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산업전사로 땀을 흘렸습니다. 나보다는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더니 남은 것은 나빠진 건강과 주름밖에 없습니다.”
⊙ 대개가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팔목과 어깨가 아픈 나이
⊙ 독일과 미국, 캐나다 등지에 정착한 派獨광부들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
⊙ “독일 2세들의 80% 이상이 고등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고통과 희생을 저버리지
않았다”
⊙ 귀국한 파독광부들의 돈은 부모의 생계비나 병원비, 형제들의 학비, 자녀의 학비 등으로 지출.
결국 3년 계약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재산은 아무것도 없어
⊙ 파독광부협회, 근대화를 위해 희생한 광부들을 위한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목표
⊙ 대개가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팔목과 어깨가 아픈 나이
⊙ 독일과 미국, 캐나다 등지에 정착한 派獨광부들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
⊙ “독일 2세들의 80% 이상이 고등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고통과 희생을 저버리지
않았다”
⊙ 귀국한 파독광부들의 돈은 부모의 생계비나 병원비, 형제들의 학비, 자녀의 학비 등으로 지출.
결국 3년 계약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재산은 아무것도 없어
⊙ 파독광부협회, 근대화를 위해 희생한 광부들을 위한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목표
- 파독광부들은 자기 몸 하나 혹사시키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악착같은 소망으로 고된 광산노동을 이겨냈다.
“아무리 광부들이 시멘트 골격을 가졌다 해도 시간의 힘에 당하진 못한다. 그땐 두려움에 술을 마시기도 했다.”
“방진 마스크를 써도 높은 지열과 중노동으로 숨이 차 벗어 버리는 수가 더 많았다.”
“우리 광부들은 채탄 막장을 지옥 일 번지라거나 지옥의 입구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가 취재과정에서 만난 3명의 파독(派獨) 광부 출신 노인들은 이름이 없었다. “자식들에게 전직 광부였다는 사실을 여태 숨기고 있다”고 했다. 숨이 끊길 때까지 평생 숨길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기억 속에 탄(炭)은 ‘순금의 기억’이다. 더 많은 탄을 캐기 위해 위험표지가 붙은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탄층에 발이 빠지기도 했고 동료가 탄 더미에 깔려 죽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지옥이었다.
1963년 12월 21일부터 1977년 12월 25일까지 7968명의 한국인 젊은이가 독일에 갔다. 자기 몸 하나 혹사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악착같은 소망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47년이 흘렀다. 그들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진·규폐 상흔에다 언제 탄더미에 깔려 죽을지 모르는, ‘사람 잡는’ 탄광노동을 견뎌낸 이들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파독광부로 일하다 미국으로 이민 가 미국과학기술원 화공학회 회장이 된 이성재(72·샌프란시스코 한국문인협회 회장)씨는 ‘서시(序詩)-라인강변에 피운 한강의 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게 라인강의 기적을 보여준 독일 / 광산에서 병원에서 젊음을 불태우며 / 한강의 기적을 꿈꾸었고 / 서울의 희망을 키워왔었다. / 꿈과 희망의 열매를 한 줌도 / 남김없이 조국으로 보내면 / 네가 보내준 기다리던 그 소식 /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가 뚫리고 /공장 굴뚝에는 밤낮없이 연기가 난다고…. (이하 생략)>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살아
7900여 명의 파독광부들의 현재 거주지는 일부만 파악된다.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이하 파독광부협회)에 따르면 3년간의 광산노동(韓獨 정부 간 노동계약 기간이 3년이었다)을 마친 뒤 귀국하지 않고 독일과 유럽에 정착한 이가 1000여 명에 이르고 캐나다와 미국, 호주 등지로 이민을 떠난 이가 각각 500명, 800명, 50명에 이른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추정치다. 또 한국으로 돌아온 이는 2000~3000명 가량으로 파악된다. 이들 중 현재 파독광부협회와 연락이 닿는 이는 고작 400명 정도. 나머지는 소식을 알 수 없다. 대개가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나이다. 2009년 발간된 <파독광부 백서> 집필에 참여한 한국교원대 권이종(權彛鍾·70)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7900여 명 모두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뤘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백서 집필 과정에서 만난 이들 중에 익명을 원하는 분들이 상당수였습니다. 몇몇은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독 경험담을 (백서에) ‘무명인’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독광부가 숨기고 싶은 평생의 멍에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까짓 몇 년 죽도록 고생하지 하는 ‘정직한’ 희생까지 그들의 침묵을 덮을 순 없다.
파독광부협회에 따르면, 광부 중에 대학교수가 된 이가 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권이종 명예교수와 청주대 토목환경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권광수(權光秀·67)씨가 대표적이다. 전북 장수가 고향인 권이종 교수는 1964년부터 3년간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일하다 독일 국립 사범대인 아헨교원대에 진학했다. 유일한 외국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수업이 없는 시간은 벨기에 군대 PX로 달려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남들이 4년 다니는 학사학위를 6년 만에 겨우 마쳤으나 결국은 교육학 박사학위까지 거머쥐고 귀국했다. 그는 한국교원대 교수로 재직하며 차관급 자리인 한국청소년개발원장까지 올랐고 국내 청소년 교육과 평생교육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파독광부 중 귀국하지 않고 독일에 눌러앉은 경우도 많았다. 원래는 파독기간 3년이 지나면 귀국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예외가 인정됐다. 능력을 인정받아 광산의 정식직원이 되거나 파독 간호사와 결혼하면 독일에 남을 수 있었다.
이정의씨는 1964년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다 광산 간부인 슈타이거(steiger·일종의 ‘작업감독’. 마이스터·meister로 불리는 ‘지하 장’보다 서열이 위다.)가 되기 위해 광산전문학교 3년 과정을 마쳤다. 또 베를린 공대에서 광산학 석사를 딴 뒤 독일 루르 광산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퇴임 후 보쿰 루르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히브리어 사전을 번역, 국내 최초 출간했다. 그의 말이다.
“딸이 신학을 공부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 흥미있어 보였습니다. 천길 땅속에서 땅 귀신을 여럿 만났으니 이번에는 하늘나라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 가까이에 있는 보쿰시(市)의 루르대 신학과에 입학했죠. 내 딸의 후배가 된 셈입니다. 고전어, 즉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익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하던 말을 읽고 배우니 참 신기했습니다. 한마디를 하면 하느님께서 통역 없이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히브리어를 배울 때 유학 온 젊은 목사들이 한국에는 아직 쓸 만한 히브리어 사전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일을 시키시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재산은 남은 게 없다”
많은 파독광부 출신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독일 땅에서 동양식품업체를 경영하거나 캐나다와 미국에서 화훼업과 숙박업으로 성공한 이, 독일에서 신학대학을 나와 현지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1967년 무렵, 파독광부 중에 간첩활동을 한다는 소문이 나돈 일이 있다. 월남전 참전 장교인 재미 대한태권도협회 김광웅 회장이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 파견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파견업무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간 뒤 진짜 파독광부가 되어 다시 독일로 갔다. 파독 간호사와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태권도 사범으로 이름을 날렸다. 젊은 시절, 남아프리카에서 대통령 경호요원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경험을 살렸다고 한다. 광부출신 김태현 재독 한인태권도협회장이 쓴 글에는 ‘유럽과 독일에 태권도가 처음 시작된 계기는 1963년 12월 파독광부에 의해서였다. 광부들이 사는 지역에 독일인을 모아 놓고 태권도를 가르치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탄을 캐는 광부들이 한국의 태권도를 유럽과 미국에 심은 셈이다.
파독광부협회에 따르면, 미국, 캐나다 등 북미지역에 정착한 광부출신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고 독일에 잔류한 이들도 어려움 없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으로 귀국한 이들은 대부분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당시 파독광부들은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고된 막장에서 일하던 광부는 많게는 한 달에 500~1000마르크(당시 1마르크에 60원가량) 이상을 벌었다. 이 액수는 그 시절 5급 공무원 한 달 봉급이 360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고 고액연봉자였던 은행원의 1년 연봉과 맞먹었다. 그러니 파독광부 모집에 구름같이 지원자가 몰렸다.
