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 3조5000억원 투입되는 프로젝트
⊙ 당초 유치예정이었던 충청권 ‘원안 사수’에 올인, 호남까지 유치전에 뛰어들어
⊙ “최초 의도가 없어진 채 정치인들의 표밭으로 변해 버렸다”(Y대 이학과 교수)
⊙ “대통령이 국익차원에서 결단 내려야”(전성근 전 과기처 실장)
⊙ 당초 유치예정이었던 충청권 ‘원안 사수’에 올인, 호남까지 유치전에 뛰어들어
⊙ “최초 의도가 없어진 채 정치인들의 표밭으로 변해 버렸다”(Y대 이학과 교수)
⊙ “대통령이 국익차원에서 결단 내려야”(전성근 전 과기처 실장)
- 지난 2월 7일 오전 염홍철 대전시장 등 대전 지역 정치인, 기업인들은 과학벨트 충청권 유치를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이하 과학벨트) 입지선정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과학벨트 구축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때인 지난 2007년 10월에 충청권 공약으로 제시한 것이다. 행정도시와는 별개로 과학벨트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전의 대덕연구개발특구와 충남 연기·공주의 행정중심복합도시, 충북 오창·오송단지를 하나의 벨트형 경제권으로 묶어 ‘한국판 실리콘밸리’를 만들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정부 예산 3조5000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후 과학벨트안(案)을 세종시 수정안에 넣어 추진하다가 세종시 수정안의 실종과 함께 과학벨트는 애매한 상태가 돼 버렸다. 그게 2010년 6월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에 과학벨트안을 포함시키면서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기초과학 국책기초연구소’ 외에 삼성, 한화, 롯데 등 대기업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세종시에 신재생에너지, 그린에너지, LED 등을 개발코자 4조5000억원 이상을 투자키로 했다. ‘세종시’라고는 하지만, 이들의 투자는 엄밀히 따지면 ‘과학벨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면서, 대기업들은 세종시(정확히 말하면 과학벨트라고 볼 수 있다)에 하기로 했던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기초과학 국책연구소(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므로 국책으로 본다)도 이와 함께 어물쩡 무산되는 것으로 넘어갔다.
이어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과학벨트특별법’이 통과됐다.
이 특별법은 오는 4월 5일에 발효된다. ‘국무총리 산하에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입지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충청도의 어느 도시’에 입지를 선정한다는 식의 ‘충청권’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
이런 와중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올 초 “위원회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한 후에 결정될 것”이라며 “백년대계이니 과학자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것은 과학벨트 지역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의중’이 이렇게 확인되자 지자체들마다 과학벨트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정치권도 와글와글하다. 정치적으로 인화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총선과 대선(大選)이 있다. 무더기로 표를 움직일 수 있는 이슈다. 그래서 전남, 광주 지역의 국회의원들은 과학자들을 초청해 공청회를 열겠다고 치고 나갔다. 유치 의사를 밝힌 것이다. 대구 지역도 들썩이고 있다. 당초 후보지였던 대전시(市)는 이에 맞서 ‘원안(原案) 고수’에 사활을 걸었다.
정치판이 돼 버린 과학벨트 문제에 대한 과학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어디를 과학자들의 연구 터전으로 삼을 것이냐에 대해 막상 과학자들의 의견은 조그맣게 들린다. 제일 중요한데도 말이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에 대덕연구단지를 만들었던 정부 관료와 현역에 재직 중인 이공계 교수들, 과학벨트의 ‘잠재 연구원’들에게 물어봤다.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고, 상반되는 경우도 있었다.
‘펀딩’이 거의 불가능했던 순수과학
과학자들은 과학벨트의 설립 의도에 대해서는 다들 반겼다.
국내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뒤 미국 P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미국 S대에서 포스트닥터(이하 포닥·Post Doctor)로 지내는 A씨의 얘기다.
“정부에서 과학벨트를 조성한다고 할 때 순수과학도 입장에서 많이 반겼습니다. 국가에서 국민의 세금을 투입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니까요. 기초과학은 ‘펀딩(투자·funding)’을 받기 참 어려운 분야입니다. 펀딩을 받으면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데, 기초과학은 공대(工大)에 비해 결과가 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나마 나오면 다행이지만,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리스크가 큽니다. 그렇다 보니 펀딩에 비해 결과물이 미미하게 보일 수밖에 없고, 이런 이유 때문에 펀딩이 어려운 겁니다. 게다가 기초과학 전공자들이 갈 만한 연구소나 대학이 국내에 많지 않습니다.”
―미국은 상황이 달라서 그곳에 있는 겁니까.
