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 주민과 삼성중공업, 無限책임과 有限책임 법적 공방
⊙ 삼성중공업, “이미 피해보상과 별개로 기금 1000억원 출연”
⊙ 주민 측 소송대리인 “주민 돕겠다는 특별법 때문에 오히려 고통”
⊙ 국토부 “국제협약에 따라 보상절차 진행…객관성과 합리성 도모”
⊙ 先보상 後협상한 스페인 vs. 국제기금 査定만 기다리는 한국
⊙ 삼성중공업, “이미 피해보상과 별개로 기금 1000억원 출연”
⊙ 주민 측 소송대리인 “주민 돕겠다는 특별법 때문에 오히려 고통”
⊙ 국토부 “국제협약에 따라 보상절차 진행…객관성과 합리성 도모”
⊙ 先보상 後협상한 스페인 vs. 국제기금 査定만 기다리는 한국
- 충남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자원봉자사들이 바다에서 떠낸 원유를 한곳에 모으고 있다.
지난 2월 26일,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을 땄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울렸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같은 날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곳이 있었다. 충남 태안이다. 이날 오전에 있었던 전(全) 피해민 손해배상대책위원회(이하 전 피해민 대책위) 위원장 성정대(成正大)씨의 자살 때문이다.
성씨는 “2007년 태안해역 유류피해로 처음 시작한 양식 사업의 주기(週期)가 깨지고 채무(債務)만 늘어간다”는 비관과 함께 “다시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속하고도 원만한 배상이 이루어지길 촉구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2008년 1월, 태안에서는 사고로 인한 좌절과 피해로 인한 생활고로 열흘이 안되는 기간 동안 3명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성정대씨가 자살했지만, 세간의 이목(耳目)은 이미 태안을 떠나 있었다.
전쟁터만큼 비참했던 2007년 12월의 태안
지난 5월 12일, 태안 기름유출사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희생자 가족들이 삼성중공업과 대한민국 등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에서 밝힌 청구취지는 “피고(정부, 삼성중공업, 허베이 스피리트사) 등은 연대하여 각 원고에게 각 금 5억원 및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는 것이다.
30개월 전, 우리나라는 사상 최악의 환경재난을 겪었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에서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Hebei Spirit)호 유류오염 사고다. 그것은 인재(人災)였다. 삼성중공업 소속 크레인 부선이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해 7만8000배럴(1만900t)의 기름이 바다로 흘러나온 사건이다. 만리포면에 거주하는 명한영(53)씨는 사고 당시를 떠올리며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름 냄새가 진동해서 보일러가 터진 줄 알았다”며 “영화에서 보던 전쟁터보다 더 비참했다”고 전했다.
해안선 375km, 육지 70.1km가 오염됐고, 태안을 비롯한 충남·전남북 지역 11개 시군이 피해를 입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돼 성금 389억원이 모였고, 전국 각지에서 온 120만 자원봉사자들이 방제작업에 참여했다. 빠른 회복에 전 세계는 감탄했다. ‘태안의 기적’이었다. 30개월이 지난 지금, 태안에서 사라진 기름 자리에 ‘사람의 눈물’이 채워졌다.
“보상완료돼 다시는 이런 인터뷰 안 했으면”
지난 4월 29일, 기자는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로 향했다. 유출지점 바로 앞 해안가였다.
부락 뒤편 산비탈 외진 집에 가재분(賈在芬·62)씨가 살고 있었다. 가씨는 태안 사고 이후 처음으로 자살한 이영권씨의 부인이다.
가씨는 “5월 2일이 막내아들 결혼식”이라며 “식장에 혼자 들어가 앉아 있을 걸 생각하면 막막하다”고 눈물부터 훔쳤다.
고(故) 이영권씨는 소원면 의항2리에서 50년 동안 맨손어업에 종사했다. 가재분씨도 20세에 시집와서 줄곧 맨손어업을 해 오던 도중, 빚을 얻어 굴 양식을 시작했다. 한해 3000만원을 버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름유출 사고로 굴은 전부 폐사(斃死)했다. 이씨는 “굴 수확을 하면 결혼식을 올려주겠다”던 막내아들과의 약속도 지켜주지 못하게 됐다. 이씨의 막내아들 운규씨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한 채 살고 있었다.
이씨는 2007년 12월 28일 해양수산부 주최 주민설명회에서 “무허가 굴양식은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씨의 굴 양식장은 무허가였다. 언론에서는 “태안 바다가 회복되는 데 100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보상은 요원(遙遠)하고 다시 굴을 깔 수 있다는 희망도 없어졌다.
이씨는 사고 전날 술을 많이 마셨다. 가재분씨에 따르면 이씨는 다음 날인 2008년 1월 10일 아침 8시에 막내아들 운규씨에게 전화를 해 “나 보려면 지금 집에 들어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운규씨가 집에 도착했을 때 이씨는 이미 음독(飮毒)을 한 뒤였다. 이씨는 부인과 삼 남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이씨의 장례식은 1월 14일 태안군청 광장에서 군민장으로 치러졌다. 태안 주민 1만여 명이 참석해 이씨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충경 의항리 어촌계장은 조사(弔辭)에서 “누가 이영권 선생을 죽였느냐”며 “6만 태안군민 앞에 정부와 삼성은 엎드려 사죄하라”고 외쳤다.
이씨의 장례식이 끝나고 태안주민들 사이에서 돈 소문은 유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줬다. 가재분씨는 “그런 말들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사람들이 ‘들어온 부조금만 수억원이다’ ‘삼성이 돈을 줬다’는 말들을 했습니다. 저희는 삼성으로부터 돈은커녕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지 가씨는 연방 눈물을 닦으며 “아무쪼록 보상이라도 빨리 나와서 다시는 이런 일로 인터뷰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 통장의 20만원 쓰라”던 통화, 결국 遺言 돼
태안군 근흥면 마금리의 고(故) 김용진씨도 이번 사고로 인한 생활고(生活苦)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두 번째 희생자다.
김씨는 갯벌에 나가 바지락을 캐며 생계를 꾸려 왔었다. 2남3녀를 두었지만, 자식들의 도움을 바랄 형편이 아니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갯벌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김씨의 부인 함영자(71)씨는 허리가 굽고, 무릎이 상해 거동이 불편했다. 건강도 좋지 않아 병원비로 쓰는 돈이 많았다.
기름유출사고가 일어나 갯벌은 죽었고, 바지락은 씨가 말랐다. 하지만 어떻게든 삶은 이어나가야 했다. 당장 필요한 생활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하루 7만원인 방제작업을 꼭 해야만 했다.
방제작업 인건비는 태안군과 방제업체가 영국의 선주상호보험(P&I: 선주의 손해 등을 보상해 주는 보험)에 신청을 하면 지급되기 때문에 얼마간의 시일이 걸린다.
