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기자님, 취소됐어요. 고맙습니다. 다 月刊朝鮮 덕분입니다.”
10월 27일 아침, 전화를 걸어온 鄭之碩(정지석) 한미약품 부회장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정 부회장은 月刊朝鮮 11월호에 소개된, 親日派(친일파)로 몰린 鄭玄雄(정현웅) 화백의 아들.
그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정현웅 화백이 日帝(일제) 말 몇몇 잡지에 그린 그림들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규명위)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자, 지난 9월 1일 위원회에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한편 成大慶(성대경) 친일규명위원장에게 父親(부친)의 결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고, 그 편지를 月刊朝鮮 11월호에 공개했었다.
그에게 친일규명위의 결정문을 보내달라고 했다. 결정문을 보니 이의신청은 10월 21일에 내려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결정문은 당초 자신들이 정현웅 화백을 친일파로 판단했던 이유와 이의신청 내용을 언급한 후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거듭 밝히지만 우리 위원회가 정현웅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근거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과 침략전쟁을 묘사한 표지화를 40점 이상 그렸던 사실이다. (중략) 잡지 표지화를 그렸던 것이 생계를 위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이의신청인의 주장은 자료로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정현웅의 지속적인 침략전쟁 선전활동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위원회에서는 정현웅의 행위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일제협력단체 활동이 없었다는 점 등 여러 정황과 자료를 살펴보건대, 정현웅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것에 대한 이의신청인의 주장을 인용하기로 결정하고 당해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취소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당초 결정은 정당했지만, ‘봐준다’는 투였다. ‘이렇게 쉽게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굴레를 벗겨줄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당초 그런 결정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돼 두고두고 역사의 단죄를 받았어야 할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결정을 번복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일규명위의 결정 번복에도 불구하고 정 부회장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동이 된 민간기구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편찬하는 <친일인명사전>에서 정현웅 화백의 이름을 빼는 일이었다.
친일규명위의 결정이 나오자마자 정지석 부회장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로 달려갔다고 한다.
“친일규명위원회의 결정문을 보여주면서, ‘한쪽에서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친일파라고 한다면 어느 한쪽은 잘못됐다는 얘기 아니냐. 당신들 하는 일의 공신력을 위해서라도 아버지 이름을 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어요.
친일인명사전편찬委에서는 ‘수록보류’ 결정
그러자 ‘정 화백은 越北(월북)하신 분인데,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죠’라고 하더군요. 월북했다고 빼 주고, 월북 안 했으면 안 빼 주겠다는 것인지….”
결국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정현웅 화백에 대해 ‘수록 보류’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정지석 부회장에게 보낸 회신에서 “신청인 측의 주장이 일부 개연성이 있으나 확정적인 판단에 앞서 엄정을 기하기 위해 객관적인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이번에 발간하는 <친일인명사전>에는 신청인이 이의제기한 대상자(정현웅 화백-필자 주)는 수록되지 않으며, 보완조사를 통해 補遺(보유)편 발간시 수록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위원회에서 ‘수록보류’ 결정을 내린 것은 명단 발표일(11월 8일)을 코앞에 두고 있던 11월 2일이었다. 정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위원회 관계자 말로는 아버지가 ‘정’씨라서 명단에서 빠질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친일인명사전>은 총 3권인데, 김씨나 박씨였다면 이미 인쇄가 끝난 뒤여서 빼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정 부회장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이쯤되면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고 안되고는 ‘복걸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원회는 정 부회장에게 보낸 회신 말미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의 목적이 특정인 또는 후손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학문적 정리에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위원회는 그렇게 말하지만, 아버지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릴 뻔했던 후손의 입장에서 그게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일까? 정지석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의신청을 했을 때 친일규명위의 한 관계자가 ‘친일파 문제는 언젠가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역사의 씻김굿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하더군요. 친일파로 낙인 찍혀 인생을 송두리째 부인당한 사람과 그 자손들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얘기입니다.