“(미국에선)순수과학도들이 연구를 하고자 하면 적어도 본인이 원할 때까지는 연구할 만한 여건이 주어지죠. 생계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의 월급이 주어지고요. 하지만 국내에서는 과학자들이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할 정도였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들 얘기로는 연구만 하는 환경도 조성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한 상태에서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는 과학벨트 얘기가 논의됐기 때문에 저를 비롯해 많은 순수 과학도들의 관심이 컸습니다. 저 역시 여건이 맞는다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습니다.”
미국 D대 교수로 지내다 최근 국내 S대로 옮긴 한 교수는 “순수과학이든 공대든 상관없이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했다.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자면, 과학벨트 조성이라는 원론 자체는 과학자들에게 꽤 파워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즘의 상황을 바라보는 과학자들의 심정은 편치 않다.
Y대학 수학과의 C교수 얘기다.
갈라먹기만큼은 막아야
“어느 지역에 벨트가 조성돼야 한다는 쪽으로 얘기가 흘러가면서 다들 기본 취지를 잊었습니다. 기초과학을 탄탄히 하고, 우리가 과학 강국(强國)으로 도약한다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습니다.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꾸려 가야 성공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지역분배라는 둥, 어떤 지역으로 가야 한다는 둥의 얘기가 불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C교수의 지적은 맞지만, 어찌됐건 요즘의 관심사는 ‘어느 곳에 조성되느냐’ 하는 부분이다.
인터뷰에 응한 과학자들도 딱히 어느 곳이 적당하냐에 대해서는 각각 생각이 달랐다. 하지만 ‘갈라먹기 식(式)은 곤란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냈다.
미국 S대 포닥으로 있는 A씨의 얘기다.
“학문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기계과나 물리학과의 도움을 얻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 역시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학과의 프로젝트에 도움을 주고요. 한국의 정치권에서 지역 분배를 감안해 ‘나눠먹기’ 식의 형태가 되는 것은 절대 반대합니다. 과학벨트의 설립 목적에 반(反)하는 정책입니다. 과학 프로젝트를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이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Y대 C교수는 “과학프로젝트는 절대 정치적인 사안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를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은 대의(大義)를 생각해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벨트 도시 육성이 ‘용두사미’가 될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D씨는 미국 대학에서 생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S대 이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나라 과학계의 슬픈 점은 과학자가 발의(發議)를 하면 정치인들이 결정을 한다는 겁니다. 발의자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나중에 정치인이 짜 놓은 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숙제를 하는 꼴입니다. 연구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과학자인데 과학자들은 의사결정에서 뺍니다. 특히 ‘찢어 갖자’는 허황된 생각은 첨단의료복합단지처럼 실패로 끝날 겁니다. 솔직히 요즘 일어나는 일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르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과학벨트라는 원안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과학의 이슈는 새롭게 생기고 표류하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결론났는지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게 과학계의 현실입니다.”
―과거에 근무했던 미국의 연구원 등은 상황이 다릅니까.
“발의자의 실체가 명확합니다. 통상 업계에서 권위있는 학자나 전문가가 발의를 하면, 피어그룹(peer group·관련단체)에서 토론을 하고, 서로 서포트해서 결정합니다. 상관없는 사람들이 감 놔라 대추 놔라를 하는 식이 잘 없죠.”
인력 스카우트에 연구비 대부분을 할애해야
D씨는 좀 더 시니컬한 태도로 얘기를 이어 갔다.
“과거와 비슷한 모습이라면 (과학벨트가) 어떻게 흘러갈지 뻔합니다. 가령 5000억원의 예산이 있다고 치면 정치인들이 결정을 해서 땅 사고 건물 짓는데 3000억원을 쓸 겁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지어 놓고 겉을 번지르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남은 돈 중 1000억원으로 실험 장비를 사고, 관련 연구소의 장들을 뽑습니다. ‘우리가 준비는 충분히 해줬으니 이제는 과학자 너희들이 잘할 차례’라면서요. 실제로 연구소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방송국의 카메라가 오지 않고 언론의 관심이 뚝 끊어지거든요. 연구소장은 남은 예산 1000억원을 들고, 텅 빈 집에 앉아서 그제야 고민하는 겁니다.”
―당신에게 권한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1000억원으로 집 지은 다음에 무엇을 할까를 고민할 겁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연구소를 가 보면 외관이 우리보다 훨씬 못합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데 뭣하러 으리으리한 건물과 넓은 부지가 필요합니까.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이 선진화되지 못한 것은 장비가 부족하거나 과학자들의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국내에서, 해외에서 선진 기법을 배웠습니다.저라면 예산 중에서 많은 부분을 인재를 리크루트하는 데 사용할 겁니다. 좋은 조건으로 좋은 사람을 데려와야 좋은 연구 결과가 나올 것 아닙니까.”
원안 후보지였던 대전과 관련해서는 여러 얘기들이 있다.