권이종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힘들게 벌었는데 왜 지금은 돈이 없을까. 이유는 간단하죠. 북미나 독일에 잔류한 광부들은 목돈을 마련해 그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지만 귀국한 이들은 임금을 고국에 있는 부모의 생계비나 병원비, 형제들의 학비, 자녀의 학비 등으로 썼습니다. 결국 3년 계약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많은 돈을 송금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산은 남은 게 없었다는 얘기죠.”
기자는 파독광부협회의 도움으로 광부들의 근황을 수소문해 보았다.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인 그들을 만나 아직도 식지 않은 ‘광부의 노래’를 들었다.
“식민지 종놈이 왔다”
경북 영주 출신의 장삼택(73·張三澤)씨는 1966년 7월 독일로 갔다. 함본 광산에 도착하니 일본인 광부들이 많았다. 그들 중 독일에 온 지 12년째 된다는 이도 있었다. 일본인 한 광부가 “식민지 종놈이 왔다”고 하기에 설움이 북받쳤다고 한다.
덩치가 크고 일을 잘해서인지 당시 1000명의 광부 가운데 일 잘하는 7명에 발탁됐다. 제일 깊숙한 막장에서 도급단가로 일했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종일 탄더미 안에서 시간을 보냈더니 월 1000마르크 이상을 손에 쥐게 됐다. 한번은 독일인 슈타이거가 “하루에 370원씩 더 주겠다. 동료에게 절대 알리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더란다. 그만큼 슈타이거의 신임이 두터웠다.
어느 날 작업 도중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다리가 트윈침대 크기만한 돌에 깔려 있었다. 독일인 동료 광부가 대뜸 “다리부터 잘라야 한다”고 했다. 곁에 있던 한국인 동료가 울부짖으며 “죽는 것도 억울한데 발은 왜 자르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 무거운 돌을 다 치우고 12시간 만에 병원으로 이송됐을 때만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의 말이다.
“기적이었죠. 천장이 무너지면서 두 다리 사이로 굴러온 단단한 ‘알 돌(지름 25cm쯤 되는 둥근 돌)’이 그 큰 돌덩이를 지탱했습니다. 알 돌이 아니었다면 두 다리는 쓰지 못했을 겁니다. 들것에 실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곧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 원장이 진료하더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8개월 동안 손발 묶인 채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1969년 12월 귀국할 당시만 해도 살아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데다 꼬박꼬박 아내에게 송금한 돈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고향인 경북 영주에 내려가니 은행통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처가식구들이 다 빼내 간 것이다.
“아내가 처남에게 통장을 맡겼더니 다 찾아 쓴 것입니다. 남의집 살던 처가식구들이 막장에서 목숨과 맞바꾼 돈으로 집 사고, 땅 사고, 과수원 사고,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살더군요. 오죽하면 내가 자살하려 했겠습니까. 이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씨가 귀국해 건진 것은 고작 논 몇 마지기밖에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남겨진 아이 다섯을 부양해야 했다. 할 수 없이 중동의 건설잡부로 요르단과 쿠웨이트, 싱가포르 등지에서 평생을 일했다.
“중동에서 번 돈은 독일의 10분의 1이 안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덜컥 이혼은 해버렸지, 돈은 없지, 당장 아이들 학비가 급선무였죠. 재혼을 하면 더 고생할 것 같아 다 잊어버리려고 중동에 간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들 다 출가시키고 혼자 삽니다.”
정대호(鄭大鎬·71)씨는 1973년 11월 독일 겔센키르헨 광산에 도착한 지 1주일도 안돼 막장에서 동료가 죽는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봤다고 한다. 당장 귀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독일인 작업반장에게 “막장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막장에서 캐낸 탄을 이송하는 일을 맡게 됐다. 주로 자정부터 오전 10시에 퇴근하는 야간작업이 주어졌다. 일은 위험하지 않았으나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꾀를 내었다. 이발기기를 사서 동료 광부들의 머리를 잘라 주고 용돈을 벌었다. “처음에는 그냥 깎아 줬는데, 주위에서 3마르크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하더란다. 그래도 집에 송금하는 돈이 남들보다 적었다. 할 수 없이 독일인 공동묘지에 나가 풀을 뽑고 꽃을 옮겨 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누구보다 시간을 아껴 썼다.
그는 3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 캐나다 이민을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많은 파독광부가 캐나다와 미국 광산에 이민을 갔었다. 이민 브로커에게 300마르크까지 준 상태였다. 그러나 한국에 있던 아내에게서 ‘귀국하라’는 전보가 득달같이 왔다. “당시 아이가 사고를 당해 아빠를 무척 찾았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가족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결국 1976년 11월 귀국길에 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족이 먼저입니다. 캐나다에 갔다면 지금보다 윤택하게 살았겠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독일에서 돌아와 이듬해 1년간 사우디아라비아에 전기공으로 다녀온 뒤 기능직 공무원으로 정년을 마쳤습니다.”
독일에서 중동으로
이응희(李應熙·72)씨는 1972년 12월부터 3년간 독일 캄프디트 포드 광산에서 일했다. “믿는 건 몸뚱이 하나, 몇 년 고생하면 목돈을 쥘 수 있다는 믿음밖에 없었다”고 했다. 악착같이 일한 덕에 귀국할 무렵, 제법 큰돈을 손에 쥐었다. 고향에 돌아와 농기계 수리소를 열었다. 수리공을 5명이나 채용할 정도로 크게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농기계 수리제작 허가증’도 없이 사업에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브로커에게 속아 허가증을 50만원에 샀지만, 타인에게 허가증을 양도하거나 팔 수 없다는 규정을 몰랐다. 결국 사업 시작 3일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그나마 경찰관이던 친척의 도움으로 폐업은 막았으나 이번에는 중고 원동기를 구매한 것이 장물로 드러나 결국 사업을 접었다.
“폐광에서 50마력짜리 중고 원동기를 싸게 사서, 고쳐 되팔려 했습니다. 장물아비에게 속은 셈입니다. 결국 독일에서 번 돈 다 잃고 빚만 100만원 지게 됐죠. 세상이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습니다.”
가진 돈 다 날렸지만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할 수 없이 해외 건설현장에 레미콘 기사로 다시 출국했다. 사우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괌 등지에서 일했다. 싱가포르의 상징인 ‘래플즈시티’ 건설에 직접 참여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쌍용건설이 지은 싱가포르 래플즈시티는 1980년 당시 ‘콘크리트 24시간 연속타설’의 기록을 수립, 그해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등 한국의 동남아 해외건설의 역사다.
“젊은 시절, 산업전사로 땀을 흘렸습니다. 나보다는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더니 남은 것은 나빠진 건강과 주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 손으로, 한국인의 기술로 해외에 세운 높은 건물과 튼튼한 교량을 생각하면 뿌듯합니다.”
1973년 5월부터 76년 5월까지 독일 딘스라겐 광산에서 일했다는 이동백(李東伯·66)씨 역시 귀국 후 사우디, 바레인, 카타르 등 중동에서만 12년간 일했다. “원체 광산에서 사고가 잦은 데다 광부 일을 오래 하면 죽을병에 걸린다는 공포가 싫어 귀국 후에는 광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장보다는 사막의 전갈과 모랫바람이 오히려 견딜 만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지만 살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스스로에게나 남들에게 애국자라고 말한다. 달러를 벌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했다.
김기환(金基煥·66)씨는 1973년 10월부터 3년간 레그린하우젠 광산에서 일했다. 귀국한 뒤 목돈을 털어 장사를 시작했지만, 요령을 몰라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동네 수퍼도 하고 장사를 여러 번 했지만 잘 안되더군요. 바닥부터 차곡차곡 다져야 하는데 덮어놓고 돈 갖고 밀어붙이니 결국 안되더라고요. 독일에서 번 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결국 손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주위에 독일 갔다 온 사람이 여럿 있는데 몇 사람 빼고 잘 안 풀렸습니다. 왜 그런지 몰라….”
김충규(金?圭·71)씨는 1973년 겔센키르헨 광산에서 일하다 76년 귀국해서 영주 부석사 근방에 땅을 사서 지금껏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 그나마 제일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주위에서 광부로 다시 일하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안 갔다”고 한다. 그와 같이 독일에 간 동료 중에는 귀국 후 강원도 태백, 장성 등지에서 다시 광부로 일하다 결국 진·규폐로 몸져 눕게 된 이가 여럿 된다고 한다.