인건비가 제때 나오지 않아 생활고를 겪게 되자, 김씨는 부인에게 “이제 살 의욕이 없다”며 낙담했다. 함씨의 말이다.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새까매졌으니 살 의욕이 있었겠어요? 평소 소식(小食)을 하는데 사고 당일 저녁은 밥 한 공기를 다 드셨습니다. 이승에서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함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명이 이어졌다.
“상을 치우고 저는 다른 방에 있었습니다. 잠시 뒤에 저를 부르더니 ‘큰며느리한테 전화 좀 걸어 달라’고 했어요. 큰며느리에게 ‘내 통장에 20만원이 있으니까 쓰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습니다.”
함씨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김용진씨가 있는 방으로 갔을 때, 김씨는 구토를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리 준비해 둔 제초제를 마신 것이다. 병원으로 옮겨져 위세척을 받았지만, 다음 날인 1월 16일 아침 10시경에 사망했다.
남편의 자살 후 살길이 막막해진 함씨는 작년에 처음으로 바지락 작업을 나갔다. 그러나 거동조차 불편한 함씨로서는 무리였다. 함씨의 말이다.
“노인연금 8만원 나오는 걸로 병원비를 충당하고, 전기료 같은 공과금은 애들이 조금씩 내 주고 있습니다. 이외에 돈을 쓰는 것은 엄두도 못 냅니다. 건강하면 밥이라도 얻어먹으러 다닐 텐데, 겨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함씨는 바다를 볼 때마다 “남편이 생각나 착잡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터지면 항상 없는 사람들만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다는 회복됐지만, 우리가 입은 피해는 아직 회복이 안 됐습니다.”
‘희망’이 ‘절망’되자 제초제 마신 후 焚身
다음 날 태안읍 조석시장 입구에 있는 횟집을 찾아갔다. 점심때였지만 손님은 없었다. 세 번째로 자살한 고(故) 지창환씨의 부인 최명화(55)씨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최씨를 비롯한 가족에게 ‘기름 유출’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날로 손님은 끊겼다. 최씨는 “아저씨가 까맣게 된 바다를 보면서 ‘태안은 이제 다 죽었다’고 했다”며 “잠도 잘 못 이루고, 술 마시는 날도 잦아졌다”고 말했다.
그래도 희망은 잃지 않았다. 바다만 살린다면 예전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지씨는 사고 후 기름때를 닦아내기 위해서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갔다. 최씨의 설명이다.
“우리 집 아저씨는 평소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도왔습니다. 기름유출 사고 뒤 조석시장 상인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어요. 사고가 난 뒤에는 ‘바다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일’이라며 방제작업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기름은 없어지지 않았다. 바위틈, 모래에서 계속 올라왔다. 지씨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2008년 1월 14일 지씨는 태안군청 광장에서 군민장(郡民葬)으로 치러진 이영권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날 저녁 지씨는 부인 최명화씨에게 “나도 태안을 위해 뭔가 희생해야겠다”고 말했다. 최씨가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그때 말한 희생이 자살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누가 등을 떠민 사람도 없으니까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고…. 답답하고, 가끔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4일 후인 18일 오후 열린 ‘특별법 제정 촉구 및 대정부 투쟁집회’에서 지씨는 제초제를 마시고 연단으로 올라갔다. 마이크를 뺏으려 주변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생수병에 담아온 시너를 몸에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여 분신(焚身)을 했다.
지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위세척을 받았지만, 음독으로 인한 고통과 화상의 이중고를 겪다가 다음 날 오전 8시쯤 사망했다.
아버지 분신 동영상 보고 유산한 딸
남편의 죽음 이후 최씨는 가슴 두근거림과 우울증이 생기는 등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식들에게도 ‘아버지의 자살’은 큰 상처였다. 딸(33)은 아버지의 분신 장면을 동영상으로 본 후 유산(遺産)했다. 그 뒤로는 애가 들어서질 않는다고 한다. 아들 또한 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한 달이 지난 다음 최씨는 다시 장사를 했다. 가장 큰 고민은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었는데 예전처럼 손님들을 웃으면서 맞자니 이상한 여자라고 할 것 같고, 그렇다고 푹 가라앉아 있자니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저는 괜찮아요. 예전처럼 대해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영업을 했습니다.”
사고 후 언니와 형부가 와서 일을 도와주고 있지만, 영업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물건값을 제때 못 주는 일도 다반사다. 최명화씨의 말이다.
“현재 빚이 1억원 정도 됩니다. 장사는 안되지만 정기적으로 나가는 돈이 있으니까 식당을 할수록 손해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남편 잃고 어디 가서 일하는 내 모습이 처량할 것 같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1일 기자는 소원면 의항리를 다시 찾았다. 이영권씨의 막내아들 운규씨의 결혼식 피로연이 마을회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성정대씨의 아들 익현(28)씨도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魂이 전복양식장에 계신 듯”
피로연이 끝나고서, 기자는 성익현씨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배는 사고해역으로 향했다. 해당 지점에 도착하자 익현씨는 손으로 가리키며 “저곳에서 모든 일이 시작됐다”고 했다.
선수를 돌려 익현씨의 전복양식장이 있는 파도리 앞바다로 갔다. 익현씨의 눈이 불그스레해졌다. 그는 “아버지의 혼(魂)이 양식장에 계신 듯하다”며 탄식(歎息)했다.
성정대씨는 1976년부터 2007년까지 서산수협에서 근무했다. 주변 사람들은 성씨에 대해 “일 처리가 확실하고, 친화력도 뛰어났다”고 했다.
수협에서 퇴직 후 성씨는 2007년 10월 15일 소원면 파도리에서 전복양식업을 시작했다. 시설설치비용과 전복 종패(種貝) 구입비용에 8억원 정도가 들었다.
보통 3년인 양식주기를 1년으로 단축하려고 큰 종패를 사들여 비용이 늘어났다. 익현씨에 따르면 보통 종패가격은 300원이지만, 성씨가 산 종패는 1300원이라고 한다. 익현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제가 아버지 일을 도와드리려고 이 분야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만약 1억5000만원을 투자했을 경우 1년 안에 1억원을 회수(回收)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사업을 시작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56억원은 한 가구 피해액도 안되는 돈”
그 희망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물거품이 됐다. 사고해역에서 몰려온 기름띠는 양식장을 초토화했다. 전복 종패들은 절반 이상이 죽었다.
성씨는 태안 피해주민들을 돕기 위해 ‘전(全) 피해민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조직했다. 유류오염피해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본 상황에서도 대책위에 5000만원을 출자했다.
익현씨도 아버지를 돕기 위해 2009년부터 대책위에서 일했다. 익현씨에 따르면 성씨는 ‘보상문제가 해결되는 데 길어야 2년’이라고 자신했다.
오판(誤判)이었다. 배상이 지연(遲延)됨에 따라 성씨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상금이 나오게 해 달라”고 독촉하는 사람들의 방문과 전화가 빗발쳤다. “대책위가 공금을 유용했다”는 소문도 퍼졌다.