전상근(全相根) 전(前)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은 “대덕단지와의 시너지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퍼듀대 화공과를 나온 전상근 전 실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에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 과기처 종합실장 등을 맡아 오늘날의 대덕과학단지를 일군 사람이다.
전상근 전 실장의 얘기다.
대덕과학단지와 과학벨트는 출발점부터 달라
“과학벨트는 대덕단지와 성격이나 설립 목적이 다릅니다. 대덕단지를 조성할 때에는 국내에 과학연구 환경이라는 것 자체가 조성돼 있지 않았습니다. 국내 과학진이 개발하는 것보다는 외국의 기술을 도입해서, 우리 식으로 소화·개량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을 한군데에 모아서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소가 필요해서 만든 것이 대덕과학단지입니다. 대전, 청주, 화성 중에 대전이 낙점됐지요. 여기서 훈련된 과학기술자들이 산업계로 파견돼 오늘날의 삼성, LG, 현대와 같은 기업이 탄생했죠. 과학벨트는 대덕과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대덕이 단지를 만들고 과학자들을 불러왔다면, 이번 과학벨트는 과학자들이 이미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만들어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스스로 찾아올 정도로 매력적인 입지에 타운을 건설해야 합니다.”
―충청권에서는 대덕단지와 연계하는 것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고 합니다.
“난센스예요. 대덕단지는 미션 컴플리티드(mission completed·임무가 끝난 것)예요. 저는 대덕연구단지가 성공적인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우수한 인력을 산업계에 보급한 업적이 있습니다. 그 인력이 오늘날의 삼성, LG, 현대가 탄생하도록 했지만, 정작 대덕단지 내에서 혁혁한 연구 성과를 낸 것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연구원들이 주말이 되면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거든요. 대덕단지 내에서 365일 연구에 몰두하는 빈도가 아무래도 낮을 수밖에 없었죠. 훌륭한 인력을 배출한 것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했고, 또 앞으로도 그것이 주요 임무가 될 겁니다. 과학벨트를 대덕하고 연계해서 단지를 크게 만든다고 시너지 효과가 있을는지에 대해서는, 글쎄요.”
―호남권에서 유치하겠다고 나섰는데요.
“제 정신이 아니죠. 한국의 과학 발전은 염두에 두지 않고 제사보다 젯밥에 흥미가 있다고밖에 안 보여요. 국회의원들이야 자신의 표밭이니까 그렇게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초연해야 합니다. 국익(國益) 앞에서 정치를 논하고, 정치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죠.”
근무지가 수원이어서 미국에서 돌아온 B교수
S대 공대 교수는 “기본적인 것을 갖춘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 교수로 지내다가 한국에서 오퍼(제안)를 받았을 때 근무지가 수원이어서 더욱 끌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카이스트에서 오퍼를 받았다면 돌아왔을 것 같기는 한데, 그보다 먼 곳이었다면 아마 오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지역 편차가 큰 탓이 있지만 해외에 근무했던 교수 입장에서 볼 때 기본적인 여건이 열악한 곳이 많거든요. 가령 종합병원이나 애들 교육기관 같은 기초적인 것들이 부족한 지역은 문제입니다. 과학벨트가 외딴 곳에 위치한다면,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하는 많은 잠재 연구원들의 마음이 멀어질 겁니다.”
미국 S대 포닥으로 있는 A씨는 “대전까지는 모르겠지만 대전 이하의 지역에 과학벨트가 조성되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했다. A씨의 남편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리 과학자라고 해도 삶의 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직장 때문에 남편의 직장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대전은 대덕이라는 과학단지가 조성된 지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삶의 질(質)이 높다고 봅니다. 또 무리를 하면 대전에서는 출퇴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보다 먼 곳에, 더구나 새로 과학벨트를 조성한다면 다시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화학을 전공한 E씨는 미국의 I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캘리포니아 소재의 모 대학에서 포닥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부인과 다섯 살 난 딸이 한 명 있다.
E씨의 얘기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처음에 미국으로 유학을 올 때는 나중에 이곳에 남거나, 한국 대학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막상 와 보니 백인의 사회에서 마이너리티(소수)라는 느낌을 버릴 수 없는 데다 한국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습니다. 10년 이상을 한 우물을 팠고, 나름 업계에서 실력 있는 과학도라고 생각은 하지만요.”
―과학벨트가 조성되고 연구원 제안을 한다면요.
“무엇보다 위치가 중요하죠. 과학도도 사람 아닙니까. 서울은 아니더라도, 아내와 딸이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어야죠. 솔직히 미국에 남아 있는 포닥들 중에서 아이들 교육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예요.”
수도권에 과학벨트 유치해야 성공할 수 있어
S대의 D교수는 “정부와 국민이 정말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수도권에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S대에 연구실 하나, 또 S대에서 30여 분 떨어진 곳에 연구실을 갖고 있다.