파독광부 출신 권이종 교수는 “‘한강의 기적’의 출발점인 광부 파독과 그들의 피땀 어린 송금은 1960~70년대 한국의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값어치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물가상승의 영향으로 상대적 실질임금이 하락해 ‘보이지 않는’ 손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상당수 광산 노동자들이 돈을 모아 국내에 집을 사려고 했지만 빠르게 오르는 물가와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인해 오히려 임금하락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손창헌(孫昌憲·73)씨는 1970년 12월부터 3년간 독일 함본 광산에서 일했다. 독일로 가기 전 강원산업에서 광부로 일한 경험이 있다. 막장에서 속옷 바람으로 일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지열이 40도에 달했기 때문이다.
1972년 9월 뮌헨 올림픽에 광부, 간호사들 모두가 의무적으로 올림픽 응원에 참여했다. 그 역시 배구장에서 열심히 응원했다. 하지만 피로 탓인지 이튿날 막장에서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아직도 다리가 불편하다.
“어린 시절,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 보자는 각오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운 것이 없었죠. 사실 일부 파독광부 중에는 뒷돈을 주고 온 이가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막장 일은 하지 않고 쉬운 일만 한 이도 있었지만 나는 달랐습니다.”
그는 생활비를 뺀 월급을 꼬박꼬박 부쳐 42개월이 지나 800여 만원을 모았다. 당시 30평형 단독주택 한 채가 80만원 할 때였다고 한다. 귀국 후 임대업과 여관업을 하며 자식을 키웠다.
파독광부가 내 인생을 바꿨다
전직 경기도의원 신광식(申光湜·68)씨는 1971년 파독광부로 떠나기 직전 인천의 가구공장 막일꾼, 트럭 운전사의 조수로 일했다. 우연히 신문에 독일광부 모집 기사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이튿날 서울 동교동에 있던 해외개발공사를 찾아갔다. 결국, 파독광부로 발탁돼 1971년 5월부터 3년간 지하 1000m 컴컴한 막장에서 탄을 캤다. “지열과 지압, 가스, 탄가루, 분진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한다.
작업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피곤에 절어 쓰러져 자는 일이 계속됐다.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아리랑을 소리 높여 불렀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선 독일인의 부유함과 자유, 그리고 윤택한 생활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1974년 말 귀국해 김포시 통진면 가현리에다 논과 밭 1만평을 구입, 농사일을 시작했다. 마을 이장으로 8년간 봉사한 것이 계기가 돼 1991년 김포군의원(지금은 김포시의회)에 출마했다. “독일처럼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위정자가 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만 낙선하고 말았다. 절치부심, 95년 재출마해 내리 3선을 하고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했다. 내친 김에 2006년 경기도의원에 당선됐다. 지역 언론사로부터 2회에 걸쳐 의정대상을 받았고 대통령표창도 받았다고 한다.
“유년시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열아홉 되던 해, 동인천역에 처음 내렸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시장을 전전하며 ‘밥만 먹여 주시면 일을 해 드린다’고 해도 누구도 반겨 주는 이가 없더라고요. 큰 가게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니 며칠 있어 보라고 해서 눌러앉았습니다. 잡화상과 청과물 상회 점원, 쌀가게 배달부, 청소부로 살았습니다. 파독광부가 되면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한독(韓獨) 합자회사인 대성-헨켈㈜의 초대 대표인 염수용(廉洙庸·73)씨도 파독광부 출신이다. 1964년 성균관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서울시가 운영하던 서울청과㈜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광부가 된 케이스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파독광부 모집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부모와 형제들이 ‘죽으러 가느냐’고 말렸다.
1965년 독일 딘스라겐 지역 로흐베르그 광산에서 일하면서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슈타이거가 됐다. 슈타이거는 독일 광부들의 존경을 받는 자리다. 한국인 출신 슈타이거는 전체 7968명의 파독광부 가운데 5명 안팎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만큼 독일인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워야 한다.
“독일 광부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의 지시를 받으니 불만이 많았죠. 일부는 내 명령에 반항하고 대드는 이도 있었습니다.”
보통 독일광산은 수갱(竪坑·일종의 지하 엘리베이터)을 타고 지하 1000m 이상을 내려가서 작업이 이뤄진다. 고되고 위험한 만큼 스타이거와 마이스터의 지시와 명령을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 그래서 스타이거는 ‘지하의 영주’라 불린다.
“외국인에게 배타심이 많은 이들을 내가 직접 데리고 다녔습니다. 솔선해서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싫어하면 너도 광산학교에 다녀 스타이거가 되라’고 했습니다. 몇몇은 화가 난다며 망치를 내던진 이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했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한국인, ‘지하의 영주’가 되다
결국 독일 광부들이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주로 광부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일이 맡겨졌고 나중에는 안전담당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1984년 해외 성실 근무자로 노동부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그러다 독일의 한 화학회사에 재취업, 1989년 한독 합자회사의 대표로 귀국했다.
“인생이 반복된다 해도 다시 독일에 가겠습니다. 독일인에게 부지런히 움직이고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나 역시 광부 시절,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4시에 일어납니다. 아이들에게 ‘자려면 앉아서 자라’고 가르쳤습니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시간이 많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것은 죽는 연습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자더라도 책상에 앉아 자라고 가르쳤고 나 역시 그렇게 살았습니다. 파독 간호사와 결혼해 딸을 하나 뒀는데, 딸이 이번에 독일 대학교수가 됐습니다.”
파독광부협회 회장인 신영필름 김태우(金泰雨·70) 대표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다니다 3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출국, 광부가 됐다. 1964년 12월의 일이다. 평생 곡괭이 한번 잡지 않은 ‘곱게 자란’ 대학생이었지만 살기 위해 막장에 들어섰다. 광부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았다. 남들보다 봉급이 배 이상 많아 1000마르크가 넘었지만 ‘왕소금처럼 절약’하며 살았다. 덕분에 성실한 광부에게 특전으로 주는 직업학교 교육을 받고 ‘광산전문기술자격증(hauer brief)’을 땄다.
그에게 1964년 12월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독일에 온 것이다. 박 대통령의 “나는 조국 근대화를 이룰 터이니 여러분은 건강하게 일하고 귀국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일꾼이 되자”는 연설을 듣고 그간의 고됨을 다 잊었다고 한다.
“그 시절,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았다고 생각한들 산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불평하거나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동이 끝나는 매일 저녁, 오늘 죽지 않고 산 것에 감사했습니다.”
우연히 귀국을 며칠 앞두고 <철이 살아 숨 쉰다>는 다큐멘터리 기록영화를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영화를 촬영하는 기술자가 되리라 결심하고 곧바로 촬영기기와 기법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브랜드였던 아리플렉스(ARRIFLEX) 35mm 촬영기와 칼자이스(Carlzeiss) 렌즈를 3년간 번 돈 탈탈 털어 2만 마르크에 샀다. 촬영기법을 6개월 동안 배운 뒤 1968년 4월 귀국했다. 물론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최신 장비여서 유명 영화감독들의 촬영요청이 적지 않았다. 신상옥(申相玉) 감독과 충무로 영화사에서 계약을 맺을 정도였다.
그러나 제작에 참여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귀국 1년 만에 사무실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촬영기기는 건질 수 있었다. 서울의 변두리 여관방에 사업자등록증을 걸어 놓고 다시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산림청이 의뢰한 <산을 푸르게>라는 계몽영화를 제작한 것이 의외의 반응을 얻었다. 이후 다큐멘터리 기록물 제작에 뛰어들어 원자력발전소 건설, 경부고속도로 개통, 서울대학교 이전, 포항 영일지구 사방사업, 대전엑스포 70mm 영화 등을 제작했다. 1993년에는 영상산업 발전공로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국가홍보물 제작물량이 줄면서 영화제작에 참여한 그는 대박을 터뜨린 <실미도> <집으로> <왕의 남자> <추격자> <우생순> <이끼> 같은 영화를 직접 촬영했다. 현재는 촬영장비 전문회사로 특화됐다.