2009년 12월에는 태안주민들의 “삼성중공업의 선박책임절차 개시 결정을 내린 서울중앙지법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항고가 기각됐다.
성정대씨는 이 소식을 듣고 좌절했다. 익현씨는 “아버지가 ‘56억원은 한 가구 피해액도 안 되는 돈’이라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판결을 보고 세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자동차 사고와 비교해 보면 답이 딱 나오잖아요. 왜 피해자들이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힘 있고, 돈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현실을 보며 무력감을 느끼셨습니다. 한숨도 늘고, 외출도 잘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성씨는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집을 담보로 잡히고 받은 대출금 1억3000만원, 영어(營漁)자금 3억원, 특별영어자금 3억원 등을 포함 총 8억원이었다. 이자를 갚는 것도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 성씨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지난 2월 26일 익현씨는 아침 일찍 외출했다. 9시30분께 잠에서 깬, 성씨의 부인 남금순(53)씨는 목을 매 숨져 있는 성씨를 발견했다.
익현씨는 “어머니께 연락을 받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건장한 청년의 어깨가 들썩였다.
無限책임 對 有限책임 공방
기자는 태안읍에 있는 대책위로 향했다. 고(故) 성정대씨가 위원장으로 있던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완전한 배상, 완전한 복구, 가해자 무한책임”이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성씨의 뒤를 이어 박규웅(68)씨가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박 위원장은 구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완전한 배상, 완전한 복구는 태안을 사고 이전 상황으로 되돌려 놓는 상식적인 조치입니다.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이 사고의 가해자(加害者)는 삼성중공업입니다. 기상조건이 좋지 않았는데도 운항을 강행(强行)해 크레인 부선이 가만히 있는 배를 받은 겁니다. 그로 인해 수조원대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피해보상은 삼성중공업이 ‘가해자’로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현재 태안 문제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유류오염 피해주민들은 삼성중공업과 정부를 성토(聲討)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쟁점은 사고책임소재 규명 및 손해 배·보상 주체에 대해 태안 주민과 삼성중공업의 입장이 다른 것이다.
삼성중공업은 2008년 12월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선박책임제한절차 개시 신청’을 했다. 선박책임제한절차란, 해상기업(海上企業)의 위험성과 손해액이 크다는 것, 국민경제상 해상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등을 근거로 선박소유자에 대한 유한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2009년 3월 서울중앙지법 파산1부는 삼성중공업의 책임한도액 및 법정이자를 약 56억3400만원으로 산정, 선박책임제한절차 개시를 결정했다. 즉 서울중앙지법이 태안 기름유출사고에 대한 삼성중공업의 책임한도를 56억원으로 정한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사고 피해 주민들이 주장하는 손해배상액은 상법에서 정하는 책임제한액의 한도를 초과했고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사유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태안 주민들은 “해상 크레인 부선은 상법상 ‘선박’이 아니라 민법상 ‘공작물’로 봐야 한다”며 서울고등법원에 항고(抗告)했다. 해상크레인 부선이 ‘선박’이 아닐 경우 선박책임제한절차를 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 민사40부는 2009년 12월에 주민들의 항고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해상 크레인 부선은 상법상 선박 책임제한 규정이 적용되는 ‘선박’에 해당하고, 당시 선장의 행위 역시 고의나 무모한 행위였다고 볼 수 없다”고 기각 이유를 밝혔다. 태안 주민들은 1월 29일 대법원에 재항고해 현재 계류 중이다.
‘선박파괴’ 對 ‘선박충돌’
태안사고의 삼성중공업 책임 부분에 대해, 태안 기름유출사태 희생자 유가족들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박찬종(朴燦鍾) 전 의원(변호사)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삼성중공업의 해상 크레인 바지 선단이 유조선을 ‘선박파괴’한 것은 명백하지만, 특별법은 ‘선박충돌’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삼성중공업이 주 가해자로 부각됨으로써 손해배상책임이 커지는 것을 막고, 사고경위를 왜곡시킬 소지가 있다.”
박 전 의원의 주장에 대한 삼성중공업 측의 반론이다.
“이미 대법원에서 ‘선박파괴로 볼 수 없다’고 결론이 났다. 선박충돌 부분은 과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름유출은 선박충돌 후 허베이 측과 정부의 초동대응 미흡이 결정적 원인이다.”
이 사건과 관련한 형사재판 2심(대전지법 제1형사부)은 1심에서 무죄였던 허베이 스피리트호 선장과 당직항해사, 법인에 대해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2심 판결문에서 드러난 당시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유조선 당직항해사가 경계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유효적절한 피항(避航)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충돌 후 기름이 유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선장은 유류탱크의 폭발을 막기 위해 불활성(不活性) 가스를 주입했다.
가스의 주입으로 탱크 내 기압이 올라가 기름의 유출을 빠르게 했다. 유조선 선체를 기울여 기름유출을 막는 조치도 제대로 취하지 않았고, 최초 충돌 후 3시간30분이 지나서야 빈 탱크로 기름 이송작업을 시작했다.
인천지방해양안전심판원이 2008년 9월 4일 내린 재결서에 따르면 허베이 측이 신속한 대처를 했다면 기름유출량은 실제의 11.5%(1253톤)에 그칠 수도 있었다.
2009년 4월 23일 대법원 1부(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해양오염방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삼성중공업과 허베이 스피리트에 대해 벌금 3000만원씩을 선고한 원심(原審)을 확정했다. 그러나 ‘업무상 과실 선박파괴’에 대해 판결문은 “허베이 스피리트호에 발생한 손상은 형법 제187조에서 정한 선박의 파괴에 이를 정도라고 보기 어렵다”고 원심을 파기했다.
삼성중공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안타깝다”
삼성중공업은 “우리가 사건 당사자인 것은 맞지만, 가해자는 아니다”며 “하지만 사고 수습을 위한 노력은 해 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중공업은 사건 발생 47일째인 2008년 1월 22일 “머리 숙여 사과 드린다”는 제하의 사과문을 ‘대표이사 사장 김징완(金澄完) 외 임직원 일동’의 명의로 광고 게재했다. 사과문에서 “관련 당사자들과 함께 주민 여러분의 터전이 조속히 회복되고 서해 연안의 생태계가 복원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위 내용과 관련한 삼성중공업 측의 설명이다.
“사고 이후 연인원 7만 5000명의 삼성직원들이 방제작업에 참여했고, 현재까지 약 240억원 상당을 방제비 또는 지역경제 살리기에 지원했습니다.‘1사(社) 1어촌 자매결연 맺기를 지속하고 있는 등 주민들과의 협의를 통해 현실적인 지원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2008년 2월에는 법적책임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역발전기금’ 1000억원을 출연하겠다고 발표했죠. 그런데 정부 소관부처가 정해지지 않아 집행이 안되고 있습니다.”