D교수의 얘기다.
“우리 방(실험실)에 오는 애들(연구원들)이 저를 만나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도망 다녔습니다. 어떻게든 눈에 안 띄려고 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들어 보니 S대가 아니라 다른 연구실로 출근을 하라고 지시할까봐 그런다는 겁니다.”
―30분밖에 안 떨어진 곳 아닙니까.
“20, 30분 차이가 별 거 아닌 거 같지요? 실제로 한 번 해 보세요. 연구원들한테 교통비를 얹어 주고, 셔틀버스 대 주고, 화상채팅으로 회의를 하고 별 거 다 해 봤습니다. ‘과학자가 열정이 있어야지 그깟 거리를 신경쓰면 되느냐’고 읍소도 해 봤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거리 때문에 사투를 벌였습니다. 결과요? 그래도 애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덕은 성공한 것 아닙니까.
“시간이 오래됐고 자리를 잡은 것은 맞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과학벨트의 과제 중 하나가 해외에서 우수한 인력을 데려온다는 것 아닙니까? 외국 과학자를 직접 한 번 에스코트해 보세요. 인천공항에 내려서 차를 타고 기차역에 가서, KTX를 타고 대전에 가서 또 차를 타고 간다고요? 예전에 대덕에 일이 있어서 미국 과학자 한 명을 에스코트했는데 KTX 안에서 지쳤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정말 과학벨트의 성공을 바란다면 수도권에 유치를 해야 합니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과학자들에게 기대 이상의 연봉을 주고 소수정예로 연구소를 꾸려 가야 합니다.”
D교수는 샌디에이고에 있는 스크립스 연구소(Scrips Institution)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버드를 넘어서겠다’는 의도로 설립된 이 연구소는 초반에 연구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서 보스턴으로 발길을 옮기는 연구원들을 붙잡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을 유혹할 수 있어야 성공한다
전상근 전 과기처 실장의 생각도 비슷했다.
전 전 실장의 얘기다.
“과학자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 또 외국의 학자들이 살고 싶어하는 곳에 유치를 해야 합니다. 수도권이죠. 따지고 보면 과학자들이 가장 많은 곳이 서울입니다. 대덕단지와 연계해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수많은 브레인들을 활용해야죠. 밤늦게까지 연구하고, 집에 한 시간이면 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수도권이 아니면, 적어도 일일 출퇴근이 가능한 수도권 부근에 만들어야 합니다.”
―부지가 많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기초과학 아닙니까? 100만평씩 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연구소 부지의 면적이나 건물에 신경을 쓰면 안 됩니다. 얼마나 머리 좋은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느냐가 제일 중요하죠. 우리가 말하는 ‘원천기술’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자들 머릿속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머리를 사 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과학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지역, 그들이 원하는 대우를 해 줘야 합니다. 호남권이나 경남에 유치되면 취직이 되지 않는 과학자들이나 몇 명 가겠지요. 브레인(brain)들이 왜 가겠습니까? 브레인들을 유혹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지 않고서는, 왜 사람들이 모이지 않느냐고 얘기할 겁니까?”
미국 S대에서 포닥 중인 A씨에게 ‘수도권에 과학벨트가 생기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A씨는 “미국에 남아 있는 연구원들이 한국에 더 돌아가고 싶어할 것 같다”고 답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포닥 중인 E씨는 “연구원직을 오퍼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가) 최선을 다할 것 같다”고 했다.
전상근 전 과기처 실장은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대덕을 만들 때에 건설부에서 대덕, 청주, 화성을 추천했습니다. 도시계획을 전공한 김형만 박사가 입지 조건을 살펴서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발표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대덕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고 결정했습니다. 마침 국무총리 김종필씨가 충청 출신이니 만장일치로 결정이 됐지요. 하지만 그 결정은 정치적인 이유로 한 것이 아닙니다. 팩트에 기반해서, 장단점을 따져서 결정했습니다.”
차라리 과학자들이 끝장토론 했으면
―왜 대전이 됐습니까.
“고속도로에서 가깝고,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가고, 호남, 대구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전문가들이 지역을 낙점했습니다. 대통령이 국익을 생각해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가장 선호하고, 편한 곳으로요.”
S대 D교수의 말이다.
“차라리 과학자들끼리 끝장토론을 할 수 있는 장을 열었으면 합니다. 과거처럼 ‘예산을 충분히 줬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원천기술이 없느냐’, ‘우리의 과학수준이 언제 업그레이드되느냐’고 말하지 말고요. 정치인들이 판을 짜 놓고 덩그러니 과학자를 앉히는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차라리 온전하게 과학자들이 책임을 지고,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있도록 정치는 개입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과학자들이 비난을 받아도 당연하다고 느낄 것 아닙니까.”