김 대표는 ‘크니쇠너(kniesch쮤ner)’로 불리는 고무로 된 무릎보호대를 잊을 수 없다. 막장에 들어갈 때는 전기 램프, 장화, 물통과 함께 크니쇠너를 반드시 챙겼다. “이 4가지는 필수품이다. 이것 없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배당량의 석탄을 캐어 실어 낼 수 없다”고 한다.
“지하 1000m 막장 지열이 35도를 넘나들고 지상에서 내려오는 공기는 찜통 같은 더위와 돌가루, 석탄가루로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채탄기계, 무너지는 돌 소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크니쇠너’ 없이는 1분도 일할 수 없습니다. 막장 천장을 받치는 쇠기둥(stempel)을 세울 때나 해체할 때, 온 힘을 무릎에 모아 작업합니다. 그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했습니다. 고된 노동을 이겨내며 오직 이 상황을 이겨내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니쇠너가 아니었다면 이런 결심도 무너졌을 것입니다. 내 무릎도 부서졌을 것입니다.”
광부들의 월급 송금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은 생활비를 떼어내고 임금의 상당액을 한국으로 송금했다. 송금한 외화는 국민가계 및 외화획득에 기여한 것은 당연하다. 1964년 말에 갔던 제1진 광부 235명으로부터 44만8000마르크(11만2000달러)가 처음 송금된 것을 시작으로 1966년 말까지 총 2318명(함본 광산 768명, 에슈바일러 광산 848명, 클뢰크너 광산 276명, 에센 광산 426명)의 광부와 간호사 등으로부터 모두 1255만2000마르크(313만8000달러)가 송금됐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광부를 포함한 독일 파견 근로자들의 송금액은 <표2>와 같다. <표2>에서 광부와 간호사의 파독 초기 3년간의 송금액을 보면 1964년 11만2000달러가 처음 송금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273만4000달러, 1966년 477만9000달러였다. 이를 GNP와 비교해 보면, 1964년 GNP 총액 29억 달러 대비 0.003%, 1965년은 0.09% (GNP 30억 달러), 1966년 0.12%(37억 달러)였다.
파독광부협회 김태우 회장은 “광부를 포함한 독일 파견 노동자들의 외화송금은 1960년대 당시 경제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단 1달러의 외화도 귀중했던 한국 경제상황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 광부들이 독일로 파견된 1960년대 한국의 경제지표는 1인당 GNP 87달러. 당시 한국은행 외화보유 잔고는 2300만 달러, 연간 물가상승률 42%, 실업률 23%, 민간저축률 3%대의 후진국 경제규모를 면치 못하던 시절이었다.
파독광부의 송금이 결과적으로 가계의 소비와 저축을 늘리고 산업생산을 파급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권이종 교수는 “광부와 간호사들은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 홀로 독일에 보내진 경우가 많았고, 이들 대부분이 생활에 필요한 최소 비용을 제외하고 월급의 대부분을 송금, 가계 및 국민소득 향상에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파독광부의 가장 큰 의의는 국내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가계저축의 증가는 투자증대로 이어져 산업생산 능력을 확대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독일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해외건설에 뛰어들어 중동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로 진출하는 데 파독광부들이 밑거름 역할을 했다.
독일 거주 파독광부 2세의 성공
파독광부들의 학력은 지역에 따라, 파독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개가 고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국사 필기시험에 대비한 예상문제집이 나돌 정도였다. 심지어 대졸자도 여럿 됐는데, ‘손이 고운’ 대졸 응시자들은 면접장에 나오기에 앞서 연탄에 손을 비벼 검고 투박한 손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업자가 250만명이나 되고 고학력 실업자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이 자녀교육에 열성적인 것은 당연했다. 막장에서 캔 돈을 자녀에게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 결과, 독일에 정착한 광부 2세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국내 파독광부 2세들의 행적에 대해선 거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주독한국대사관과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에 의하면,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는 2002년 기준 약 2만9200명에 이른다. 이는 유럽 전체 동포의 3분의 1 수준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독일인 수도 1000명이 넘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미국인 다음으로 많다.
1964년 파독광부로 일하다 독일에 정착, 2002년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마을’에 영구귀국한 조용길(曺容吉·75)씨는 “독일 2세들의 80% 이상이 고등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고통과 희생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개 어머니가 간호사인 2세들이 많죠. 자연히 자녀는 의사를 꿈꾸는 식으로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또 외국인으로서 받는 차별을 이겨내기 위해 경찰이나 판·검사가 된 이도 있습니다. 부모들의 고생과 땀을 자녀가 잊지 않은 까닭이죠.”
파독광부협회에 따르면, 독일에서 법대를 졸업한 2세들 상당수가 판·검사로 활약하고 있고, 의대를 나와 분야별 병원에서 근무하거나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이들도 대단히 많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를 20명이나 배출한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2세가 있고, 미국 모건스탠리 그룹에 입사해 세계 금융리더를 꿈꾸는 이도 있다.
이밖에 독일 WDR 방송사에서 대중음악 저널리스트로 활약한 이, 컴퓨터와 IT분야를 공부해 실어증과 전신마비로 고통받는 환자가 컴퓨터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이도 한국인 2세들이다. 파독광부협회 관계자의 말이다.
“이방인으로 억울함을 견뎌야 했던 부모세대를 돕기 위해 경찰이 된 2세도 있습니다. 노란 피부색과 다른, 까만 머리와 눈동자 탓에 좌절을 겪고, 차별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갈등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살아온 부모를 모델로 삼아 잘 자라나 이제 독일 한인사회의 자부심이 되고 있습니다.”
광부들의 마지막 소원
파독광부들은 이제 역사의 뒷자리에 물러서 있다. 팔목과 어깨가 아픈 나이다. 초로의 문턱을 넘어 삽시간에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무력해졌다. 돌무덤에 들어가 곡괭이로 탄을 캐던 시절이 아득하기만 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독일 광산촌을 찾았을 때 이런 약속을 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국가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국가에서 베풀어 줄 수 있는 혜택을 최대한으로 베풀어 주겠습니다.”
권이종 교수는 “40년이 지난 지금 뒤돌아보니 독일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광부들에게 정부가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동료 광부들이 정부의 혜택이나 도움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한 경우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파독협회 김태우 회장은 “광부들의 땀이 조국 근대화를 이루는 불씨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점을 국민이 기억할 수 있게 ‘파독광부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광부들의 염원”이라며 “세계에 흩어진 파독광부와 그 후손들이 모국을 찾았을 때 쉬어 갈 수 있도록 작은 유스호스텔 규모의 숙박시설 조성도 목표”라고 말했다.
파독광부 출신 정대호씨는 “파독광부의 인력송출을 담보로 당시 정부가 독일로부터 돈을 빌려 경제발전을 이룬 게 사실이라면, 어찌 보면 파독광부들은 ‘인간 담보물’이 아니겠느냐”며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된 광부들의 희생과 땀을 작게나마 연금형식으로 보상받는 게 마땅하다”고 했다.⊙
[인터뷰] 독일인 하크 박사가 말하는 파독광부와 간호사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고학력에 독일정부가 깜짝 놀랐다”
독일의 정형외과 의사인 하크(Volker Haack) 박사는 파독 간호사였던 한국인 아내와 결혼했다. 그 아내는 파독광부였던 한국교원대 권이종 명예교수의 사촌 처형이다. 또 권 교수의 아내 백정신 여사 역시 파독 간호사 출신이다. 네 사람 다 독일이 맺어준 인연인 셈이다. 최근 방한(訪韓)한 하크 박사는 국내 곳곳을 찾아 한국의 늦가을 정취와 경제발전상을 둘러보았다.
권 교수의 아헨교원대 박사과정 시절, 하크 박사는 병원 일을 마친 뒤 그의 학위논문 교정을 꼼꼼히 도와주었고, 늘 같이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1960~70년대 그의 눈에 비친 파독광부는 어떤 모습일까. 하크 박사는 “당시 독일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부족한 부분은 외국인의 손을 빌려야 했다”며 “여기다 철강산업의 발전은 화석에너지, 즉 석탄수요의 급증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독일은 자동차, 선박, 군수산업이 발전하면서 철강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이 됐고 덩달아 석탄수요도 늘어나게 됐어요. 문제는 독일인이 하기 싫은 업종 중의 하나가 광산노동이었다는 점입니다. 고되고 힘든, 탄을 캐는 일을 누가 할 것이며 어디서 일 잘하는 광부들을 데려오느냐가 큰 고민거리였지요. 한국인은 예의바르고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독일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어요. 게다가 고용주에게 반발, 노조를 결성하거나 파업을 하는 경우도 없었지요. 한국인은 오직 일만 했습니다.”