‘지역발전기금’을 출연할 당시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1000억원은 법적인 피해보상과는 별도로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이완구(李完九) 충남지사는 “주민들은 무한배상을 요구하고 있다”며 “현지 사정을 모르고 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삼성중공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며 입장을 밝혔다.
“기금 1000억원은 회사의 경영여력을 감안해 결정한 것입니다. 기금형태로 출연하게 된 것은 사고의 한 당사자인 우리 회사가 통상적인 지원금을 내면 배상금액의 일부로 오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향후 유조선측 보험사가 전체 배상금액에서 우리가 지원한 금액만큼 차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쟁점은 IOPC펀드(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의 손해 배·보상 지연에 따라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허베이 스피리트호 유류오염사고 피해주민의 지원 및 해양환경의 복원 등에 관한 특별법>이 있지만, 피해 주민들은 “아직 제대로 된 정부의 지원조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IOPC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4월 26일을 기준으로 총 1만6927건으로, 금액은 1조8079억원이다. 이 중 34%인 5737건이 사정완료됐다. 사정결과는 피해인정 1739건(1083억원)인 반면 피해 불인정 3998건으로 70%가 기각됐다.
태안사고 3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배상·보상이 안 되는 이유는 IOPC펀드의 절차 때문이다. IOPC펀드의 엄격한 사정절차 진행으로 인과관계가 부족하거나, 증거자료가 불충분한 청구는 보상받지 못한다.
객관적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사고 전 3년간 번 돈의 평균금액과 사고 뒤 1년 동안 수입의 차를 계산해야 한다. 즉 배상 청구까지 최소 1년이 필요하다. 청구를 해도 청구 건수와 액수가 많아 사정에 긴 시일이 필요하다. 여수 씨프린스호 사고의 배·보상이 종료된 때는 10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배상금액도 적다. 허베이 측에서 가입해 있는 선주보험사가 1422억원, IOPC펀드가 1794억원을 한도액으로 정했다. 총 3216억원이다.
現 특별법상 국제기금의 3216억원 제외한 나머지는 정부가 지급해야
현행 국제유류오염 보상체계에 따라 선주보험사 측에서 일차적으로 배상을 해야 한다. 이 금액이 소진됐을 때 IOPC의 자금이 투입된다.
우리 국회는 배상·보상 지연에 따른 주민들을 지원하고자 2008년 2월 특별법을 만들었다.
IOPC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금액 1조8079억원에 대한 사정이 완료되면, 우리 정부는 국제기금 책임한도액 3216억원을 제외한 사정금액을 지급해야 한다.
‘특별법을 개정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피해주민 측 소송대리인 장기욱(張基旭) 변호사(前 의원)는 “피해주민에 대한 선급금 지급을 규정한 조항은 언어도단”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특별법 8조 1항에서는 피해자가 ‘국제기금’ 등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는 게 너무 오랜 시일이 걸리는 실정에 비춰 당국(국가·지방자치단체)이 피해자에게 미리 일정 범위의 금액을 지급할 수 있는 선급금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제8조 2항에서는 ‘국제기금’에서 사정한 손해액을 기준으로 선급금을 결정하겠다니 결국 선급금은 ‘선급금’이 아닌 게 됐습니다. 이는 언어유희로서 국가가 피해주민을 속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다음은 장 전 의원의 주장에 대한 국토해양부의 반론이다.
“우리나라는 국제협약 가입국입니다. 특별법 8조 2항에서 ‘국제기금에서 사정한 손해액을 기준으로 지급한다’고 규정한 사유는 국제협약에 따라 1차적인 피해조사·사정은 국제기금이 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조사 및 손해 배·보상의 주체인 국제기금이 선정한 전문가가 사정한 손해액을 기준으로 함으로써 보상금 산정의 객관성 및 합리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국가가 피해조사를 하면 이로 인해 이중 조사·사정에 따른 손해 배·보상 절차이행의 비효율성을 초래하게 됩니다. 또 정부와 국제기금의 사정결과가 다를 경우 선지급금에 대한 사후 정산문제, 사정결과에 대한 불만 등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보입니다.”
스페인, 1년7개월 만에 보상 95% 마무리
정부는 특별법을 마련하고, 생계지원 대책으로 5372억원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2009년 10월에는 ‘특별해양환경복원계획’을 마련해, 10년(2010~19)간 4786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태안을 비롯한 피해지역 주민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프레스티지호 사고에 대한 스페인 정부의 대응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걸 시사한다. 스페인 정부는 프레스티지호 침몰사고의 배·보상 과정에서 ‘국민 고통 최소화’를 내걸었다. “정부가 국책은행을 통해 보상금을 선지급하고 IOPC에 대한 보상청구권을 주민으로부터 인수한다”는 내용의 특별법을 만들었다.
경험이 부족한 피해주민들을 대신해 “IOPC 협상은 정부가 맡는다”고 선언, IOPC 보상한도액(약 2739억원)의 2배가 넘는 6152억원을 IOPC에 청구했다. IOPC는 산정한 ‘피해 평가액’의 30%만 지급하겠다고 했다.
스페인 정부는 “피해 청구액의 30%를 지급해 달라”고 했고 1844억원을 선지급받는 데 성공했다. IOPC 선지급금과 예산을 토대로 1년7개월 만에 주민 보상을 95% 마무리했다. 또한 피해액을 스페인의 국영 보험사가 결정하도록 해 피해 주민들이 청구한 금액을 대부분 수용했다.
중요한 것은 신속하고 합리적인 배·보상이다. 태안 기름유출사고의 실마리를 푸는 것은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과연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재난방지시스템이 있는가’하는 점이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를 통해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 미국은 1989년 엑손 발데스호(26만 배럴 유출) 이후, 1990년 유류오염방지법(OPA)을 제정해 단일선체 유조선은 미국 해안을 항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94년에는 ‘유류 및 유해물질 유출로 인한 국가 재난 사태(SONS)’도 만들었다. 이 규정에 따라 미국은 3년에 한 번씩 국가 차원의 ‘SONS 훈련’을 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멕시코만 원유유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재난에 ‘국민’만 있고 ‘국가’는 없어
우리나라도 1995년 여수 씨프린스호 사고 후 미국을 따라 재난방지시스템을 갖췄다. 하지만 12년 뒤인,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에서 보여준 정부의 모습은 우왕좌왕이었다.
박찬종 전 의원은 “국가는 대량의 원유가 유출되는 대형오염사고인데도 해양오염방지법에 의한 재난방지시스템을 가동하지 않았다”며 “정부가 유출방지작업을 진두지휘하지 않고 48시간 이상 유출을 방치, 방관함으로써 대재앙에 이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삼성중공업에 따르면 유조선에 난 구멍을 막는 일도 해경이 아닌 민간업체가 했다고 한다. 해안 기름띠 제거조차 자원봉사자에게 의존했다. 재난을 당했을 때 ‘국민’은 있었지만, ‘국가’는 없었다.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의 원유 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사고에 취약한 단일선체 유조선이 여전히 우리 바다를 운항 중이다. 언제든지 태안 기름유출사고와 같은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과연 오늘 이 시간에 또 그 같은 사고가 일어난다면, 정부는 조속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같은 날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곳이 있었다. 충남 태안이다. 이날 오전에 있었던 전(全) 피해민 손해배상대책위원회(이하 전 피해민 대책위) 위원장 성정대(成正大)씨의 자살 때문이다.