Y대의 C교수는 “조만간 과학자들이 협회 차원에서 공청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을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과학벨트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이는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다.
충청권 광역단체장은 지난 2월 14일 한자리에 모여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대로 충청권에 과학벨트를 조성하라”고 강력한 입장을 표했다.
충청권의 시도는 ‘과학벨트 사수 공동 대응’이라는 초강수를 던지고 있다.
과학벨트 호남권 유치위원회는 조만간 정부에 유치제안서를 정식으로 제출하고, 정계와 과학계에 유치와 관련한 공청회를 열 계획이다.
과학자들이 각자 연구에 바빠 한목소리로 과학벨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표’라는 절체절명의 숙명과 이 사안이 맞닥뜨려 있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충청권 과학벨트를 제안할 때에나, 또 전면 수정을 얘기하고 있는 지금이나, 과학자들이 그 주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벨트 구축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때인 지난 2007년 10월에 충청권 공약으로 제시한 것이다. 행정도시와는 별개로 과학벨트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전의 대덕연구개발특구와 충남 연기·공주의 행정중심복합도시, 충북 오창·오송단지를 하나의 벨트형 경제권으로 묶어 ‘한국판 실리콘밸리’를 만들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정부 예산 3조5000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후 과학벨트안(案)을 세종시 수정안에 넣어 추진하다가 세종시 수정안의 실종과 함께 과학벨트는 애매한 상태가 돼 버렸다. 그게 2010년 6월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에 과학벨트안을 포함시키면서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기초과학 국책기초연구소’ 외에 삼성, 한화, 롯데 등 대기업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세종시에 신재생에너지, 그린에너지, LED 등을 개발코자 4조5000억원 이상을 투자키로 했다. ‘세종시’라고는 하지만, 이들의 투자는 엄밀히 따지면 ‘과학벨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면서, 대기업들은 세종시(정확히 말하면 과학벨트라고 볼 수 있다)에 하기로 했던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기초과학 국책연구소(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므로 국책으로 본다)도 이와 함께 어물쩡 무산되는 것으로 넘어갔다.
이어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과학벨트특별법’이 통과됐다.
이 특별법은 오는 4월 5일에 발효된다. ‘국무총리 산하에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입지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충청도의 어느 도시’에 입지를 선정한다는 식의 ‘충청권’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
이런 와중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올 초 “위원회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한 후에 결정될 것”이라며 “백년대계이니 과학자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것은 과학벨트 지역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의중’이 이렇게 확인되자 지자체들마다 과학벨트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정치권도 와글와글하다. 정치적으로 인화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총선과 대선(大選)이 있다. 무더기로 표를 움직일 수 있는 이슈다. 그래서 전남, 광주 지역의 국회의원들은 과학자들을 초청해 공청회를 열겠다고 치고 나갔다. 유치 의사를 밝힌 것이다. 대구 지역도 들썩이고 있다. 당초 후보지였던 대전시(市)는 이에 맞서 ‘원안(原案) 고수’에 사활을 걸었다.
정치판이 돼 버린 과학벨트 문제에 대한 과학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어디를 과학자들의 연구 터전으로 삼을 것이냐에 대해 막상 과학자들의 의견은 조그맣게 들린다. 제일 중요한데도 말이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에 대덕연구단지를 만들었던 정부 관료와 현역에 재직 중인 이공계 교수들, 과학벨트의 ‘잠재 연구원’들에게 물어봤다.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고, 상반되는 경우도 있었다.
‘펀딩’이 거의 불가능했던 순수과학
과학자들은 과학벨트의 설립 의도에 대해서는 다들 반겼다.
국내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뒤 미국 P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미국 S대에서 포스트닥터(이하 포닥·Post Doctor)로 지내는 A씨의 얘기다.
“정부에서 과학벨트를 조성한다고 할 때 순수과학도 입장에서 많이 반겼습니다. 국가에서 국민의 세금을 투입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니까요. 기초과학은 ‘펀딩(투자·funding)’을 받기 참 어려운 분야입니다. 펀딩을 받으면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데, 기초과학은 공대(工大)에 비해 결과가 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나마 나오면 다행이지만,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리스크가 큽니다. 그렇다 보니 펀딩에 비해 결과물이 미미하게 보일 수밖에 없고, 이런 이유 때문에 펀딩이 어려운 겁니다. 게다가 기초과학 전공자들이 갈 만한 연구소나 대학이 국내에 많지 않습니다.”
―미국은 상황이 달라서 그곳에 있는 겁니까.