독일정부는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심지어 일본에서도 노동자를 데려왔다. 이들은 광산뿐만 아니라 방직공장 등 제조업 현장에 투입됐다. 그 수는 1960년대 당시 대략 10만명 선인 것으로 파악된다. 하크 박사는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비교해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의 교육수준이 매우 높았다”며 “이런 고학력 현상은 독일정부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달리 한국인은 독일사회에 빨리 적응하고 동화하려 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어요. 다른 외국인처럼 끼리끼리 모여 살며 독일사회와 담을 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부 외국인은 불성실하게 일하다 해고당해 실업급여를 타려 했지만 한국인 중에선 실업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일해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월급을 보내 주려 했지요.”
―파독광부 중 독일에 귀화한 한국인은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정착한 파독광부의 경우 독일인 광부와 비교해 광산노동 경력이 적어 사실 연금이 많지 않아요. 다만 간호사인 아내와 결혼한 이들은 부부가 함께 연금을 받아 넉넉하진 않지만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어요. 또 텃밭에서 채소도 키우고 부지런해서 어딜 가든 환영받지요.”
독일 사회에서 한인 2세들의 활약을 하크 박사는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로 설명했다. 또한 한인 2세들이 부모들의 고된 노동과 희생을 아는 탓이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독일 가정은 90% 이상 잘삽니다. 또 한국인끼리 사는 가정도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어요. 독일인이 생각하기에 한국인 여성들은 자녀에 대해 유난히 정열적이고 교육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습니다.”
―파독광부들이 번 돈으로 부모나 친척의 생계비나 병원비, 형제와 자녀들의 학비에 모두 써 버려, 정작 남은 재산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최근 독일 <슈피겔>지에 파독 터키인 이야기가 실렸어요. 터키 출신 노동자들이 독일에서 3~4년 힘들게 일해 번 돈을 자국에 보냈지만 정작 귀국하면 아무 것도 없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한국인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해요. 독일인의 사고방식으로 얘기하자면, 부모가 자식에게 학비를 대 줘 나중 직업을 갖게 되면 부모에게 되갚아야 합니다. 그러니 자녀는 부모를 부양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하크 박사는 파독광부들이 ‘라인강의 기적’을 낳은 독일에서 땀의 가치를 배워 귀국한 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산업전사가 됐다는 점이 놀랍다고 했다.
“광부들이 독일인의 성실함과 부지런함, 책임감을 배워 귀국한 뒤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겼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독일은 한국인의 노동력을 빌려 경제발전을 이뤘지요. 사실, 한국은 올 때마다 새롭게 변화하고 있어요. 일부 산업에서는 독일을 앞서 가고 있습니다. 그 발전의 뿌리에 파독광부들의 땀과 희생이 담겨 있다니 놀라워요.”
“방진 마스크를 써도 높은 지열과 중노동으로 숨이 차 벗어 버리는 수가 더 많았다.”
“우리 광부들은 채탄 막장을 지옥 일 번지라거나 지옥의 입구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가 취재과정에서 만난 3명의 파독(派獨) 광부 출신 노인들은 이름이 없었다. “자식들에게 전직 광부였다는 사실을 여태 숨기고 있다”고 했다. 숨이 끊길 때까지 평생 숨길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기억 속에 탄(炭)은 ‘순금의 기억’이다. 더 많은 탄을 캐기 위해 위험표지가 붙은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탄층에 발이 빠지기도 했고 동료가 탄 더미에 깔려 죽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지옥이었다.1963년 12월 21일부터 1977년 12월 25일까지 7968명의 한국인 젊은이가 독일에 갔다. 자기 몸 하나 혹사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악착같은 소망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47년이 흘렀다. 그들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진·규폐 상흔에다 언제 탄더미에 깔려 죽을지 모르는, ‘사람 잡는’ 탄광노동을 견뎌낸 이들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파독광부로 일하다 미국으로 이민 가 미국과학기술원 화공학회 회장이 된 이성재(72·샌프란시스코 한국문인협회 회장)씨는 ‘서시(序詩)-라인강변에 피운 한강의 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게 라인강의 기적을 보여준 독일 / 광산에서 병원에서 젊음을 불태우며 / 한강의 기적을 꿈꾸었고 / 서울의 희망을 키워왔었다. / 꿈과 희망의 열매를 한 줌도 / 남김없이 조국으로 보내면 / 네가 보내준 기다리던 그 소식 /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가 뚫리고 /공장 굴뚝에는 밤낮없이 연기가 난다고…. (이하 생략)>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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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독일 광산을 찾아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했다. 박 대통령은 “나는 조국 근대화를 이룰 터이니 여러분은 건강하게 일하고 귀국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일꾼이 되자”고 연설했다. |
“7900여 명 모두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뤘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백서 집필 과정에서 만난 이들 중에 익명을 원하는 분들이 상당수였습니다. 몇몇은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독 경험담을 (백서에) ‘무명인’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독광부가 숨기고 싶은 평생의 멍에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까짓 몇 년 죽도록 고생하지 하는 ‘정직한’ 희생까지 그들의 침묵을 덮을 순 없다.
파독광부협회에 따르면, 광부 중에 대학교수가 된 이가 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권이종 명예교수와 청주대 토목환경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권광수(權光秀·67)씨가 대표적이다. 전북 장수가 고향인 권이종 교수는 1964년부터 3년간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일하다 독일 국립 사범대인 아헨교원대에 진학했다. 유일한 외국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수업이 없는 시간은 벨기에 군대 PX로 달려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남들이 4년 다니는 학사학위를 6년 만에 겨우 마쳤으나 결국은 교육학 박사학위까지 거머쥐고 귀국했다. 그는 한국교원대 교수로 재직하며 차관급 자리인 한국청소년개발원장까지 올랐고 국내 청소년 교육과 평생교육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파독광부 중 귀국하지 않고 독일에 눌러앉은 경우도 많았다. 원래는 파독기간 3년이 지나면 귀국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예외가 인정됐다. 능력을 인정받아 광산의 정식직원이 되거나 파독 간호사와 결혼하면 독일에 남을 수 있었다.
이정의씨는 1964년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다 광산 간부인 슈타이거(steiger·일종의 ‘작업감독’. 마이스터·meister로 불리는 ‘지하 장’보다 서열이 위다.)가 되기 위해 광산전문학교 3년 과정을 마쳤다. 또 베를린 공대에서 광산학 석사를 딴 뒤 독일 루르 광산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퇴임 후 보쿰 루르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히브리어 사전을 번역, 국내 최초 출간했다. 그의 말이다.
“딸이 신학을 공부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 흥미있어 보였습니다. 천길 땅속에서 땅 귀신을 여럿 만났으니 이번에는 하늘나라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 가까이에 있는 보쿰시(市)의 루르대 신학과에 입학했죠. 내 딸의 후배가 된 셈입니다. 고전어, 즉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익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하던 말을 읽고 배우니 참 신기했습니다. 한마디를 하면 하느님께서 통역 없이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히브리어를 배울 때 유학 온 젊은 목사들이 한국에는 아직 쓸 만한 히브리어 사전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일을 시키시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재산은 남은 게 없다”
많은 파독광부 출신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독일 땅에서 동양식품업체를 경영하거나 캐나다와 미국에서 화훼업과 숙박업으로 성공한 이, 독일에서 신학대학을 나와 현지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1967년 무렵, 파독광부 중에 간첩활동을 한다는 소문이 나돈 일이 있다. 월남전 참전 장교인 재미 대한태권도협회 김광웅 회장이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 파견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파견업무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간 뒤 진짜 파독광부가 되어 다시 독일로 갔다. 파독 간호사와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태권도 사범으로 이름을 날렸다. 젊은 시절, 남아프리카에서 대통령 경호요원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경험을 살렸다고 한다. 광부출신 김태현 재독 한인태권도협회장이 쓴 글에는 ‘유럽과 독일에 태권도가 처음 시작된 계기는 1963년 12월 파독광부에 의해서였다. 광부들이 사는 지역에 독일인을 모아 놓고 태권도를 가르치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탄을 캐는 광부들이 한국의 태권도를 유럽과 미국에 심은 셈이다.