성씨는 “2007년 태안해역 유류피해로 처음 시작한 양식 사업의 주기(週期)가 깨지고 채무(債務)만 늘어간다”는 비관과 함께 “다시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속하고도 원만한 배상이 이루어지길 촉구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2008년 1월, 태안에서는 사고로 인한 좌절과 피해로 인한 생활고로 열흘이 안되는 기간 동안 3명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성정대씨가 자살했지만, 세간의 이목(耳目)은 이미 태안을 떠나 있었다.
전쟁터만큼 비참했던 2007년 12월의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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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월 23일 태안 주민들이 삼성본관 쪽으로 이동하다 제지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있다. |
소장에서 밝힌 청구취지는 “피고(정부, 삼성중공업, 허베이 스피리트사) 등은 연대하여 각 원고에게 각 금 5억원 및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는 것이다.
30개월 전, 우리나라는 사상 최악의 환경재난을 겪었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에서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Hebei Spirit)호 유류오염 사고다. 그것은 인재(人災)였다. 삼성중공업 소속 크레인 부선이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해 7만8000배럴(1만900t)의 기름이 바다로 흘러나온 사건이다. 만리포면에 거주하는 명한영(53)씨는 사고 당시를 떠올리며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름 냄새가 진동해서 보일러가 터진 줄 알았다”며 “영화에서 보던 전쟁터보다 더 비참했다”고 전했다.
해안선 375km, 육지 70.1km가 오염됐고, 태안을 비롯한 충남·전남북 지역 11개 시군이 피해를 입었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돼 성금 389억원이 모였고, 전국 각지에서 온 120만 자원봉사자들이 방제작업에 참여했다. 빠른 회복에 전 세계는 감탄했다. ‘태안의 기적’이었다. 30개월이 지난 지금, 태안에서 사라진 기름 자리에 ‘사람의 눈물’이 채워졌다.
“보상완료돼 다시는 이런 인터뷰 안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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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1월 피로파괴로 침몰한 프레스티지호. |
지난 4월 29일, 기자는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로 향했다. 유출지점 바로 앞 해안가였다.
부락 뒤편 산비탈 외진 집에 가재분(賈在芬·62)씨가 살고 있었다. 가씨는 태안 사고 이후 처음으로 자살한 이영권씨의 부인이다.
가씨는 “5월 2일이 막내아들 결혼식”이라며 “식장에 혼자 들어가 앉아 있을 걸 생각하면 막막하다”고 눈물부터 훔쳤다.
고(故) 이영권씨는 소원면 의항2리에서 50년 동안 맨손어업에 종사했다. 가재분씨도 20세에 시집와서 줄곧 맨손어업을 해 오던 도중, 빚을 얻어 굴 양식을 시작했다. 한해 3000만원을 버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름유출 사고로 굴은 전부 폐사(斃死)했다. 이씨는 “굴 수확을 하면 결혼식을 올려주겠다”던 막내아들과의 약속도 지켜주지 못하게 됐다. 이씨의 막내아들 운규씨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한 채 살고 있었다.
이씨는 2007년 12월 28일 해양수산부 주최 주민설명회에서 “무허가 굴양식은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씨의 굴 양식장은 무허가였다. 언론에서는 “태안 바다가 회복되는 데 100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보상은 요원(遙遠)하고 다시 굴을 깔 수 있다는 희망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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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결혼식 피로연 날, “오늘도 산소에 가서 펑펑 울었다”는 가재분씨. |
운규씨가 집에 도착했을 때 이씨는 이미 음독(飮毒)을 한 뒤였다. 이씨는 부인과 삼 남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이씨의 장례식은 1월 14일 태안군청 광장에서 군민장으로 치러졌다. 태안 주민 1만여 명이 참석해 이씨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충경 의항리 어촌계장은 조사(弔辭)에서 “누가 이영권 선생을 죽였느냐”며 “6만 태안군민 앞에 정부와 삼성은 엎드려 사죄하라”고 외쳤다.
이씨의 장례식이 끝나고 태안주민들 사이에서 돈 소문은 유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줬다. 가재분씨는 “그런 말들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사람들이 ‘들어온 부조금만 수억원이다’ ‘삼성이 돈을 줬다’는 말들을 했습니다. 저희는 삼성으로부터 돈은커녕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지 가씨는 연방 눈물을 닦으며 “아무쪼록 보상이라도 빨리 나와서 다시는 이런 일로 인터뷰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 통장의 20만원 쓰라”던 통화, 결국 遺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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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박충돌’로 인해 허베이 스피리트호에서 원유(1만900t)가 검은 띠를 이루며 해양으로 유출되고 있다. |
태안군 근흥면 마금리의 고(故) 김용진씨도 이번 사고로 인한 생활고(生活苦)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두 번째 희생자다.
김씨는 갯벌에 나가 바지락을 캐며 생계를 꾸려 왔었다. 2남3녀를 두었지만, 자식들의 도움을 바랄 형편이 아니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갯벌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김씨의 부인 함영자(71)씨는 허리가 굽고, 무릎이 상해 거동이 불편했다. 건강도 좋지 않아 병원비로 쓰는 돈이 많았다.
기름유출사고가 일어나 갯벌은 죽었고, 바지락은 씨가 말랐다. 하지만 어떻게든 삶은 이어나가야 했다. 당장 필요한 생활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하루 7만원인 방제작업을 꼭 해야만 했다.
방제작업 인건비는 태안군과 방제업체가 영국의 선주상호보험(P&I: 선주의 손해 등을 보상해 주는 보험)에 신청을 하면 지급되기 때문에 얼마간의 시일이 걸린다.
인건비가 제때 나오지 않아 생활고를 겪게 되자, 김씨는 부인에게 “이제 살 의욕이 없다”며 낙담했다. 함씨의 말이다.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새까매졌으니 살 의욕이 있었겠어요? 평소 소식(小食)을 하는데 사고 당일 저녁은 밥 한 공기를 다 드셨습니다. 이승에서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함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명이 이어졌다.
“상을 치우고 저는 다른 방에 있었습니다. 잠시 뒤에 저를 부르더니 ‘큰며느리한테 전화 좀 걸어 달라’고 했어요. 큰며느리에게 ‘내 통장에 20만원이 있으니까 쓰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습니다.”
함씨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김용진씨가 있는 방으로 갔을 때, 김씨는 구토를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리 준비해 둔 제초제를 마신 것이다. 병원으로 옮겨져 위세척을 받았지만, 다음 날인 1월 16일 아침 10시경에 사망했다.