“(미국에선)순수과학도들이 연구를 하고자 하면 적어도 본인이 원할 때까지는 연구할 만한 여건이 주어지죠. 생계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의 월급이 주어지고요. 하지만 국내에서는 과학자들이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할 정도였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들 얘기로는 연구만 하는 환경도 조성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한 상태에서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는 과학벨트 얘기가 논의됐기 때문에 저를 비롯해 많은 순수 과학도들의 관심이 컸습니다. 저 역시 여건이 맞는다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습니다.”
미국 D대 교수로 지내다 최근 국내 S대로 옮긴 한 교수는 “순수과학이든 공대든 상관없이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했다.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자면, 과학벨트 조성이라는 원론 자체는 과학자들에게 꽤 파워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즘의 상황을 바라보는 과학자들의 심정은 편치 않다.
Y대학 수학과의 C교수 얘기다.
갈라먹기만큼은 막아야
“어느 지역에 벨트가 조성돼야 한다는 쪽으로 얘기가 흘러가면서 다들 기본 취지를 잊었습니다. 기초과학을 탄탄히 하고, 우리가 과학 강국(强國)으로 도약한다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습니다.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꾸려 가야 성공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지역분배라는 둥, 어떤 지역으로 가야 한다는 둥의 얘기가 불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C교수의 지적은 맞지만, 어찌됐건 요즘의 관심사는 ‘어느 곳에 조성되느냐’ 하는 부분이다.
인터뷰에 응한 과학자들도 딱히 어느 곳이 적당하냐에 대해서는 각각 생각이 달랐다. 하지만 ‘갈라먹기 식(式)은 곤란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냈다.
미국 S대 포닥으로 있는 A씨의 얘기다.
“학문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기계과나 물리학과의 도움을 얻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 역시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학과의 프로젝트에 도움을 주고요. 한국의 정치권에서 지역 분배를 감안해 ‘나눠먹기’ 식의 형태가 되는 것은 절대 반대합니다. 과학벨트의 설립 목적에 반(反)하는 정책입니다. 과학 프로젝트를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이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Y대 C교수는 “과학프로젝트는 절대 정치적인 사안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를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은 대의(大義)를 생각해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벨트 도시 육성이 ‘용두사미’가 될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D씨는 미국 대학에서 생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S대 이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나라 과학계의 슬픈 점은 과학자가 발의(發議)를 하면 정치인들이 결정을 한다는 겁니다. 발의자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나중에 정치인이 짜 놓은 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숙제를 하는 꼴입니다. 연구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과학자인데 과학자들은 의사결정에서 뺍니다. 특히 ‘찢어 갖자’는 허황된 생각은 첨단의료복합단지처럼 실패로 끝날 겁니다. 솔직히 요즘 일어나는 일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르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과학벨트라는 원안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과학의 이슈는 새롭게 생기고 표류하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결론났는지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게 과학계의 현실입니다.”
―과거에 근무했던 미국의 연구원 등은 상황이 다릅니까.
“발의자의 실체가 명확합니다. 통상 업계에서 권위있는 학자나 전문가가 발의를 하면, 피어그룹(peer group·관련단체)에서 토론을 하고, 서로 서포트해서 결정합니다. 상관없는 사람들이 감 놔라 대추 놔라를 하는 식이 잘 없죠.”
인력 스카우트에 연구비 대부분을 할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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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근 전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 |
“과거와 비슷한 모습이라면 (과학벨트가) 어떻게 흘러갈지 뻔합니다. 가령 5000억원의 예산이 있다고 치면 정치인들이 결정을 해서 땅 사고 건물 짓는데 3000억원을 쓸 겁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지어 놓고 겉을 번지르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남은 돈 중 1000억원으로 실험 장비를 사고, 관련 연구소의 장들을 뽑습니다. ‘우리가 준비는 충분히 해줬으니 이제는 과학자 너희들이 잘할 차례’라면서요. 실제로 연구소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방송국의 카메라가 오지 않고 언론의 관심이 뚝 끊어지거든요. 연구소장은 남은 예산 1000억원을 들고, 텅 빈 집에 앉아서 그제야 고민하는 겁니다.”
―당신에게 권한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1000억원으로 집 지은 다음에 무엇을 할까를 고민할 겁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연구소를 가 보면 외관이 우리보다 훨씬 못합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데 뭣하러 으리으리한 건물과 넓은 부지가 필요합니까.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이 선진화되지 못한 것은 장비가 부족하거나 과학자들의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국내에서, 해외에서 선진 기법을 배웠습니다.저라면 예산 중에서 많은 부분을 인재를 리크루트하는 데 사용할 겁니다. 좋은 조건으로 좋은 사람을 데려와야 좋은 연구 결과가 나올 것 아닙니까.”
원안 후보지였던 대전과 관련해서는 여러 얘기들이 있다.