파독광부협회에 따르면, 미국, 캐나다 등 북미지역에 정착한 광부출신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고 독일에 잔류한 이들도 어려움 없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으로 귀국한 이들은 대부분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당시 파독광부들은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고된 막장에서 일하던 광부는 많게는 한 달에 500~1000마르크(당시 1마르크에 60원가량) 이상을 벌었다. 이 액수는 그 시절 5급 공무원 한 달 봉급이 360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고 고액연봉자였던 은행원의 1년 연봉과 맞먹었다. 그러니 파독광부 모집에 구름같이 지원자가 몰렸다.
권이종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힘들게 벌었는데 왜 지금은 돈이 없을까. 이유는 간단하죠. 북미나 독일에 잔류한 광부들은 목돈을 마련해 그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지만 귀국한 이들은 임금을 고국에 있는 부모의 생계비나 병원비, 형제들의 학비, 자녀의 학비 등으로 썼습니다. 결국 3년 계약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많은 돈을 송금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산은 남은 게 없었다는 얘기죠.”
기자는 파독광부협회의 도움으로 광부들의 근황을 수소문해 보았다.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인 그들을 만나 아직도 식지 않은 ‘광부의 노래’를 들었다.
“식민지 종놈이 왔다”
경북 영주 출신의 장삼택(73·張三澤)씨는 1966년 7월 독일로 갔다. 함본 광산에 도착하니 일본인 광부들이 많았다. 그들 중 독일에 온 지 12년째 된다는 이도 있었다. 일본인 한 광부가 “식민지 종놈이 왔다”고 하기에 설움이 북받쳤다고 한다.덩치가 크고 일을 잘해서인지 당시 1000명의 광부 가운데 일 잘하는 7명에 발탁됐다. 제일 깊숙한 막장에서 도급단가로 일했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종일 탄더미 안에서 시간을 보냈더니 월 1000마르크 이상을 손에 쥐게 됐다. 한번은 독일인 슈타이거가 “하루에 370원씩 더 주겠다. 동료에게 절대 알리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더란다. 그만큼 슈타이거의 신임이 두터웠다.
어느 날 작업 도중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다리가 트윈침대 크기만한 돌에 깔려 있었다. 독일인 동료 광부가 대뜸 “다리부터 잘라야 한다”고 했다. 곁에 있던 한국인 동료가 울부짖으며 “죽는 것도 억울한데 발은 왜 자르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 무거운 돌을 다 치우고 12시간 만에 병원으로 이송됐을 때만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의 말이다.
“기적이었죠. 천장이 무너지면서 두 다리 사이로 굴러온 단단한 ‘알 돌(지름 25cm쯤 되는 둥근 돌)’이 그 큰 돌덩이를 지탱했습니다. 알 돌이 아니었다면 두 다리는 쓰지 못했을 겁니다. 들것에 실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곧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 원장이 진료하더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8개월 동안 손발 묶인 채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1969년 12월 귀국할 당시만 해도 살아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데다 꼬박꼬박 아내에게 송금한 돈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고향인 경북 영주에 내려가니 은행통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처가식구들이 다 빼내 간 것이다.
“아내가 처남에게 통장을 맡겼더니 다 찾아 쓴 것입니다. 남의집 살던 처가식구들이 막장에서 목숨과 맞바꾼 돈으로 집 사고, 땅 사고, 과수원 사고,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살더군요. 오죽하면 내가 자살하려 했겠습니까. 이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씨가 귀국해 건진 것은 고작 논 몇 마지기밖에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남겨진 아이 다섯을 부양해야 했다. 할 수 없이 중동의 건설잡부로 요르단과 쿠웨이트, 싱가포르 등지에서 평생을 일했다.
“중동에서 번 돈은 독일의 10분의 1이 안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덜컥 이혼은 해버렸지, 돈은 없지, 당장 아이들 학비가 급선무였죠. 재혼을 하면 더 고생할 것 같아 다 잊어버리려고 중동에 간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들 다 출가시키고 혼자 삽니다.”
정대호(鄭大鎬·71)씨는 1973년 11월 독일 겔센키르헨 광산에 도착한 지 1주일도 안돼 막장에서 동료가 죽는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봤다고 한다. 당장 귀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독일인 작업반장에게 “막장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막장에서 캐낸 탄을 이송하는 일을 맡게 됐다. 주로 자정부터 오전 10시에 퇴근하는 야간작업이 주어졌다. 일은 위험하지 않았으나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꾀를 내었다. 이발기기를 사서 동료 광부들의 머리를 잘라 주고 용돈을 벌었다. “처음에는 그냥 깎아 줬는데, 주위에서 3마르크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하더란다. 그래도 집에 송금하는 돈이 남들보다 적었다. 할 수 없이 독일인 공동묘지에 나가 풀을 뽑고 꽃을 옮겨 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누구보다 시간을 아껴 썼다.
그는 3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 캐나다 이민을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많은 파독광부가 캐나다와 미국 광산에 이민을 갔었다. 이민 브로커에게 300마르크까지 준 상태였다. 그러나 한국에 있던 아내에게서 ‘귀국하라’는 전보가 득달같이 왔다. “당시 아이가 사고를 당해 아빠를 무척 찾았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가족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결국 1976년 11월 귀국길에 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족이 먼저입니다. 캐나다에 갔다면 지금보다 윤택하게 살았겠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독일에서 돌아와 이듬해 1년간 사우디아라비아에 전기공으로 다녀온 뒤 기능직 공무원으로 정년을 마쳤습니다.”
독일에서 중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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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독광부 합격 통지서. |
“폐광에서 50마력짜리 중고 원동기를 싸게 사서, 고쳐 되팔려 했습니다. 장물아비에게 속은 셈입니다. 결국 독일에서 번 돈 다 잃고 빚만 100만원 지게 됐죠. 세상이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습니다.”
가진 돈 다 날렸지만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할 수 없이 해외 건설현장에 레미콘 기사로 다시 출국했다. 사우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괌 등지에서 일했다. 싱가포르의 상징인 ‘래플즈시티’ 건설에 직접 참여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쌍용건설이 지은 싱가포르 래플즈시티는 1980년 당시 ‘콘크리트 24시간 연속타설’의 기록을 수립, 그해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등 한국의 동남아 해외건설의 역사다.
“젊은 시절, 산업전사로 땀을 흘렸습니다. 나보다는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더니 남은 것은 나빠진 건강과 주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 손으로, 한국인의 기술로 해외에 세운 높은 건물과 튼튼한 교량을 생각하면 뿌듯합니다.”
1973년 5월부터 76년 5월까지 독일 딘스라겐 광산에서 일했다는 이동백(李東伯·66)씨 역시 귀국 후 사우디, 바레인, 카타르 등 중동에서만 12년간 일했다. “원체 광산에서 사고가 잦은 데다 광부 일을 오래 하면 죽을병에 걸린다는 공포가 싫어 귀국 후에는 광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막장보다는 사막의 전갈과 모랫바람이 오히려 견딜 만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지만 살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스스로에게나 남들에게 애국자라고 말한다. 달러를 벌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했다.
김기환(金基煥·66)씨는 1973년 10월부터 3년간 레그린하우젠 광산에서 일했다. 귀국한 뒤 목돈을 털어 장사를 시작했지만, 요령을 몰라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동네 수퍼도 하고 장사를 여러 번 했지만 잘 안되더군요. 바닥부터 차곡차곡 다져야 하는데 덮어놓고 돈 갖고 밀어붙이니 결국 안되더라고요. 독일에서 번 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결국 손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주위에 독일 갔다 온 사람이 여럿 있는데 몇 사람 빼고 잘 안 풀렸습니다. 왜 그런지 몰라….”
김충규(金?圭·71)씨는 1973년 겔센키르헨 광산에서 일하다 76년 귀국해서 영주 부석사 근방에 땅을 사서 지금껏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 그나마 제일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주위에서 광부로 다시 일하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안 갔다”고 한다. 그와 같이 독일에 간 동료 중에는 귀국 후 강원도 태백, 장성 등지에서 다시 광부로 일하다 결국 진·규폐로 몸져 눕게 된 이가 여럿 된다고 한다.