남편의 자살 후 살길이 막막해진 함씨는 작년에 처음으로 바지락 작업을 나갔다. 그러나 거동조차 불편한 함씨로서는 무리였다. 함씨의 말이다.
“노인연금 8만원 나오는 걸로 병원비를 충당하고, 전기료 같은 공과금은 애들이 조금씩 내 주고 있습니다. 이외에 돈을 쓰는 것은 엄두도 못 냅니다. 건강하면 밥이라도 얻어먹으러 다닐 텐데, 겨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함씨는 바다를 볼 때마다 “남편이 생각나 착잡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터지면 항상 없는 사람들만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다는 회복됐지만, 우리가 입은 피해는 아직 회복이 안 됐습니다.”
‘희망’이 ‘절망’되자 제초제 마신 후 焚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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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화씨가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오열하고 있다. |
다음 날 태안읍 조석시장 입구에 있는 횟집을 찾아갔다. 점심때였지만 손님은 없었다. 세 번째로 자살한 고(故) 지창환씨의 부인 최명화(55)씨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최씨를 비롯한 가족에게 ‘기름 유출’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날로 손님은 끊겼다. 최씨는 “아저씨가 까맣게 된 바다를 보면서 ‘태안은 이제 다 죽었다’고 했다”며 “잠도 잘 못 이루고, 술 마시는 날도 잦아졌다”고 말했다.
그래도 희망은 잃지 않았다. 바다만 살린다면 예전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지씨는 사고 후 기름때를 닦아내기 위해서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갔다. 최씨의 설명이다.
“우리 집 아저씨는 평소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도왔습니다. 기름유출 사고 뒤 조석시장 상인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어요. 사고가 난 뒤에는 ‘바다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일’이라며 방제작업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기름은 없어지지 않았다. 바위틈, 모래에서 계속 올라왔다. 지씨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2008년 1월 14일 지씨는 태안군청 광장에서 군민장(郡民葬)으로 치러진 이영권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날 저녁 지씨는 부인 최명화씨에게 “나도 태안을 위해 뭔가 희생해야겠다”고 말했다. 최씨가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그때 말한 희생이 자살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누가 등을 떠민 사람도 없으니까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고…. 답답하고, 가끔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4일 후인 18일 오후 열린 ‘특별법 제정 촉구 및 대정부 투쟁집회’에서 지씨는 제초제를 마시고 연단으로 올라갔다. 마이크를 뺏으려 주변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생수병에 담아온 시너를 몸에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여 분신(焚身)을 했다.
지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위세척을 받았지만, 음독으로 인한 고통과 화상의 이중고를 겪다가 다음 날 오전 8시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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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유출로 황폐해진 바다를 한 주민이 쓸쓸히 바라보고 있다. |
아버지 분신 동영상 보고 유산한 딸
남편의 죽음 이후 최씨는 가슴 두근거림과 우울증이 생기는 등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식들에게도 ‘아버지의 자살’은 큰 상처였다. 딸(33)은 아버지의 분신 장면을 동영상으로 본 후 유산(遺産)했다. 그 뒤로는 애가 들어서질 않는다고 한다. 아들 또한 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한 달이 지난 다음 최씨는 다시 장사를 했다. 가장 큰 고민은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었는데 예전처럼 손님들을 웃으면서 맞자니 이상한 여자라고 할 것 같고, 그렇다고 푹 가라앉아 있자니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저는 괜찮아요. 예전처럼 대해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영업을 했습니다.”
사고 후 언니와 형부가 와서 일을 도와주고 있지만, 영업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물건값을 제때 못 주는 일도 다반사다. 최명화씨의 말이다.
“현재 빚이 1억원 정도 됩니다. 장사는 안되지만 정기적으로 나가는 돈이 있으니까 식당을 할수록 손해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남편 잃고 어디 가서 일하는 내 모습이 처량할 것 같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1일 기자는 소원면 의항리를 다시 찾았다. 이영권씨의 막내아들 운규씨의 결혼식 피로연이 마을회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성정대씨의 아들 익현(28)씨도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魂이 전복양식장에 계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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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이영권씨의 영결식이 끝나고 태안군청을 나서는 장례행렬. 약 1만명의 태안 군민이 함께했다. |
피로연이 끝나고서, 기자는 성익현씨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배는 사고해역으로 향했다. 해당 지점에 도착하자 익현씨는 손으로 가리키며 “저곳에서 모든 일이 시작됐다”고 했다.
선수를 돌려 익현씨의 전복양식장이 있는 파도리 앞바다로 갔다. 익현씨의 눈이 불그스레해졌다. 그는 “아버지의 혼(魂)이 양식장에 계신 듯하다”며 탄식(歎息)했다.
성정대씨는 1976년부터 2007년까지 서산수협에서 근무했다. 주변 사람들은 성씨에 대해 “일 처리가 확실하고, 친화력도 뛰어났다”고 했다.
수협에서 퇴직 후 성씨는 2007년 10월 15일 소원면 파도리에서 전복양식업을 시작했다. 시설설치비용과 전복 종패(種貝) 구입비용에 8억원 정도가 들었다.
보통 3년인 양식주기를 1년으로 단축하려고 큰 종패를 사들여 비용이 늘어났다. 익현씨에 따르면 보통 종패가격은 300원이지만, 성씨가 산 종패는 1300원이라고 한다. 익현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제가 아버지 일을 도와드리려고 이 분야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만약 1억5000만원을 투자했을 경우 1년 안에 1억원을 회수(回收)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사업을 시작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56억원은 한 가구 피해액도 안되는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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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익현씨는 아버지의 사고에 대해 얘기하다 눈물을 흘렸다. |
그 희망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물거품이 됐다. 사고해역에서 몰려온 기름띠는 양식장을 초토화했다. 전복 종패들은 절반 이상이 죽었다.
성씨는 태안 피해주민들을 돕기 위해 ‘전(全) 피해민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조직했다. 유류오염피해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본 상황에서도 대책위에 5000만원을 출자했다.
익현씨도 아버지를 돕기 위해 2009년부터 대책위에서 일했다. 익현씨에 따르면 성씨는 ‘보상문제가 해결되는 데 길어야 2년’이라고 자신했다.
오판(誤判)이었다. 배상이 지연(遲延)됨에 따라 성씨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상금이 나오게 해 달라”고 독촉하는 사람들의 방문과 전화가 빗발쳤다. “대책위가 공금을 유용했다”는 소문도 퍼졌다.
2009년 12월에는 태안주민들의 “삼성중공업의 선박책임절차 개시 결정을 내린 서울중앙지법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항고가 기각됐다.