전상근(全相根) 전(前)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은 “대덕단지와의 시너지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퍼듀대 화공과를 나온 전상근 전 실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에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 과기처 종합실장 등을 맡아 오늘날의 대덕과학단지를 일군 사람이다.
전상근 전 실장의 얘기다.
대덕과학단지와 과학벨트는 출발점부터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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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연구단지 전경. 전상근 전 과기처 종합기획실장은 “대덕단지의 역할은 끝났다”고 말한다. |
―충청권에서는 대덕단지와 연계하는 것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고 합니다.
“난센스예요. 대덕단지는 미션 컴플리티드(mission completed·임무가 끝난 것)예요. 저는 대덕연구단지가 성공적인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우수한 인력을 산업계에 보급한 업적이 있습니다. 그 인력이 오늘날의 삼성, LG, 현대가 탄생하도록 했지만, 정작 대덕단지 내에서 혁혁한 연구 성과를 낸 것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연구원들이 주말이 되면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거든요. 대덕단지 내에서 365일 연구에 몰두하는 빈도가 아무래도 낮을 수밖에 없었죠. 훌륭한 인력을 배출한 것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했고, 또 앞으로도 그것이 주요 임무가 될 겁니다. 과학벨트를 대덕하고 연계해서 단지를 크게 만든다고 시너지 효과가 있을는지에 대해서는, 글쎄요.”
―호남권에서 유치하겠다고 나섰는데요.
“제 정신이 아니죠. 한국의 과학 발전은 염두에 두지 않고 제사보다 젯밥에 흥미가 있다고밖에 안 보여요. 국회의원들이야 자신의 표밭이니까 그렇게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초연해야 합니다. 국익(國益) 앞에서 정치를 논하고, 정치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죠.”
근무지가 수원이어서 미국에서 돌아온 B교수
S대 공대 교수는 “기본적인 것을 갖춘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 교수로 지내다가 한국에서 오퍼(제안)를 받았을 때 근무지가 수원이어서 더욱 끌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카이스트에서 오퍼를 받았다면 돌아왔을 것 같기는 한데, 그보다 먼 곳이었다면 아마 오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지역 편차가 큰 탓이 있지만 해외에 근무했던 교수 입장에서 볼 때 기본적인 여건이 열악한 곳이 많거든요. 가령 종합병원이나 애들 교육기관 같은 기초적인 것들이 부족한 지역은 문제입니다. 과학벨트가 외딴 곳에 위치한다면,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하는 많은 잠재 연구원들의 마음이 멀어질 겁니다.”
미국 S대 포닥으로 있는 A씨는 “대전까지는 모르겠지만 대전 이하의 지역에 과학벨트가 조성되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했다. A씨의 남편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리 과학자라고 해도 삶의 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직장 때문에 남편의 직장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대전은 대덕이라는 과학단지가 조성된 지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에 삶의 질(質)이 높다고 봅니다. 또 무리를 하면 대전에서는 출퇴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보다 먼 곳에, 더구나 새로 과학벨트를 조성한다면 다시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화학을 전공한 E씨는 미국의 I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캘리포니아 소재의 모 대학에서 포닥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부인과 다섯 살 난 딸이 한 명 있다.
E씨의 얘기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처음에 미국으로 유학을 올 때는 나중에 이곳에 남거나, 한국 대학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막상 와 보니 백인의 사회에서 마이너리티(소수)라는 느낌을 버릴 수 없는 데다 한국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습니다. 10년 이상을 한 우물을 팠고, 나름 업계에서 실력 있는 과학도라고 생각은 하지만요.”
―과학벨트가 조성되고 연구원 제안을 한다면요.
“무엇보다 위치가 중요하죠. 과학도도 사람 아닙니까. 서울은 아니더라도, 아내와 딸이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어야죠. 솔직히 미국에 남아 있는 포닥들 중에서 아이들 교육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예요.”
수도권에 과학벨트 유치해야 성공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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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스크립스연구소. |
D교수의 얘기다.
“우리 방(실험실)에 오는 애들(연구원들)이 저를 만나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도망 다녔습니다. 어떻게든 눈에 안 띄려고 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들어 보니 S대가 아니라 다른 연구실로 출근을 하라고 지시할까봐 그런다는 겁니다.”
―30분밖에 안 떨어진 곳 아닙니까.
“20, 30분 차이가 별 거 아닌 거 같지요? 실제로 한 번 해 보세요. 연구원들한테 교통비를 얹어 주고, 셔틀버스 대 주고, 화상채팅으로 회의를 하고 별 거 다 해 봤습니다. ‘과학자가 열정이 있어야지 그깟 거리를 신경쓰면 되느냐’고 읍소도 해 봤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거리 때문에 사투를 벌였습니다. 결과요? 그래도 애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덕은 성공한 것 아닙니까.