파독광부 출신 권이종 교수는 “‘한강의 기적’의 출발점인 광부 파독과 그들의 피땀 어린 송금은 1960~70년대 한국의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값어치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물가상승의 영향으로 상대적 실질임금이 하락해 ‘보이지 않는’ 손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상당수 광산 노동자들이 돈을 모아 국내에 집을 사려고 했지만 빠르게 오르는 물가와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인해 오히려 임금하락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손창헌(孫昌憲·73)씨는 1970년 12월부터 3년간 독일 함본 광산에서 일했다. 독일로 가기 전 강원산업에서 광부로 일한 경험이 있다. 막장에서 속옷 바람으로 일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지열이 40도에 달했기 때문이다.
1972년 9월 뮌헨 올림픽에 광부, 간호사들 모두가 의무적으로 올림픽 응원에 참여했다. 그 역시 배구장에서 열심히 응원했다. 하지만 피로 탓인지 이튿날 막장에서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아직도 다리가 불편하다.
“어린 시절,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 보자는 각오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운 것이 없었죠. 사실 일부 파독광부 중에는 뒷돈을 주고 온 이가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막장 일은 하지 않고 쉬운 일만 한 이도 있었지만 나는 달랐습니다.”
그는 생활비를 뺀 월급을 꼬박꼬박 부쳐 42개월이 지나 800여 만원을 모았다. 당시 30평형 단독주택 한 채가 80만원 할 때였다고 한다. 귀국 후 임대업과 여관업을 하며 자식을 키웠다.
파독광부가 내 인생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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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광식 전 도의원. |
작업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피곤에 절어 쓰러져 자는 일이 계속됐다.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아리랑을 소리 높여 불렀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선 독일인의 부유함과 자유, 그리고 윤택한 생활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1974년 말 귀국해 김포시 통진면 가현리에다 논과 밭 1만평을 구입, 농사일을 시작했다. 마을 이장으로 8년간 봉사한 것이 계기가 돼 1991년 김포군의원(지금은 김포시의회)에 출마했다. “독일처럼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위정자가 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만 낙선하고 말았다. 절치부심, 95년 재출마해 내리 3선을 하고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했다. 내친 김에 2006년 경기도의원에 당선됐다. 지역 언론사로부터 2회에 걸쳐 의정대상을 받았고 대통령표창도 받았다고 한다.
“유년시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열아홉 되던 해, 동인천역에 처음 내렸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시장을 전전하며 ‘밥만 먹여 주시면 일을 해 드린다’고 해도 누구도 반겨 주는 이가 없더라고요. 큰 가게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니 며칠 있어 보라고 해서 눌러앉았습니다. 잡화상과 청과물 상회 점원, 쌀가게 배달부, 청소부로 살았습니다. 파독광부가 되면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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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수용 대성-헨켈 전 대표. |
1965년 독일 딘스라겐 지역 로흐베르그 광산에서 일하면서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슈타이거가 됐다. 슈타이거는 독일 광부들의 존경을 받는 자리다. 한국인 출신 슈타이거는 전체 7968명의 파독광부 가운데 5명 안팎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만큼 독일인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워야 한다.
“독일 광부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의 지시를 받으니 불만이 많았죠. 일부는 내 명령에 반항하고 대드는 이도 있었습니다.”
보통 독일광산은 수갱(竪坑·일종의 지하 엘리베이터)을 타고 지하 1000m 이상을 내려가서 작업이 이뤄진다. 고되고 위험한 만큼 스타이거와 마이스터의 지시와 명령을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 그래서 스타이거는 ‘지하의 영주’라 불린다.
“외국인에게 배타심이 많은 이들을 내가 직접 데리고 다녔습니다. 솔선해서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싫어하면 너도 광산학교에 다녀 스타이거가 되라’고 했습니다. 몇몇은 화가 난다며 망치를 내던진 이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했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한국인, ‘지하의 영주’가 되다
결국 독일 광부들이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주로 광부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일이 맡겨졌고 나중에는 안전담당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1984년 해외 성실 근무자로 노동부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그러다 독일의 한 화학회사에 재취업, 1989년 한독 합자회사의 대표로 귀국했다.
“인생이 반복된다 해도 다시 독일에 가겠습니다. 독일인에게 부지런히 움직이고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나 역시 광부 시절,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4시에 일어납니다. 아이들에게 ‘자려면 앉아서 자라’고 가르쳤습니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시간이 많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것은 죽는 연습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자더라도 책상에 앉아 자라고 가르쳤고 나 역시 그렇게 살았습니다. 파독 간호사와 결혼해 딸을 하나 뒀는데, 딸이 이번에 독일 대학교수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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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우 파독광부협회 회장. |
그에게 1964년 12월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독일에 온 것이다. 박 대통령의 “나는 조국 근대화를 이룰 터이니 여러분은 건강하게 일하고 귀국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일꾼이 되자”는 연설을 듣고 그간의 고됨을 다 잊었다고 한다.
“그 시절,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았다고 생각한들 산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불평하거나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동이 끝나는 매일 저녁, 오늘 죽지 않고 산 것에 감사했습니다.”
우연히 귀국을 며칠 앞두고 <철이 살아 숨 쉰다>는 다큐멘터리 기록영화를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영화를 촬영하는 기술자가 되리라 결심하고 곧바로 촬영기기와 기법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브랜드였던 아리플렉스(ARRIFLEX) 35mm 촬영기와 칼자이스(Carlzeiss) 렌즈를 3년간 번 돈 탈탈 털어 2만 마르크에 샀다. 촬영기법을 6개월 동안 배운 뒤 1968년 4월 귀국했다. 물론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최신 장비여서 유명 영화감독들의 촬영요청이 적지 않았다. 신상옥(申相玉) 감독과 충무로 영화사에서 계약을 맺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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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독광부들의 태권도 격파 모습. 유럽과 독일에 태권도가 처음 시작된 계기는 1963년 파독광부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
국가홍보물 제작물량이 줄면서 영화제작에 참여한 그는 대박을 터뜨린 <실미도>
김 대표는 ‘크니쇠너(kniesch쮤ner)’로 불리는 고무로 된 무릎보호대를 잊을 수 없다. 막장에 들어갈 때는 전기 램프, 장화, 물통과 함께 크니쇠너를 반드시 챙겼다. “이 4가지는 필수품이다. 이것 없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배당량의 석탄을 캐어 실어 낼 수 없다”고 한다.
“지하 1000m 막장 지열이 35도를 넘나들고 지상에서 내려오는 공기는 찜통 같은 더위와 돌가루, 석탄가루로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채탄기계, 무너지는 돌 소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크니쇠너’ 없이는 1분도 일할 수 없습니다. 막장 천장을 받치는 쇠기둥(stempel)을 세울 때나 해체할 때, 온 힘을 무릎에 모아 작업합니다. 그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했습니다. 고된 노동을 이겨내며 오직 이 상황을 이겨내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니쇠너가 아니었다면 이런 결심도 무너졌을 것입니다. 내 무릎도 부서졌을 것입니다.”
광부들의 월급 송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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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광산의 갱도 모습. 갱도 내 철기둥을 제때 세우지 않으면 천장에서 바위들이 떨어져 낙반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
1964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광부를 포함한 독일 파견 근로자들의 송금액은 <표2>와 같다. <표2>에서 광부와 간호사의 파독 초기 3년간의 송금액을 보면 1964년 11만2000달러가 처음 송금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273만4000달러, 1966년 477만9000달러였다. 이를 GNP와 비교해 보면, 1964년 GNP 총액 29억 달러 대비 0.003%, 1965년은 0.09% (GNP 30억 달러), 1966년 0.12%(37억 달러)였다.
파독광부협회 김태우 회장은 “광부를 포함한 독일 파견 노동자들의 외화송금은 1960년대 당시 경제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단 1달러의 외화도 귀중했던 한국 경제상황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 광부들이 독일로 파견된 1960년대 한국의 경제지표는 1인당 GNP 87달러. 당시 한국은행 외화보유 잔고는 2300만 달러, 연간 물가상승률 42%, 실업률 23%, 민간저축률 3%대의 후진국 경제규모를 면치 못하던 시절이었다.