성정대씨는 이 소식을 듣고 좌절했다. 익현씨는 “아버지가 ‘56억원은 한 가구 피해액도 안 되는 돈’이라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판결을 보고 세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자동차 사고와 비교해 보면 답이 딱 나오잖아요. 왜 피해자들이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힘 있고, 돈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현실을 보며 무력감을 느끼셨습니다. 한숨도 늘고, 외출도 잘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성씨는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집을 담보로 잡히고 받은 대출금 1억3000만원, 영어(營漁)자금 3억원, 특별영어자금 3억원 등을 포함 총 8억원이었다. 이자를 갚는 것도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 성씨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지난 2월 26일 익현씨는 아침 일찍 외출했다. 9시30분께 잠에서 깬, 성씨의 부인 남금순(53)씨는 목을 매 숨져 있는 성씨를 발견했다.
익현씨는 “어머니께 연락을 받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건장한 청년의 어깨가 들썩였다.
無限책임 對 有限책임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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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갯벌을 살리기 위해 방제작업을 하고 있는 주민과 봉사자들. |
기자는 태안읍에 있는 대책위로 향했다. 고(故) 성정대씨가 위원장으로 있던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완전한 배상, 완전한 복구, 가해자 무한책임”이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성씨의 뒤를 이어 박규웅(68)씨가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박 위원장은 구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완전한 배상, 완전한 복구는 태안을 사고 이전 상황으로 되돌려 놓는 상식적인 조치입니다.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이 사고의 가해자(加害者)는 삼성중공업입니다. 기상조건이 좋지 않았는데도 운항을 강행(强行)해 크레인 부선이 가만히 있는 배를 받은 겁니다. 그로 인해 수조원대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피해보상은 삼성중공업이 ‘가해자’로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현재 태안 문제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유류오염 피해주민들은 삼성중공업과 정부를 성토(聲討)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쟁점은 사고책임소재 규명 및 손해 배·보상 주체에 대해 태안 주민과 삼성중공업의 입장이 다른 것이다.
삼성중공업은 2008년 12월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선박책임제한절차 개시 신청’을 했다. 선박책임제한절차란, 해상기업(海上企業)의 위험성과 손해액이 크다는 것, 국민경제상 해상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등을 근거로 선박소유자에 대한 유한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2009년 3월 서울중앙지법 파산1부는 삼성중공업의 책임한도액 및 법정이자를 약 56억3400만원으로 산정, 선박책임제한절차 개시를 결정했다. 즉 서울중앙지법이 태안 기름유출사고에 대한 삼성중공업의 책임한도를 56억원으로 정한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사고 피해 주민들이 주장하는 손해배상액은 상법에서 정하는 책임제한액의 한도를 초과했고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사유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태안 주민들은 “해상 크레인 부선은 상법상 ‘선박’이 아니라 민법상 ‘공작물’로 봐야 한다”며 서울고등법원에 항고(抗告)했다. 해상크레인 부선이 ‘선박’이 아닐 경우 선박책임제한절차를 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 민사40부는 2009년 12월에 주민들의 항고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해상 크레인 부선은 상법상 선박 책임제한 규정이 적용되는 ‘선박’에 해당하고, 당시 선장의 행위 역시 고의나 무모한 행위였다고 볼 수 없다”고 기각 이유를 밝혔다. 태안 주민들은 1월 29일 대법원에 재항고해 현재 계류 중이다.
‘선박파괴’ 對 ‘선박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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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종(朴燦鐘·72) 변호사(전 국회의원).태안 기름유출 사고 희생자 유족들의 변호를 맡고 있다. |
태안사고의 삼성중공업 책임 부분에 대해, 태안 기름유출사태 희생자 유가족들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박찬종(朴燦鍾) 전 의원(변호사)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삼성중공업의 해상 크레인 바지 선단이 유조선을 ‘선박파괴’한 것은 명백하지만, 특별법은 ‘선박충돌’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삼성중공업이 주 가해자로 부각됨으로써 손해배상책임이 커지는 것을 막고, 사고경위를 왜곡시킬 소지가 있다.”
박 전 의원의 주장에 대한 삼성중공업 측의 반론이다.
“이미 대법원에서 ‘선박파괴로 볼 수 없다’고 결론이 났다. 선박충돌 부분은 과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름유출은 선박충돌 후 허베이 측과 정부의 초동대응 미흡이 결정적 원인이다.”
이 사건과 관련한 형사재판 2심(대전지법 제1형사부)은 1심에서 무죄였던 허베이 스피리트호 선장과 당직항해사, 법인에 대해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2심 판결문에서 드러난 당시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유조선 당직항해사가 경계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유효적절한 피항(避航)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충돌 후 기름이 유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선장은 유류탱크의 폭발을 막기 위해 불활성(不活性) 가스를 주입했다.
가스의 주입으로 탱크 내 기압이 올라가 기름의 유출을 빠르게 했다. 유조선 선체를 기울여 기름유출을 막는 조치도 제대로 취하지 않았고, 최초 충돌 후 3시간30분이 지나서야 빈 탱크로 기름 이송작업을 시작했다.
인천지방해양안전심판원이 2008년 9월 4일 내린 재결서에 따르면 허베이 측이 신속한 대처를 했다면 기름유출량은 실제의 11.5%(1253톤)에 그칠 수도 있었다.
2009년 4월 23일 대법원 1부(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해양오염방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삼성중공업과 허베이 스피리트에 대해 벌금 3000만원씩을 선고한 원심(原審)을 확정했다. 그러나 ‘업무상 과실 선박파괴’에 대해 판결문은 “허베이 스피리트호에 발생한 손상은 형법 제187조에서 정한 선박의 파괴에 이를 정도라고 보기 어렵다”고 원심을 파기했다.
삼성중공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안타깝다”
삼성중공업은 “우리가 사건 당사자인 것은 맞지만, 가해자는 아니다”며 “하지만 사고 수습을 위한 노력은 해 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중공업은 사건 발생 47일째인 2008년 1월 22일 “머리 숙여 사과 드린다”는 제하의 사과문을 ‘대표이사 사장 김징완(金澄完) 외 임직원 일동’의 명의로 광고 게재했다. 사과문에서 “관련 당사자들과 함께 주민 여러분의 터전이 조속히 회복되고 서해 연안의 생태계가 복원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위 내용과 관련한 삼성중공업 측의 설명이다.
“사고 이후 연인원 7만 5000명의 삼성직원들이 방제작업에 참여했고, 현재까지 약 240억원 상당을 방제비 또는 지역경제 살리기에 지원했습니다.‘1사(社) 1어촌 자매결연 맺기를 지속하고 있는 등 주민들과의 협의를 통해 현실적인 지원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2008년 2월에는 법적책임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역발전기금’ 1000억원을 출연하겠다고 발표했죠. 그런데 정부 소관부처가 정해지지 않아 집행이 안되고 있습니다.”
‘지역발전기금’을 출연할 당시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1000억원은 법적인 피해보상과는 별도로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이완구(李完九) 충남지사는 “주민들은 무한배상을 요구하고 있다”며 “현지 사정을 모르고 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삼성중공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며 입장을 밝혔다.