나야 시간적·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처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자기 조상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는지도 모르고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10월 27일 아침, 전화를 걸어온 鄭之碩(정지석) 한미약품 부회장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정 부회장은 月刊朝鮮 11월호에 소개된, 親日派(친일파)로 몰린 鄭玄雄(정현웅) 화백의 아들.
그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정현웅 화백이 日帝(일제) 말 몇몇 잡지에 그린 그림들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규명위)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자, 지난 9월 1일 위원회에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한편 成大慶(성대경) 친일규명위원장에게 父親(부친)의 결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고, 그 편지를 月刊朝鮮 11월호에 공개했었다.
그에게 친일규명위의 결정문을 보내달라고 했다. 결정문을 보니 이의신청은 10월 21일에 내려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결정문은 당초 자신들이 정현웅 화백을 친일파로 판단했던 이유와 이의신청 내용을 언급한 후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거듭 밝히지만 우리 위원회가 정현웅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근거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과 침략전쟁을 묘사한 표지화를 40점 이상 그렸던 사실이다. (중략) 잡지 표지화를 그렸던 것이 생계를 위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이의신청인의 주장은 자료로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정현웅의 지속적인 침략전쟁 선전활동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위원회에서는 정현웅의 행위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일제협력단체 활동이 없었다는 점 등 여러 정황과 자료를 살펴보건대, 정현웅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것에 대한 이의신청인의 주장을 인용하기로 결정하고 당해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취소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당초 결정은 정당했지만, ‘봐준다’는 투였다. ‘이렇게 쉽게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굴레를 벗겨줄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당초 그런 결정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돼 두고두고 역사의 단죄를 받았어야 할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결정을 번복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일규명위의 결정 번복에도 불구하고 정 부회장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동이 된 민간기구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편찬하는 <친일인명사전>에서 정현웅 화백의 이름을 빼는 일이었다.
친일규명위의 결정이 나오자마자 정지석 부회장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로 달려갔다고 한다.
“친일규명위원회의 결정문을 보여주면서, ‘한쪽에서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친일파라고 한다면 어느 한쪽은 잘못됐다는 얘기 아니냐. 당신들 하는 일의 공신력을 위해서라도 아버지 이름을 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어요.
친일인명사전편찬委에서는 ‘수록보류’ 결정
그러자 ‘정 화백은 越北(월북)하신 분인데,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죠’라고 하더군요. 월북했다고 빼 주고, 월북 안 했으면 안 빼 주겠다는 것인지….”
결국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정현웅 화백에 대해 ‘수록 보류’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정지석 부회장에게 보낸 회신에서 “신청인 측의 주장이 일부 개연성이 있으나 확정적인 판단에 앞서 엄정을 기하기 위해 객관적인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이번에 발간하는 <친일인명사전>에는 신청인이 이의제기한 대상자(정현웅 화백-필자 주)는 수록되지 않으며, 보완조사를 통해 補遺(보유)편 발간시 수록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위원회에서 ‘수록보류’ 결정을 내린 것은 명단 발표일(11월 8일)을 코앞에 두고 있던 11월 2일이었다. 정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위원회 관계자 말로는 아버지가 ‘정’씨라서 명단에서 빠질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친일인명사전>은 총 3권인데, 김씨나 박씨였다면 이미 인쇄가 끝난 뒤여서 빼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정 부회장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이쯤되면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고 안되고는 ‘복걸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원회는 정 부회장에게 보낸 회신 말미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의 목적이 특정인 또는 후손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학문적 정리에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위원회는 그렇게 말하지만, 아버지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릴 뻔했던 후손의 입장에서 그게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일까? 정지석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의신청을 했을 때 친일규명위의 한 관계자가 ‘친일파 문제는 언젠가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역사의 씻김굿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하더군요. 친일파로 낙인 찍혀 인생을 송두리째 부인당한 사람과 그 자손들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얘기입니다.
나야 시간적·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처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자기 조상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는지도 모르고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