“시간이 오래됐고 자리를 잡은 것은 맞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과학벨트의 과제 중 하나가 해외에서 우수한 인력을 데려온다는 것 아닙니까? 외국 과학자를 직접 한 번 에스코트해 보세요. 인천공항에 내려서 차를 타고 기차역에 가서, KTX를 타고 대전에 가서 또 차를 타고 간다고요? 예전에 대덕에 일이 있어서 미국 과학자 한 명을 에스코트했는데 KTX 안에서 지쳤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정말 과학벨트의 성공을 바란다면 수도권에 유치를 해야 합니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과학자들에게 기대 이상의 연봉을 주고 소수정예로 연구소를 꾸려 가야 합니다.”
D교수는 샌디에이고에 있는 스크립스 연구소(Scrips Institution)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버드를 넘어서겠다’는 의도로 설립된 이 연구소는 초반에 연구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서 보스턴으로 발길을 옮기는 연구원들을 붙잡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을 유혹할 수 있어야 성공한다
전상근 전 과기처 실장의 생각도 비슷했다.
전 전 실장의 얘기다.
“과학자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 또 외국의 학자들이 살고 싶어하는 곳에 유치를 해야 합니다. 수도권이죠. 따지고 보면 과학자들이 가장 많은 곳이 서울입니다. 대덕단지와 연계해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수많은 브레인들을 활용해야죠. 밤늦게까지 연구하고, 집에 한 시간이면 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수도권이 아니면, 적어도 일일 출퇴근이 가능한 수도권 부근에 만들어야 합니다.”
―부지가 많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기초과학 아닙니까? 100만평씩 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연구소 부지의 면적이나 건물에 신경을 쓰면 안 됩니다. 얼마나 머리 좋은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느냐가 제일 중요하죠. 우리가 말하는 ‘원천기술’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자들 머릿속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머리를 사 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과학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지역, 그들이 원하는 대우를 해 줘야 합니다. 호남권이나 경남에 유치되면 취직이 되지 않는 과학자들이나 몇 명 가겠지요. 브레인(brain)들이 왜 가겠습니까? 브레인들을 유혹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지 않고서는, 왜 사람들이 모이지 않느냐고 얘기할 겁니까?”
미국 S대에서 포닥 중인 A씨에게 ‘수도권에 과학벨트가 생기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A씨는 “미국에 남아 있는 연구원들이 한국에 더 돌아가고 싶어할 것 같다”고 답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포닥 중인 E씨는 “연구원직을 오퍼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가) 최선을 다할 것 같다”고 했다.
전상근 전 과기처 실장은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대덕을 만들 때에 건설부에서 대덕, 청주, 화성을 추천했습니다. 도시계획을 전공한 김형만 박사가 입지 조건을 살펴서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발표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대덕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고 결정했습니다. 마침 국무총리 김종필씨가 충청 출신이니 만장일치로 결정이 됐지요. 하지만 그 결정은 정치적인 이유로 한 것이 아닙니다. 팩트에 기반해서, 장단점을 따져서 결정했습니다.”
차라리 과학자들이 끝장토론 했으면
―왜 대전이 됐습니까.
“고속도로에서 가깝고,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가고, 호남, 대구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전문가들이 지역을 낙점했습니다. 대통령이 국익을 생각해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가장 선호하고, 편한 곳으로요.”
S대 D교수의 말이다.
“차라리 과학자들끼리 끝장토론을 할 수 있는 장을 열었으면 합니다. 과거처럼 ‘예산을 충분히 줬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원천기술이 없느냐’, ‘우리의 과학수준이 언제 업그레이드되느냐’고 말하지 말고요. 정치인들이 판을 짜 놓고 덩그러니 과학자를 앉히는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차라리 온전하게 과학자들이 책임을 지고,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있도록 정치는 개입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과학자들이 비난을 받아도 당연하다고 느낄 것 아닙니까.”
Y대의 C교수는 “조만간 과학자들이 협회 차원에서 공청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을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과학벨트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이는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다.
충청권 광역단체장은 지난 2월 14일 한자리에 모여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대로 충청권에 과학벨트를 조성하라”고 강력한 입장을 표했다.
충청권의 시도는 ‘과학벨트 사수 공동 대응’이라는 초강수를 던지고 있다.
과학벨트 호남권 유치위원회는 조만간 정부에 유치제안서를 정식으로 제출하고, 정계와 과학계에 유치와 관련한 공청회를 열 계획이다.
과학자들이 각자 연구에 바빠 한목소리로 과학벨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표’라는 절체절명의 숙명과 이 사안이 맞닥뜨려 있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충청권 과학벨트를 제안할 때에나, 또 전면 수정을 얘기하고 있는 지금이나, 과학자들이 그 주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