파독광부의 송금이 결과적으로 가계의 소비와 저축을 늘리고 산업생산을 파급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권이종 교수는 “광부와 간호사들은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 홀로 독일에 보내진 경우가 많았고, 이들 대부분이 생활에 필요한 최소 비용을 제외하고 월급의 대부분을 송금, 가계 및 국민소득 향상에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파독광부의 가장 큰 의의는 국내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가계저축의 증가는 투자증대로 이어져 산업생산 능력을 확대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독일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해외건설에 뛰어들어 중동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로 진출하는 데 파독광부들이 밑거름 역할을 했다.
독일 거주 파독광부 2세의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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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독광부로 선발된 20대~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독일행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다.1963년 12월 21일부터 1977년 12월 25일까지 7968명의 한국인 젊은이가 독일에 갔다. |
이들이 자녀교육에 열성적인 것은 당연했다. 막장에서 캔 돈을 자녀에게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 결과, 독일에 정착한 광부 2세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국내 파독광부 2세들의 행적에 대해선 거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주독한국대사관과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에 의하면,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는 2002년 기준 약 2만9200명에 이른다. 이는 유럽 전체 동포의 3분의 1 수준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독일인 수도 1000명이 넘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미국인 다음으로 많다.
1964년 파독광부로 일하다 독일에 정착, 2002년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마을’에 영구귀국한 조용길(曺容吉·75)씨는 “독일 2세들의 80% 이상이 고등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고통과 희생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개 어머니가 간호사인 2세들이 많죠. 자연히 자녀는 의사를 꿈꾸는 식으로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또 외국인으로서 받는 차별을 이겨내기 위해 경찰이나 판·검사가 된 이도 있습니다. 부모들의 고생과 땀을 자녀가 잊지 않은 까닭이죠.”
파독광부협회에 따르면, 독일에서 법대를 졸업한 2세들 상당수가 판·검사로 활약하고 있고, 의대를 나와 분야별 병원에서 근무하거나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이들도 대단히 많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를 20명이나 배출한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2세가 있고, 미국 모건스탠리 그룹에 입사해 세계 금융리더를 꿈꾸는 이도 있다.
이밖에 독일 WDR 방송사에서 대중음악 저널리스트로 활약한 이, 컴퓨터와 IT분야를 공부해 실어증과 전신마비로 고통받는 환자가 컴퓨터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이도 한국인 2세들이다. 파독광부협회 관계자의 말이다.
“이방인으로 억울함을 견뎌야 했던 부모세대를 돕기 위해 경찰이 된 2세도 있습니다. 노란 피부색과 다른, 까만 머리와 눈동자 탓에 좌절을 겪고, 차별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갈등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살아온 부모를 모델로 삼아 잘 자라나 이제 독일 한인사회의 자부심이 되고 있습니다.”
광부들의 마지막 소원
파독광부들은 이제 역사의 뒷자리에 물러서 있다. 팔목과 어깨가 아픈 나이다. 초로의 문턱을 넘어 삽시간에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무력해졌다. 돌무덤에 들어가 곡괭이로 탄을 캐던 시절이 아득하기만 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독일 광산촌을 찾았을 때 이런 약속을 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국가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국가에서 베풀어 줄 수 있는 혜택을 최대한으로 베풀어 주겠습니다.”
권이종 교수는 “40년이 지난 지금 뒤돌아보니 독일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광부들에게 정부가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동료 광부들이 정부의 혜택이나 도움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한 경우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파독협회 김태우 회장은 “광부들의 땀이 조국 근대화를 이루는 불씨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점을 국민이 기억할 수 있게 ‘파독광부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광부들의 염원”이라며 “세계에 흩어진 파독광부와 그 후손들이 모국을 찾았을 때 쉬어 갈 수 있도록 작은 유스호스텔 규모의 숙박시설 조성도 목표”라고 말했다.
파독광부 출신 정대호씨는 “파독광부의 인력송출을 담보로 당시 정부가 독일로부터 돈을 빌려 경제발전을 이룬 게 사실이라면, 어찌 보면 파독광부들은 ‘인간 담보물’이 아니겠느냐”며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된 광부들의 희생과 땀을 작게나마 연금형식으로 보상받는 게 마땅하다”고 했다.⊙
[인터뷰] 독일인 하크 박사가 말하는 파독광부와 간호사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고학력에 독일정부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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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원대 권이종 교수와 하크 박사, 백정신 여사(오른쪽부터). |
권 교수의 아헨교원대 박사과정 시절, 하크 박사는 병원 일을 마친 뒤 그의 학위논문 교정을 꼼꼼히 도와주었고, 늘 같이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1960~70년대 그의 눈에 비친 파독광부는 어떤 모습일까. 하크 박사는 “당시 독일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부족한 부분은 외국인의 손을 빌려야 했다”며 “여기다 철강산업의 발전은 화석에너지, 즉 석탄수요의 급증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독일은 자동차, 선박, 군수산업이 발전하면서 철강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이 됐고 덩달아 석탄수요도 늘어나게 됐어요. 문제는 독일인이 하기 싫은 업종 중의 하나가 광산노동이었다는 점입니다. 고되고 힘든, 탄을 캐는 일을 누가 할 것이며 어디서 일 잘하는 광부들을 데려오느냐가 큰 고민거리였지요. 한국인은 예의바르고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독일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어요. 게다가 고용주에게 반발, 노조를 결성하거나 파업을 하는 경우도 없었지요. 한국인은 오직 일만 했습니다.”
독일정부는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심지어 일본에서도 노동자를 데려왔다. 이들은 광산뿐만 아니라 방직공장 등 제조업 현장에 투입됐다. 그 수는 1960년대 당시 대략 10만명 선인 것으로 파악된다. 하크 박사는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비교해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의 교육수준이 매우 높았다”며 “이런 고학력 현상은 독일정부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달리 한국인은 독일사회에 빨리 적응하고 동화하려 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어요. 다른 외국인처럼 끼리끼리 모여 살며 독일사회와 담을 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부 외국인은 불성실하게 일하다 해고당해 실업급여를 타려 했지만 한국인 중에선 실업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일해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월급을 보내 주려 했지요.”
―파독광부 중 독일에 귀화한 한국인은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정착한 파독광부의 경우 독일인 광부와 비교해 광산노동 경력이 적어 사실 연금이 많지 않아요. 다만 간호사인 아내와 결혼한 이들은 부부가 함께 연금을 받아 넉넉하진 않지만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어요. 또 텃밭에서 채소도 키우고 부지런해서 어딜 가든 환영받지요.”
독일 사회에서 한인 2세들의 활약을 하크 박사는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로 설명했다. 또한 한인 2세들이 부모들의 고된 노동과 희생을 아는 탓이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독일 가정은 90% 이상 잘삽니다. 또 한국인끼리 사는 가정도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어요. 독일인이 생각하기에 한국인 여성들은 자녀에 대해 유난히 정열적이고 교육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습니다.”
―파독광부들이 번 돈으로 부모나 친척의 생계비나 병원비, 형제와 자녀들의 학비에 모두 써 버려, 정작 남은 재산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최근 독일 <슈피겔>지에 파독 터키인 이야기가 실렸어요. 터키 출신 노동자들이 독일에서 3~4년 힘들게 일해 번 돈을 자국에 보냈지만 정작 귀국하면 아무 것도 없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한국인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해요. 독일인의 사고방식으로 얘기하자면, 부모가 자식에게 학비를 대 줘 나중 직업을 갖게 되면 부모에게 되갚아야 합니다. 그러니 자녀는 부모를 부양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하크 박사는 파독광부들이 ‘라인강의 기적’을 낳은 독일에서 땀의 가치를 배워 귀국한 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산업전사가 됐다는 점이 놀랍다고 했다.
“광부들이 독일인의 성실함과 부지런함, 책임감을 배워 귀국한 뒤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겼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독일은 한국인의 노동력을 빌려 경제발전을 이뤘지요. 사실, 한국은 올 때마다 새롭게 변화하고 있어요. 일부 산업에서는 독일을 앞서 가고 있습니다. 그 발전의 뿌리에 파독광부들의 땀과 희생이 담겨 있다니 놀라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