, 이때 실체적 진실이란 객관적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문학은 그걸 뛰어넘는 삶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현실을 균형 있게 바라보기 위해 객관적 사실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 인간관계의 진실을 파악하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법만으론 부족합니다. 판사는 인문학과 종교적 품성을 갖춰야 차원 높은 판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예로 들었다. 라스콜니코프와 소냐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두 사람은 사형수와 창녀다. 둘 다 사회의 암적 존재인 셈이다.
“법이 파악한 사실만 따진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반(反)사회적 인격의 만남이지만, 문학의 영역에서는 지고지순의 연인입니다. 문학은 비록 허구지만 그 속에 녹아든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세계를 보려면 법학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고교시절, 문예반에서 교지를 만들며 시와 소설을 썼고 대학시절에는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도 이청준, 도스토옙스키,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의 소설가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판사 시절, 퇴근하며 사건기록을 한 보따리 챙겨 와 판결문을 썼다. 문장은 간결하게, 만연체 같은 긴 문장을 피했고 주어와 술어를 분명하게 썼다. 불필요한 우회적 표현도 삼가려 노력했다. 후배 판사들에게도 간결한 문장쓰기를 강조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판결문에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표현을 ‘해야 한다’로 고쳐 썼어요. 다 일본식 문장이거든요. 후배 판사들의 판결문에 ‘위 김갑동’은 어쩌고, ‘위 김갑동’은 저쩌고 하는 표현이 수두룩하기에, ‘위’자를 하나만 남기도 다 지웠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김갑동이란 이름은 하나의 고유명사인데, 도대체 판결문 속에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몇 명 등장하느냐’고요. 그런 글은 아무도 안 읽습니다. 저는 길게 이어진 문장을 7~8개 단위로 끊어 쓰려 했고, 주술(主述)관계를 명확히 하려 했어요.”
―판사들의 땀과 고뇌가 담긴 판결문을 기대할 순 없나요.
“판사가 삶의 진실을 고뇌하고 이를 판결문에 담을 수는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면 설익은 것이 돼 오히려 진실을 흐리게 만들 수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판결은 절대 훈시가 돼선 안 됩니다. 일간지에 ‘판사가 피고인을 준열히 꾸짖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꾸짖을 수야 있지만, 그게 도가 지나쳐서 인격에 대해 판단까지 해선 곤란합니다.”
법학은 경험과학 판결문에 문학적 향기 담아야
이우근 변호사는 “법학은 이론과학이 아니라 경험과학”이라며 “경험이 많을수록 좀 더 익은 판결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군대 안 간 사람은 20대에 단독판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변호인은 물론 사건당사자들도 불안합니다. 속으로 ‘저 사람이 뭘 알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판결에는 축적된 경험과 안목이 녹아 있어야 합니다. 이론만으론 부족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법령이나 법조문, 판결문을 국어어법에 맞게 고쳐야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며 “판사들은 법률용어를 순화시킬 우리말을 모르고, 국어학자들은 우리말은 알지라도 법을 모른다”고 했다.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 가곡은 참 아름답습니다. 시인이 쓴 시도 주옥 같아요. 그런데 시는 우리 운율, 곡은 서양기법으로 작곡하니 시에다 곡을 붙이기가 까다로워요. 그런데 서양의 음악전문학교에 가 보세요. 성악과나 작곡과는 실기만 가르치는 교수만 있는 게 아니라 시학(詩學)을 가르치는 시인교수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야 시의 운율과 음악의 선율이 일치하는 곡을 부를 수 있고 작곡할 수도 있어요. 슈만이나 슈베르트가 왜 당대 최고일까요? 바로 시적 운율과 음악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변호사는 “로스쿨과 사법연수원 커리큘럼에 인문학과 문학을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판사가 법 기술적 판단만 잘해선 곤란합니다. 인격적 고뇌가 담긴 판결과 판결문을 쓰기 위해선 인문학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판결문은 법 문서이지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문학적 향기를 담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선 곤란합니다.”⊙
| ▣ 취재후기 기자는 판결문 속에 판사들의 땀과 눈물, 고뇌하는 판사들의 판결문을 쓸 수 없을까 하는 관점에서 법조인과 국어학자를 만났다. 한편으로는 판사들의 ‘난해한’ 판결문이 성역이라면 그 성역을 깰 수는 없을까 하고 고민해 보았다. 판결(문)은 의뢰인을 위한 것이지, 판사나 검사·변호사의 것이 아니다. 까다로운 판결문은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해석하기 어려울테고, 그러면 변호사가 더욱 ‘돈벌이’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면 억측일까. 물론 판사들과 법조인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여전히 판결문의 문턱이 너무 높다고 느끼고 있고, 판사들의 열정과 인간적 고뇌가 담긴 판결문을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판사들은 외계인이 아니다. 그들이 쓰는 말과 글도 외계어가 아니어야 한다. 정확하고 때로 인간적 체취가 묻어나는, 명확하되 따뜻한 우리말과 글을 판결문에 담아야 한다. 그런데도 스스로 외계인을 고집한다면 법과 판결문의 권위도 추락할 것이다. 아니,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