“기금 1000억원은 회사의 경영여력을 감안해 결정한 것입니다. 기금형태로 출연하게 된 것은 사고의 한 당사자인 우리 회사가 통상적인 지원금을 내면 배상금액의 일부로 오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향후 유조선측 보험사가 전체 배상금액에서 우리가 지원한 금액만큼 차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쟁점은 IOPC펀드(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의 손해 배·보상 지연에 따라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허베이 스피리트호 유류오염사고 피해주민의 지원 및 해양환경의 복원 등에 관한 특별법>이 있지만, 피해 주민들은 “아직 제대로 된 정부의 지원조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IOPC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4월 26일을 기준으로 총 1만6927건으로, 금액은 1조8079억원이다. 이 중 34%인 5737건이 사정완료됐다. 사정결과는 피해인정 1739건(1083억원)인 반면 피해 불인정 3998건으로 70%가 기각됐다.
태안사고 3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배상·보상이 안 되는 이유는 IOPC펀드의 절차 때문이다. IOPC펀드의 엄격한 사정절차 진행으로 인과관계가 부족하거나, 증거자료가 불충분한 청구는 보상받지 못한다.
객관적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사고 전 3년간 번 돈의 평균금액과 사고 뒤 1년 동안 수입의 차를 계산해야 한다. 즉 배상 청구까지 최소 1년이 필요하다. 청구를 해도 청구 건수와 액수가 많아 사정에 긴 시일이 필요하다. 여수 씨프린스호 사고의 배·보상이 종료된 때는 10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배상금액도 적다. 허베이 측에서 가입해 있는 선주보험사가 1422억원, IOPC펀드가 1794억원을 한도액으로 정했다. 총 3216억원이다.
現 특별법상 국제기금의 3216억원 제외한 나머지는 정부가 지급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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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법 문제 있다”고 주장한 장기욱(張基旭·68) 변호사(전 국회의원). |
현행 국제유류오염 보상체계에 따라 선주보험사 측에서 일차적으로 배상을 해야 한다. 이 금액이 소진됐을 때 IOPC의 자금이 투입된다.
우리 국회는 배상·보상 지연에 따른 주민들을 지원하고자 2008년 2월 특별법을 만들었다.
IOPC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금액 1조8079억원에 대한 사정이 완료되면, 우리 정부는 국제기금 책임한도액 3216억원을 제외한 사정금액을 지급해야 한다.
‘특별법을 개정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피해주민 측 소송대리인 장기욱(張基旭) 변호사(前 의원)는 “피해주민에 대한 선급금 지급을 규정한 조항은 언어도단”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특별법 8조 1항에서는 피해자가 ‘국제기금’ 등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는 게 너무 오랜 시일이 걸리는 실정에 비춰 당국(국가·지방자치단체)이 피해자에게 미리 일정 범위의 금액을 지급할 수 있는 선급금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제8조 2항에서는 ‘국제기금’에서 사정한 손해액을 기준으로 선급금을 결정하겠다니 결국 선급금은 ‘선급금’이 아닌 게 됐습니다. 이는 언어유희로서 국가가 피해주민을 속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다음은 장 전 의원의 주장에 대한 국토해양부의 반론이다.
“우리나라는 국제협약 가입국입니다. 특별법 8조 2항에서 ‘국제기금에서 사정한 손해액을 기준으로 지급한다’고 규정한 사유는 국제협약에 따라 1차적인 피해조사·사정은 국제기금이 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조사 및 손해 배·보상의 주체인 국제기금이 선정한 전문가가 사정한 손해액을 기준으로 함으로써 보상금 산정의 객관성 및 합리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국가가 피해조사를 하면 이로 인해 이중 조사·사정에 따른 손해 배·보상 절차이행의 비효율성을 초래하게 됩니다. 또 정부와 국제기금의 사정결과가 다를 경우 선지급금에 대한 사후 정산문제, 사정결과에 대한 불만 등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보입니다.”
스페인, 1년7개월 만에 보상 95% 마무리
정부는 특별법을 마련하고, 생계지원 대책으로 5372억원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2009년 10월에는 ‘특별해양환경복원계획’을 마련해, 10년(2010~19)간 4786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태안을 비롯한 피해지역 주민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프레스티지호 사고에 대한 스페인 정부의 대응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걸 시사한다. 스페인 정부는 프레스티지호 침몰사고의 배·보상 과정에서 ‘국민 고통 최소화’를 내걸었다. “정부가 국책은행을 통해 보상금을 선지급하고 IOPC에 대한 보상청구권을 주민으로부터 인수한다”는 내용의 특별법을 만들었다.
경험이 부족한 피해주민들을 대신해 “IOPC 협상은 정부가 맡는다”고 선언, IOPC 보상한도액(약 2739억원)의 2배가 넘는 6152억원을 IOPC에 청구했다. IOPC는 산정한 ‘피해 평가액’의 30%만 지급하겠다고 했다.
스페인 정부는 “피해 청구액의 30%를 지급해 달라”고 했고 1844억원을 선지급받는 데 성공했다. IOPC 선지급금과 예산을 토대로 1년7개월 만에 주민 보상을 95% 마무리했다. 또한 피해액을 스페인의 국영 보험사가 결정하도록 해 피해 주민들이 청구한 금액을 대부분 수용했다.
중요한 것은 신속하고 합리적인 배·보상이다. 태안 기름유출사고의 실마리를 푸는 것은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과연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재난방지시스템이 있는가’하는 점이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를 통해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 미국은 1989년 엑손 발데스호(26만 배럴 유출) 이후, 1990년 유류오염방지법(OPA)을 제정해 단일선체 유조선은 미국 해안을 항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94년에는 ‘유류 및 유해물질 유출로 인한 국가 재난 사태(SONS)’도 만들었다. 이 규정에 따라 미국은 3년에 한 번씩 국가 차원의 ‘SONS 훈련’을 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멕시코만 원유유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재난에 ‘국민’만 있고 ‘국가’는 없어
우리나라도 1995년 여수 씨프린스호 사고 후 미국을 따라 재난방지시스템을 갖췄다. 하지만 12년 뒤인,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에서 보여준 정부의 모습은 우왕좌왕이었다.
박찬종 전 의원은 “국가는 대량의 원유가 유출되는 대형오염사고인데도 해양오염방지법에 의한 재난방지시스템을 가동하지 않았다”며 “정부가 유출방지작업을 진두지휘하지 않고 48시간 이상 유출을 방치, 방관함으로써 대재앙에 이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삼성중공업에 따르면 유조선에 난 구멍을 막는 일도 해경이 아닌 민간업체가 했다고 한다. 해안 기름띠 제거조차 자원봉사자에게 의존했다. 재난을 당했을 때 ‘국민’은 있었지만, ‘국가’는 없었다.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의 원유 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사고에 취약한 단일선체 유조선이 여전히 우리 바다를 운항 중이다. 언제든지 태안 기름유출사고와 같은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과연 오늘 이 시간에 또 그 같은 사고가 일어난다면, 정부는 조속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